박냐옹

 

 

 

1. 그린그림에서 작업한 나의 작업물은, 생각외로 간단한 '노트'였다. 처음부터 그럴싸한 작업물을 생각하고 멋드러지게 만들어보고 싶었던 욕심이 경험이 부족한 나에겐 버거운 것이었다. 작업을 위해 준비해갔던 것들이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노트밖에 안되겠다'라는 준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욱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만든 노트는 결과적으로는 의미 깊고 애착 있는 물건이 되고 있다. 처음 만들어내고 싶었던 작업은, 조금 무리스러웠지만 사진과 글을 조합하는 앨범형 책자였다. 개인 작업이 가능하다는 말에, 지금 나에게 아주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던 나의 작은 가족을 기리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10년을 함께한 강아지가 몇일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관계로..) 하지만 준비해 간 사진들의 책의 내용물로서 배열이 맞지 않았던 관계로, (^^;) 또한 그렇지만 준비해 간 것들을 없애지 않고 모두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노트를 만들게 되었다.

내가 손수 제작한 노트는, 단순히 이쁜 그림과 무언 갈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종이덩어리만은 아니다. 이 노트 속에는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무지하고 게으른 탓에 실천하지 못했던 '행동'이 들어 있으며 이 같은 작업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이건 아주 개인적인) 사랑하는 작은 가족을 기리는 작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노트는 총 5권이다. 그린그림의 배려 속에 몇 번의 연습과정을 경험하게 해주어서 연습의 작업까지 포함해서 5권의 노트가 탄생했다. 노트의 특성상 ‘실제본’을 통해 제작하게 되었으며 5권의 노트 모두 내가 가져온 사진과 그림을 활용하였다. 표지는 내 개인 준비물들을 모두 활용하여 만들었고 속지와 간지를 사용하여 노트를 완성했다. 내가 만든 책자에 나의 흔적인 비록 표지에만 나타나고 있지만, 이 실패와 도전 속에 언급한 의미들이 숨어있으리라 생각한다.

 

2. 앨범형 책자를 만들고 싶었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간드러지는.

하지만 막상 혼자 사진과 글을 준비하고자 하니 첫 번째로, ‘실제본’을 위해 내용글들을 배열하는 것이 꽤나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은 질문과 해결을 통해 이루어졌고 결국은 하나의 완성물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한권을 책을 위해 한 장의 종이 안에 어떤 순서로 글들이 정리되어야 하는지, 단면과 양면의 배열은 어떠한지.. (결국은 나는 이 작업을 실패했다.) 고민하던 것들이 그린그림에서는 아주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미 종이를 만들어놓고 번호를 쓰라는 것! 그리고 무작정 손으로 다 그려놔보라는 것이다. 왜 번호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라는게 경험의 차이인가.

 

두 번째, 사진을 쓰고 싶은 맘에 기껏 준비해서 프린트까지 해갔지만 아무 종이나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선택한 두껍고 튼튼해보이는 종이는 이쁘게 프린트되어 있는 잉크를 열심히도 내뱉어내어 버린 관계로 모든 노트가 잉크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세 번째, 실제본을 위한 바느질도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바늘구멍이 양옆으로 3개나 뚫려 너덜너덜한 나의 노트를 보며. 노트의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쉬우면서 어려웠다. 혼자서 하기에 충분했으나, 과도한 시행착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이의 배열, 용지 사용, 제작 과정 등은 실수투성이였지만 이 같은 실수와 과정을 통해 완성된 노트를 얻어내게 되었다.

 

3. 하고 싶어하는 욕심은 많았다. 거기에 맞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번 그린그림의 워크샵은 이런 의미에서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실행하기 꺼려했던 나태한 나를 깨우고 고민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계기를 통해, 어렵거나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일단 시작해볼 수 있는 일이란 것을 배우게 된 것도 좋았다.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일단은 시작해 본다는 마음으로 하나를 행동하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조금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 더 편하고 가볍게 시작하는 '행동'을 만들어나가보자는 생각도 함께.  

선우

 

 

 

 

 

 

 

Side B. (1월12일, 1월19일 세미나에서)

"정동은 사이에 있음(inbetween-ness에서 태어나고, 곁-임beside-ness의 누적, 쌓임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정동은 신체적인 능력의 물매gradient로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우의 다양한 양태와 리듬 뿐 아니라, 감각과 감성의 골과 체를 통과하여 태어나고 소멸하는 그러한 힘-관계들의 지속적인 조절의 유연한 점진주의.(권명아 선생님 역, <An inventory of shimmers>, forces of encounter 미명의 목록/발명, 부딪침들의 힘들, 부대낌의 힘들)"


