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어펙트 연구소에서 콜로키움 <대항서사(counter narrative)로서의 지역과 젠더>를 개최합니다.



연구모임 아프꼼이 '젠더 어펙트 연구소'라는 새로운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자리를 함께 공부하는 것으로 열어보고자 합니다. 


기존의 서사를 새로이 대항적인 것으로 발굴하는 연구를 통해 앞으로 저희가 나아갈 길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권영빈 선생님께서는 박완서의 <미망> 분석을 통해 '여성을 소유한 개인'이 성적 계약을 통해 가족 자본을 구축하고, 그것이 '개성'이라는 도시 공간을 재편하는 과정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유승환 선생님께서는 <1920년대 토론회의 문화사>를 통해서 당대에 공유되었던 '앎'의 지반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이지만 함께 연구를 깊이 하며, 더욱 단단하게 되어가려 합니다. 


소중한 자리에 여러 연구자 선생님들께서 꼭 오셔서 공부한 바를 나누어 주시고 함께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테크네-인문/테크 프로그램 개발> 연구팀, 동아대 링크 플러스 사업단, 학부생 프로그램 참여 피드백 노트

 

공간 공존 경험

 -제5회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 공존과 저항, 예술적 실천의 이름들-인터-내셔널과 인터-페이스로서의 만남의 기록 후기

 

박채린

 


든 것은 자신의 영역을 가진다. 그리고 공존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을 경계하며 살아간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의 위를 차지하고, 약한 것은 강한 것 아래에서 살아갔다. 인간 또한 이족보행을 하고 무리를 이루고 문명화 되면서 점점 영역을 넓히려는 욕구를 가졌다. 무기를 이용한 전쟁이 일어나고 패배한 무리를 노예로 부리기도 했다. 하나의 나라 안에서도 중심이 되는 수도와 그 이외의 지역으로 구분되고 분리된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한국은 수도권 서울과 비수도권인, 일명 지방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으로 나뉜다. 다양한 서비스와 산업의 중심이 서울에 집중되어있고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서울에 모여든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서울은 발전된 곳이며 지방은 그에 비해 비교적 발전이 되지 않은 곳이다. 이러한 생각이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시 돌아가서, 제국주의가 그 시대 강대국들의 깊숙한 부분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지구상의 땅따먹기는 매우 과열되어 있었다. 제국들은 식민지를 두어 자신들의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였고, 보호란 이름의 식민지 착취를 끊임없이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여러 나라를 상처입혔다.

 

리나라는 식민지라는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표면적으로 피해사실을 드러내며 해결을 촉구하지만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결되지 못한 나라는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민지라는 공간의 공통적 경험. 좋지 않은 경험이지만 같은 경험을 통해 공감을 할 수 있는 접점을 가지게 된다. 서로의 아픔이 있는 공간에 가서 해결되지 않은 식민지의 문제를 표현해 내는 것, 과거의 일과 더불어 현재에 일어나는 문제적인 상황을 주목함으로써 폭력으로 이루어진 상처를 비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공감의 폭을 넓히고 깊게 만들 것이다.

 

 

 

실 강연을 중간부터 듣다보니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같은 상처를 가진 공간을 통해서 협업하고 단순히 상처를 극복하는 것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 아닌, 한 걸음 더 나아간 그 무엇을 실현 시키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목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제5회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

 

공존과 저항, 예술적 실천의 이름들
인터-내셔널과 인터-페이스로서의 만남의 기록

 

 

2014년 설립된 부산지역의 예술정치공간 <공간 힘>은 2016년부터 “역사적 냉전의 지리에서 공존과 평화의 해안선으로”라는 테마로 ‘아시아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예술기행’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제5회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는 <공간 힘>이 2016년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2017년의 대만에서의 예술실천가들을 만나고 교류해 온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남성 디렉터 쉽이 지배적인 부산지역 미술장에서 <공간 힘>의 디렉터 쉽을 맡고 있는 김효영 선생님의 활동은 지역미술 현장에서 여성 큐레이터 쉽과 디렉터 쉽의 향방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큐레이터가 아닌 '공간'의 운영자로서 움직이는 일, <공간 힘> 멤버들(서평주 프로듀서, 김선영 큐레이터, 김만석 아키비스트)과의 커뮤니케이션 조율 등의 소중한 경험과 앞으로의 활동의 향방도 함께 고민하고 들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발표: 김효영(공간 힘 디렉터)
일시: 2017년 12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장소: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사회대 606 강의실(B04(A)-0606)

