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지배, 다양한 저항

 

 

 

 

스나가와 히데키(砂川秀樹)_LGBT 인권활동가

번역: 장수희_연구모임 아프꼼 연구원

감수: 다지마 테츠오(田島哲夫)_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들어가며

 

 

   2015719일 핑크 닷 오키나와(Pink Dot Okinawa)[각주:1]의 행사장에서 나하(那覇)시장이 성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 나하 선언’(통칭 레인보우 나하 선언’)을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레인보우 나하 선언은 행정이 LGBT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지원해 가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2013년에 오사카부 요도가와구(淀川区)가 발표했던 ‘LGBT 지원 선언다음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가 된다.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땅인 탓인지 전국적으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이런 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LGBT에 관한 관심과 이해의 확산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사장을 이용해서 발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레인보우 나하 선언에 큰 영향을 준 것 중 하나가 핑크 닷 오키나와이다. 핑크 닷 오키나와는 ‘LGBT 등의 성적 소수자가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원하는 사람들이 핑크색으로 된 물건을 몸에 걸치고 모여, 그 의사를 표현하고 연대를 보여주는 이벤트이다. 핑크 닷은 싱가폴에서 2009년에 시작되어 퍼레이드와는 다른 형식의 프라이드 이벤트(LGBT의 가시화, 현재화를 위해 행하는 이벤트)로서 몬트리올이나 유타주, 홍콩, 대만 등에서도 개최되어 왔다.

   오키나와 최초의 프라이드 이벤트로서(일본 최초의 핑크 닷으로) 2013년에 시작된 이 핑크 닷 오키나와는 사실 내가 공동대표로 일하고 개최했던 것이다(또 한명의 공동대표는 이 이벤트를 계기로 신문을 통해 오키나와에서 최초로 실명을 드러내며 공적으로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한 미야기 유카(宮城由香)이다). 나는 도쿄에 살기 시작한 1990년부터 HIV/AIDS에 관한 시민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도쿄 레즈비언&게이 퍼레이드의 실행위원장이 되었고, 그 후에 이 퍼레이드의 모체가 되는 도쿄프라이드의 대표가 되는 등 2011년에 고향인 오키나와로 돌아오기까지 도쿄에서 21년에 걸쳐 LGBT에 관련한 활동에 관여해 왔다. 따라서 일본의 LGBT를 둘러싼 상황이나 변화를 말할 때 그것에 크게 관계해 온 나는 자기성찰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또 나는 신주쿠 2초메를 주요한 필드로 조사를 하면서 그 거리에서 게이커뮤니티 의식이 발생한 배경, 도시에서의 인간관계 형성 등을 테마로 연구를 해 온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이 문화인류학자로서의 조사연구와 앞서 기술한 게이액티비스트로서의 활동은 내가 각각을 상대화하는 시점을 항상 견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서두에서 나 자신의 배경에 대해서 기술한 것은 이 테마에 대해서 논할 때 나의 경험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도쿄에서 오키나와로 거점을 옮겨 계속해 온 25년간의 활동 경험과 문화인류학자로서의 사고 사이를 왕래한 결과이다.

 

 

 

 

2개의 지향성

 

 

   근 4, 5년간에 일본에서도 LGBT라는 단어가 널리 침투되기 시작해 기업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서 LGBT가 주목을 받는 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붐이라고 하면 일찍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1990년대 전반에 대중매체가 게이에 주목하여 활발하게 거론했던 게이 붐이라고 불리는 시절이 있었다. 여성을 주요한 독자층으로 하는 잡지 CREA(문예춘추사)게이 르네상스91’이라는 제목의 특집을 꾸리고, 1992년에는 후지텔레비전(Fuji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NONFIX>에서 핑크 트라이앵글-맨얼굴의 동성애자들편이 방송되었다. 1993년에는 일본텔레비전(NTV)이 제작한 게이 주인공의 연속 드라마 <동창회>가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사이 많은 잡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서 게이가 거론되었다.

   사실 붐에 선행하는 형태로 1980년대 후반부터 게이 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앞서 말했던 다큐멘터리 핑크 트라이앵글-맨얼굴의 동성애자들편은 어커(OCCUR)[각주:2]ILGA일본[각주:3] 등 도쿄를 거점으로 게이 해방운동을 이끌어 온 단체를 추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들 운동이 게이 붐의 흐름에 포함될 수 있는 부분은 적다. 또 당시 운동 속에서 이 붐은 대중매체가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것이어서, 현실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라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 있던 터인 동시대에 융성했던 대중매체의 움직임과 해방운동이, 하나의 흐름으로서 위치지어질 수 없었던 배경은 필시 그것들이 각각 다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개의 지향성이란 널리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주류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표상에 맞추어 가려고 하는 이른바 동화주의와, 사회를 보다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급진주의(radicalism)의 지향성이다. 이것은 다양한 사회변혁운동, 특히 마이너리티운동 속에서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생겨나고 있고, 따라서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지적되어 왔다. 그 때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LGBT에 관한 움직임에 대해서 논하는 중에, 굳이 새삼스러운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은 LGBT에 관한 활동이 활발하고 다양한 입장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난 지금, 이 두 가지 지향성 사이의 마찰이 눈에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여기에서는 사회변혁운동, 마이너리티운동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사회에 대해 행동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활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 파트너십을 행정이 인정하는 움직임 속에서, 혼인제도 그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한 쌍의 파트너 관계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더욱이 이를 최상의 관계인 것처럼 표상하고 나아가서 그 관계를 나라나 지방 행정 등이 관리하는 시스템에 비판적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시스템에 동성 커플이 등록되는 것을 비판한다. 이것은 가장 급진적인 입장 중 하나이다. 물론 그 대척점에 있는 동화주의에 위치하는 주장은 이러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일 것이다. 시부야구의 파트너십증명서는 구청장에 의한 허가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전제가 될 법적 보장 때문에 경비가 든다. 그러나 동화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이성애자의 혼인과 큰 차이가 나는 이 점(법적 보장에 경비가 드는 것)보수파로부터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보수파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성간의 혼인과 다른 점을 비판하고 가능한 한 동일한 취급을 바라는 입장은 혼인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동화주의적이긴 하나, 차이를 만들어 안심하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는 급진주의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LGBT 활동 내에서의 의견 대립, 마찰이 생길 때 사회변혁 자체를 바라지 않고, 활동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 때라는 듯이 그것을 왈가왈부하고 운동의 추한모습인 것처럼 포착해 SNS 등을 통해 선전한다. 또 활동에 공감을 하는 사람, 혹은 관여하는 사람도 왕왕 이와 같은 대립 그 자체를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대립은 없애버려야 하는 것일까. 혹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생각한 다음에 중요한 것은 사회 속의 지배적 가치관과 규범의 다원성이나 다면성, 다층성 등에 기반하는 다양성과 그 속에서 생겨나는 저항에 대해서이다.

 

 

 

 

겹쳐지고 접합하는 프레임

 

 

   여기서 잠깐 내 최근 저작인 신주쿠 2초메의 문화인류학[각주:4]에서 논한 것을 요약해서 사회의 가치관이나 규범의 다양성과 이에 대한 저항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이 책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지배적 언설과 이에 대한 저항을 3개의 프레임으로 분류했다. 이 프레임은 플루그펠더(Pflugfelder)[각주:5]가 제시하고 있는 일본 섹슈얼리티 역사의 패러다임이나 메이지 시대의 계간법(鷄姦法) 제정과 폐지에 관한 후루가와 마코토[각주:6]의 분석을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동성애를 파악하는 시점은 -취미 프레임에서 병리 프레임으로, 그리고 성적 지향 프레임으로 이행해 왔다. 사에키 준코[각주:7]에 의하면 메이지 이후 사랑()’이 도입되기 이전 일본의 섹슈얼리티는 ()’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그 프레임에서는 남색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 후, 메이지기에 성과학(sexology)이 도입되면서 병리 프레임에 의한 동성애가 인식되게 되고, 이에 대해 당사자가 중심이 되어 저항적으로 확장되어 온 성적 지향 프레임이 등장하게 된다.

   이 개념들의 개념틀(여기에서 말하는 프레임)의 이행을 지적하는 것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나의 논점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시대에서 다양한 가치관이나 관념이 항상 존재했다는 것, 새롭게 등장한 듯 보이는 프레임도 그 프레임을 견인한 사상이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 프레임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개념과 접속하면서(예를 들면 취미와 접속하면서) 병존하고 다층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언제를 시발점으로 잡아도 그 때의 사회가 획일적인 섹슈얼리티관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색이 수용되었다고 말하는 시대에도 부정적으로 보는 가치관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메이지 시대에 구미의 크리스트교 가치관이 들어와서, 일본에서는 동성애가 억압되게 되었다.’라는 견해가 너무 소박하다는 것도 지적했다. 애당초 부정적인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에 병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새로운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지배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동성애를 -취미혹은 병리로 보는 프레임은 뿌리 깊게 존재해 동성애를 억압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프레임 속에서도 다양한 언설이 서로 밀고 당기며 동성애를 표상하고 있었다는/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이들 표상은 다른 프레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겹쳐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게이는 멋쟁이가 많다라는 말하기는 칭찬의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종의 편견이다. 이 말하기 속에는 타고난 성질로서 위치 지어진 성적 지향을 토대로 -취미와 친화성이 있는 유흥과 관계하는 이미지,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는 병리에 가까운 일탈성의 의미가 접합된 표상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물론, 경험적인 것으로, 게이로 커밍아웃 하기 쉬운 직업 영역과의 관계도 있겠지만, 그 커밍아웃 하기 쉬움과 앞의 설명은 순환구조에 있다.)

  

 

 

 

모순을 포함하는 지배적 힘

 

 

   여기서 구체적인 운동과 연결 짓기 어려운, 약간 추상화된 논의를 전개한 것은 사회를 바꾸어가는 활동이 저항하는 대상이 될 프레임과 그 속에 존재하는 표상들 자체가 일관된 것이나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파악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고방식은 인문·사회계의 학문 세계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것 중 하나이다. 내가 이 논의를 처음으로 접한 것도, 초판이 25년 전에 나온 셰리 오트너의 젠더·헤게모니[각주:8]에서였다. 고전이 된 논의이지만 지금도 유효하고, 더 널리 학계 밖에도 알려져야만 하는 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젠더·헤게모니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가 그람시로부터 받아들인 헤게모니 개념을 참조하면서, 남성우위의 보편성을 둘러싸고 인류학에서 일어났던 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 그녀는 어떤 사회/문화에서도 남성이 권위를 가지는 축, 여성이 권위를 가지는 축, 양성이 평등인 축이 복수로 있고, 나아가 젠더와 관계가 없는 권위축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모순이 없는 사회/문화는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서도 논리나 언설, 실천에는 복수적이고, 어느 것은 지배적(헤게모니적)이고, 다른 어떤 것은 반헤게모니적(전복적, 도전적)이고, 또 다른 어떤 것은 단지 다른 것으로 존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지배의 축이 다양하고 그 속에는 모순되는 것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는 것도 일관성이나 획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AB라는 서로 모순된 시스템이나 언설이 마이너리티를 억압하고 있는 경우, 그것에 대해 일어나는 반()A, B도 서로 모순된다(젠더에서의 여성에 대한 약하고 비호해야하는 존재’/ ‘여성은 강하다, 만만치 않다라는 언설과 이에 대한 저항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지배하는 힘에 내재하는 모순이 문제시 되지는 않지만, 저항으로 일어나는 반A와 반B의 사이의 모순에는 비판이 쏟아진다. 또 반A와 반B의 사이에도 AB에 거의 생기지 않는 대립이 생기기 쉽다. 그것은 마이너리티가 항상 획일적이길 요구하는 힘이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리티에게 획일적일 것이 요구되는 것을 둘러싼 논의는 이전에 내가 변동하는 주체의 상상/ 창조라는 논고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각주:9] 거기에서 나는 마이너리티는 주체에 관해 0/1(=있느냐 없느냐) 어느 한 쪽의 존재 방식을 강요당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말했다. 주류는 0~1의 주체성 속에서 매 번 변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마이너리티는 마이너리티로서 주체화되거나 완전히 억제되거나 하는 힘이 가해지기 쉽다.

   그것은 각 주체의 구축론이지만, 집단에 대해서도 같은 힘이 가해지고 있다. 주류가 항상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흔들림이나 모순이 허용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마이너리티는 그 주체성의 구축에 있어서 각각에 0/1의 주체성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에도 획일적이고 일관된 정체성에 기반한 주체화가 요구된다. 이와 같이 획일적이고 일관성 있는 듯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힘이 마이너리티에게 가해지고 있는 최대의 억압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예를 들어 ‘LGBT 활동으로 범주화되는 것들 속에 모순되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그것 자체가 획일화라는 최대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강하게 비판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지배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는 이상, 저항의 모순도 불가피하다). 그 모순 때문에 대립이 강해지고 때로는 활동이 분열되기도 할 것이다. 나 자신, 스스로가 깊이 관여해온 HIV/AIDS 활동에서도 동경의 퍼레이드에서도 분리를 경험하고 있다. 활동의 분리는 개인적인 권리욕에 의한 주도권 다툼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각각이 실현하고 싶은 저항 형태의 다름에 의한 대립에 기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분리가 자주 발생하면 이로 인해 활동 전체의 에너지가 저하되기도 하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만 강하게 부정될 것도 아니다. 때때로 분리는 다양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 대립과 분리에 관해 활동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이 가장 주의해야하는 것은 서로간의 저항의 다름(모순)에서 생기는 대립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하지 않는 것, 분리를 최악의 일처럼 다루지 않는 것, 분리한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투여하면 마이너리티를 가장 억압하고 있는 근본, 즉 획일화하려는 지배적인 힘을 그대로 놓아두게 된다.

 

 

 

흔들림, 왕래의 필요성

 

 

   LGBT가 크게 부상하여 붐 같은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와 가장 다른 인상을 받는 것은 기업이 LGBT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경에서 퍼레이드와 같은 큰 LGBT 이벤트에 스폰서로 지원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직장을 LGBT가 일하기 쉬운 환경으로 정비할 것인가라는 테마에 대해서도 논의하게 되었다.

   이 흐름은 외국자본계의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대기업도 따르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속에서 이들 기업과 제휴한 활동은 상업성이 강해지고 (활동 그 자체가 이익을 얻는다기보다 스폰서가 야기하는 표상성이라는 의미에서) 사회 전체 속에서 지배적인 힘을 가진 자가 가지는 문화에 접근하여, 이른바 중상류층과 상류층 중심의 활동이 된다. 물론 실제로는 그와 같은 활동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가 하고 있고, 다른 지향성을 가지는 사람도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상적, 전체로서의 지향성 말이다. 그 흐름에 대해 LGBT의 빈곤 문제, 정신위생 문제 등 곤궁한 측면에 주목하고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로부터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한다. 이는 미국 등의 퍼레이드에서도 반복되어 온 비판이다. 또 동성 간 파트너십의 법적 보호 실현을 중심적 과제로 하는 활동에 대한 위화감을 듣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또한 미국에서 동성 간 결혼의 실현(결혼의 평등화)LGBT 활동의 주된 목표인 것처럼 전개되어 온 것에 대한 비판과도 통한다.

   내가 2010년에 동경에서 퍼레이드의 대표가 되었을 때, 글로벌 금융기업이 부스 설치를 해 주었다. 이와 같은 대기업이 퍼레이드에 부스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경제격차를 낳고 있는 요인 중의 하나로서 금융기업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들 기업의 부스 설치에 대해 SNS를 통한 비판이 쏟아졌다. 또 그 한편으로 나는 홈리스사람들의 자립 지원을 위한 잡지 빅이슈(THE BIG ISSUE)와 협력하여 같은 퍼레이드 행사장에 빅이슈의 판매 공간을 설치했다. 이 같은 연대에 대해서 어느 이벤트 오거나이저로부터 퍼레이드는 이제 홈리스의 이벤트가 되었나요?’라고 야유를 당하기도 했다. 그 말이 나온 배경에는 다른 사회운동(게다가 화려하지 않은 것)과의 연대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클럽문화 같은 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한 실행위원의 잘못이 있었다.

   각각 다른 입장에서 비판이나 반발을 받았던 이 지원/협력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LGBT 활동 전체에 모순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활동 속에도 때로는 모순되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공존 불가능한 모순도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앞에서 논한 것처럼 분리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다만 그 때 일단 분리한 활동도 활동 과제가 일치 할 때에는 함께 활동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느 단체에 소속하는지, 혹은 이전에 대립이나 충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넘어, 활동 과제에 따라서는 공동 투쟁하는 것이 그 분야의 활동을 향상시켜 갈 터이다.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핑크 닷 오키나와는 2013년에 최초의 핑크 닷이 끝난 후, 2개의 세미나에 관여하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 주최한 것으로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일본인 대학원생이 미국 퀴어액티비즘의 최신 논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재오키나와미국영사관이 주최하고, 우리가 후원한 미국 최대의 LGBT권리운동 단체 ‘Human Rights Campaign(HRC)’의 법무부장에 의한 것이었다.