본 세미나(발전/정적 해체; 정념과 공동체)가 끝난 뒤, Side B에선 온갖 종류의 말들이 터진다. 본 세미나를 맞춰가기 위해 보조적으로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 곳에선 발정/전적 보조를 위해 서로를 닮아 가기도, 의심하기도, 업고, 업혀가기도 하며 세미나를 지속하고 있다. *가이님은 이 세미나의 성격에 대해서, "서로 뭔가 나누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서로의 공부 수준을 알고 있기에^^; 깊게 의지하지 않지만, 덧대고 덧대며 이해하게 된다. 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정동'이라는 그 뉘앙스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던 것은, 기존의 공부방식, 지식을 습득, 이해하는 태도의 변환(그러니깐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이론도 아니고, 아직 아니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본 세미나가 지나고, 여기서도 두 차례에 걸쳐, 진은영의 <<코뮨주의 선언>>과 들뢰즈의 <<비물질 노동과 다중>>을 함께 읽었다. 읽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매혹을 느끼기 때문인지, 기쁜 능동의 정동으로 가능한 코뮨을 도무지 상상, 체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인지(어떻게?) 세미나 내내 그의 글에 (반증 아닌)반감만 드러냈다. 2번째 본 세미나와 보조 세미나를 통해서 이러한 반감에 대한 살을 갖게 될 수 있었는데, 슬픔과 기쁨은 신체의 능력을 변용(감소, 증대)시키는 감응 능력으로 우리는 어떻게 코뮨을 구성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변용-결과에 대한 무지 상태에서, 그것의 원인,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을 어떻게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를 슬픈 수동적 정서들로 응집케 하는 "공포의 전략에 대한 고발"이 가능한가? 코뮨은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것임을 재차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작동 방식(입시지옥,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은 늘 이분법적인 선택지, 생체정치 포섭의 예로 촛불집회와 같은)에 대해 우리들은 늘 수동적으로 치이고 있다. 그런데 이 환상의 이분법을 깨는 "발명해야 할 코뮨적 감응"으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한 소년과 같은 '유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진은영이 정념의 낡은 서랍장에서 하나씩 꺼내놓은 것에 유쾌해 질 수 없었다.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직은 규정할 수 없다."


 

 

<<비물질 노동과 다중>>을 통해 모두가 "정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많이 내놓았다. "레닌은 누구인가?", "윤리는 무엇인가?", "정서, 정념 는/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현아님이 독특한 예시(*모스버거 인 도쿄: 일주일간 도쿄에 관광을 간 현아님은 햄버거를 두개 먹고 그 자리에서 구토 한 사건을 일컫습니다.)를 덧대주어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합리적이다'라는 것은 '보편타당'이거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특별한 윤리성과 '힘 관계'의 문제이다. 수많은 마주침과 정동 속에서 자신과 '공통-통념'을 형성할 수 있는 정서를 판별해내는 것, 그 속에서 자신의 신체의 관계를 조직을 짜나가는 능력-또는 판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스 버거를 1개만 먹는 합리성!)"
Q1. 그렇다면 신현아님의 코나투스는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판단을 하지 않았나?
A1. 우리는 다만 '만일 내가 관계들의 집합이라면 아마도 그것은 합리적인 관계들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합리적인'이라면, '오로지 되기becoming의 결과로서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p115)

그 렇다면 우리는 매번 생생한 실험 속에서 끊임없이 나와는 맞지 않는 상황들에 몸을 내던진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합리적이게 되어가는 것은 끊임없이 신체를 사용하여 (능/수동이든)무언가에 직면하여서 관계를 축적하는 것이기에, 결국 어떻게 합리적이게 되는가? 라는 질문은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상응할 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불완전성은 다시 나의 본질, 본질적 영역은 어디 까지인가?를 묻는 것인데, 이는 일종의 순수한 '순간성[캡쳐(신)]'이다. 내재성 또한 외부 영향인 것이기에 계속 변하며 경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부적실한 관념들도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는 자연적인 조건 상 외부적인 외연적인 부분들의 무한한 관계에 속해있다. 그 '외부적'인 정서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효과를 만들며 맞부딪힐 때, 즉 나에게 작용할 때 그것은 나에게 일부 속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1) "윤리는 힘의 문제이지, 의무의 문제가 아니다."(p52)
들뢰즈는 안/행함 가능성의 결단의 문제라고 말한다. 여기서 '윤리'란 불확정적인 어떤 것으로써, 아직 아닌 것을 선택함의 문제이다.
(2) conatus 자기보존의 유지의 노력이자 판단인데, 이 '자기보존'은 앞서 언급한, 힘 관계에서의 적절한 선택, 원인과 결과가 납득이 되는 선택을 했을 때
(3)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의 '전위' 개념은, 노동자를 내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는 농민이지만, 전위(앞서서 이끌어주지)하지 않으면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각성된 인텔리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을 말한다. 4월 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 일컫는 것 또한 '전위'되지 않았기 때문!
 

mora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2012년 첫주에 일명 근국세미나나 팀이 학교 '밖'으로 나가 공부를 시도했습니다.

근국세미나팀의 새로운 이름을 신콩떡님께서 Side-B라고 재해석 해주셨어요. 그 뜻을 앨범에 비유했는데, 테잎으로 앨범을 듣던 당시 앞면을 A , 뒷면은 B라고 표기가 되었지요. 주로 타이틀곡이 들어있는 앞면의 곡들이 끝나면 '찰칵' 소리와 동시에 뒷면은 또다른 국면들에서 시작되는 '더 많은 노래들'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런 의미의 연장으로 Side- B는 테잎의 뒷면 처럼 근국세미나팀이 '찰칵'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아 공부와 삶을 만나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제 근국세미나의 정식 이름이 되었습니다. 현재 Side-B는 역사의 기본적인 흐름들과 개념들을 공부한다는 취지로 근대국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김준석|책세상 |2011.08.31

이 책은 근대국가를 서구의 발명품으로서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가 근대 국가의 질서 유지의 기능으로 삼고 있는 '폭력의 독점'이라는 부분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근대국가의 성격을 전쟁과 주권 자본주의의 키워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중 전쟁을 통한 영국과 독일 프랑스등 유럽 근대국가의 출현을 좀더 면밀히 살피면서

입헌주의의 승리에 따른 19세기 유럽근대국가의 발전, 그로인한 국가의 역할과 폭력의 감소의 변화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3세계들이 서구와 같은 모델로 근대국가를 건설한 예시와 함께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에 관한 내용도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근대와 국가라는 거대한 구조를 이 책 한권으로 독파할수는 없을테지만 중요한 관점들은 안내해주는 좋은 거름이 된거 같습니다. 또한 단순히 역사적인 배경과 흐름뿐 아니라 우리 삶이, 나 자신이 그 안에 놓여 있음을,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놓쳐서는 안될것입니다.