 

 

 

 

*참고자료*

2017타이난 국제교류 기본소개자료.pdf

<테크네-인문/테크 프로그램 개발> 연구팀, 동아대 링크 플러스 사업단, 학부생 프로그램 참여 피드백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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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퀴어-정치 후기

 

 

박채린

 

 

 

 

위에 그 시대의 사상이나 풍조 등을 드러낼 수 있는 미술의 창작자는 자신의 그리는 행위와 그 결과물에 정치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한국에서 9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대두와 동시에 등장한 퀴어 미술은 한국사회의 퀴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서양미술사의 퀴어 미술 배제가시화를 통한 퀴어 소비방식과 더불어 민중 미술속에 포함 시킬 수 없는 퀴어 미술의 퀴어 화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미술이라는 예술적 분야가 서구와 비서구를 떠나 아직은 위계 없는 세계 언어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되고 정상적이며 당연하다고 일컫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과 저항을 하며 성, 인종, 젠더, 민족성 등의 상호 교차적인 성격을 가지는 퀴어는 그 자체가 사회적 주류로부터 게토된 상태이면서, 실상 퀴어 내부는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며 수직적인, 일명 주류 사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섹슈얼리티적 퀴어 속에서도 주를 이루는, 게이, 레즈비언과 그 이외의 젠더의 관계, 게이와 레즈비언의 관계, 더 들어가서 게이와 레즈비언 각각의 내부에서도 권력의 우위와 하위가 나뉘는 것이다. 이러한 게토 속 권위는 퀴어라는 단어의 정의와 부합하지 않는 성격이 아닐까.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수업으로써 이 주제를 듣는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전에 내가 들었던 미술과 관련된 수업들은 동서양의 미술사, 혹은 각 시대별 화가들의 나열과 설명을 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 속에서 현대의 신생이론과 사조를 다루기에는 제한되어있는 강의시간으로는 부족했다. 한 학기로 정해져있는 강의에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모두 다루는 것은 수박 겉핥기라는 것이다. 미술사의 경우, 다양한 사조들의 연속이며 주로 중세와 근대사조들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이번처럼 현대의 신생사조, 그 중에서도 주류문화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되는 퀴어 문화사조를 다루는 나름의 특이점이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고 집중하게 하는 강점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듣는 동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던 점이 있었다. 이후 토론자가 이야기 했듯이 발표의 앞부분에서 퀴어는 섹슈얼리티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민족성 등 다양한 사회적 게토의 집합과 교차이며, ‘퀴어가 섹슈얼리티인가?’라는 물음에 이분법적인 /아니요라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설명을 했지만, 발표자가 그 뒤로 다루는 퀴어 미술은 오로지 섹슈얼리티적인 퀴어만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섹슈얼리티적 퀴어라는 부분은 퀴어의 가장 잘 알려지고 다루기 쉬울 수 있는 부분이라는 입장에서, 발표의 대주제로써 퀴어 전체를 다루기보다는 세부적인 부분을 다루는 방향을 잡았으면 어땠을까 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 편집의 말 :

<공간힘>이라는 대안공간을 이끌어오면서 오랜시간동안 부산 문화예술 지평을 넓히는 데 애를 써오고 있는 미술평론가 김만석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후기입니다. 10월 26일 저녁 <공간힘>에서 있었던 오용석 작가의 강좌와 10월 27일 저녁 <아프콤 월례발표회>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던 예술적 표현과 발언의 정치적 의미와 두 모임 사이에 공명하고 있는 교류의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측 : 박수지 발표자 / 우측: 양창아 토론자

 

 

한국미술사에서 퀴어의 위치는 여전히 주변적 경향성이다. 예술에 있어서 퀴어의 범주나 개념 역시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고 있고 이들의 역사와 실천이 탐구되거나 논의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에서 퀴어 문제는 미술적 지형에서 새로운 흐름이며 도전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주제는 논쟁적이고 아직 구성되지 않은 것으로서 펼쳐져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10 26일 목요일 저녁 7<공간힘>에서 오용석 작가의 강좌가 진행되었다. 강좌의 제목은 젠더를 넘어서’. 27일 금요일 저녁 7<아프콤 월례 발표회>(부산컨텐츠코리아랩)에서는 박수지의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퀴어-정치가 발표되었다. 이틀 간 밤마다 퀴어에 관한 이야기 혹은 퀴어로 예술하기와 살기 그리고 연구하기가 이루어졌다. 참여자들은 스무 명 내외. 이 작고 소소한 자리야 말로 퀴어를 둘러싸고 앉는 것도 쉽지 않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래서 참석자들은 귀하고 귀하다. 두 번의 밤과 두 번의 공연. 퀴어가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상연하고 연출하고 연기하는 자리라면, 이 두 번의 밤과 공연은 참석자들을 흔들고 요동치게 만드는 자리이고 그 순간을 나눈 경험은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틀의 밤은 모두 무대에서 진행되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공연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제니 리빙스턴, <파리 이즈 버닝Paris Is Burning (1990)>의 한 장면