   앞의 세미나에서는 미국 주류’ LGBT운동이 신자유주의나 국가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에 대한 비판, 결혼의 평등화가 최우선이 되는 것은 중상류층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한 보고였다. 그리고 HRC의 세미나에서는 다름이 아니라 주류’ LGBT운동 전략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가 지역 신문의 인터뷰에 동석했을 때, 신문기자가 미국에서 어떻게 호소해 왔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우리들은 이성애자와 똑같다는 점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개의 세미나가 끝난 뒤, 핑크 닷 멤버들이 감상을 공유했을 때에는, 크게 제도를 바꾸어 나갈 때 전략적으로 지배적인 문화에 맞추어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 그러나 그대로 지배적인 문화와 일체화하거나, 큰 사회적 흐름에 포섭되어버리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이 축을 항상 의식하면서 흔들리는 것, 혹은 그 사이를 왕래할 필요성이었다.

   아무리 의식해도 모두 의식할 수 없는 부분은 있지만, 지금 우리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지, 어떤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문화에 어디까지 동화하려고 하는지, 혹은 변혁하려고 하는지를 항상 의식하는 것, 또 모순을 내포한 지배력에 대해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된 저항들 간에서, 그 모순이나 대립점을 확인하고, 때로는 그러한 문제점을 상호간에 전달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비판에 에너지를 너무 들이지 않는 것, 또 그 모순이나 대립을 과하게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 그리고 언제라도 같은 활동 과제 하에 모이는 것, 이 의식이 지금부터의 LGBT 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들을 의식하는 것이 획일화시키려고 하는 최대의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달관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의 한가운데에 있고 갈등하거나 번민하거나 하는 일이 많은 나 자신에게 타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 이 글은 문화인류학자이자 LGBT 인권활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스나가와 히데키(砂川秀樹)현대사상(現代思想)201510월호에 발표한 다양한 지배, 다양한 저항(多様支配多様抵抗)을 옮긴 것이다. 스나가와 히데키의 저서로는 カミングアウト・レターズ(太郎次郎社エディタス, 2008), 性的なものはプライベートなものか?』(グラディ出版, 2013), 新宿二丁目文化人類学: ゲイ・コミュニティから都市をまなざす(太郎次郎社エディタス, 2015) 등이 있다. 그는 공식 홈페이지(http://www016.upp.so-net.ne.jp/sunagawa/) 공식 블로그(http://hidekiss.exblog.jp/) 통해 오키나와에서의 LGBT 인권활동의 기록과 연구자로서의 행보 등을 보고, 발표하고 있다.-옮긴이

 

 

 

* 이 글은 『문화과학』 겨울 84호(2015)에 실렸습니다.

 

 

 

 

  1. 1) 2015년 핑크 닷 오키나와(Pink Dot Okinawa) 개최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http://pinkdotok.jp)에서 확인할 수 있다.-옮긴이 [본문으로]
  2. 2) NPO법인 어커(OCCUR, http://www.occur.or.jp/about.html)의 정식 명칭은 ‘움직이는 게이와 레즈비언 모임’으로 레즈비언과 게이로 구성된 그룹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고립, 자기 비하 등 당사자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1986년에 설립되었고, 1999년 12월에 에이즈 서비스 사업체로서 또 동성애자 사회 서비스 사업체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관할청에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NPO법인)의 인증을 받았다. 어커(OCCUR)는 동성애와 HIV/AIDS에 대한 “올바른 지식·정확한 정보의 보급”, “차별·편견 해소”, “네트워크 구축”을 활동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전역에 약 350명의 등록 회원과 2,500명의 등록 지원자들이 있으며, 도쿄 사무소에는 약 50명이 자원 봉사 스탭이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어커(OCCUR)는 레즈비언/게이의 전화 상담, AIDS/STD정보 라인, 법률 상담 등의 각종 전문 상담과 에이즈 예방 홍보 행사 등 사회 서비스 사업을 비롯한 인권 옹호, 조사 연구, 정책 제언, 국제 협력 등 각 분야의 사업을 종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홈페이지 ‘단체소개’ 참고).-옮긴이 [본문으로]
  3. 3) 국제레즈비언・게이협회(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는 레즈비언과 게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관련 단체 600개 이상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협회이다. 인권과 시민권 영역에서의 LGBT 권리를 위한 캠페인과 유엔 및 각국 정부를 대상으로 탄원서명운동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ILGA일본(ILGA日本)에는 어커(OCCUR), G-Front간사이(G-Front関西, http://www5e.biglobe.ne.jp/~gfront), 홋카이도성적소수자협회삿포로 미팅(北海道セクシュアルマイノリティ協会札幌ミーティング, http://pablo1974.com/hikokai_hsa/index.html), 게이재팬뉴스(ゲイジャパンニュース, http://gayjapannews.com/news2007/news226.htm)가 가입했다.-옮긴이 [본문으로]
  4. 4) 砂川秀樹, 『新宿二丁目の文化人類学: ゲイ・コミュニティから都市をまなざす』, 太郎次郎社エディタス, 2015. [본문으로]
  5. 5) Gregory M. Pflugfelder, Cartographiesof Desire: Male-Male Sexuality in Japanese Discourse, 1600-195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본문으로]
  6. 6) 古川誠, 「「性」暴力装置としての異性愛社会ー日本近代の同性愛をめぐって」, 『法社会学 法と暴力』第54号, 2001, 80-93. [본문으로]
  7. 7) 佐伯順子, 『「色」と「愛」の比較文化史』, 岩波書店, 1998. [본문으로]
  8. 8) Sherry B. Ortner, "Gender Hegemonies," Making Gender: The Politics and Erotics of Culture (Boston: Beacon Press, 1996). [본문으로]
  9. 9) 砂川秀樹, 「変動する主体の想像/創造」, 『現代思想』 Vol.28-14. [본문으로]

 

 

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

-불가시화에 저항하며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_일본근대여성사 연구자

번역: 장수희_연구모임 아프꼼 연구원

감수: 다지마 테츠오(田島哲夫)_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의 이름이나 사건이 있다. 중앙난방의 건조한 방이나 라디오에서 흐르는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의 음악 소리, ‘안티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반대)’라는 벽돌 벽의 낙서, 코인 세탁소의 싸구려 유연제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기억과 함께 구체적인 사건이 선명히 의식 속에 떠오른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유학생으로서의 경험은, 그 때에 실시간으로 이해하거나 반응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만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돌아가 질문하는 기억의 지점이 되어 몸에 새겨져 있다.

 

   그 겨울은 특별한 겨울이었다. 199810월 와이오밍주 라라미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21세의 대학생 매튜 셰퍼드가 눈이 내리는 밤에 살해당했다. 셰퍼드는 대학에서도 게이임을 오픈하고 있었고, 그 밤은 우연히 그 지역의 바에 혼자 있었다. 같은 세대인 아론 맥키니(Aaron McKinney)와 러셀 헨더슨(Russell A. Henderson)이 셰퍼드에게 말을 걸었고, 집에 데려다 준다는 제안으로 맥키니가 운전하는 픽업트럭에 탔다. 그러나 차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마을 밖 들판 한가운데에 멈추었다. 거기서 셰퍼드는 차에서 끌려내려져 나무 말뚝에 포박당하고, 총부리로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한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18시간 후에 자전거로 그 곳을 지나던 같은 와이오밍 대학의 학생에게 발견되지만 그가 이송되었던 콜로라도주의 병원에서 5일만에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채 죽었다.[각주:1] 맥키니와 헨더슨은 셰퍼드가 발견되기보다도 전에 마을에서 히스패닉 젊은이 2명과 싸우는 중에 체포되었고 나중에 종신형에 처해졌다.

   내가 유학하고 있었던 안티오크 대학의 신문 디 안티오크 레코드(The Antioch Record)에는 나는 메튜 셰퍼드(I am Matthew Shepard)라는 사건의 개략을 전하는 서명기사가 1014일에 났다. 기사는 대형 미디어가 했던 보도를 요약한 것인데, 와이오밍 대학의 홈 커밍 퍼레이드에 셰퍼드 사건에 대한 항의자 약 450명이 참가했다는 것과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게이 활동가들이 촛불을 밝히고 셰퍼드를 추도하는 밤샘 모임을 기획했다는 것이 실렸다. 또한 한편에는 임신중절 반대파가 셰퍼드의 죽음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반혐오범죄(Hate Crime)법의 제정으로 레즈비언이나 게이에게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 등을 전하고 있다.[각주:2] 콜럼버스는 안티오크 대학에서 한 시간 정도인 곳에 있고 기사에 있는 1013일 밤샘 모임에는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셰퍼드 사건은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캠퍼스에서도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디 안티오크 레코드(1013)에 실린 한 학생의 발언에도 밝혀져 있듯이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로서 산다는 것은 모든 장소에서 항상 폭력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안티오크 대학의 퀴어 커뮤니티나 각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셰퍼드 사건과 같은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일상적인 대학생활 내의 폭력에 대해 소리를 높이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행동했는지 당시의 학내 신문과 나의 기억을 의지하여 살펴보고 싶다. 그들의 실천은 17년이나 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이성애중심주의와 LGBT의 불가시화 문제를 고찰할 때 중요한 시점을 제시하고 있다.

 

 

 

안티오크 커뮤니티와 퀴어센터

 

   안티오크 대학은 오하이오의 옐로우스프링스라는 인구 3,5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 있다. 마을의 중심가인 제니아 에비뉴를 따라서 도서관이나 작은 영화관, 여러 개의 카페 등이 있는데, 5분 정도 걸으면 마을을 벗어나 광대한 글렌헬렌의 숲에 다다른다. 거의 숲 속에 있다고 말해도 좋은 대학의 캠퍼스 중앙에는 19세기에 개교 했을 때 세워진 독일 뤼베크의 성마리엔 교회를 방불케 하는 탑이 있는 대학본부가 솟아 있고, 주위에 교실과 학생 기숙사가 흩어져 있다. 1998년 당시의 캠퍼스 학생 수는 신입생을 맞이하는 9월임에도 4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주말이 되면 차를 가진 학생들은 근처의 마을이나 쇼핑몰로 외출해, 나뭇가지 사이로서 얼굴을 슬쩍슬쩍 내비치는 다람쥐 모습이 사람보다도 더 자주 눈에 띄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바로 나누어주는 『안티오크 대학 서바이벌 핸드북(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의 서두에 안티오크는 대단히 독특한 대학인데 그 많은 대부분은 커뮤니티 정부(government)의 형태에서 연유한다.’[각주:3]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안티오크 대학 내 자치제도는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예를 들면 커뮤니티 정부는 대학의 관리 운영 부분인 AdCil(Administrative Council)과 학내 생활에 관한 입법 부문인 ComCil(Community Council)이라는 두 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AdCil은 이사 2, 대학 총장, 교원 대표, 커뮤니티 매니저(학생자치회장), 직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 직원 1, 교원 투표에 의해 선출된 교원 2, 학생 투표에 의해 선출된 학생 3명과 교원 2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성립된다.

   학생의 활동도 왕성하고 학내의 인권적 마이너리티의 상황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TWA(Third World Alliance), 성희롱·성폭력(sexual harassment)이나 섭식장애, 여성의 신체 이미지 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공간을 운영하는 여성센터 등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나는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간 10명의 유학생 중 한 명으로 8월 말에 오하이오에 도착하여 밀즈라는 학생 기숙사에서 신입생들과 섞여 생활을 시작했다. 교토에 있을 때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과 섹스워크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티오크에 와서는 영어가 어려운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수업은 피하고 인류학 코스를 이수하고 있었다. 학내에서 자주 눈에 띠는 퀴어센터의 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10월의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National Coming Out Day)[각주:4] 즈음부터이다. 앞에서 말한 『안티오크 대학 서바이벌 핸드북』에 따르면 퀴어센터는 게이나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그리고 섹슈얼 아이덴티티를 사회의 주변에 위치시키고 있는 사람들을 지원[각주:5]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룹으로 학내의 퀴어 이벤트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한 통의 투서

 

   셰퍼드 사건이 전 미국의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주는 1011일 일요일,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를 맞이해 안티오크 학내에서도 퀴어센터 기획에 의한 상영회와 댄스파티 등이 열린 주였다. 8일에는 학내 카페에서 퀴어 커피 타임이 있고, 9일에는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퀴어 댄스파티, 10일과 11일에는 퀴어 영화제가 개최되었다.

   9일 금요일 밤에 유니온 빌딩(학생 동아리 방이 모여 있는 건물)2층 댄스 공간에서 열린 파티에는 많은 학생이 여장이나 남장의 이성으로 변장하여 참가하고, 댄스가 특기인 학생은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퍼포먼스를 했다. 파티는 밤 11시경에 시작해 방으로 돌아간 것은 심야 2시경이었다. 당시 내 기록을 보자면 왠지 이상한 느낌이라고 휘갈겨 쓴 듯한 메모만 남아 있다. 이제 와서 읽어 보아도 분절화되지 않은 이 한 문장으로는 그 위화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여장한 신입생들이 떠들고 있는 모습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그 파티 며칠 후에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 게재된 안티오크는 퀴어친화적이지 않다라는 한 통의 투서가 그 때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투서는 퀴어 입장에서 학내의 이성애자를 중심으로 한 퀴어친화적인 포즈의 기만성을 비판하고 있었다.

 

 

 

커뮤니티에게

 

   모두 잘 들어. 나는 퀴어라고 안티오크에서 말할 때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안티오크는 퀴어친화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에 대해 말할 때나 퀴어 이벤트(확실히 준비한 기획, 그것이 단순히 모두에게 안녕 나는 다이크[각주:6]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인데도)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을 의뢰할 때 나는 불쾌해. 그건 말이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이성애(Straightness)를 가정하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하면 기묘한 것을 본 것 같은 눈을 해.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들을 퀴어친화적이라고 생각하고, 퀴어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냐.

   좋은 예 하나. 이번 주말은 내셔널 커밍아웃 데이였고, 원래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밖으로 나와 긍정되어야하는 날이었어. 그런데 내가 본 것은 전혀 정반대의 광경이었지. 친구들은 대학 캠퍼스에 분필로 퀴어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써서 비난당했어. 토요일 밤 퀴어 파티는 원래 퀴어의 역사와 문화의 축제여야 했어. (이렇게 써도 맨디와 리즈의 파티를 위한 노력에 감사! 고마워 소녀들!)

   내가 본 것은 파티가 퀴어를 성적인 존재로밖에 보지 않는 이성애자들에게 강탈당한 모양이었어.(별로 퀴어가 섹시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냐. 그래도 우리들은 그것만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먹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흡하고 있는 것도 아냐. 그런데도 우리들이 여기에서 퀴어에 대해 말하거나 축복하거나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성적인 존재일 때뿐인 듯 해. 도대체 그게 뭐야?) 일 년에 단 하루만 드레스를 입고 여()장 한다고 해도 너희가 퀴어친화적이 되는 것은 아냐. (내가 다닌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은 학교의 격려회 때 언제나 치어리더로 분장을 했었어. 그들은 젠장 틀림없이 퀴어친화적이 아니라 단순히 여성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가 말하는 것은 나쁜년이란 느낌? 난 그래. 나는 나쁜년 다이크이고, 그리고 죽을 만큼 화가 났어. 왜냐하면 모두들 전혀 공감적이지 않고, 안티오크에서 퀴어라고 말할 때 기분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야. 내가 퀴어 문제에 대해 말하면 모두들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는 듯해. 왜냐하면 안티오크는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에’? 누가 그렇대?[각주:7]

 

 

 

 

   이 투서를 한 A.로튼은 4학년생으로 기사에는 신념을 가진 다이크라는 서명이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투서의 일부분이지만 전체를 다 읽으면 댄스파티 때의 불쾌함은 어디까지나 일례이고 그 불쾌함은 일상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로튼의 투서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의 문제(‘나를 이상하게 본다’), 이성애 규범의 억압에 대한 불쾌(‘다들 아직 내가 스트레이트라고 가정한다’)가 빈번히 등장한다. 즉 애당초부터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지 않는 일상적인 현장에서 이성애주의가 가하는 억압의 체험을 로튼은 언어화하여 비판하고 있다. 더하여 퀴어를 성적인 존재로만 파악하려는 시선의 폭력성도 지적하고 있다.