 

Side-B는 세미나와 함께 학교밖의 공간에서 공부하기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 취지에서 출발하여 현재는

공부의 나눔을 목적으로 학교밖을 벗어나, 도시안에서 공부 할수 있는 장소(이때, 공부라 함은 학문적인것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속에 드는 비용과도 같은것입니다) , 공간은 있는가? 관계할수 있는 장소의 한계성을 느끼고,

또한 이 관계함은 어떤식으로든 '돈'을 매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실질적으로 공부를 위해 밖으로 나갔을때 드는 비용들을 체감하면서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찻값과 음식값은 터무니 없이 비싸다고 생각되니깐요^^) '돈' 매개는 공부 뿐아니라, 친구,연애등 모든 관계가 그렇지요. 그래서 일단 단순히 돈을 쓰지 않는것은 불편함과 곧장 만나는 일 입니다. 그 단순한 불편함을 통해서 우리몸은 어떤식으로 반응하며, 그 반응을 공부의 나눔을 통해서 어떻게든 슬기롭게 헤쳐나가보자 함입니다

 

. 12월 첫주 세미나는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립미술관 실내의 '의자' 라고 하는게 좋겠군요. 전시장 안에는 관람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실내의 의자 배치가 바뀌지 않았던 시립미술관이였기에, 좀 구석이기도 하고, 화장실 앞에 괜찮은 의자가 있었던것을 기억하며, 그곳을 머리속으로 '찌뽕'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자는 사라지고 거기에 설치 작품이 떡하니 있더군요. 그 순간 이곳이 '미술관'임을 다시 환기 시키게 되었습니다.

 

 

 

부산 시립미술관 설치 작품. 이 사진을 찍은 의도는 원래 이 자리는 오랜시간동안 관람객들이 앉을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던 자리인데, 의자 대신 작품이 설치 되어있는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의자(관람자)와 작품(미술) 사이의 간격은 가까워진걸까요? 더더욱 멀어진걸까요?

 

화이트 큐브로 부터 시작해서 미술관의 위엄을 벗어나고자 창고나 페허를 개조해서 생겨나기 시작한 대안미술공간(전시장)들은 그 의미들이 변질됨에 따라 또다른 의미에서의 화이트 큐브라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각 섹션으로 나누어진 스펙터클한 전시장 안과 / 무수한 이미지와 체험들로 지친 육체와 정신이 잠시 쉬어가는

밖(전시장 밖)의 구조는 대형 멀티플라자나 백화점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러니 미술관 안에서 공부하는 나의 몸은 대형 자본의 공간들의 쉼터(의자)에서 느꼈던 것과 동일한 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밖'(학교, 제도) 은 또다른 '안' 입니다. 좀더 공부하기 편한곳을 찾을수도 있겠지만, 이런 공공의 장소를 선택하는것은 '밖'이라는 의미를 다르게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날 마침, 부산시립미술관에 좋은 기획의 전시가 있었습니다. 이 전시에 관한 리뷰는 Side-B의 가이님의 리뷰를 참고 해보시길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agitproject/# 에서 지난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 그리고 내년

 

 

 

거의 이런 자세로 2시간 남짓 강독을 이어가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의지겠지요.

 

 

 

이건 뭔가 앞의 사진과는 다른 국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약간의 설정샷인 티가 나는군요

 

Side-B는 정해진것이 없이, 서로의 정동에 의해 계속 '다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방식의 후기는 정동과는 또 다른 국면일것입니다. 오늘 코뮨주의 선언중(진은영) 코뮨주의와 유머를 읽다가 감동받은 부분이 있어 그 글을 한부분을 손수 적으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유머리스트는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아무도 실패해본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한다

그는 피로감 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실패들을 이어간다. 실패나 성공과 무관하게 오직 자기 활동속에

존재하는 유머리스트의 고요하고 영원한 기쁨"

 

 

부산시립미술관 별점: ★★★

< 공부하는 장소마다 별점을 매겨보기로 했습니다. 총 별점의 이유를 세미나 하셨던 분들이 댓글로 달아주시면 더 좋을거 같군요! >

 

관리자

 

 

 

 

조금 늦은 글을 남깁니다.

서울에서 수요집회 1000회가 열릴때 도쿄에서도 위안부 집회가 열렸습니다.

신콩떡님과 도쿄에 체류중이던 일정과 겹쳐서 저희도 참석하게 되었어요.

다른분들에게 간단하게나마 전달될수 있으면 좋을거 같아서 사진과 글을 올려봅니다 .