 

첫 번째 밤(26). 오용석은 레나타 로렌츠의 <Queer Art : A  Freak Theory>에서 제시된 퀴어 이론과 미학을 설명했다. 이 책의 저자가 갖는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1990년대 이른 바 에이즈 위기라는 상황에서 게이해방전선의 예술적 싸움과 스펙트럼을 보여준다고 했다. 논의의 출발점에서 마돈나의 뮤직비디오에서 나타난 보그’, ‘보깅을 예로 들면서, 무대 위에서 공연자들이 1980년대 흑인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 실천들을 차용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긴 장식이 달린 모자와 화려한 깃털로 이루어진 의상들을 <파리 이즈 버닝>이라는 흑인 퀴어 공동체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보깅>, <보그>가 주류 문화 속에 어떻게 치환/차용되는지를 감각하도록 만들었다. <보그><보깅>은 흔히 ‘DRAG’과 같은 뉘앙스로 활용되는 것인데, 의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용하는 방법인 드랙이라는 전략은 계급, 계층, 인종, 젠더를 무대에 올려 그것의 경계가 분명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강연자가 보내준 요지서에 따르면 레나타 로렌츠가 1990년대 이후 퀴어 예술을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저자가 내세우는 관점은 프릭드랙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프릭은 프릭쇼와 같은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 가정된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저자가 퀴어를 급진화하기 위해 차용한 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퀴어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지배적 시선과 논리를 급진적으로 전유해 퀴어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릭은 역사적 유산들을 기괴한 것으로 그래서 퀴어로 전유함으로써, 과거를 (몸으로) 다시 쓰는 일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은 예술들을 대상으로 한다. 드랙은 단순히 의상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몸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동시에 드랙은 이러한 규범들, 예컨대 양성체제, 백인임, 비장애인임, 그리고 이성애 규범성에 대한 거리를 생산하는 일련의 효과적인, 수고로운, 한편으론 친숙하고 한편으론 공격적인 방법론들을 조직하는 한 방식이다.”

 

 

이 두 조건을 통해 레나타 로렌츠는 퀴어 예술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1)급진적 드랙 2)전환시간적 드랙 3)추상적 드랙. 이 세 범주의 논리는 젠더’, ‘역사’, ‘지각을 동시대 퀴어의 관점에서 재전유함으로써 제시한다. 가령, 퀴어와 무관하지만 부드리와 로렌츠의 공동 작업인 <살로메니아>(2009) 1923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퀴어로 전유하고 무대 위에서 재상연하도록 배치하는 작업을 전환시간적 드랙으로 범주화한다. 이 작업의 전략은 기존의 예술사, 영화사는 물론이거니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퀴어의 역사로 배치하고자 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살로메라는 극적 인물이 퀴어내부에서 재해석되고 재공연되는 이었다는 사실 역시 주지해야 한다. 요컨대, 퀴어 예술에 대한 한 지도를 그리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레나타의 흥미로운 참조점을 제공한다는 것.

 

두 번째 밤(27). 보다 중요한 사실은 강연자가 강연을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퀴어의 역사화 작업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퀴어는 게토에 머물러 있음을 강하게 자각하면서, 자신은 몸과 작업의 일치가 일어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연자는 퀴어 내부의 위계화 문제 또한 제기하면서, ‘트랜스젠더가 어떻게 게이해방전선에서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주며 향후 퀴어 구성의 문제를 한국사회 내부에서 고민하려 한다는 말을 했다.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다음 날 밤, 아프콤월례발표회(4)의 플로어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주유신)과 공명했다. 퀴어 씬 내부의 위계화 문제는 퀴어 문제를 다룰 방법적 논의가 무척 중요해지는데, 이에 대한 한 응답이 전날 밤의 논의를 통해서 일정부분 이루어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발표자(박수지)퀴어성’(이 용법은 다소 불분명한 표현으로 보인다)이라는 게 만약 정치가 될 수 있다면, 이들이 가시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본주의신자유주의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플로어에서 퀴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총체를 다만 퀴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면, 이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퀴어가 이름을 도무지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있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퀴어성이라는 범주적 표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권명아)라는 관점을 이야기했다. 퀴어가 다만 당사자 운동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데도, 당사자로서 운동으로 귀착시키는 논점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제시했다. 이는 토론자(양창아)의 수많은 질문들과도 공명하는 논의이기도 했다.

