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Side B. (1월12일, 1월19일 세미나에서)

"정동은 사이에 있음(inbetween-ness에서 태어나고, 곁-임beside-ness의 누적, 쌓임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정동은 신체적인 능력의 물매gradient로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우의 다양한 양태와 리듬 뿐 아니라, 감각과 감성의 골과 체를 통과하여 태어나고 소멸하는 그러한 힘-관계들의 지속적인 조절의 유연한 점진주의.(권명아 선생님 역, <An inventory of shimmers>, forces of encounter 미명의 목록/발명, 부딪침들의 힘들, 부대낌의 힘들)"


본 세미나(발전/정적 해체; 정념과 공동체)가 끝난 뒤, Side B에선 온갖 종류의 말들이 터진다. 본 세미나를 맞춰가기 위해 보조적으로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 곳에선 발정/전적 보조를 위해 서로를 닮아 가기도, 의심하기도, 업고, 업혀가기도 하며 세미나를 지속하고 있다. *가이님은 이 세미나의 성격에 대해서, "서로 뭔가 나누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서로의 공부 수준을 알고 있기에^^; 깊게 의지하지 않지만, 덧대고 덧대며 이해하게 된다. 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정동'이라는 그 뉘앙스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던 것은, 기존의 공부방식, 지식을 습득, 이해하는 태도의 변환(그러니깐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이론도 아니고, 아직 아니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본 세미나가 지나고, 여기서도 두 차례에 걸쳐, 진은영의 <<코뮨주의 선언>>과 들뢰즈의 <<비물질 노동과 다중>>을 함께 읽었다. 읽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매혹을 느끼기 때문인지, 기쁜 능동의 정동으로 가능한 코뮨을 도무지 상상, 체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인지(어떻게?) 세미나 내내 그의 글에 (반증 아닌)반감만 드러냈다. 2번째 본 세미나와 보조 세미나를 통해서 이러한 반감에 대한 살을 갖게 될 수 있었는데, 슬픔과 기쁨은 신체의 능력을 변용(감소, 증대)시키는 감응 능력으로 우리는 어떻게 코뮨을 구성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변용-결과에 대한 무지 상태에서, 그것의 원인,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을 어떻게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를 슬픈 수동적 정서들로 응집케 하는 "공포의 전략에 대한 고발"이 가능한가? 코뮨은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것임을 재차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작동 방식(입시지옥,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은 늘 이분법적인 선택지, 생체정치 포섭의 예로 촛불집회와 같은)에 대해 우리들은 늘 수동적으로 치이고 있다. 그런데 이 환상의 이분법을 깨는 "발명해야 할 코뮨적 감응"으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한 소년과 같은 '유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진은영이 정념의 낡은 서랍장에서 하나씩 꺼내놓은 것에 유쾌해 질 수 없었다.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직은 규정할 수 없다."


 

 

<<비물질 노동과 다중>>을 통해 모두가 "정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많이 내놓았다. "레닌은 누구인가?", "윤리는 무엇인가?", "정서, 정념 는/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현아님이 독특한 예시(*모스버거 인 도쿄: 일주일간 도쿄에 관광을 간 현아님은 햄버거를 두개 먹고 그 자리에서 구토 한 사건을 일컫습니다.)를 덧대주어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합리적이다'라는 것은 '보편타당'이거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특별한 윤리성과 '힘 관계'의 문제이다. 수많은 마주침과 정동 속에서 자신과 '공통-통념'을 형성할 수 있는 정서를 판별해내는 것, 그 속에서 자신의 신체의 관계를 조직을 짜나가는 능력-또는 판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스 버거를 1개만 먹는 합리성!)"
Q1. 그렇다면 신현아님의 코나투스는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판단을 하지 않았나?
A1. 우리는 다만 '만일 내가 관계들의 집합이라면 아마도 그것은 합리적인 관계들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합리적인'이라면, '오로지 되기becoming의 결과로서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p115)

그 렇다면 우리는 매번 생생한 실험 속에서 끊임없이 나와는 맞지 않는 상황들에 몸을 내던진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합리적이게 되어가는 것은 끊임없이 신체를 사용하여 (능/수동이든)무언가에 직면하여서 관계를 축적하는 것이기에, 결국 어떻게 합리적이게 되는가? 라는 질문은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상응할 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불완전성은 다시 나의 본질, 본질적 영역은 어디 까지인가?를 묻는 것인데, 이는 일종의 순수한 '순간성[캡쳐(신)]'이다. 내재성 또한 외부 영향인 것이기에 계속 변하며 경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부적실한 관념들도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는 자연적인 조건 상 외부적인 외연적인 부분들의 무한한 관계에 속해있다. 그 '외부적'인 정서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효과를 만들며 맞부딪힐 때, 즉 나에게 작용할 때 그것은 나에게 일부 속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1) "윤리는 힘의 문제이지, 의무의 문제가 아니다."(p52)
들뢰즈는 안/행함 가능성의 결단의 문제라고 말한다. 여기서 '윤리'란 불확정적인 어떤 것으로써, 아직 아닌 것을 선택함의 문제이다.
(2) conatus 자기보존의 유지의 노력이자 판단인데, 이 '자기보존'은 앞서 언급한, 힘 관계에서의 적절한 선택, 원인과 결과가 납득이 되는 선택을 했을 때
(3)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의 '전위' 개념은, 노동자를 내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는 농민이지만, 전위(앞서서 이끌어주지)하지 않으면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각성된 인텔리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을 말한다. 4월 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 일컫는 것 또한 '전위'되지 않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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