혹시나 기타등등인님에게도 도움이 될까요? ^^ 이번 참석에는 요코하마 레지던시 기간중 만난 다케우치상의 긴급연락을 받아서 움직일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위, 현장, 집회와 같은 성격의 장소는 처음이여서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어요. 그 긴장감은 현장에 배치된 일본 경찰들과 대형 일장기를 들고 있는 우익단체들을 보는 순간 더더욱 고조되더군요.

 

 

다케우치상과 신콩떡님

 

 

 

 

 

 

 

 

 

다케우치상을 비롯한 일본의 활동가들의 안내 덕분에 큰 무리없이 집회 프리젠테이션 현장에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프리젠터이션 현장엔 많은 인원때문에 미처 안으로 들어오시지 못한분들도 계셨어요. 다케우치상의 간단한 번역을 통해서 현장에서 어떤이야기들이 오고가는지 전해들을수 있어서 몇가지 메모를 했습니다. 이날 집회는 우익 단체와 국회위원들의 반대속에 진행되었고, 일본정부가 태도를 바꿀수있는지 확신할수 없다는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열린 서울집회의 현장모습을 실시간으로 공개해서 바로 볼수 있었어요. 일본쪽에서도 국회의원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서울집회보다 인원이 더 많은거 같군요.

국회의원들의 발언은 대체적으로 국회안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마련하는 어려워서, 많은 성과를 얻지 못한 미안함과 해결할수 있는 법안을 함께 만들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일본의 젊은이들이 위안부와 관련된 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아도 그뜻을 이해하고 참여하며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위안부 집회 프리젠터이션 현장

 

이어서 송신도 할머님께서 자리해주셨는데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전쟁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전쟁으로 인해 위안부는 죽었다. 전쟁은 안된다. 돈준다고 해도 안하겠다. 일본의 정치가가 하는 일들을 보니, 걱정이 된다. 정치가도 바보야! " 전쟁을 학습과 자료, 영상으로만 접한 '우리'로서는 할수 없는 말인거 같았습니다. 마지막 발언에서 모두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위안부 관련 관계자나 참여자, 정치가의 '말'과는 분명 다른 '말' 이라고 생각됩니다. 짧은 관심과 참여로는 뭐라고 말할수 여지가 좁은거 같습니다. 하지만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를 일본에서 참여하는것은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또한 예전에 여성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위안부와 기지촌 기록들이 쓰여진 책을 읽으며 '분노' '격분' 이런식의 감정부터 치솓았던 기억들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이날의 묘한 감정의 출처를 생각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고엔지로 가기위해 지하철로 내려가는 길에 국회의사당 앞쪽에 원전반대단체가 공간을 점거한 캠프가 꾸려져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일본에서는 원전을 더 많이 만들기로 선포를 했다는군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낄수 있었어요.

 

 

 

캠프 전경- 밤이 되니 악기들을 하나씩 연주하셨어요

 

 

 

캠프 내부

 

 

캠프에 모인 사람들 여기서 부터는 신콩떡님과 제가 일본말을 거의 못알아듣고 한국-부산에서 왔다는 이유로 많은 관심과 친절을 받았습니다. 원전반대를 위해 모인이들의 실천과 활동들을 보면서 응원하고 힘을 보태면서 동시에 저도 힘이 생기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초콜렛과 귤을 받고 똘망똘망한 눈빛과 미소를 보내오고, 피켓과 사진찍기를 권유받으면서 이런방식이 교회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곳에서도 묘한 기운을 받고 말았네요. 하지만 이곳을 지나치지 않았다는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날은 전체적으로 이와 유사한 현장에서의 '운동'을 경험한 바가 없어서 스스로가 어떻게 인식해야하는지 몸과 머리가 잘 따라주지 않았던거 같아요. 또한 현장에서의 '운동'을 경험한 바가 없다는것은 무엇인지, 글을 쓰면서 묻게 되는군요.

.....

기타등등인

 

 

 

1

수요일, 1000회 수요집회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배우들이 시위를 하러 모인 군중들을 한번에 숙연하게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할머니 파이팅!” 하게 만들었던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커다랗고 짙은 색깔의 썬글라스를 쓴 멋쟁이 할머니는, 햇살 기지촌 여성 센터의 할머니였다.(나는 사진을 못찍었는데, 인터넷에서도 찾기가 어렵다.ㅜㅡ) 할머니는 일본 대사관에다가 “왜 사죄를 안하노!”를 외치고 시위 현장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언니들~ 사랑합니다~!”라고 연대 발언을 마쳤다. 연대 발언을 들으면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할머니가 된 기지촌 여성들과도 교류가 있나 보다라고 생각 하고 넘겼었다.