 

 

 

이 논의에서 퀴어를 둘러싼 문제의식들, 그러니까 1990년대 이후 해소되지 않고 진행되어온 저간의 담론적 맥락과 쟁점들을 해소하지 않고 온 사정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관점이 피력되었다. 정체성이 주요한 의제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 영역이 페미니즘의 선후배 세대가 교차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대화의 자리라는 것을, 페미니즘의 역사를 쓰는 영역이라는 사실이었다. 페미니즘 내 세대적 갈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은 엡데이트로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반복을 피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함께 기획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다만 여성의 이론이 아니라 소수자 해방 정치를 위한 기획을 실현하는 영역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아프콤의 월례 연구/발표회는 드문 자리일 것이다. 여러 연구자끼리 교류하는 자발적 모임이 사실 상 전무한 부산에서 이 연구/발표회가 점점 취약해져 가는 연구자 지반으로 꾸역꾸역 일구어 나가는 지역에서는 무엇보다 귀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아프콤의 멤버들의 수고로움이 가시적 성과로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겠지만, 시간을 더할수록 참여자와 밀도를 더 해 가는 과정은 향후 연구자들의 고립을 해소하는 데도 중요한 몫을 할 것으로 여겨진다(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과장이겠지만 어떤 기대와 모종을 삽입해두는 건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지역의 대학에서 대학원을 중요한 목적으로 사고하지 않게 되어버린 현실은 안팎으로 연구자들의 장치를 모색하게 만들고 있으니, 외려 긍정적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fin)

 

 

 

 

제4회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퀴어-정치

 


올해는 부산에서도 퀴어페스티벌이 열렸던 역사적인 해입니다. 혐오세력들의 혐오발화에 아랑곳 없이 파란 하늘에 무지개 깃발들이 펄럭거리며, 멋진 퍼포먼스를 했던 퀴어 퍼레이드를 떠올리며, 이번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에서는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퀴어-정치>라는 주제로 박수지 선생님이 연구발표를 해주십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셔서 풍성한 논의의 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발표자가 전하는 말 :
"퀴어는 ‘원래 있던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퀴어 이론은 여전히 ‘신생’이론에 가깝습니다. 퀴어는 늘 옆에 있지만 그 옆자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역에 위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서발턴으로, 때로는 여성, 소수자, 디아스포라로 다르게 호명될 수 있습니다. 삶의 태도로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양태 중 하나로서의 ‘퀴어’를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1990년대 이후를 기점으로 한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정치성에 대한 연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퀴어는 섹슈얼리티일까요? 섹슈얼리티에서 분리된 퀴어를 말할 수 있을까요? 퀴어의 정치적 급진성은 무엇으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본 연구는 위의 질문들을 안고 시작합니다."

 

 

발표: 박수지(독립 큐레이터/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석사수료)
토론: 양창아(부산대학교 비정규 교수)
일시: 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저녁 7시~9시
장소: 부산 콘텐츠코리아 랩 금정센터(부산광역시 금정구 금강로 252-1 근명테크빌 3층)

 


관련자료 링크:"
정연심, 「2세대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즘 미술비평」,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26 No.-, 2013.(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

애너매리 야고스, 「페미니즘의 퀴어이론」, 박이은실 옮김, 『여/성이론』 Vol.- No.23, 2010.(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

정은영, 「퀴어, 미학, 정치」, 『삐라 : 퀴어인문잡지』 Vol.1 No.-, 2012.(http://www.riss.kr/search/Search.do…)

 

 

 

아프꼼 3차 월례 연구 발표회

나카야 이즈미, 수탈당하는 여성표상 발표 참관 후기

 

박 수 진

 

 