   투서가 있고 8일 후인 1022, 로튼의 비판을 뒷받침하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두 남성이 키스하고 있는 퀴어센터 홍보 포스터가 스포트라는 기숙사 입구에 붙어 있었는데, 그 포스터에 패그즈(Fags, 게이자식들)’라고 낙서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기숙사 엘리베이터의 퀴어센터 포스터에는 나치스의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었다. 디 안티오크 레코드는 곧바로 호외를 발행하고 그 행위들을 커뮤니티가 대응해야하는 호모포비아라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

 

   기사에 의하면 낙서가 발견된 목요일 심야에 커뮤니티 매니저(학생대표와 같은 입장)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었고, 그 후 옐로우스프링스 경찰에게 알리는 한편, 대학의 경비원에게도 신고했다. 오전 115분부터 약 30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긴급회의도 이루어졌다.[각주:8] 23일 오후에 식당에 가자 40명 이상의 학생들이 원형으로 모여, 사건에 대한 항의집회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알 수 없었지만,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뭔가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사자에 의한 운동의 고양과 가시화

 

 

   신문의 호외는 퀴어는 침묵하지 않는다(Qeer will not be silenced)’, ‘견딜 수 없는 침해(Violation intolerable)’라는 타이틀로, 학내의 레즈비언이나 게이 당사자의 소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성애자도 나서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각주:9]는 주장도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신문이 전하는 메시지들뿐 아니라 23일 밤에는 차별낙서를 비판하는 전단(flier)도 등장한다. 전단은 지극히 심플하게 만약 퀴어의 단결을 호소하는 포스터에 하켄크로이츠를 쓴 것이 너무 재밌어 죽겠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엔 뻔뻔스럽게 내선번호도 적어라!’[각주:10]고 주장한다. 25일 일요일에는 안티오크에서 옐로우스프링스 마을로 향하는 반혐오(hate) 행진과 집회가 기획되어 있다.

   일련의 반혐오 액션의 고양은 1027일 커뮤니티 회의(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전학집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집회는 퀴어와 그 지지자에 의해 기획되었던 것인데, 30명의 멤버가 핑크 트라이앵글을 가슴에 붙이고 발언자로 참가했다. 200명에 가까운 참가자 앞에서 3학년인 K. 프랭크는 미국에서 LGBT가 피해자가 된 범죄통계를 소개하고, 교실에서 나갔다. 다른 멤버들도 교실의 여러 장소에 서서 역시 레즈비언이나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피해자가 된 사건의 메모를 크게 읽은 후 프랑크 뒤를 따라 나가, 마지막에는 회의 장소에 핑크 트라이앵글을 붙인 멤버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회의 장소에 남은 3학년생인 H. 골만이 이것이 퀴어인 사람들이 없는 세계다라고 발언한다.

   지금 당시의 커뮤니티 회의를 촬영한 비디오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어 영상을 본다. 맥그리거 홀의 갈색 오크나무 벽 앞에 선 그리운 얼굴, 얼굴, 얼굴. 이발에 실패해서 앞머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져 있던 나도 찍혀있다. 핑크 트라이앵글을 붙인 멤버가 한 명도 없어지고 고요해진 교실. 다시 문이 열리자 나갔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손을 이어 잡고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먼 사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퀴어는 아니고 트랜스젠더인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내가 그때보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들어 보면, 말하는 사람에 따라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고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퀴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이들 중 어느 말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해도 많은 발언자들이 그 아이덴티티를 심한 고통의 기억과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다. ‘나는 퀴어야. 그것 때문에 여동생은 학교에 가면 따돌림을 당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발언하는 교원. ‘나는 게이다. 그것은 내가 내 부친과의 관계가 이제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단 한명의 부모님인데.’ ‘나는 퀴어다. 지금은 그것을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 두렵다. 아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집회의 마지막에는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 투고를 한 A. 로튼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낭독하였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피억압자들 그룹은 각각 그룹끼리 대립하도록 하게 만들고, 자유를 구하는 싸움은 분열되어 왔다. 억압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들은 그런 고통으로 가득 찬 무익한 역사를 따라가면 안 된다. 이 액션의 목적은 퀴어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공유하고, 대립을 넘어선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다.”[각주:11] 이 말대로 커뮤니티 회의를 포함한 안티오크 학내에서의 반혐오 액션은 먼저 다양한 경험을 서로 말하는 것을 통해 이성애자도 포함된 커뮤니티 멤버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커뮤니티 안에서 생활하는 LGBT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험을 말하는 것은 당사자의 권리임과 동시에 이성애를 자명하게 생각하는 시선과의 직접적인 싸움이기도 하다. 경계 지어져 있는 당사자의 정신적 고립감을 불식시키는 것과 동시에 학생에 의한 에스코트 활동(정신적 신체적 위기를 느낀 학생이 전화를 하면 언제든 카운슬링의 트레이닝을 받은 학생이 찾아가서 대응하는 활동)이나 학생에 의한 학내 순찰 단체의 결성 등 물리적 의미에서의 지원도 적극적으로 실천되었다.

   이들 액션은 결과적으로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 가능한 공간의 확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9월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디 안티오크 레코드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발언을 하고, 기숙사의 벽돌 벽면에 안티 헤테로섹시즘(이성애중심주의 반대)’‘Qeers live here(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라는 두 개의 큰 그래피티를 그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학내 구석구석까지 남아 있었던 우리들은 여기에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았다. 나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 속에서 불가시화 되었던 것이 당사자의 발언과 행동을 통해 여기에서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부각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티오크로부터 멀리 떨어져

 

   처음으로 17년 전 미국에서의 체험을 다시 정리해보고 생각한 것은 그 때의 다양한 말하기와의 만남이 생활 속 이성애중심주의나 젠더 규범을 고쳐 묻는 하나의 원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사건을 확실히 쓰겠다고 생각했었는지 오려두었던 신문기사 조각도 골판지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번에 원고를 쓰게 되어서 실은 당시 캠퍼스에 있었던 다른 학생들을 찾아 그 때의 인상을 듣고 싶었지만, 시간의 제약이 있어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은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고, 보다 상세하게 인상을 말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시점의 의견으로 신문에 남아있는 커뮤니티 회의에 대한 감상을 두 개 소개하고 싶다. 교육학의 H. 랫슨 교수는 정말 훌륭하다. 우리들이 함께 행동할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회의 기획자들이 퀴어 커뮤니티 속에 있는 차이를 확실히 마주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했다. 통상 그런 차이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각각의 다른 말하기를 존중하는 형태로 집회가 기획된 것을 평가하고 있다. 2학년인 E. 칼리로는 ‘K가 방을 나갔을 때가 정말로 가슴에 깊이 박히는 듯한 순간이었다. 호모포비아를 나 자신과 가까운 문제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잘 알고 있는 그가 지독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것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그래도 그 경험은 나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라고 상상하는 것으로 가까운 친구와 호모포비아의 문제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각주:12] 신문에 소개된 것은 기본적으로 액션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인데, 이들 속에도 이성애중심주의를 커뮤니티에서 맞붙어야만 하는 문제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티오크라는 작은 커뮤니티의 이야기에서 일단 멀어져, 보다 큰 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1998년부터 17년 동안 LGBT를 둘러싼 법제도적 상황은 크게 변화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2009년에 섹슈얼리티와 장애를 이유로 한 범죄를 혐오범죄(Hate Crime)으로 규정하는 매튜셰퍼드법이 버락 오바마의 서명으로 성립되었고, 20156월에는 최고재판정이 동성결혼 금지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일본에서도 성적 마이너리티에의 차별을 금하고 이성간의 혼인관계와 같은 제도적 지원을 보장하는 남녀평등 및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진하는 조례가 시부야구에서 가결되어 올해 4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각주:13] 77일에는 동성혼 인권구제 변호단(LGBT 지원 법률가 네트워크 유지[有志])이 일본에서 동성혼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일변련(日弁連)에 인권구제 제기를 하고 있다. 다만 동성 간 파트너십의 확대에 대해 말한다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과 같은 당사자의 불가시성을 약하게 하는 계몽적인 가능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으로 이성애중심주의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다시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미국 유학을 끝내고 교토에 돌아와 얼마 지난 후에 사쿄구(左京区)에서 집 한 채를 빌려 대학 친구와 살기 시작했다. 16년간 주민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지금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겨울마다 히에이잔(比叡山)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아온, 지은 지 45년 된 2층짜리 집은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봄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방안에 금목서 향이 나고, 매일 아침 동틀 녘에는 현관 쪽에서 들고양이가 싸움을 하는 한가로운 환경이다. 1층에는 이 집에는 동성애자가 살고 있습니다라는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다. 옛날 이 집의 주민이며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었던 게이 친구가 10년 정도 전에 쓴 것이다. 함께 생활하면서 어떨 때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어떨 때는 버려진 개를 돌보거나, 때로는 고양이 간병을 하면서 많은 말을 나누었다. 함께 살기 시작했던 즈음에 그는 대학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는 것에 대해 예를 들어 내가 여기에 안주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층 더 교묘한 클로젯(closet, 벽장)일지도 몰라. 일상적으로 게이로 있으려면 커밍아웃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보다 신중한 클로젯(closet)과의 대결이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각주:14] 클로젯(벽장)이란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가 둘러싸인 어두운 공간의 비유이지만, 설령 커밍아웃 했다고 해도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이나 다른 장소를 방문할 때마다 게이인 것이 상정되지 않는, 불가시화의 폭력과 계속 대치해야한다는 어려움이 여기에 서술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쉐어하우스라는 작은 커뮤니티에서도 다르지 않다. 친한 관계 속에서 게이라는 것을 전해도 이성애중심주의와 젠더 규범에 대한 비판이 공유되지 않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게이로서 살아온 경험을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면, 그곳은 다시 새로운 벽장이 되어버린다. 그런 문제의식도 있고,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기도 해서, 그가 살고 있었던 7년간은 생활 속에서 이성애중심주의나 섹슈얼리티, 젠더에 대한 대화를 반복하는 매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대화는, 이 장소가 LGBT의 소외나 성차별이 없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현재의 내 생각과도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

   지금도 섣달그믐이 되면 그도 포함해 과거의 이 집 주민과 친구들이 집에 모인다. 섹슈얼리티를 오픈하고 있는 사람, 하지 않고 있는 사람, 전혀 위화감 없이 이성애 규범을 살고 있는 사람, 젠더 트러블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 갓 결혼한 사람들 등이 같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TV를 보거나, 해넘이 소바를 먹거나 한다. 나는 부엌에 서서 요리를 만들 때가 많지만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때때로 귀를 기울인다. 당사자의 발언이 무화되지 않도록, 일반화되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말을 찾을 때도 있다. 결코 한 모양이 아닌 다양한 이야기 속에 솟아나는 당사자의 경험과 그 이야기를 들었던 때의 감촉,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는 일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상황을 바꾸어 가는 하나의 힘이 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 이 글은 일본근대여성사 연구자인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현대사상(現代思想)201510월호에 발표한 퀴어가 여기 살고 있다-불가시화에 저항하며(Queers live here-不可視化して)를 옮긴 것이다. 최근의 저서인 遊郭のストライキ: 女性たちの二十世紀序説(共和国, 2015)가 주목 받고 있다. 얀베 유우헤이는 모교인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 근무했던 2010년 겨울에 1년씩 3년까지밖에 계약할 수 없는 대학의 고용상한제에 대해 젊은 연구자들이 쓰고 버려진다.”라며 문제제기를 하고, 고용한도 철폐를 위해 동료 5명과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한 바 있다. 지금은 효고현 내에 있는 오테마에 대학 학습지원센터에서 학생 상담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北海道新聞>, 2015. 5. 3 참조. http://dd.hokkaido-np.co.jp/cont/books_visited/2-0026968.html).-옮긴이

 

 

* 이 글은 『문화과학』겨울 84호(2015)에 실렸습니다. 

 

 

  1. 1) The New York Times, 1998. 10. 10, 13. [본문으로]
  2. 2) K. Franck, “Gay student killed in Wyoming Hate Crime: I am Matthew Shepard,” The Antioch Record, 1998. 10. 14(신문에 실린 기사의 서명은 실명이었지만, 발표 매체가 적은 부수의 학내 신문인 것, 현재 어떻게 LGBT 활동과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집필자, 발언자 모두를 가명으로 하였다. 일본어로의 번역은 모두 필자가 했다). [본문으로]
  3. 3) 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 1998-1999, 8. [본문으로]
  4. 4) 1987년에 워싱턴DC에서 레즈비언과 게이 퍼레이드를 한 날로, 그 다음해 1988년에 이를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본문으로]
  5. 5) Antioch College Survival Handbook 1998-1999, 77. [본문으로]
  6. 6) Dyke. 레즈비언 용어 중 하나. 원래 남성적 특징이 강한 레즈비언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이 단어에 대한 의미 투쟁을 통해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와 함께 여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옮긴이 [본문으로]
  7. 7) A. Lawton, “Antioch is not queer friendly,” The Antioch Record, 1998. 10. 14. [본문으로]
  8. S) Holman, “Anti-Queer Graffiti Found in Spalt,” The Antioch Record(special edition), 1998, 10. 23.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즉시 경찰에 알렸다는 사실로도 셰퍼드 사건 이후의 안티오크 대학 내의 위기감 고조를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9) The Antioch Record(1998. 10. 23)에 실린 C. McArleton의 발언. [본문으로]
  10. 10) The Antioch Record, 1998. 10. 24. [본문으로]
  11. 11) The Antioch Record, 1998. 10. 28. [본문으로]
  12. 12) 두 발언 모두 The Antioch Record(1998. 10. 28)에서 재인용했다. [본문으로]
  13. 13) 한편, 이 조례에는 핑크워싱(Pinkwashing, LGBT친화적인 자세를 어필하여 그 외의 다른 인권침해나 폭력을 은폐하는 것)적 측면이 있다. ‘다양성 존중’을 동성 간 파트너십의 근거로서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부야구는 2014년 말에 구내에 있는 미야시타공원(宮下公園)을 폐쇄하고 야숙자들을 완전히 내쫓았다. [본문으로]
  14. 14) ナカタニカウヤ, 「セイカ大における‘日常’としてのクローゼット」, 『イツカノユウグレ』 創刊号. 『イツカノユウグレ』는 주로 교토 세이카 대학 내에서 배포하고 있는 무가지로, 창간 이후 현재까지 필자가 편집을 직접 하고 있다. [본문으로]

 


 

 

 

 

 

 

<<實踐文學>>, Seoul, Korea, November, 2015

 

 

 

 

りなき相互作用デモ

 

 

 

 

クゥンミョンア(權明娥)

 

翻訳 : 田島哲夫

 

 

 

 

 

 

 

1.経緯

 

 

本稿日本についてのではない日本専門家でもない筆者日本についてのれるわけもなくここでろうとするのは日本状況についての評論分析ではない本稿つの経緯もうつの経緯りとなりまたいてたなりのをつくりだしそうしたりをわす集合体としての歴史がつくられる過程についてのつの報告であり断章であるこの歴史釜山研究集団アプコムと日本高円寺東日本大地震京都市役所前戦争法案するさまざまなのデモをめぐるみからまる紙幅られているためそのなかのきわめて一部のみを簡略紹介したいと

 

にも紹介されているシルズ(SEALDs)のデモの現場れば学生たちが自己紹介をしてから意見表明する姿ることができる自分でありこれまでデモについてどんなえをもっていたか政治についてや変化についてどうえてきたかあるいはなぜ関心がないのかところでまさにそうした自分自身がどんな理由からまさにここにっているのからはなぜこうしたりをするのかデモの歴史縁遠日本において現在のように数万人デモができた要因はいろいろとあるだろうとりわけ重要要因るにデモがらの経緯公的またそうしていの経緯わすびの発明したところにあるようにえる

 

日本国会前のデモにする報道ほとんどからカメラでとらえた数万人群衆写真せているデモについて報道してこなかった日本巨大メディアも数多くの人波焦点わせていた日本巨大メディアがデモ何人なのか学的分析しつつデモ主催者側した参加者数誇張されたものだと躍起になっている姿デモについての巨大メディアとデモとのとてつもない視角をあざやかにしている

 

東日本大震災以降首相官邸前国会前まったどこにもされなかったが日本全地域からまってきた発再稼働反対」「情報公開んだそして安保法案撤のためにあちこちからまり政府かってらの要求えた数万人群衆というような量的規模として合算できないらは皆自分なりの事情経験じてまたいにらの言葉くためにまりはじめ依然集まっている二万人なのか二十人なのかが重要でない理由はそのゆえである二十人まってもデモをけているところがここ日本でのデモがもつ重要意味である

 

それゆえ本稿でも経緯をまずることでめたいとった日本経緯じてそうやってまたさんの経緯へとあらたなりと歴史りだす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る

 

ソウルのさまざまな人文空間釜山びつける

 