오늘은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동아시아 미군기지 문제와 여성인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있었다. 심포 여는 인사를 윤미향 정대협 대표님이 하셨다. 원래 인사말을 기지촌 여성 인권 연대의 대표인 우순덕 선생님이 하시기로 한 듯 한데, 아마 도착을 안해서 대신 하신 듯 하다. 빨간 후드티를 입은 윤미향 대표님은 저 기지촌 여성 센터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교류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3년 전부터 일본군 위안부와 비슷한 성폭력 경험을 갖고 있는 햇살 기지촌 여성 센터 여성들이 어버이 날을 같이 보내고 있는데, 서로 자매애를 갖고 연대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라고 일화 하나를 소개 해 주었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부끄러워 하지 말라, 우리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부끄러운 것이다. 일본 정부든, 한국 정부든 요구를 해라. 우리가 언니니까 도와주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으니까, 어제 그 연대발언 하셨던 할머니가, “우리 언니들한테 사과 해라! 왜 사과를 안하노!!!”했던게 어떤 맥락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오늘 심포의 발표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지촌의 역사적 구성 과정과 여성운동 : 이나영(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2. 미군자료로 보는 미군의 성매매정책과 성폭력 : 하야시 히로후미(칸토학원대학 교수)

3. 한국의 기지촌 여성 인권운동의 역사 : 고명진(파주여성인권센터 Shego 센터장)

4. 군사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국제여성 네트워크-젠더 시점의 기지철폐 글러벌 네트워크 : 아키바야시 코즈에(리츠메이칸 대학교)

5. 기지촌 여성 문제는 국가(한국, 미국)의 책임 -소송 제기와 입법 운동의 당위성, 그리고 방향 : 안정애(주한미군범죄근저운동본부 대표)

6. 일본에서의 미군의 성매매 성폭력-이와쿠니 기지를 중심으로 : 후지메 유키(오사카 대학교)

후기는 6개 발표 다 소개할려고 하는데, 몇회에 나누어서 업데이트 할 생각이다. 나는 고명진 선생님 논의와 후지메 유키 선생님 논의가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내 연구에도 어떻게든 그러한 지점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선, 고명진 선생님 발표.

고명진 선생님은 성매매 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25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 「성매매, 기지촌, 그리고 인권」에 실린 유영님 두래방 원장님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영님 원장은 기지촌 여성 인권 운동의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다. 제 1기는 1986년부터 1992년 윤금이 사건 이전까지이고, 제 2기는 1992년 윤금이 사건부터 2004년 성매매특별법 제정 이전 시기까지, 제 3기는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제정 이후의 시기와 기지촌 여성 인권 연대의 결성을 통한 최근의 운동까지이다. 고명진 선생님은 파주 여성 인권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파주 용주골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하였다. 파주의 용주골은 미군부대에 의존한 기지촌으로 먼저 발전한 지역인데, 71년에 동두촌으로 미군 기지가 이전하자, 축소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인 대상의 성매매 집결지로 변화하게 된 곳이라고 한다. 고명진 선생님은 이 미군 기지촌->한국인 성매매 집결지로의 변화하는 용주골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즉, 미군 부대에 기대고 있는 기지촌 성매매는 미군 부대가 이동을 하여 기지촌이 없어진다고 해도, <용주골>이라는 공간이 남게 되는데, 이 공간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성매매는 계속 된다는 것이다. 즉, 포커스는 군사시설이 아니라, 성매매가 되어야 하며, 공간에 대한 논의와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얼마 전 송연옥 선생님의 강연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게 했는데, 송연옥 선생님은 식민지 시대의 장소는 그 시대만 바뀔 뿐 비슷한 업종이 그 장소에 그대로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 식민지 시대에 은행이 있었던 장소에는 해방 이후에도 은행이 세워지는 장소가 되고, 식민지 시대에 공창이었던 곳은, 해방 이후에도 매매춘이 집결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고명진 선생님의 말대로, 미군 기지촌이 있던 자리에, 미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있었던 매매춘은 계속 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실례도 찾기 어렵지 않다.

즉, 남겨진 공간이 또다른 성매매 공간이 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고명진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서 강조했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 된다고 해서 이태원이란 장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성매매 공간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 이러한 군사 문화로 인한 성매매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미군기지나 기지촌이 있는 지역의 생활의 문제로 포커스를 넓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고명진 선생님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기지촌에 있었던 사람들은 매매춘 여성들 뿐만이 아니라 기지촌 주변의 시민들도 그러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성매매 하지 않는 사람들도 경제적 문제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피해자임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군 기지촌 운동을 한다는 것은 지역의 정서와 생활을 함께 고려하는 것임을 자각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타등등인

 

 

 

수요 집회 1000회.

얼마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 가서 <낮은 목소리>를 봤다. 시리즈가 3개 있는데, <낮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2>, <숨결> 이렇게 있다. 원래 <낮은 목소리>는 디비디가 아니라 비디오 밖에 없어서 <한국영상자료원>까지 찾아간 거였는데, 최근에 DVD가 나온 듯 하다. 야튼, 첫 <낮은 목소리>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 100회째가 찍혀 있다. 그 100회를 10번이나 더 한 날이 바로 이번 주 수요일 1000차 수요 집회였다.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에 대한 연구를 완보(緩步)로 진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집회에 참가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한번도 수요집회에 참가하지 못해서,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고 있었다. 트위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글이 트윗이 올라오면, 무조건 리트윗 하고.