   난 금요일, -학교와 그 외피씨방(매우 중요)집의 패턴을 거의 바꾸지 않고 살아가는 제게 좋은 자리가 있으니 가자! 하고 끌고 나가준 여러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동아대에서 있었던 아프꼼 월례 연구 발표회에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발표회가 있으니 시간이 괜찮다면 가자는 권유를 받은 것은 한주 전, 그때라도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여쭸더라면 조금 더 준비된 상태에서 여유로울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애살을 전혀 발휘하지 않았던 탓에 그날의 발표 주제가 해외 연구 소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동아대로 출발하기 한 시간 전쯤이었으며, 심지어 그 해외 연구자께서 직접 오셔서 발표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미나실에 들어간 직후였습니다. 덕분에 그 자리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름의 준비(?)를 하셨을 다른 분들과 달리 전 자리에 앉은 직후부터 아차……. 논의의 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는지……. 아득함과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러나 그런 고통은 정작 발표가 시작되자 그다지 의미 없는 걱정이 되어 사라지게 되니, 나눠 받은 요약지에 쓰여 있던 차례에 따라 충분한 설명을 곁들여주신 발표자와 곁에서 발표자의 짧지 않은 이야기를 공들여 통역해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신현아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논의의 시작은 생활기록의 필자들’, 즉 어린이의 작문 문체로 자신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공들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색채가 미디어를 거치면서 일어난 맥락의 삭제로 인해 성장 도중의 주체로 읽히게 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이 글쓰기는 단순히 자신의 생활과 내면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쓰기 공동체 내에서의 대화가 전제된 글쓰기였기에 쓰인 것 이상의 출구 모색을 위한 주체의 치열한 과정이 있었을 테지만, 이것이 미디어를 거치고 비정치적인 글이 되는 과정은 마치 그렇게 열심히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길을 주체적으로 찾아 나갔을 여공들이 결혼 후에는 자신이 그 이전에 해온 많은 주체적인 것들이 삭제 당한 채 가정이라는 테두리 내에 속박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의 과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에 비정치적인 것으로만 읽히기를 강요당하는 것은 그들을 성장 도중의 주체로만 보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이 얼마나 폭압적인 것인지는 이어서 나온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발표자께서 요약자에 적어둔 대로, 말 그대로 이야기의 수탈이었습니다. 사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는데(최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호 스트레인 독스를 통해 또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믿고 일기장을 보냈던 아리아케 시즈의 이야기를 가로채 소설로 바꿔 쓰며 서술자의 이미지를 섹슈얼리티와 접속시킨 행위는 꽤나 충격이었습니다.

성장 과정 중의 여성을 정지시키고 그 순간을 박제하고자 하는 기이한 욕망, 즉 소녀에 대한 기분 나쁜 집착에 대해서는 일본의 대중문화물을 적지 않게 접했었기에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역시 이런 건 단순히 예능 사업이나 애니메이션 시장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또 이처럼 여성을 한 자리에, 한 시간에 붙들어 두고자 하는 시도는 일본의 문제만도 아닐 겁니다.

 

 

  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발표자께서는 아마도 소녀라는 이미지가 현대에까지 문제적으로 소비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서사 장르인 애니메이션을 가져오셨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그 텍스트의 선택에 있어서는 조금 많은 부분을 간과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일 겁니다. 비록 애니메이션은 이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엔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시장이기는 하지만(그런데 또 알 수 없지요, 넷플릭스가 들어간다니까. 예토전생 기대해봅니다.), 그래도 한때 소녀만이 아니라 소년을 만들어내는데도 크게 일조했던 서사 장르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젠더의 선을 가르는 데 있어서 첨단의 도구였던 애니메이션을 통해 시간이 박제된 소녀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하셨던 발표자의 시도는 긍정하지만, 동시에 오타쿠 계 내에서의 반성과 거기서 비롯된 장르 내외의 대중적 효과가 일본의 문학 연구자들에게는 너무 단순하게 읽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발표자의 논의 중에서도 아주 국소적인 부분에 해당하지만 후기에까지 이 부분 때문에 분량을 넘긴 걸 보면 사실은, 제법 곱씹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리고 이렇게 소심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발표 이후에 이어졌던 자리까지 따라간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던 권명아 교수님과 동아대 선생님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하셨던 다른 연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선생님들의 문제의식과 다양한 연구 주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단순히 가자고 하니까 가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가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몸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자리가 있었던 덕분에 찾아갈 기회가 생긴 것이고, 덕분에 제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좋은 자리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제 후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프꼼 3차 월례 연구/발표회 그 민중이란 누구인가후기

 

신민희

 

 