ファシズムを専攻する研究者として日本はファシズムの研究資料つの書庫であった対案人文学運動関心をもちまた釜山へとにとって日本意味わった釜山もゆかりもなかった移住者として釜山ろしまた地域研究者らに拠地となる対案空間をつくろうとさまざまなモデルをめたそうして対案研究集団アプコムをつくったアプコムはげようつのとしたそれは地域差別構造学力差別内面化された地方大研究者らと差別えていく自己肯定をともにつくりたいからであったソウルのさまざまな人文空間釜山びつけるみは成功失敗したソウルへのはチムのメンバれさせしんどくさせた試行錯誤この物理的距離感からもたらされるものだけではないことにどうにかづくことができた

 

歓待

 

ソウルと釜山往復する移動説的地域差別構造的心情的全身むことになったソウルのだちと仲間たちはアプコムをから歓待してくれたものの歓待だけではをのりえ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かえって歓待されているためにじるそっくりそのままメンバらの自分問題になってしまいをただ全身むしかなかった

 

クォンミョンアという個人ではなくアプコムの一構成員として行動すべきという強迫にちかいえをもっていたためメンバらとのソウルれはにそのまま転移したソウルれの理由はそれだけではなかった膨大資料基盤とする研究批評的実践とが自然体質していたため釜山でもめはこうした研究実践をつくったしかしソウルでとはなり資料すための時間的物理的消耗があまりにきかったソウルへ資料しにくことは地方とソウルとの格差じるに十分だったまたりの先輩仲間後輩たちがどんな資料論文使っておりそれは論文続編でありどの資料どこでセミナがあるといった協業分業とでなっている学問ソウルのみが独占しているのだということをじた

 

学問的介入説的介入のためのかねばという叱咤学問についての実感がないという地域研究者らのきを実際自実感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いまもその実感じに理解できるとはえていないまた資料基盤とした研究共同体をよりゲリラ批評的共同体へと転換したのはこうした理由きいまたアプコムのメンバとともにソウルをねることをやめた

 

高円寺311 そして革命のバタフライ効果

 

そして日本対案空間ねるしたソウルと釜山その地域対案空間いたやり踏襲したソウルの対案空間はよくれれているなのだが釜山地方対案空間はそうではない交換した情報ようやく連絡先しだしねてってインタビュしてらの活動共有するそうしていてめてったのが高円寺グルプだった高円寺グルプをはじめとする日本さな空間いているとき311発生した東日本大地震きた2011アプコムはより以上頻繁日本ねた国人日本からするのにしく日本する怪談(流言)であふれかえっていたたちはできるだけ日本くことをんだそこにはたちの苦境をともにかちあえるがいたからでありなによりらがんでいくをともにしたかったためである

 

 

 

 

 

 

 

こうした個人的をまずることは実際本稿において日本についての論議がいかなる脈絡背景にしているかをしくらかにしておきたかったからである日本安保法制批判現場についてはくの論議がなされているのだが、「革命のバタフライ効果とは論理的観的知識分析とはなる次元地平すとわれるからである安保法制批判のために数万人国会前まりデモをげている現在日本奇跡のような状況あるにおいてそれぞれの経緯経験ばれたからこそ可能だったとえる

 

 

 

 

2.わす集合体たな歴史くということ

 

 

歴史学者である小熊英二監督したドキュメンタリ首相官邸2015月中旬日本全公開された産業映公開とはなり各地域のさまざまな場所自主上映めた自主上映とは共同体上映形式である日本のようにマルチプレックス画館などはくないしかし会員制されているさな独立映画館健在しているとえる京都でも201510から立誠劇場上映まった立誠劇場少子高齢化により廃校となった立誠小学校改造した文化空間である1024首相官邸第一回上映があったこの日立誠劇場客席20から80まで男女問わずまった

 

 

 

 

 

 

 

 

 

 

2015.10立誠劇場

ドキュメンタリ映画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ながらためをつき安堵いをかちあった小熊英二えるには』『きてってきたなどででもよくられている歴史学者小熊英二はホムペジでドキュメンタリ制作について以下のようにらかにしている

 

この来事したいとった自分歴史家であり会学者いま自分がやるべきことはかといえばこれを後世すことだとった

 

 

ったことはなかった画作りに関心ったこともなかったしかし過去資料断片めてつの世界りあげることはこれまでの著作でやってきたうことになる対象文字であるか映像であるかはこのさい問題ではなかった

 

 

いうまでもないが一人った作品ではない同時代現場撮影していたびとインタビュじてくれたびとがすべて無償協力してくれた

 

 

なによりこの主役っているびとすべてだそのびとは性別世代地位国籍出身地志向もばらばらだそうしたびとがつのにつどう姿稀有のことであると同時しいとった

 

 

そうした奇跡のような瞬間つのめったにれるものではない歴史家だからそのことをっているがやったことやろうとしたことはそのような瞬間したというただそれだけにすぎない

 

いろいろな見方のできるだと率直感想しあってほしい意味えるのは観客でありその集合体としてのであるそこからあなたにとってまたにとってしいことがまれるはずだ

(小熊英二監督言葉」『首相官邸

http://www.uplink.co.jp/kanteimae/director.php

 

 

災難経験, 地方, デモ

 

安保法案反デモは東京都心である国会だけでなく日本全域においてしているのマスコミは東京国会前のデモに焦点わせているがさなかれるデモの存在もまた重要である日本においてデモが民主主義重要として登場したのはまさに東日本大地震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経験びついているこの災難してさまざまな問題提起されたのだが災難経験ですら東京をはじめとする中央専有されてしまうという問題視された

 

2015数万人群衆まった国会前のデモについての便りをえる本稿において2011東日本大地震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についてのりへとるのはこうした理由からである小熊英二首相官邸はデモを迷惑なものと黙的合意とつきうことにれていたびと(日本語という表現はこうした会的雰囲気典型的内包している)がどうやってデモへしていったかについての歴史的記録である。『首相官邸日本においてこの何年間デモをデモをしてえられるという囲気がどのようにづいたかについての研究作業でもある

 

"怪談"から知識主体となりまで

 

東日本大地震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以降政府情報統制により情報交換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初期には被曝についての怪談(流言)まりもしたではにこうした怪談(流言)まっているしかし怪談(流言)だけではすることはできないするためにはそしてくためには観的具体的情報必要である東北地方びとは首相官邸東京電力蒐集した情報具体的要求事項政府対策追及したこうした過程ながらデモは情報知識とをかちあい続可能とする具体的対策追及するとなったこうした過程において知識以前とはなるへとかうしかなかった知識主体となり知識かちあうがデモの現場となったのである

 

パトスを噴出知識生産共有

 

 

 

 

 

 

 

 

 

 

 

日本のデモの現場はそうしたでパトスを噴出するというよりは知識生産共有となった過去全共闘時代激烈なデモが知識基盤としつつもパトスを噴出するであったとすれば今日日本のデモは知識かちあうとなったのであるこれはきわめて重要地点である日本のデモの現場見物したびとがしくなかったとかあまりに真面目とかのせるのもこうした脈絡からえてみることができる

こうした変化つめでのデモ文化やデモにする立場比較えてみもしたもちろん歴史的局面条件なる日本同一線上において比較するのはしいただ日本においてデモについての論議つめながらデモと民主主義関係をパトスと知識かちあい急進性続性単一立場主導性参加可能性という脈絡からもう一度論議していくくとはきわめて重要だとえるようになった

 

 

不安解消するための知識生産共有熱情

 

日本でも2011不安恐怖れとみという情動によりへと進出することになったしかしデモがパトスを噴出するにとどまるされたすることはできないもちろんこれは二項対立的なものではないくのがデモをしてそしてデモをできるということだけでも不安恐怖から変化させられるたな情動へと移行することができたと証言しているそうしたから東日本大地震以降日本におけるデモは不安恐怖情動いにかつことによりかえって変化させともにきぬかねばならないという変化熱情へと移行させる媒介となったとえるそしてこうした移行から不安解消するための知識生産共有熱情重要役割たしたとられる

 

2011模索

 

東日本大地震以降デモがまりしていく過程そうしたから知識生産かちあうなるやり専有する過程でもあったつの場面げてみよう2011東京強制節電施行中であり焦熱地獄のようにかった東京新宿には模索というびたじの書店がある1970年代につくられた模索表現言論活動様性保障ということを目標としているとくに表現言論活動様性保証するにはこれを媒介するメディア流通様性をもたせることが不可欠です模索はこの様性一役うため取次店した主要出版流通トにするもうひとつの流通をめざし自主流通出版物ミニコミ主要っています」。

http://(http://www.mosakusha.com/voice_of_the_staff/)

 

東日本大地震以前模索にははなくなった会科学書店たような役割たしてきた戦体制とはなり日本対的思想自由保障されてきたのはであるもちろん消費資本主義強力日本における思想様性もまた資本さえつけられてきたそれでも歴史をもちどうにかってきた出版社書店ネットワクは囲気があれこれ変化するなかでも基底にしっかりとろしている模索もそのつである

 

東日本大地震以降模索には自主出版物発的増加した。「デモのやり」「ポスタといったデモの基本方法らせてくれるさな冊子からさなまりがつくった出版物から殺到してきている模索には1970年代スタイルの古典的会科学書籍製本されてもない昭和時代青年についての博士論文にした著書同人誌オタクたちの小冊子デモにはじめて参加したらつくった上記デモのやりといったんでいる

首相官邸にも登場する首都圏反原発連合のミサオレッドウルフもイラストレだったもともと青森県核燃料再処理事業反対運動をしていた彼女2007てのしてというために」」活動する営利団体NO NUKES MORE HEARTSをつくることになったイラストレだった彼女はこうした活動らせるためにポスタ内状ロゴなどをつくり団体のそうした仕事をも手助けしながら仕事をやめ活動家としての専念することになった(直接行動首相官邸前抗議」 』クレヨンハウス, 2013)

 

強烈なイメ えない努力とネットワ

 

日本のデモにくの関心をもつことになったのは数万人まった国会前のデモという強烈なイメジのためでもあるいつもそうであるようにこうした強烈なイメジがると関心そうだとすればきこうしたイメジをつくるために努力すべきなのかそれも必要なことであるしかし日本においてこの数年間のデモの歴史れば実際重要なことは強烈なイメジよりかちあうためのえない努力とネットワクだとえるだろう1970年代につくられた模索はほとんど注目びないまま不思議なほどその生存してきた模索があったから自主出版することができめてデモにすためのたに小冊子をつくって配布したい模索をその媒介にすることができたもちろんネットをじた流通配布重要役割たしたがネットはまたそれだけ情報消滅させる

 

ってきたネットワクがたにじた変化熱情れを媒介する窓口となる

 

ほとんどのびとのにつきもしないが対案会変化しつつ基底ろしどうにかえてきたあるネットワクとメディアがたにじた変化熱情れを媒介する窓口となるあるでは今日日本においてデモは活用できるてのメディアと表現方法をあらたに専有発明するとなったとえる国籍もジャンルも超越ともにじるての道具をデモの表現ジャンルとして発明した高円寺グルプのデモもまたこうした事例だとえるだろう

なロゴと個性あふれるデモ方式によりあらためて注目めているシルズは実際こうしたデモ歴史のなかでづくられたものである最近ルズのデモの方法えをかちあい討論する書籍挙出版されている書店にはルズによる選書用意されてもいるこのようにメディアと表現方法をあらたに発明しながらデモはしている

 

 

 

 

 

 

 

 

 

 

 

 

3.りとりない連結発明

 

 

どうかすると以上日本専門家やどなたかには臨時訪問者異邦人である筆者誇張された希望的りとることもあろう多分そうかもれないくもない時間のなかったのは日本日本というよりは出口のない状況においてただ自分なりに全力くしているびとだったからである

 

そしてそれはったことのように状況とをんでいたりのかけらにぎない失敗強固体制による咀嚼のやむことのない反復関係絶望らへの悔恨自虐経緯はそのように足踏みをしているくもない日本滞留づいているたしてってができるのかという絶望的質問きカッコにれてきたそのわり全力くしているをのぞき希望対案めて一人でもくのおうとめてきたそれゆえあるにはあまりにきくったそうやって全力くしているびとのわしまたえながらはじめて経緯なるりへとす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らが歴史をつくるという自意識にはさないが結局そうやって歴史いていくらのりをしてめて歴史とはたんにめぐりゆくものではなくしていくものだというさな結末反芻してみる

 

 

 


 

 

 

 

 무한한 상호작용, 데모

 

 

 

 

 

권명아

번역 : 타지마 테츠오

 

 

 

 

 

 

 

1. 사연을 들려주다

 

 

이 글은 일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전문가도 아닌 필자가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지도 않으려니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일본 상황에 대한 논평이나 분석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연과 또 다른 사연이 만나서 이야기가 되고, 또 이어져서 새로운 이야기 연쇄를 만들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집합체로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보고이자 단상이다. 이 역사는 와 부산, 아프콤과 일본, 코엔지와 동일본 대지진, 교토 시청 앞과 전쟁법안을 반대하는 여러 형태의 데모를 오가는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그중 아주 일부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도 많이 소개된 실즈(SEALDs: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 - s)의 시위 현장을 보면 대학생들이 자신에 대해 소개하면서 의견을 표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고, 그간 데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고, 정치에 대해서나 사회 변화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 혹은 왜 관심이 없었는지, 그런데,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이 어떤 이유로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지. 그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데모의 역사가 희귀한 일본 사회에서 지금처럼 수만 명이 모인 데모를 지속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중요한 요인은 내가 보기에 데모가 자신의 사연을 공적으로 말하고, 또 그렇게 서로의 사연을 주고받는 연결의 장을 다양하게 발명한 데 있다고 보인다.

 

일본 국회 앞 시위에 대한 한국 보도는 거의 하늘에서 카메라로 잡은 수 만 명의 군중 사진을 내걸고 있다. 데모 보도를 하지도 않던 일본 거대 미디어도 주로 수많은 인파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본 거대 미디어가 시위대가 몇 명이었는가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으면서 시위대 측에서 내놓은 군중 수가 과장된 것이라며 열을 올리는 모습은 데모에 대한 거대 미디어와 시위대 사이의 엄청난 시각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동일본 대진재 이후 수상 관저 앞과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 어디도 기록되지 못했지만, 일본 전 지역에서 모여 원전 재가동 반대’, ‘정보 공개를 외친 무수한 사람들, 그리고 안보법안 철폐를 위해 여기저기 모여 정부를 향해 자신의 요구를 전한 사람들은 수만 명의 군중과 같은 양적 규모로 합산될 수 없다. 이들은 모두 각자 자신 나름의 사정과 경험과 이력을 통해, 그리고 서로 그 말을 전하고 듣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고, 계속 모이고 있다. 2만 명이냐 20명이냐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20명이 모여서도 데모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 지금 여기의 일본에서의 데모가 가진 중요한 의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나의 사연을 먼저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내가 보고 만난 일본은 나의 사연을 통해 이어지고 그렇게 또 여러분의 사연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이야기와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전공하는 연구자로서 오랜 시간 일본은 파시즘 연구 자료를 찾는 하나의 서고였다. 대안 인문학 운동에 관심을 갖고, 또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나에게 일본의 의미는 변하였다. 부산에 아무런 연고도 갖지 못한 이주자로서 부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또 지역 연구자들에게 터전이 될 만한 대안 공간을 만들고자 여러 모델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대안연구모임 아프콤을 만들었다. 아프콤은 초기에 삶의 반경을 넓히자를 하나의 지향으로 삼았었다. 그것은 뿌리 깊은 지역 차별 구조와 학력 차별을 내면화한 지방대학연구자들과 차별의 벽을 넘는 자기 긍정의 힘을 함께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여러 인문 공간과 부산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다. 서울을 다녀오는 일은 팀원들을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이 피로가 물리적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이동은 역설적으로 지역 차별의 구조적이고 심정적인 을 온 몸으로 앓게 했다. 서울의 친구와 동료들은 아프콤을 진심으로 환대해주었지만, 환대만으로 을 넘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환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벽을 느끼는 피로는 고스란히 팀원들의 자기 문제가 되어버렸고, 현실의 장벽을 그저 온 몸으로 앓는 수밖에 없었다. ‘권명아라는 개인이 아니라, 아프콤의 한 구성원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팀원들의 서울 몸살은 내게도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아니 서울 몸살의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연구와 비평적 실천을 자연스럽게체화하고 있었기에 부산에서도 처음에는 이런 식의 연구와 실천의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와 달리 자료를 찾기 위한 시간적, 물리적 소모가 너무나 컸다. 서울로 자료를 찾으러 가는 일은 지방과 서울의 격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 주변의 선배 동료 후배들이 어떤 자료로 무슨 논문을 쓰고 있고, 그게 누구 논문의 후속편이고, 어느 자료가 어디서 세미나가 있고 하는 식의 협업과 분업으로 이뤄진 학문장이란, 서울만이 독점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학문적 개입, 담론적 개입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나의 질타에 학문장, 담론장에 대한 실감이 없다는 지역 연구자들의 한탄을 사실 실감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 실감을 내가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 자료를 기반으로 한 연구 공동체를 좀 더 게릴라적인 비평적 공동체로 전환한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그리고 아프콤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안공간을 찾아 길을 나섰다. 서울과 부산 여타 지역의 대안 공간을 찾아다니던 방법을 이어나갔다. 서울의 대안 공간은 잘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부산이나 지방의 대안공간은 그렇지 않다. 입소문과 알음알음의 정보를 통해 겨우 연락처를 알아내고 찾아가서 만나고, 인터뷰를 통해 기록하고 그들의 활동을 공유한다. 그렇게 먼저 만난 것이 코엔지 그룹이었다. 코엔지 그룹을 비롯하여 일본의 작은 공간들을 만나가던 도중 3. 11이 발생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2011, 아프콤은 어느 때보다 더 자주 일본을 찾았다. 외국인들이 일본을 떠나기 바쁘고,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괴담이 넘쳐나던 시간, 우리는 가능한 더 일본에 자주 가는 길을 택했다. 거기에 우리의 곤경을 함께 나눈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사실 이 글에서 일본에 대한 논의가 어떤 맥락을 배경으로 하는지를 조금은 밝히고 싶어서였다. 일본의 안보 법제 비판의 현장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혁명의 나비 효과란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지식 분석과는 다른 차원의 지평을 지시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안보 법제 비판을 위해 수만 명이 국회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는 현재 일본의 기적과 같은상황은 어떤 점에서 각자의 사연과 경험이 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 이야기를 나누는 집합체: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것