 

 

야튼, 역사의 현장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니까, 밤에 잠이 안왔다. 새벽까지, 일본 대사관 찾아가는 길을 찾고, 서울가는 동안 읽으려고 <20년간의 수요일>도 챙기고, 또 계속 설레고 하느라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늦잠을 자버렸다. 눈뜨자마자 부랴부랴 챙겨서 12시에 겨우 일본 대사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권해효씨가 집회 진행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도 한마디씩 하시고, 연대발언도 돌아가면서 했다. 먼저 윤미향 정대협 대표, 한명숙씨, 정몽준씨, 이정희씨 등의 정치인들이 연대발언을 했다. 이정희씨는 수요집회 처음 할때 집회를 준비하고 참가했다고 했는데, 정치인들의 연대 발언 중에는 이정희씨의 연대발언이 좋았던 것 같다. 한명숙씨와 정몽준씨는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서만 비판했는데, 이정희씨는 50년간 모른척한 한국 정부도 함께 비판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은 수줍게 올라와서 당당하게 발언했다. 이 연대 발언의 마지막은 모두들 “사랑합니다”였다. 연대 발언 제일 마지막에는 배우 김여진과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배우들이 함께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대사 일부분을 낭독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배우들의 목소리에 숙연해지고, 가슴을 먹먹해졌다. 이날 시위에서는 강하게 일본 대사관 쪽을 향해 항의 하기도 하고, 이 수요 시위가 과거를 위한 시위가 아니라, 미래의 평화를 위한 시위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약간씩은 다른 의견이지만, 모두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것에 대해 반응했다. 정몽준씨가 발언할때는 내려가라고, FTA 해결하라고 했고, 쑥스러워하는 여고생들에게는 박수로, 구호는 3번씩 같이 반복. 나는 12시에 겨우 맞춰 도착했기 때문에 찍은 사진들이 엉망이다. 원래 사진을 잘 못찍기도 하지만, 나눠주시는 보라색 피켓을 입에 물고 현장을 기록할 수 있는 사진 몇장을 찍었다. 현장이 잘 찍힌 사진들은 기자님들이 기사에 많이 올려주셨다.

 

 

 

 

때마침, 도쿄에서 신콩떡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신콩떡님은, 일본 국회 앞에서 연대 수요집회를 하고 있는 현장에 있었다. 서로, 각자가 있는 곳에서의 현장감을 교환했다.

신콩떡 : 여기는 일본 국회의원회관입니다! 저쪽에는 송신도 할머니가...

기타등등 : 여기도 1000회 수요집회 선언서 낭독! 집회는 끝났음.(사진을 함께 보냈다.)

신콩떡 : 멀티메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ㅠㅠ 트위터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는 1000회 수요집회 기념으로 일본군 위안부 인터뷰 시리즈가 계속 올라왔고, 마이니치 신문 트위터에서는 곧 있을 한일수뇌회담에 들어갈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도 올라오고 있다. 집회를 마치고는 <바위처럼>을 부르면서 해산했다. 참가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요집회에 기여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집회 참가와 열심히 리트윗을 했지만, 내 연구 주제를 더욱 파고들어서 내 연구로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jaㅋ

 

 

 

아핫, 영화제가 끝나고 이제 약 일주일이 지나가네요, 미키오의 말을 빌리면 '화려한 피날레' 였던 동아대에서의 영화제는 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글을 써가며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밖에서 커피 부스를 지키고 있어서 강의실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들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뒷풀이에서 학부생 친구들을 보면서 저의 '행운'에 대해서 다시한 번 느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연하게 카르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지금 제가 프로젝트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카르마에 들어가게 된 마음도 솔직히 책 - 토론 - 면접 뭐 이런 생각으로 들어갔지요. ,,, 모르고,,,, 들어갔지요. 그 때 만약 카르마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토익 동아리 이런 데 들어가지 않았을까싶습니다. 그 곳에 온 학부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영화제에 왔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이번 영화제를 통해서 와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신선한 경험에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민은 생깁니다. 저번 워크샵이 끝나고서도 저는 많은 것을 느꼈고 결심도 했습니다. 어정쩡한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제가 그 때의 어정쩡함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프로젝트 팀원이 되었고, 유학이라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고 앞으로 할 일은 많이 있지만 제 마음가짐은 그리 다잡아지지는 않은 듯 합니다. 행사를 통해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저의 어정쩡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됩니다. 주어진 것만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할 텐데요.

영화제를 통해 잊었던 어정쩡함을 확인하는 것은 스스로를 슬프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저번 워크샵 이후로 제가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았던 것도 확인 할 수 있었으니까요. 1mm는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

아.. 정말 느낌을 글로 쓴다는 것은 엄청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겨우 이정도네요..ㅜㅜ 정말 영화제 준비하시고 홍보하시고 ,, 수고 많으셨습니다.  

mora

 

 

 

 

 

이번 제 4회 동아시아 시민 공생영화제 in Busan 이 막을 내렸습니다. 구마모토에서 출발하여 후쿠오카를 거처 부산에서는 동아시아 시민 공생영화제 2011 실행 위원회 팀과 저희 프로젝트 팀이 함께 준비하며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4회를 맞는 본 영화제는 2007년 '동아시아 이주 공생 영화제' 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이주'의 측면을 강조하며 3회를 개최하였고, 올해는 이주의 개념을 좀 더 포괄적인 '동아시아 시민'의 이름으로 바꿈으로 해서 '동아시아 시민 공생 영화제' 라는 타이틀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제 전 준비 모습과 참여해주신 분들의 모습

 

         

언제나 그렇듯~ 김대성 선생님의 사회로 영화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정념커뮤니티와 감각적 결속과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 연구팀 책임자이신 권명아

선생님의 인사 말씀

 

 

동아시아 공생영화제를 계속 해서 이끌고 계신 구마모토 가쿠인 대학에서 한국문학 교수로 계시는 신명직 선생님의 말씀

 

 

영화상영에 앞서 구마모토 가쿠인 대학의 미키오상 의 동아시아 공생커피에 관한 프리젠터이션 이날 미키오상은 한국어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오시는 열의를 보여주셨지요