프꼼 3차 월례 연구/발표회에 대한 후기를 쓰기로 마음먹고,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수록, 좋은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면 가질수록 왜 이와는 점점 멀어진 채, 자질구레한 어릴 적 나의 글쓰기 경험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을 규명하는 일이, 어느 지점에서 발표회의 후기와 맞닿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남해군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열었다. 그때 제시된 주제는 가족이었는데, 그 당시에 나는 가족의 위기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경제적으로 위태로웠는데, 그해는 한국 전체에 IMF위기가 불어닥치던 때였다. 그때 내가 느꼈던 고통은 경제적 궁핍이라기보다 부모님들의 무기력함, 분노, 짜증을 보는 일이었다. ‘아이의 시선으로 기억하는 일은 사실 부모님의 대화를,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전화통화를 엿듣는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도 현재의 상황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엿듣고 훔쳐보면서 가늠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이 내가 가족의 위기를 더 크게 공포로 인식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큰 공포와 불안감이 가족이라는 주제 앞에서 글을 쓰게 했던듯하다. ‘우리가 너무 가난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면서도 글을 썼던 기억, 쓸 수밖에 없었던 기억. 이것이 나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었던 것인지, 글을 쓰는 일을 생각하면 늘 이때의 경험만이 떠오른다. 엿듣는 위치에서 내가 나의 고통을 글로 썼다는 경험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경험이 떠오르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때 쓴 나의 결말이 늘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우리 가족이 이 위기를 극복해,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은 것. 그 당시에도 내가 그 글을 마무리하면서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를 봉합해버렸다는 기억이 있다(하지만 이 극복의 의지가 없었다면 상을 받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앞의 글의 전개가 어떠했든 글의 결말이란 으레 그런 방식으로만 마무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상상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이 결말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고, 그리고 누군가 나의 글을 심사할 것이라는 전제 때문이었다.

 

 

금 나의 글쓰기가 이날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해방과 검열의 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 자체가 나의 글쓰기 동력이 되고 있음을, 그로부터 나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어릴 적 글쓰기 기억을 반추하는 일이 후기 쓰기에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연구/발표회가 적어도 내 글쓰기를 반추하게 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을 함께 나눌 다른 동료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된 귀한 경험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研究会affcom 月例研究/発表会

 

その「民衆」とは誰なのか:ジェンダー・階級・アイデンティティ

 

 

 

今回の研究/発表会には日本の文学研究者中谷いずみ先生の『その民衆とは誰なのか』を一緒に読みます。

声がない存在たちはいくつかの名前に呼名されました。その中で「民衆」という名前は長い歴史と様々な意味が重なっている歴史的ば名前です。『その民衆とは誰なのか』は1930年代から1950年代まで日本で民衆主義体制が構築されていた期間中に、「民衆」という名前が呼名される時に発生される権力とアイデンティティの力学を分析しています。

 

<論文PDFリンク>

女子工場労働者の綴方: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f721230d30ec11bec85d2949c297615a

‘소녀’들의 이야기의 행방: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6ae4efbb207f47efd18150b21a227875

 

 

2017。09。28(木) 午後6:30
東亜大学スンハクキャンパス人文大学7階705号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


그 민중이란 누구인가: 젠더/계급/아이덴티티


 

이번 연구/발표회는 일본의 문학연구자 나카야 이즈미 선생님의 『그 민중이란 누구인가(その民衆とは誰なのか)』를 중심으로 열리게 됩니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주변부의 존재들은 매번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어 왔습니다. 그 중 '민중'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쌓여 있는 역사적인 이름입니다. 『그 민중이란 누구인가(その民衆とは誰なのか)』는 1930년대부터 1950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민주주의 체제가 구축되는 시기 속에서 '민중'이라는 이름이 호명될 때 발생하는 권력과 정체성의 역학을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 저작에서 주목하고 있는 1950년대 일본 노동자들의 서클운동을 1970-1980년대 한국노동자의 활동과  겹쳐 읽어보고 매번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지만 그 이름 바깥으로 나아가려던 주체들, 다스려지지 않는 존재들의 역사적인 역능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9월 아프꼼 월례 연구 발표회에서는 나카야 이즈미 선생님의 <여자공장노동자의 글짓기(女子工場労働者の綴方 이영재 역)>와 <'소녀'들의 이야기의 행방(少女たちの語りのゆくえ 신현아 역)>을 다룹니다. (riss에 접근이 어려우신 경우 메일 주소를 댓글오 달아주시면 보내드릴게요~)

<논문 pdf 다운 링크>

여자공장노동자의 글짓기: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f721230d30ec11bec85d2949c297615a

소녀들의 이야기의 행방: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6ae4efbb207f47efd18150b21a227875

 

일시: 2017년 9월 28일 오후 6시 30분
장소: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 A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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