 

 

역사학자인 오구마 에이지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수상관저 앞에서>20159월 중순 일본 전역에 개봉되었다. 상업 영화의 개봉과는 다르게 각 지역의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주상영을 시작했다. 자주 상영이란 한국의 공동체 상영과 같은 형식이다. 일본은 한국처럼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이 많지 않다. 하지만 곳곳에 회원제로 운영되는 작은 독립 영화관이 아직은 건재한 편이다. 교토에서도 201510월부터 리쎄(立誠) 극장에서 상영이 시작되었다. 리쎄 극장은 고령화로 인해 폐교된 리쎄 초등학교를 개조한 문화 공간이다. 1024일은 <수상관저 앞에서>의 첫 상영회가 있었다. 이날 리쎄 극장의 객석은 20대에서 80대까지, 남녀를 막론한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한숨짓고 울고, 안도감을 나누었다. 오구마 에이지는 사회를 바꾸려면이나 일본 양심의 탄생등으로도 한국에 잘 알려진 역사학자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홈페이지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나는 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싶었다. 나의 임무는 이 사건을 포착해서 미래 세대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감독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영화 작업에 대해 지금까지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책을 쓰면서 나는 항상 과거의 역사 자료의 조각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재조합하곤 했다. 이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 독특한 사건을 들려줄 수 있는 자료가 문자인가 영상인가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 필름을 혼자 힘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시대의 현장을 기록한 수많은 독립 제작자들은 그들의 필름을 내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뜻 응해주었고, 전 수상조차 이 작업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내가 보기에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스타이다. 그들은 젠더, 세대, 계급, 출신, 지위, 국적 지향 등이 다 다르다. 이들이 항의를 하기 위해 수상 관저 앞에 함께 모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흔치 않은,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한 국가나 사회에서 이러한 순간이 발생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순간이다. 나는 역사학자이고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은 다만 이 이례적인 순간을 포착해서 기록하는 그것뿐이다.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옆에 있는 사람과 영화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을 나눠주시기 바란다.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관객이고, 그 관객의 집합체가 사회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에서부터 당신에게도 또 사회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 발생하리라 믿는다. (오구마 에이지, <감독의 말> <수상관저 앞에서> 홈페이지, http://www.uplink.co.jp/kanteimae/director.php, 번역 필자)

 

 

 

안보법안 반대데모는 도쿄 중심가인 국회 앞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에서 다양하게 지속하고 있다. 한국 언론은 주로 도쿄의 국회 앞 시위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전국 곳곳, 작은 동네마다 열리는 데모의 존재 역시 중요하다. 일본 사회에서 데모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형식으로 다시 등장한 것은 바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 사고의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재난을 통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제기되었지만, 재난의 경험조차 도쿄를 비롯한 중앙의 목소리에 전유 되어버린다는 점이 강력하게 문제시되었다.

 

2015년 수만 명의 군중이 모인 도쿄 도청 앞 데모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이 글에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구마 에이지의 <수상 관저 앞에서>는 데모를 민폐로 여기고, 사람들의 암묵적인 합의를 묵묵히 따라가는 데 익숙했던 일본 사람들(일본어로 공기를 읽는다.’는 표현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전형적으로 담고 있다.)이 어떻게 데모로 나아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수상 관저 앞에서>는 일본 사회에서 지난 몇 년간 데모를 지속하고, 데모를 통해 사회를 변화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 작업이기도 하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 이후 정부의 정보 통제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모으고 나누어야만 했다. 초기에는 피폭에 대한 괴담이 퍼지기도 했고, 한국에는 주로 이런 괴담들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러나 괴담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동북 지방 주민들은 수상 관저 앞에서, 동경 전력 앞에서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요구 사항과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데모는 정보와 지식을 나누고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장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지식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두가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되고 모두의 지식을 나누는 장이 데모 현장이 되었다.

 

 

 

 

 

 

 

 

 

 

 

 

일본의 데모 현장은 그런 점에서 파토스를 분출하는 장이라기보다 지식 생산과 공유의 장이 되었다. 과거 전공투 시대의 격렬한 데모가 지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파토스를 분출하는 장이었다면, 오늘날의 일본의 데모는 모두의 지식을 나누는 장이 된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일본의 데모 현장을 구경한 한국 사람들이 강력하지 않다거나 너무 진지하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한국에서의 데모 문화나 데모에 대한 입장들을 비교해서 생각해보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 국면이나 조건이 다른 한국과 일본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 사회에서 데모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데모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파토스와 지식의 나눔, 급진성과 지속성, 단일 입장의 주도성과 모두의 참여 가능성이라는 맥락에서 다시금 논의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2011년 사람들은 불안, 공포, 두려움과 원한이라는 정동으로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데모가 파토스를 분출하는 장에 그치는 한, 파괴된 삶을 지속해나갈 수가 없다. 물론 이는 이항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데모를 통해서, 그리고 데모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동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데모는 불안과 공포의 정동을 서로 나눔으로써 오히려 삶을 변화시키고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변화의 열정으로 이행시킨 매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행에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지식 생산과 공유의 열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데모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모이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런 점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나누는 방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20118월 도쿄는 강제 절전 시행 중이라 불지옥처럼 뜨거웠다. 도쿄의 신주쿠에는 모사쿠사(模索舎)라는 허름한 서점이 있다. 1970년대 만들어진 모사쿠사는 표현과 언론 활동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표현과 언론 활동의 다양성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이를 매개하는 미디어와 유통의 다양성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모사쿠사는 이러한 다양성을 지키는 역할의 하나로서 중개점을 매개로 한 주요출판물 유통 루트에 대항하는 또 다른 유통 루트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자주 유통 출판물을 취급하고 있다." (http://www.mosakusha.com/voice_of_the_staff/)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모사쿠사는 한국에는 이제 없어진 사회과학서점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냉전 체제가 계속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상대적으로 사상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어 온 게 사실이다. 물론 소비자본주의의 힘이 강력한 일본에서 사상의 다양성 역시 자본의 힘에 짓눌려있다. 그런데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어렵게 살아남은출판사, 서점, 네트워크는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와중에도 사회의 기저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사쿠사도 그 중 하나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모사쿠사에는 자주 출판물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데모하는 법”, “포스터 만드는 법등 데모의 기본 방법을 알려주는 작은 소책자부터 작은 모임들이 만든 출판물들이 전국에서 쇄도했다. 모사쿠사에는 1970년대 스타일의 고전적인 사회과학 서적과 막 출간된 쇼와시대 청년에 대한 박사 논문 저서와 동인지 오타쿠들의 소책자, 데모에 처음 나선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데모하는 법> 같은 책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수상 관저 앞에서>에도 등장하는 수도권 반원발(反原發)연합의 미사오 레드월프도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원래 아오모리 현의 핵연료 재처리 사업 반대 운동을 했던 그녀는 2007모든 핵에 대해 ‘No라고 말하기 위하여활동하는 비영리단체 “NO NUKES MORE HEARTS”를 만들게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였던 그녀는 이런 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포스터나 안내장, 로고 등을 만들고 다른 단체의 이런 작업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원래 직업은 그만두고 활동가로서의 삶에 전념하게 되었다.(直接行動, <首相官邸前抗議>, 크레용 하우스, 2013)

 

일본의 데모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만 명이 모인 도쿄 도청 앞 데모라는 강력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강력한 이미지가 사라지면 사람들의 관심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계속 이러한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그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난 몇 년간 데모의 역사를 보면 사실 중요한 것은 강력한 이미지보다, 지속하고 나누기 위한 보이지 않는 무수한 노력과 네트워크라 할 것이다. 1970년대 만들어진 모사쿠사는 거의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신기할 정도로 생존을 지속해왔다. 모사쿠사가 있었기에 자주 출판을 지속할 수 있었고, 이제야 비로소 데모에 나가기 위해 새롭게 소책자를 만들고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모사쿠사를 매개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빠르고 손쉬운 유통과 나눔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인터넷은 또한 그만큼 손쉽게 정보를 소멸시킨다.

 

거의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지만, 대안과 사회 변화를 지향하면서 사회의 기저에 뿌리를 내리고, 어렵게 버텨온 오래된 네트워크와 미디어가, 새롭게 발생한 변화의 열정과 흐름을 실어 나르고 매개하는 창구가 된다. 어떤 점에서는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데모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미디어와 표현 방법을 새롭게 전유하고 발명하는 장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적도 장르도 초월하여 소리를 내고 흥을 나누는 모든 도구를 데모의 표현 장르로 발명한 코엔지 그룹의 데모 역시 이런 사례라 할 것이다.

 

다양한 로고와 개성 넘치는 데모 방식으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 실즈는 사실 이러한 데모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최근 실즈의 데모 방식과 생각들을 나누고 토론하는 책들이 대거 출판되고 있다. 서점에는 실즈가 언급한 책코너가 마련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미디어와 표현 방법을 새롭게 발명하면서, 데모는 지속되고 있다.

 

 

 

 

 

 

 

 

 

 

 

3. 돌아가기와 나아가기: 무한한 연결의 발명

 

 

어쩌면 이 이야기들은 일본 전문가나 누군가에게는 임시 방문자이자 이방인인 필자의 과장된 희망적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길지 않은 시간 만난 건 일본 사람이나 일본 사회라기보다,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그저 나름의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사연과 상황을 엮어서 써나간 이야기의 조각에 불과하다. 실패의 연속, 견고한 체제에 되먹히기를 멈출 수 없는 반복, 관계의 절망과 자신에 대한 회한과 자학, 나의 사연은 그렇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제 길지 않은 일본 체류를 마감하고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 과연 돌아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절망적인 질문은 계속 유보해왔다. 대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 주변을 기웃거리며, 희망과 대안을 찾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자 애를 써보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이야기도 내게는 너무나 크고 절실하게 보였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또 전하면서 비로소 나의 사연도 다른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가 역사를 만든다는 자의식을 내세우지 않지만, 결국 그렇게 다시 역사를 써나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역사란 단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라는 작은 결말을 되새겨본다.

 

 

 

 

 

 

 

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第一回座談会概要

 

れの再構築逆装置アポリア

 

 

 


 

 

日時2015227

場所東京新宿 IRREGULAR RHYTHM ASYLUM

主催研究 aff-com(アプコム)文化/科

参加者 孔任順(コン インスン/座長)権明娥(クォン ミョンア/

パネラ 許允( ユン) 金萬錫(キム マンソク)古川高子(フルカワ タカコ)小田原琳オダワラリン 柳忠熙(リュ チュンヒ) 金泰植(キム テシク)宋連玉(ソン ヨノク)張秀熙 (ジャン スヒ)申賢娥(シン ヒョナ/)車嘉鍈(チャ カヨン/).

張秀熙 金萬錫.

座談整理車嘉鍈金萬錫.

aff-com 來人comer: 権明娥張秀熙金萬錫申賢娥車嘉鍈

参加者しい紹介にあります。

 

 


 

 

1/正規としてっている

女性マイノリティー学問分野国人研究者地方研究者

 

座談は「自己紹介」からまる。この自分紹介すること」は実上自分っている」についての発話であり、不安定いてきた「」についてのことでしかありえない。特任助教務補助専任研究員常勤研究員など、はしきりに「かれる」のやし細分化するが、これは実上研究者っているをよりめていくにぎない。こうしてまっていく一方/正規は、その内部においてびジェンダ専攻国籍出身により一層細密けられ線引きされる。おいがかれたえないほどかく線引きされていく状況で、おいが/正規によっていでた「」に共有することは、一方線引きをえてび「共通するもの」を手繰っていく過程であるともえるだろう。

 

 

 

 

1. /정규로 서 있는 자리들

: 여성, 소수 전공, 외국인 연구자, 지방 연구자

 

좌담은 자기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자기를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대한 토로이자, 불안정하게 움직여 온 이력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특임조교, 교무보조, 전임 연구원, 상근 연구원 등 대학은 자꾸만 처할 곳의 이름들을 늘리고 세분화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연구자들이 서 있을 자리를 더욱 좁혀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좁혀져만 가는 비/정규의 자리들은 그 내부에서 다시 젠더, 전공, 국적, 출신에 따라 더욱 세밀하게 나뉘고 구획된다. 서로가 처한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구획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서로가 비/정규의 자리들로 이어온 이력에 귀를 기울이고 공유하는 것은 한편으로 구획을 넘어 다시 공통적인 것을 더듬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2仲間関係労働者ネットワ

/可能非正規職関係性

 

学内において研究者たちが「共通するもの」を喪失していくということは、してうが、「関係」を構築できる可能性っていくということでもある。共通するものをもっているびとはし「仲間」とぶのであれば、非正規職に「仲間」が存在するのか、という質問結局彼()らが構築きる「」の可能性うことである。こうしたから日本非正規職講師労組は、各大学別問題として分離されやすい非正規職を「労働者」というで、地域問題としてねるとなった(古川)。しかし非正規職講師たちが労働者という団結するほど、()らを「教育者」でない「教育ビス労働者」へとしてしまおうとする圧迫えられる(権明娥) 。したがって非正規職講師学生とのの「関係」が回復される地点は、以前師弟関係回復することではなく、かえって講義時間においては平等学生労働者講師労働者としてっていることをして可能と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存在するしかしたちが「研究労働者」や「非正規職講師労働者」としてをつなぐには、()らの依然としてあまりにくのたわっている。学内において講義と、外部講義との、また、家庭教師ができる「学閥」ヒエラルキをもっている研究者と「マクドナルド」でアルバイトをしている研究者とのには、「非正規職労働者」というつに間隙存在する(許允)。またもう一方研究者仲間」についていえば、それもまた「大型プロジェクト」というシステムでは「研究者雇」と「研究者助教」、「非定年トラック教授」などとにバラバラに分離されてしまう。したがって非正規職労働者研究者講師といった数多くののうち、どこにも完全できない()らの関係はそれこそ可能でありながらも不可能となるもの、といえるだろう。

 

 

 

 

2. 동료 관계와 노동자 네트워크

: /가능한 비정규직의 관계성

 

대학 내에서 연구자들이 공통적인 것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일러 동료라 한다면, 비정규직에게 동료가 존재할 수 있냐는 질문은 결국 이들이 구축할 수 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비정규직 강사 노조는 각 대학 별 문제로 분리되기 쉬운 비정규직들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지역의 문제로 묶어주는 장소가 되었다.(후루카와) 그러나 비정규직 강사들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단결할수록, 이들을 교육자가 아닌 교육 서비스 노동자로 환수시켜버리려고 하는 압박이 강해진다.(권명아) 그렇다면 비정규직 강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지점은, 이전과 같은 사제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의시간 내에서는 평등한 학생 노동자와 강의 노동자로써 만나고 있음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 노동자비정규직 강사 노동자로 손을 잡기에는, 모두의 사이에 여전히 너무나 많은 벽들이 가로놓여있다. 대학 안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과 바깥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의 사이, 그리고 과외를 할 수 있는 학벌서열을 갖고 있는 연구자와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 사이에는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한다.(허윤) 하여 다른 한 편에서는 연구자 동료를 말해보지만 그 또한 대형 프로젝트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연구자 고용주연구자 조교’, ‘비정년트랙 연구교수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하여 비정규직, 노동자, 연구자, 강사 등 수많은 이름들 중 어디에도 채 소속되지 못한 이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가능하면서 다시 불가능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3研究マが/正規かつのか?