 

 

영화상영- 레오니즈이야기- 태양광택시로 세계일주를 - 도쿄 핵 발전소

 

 

세편의 영화상영후 신명직 선생님의 동아시아 시민 네트워크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번 영화제는 오랜시간동안 동아시아 공생에 관해 실천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신명직 선생님의 연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중심 도시들이 아닌 그 나머지 도시와 이주민들, 노동자들과 함께 공생하고자 하고 그와 관련된 문제들, 고민들을 던져주시는 자리였습니다. 동아시아 시민의 공생네트워크라는 테마로 진행된 강좌는 1987년 6월 항쟁이후 사라진, 하지만 현재 새로운 형태의 한국 의 난장이들과 국경넘어 동아시아의 수많은 난장이들의 발견으로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화' '글로벌'의 상품속에 사실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동력 투여되고 있음을 '메이드인 코리아? 메이드인 저팬?'이라는 의문을 통해서 다시 인지 시켜주셨는습니다. 또한 동아시아는 하나의 생활권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함께 고민해야하는 지점이 필요할텐데 이런 부분들이 이번 동아시아 시민 공생영화제의 중요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신명직 선생님 강좌가 끝난후 신명직 선생님과 정귀순 선생님의 토크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부산 이주민 인권 NGO 대표이신 정귀순 선생님은 부산에서 15년동안 이주민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계십니다. 현재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과 다문화 가족,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생각하는 단체, 연구소 와 인권교육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시며 실질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날은 정귀순 선생님이 그동안 활동해오셨던 것들을 토대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었는데요 정귀순 선생님의 말씀중 인상깊었던것은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은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원하는 '목적지' 일텐데 이주를 받아들이는 두 나라에서 진보적인 생각과 그에 따른 정책이 필요한데 한국정부의 이주민 정책은 이주민을 위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주민들의 활용할수 있는가' 와 ' 한국화'를 시키는것에 초점이 맞춰 있어서 억압적인 부분이 있고, 그런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한국정책의 문제 뿐 아니라 그들을 같은 시민의 시선으로 보지 않는 우리의 수준과도 깊게 관련이 되어 있는거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외국인'이라는 말을 다시 인지 한다면 이주민들은 타자화 되어야 되는 대상만은 아니라는것을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영화제를 준비하고 참여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생각에 머물러 있는 지점이 있겠지만 공생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면 생각-실천은 그리 멀리있는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원전'과 '반핵' 그리고 '동아시아의 공생'은 우리삶에 얼만큼 피부에 와닿아 있는 질문들 일까요. 이번 영화제를 통해 이것이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해보는 것은 실로 중요한 부분인거 같습니다. 그것은 말로 글로서 맺음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실천속에서 그 의미가 더 번득이게 되는것은 아닐런지요 생각이 공부의 실체가 아니듯, 각자가 생각하는 공생으로 나아갈수 있는 작은 실천 , 꾸준함 같은것들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영화제 시작 전, 권명아 선생님이 말씀하신것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함께 하기 때문에 '힘듬'은 감수해야 하는 '무엇'이 아닐까요. 중요한것은 그것을 감수 하면서, 지금 우리가 함께 인 이유겠지요.
함께 나눌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저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느낍니다. 바램이 있다면 동아시아 시민 공생 영화제가 좀더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날수 있기를 바래보고

값진 시간들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신콩떡

 

 

얼마 전, ‘지역의 문청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을 접했다. 그러니까 황량한, 또는 소박한 땅에서 무엇인가 지금과는 다른 것을 바랐고, 찾아내고 싶어했던 아이들. 그렇게 그 땅을 떠나지만 늘 사라져버리고 행방을 찾을 수 없어서 말할 수도, 말해줄 수도 없는 아이들에 대한 질문. 자신의 삶의 반경 바깥의 다른 것을 바랄만큼은 용감했고, 반경을 완전히 떠나지는 못할 만큼은 소심했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질문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청’들, 또는 ‘문청’이 되려는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아담이 되는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듯하다. 저 멀리의 누군가가 되는대로 갈긴 ‘필독서 100권’의 목록보다는 손바닥만한 삶의 반경 너머를 잠깐 꿈꾸게 해줄 시와 소설과 먼 곳의, 또는 오래된 혁명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참고서이다. 그러면 참고서의 지문을 읽고 그 중 눈이 가는 작품을 사서 읽는다. 무엇을 읽어야하는지의 지표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은 이 조악한 나침반을 들고서도 사막에서 물의 냄새를 찾듯 더듬거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늘 오래된 이야기만 읽던 아이들은 최신의 이야기를 고르는데는 대부분 머뭇거린다.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는 알량한 자존심 뒤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동네의 큰 서점에 가서도 책등이 빛이 바랜 채로 구석을 ‘장식’하던 <하서명작선>을 샀던 기억이 난다. 참고서 바깥의 세계를 혼자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에게 ‘명작선’이라는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책을 사는 부모에게도, 책을 읽는 아이에게도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읽는다는 신뢰를 주었던 ‘하서명작선’에는 ‘역자 소개’가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참고서가 아닌 책을 읽는 아이에게 군말없이 책을 사주고, 선생들은 낯선 책의 제목이 ‘권장도서’에 포함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지나갔다. 군말이 없다. 누구도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쓰는지를 몰랐던 아이들. 처음의 질문을 바꾸어서 다시 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문청’이었을까? 문청은 독특한 단어이다. ‘문학청년’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글 쓰는 청년’, ‘소설쓰는 청년’이라면, 책과 글을 사랑하고 독특한 단어와 미려한 문장에 대한 애착을 갖는 ‘문청’은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공유가 존재하는 문학적ㆍ문화적 기반 위에서 나올 수 있는 기표이다. (그리고 ‘문청’이라는 ‘줄임말’이 만들어진다는 것에서, 그 단어가 어렵잖게 유통될 수 있는 기반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지역, 그러니까 삶의 반경 안에 ‘문청’이라는 기표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문청’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의 반경 안에 ‘문청’이라는 말이 없음에도, 글과 이야기에 여전히 매혹되었던 아이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아이들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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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빠진 문장 중에는 '결국 '나'라는 주어를 잔뜩 쓰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ㅠㅠ 이 타이밍에 자기 고백적, 또는 자기 분석적인 이야기를 하고 앉아있는 것은 다음 중 무엇 때문일까요?

