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grgm 내부 사진, 책뿐만 아니라 쉽게 구하기 힘든 음반들, 핸드메이드 노트와 에코백들도 있다.)



부끄러움을 만나는 공간,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일은 책을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어떤 글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제야 텍스트의 행간의 가능성, 그 의미를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한 권의 책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grgm에서 책을 만드는 과정의 노동을 일컫는 것인데, 텍스트의 의미와 그 성질을 헤아려 글을 배열하고 종이(텍스트의 물질적 이동)를 고르고 제본의 방법 등을 따지며, 즉 행간의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일을 말한다. grgm(그린그림)은 부산에 있는 (소규모)독립 출판사이다. grgm을 찾는 이들은 아직 글을 쓰는 사람보단, 이미지 작업을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누구나'가 자신의 책을 만들 수 있을 때, 이미지 작업을 하는 사람보다 활자 작업을 하는 사람의 방문이 훨씬 적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대개 글 쓰는 이들은 자신의 글에 대해 잘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과 글쓰기의 등치는 이미 책 한권의 소재거리가 될 만큼 떼어내기 힘든 감정의 부산물인데, 그런 의미에서 글은 '가장 나 자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글에서 '나',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울 수 있을 때, 읽을 만한 글이 탄생"(오웰)할 수 있다는 말에 이미 여러 차례 빚을 진바가 있다. 나는 여기서 '글'의 본질적인 역설이자 그 역설을 담지하고 있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글 밖의 '외부성'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블랑쇼는 작품을 두고 "찢겨진 내밀성"이라 표현한 바 있다. 텍스트 그 자체의 내밀성은 한 편의 글이 쓰여 지기까지, 자신의 글과 마주하고 끊임없이 분열, 대립하는 과정을 겪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대입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작품이 작품으로 남는 한 결코 양립될 수 없고 진정되지 않는 상반되는 것들의 내밀성이고 격렬함 양립될 수 없으나 그것들을 대립시키는 이의제기 속에 충만함을 얻는 대립 작용의 상반성에 마주하는 내밀성"은 곧 담론 속에 내던져짐으로써만, 읽혀짐으로써만 생동하는 것인데, 블랑쇼는 텍스트 자체의 속성으로서, 텍스트가 행하는 '상반되는 것들의 고귀한 결합'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찬미를 통해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의 주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작품이 그 자체의 본질을 비로소 얻게 되는 작품 '외부'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저자와 독자라는 실체적인 누군가일 수도, 담론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인데, 나는 여기서 글, 즉 언어적 행위 후에 이루어지는 그 다음의 과정, 책을 만드는 행위라는 이 비언어적 행위(그 책에선 아무도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독자인가 저자인가?)또한 글쓰기의 외부성이라 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와 독사 사이에 있는 그 외부성을 통해 오늘날의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에 더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나아가 글 쓰는 이들의 실천적 동기를 이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나는 '후기'라는 형식을 통해, 함께 있었던 이들의 몫을 마련하는 글쓰기에 의욕을 내고 있었다. 그것이 곧 어울림의 발로라고 생각되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인용하며 그 자리의 의미를 만들고, 재현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 편의 세미나 후기와 발제문이자 후기이자 내 글이라고 생각되는 글 한 편을 들고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런데 책을 만들려 했던 애초의 목적이 두 편의 글을 노트의 표지로 만들게 되었다. 표지가 되버린 글은 노트로서의 상품 미학적 열정을 가졌고 역설적으로 나의 부끄러움은 기이하게 드러나 버린 꼴이 되었다. 나는 왜 책을 만들지 못했나. 물론 워크숍 당시 책이 아닌 노트의 형식을 택한 것은, 더 좋은 글을 쓰고자 이전의 글을 통해 다음 글을 '잇자' 라는 다짐의 의미였지만 결국 나는 그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잇지' 못했다.

 

책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서야 비로소 내 글을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 회피, 그 다짐 한 켠에 있었던 부끄러움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시간을 맞춰 가장 간단하게 '혼자서도 책을 만들 수 있다'라는 걸 일깨우기 위했던 워크숍은 책을 만들기 위한 기획토론을 거쳐 종이를 고르는 수고, 직접 책을 엮을 실색을 고르고, 내 손으로 제본(직접 손으로 엮는 실 제본을 했다.)을 하고 책의 양 페이지를 맞추기 위해 재단의 과정을 모두 거쳐 진행되었다. 몸의 수고가 동반되었을 때, 원고지 몇 매의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몇 문장 혹은 단어들의 나열이, 소셜 네트워크의 몇 백자로 제한된 단문들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단문의 잠재성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만드는 행위는 글이 곧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는 부끄러움을 만나고 벗어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곧 한 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는 말과 상응할 때,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니 한 문장을 쓸 때 이 단문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그 잠재성을 알아차려야 한다. 글의 비약은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비로소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부터 설명을 덧붙이자면, 김가을하늘님의 <K스토리> 신콩떡님의 <장님의 말>, 박냐옹님의 노트, 나의 노트이다.


 

김가을하늘님은 워크숍의 텍스트 분량 제한으로 자신을 인터뷰한 글을 가지고 오셨다. 하지만 다음엔 단편 소설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신콩떡님은 그간의 발제문과 단문들을 <장님의 말>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었다. 두 책 모두 스템플러로 제본되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했음을 밝힌다..^^; 박냐옹님은 얼마전 하늘로 간 강아지와의 추억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 사진을 직접 프린트해오셨다. 레이저 프린터인지라 노트 제작 내내 손에 잉크가 묻어 고생을했다. 노트 제작은 모두 실제본을 하였다. 실제본은 간격을 맞추어 직접 손으로 책이 흩어지지 않게 제본해야되는지라 초보자는 이 과정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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