数化される専攻分野、あるいはグロバル時代実用主義

 

研究者たちが数多階級立場へと破片化され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研究をする」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だけは依然として「共通するもの」として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可能場合もある。しかし実情研究というのなかでも数多階層存在する。フェミニズム―ジェンダー研究人文学研究のなかでは依然として辺部存在し、「制度批判研究はそのめるいつつある。こうした状況で「研究」はかえって共通するものの基盤でなく、かせとなってしまうのがである(権明娥)。また一方で、これは人文学自体辺部的なものとなっていく現象つの断片はないかとわれもする。また人文が「グロバル人材養成」のための「英語教育機関」へと転落する事態人文学研究者たちはかえって「ナショナル」な城壁かれ、喪失していく(古川)

 

 

 

 

3. 연구 주제가 비/정규를 가른다?

:소수화 되는 전공분야, 혹은 글로벌 시대의 실용주의

 

연구자들이 수많은 계급과 입장으로 파편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만큼은 여전히 공통적인 것으로 남겨져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연구라는 장의 안에서도 수많은 계층이 존재한다. 페미니즘-젠더 연구가 인문학 연구의 장 내에서 여전히 주변부에 존재하고, ‘제도 비판의 연구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구는 오히려 공통적인 것의 기반이 아닌, 족쇄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권명아) 한 편으로 이는 인문학 자체가 주변부적인 것이 되어가는 현상의 한 단편이 아닐까가 질문되기도 한다. 또한 인문학이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영어교육기관으로 전락하는 사태 속에서, 인문학 연구자들은 오히려 더욱 내셔널한 장벽 안에 놓이고 연대를 상실해간다. (후루카와)

 


 

 

4.オルタナティヴかアウトソシングか?

人文空間のジレンマ

 

学内数多くの限界にぶつかるのは、その/可能性たな可能性の「発明」により専有しようとするをもみだす。いろいろな「オルタナティヴ」な人文学空間られつつあるのはその突破である。ここでは、その専有突破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という言葉解決していこうとった(孔任順)。その装置はな「オルタナティヴ人文学空間」だけではなく、授業料闘争といった「ストライキ」の瞬間しばらく顕現するものでもあった(権明娥)。しかしわれる実験がかえって「人文アウトソシング」の形態構築するのではないのかといういので「オルタナティヴ」という言葉はより政治性要求することになる(古川)。そこにはしいシステムの構築が「資格証認証機」の拡充もれてしまうことにならないかというれもまた存在している。したがってたちはこれをいかに個別の「」の問題ではない「装置が循環する生態系」として構成できるかをわなければならない(権明娥)

 

 

 

 

4. 대안인가 아웃소싱인가?

: 대학 바깥의 인문 공간의 딜레마

 

대학 내에서 수많은 한계를 마주하는 것은 그 불/가능성을 새로운 가능성의 발명으로 전유해보고자 하는 힘을 낳기도 한다. 여러 가지 대안적인 인문학 공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그 돌파의 증거들이다. 여기서는 그 전유와 돌파를 장치의 발명이라는 말로 풀어보고자 하였다.(공임순) 그 장치는 다양한 대안 인문학 공간뿐만이 아니라 등록금 투쟁과 같은 스트라이크의 순간에 잠시 현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권명아) 하지만 대학 바깥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실험들이 오히려 인문학 아웃소싱의 형태를 구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 앞에서 대안이라는 말은 보다 첨예한 정치성을 요구하게 된다.(후루카와) 거기에는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이 자격증 인증기관의 확장에 머물러버리게 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 또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개별적 기관의 문제가 아닌 장치들이 순환하는 생태계로 구성해낼 수 있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권명아)

 


 

5れと逆裝置的アポリア

 

制度として人文学崩壊にもかかわらず、会的には人文する欲求まるという奇異現象きている。これに大方否定的態度せているが、かえってそうした「大衆人文学講座ム」という自己啓/自己満足的欲望のなかで人文-装置の原動力てられるかを熟慮すべきではないだろうか。これは逆裝置的アポリアとぶことができるだろう。このように内部につつある人文では「ブム」をこしている現象理由めれば、のブラック企業化やこれ以上急進的理論えられない制度限界(許允)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しかしこれにし「しているのだから、まる場所をつくればいいじゃないか」とうことは、は「」という二分法的構す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れをもたせる。したがって「オルタナティヴ」という厳格かつ、その「」にるときにたちはまたなる生存可能性を「発明」することになる(権明娥)

 

 

 

5. 흐름과 힘: 역장치적 아포리아

 

 

제도로서 대학 인문학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인문학에 대한 소구력이 높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로 이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보내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대중인문학 강좌 붐이라는 자기계발/자기만족적 욕망 안에서 인문 장치의 원동력을 캐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만 하지 않을까. 이를 역장치적 아포리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윤인로) 이처럼 대학 내부에서 죽어가는 인문학이 대학 바깥에서는 을 일으키는 현상의 이유를 찾자면, 대학의 블랙기업화(공임순)나 더 이상 급진적인 이론을 가르칠 수 없는 제도의 한계(허윤)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를 두고 대학이 붕괴하고 있으니 대학 바깥에서 모일 장소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실상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다시 반복하게 할 우려를 낳는다. 하여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의 안과 밖을 엄중히 나누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생존의 가능성을 발명하게 된다.(권명아)

 

 


 

 

 

6発明原材料(materials)あるいは歴史

 

という二者択一より大事なことは、その「」で人文-装置を「発明(権明娥)することである。それは「創造」ではなく、にあるものから変容・専有し、リズムと言語再活性化することにいものだろう。もないものからせよと要求することは、まさにイデオロギー的反動政治原点へのている。そうしたから出現内在していたつのモデルは「発明」の重要資料として使用できる(萬錫)えれば、歴史してげてきたものをもかもてるものではない、発明のための元肥として活用することのみが、られなかったというイメジの幻滅からし、えられたものをなるものとして「発明」できる方式まれることであることはめてうまでもない。そこを経過しないとき、韓日関係において努力して「発明」してきた関係様相とへイトスピチにしてしまうだろう(萬錫)

 

 

 

 

6. 발명과 원재료(materials) 혹은 역사

 

대학의 안과 바깥 양자의 선택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에서 인문장치를 발명’(권명아)을 하는 일이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변용하고 전유하여 리듬과 언어를 재활성화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출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인 반동정치의 원점으로의 회귀와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학의 출현에 내재해 있던 두 가지 모델은 발명의 중요한 자료로 사유될 수 있다.(김만석) 달리 말해, 역사를 통해서 쌓아온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발명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하는 것만이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는 이미지의 환멸로부터 벗어나 이미 주어진 것을 달리 발명할 수 있는 방식이 생겨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통하지 않을 때, 한일관계에서 어렵게 발명해온 관계양상들을 증오와 헤이트스피치로 화하게 될 것(김만석)이다.

 


 

 

 

7過少悲喜劇

 

今日制度としての人文外部とのでの発明るまでには諸問題があるのだが、研究者生涯史的周期深刻問題となっている。非正規職講師たちはお見合いして結婚出ないという(金泰植)は、につまらないとしてす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女性研究者場合学歴するヘイトスピ(小田原)までわれているである。こうした不安定さはりなくらをしていかねばならないという自責と、にもかかわらずらの研究マが大衆要求合致しないことにより「淘汰」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萎縮した防御んでいる。こうした状況において研究者たちのはきわめて「」となるか、防御的に「過少」となる。それにえて学内での講座より予備校での授業のほうがしかったという日本学生たちの証言(宋連玉)示唆するところがめてきい。でなされる大規模人文学講座考察すべき部分らかにあるだろうし、学内での一定変化もまた熟慮するべき状況(宋連玉)ったことはらかなだとわれる。

 

 

 

 

7. 과잉과 과소의 희비극

 

오늘날 제도 인문학과 바깥 그 사이에서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연구자의 생애사적 주기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비정규직 강사들은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김태식)은 그저 싱거운 이야기로만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연구자의 경우에는 고학력에 대한 혐오발화(오다와라)까지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불안정함은 끝없이 자신을 계발해나가야한다는 자책과 그럼에도 자신의 연구 주제가 대중들의 욕구와 맞아 떨어지지 않으므로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위축된 방어를 낳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의 삶은 매우 과잉되거나 방어적으로 과소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대학 내에서의 강좌보다 입시학원에서의 수업이 더 즐거웠다는 일본 학생들의 증언(송연옥)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대학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인문학 강좌에서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 분명이 있을 것이고 대학 내에서의 일정한 변화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송연옥)에 도착한 것은 분명한 일로 여겨진다.

 

翻訳:田

번역: 타지마 테츠오


 

 

*参加者のプロフィル

 

孔任順(コンインスン/座長): 西江大學校、現代小説専門、著作関係は『スキャンダルと反共國家主義』、『植民地時代野談娛樂性とプロパガンダ』外

権明娥(クォンミョンア/司会): 東亜大学教授、ファシズム、ジェンダー政治専門、著作関係は『淫乱と革命』、『無限に政治的な寂しさ』、『歴史的ファシズム』

許允(ホ ユン): 梨花女子大学時間講師、現代韓国小説専門、著作関係は「1950年代の韓国小説の男性ジェンダー硏究」、「1970年代の女子敎養の発見と転化」、「朴正レジムのガバマンタリティ女子労動者の主体化 」

萬錫(キム マンソク/企画/aff-com 來人comer): 韓國海洋大學校 時間講師、韓國近代詩専門、 著作関係は『屋上の政治』外

古川高子(フルカワ タカコ):東京外国語大学特任助教、ロッパにハプスブルクストリア専門、 著作関係は新知識人よ、せよ

小田原琳オダワラ リン):講師イタリア近現代史、ジェンダー研究専門、日本世界抗的社運動がある

柳忠熙リュウ チュンヒ東京大東洋文化究所・特任研究員国学・比較文学・比較思想専門、著作関係近代東アジアの朝鮮知識人英語リテラシ19世紀末尹致昊英語中心に」漢詩文で〈再現〉された西洋―『海天秋帆』『海天春帆小集』『環璆唫艸』と理想開化期朝鮮活動と「通用規則」――「通用規則」(1898)の流通中心に」

金泰植(キム テシク):獨協大聖心女子大ほか非常勤講師会学専門、著作関係在日朝鮮人政治犯朴正におけるヘゲモニ危機

宋連玉ソン ヨノク):青山学院大学教授、朝鮮近現代史ジェンダー史日本近現代ジェンダー史専門、著作関係のフェミニズムを求めて朝鮮女性植民地主義

張秀熙(ジャン・ スヒ/企画/aff-com 來人comer/「風の研究者」の編集委員):東亜大学時間講師、韓国近・現代文学専門、特に文学に現れた日本軍慰安婦について勉強している。 著作関係は「戦争が重なる体」、「シングルが溢れる新世界」外

申賢娥(シン・ヒョナ/通訳/aff-com 來人comer/「風の研究者」の編集委員)東亜大学博士課程、 韓国近・現代文学専門、特に若者文化専門、著作関係は「世代論と年談論で見た文的文を書き物と主体性の」、消耗するるの‘地面/紙面」、「変態する恋と弾ける現実」

嘉鍈(チャ・ガヨン/記録/aff-com 來人comer):東亜大学修士課程、 韓国近・現代文学専門、特にクイア・セクシュアリティを勉強している。著作関係は「変形物質シリー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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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イノリティ化から流れ再構築へ

 

:座談「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を始めるにあたって[각주:1]

 

クォン ミョンア( 明娥)

 

♣♣

 

二○一五年五月現在、政府の大学構造調整により、全国的に入学定員(四年制大学)が一万七千五四○名ほど減らされる予定である。このうち非首都圏の大学がその八五.四%を占め、首都圏の大学は一四.六%しか割り当てられていない。釜山地域にある十五の四年制大学の二○一七年度の入学定員は二○一四年度より二.八五三名ほど減らされる予定である。減少する定員数は今年度の慶星大学校の入学定員(二千九二○名)に近い数である。[각주:2]いわゆる学齢人口の減少により大学の定員割れ事態に備えた大学の構造調整は地域の大学を犠牲にして進めれれてきた。結局大学の構造調整は根本的に地域差別と首都圏中心主義をいっそう加速するだけでなく、学閥主義と首都圏中心主義の密着関係をも深化させるのは明らかである。

国家機構により強制的に進められてきた大学の構造調整は、学閥ヒエラルキーと地域差別、また大学に投入された巨額の資本の利益を中心にして進められてきた。大学関係者たちは地域差別と学閥主義には沈黙しても、国家機構により強いられた構造調整に対しては「共通」した声を上げてはいる。しかし地域差別と学閥主義に沈黙する「共通」した声が、果たして共通のものとなりうるだろうか。構造調整への怒りと非難の声が強硬なのに、何か虚しさを感じさせるのは、こうした共通するものの欠如に起因している。しかし同時に大学の構造調整という事態は逆説的に大学あるいは大学制度のなかで実際にいかなる差別と還元不可能な差異が存在していたかをもろに目撃させることになった。そうなのだ。私たちは大学の構造調整という国家介入事態を通して国家の暴力性だけでなく、実は「私たち」のなかの差別と差異を目撃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国家の暴力性と新自由主義体制の問題を指摘する論議が虚しく聞こえるのはまさにこうした内部的問題を回避しているからでもある。

そしてこうした内部的差別と差異は地域と首都圏という問題だけに限られない。今回の座談においてあらわれたように、ジェンダー、移住性[각주:3]、専攻領域、制度としての学問の立ち位置の選択など、いっそう緻密な差異の線が大学と学問制度の内部を横断しつつ、差別/排除の線引きを行っている。もちろんジェンダー、地域、移住性と専攻領域などが全て差別の標識としてのみ働くのではない。また如何なる問題に対しても理論と知識が現実の全ての差異を扱うことはできない。そうした点から知識と理論は現実の細部を扱うのに限界をもっている。もちろん知識と理論は現実の細部にたどり着くための異なる方法をもっている。しかしその「ちがい」をしばしば忘却し、理論の全一的な力を誇示しかねないところが理論の陥穽でもある。知識の領域内において現場記述誌(ethnography)や座談会、インタビュー、フィールドワークといった現実の細部と差異を扱うための多様な方法論もまた模索されている。座談」という名称を掲げているが、この企画は知識の方法では扱いにくい、ある現実の細部と差異に出会おうとする試みである。したがって対象に対する客観的な分析と総合的な判断を中心とする作文とは多少異なる形式を試みてみたい。

大学の構造調整や学問の危機に対し誰もが激昂し声高に語るが、実際会って「ともに」交わす話がない。各自自らの問題があまりに手にあまり最も難しい問題であるため、会っても自らの境遇について「我が身への悲観的」な愚痴だけをこぼして別れることになる。こうした話を長いこと交わした後、家に帰り、せずもがなの話をしてしまったようで自嘲的で憂鬱な状態に落ち込んでしまう経験を誰もがもっているだろう。そのため努めて言葉を惜しんだり沈黙するしかなく、私たちは誰もが自らの位置と経験について、その生の現実性について言葉を交わすことができない。残るのは恥ずかしさや恥辱、そして幻滅だけである。私たちは大学制度と学問の場において自らが置かれている位置と経験について語るとき、こうした形式の談話の慣習と情緒とを空回りさせるしかない。そのため会って我が身を悲観する言葉を交わし、その言葉と立場と情緒の現実性を再度、常に確認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車座になって我が身を悲観し大学制度と学問の場での自らの身の処し方(身の置き所、あるいは subject positioning)を吐露しつつ、どうにかそこからある糸口が見出されるかもしれない。そしてこうした糸口をしかと握りしめ、私たちの幻滅と自嘲の流れを断ち切り、異なる流れへとともに流れ込んでいくだろう。

今回の座談においても論議されたように、この座談を大学の内と外という固定した境界ではなく、その間を流れる多様な流れと緻密な差異に出会い、探しに行く実験にしたいと思う。そうした実験を通して既存の大学制度を批判的に突破した大学の外の様々な実験を受け継ぎながらも、内と外の排他的な境界設定とはことなる方式で「オルターナティヴな制度」を構成することを目標にしたいと思う。

 

座談「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はそうした場になってほしい。すでに一度失敗し、二度目にしてどうにか言葉を汲み上げた。「座談」は生中継の形式よりは、一種の言葉に対する応答の形式を取りたいと思う。座談の場で行き交った言葉をおもむくまま取捨選択するという意味でなく、行き交った言葉をいくつかのテーマを中心に集め、整理し、その「意味」を抱きしめ考察する形式によりかき集める方式を採った。そのようにして以下のように七つほどのテーマにより言葉を手繰り寄せた。手繰り寄せたテーマは各座談の冒頭に要約し説明を提示する形で整理した。これといった見返りもない座談に参席してくださった全ての方に感謝をささげる。

座談の具体的内容は『文化/科学』八二号(二○一五年五月)を参照。  

 

翻訳:田




 

 

소수화에서 흐름의 재구축으로

 

: ‘인문 장치를 발명하자좌담 연재를 시작하며[각주:4]

 

 

 

권명아(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20155월 현재 정부의 대학 구조조정으로 전국적으로 대입 정원(4년제 대학)17540명이 줄어들 예정이다. 이중 비수도권 대학이 85.4%를 차지하고 수도권 대학은 14.6%만 할당되었다. 부산 지역 154년제 대학의 2017학년도 총 입학 정원은 2014학년보다 2853명 줄어들 예정이다. 감소하는 정원 규모는 올해 경성대의 입학정원(2920)과 비슷한 수준이다. [각주:5]이른바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정원 미달 사태에 대비한 대학 구조조정은 지역대학을 희생양 삼아 진행되었다. 결국, 대학 구조조정은 근본적으로 지역 차별과 수도권 중심주의를 더욱 가속할 뿐만 아니라, 학벌주의와 수도권 중심주의의 밀착 관계 역시 심화시킬 것이 뻔하다.