 

1. 마감이 닥쳐오니 딴 일이 손에 붙어서

2.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라서

위의 말은 농이고, 사실 지역의 문청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하는 질문이 계속 떨어지지 않아서 조금 떨어내보기 위해 썼습니다. (정확히는 쓰다말았습니...) '문학청년'과 '문청'의 차이를 생각했고, '문청'이 아닌 어떤 아이들은 어떤 지표나 좌표도 갖지 못한 아이들이 아닐까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레알 문청들은 어떻게 크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편파적입니다ㅠㅠ 걔들도 탈출을 꿈꿨을까요? 적어도 교보문고 이야기를 디즈니랜드 이야기 듣듯 듣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교보문고가 디즈니랜드처럼 상상 속의 공간이었던 아이들. 문청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책을 좋아하던 아이들. 백일장에서 상을 타는 것 말고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던, '글'이 소통하는 것임을 몰랐던 아이들. 늘 저 멀리의 독자였던 아이들. 지긋지긋한 반경의 바깥을 원하던 아이들. 늙은 애비 버려두고 영영 안돌아오는 아이들은 무엇이 되었을까..요? 답은 아직 쓰지 못했어도 '삶의 반경'을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라는 주어를 많이 쓴 것이 마음이 걸립니다. 퇴행적인 현상일지도. 

선우

 

 

본 자료들은 Lo-culture서평회 <정념과 삶의 거처 - 역사, 현실 이론>의 자료로 쓰였던 권명아선생님의 논문들입니다. 권명아 선생님의 최근 연구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지평을 함께 공유하기위해 본 자료들을 게재합니다.


1.「풍기문란과 정념의 어드레스」, 분가쿠, 岩波書店, 일본, 2010년 3-4월호 (한국어 원본)

2. 「소년범, 작가, 음란범-J의 탄생과 종말」, 냉전체제와 검열 심포지엄 발표문

3. 「죽음과 생존을 묻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비의 생각 3호, 2009

4. 「맨몸의 숭고와 '비판적 삶'의 종말」, <<작가세계>> 82호, 2009년 가을호

5. 「제국의 판타지와 게토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기」, <<황해문화>>, 2010년 여름호

6. 「파시즘과 '해방의 정치'의 일레마」, <<문화과학>>, 2009년 여름호

7. 「죽음과의 입맞춤;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년 여름호


권명아 선생님의 풍기문란 작업과 그 연장에서 <정념과 주체성의 정치>를 역사 작업과 당대적인 문화비판적 작업의 두 측면에서 진행했던 글입니다.


1번과 2번은 풍기문란과 관련한 역사적 맥락과 그 고고학적 탐색의 결과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주로 '부정적 정념과 그 담지자'들에 대한 정체성 정치의 역사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주체성의 문제를 정념을 둘러싼 투쟁, 혹은 정념의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작업들입니다. 그리고 이하의 글들은 이와 같은 역사 작업을 토대로 당대에 대한 문화비판적인 개입의 차원에서 시도한 글들입니다. 7번은 '4월혁명'을 '사랑과 열정'에 대한 소유권 투쟁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검토한 글입니다. 6번은 '불안'의 정념을 키워드로 파시즘의 역사와 이론을 검토하고, 현재적 상황을 검토한 글입니다. 특히 '생존의 정치화'가 '불안의 정념을 파시즘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을 검토한 작업니다.

3,4,5,6번 글들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불안, 외로움, 슬픔'의 정념/정동을 통해서 고찰할 글들입니다. 5는 '외로움'의 정동을 정치적인 것과 새로운 어소시에이션(이행의 기제/반려/연합의 복합적 차원에서)의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3,4,는 노무현 전대통령 자살, 용산 참사 등으로 이어지는 죽음에서 시대의 '슬픔'의 정치성과 합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들입니다.

 


 

맨몸의_숭고와_&lsquo;비판적_삶&rsquo;의_종말,_작가.pdf

 

분가쿠좌담및일어본.pdf

 

분가쿠한국어본.pdf

 

애도우정공동체.pdf

 

의_입맞춤__혁명과_간통,_사랑과_소유권.pdf

 

장정일검열학회.pdf

 

제국의판타지와게토사이에서타협하며살기.pdf

 

파시즘과_&lsquo;해방의_정치&rsquo;의_딜레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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