 

  국가 기구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된 대학 구조조정은 학벌 위계와 지역 차별, 그리고 대학에 투여된 거대 자본의 이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대학 관계자들은 지역 차별과 학벌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더라도 국가 기구에 의해 강제된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공통의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지역차별과 학벌주의에 침묵하는 공통의목소리가 과연 공통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구조조정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가 격렬함에도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동시에 대학구조 조정이라는 사태는 역설적으로 대학, 혹은 학문 제도 안에서 실제 어떤 차별과 환원 불가능한 차이들이 존재했는지를 노골적으로 대면하게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대학구조 조정이라는 국가 개입의 사태를 통해 국가의 폭력성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안의 차별과 차이들을 대면해야만 한다. 국가의 폭력성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논의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부적 문제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적 차별과 차이들은 단지 지역과 수도권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번 좌담에서도 나타나듯이 젠더, 이주성[각주:6], 전공 영역, 제도 학문에 대한 입장 취함 등 더 조밀한 차이의 선들이 대학과 학문 제도 내부를 가로지르며 차별/배제의 선을 구획한다. 물론 젠더, 지역, 이주성과 전공 영역 등이 모두 차별의 표지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이론과 지식이 현실의 모든 차이를 다룰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지식과 이론은 현실의 세부를 다루는 데에 한계를 지닌다. 물론 지식과 이론은 현실의 세부에 다다르기 위한 다른 방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을 종종 망각하고 이론의 전일적 힘을 자만하기 쉬운 것이 이론의 함정이기도 하다. 지식의 영역 내에서 현장기술지나 좌담, 인터뷰, 필드워크 등 현실의 세부와 차이를 다루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 또한 모색되어 왔다. 좌담이라는 명칭을 걸고 있지만, 이 기획은 지식의 방법이 다루기 어려운 어떤 현실의 세부와 차이들을 만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하여 대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종합적 판단을 중심으로 하는 글쓰기와는 다소 다른 형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대학 구조조정이나 학문의 위기에 대해 다들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만나서 함께나눌 말이 없다. 각자 자신의 문제가 너무나 힘겹고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에 만나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변 비관형의 푸념만 늘어놓고 돌아가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나눈 후, 집으로 돌아가 괜한 말을 늘어놓은 것 같아 자조적이고 우울한 상태에 빠진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애써 말을 삼키거나, 침묵할 뿐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위치와 경험에 대해, 그 삶의 현실성에 대해 말을 나누지 못한다. 남는 것은 부끄러움이나 치욕, 그리고 환멸뿐이다. 우리는 대학제도와 학문장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와 경험에 대해 말을 할 때 이런 형식의 담화 관습과 정서를 맴돌게 될 뿐이다. 그래서 만나서 신변을 비관하는 말들을 나누면서, 그 말들과 입장과 정서의 현실성을 다시, 매번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둘러앉아 신변을 비관하고 대학 제도와 학문장에서의 자신의 처신(몸 둘 바 혹은 subject positioning)을 토로하면서 간신히, 거기서 어떤 실마리를 찾아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실마리를 부여잡고 우리는 환멸과 자조의 흐름을 끊고, 다른 흐름으로 서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좌담에서도 논의된 것처럼 이 좌담은 대학의 안과 밖이라는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 그 사이를 흐르는 다양한 흐름들과 조밀한 차이들을 만나고 찾아나가는 실험이 되고자 한다. 그런 실험을 통해서 기존의 대학 제도를 비판적으로 돌파한 대학 바깥의 여러 실험들을 이어가면서도, 안과 바깥의 배타적 경계 설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안적 제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자 한다.

 

 

  ‘인문 장치를 발명하자는 그런 자리가 되고 싶다. 이미 한번은 실패했고, 두 번째에 겨우 말을 건져내었다.좌담은 생중계의 형식보다는 일종의 말들에 대한 응답의 형식을 취하려고 한다. 좌담 자리에서의 오고 간 말들을 마음대로 취사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고 간 말들을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모으고 정리하여, 의미를 보듬고 살피는 형식으로 그러모으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게 해서 7개 정도의 주제로 말을 보듬었다. 보듬은 주제는 각 좌담의 앞부분에 요약하고 설명을 제시하는 식으로 정리하였다. 별다른 보상도 없는 좌담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좌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문화/과학』82호, 2015년 여름호를 참조.


번역: 타지마 테츠오 

 



  1. 1. 異なる生に対する至難な様々な実験が失敗した場から、その失敗と限界から更に歩き出すこと、それを私は『限界から踏み出すこと』であると論じている。拙稿「落ち着く:安心のアソシエーションのために」(『石堂論叢』59号、2014年)を参照。 [본문으로]
  2. 2.「大学構造調整一年、釜山から「四年制大学一校」(入学定員二千八百五三名)が消える」『釜山日報』二○一五年五月二○日. [본문으로]
  3. 3. 移住性は留学したり、または地域を移住し移動しつつ触発される人種的マイノリティー性との関連が深い。しかし、国家間の境界移動だけでなく、学制内での移動、すなわち専攻の変更や、古典的な学制からの離脱から生じる状態、時には国家内での地域移動から生じる移住性などもここに含まれる。多様な研究者グループとの出会いを通して、こうした移住性の様々な姿を実際に確認できるだろう。 [본문으로]
  4. 1. 다른 삶에 대한 지난한 여러가지 실험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 실패와 한게로부터 다시 걸어나가는 것, 그것을 나는 <한계를 딛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졸고 <마음을 놓다: 안심의 어소시에이션을 위하여>(석당논총59호, 2014년) 참조. [본문으로]
  5. 2. 「대학 구조조정 1년, 부산에서 ‘4년제 대학 1곳’(입학 정원 2천 853명) 사라졌다」, 『부산일보』, 2015. 5. 20. [본문으로]
  6. 3. 이주성이라는 규정은 유학을 가거나 또는 지역을 이주하거나 이동하면서 촉발되는 인종적 소수화 상태를 기본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국가 간 경계 이동뿐 아니라, 학제 내의 이동, 즉 전공의 변화나 고전적 학제로부터의 이탈에서 비롯되는 상태, 때로는 국가 내부에서의 지역 이동에서 비롯되는 이중성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양한 연구자 그룹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실 이러한 이주성의 여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점과 점이 모여 선이 되기까지 2

 

 

 

차가영(래인커머)

 

 

 

매일 똑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곳에 점을 찍다보면 어딘가로 떠나는게 무서워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그 여정은 새로운 점을 찍을 수 있는 힘이 된다.

 

3. 찍고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처음이라는 긴장되는 상황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말을 꺼낼 수나 있을까,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내가 이 만남에서 맡은 일이 뭐였더라, 이 사람은 어떤 말을 할까. 이런 것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오고, 하나로 모일 수 없는 생각은 몸을 긴장 시킨다. 코도모 센터의 마마상, 섹스워커 인권 활동가 다나카 과장, 동지사 대학의 정유진 선생님, women's action network의 오카노, 무타 선생님, 마와시요미신문의 창시자 무츠상과 만났을 때 내 시야는 오로지 눈앞에 있는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 한국 사람인 정유진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만난 모든 사람들이 일본 사람임에도 옆에서 해주는 통역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긴장된 첫 만남이 끝나고 나면,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올려보아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급하게 기록해둔 약간의 문자를 통해서만 이랬었지, 하고 기억을 더듬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후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첫 만남의 소중함은 좁아진 시야에서 나온다. 한 사람만을 향해 있는 긴장된 몸은 그 사람이 말할 때의 감정을 보는 것에만 집중하게 한다. 그 순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라는 언어의 경계 사이 어딘가 쯤에 내가 서있는 것 같다. 일본어를 거의 모르고, 처음 맞는 상황임에도 몸짓과 몇 개의 단어들로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의 맥락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이 되면, 굉장히 중요한 어떤 걸 몰래 훔쳐본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생기며 말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 호기심이, 첫 만남의 소중함을 만든다. 호기심은 그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계속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게 하니까 말이다.

  2014630. 우리는 가마가사키와 토비타신치 답사 후, 아케이드 뒤편에 있는 코도모센터를 방문했다. 코도모센터는 토비타신치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아이나 부모가 맞벌이를 하여 낮동안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조그만 보육시설이다. 코도모센터에서는 대장인 마마상을 중심으로 코도모센터 출신의 청년들이 아이를 돌보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대장인 마마상은 처음 만난 우리들에게 적극적으로 코도모센터를 소개해주었다. 코도모센터에 대해 말하는 마마상의 얼굴과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곧 끊길지도 모르는 정부의 코도모센터 지원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공간을 지키려는 사람의 결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코도모센터의 아이들이 왜 자라서 센터에 선생님으로 다시 오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 함께 있는 것의 재미와 행복을 느끼고 있을 코도모센터의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친구들이 될지 궁금해졌다.

  같은 날 가마가사키 코코룸에서 만난 섹스워커 인권활동가 다나카 과장은 정해진 단체에 속하지 않은 활동가이다. 여러 곳을 다니며 섹스워커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 다나카 과장과의 첫 만남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은 단어 사용의 다름에서 온 의사 전달의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활동가 다나카 과장과 한국의 활동가 정희샘은 성노동에 대해, 성매매에 대해 각자가 사용하는 단어를 두고 한참이나 설명을 해야 했다. 일본어와 영어와 한국어가 마구 뒤섞여 오갔다. 말의 뒤섞임 속에서 다나카 과장의 얼굴과 말투는 경계에서 안도로 변해갔다. 마구 엉켜버렸던 말의 꼬리들을 하나씩 풀면서 다나카 과장과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나카 과장과의 만남은 인권신장을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활동가끼리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무언인지에 대해, 연대라는 것은 어느 지점에서 가능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

201471. 교토에 있는 동지사 대학에서 정유진 선생님을 만났다. 정유진 선생님은 한국에 있을 때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한 활동가였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시작되었는데, 그 시간은 질문도 별로 없이 유려한 정유진 선생님의 말로 이루어졌다. 오랜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성찰이 바탕이 된 정유진 선생님의 이야기는 우리를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했다.

  정유진 선생님과의 만남 후, 바로 같은 건물에서 만난 무타, 오카노 선생님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연구자이자 활동가이다. women's action network라는 NPO 단체에 있는 두 분은 위안부, 성노동, 성소수자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연구자와 활동가를 함께 하고 있는 두 분의 모습에서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정유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도 같았다. 세 명의 여성 연구자이자 활동가의 만남에서 나는 앙다문 입이 계속 생각이 났다. 존재를 삭제하려고 하는 폭력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그 폭력이 전부 무너져 내릴 때까지 끝까지 들이받겠다는 힘이 숨겨져 있는 앙다문 입.’

  201472. 관광자이자 여행자이자 마와시요미 신문의 창시자인 무츠상이 운영하는 카페 얼스에 방문했다. 무츠상이 만든 마와시요미 신문은 교감을 위해 만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카페에 앉아서 혼자 신문을 보며 만들었는데, 이것이 점차 퍼져 지금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를 체험하고, 만든 신문을 서로 공유하며 서로 교감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날 우리는 마와시요미 신문 2호를 만들었다. 무츠상은 둘러앉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국말이 가득한 방 안에서 무츠상은 신문을 만들고 있는 우리를 보며 미소 짓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하고, 아프꼼과 동인들의 마와시요미 신문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무츠상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것을 발명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여 그것을 널리 퍼뜨리는 재미가 무엇인지 느껴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의견을 나누고, 코멘트를 해주며 다 만든 신문을 하나하나 스크랩 하는 무츠상의 얼굴을 보며, 다함께 모여 앉아 만드는 신문이 왜 공감을 만들어내는 신문이 되는 것인지를 알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때, 그에 응답하는 사람의 표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

 

  만남의 시간동안 좁아졌던 시야는 만남이 끝난 후, 숙소에 돌아와서 침대에 털썩 앉는 순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한 번의 만남을 통해 넓어진 시야를 갖는 것이 아니라 좁아진 시야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워크숍 기간 동안의 첫 만남마다 경험한다. 헤어지고 나서야, 왜 이렇게 긴장을 했었는지, 긴장한 게 오히려 티가 나서 폐가 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며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더 만나게 되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 텐데. 질문이라도 하나 해볼 텐데. 긴장으로 한껏 움츠러든 채 이루어진 만남은 절대 첫 만남으로 끝을 낼 수 없다. 첫 만남의 소중함은 여기에서 또 나온다.

 

 

 

(첫번째 후기에 그렸던 지도를 이용하여 만든 두번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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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사키를 걷다

 

 

 

장옥진(래인커머)

  

 

 

 

 

  

가마가사키의 코코룸은 여러, 다양한 만남들이 잦은 곳이다. 안심을 나눌 수 있는 예술 같은 공간, 코코룸의 좁은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쪽에 놓인 탁자가 보인다. 두 개의 탁자를 이어붙인 앉은뱅이 탁자. 신발을 벗고 자리를 채워 앉으면 맞은편엔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고,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는다. 코코룸의 운영자인 카나요상은 이 탁자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카나요상과 얘기를 나누던 중 코코룸으로 엔도상이 들어왔다. 엔도상은 조금 서두르는 기색으로 우리 일행과 코코룸을 나갔다. 가마가사키를 걷기 위해서다. 이날 엔도상은 가마가사키를 안내해주었고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사진 촬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엔도상은 민감하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곳을 민감한 곳, 민감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말하며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는 시늉을 해보였다. 우리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지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고, 이것으로 우리의 가마가사키 걷기는 시작되었다.

 

코코룸을 나와 양쪽으로 이어진 상가를 지나 거리로 나섰다. 상가 앞을 지나는 사람들, 거리의 사람들은 유독 남자가 많았다. 평소 아저씨, 할아버지로 부르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소 허름한 옷을 입고 상가 앞에 앉아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저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인 그들 곁을 약간은 긴장한 채로 지나쳤다. 거리도, 사람도 특별히 찾아온 손님이라 하여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것이 마음 편히 느껴지기도 했다.

 

엔도상의 설명으로 가마가사키는 일용직 노동자, 홈리스들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1960년대 산업화가 되면서부터 국가가 전략적으로 형성한 노동시장이었고 이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거품 경제가 몰락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일용직 노동자는 필요치 않게 되었고, 이 후 가마가사키에는 노동력이 있으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갈 곳을 잃은 사람들, 세월이 지나 고령이 된 사람들이 남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이들은 여전히 실업 문제, 고령화 문제 등을 안고서 가마가사키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둡고 좁은 거리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는 지친 이들의 모습에는 이러한 사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이곳은 경찰과 주민들 간의 갈등이 많이 빚어진다고 하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행위에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도 하고, 이는 곧 폭력사태로 번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들까지 겹쳐져 가마가사키는 대내외적으로 문제적인 곳이 되었다. 이에 오사카 정부는 가마가사키의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아이린(愛隣) 지구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엔도상은 사랑하는 이웃이란 뜻의 저 지명이 오히려 폭력적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가마가사키 주민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히 시혜적인 용어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므로 포용해야만 하고 도움 받아야 마땅할 존재가 된다. 우위의 시선에서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지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 벽에 예쁘게 달아놓은 꽃과 이 꽃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한 관이 사실은 벽에 기대어 자는 노숙자들을 쫓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엔도상에게 들었을 때는, 그들은 사실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주민들조차도 서로를 이웃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계속 해서 길을 걷다 한 건물 앞에 섰다. 쪽방, 일본말로는 야도라 한다는 이 건물은 독신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지금은 호텔의 형태로 개조된 곳도 많고 하룻밤 묵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실제로는 일용직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잠시 묵는 숙소에 가깝다고 하였다. 이에 엔도상은 사실상 노동자를 위한 호텔은 없다고 말한다. 가마가사키에는 주일 방, 달 방의 형태로 값을 치르고 사는 독거노인, 500엔 정도의 싼 방을 차지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도 있겠지만 갈 곳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엔도상의 설명에 의하면 가마가사키에는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이와 관계없이 오사카 시에서 지어준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는 가마가사키를 국가, , 부 차원에서 각각 보험 등록, 숙박 및 무료 의료센터, 직업교육 등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오사카 부에서는 노동지원센터라 해서 일용직 노동자를 서포터해주는 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직업교육, 연수 등 여러 강좌를 무료로 개설하고 있다. 엔도상은 이에 참여하는 연령대가 70~80세로 높으며 이들 역시도 고도 경제 성장기 때 모집되어 남겨진 사람들이라 하였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는 노동복지센터에는 직접 방문했는데 아무런 가구도 없는 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 자는 사람, 그 안에서 굳어진 생활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건물 자체에는 쾌쾌한 냄새와 눅눅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박스로 칸막이를 만들고 깨끗이 빤 수건을 널어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는 우리들 곁으로 방향제를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엔도상은 한 쪽 모퉁이에서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오전 다섯 시에서 오후 다섯 시 사이에 홈리스와 노동자들을 위한 인력시장이 열리고 이들이 고용되기 위해서는 주민 등록이 필수라 하였다. 주민 등록을 하지 않으면 여러 복지 지원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더불어 고용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민 등록은 그들이 가마가사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고령이 되어서도 일을 계속 하게 만들고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게 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단지 잠잘 곳이 없어 이곳을 방문했거나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사람들 또한 가마가사키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없을 경우 낮에 자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 대부분은 고용 보험을 들게 되는데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당연히 고용 보험의 혜택은 없다. 이는 곧 실업-노숙자로 이어지게 되고, 엔도상은 이런 지원센터들이 마켓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노동자가 노숙자가 되는 상황이 큰 문제라 하였다. 노동복지센터 건물을 나오며 이것이 지원인가에 대해 생각했고, 그들을 국가에 등록시키고 명목상 그들을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국가의 지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해진 마음으로 거리를 걸으며 이외에도 다소 허름한 모양새의 공터, 여러 사람들을 지나쳤다. 엔도상의 안내에 따라 우리 일행은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토비타 신치를 걷게 되었다. 카메라를 절대 꺼내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두세 명씩 떨어져 걸음을 옮겼다. 젊은 여자가 야한 옷을 입고 가만히 전시되어 있으면 할머니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형태가 길의 양 옆으로 쭉 이어졌다. 길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랐고, 길의 끝에서 생각나는 건 오사카 거리에서 보았던 전통 등()이었다. 오사카 거리를 걸었을 때 느꼈던 화려함이 이곳에서도 묘하게 느껴졌고, 성매매가 일본에서도 불법이긴 하지만 경찰도 어찌하지 못하는 곳이란 설명을 들었을 때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바삐 몇 걸음을 옮기자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껏 뭘 보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뚝 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반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전혀 다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이 아파트에는 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가마가사키를 엔도상의 안내에 따라 걷고 나니 허기가 졌다.

 

코코룸 안으로 다시 들어오니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마주한 것은 허름한 옷차림의 웃음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거리에서 보았던 아저씨, 할아버지들과 다름이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처음 앉았던 탁자에 앉았다. 정성스레 차린 음식이 탁자 위에 차려졌고, 좁은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밥을 먹었다. 가마가사키의 많은 사람들이 간신히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를 곱씹으며 코코룸에서의 밥 한 숟가락을 꿀떡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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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섬, ,

 

장수희(래인커머)

 

 

 

 

 

 

 

 

 

 

 

  

 

시공사의 ‘Just Go’ 시리즈는 여행정보 가이드북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구하기도 쉽다. 이 가이드북은 여행을 떠날 사람들에게 여행지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 한권만 들면 여행지 안에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을 것처럼 광고되기도 한다. “명소 총망라라든지 완벽 가이드는 이런 가이드북에 늘 따라붙어 다니는 광고 문구이다.



내가 오키나와에 가게 되었을 때에도, 도서관에서 ‘Just Go’ 시리즈의 『오키나와』편을 빌려 읽었다. 이 책은 오키나와를 북부중부남부, 공항이 있는 나하시, 그리고 케라마 열도로 나누어 설명한다. 나는 오키나와에 가기 전까지 그곳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이 여행 책자에서 설명하는 오키나와 본섬과 케라마 열도가 오키나와의 전부인 줄 알았다. 사실, 일본의 오키나와현은 오키나와 제도, 다이토우 제도, 미야코 제도, 야에야마 제도 등 총 36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근처에 중국과의 분쟁 지역인 센카쿠 열도도 있다.



그런데 오키나와를 이루는 수많은 섬들이 한국의 여행 가이드북에는 제외되어 있다. 한국의 여행 가이드북에는 없는 섬-한국이나 한국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남국 혹은 일본의 일부분일 뿐인 것처럼 느껴지는 섬들. 한국인들에게 오키나와의 섬들은 왜 삭제되어 버린 것일까.



사실, 오키나와는 한국영사관이 있을 정도로 한국 정부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속해 왔던 곳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1972년까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아 왔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자, 오키나와에서는 민단(7012)과 조총련(729)이 재빨리 조직되었다. 한국은 오키나와에 영사관을 설치함으로써 안보 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군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에 군부나 병사로서 그리고 일본군위안부로서 희생되었던 조선인에 대한 규명이나 당시 오키나와에 살고 있었던 1,000여 명의 한국인에 대한 지원보다, 냉전 상황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고려가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오키나와는 휴전선 없이 남과 북이 뒤섞여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해 갔던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현현되는 공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오키나와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삶은(혹은 기록은) 한국인에게서 서서히 잊히면서 인식의 지도에서 삭제되어 간다.



1973년부터 1995년까지 조총련의 활동과 북괴를 견제하며 오키나와의 나하시()에 주재했던 대한민국영사관은 이제 없다. 또한 1972년부터 1998년까지 활동했던 오키나와의 조총련 조직도 이미 해산했다. 이제는 오키나와에서의 조선인의 삶, 조선인의 고난, 조선인의 역사는 잊히고 아름다운 휴양지 오키나와의 이미지만 남아 있다. 한국인에게 휴양지혹은 관광지로 인식되는 오키나와가 다이토우 제도, 미야코 제도, 야에야마 제도를 포함한 363개의 섬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관광지, 휴양지로서의 오키나와는 본섬과 케라마 열도 정도로 족하기 때문이다.



여행 가이드북에선 소개하지 않은 미야코 제도의 미야코 섬에는 일본군위안부를 추모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아리랑의 비12개의 언어로 반전평화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는 여자들에게라는 기념비가 있다. 일본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는 장소 옆, 작은 비석이 놓여 있는 벌판의 주위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위안소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인에게 잊어진 섬, ‘오키나와의 미야코 제도에는 잊히고 배제되어 왔던 그들의 이 남아있다. 그런 오키나와에 가는 일은 우리가 냉전기를 지나면서 삭제시켜 온 , ‘, 그리고 들을 만나는 것, 그리고 , ‘, ‘들을 되살리고 듣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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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se

 

 

 

마틴

 

 

 

 

 

 

 

   가마가사키를 안내해준 엔도가 보여준 쪽방은 한국의 쪽방과 똑같았다. 오사카 도시가 건설될 때 모여든 노동자들이 살다가 슬럼화된 곳. 어느덧 고층아파트촌과 가마가사키 사이의 도로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섰고,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가마가사키를 우범지대라 낙인찍고 차별하고 있다. 가마가사키는 그렇게 오사카라는 도시의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J. 콘래드)이다. ‘풍경이 상처의 기원을 은폐하는(고진, 김영민)‘ 것이 모든 도시가 지닌 비밀이며, 그 콘크리트 속에는 인간의 물기가, 삭제된 이들의 표정이 있다.

 

   인간의 인지부조화는 놀라운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는 디카프리오의 정신세계가 닫힌 섬처럼 삭제되고 폐쇄된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이 드러나자 그의 여리고 성 같은 정신은 잿더미가 되면서 붕괴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부정하고 삭제하는 것은 체계역시 마찬가지다. 상처를 모르쇠하는 에 대한 저항적 문제의식은 교토 동지사대학에서 만난 정유진에게서 생생하다. 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에 충격을 받고 기지촌 두레방에서 활동하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와 국가인권위에서 활동한 그녀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미군에 의한 성범죄에 대해 피해국민의 인권보다 국가 안보가 우선이며 미군문제는 개인의 고통보다는 민족주권의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계속 싸웠다.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외면하고 있는 미군범죄의 희생자는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개인의 인권을 도외시하고 민족주권의 문제로 비약할 수 없다. 미군주둔지역 성매매여성을 한국인 전체와 분리하는 인식은 이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전제로 한다. 한국인임에도 한국인 전체와 구별된다고 보는 시각은 기지촌 여성들을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평화네트워크에서 만난 아시아의 여성운동단체들의 활동가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나 개인만의 생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의 느낌과 정서, 그 추이들을 섬세하게 헤아리기는커녕, 그것을 거칠게 삭제하는 남성들의 언어, 명분개념에 대한 회의는 그녀를 활동가에서 연구자로 이끌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타자의 낯섦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타자성을 삭제하는 일“(<무한히 정치적인 것의 외로움>)에 저항하면서 체계가 삭제했던(하려고 시도했던) 정념들을 소상히 추적해내는(<음란과 혁명>) 권명아의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음악은 왈츠형식의 3박자다. 3박자에는 정념과 운동성이 내재한다. 왈츠는 시민들이 추었던 첫 번째 춤이며, 3의 운동성에 따라 폐쇄계를 뚫어버린다. 18-9세기의 혁명들과 왈츠의 확산은 연관관계가 있다. 가마가사키에서 만난 카나요와 엔도, 무츠에게서 선선히 감동받은 것은 그들의 지치지 않는 서늘한 활기였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살며 더불어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그 삶의 리듬을 기타가 시작하면, 콘크리트속의 사람이, 삭제되었던 정념이 문을 두드린다. 열어달라고. 벨과 일본 악기 고토는 서로 갈마들면서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상한 세계의 모순을 표현한다. 리듬과 화성이 어긋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밝은 리듬만, 건강한 발걸음만 남도록 구성하였다. 위기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너의 손위로 나의 손을 포개며.

 

 

 

 

 

https://soundcloud.com/la-martin-2/v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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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국제선 공항청사. 우물안같은 좁은 나라, 여기에서만 통용되는 상식들과 숨막히는 명분들의 자장이 소멸하는 곳. 사실 그 완고한 것들이 임의적이면서 그토록 가혹하게 그어진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두 세시간전에 미리 모이는 약속이행의 장소인 것이 맘에 든다. 아아, 나는 약속을 정해놓고, 늦거나, 변경하거나, 기다려도 지켜지지 않는 것들에 계속 상처받는다.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타본다는 소설가 김비는 무려 4시간 전에 집에서 출발해 누구보다도 먼저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냉면을 먹는 중에, 김비가 꿈 얘기를 한다.

 

   "나에게 한 늙은 부부가 부탁을 하는 거야. 돈은 넉넉하게 드릴 테니, 죽은 아들을 좀 만나달라고목에 로프를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어. 어둠속에서 아주 작은 환함그의 실체를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그는 나의 얼굴을 잠시 쓰다듬었는데, 그 때 물속에서도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는 나와 애닲은 이별을 하고 바다 더 깊은 곳으로 멀리 사라졌어. 나는 애잔한 가슴으로 헤엄쳐 다시 물위로 올라왔어저 쪽에는 같은 일을 시도했다가 로프에 목이 졸려 죽은 여자도 보였어나는 운 좋게 성공한 거지그 꿈에서 난 나를 만난 건지도 모르겠어."

 

   짧지만 아주 강렬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의 함께하는 여행을 붙잡아주는 프리즘이 되었다. 낯설은만큼 낯익고, 낯익은만큼 낯선 일본과 일본인들에 접속하는. 낯익은 나로부터 검은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에는 공포와 피로가 따를 것이겠지만, 그렇게만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안식도 있었다. 가마가사키라는 오사카의 폐부와 천년고도 교토를 경유하여 동래구 복천동의 나의 집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꾸는 꿈은 서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렇게 꿈이야기를 길게 하고픈 욕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꿈이야기를 하는 자는 여행자와 같다. 자신의 꿈의 세계를 잊으며 잃어버리기 전에 의식의 세계에 기록한다는 점에서도. 현실을 현실 그대로만 전하는 자들의 플랫flat함이 가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언젠가 우리는 현실이 모든 것이라는 이들을 등지며 여행을 시작하였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만나지 않는 여행이란 없을 것이다.

 

   음악얘기를 해야겠다. 이륙하는 비행기에 샤먼의 종이 흔들린다. 어린 시절에 놀이공원에서 기계가 처음 움직이는 소리, 특히 회전목마가 시작하는 소리가 좋아 여러번을 탔던 기억이 난다.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이행한다는 뜻이며, 다른 세계로 진입하자마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 물에 뛰어든다. 5음계의 기타 라미솔라는 파도미b파와 만나면서 블루스 음계를 따른다. 두 개의 패턴에서 각음의 간격은 일치한다. 중심이 바뀐 소리일 뿐이지만, 그 순간에 블루노트가 시작되고, 이 작은 우울의 음(특히 미b)은 블루스가 그러하듯이-이 마이너노트를 메이저스케일로 연주하면 그루브가 발생한다. 우울한 것만은 아니게 된다. 말하자면 경계는 고정점이 있을 때만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되면, 메이저와 마이너의 차이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게 된다.

 

   김현은 <존재와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는 한 생물학 실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방이 붉은색으로 덮인 그런 협소한 방 가운데서 인간은 쉬이 미쳐버린다는 그런 실험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붉은 방에 갇힌 수인의 처절한 고통--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오직 붉다라는 단어로 환원되어버리고 모든 현상이 그의 발광을 재촉하는 것같이 느끼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탈출할 수 없는 수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런 방 속에 갇힌 존재이니까. 갇혀 있으면서도 갇힌 줄 모르는 존재자--그것이 우리 하나하나의 슬픔 모습이 아니었던가.”(12191)

 

   <행복한 책읽기>에서 1986523일의 일기에는 "현상학적 환원이 결국은 하강 초월이 아닐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던져 볼 만한 질문이다. 자신의 내부로 하강 초월하면 거기에 대상이 있는 게 아닐까?"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존재와 언어>에서 말라르메에 대해서 평하기를 "병자들만이 가득 차 있는 세계는 말라르메에게는 견딜 수 없는--그리하여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느낌을 강렬하게 던져주는 것이다."라고 한다.

 

   계속되는 드럼루프(loop : '고리'라는 뜻으로 같은 패턴의 리듬이 반복되는 것)는 자세히 들어보면 반음씩 계속 낮아진다. 마치 끝나지 않는 영원회귀의 반복이지만, 그 톤을 조금씩 낮추어가야 피리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리는 날 때에도 요란스럽지 않다. 그것은 김비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그녀는 날 때에도 경박해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청수사의 오래고 서늘한 기운은 압권이었다. 비록 우리의 삶이 때로 저주받은 것이라 느낄 때에도 이 모든 일이 그저 절이 꾸는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 절의 말이 일테다.

 

   나는 김비의 <경계인간>을 연재될 때마다 보았다가, 일본에 가기 전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 글은 말라르메식 하강초월-그녀의 이름은 -이었고, 말라르메가 그러하듯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제기하여 자기의 삶을 근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가령 프루스트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했던 것처럼. 하강으로서만 솟구칠 수 있는 고통이지만, 그 과정으로 변모하고, 그것에 새롭게 적응하는 과정마저 사라진 것이 이 세계의 불행이 아닐까? 그녀가 자기 존재의 심연으로 깊이 하강하여,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자기를 만나고, 다시 물 밖으로 헤엄쳐나오는 장면은 눈물겨웁다. 그것을 감행한 이의 글을 만나고, 그 저자와 함께 동행하면서 나눈 귀한 시간에 대해 이 작은 답가를 올린다.

 

 

 

 

https://soundcloud.com/la-martin-2/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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