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장치를 발명하자’ 연속 좌담 2회

 


 

 

NPO와 공생 카페
: 지역 생협으로 발명한 ‘동아시아 공생 대학’

 

 

권명아

 

 

   이번 좌담은 일본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신명직 선생님에 대한 인터뷰로 이루어집니다. ‘운동을 하는 것’과 ‘운동을 사는 것’에 대해 이즈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이 삶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방법이 될 수 없을까? 이 좌담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다시 일본으로 늦은 나이에 이주하여 ‘한국계 규슈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신명직 선생님의 생애사를 따라가면서, 운동 방식의 변화를 되새겨보고자 했습니다. 생애사의 운동사를 연결해서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대학과 지역사회, NPO법인을 연결하여 새롭게 인문장치를 발명해온 과정을 한국 상황과 비교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은퇴 후의 계획을 묻는 필자에게 동아시아 공생을 위한 엄청난 계획을 말해주시는 신명직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며, ‘운동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단지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삶이 될 때, 지치지 않는 ‘기쁨’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즐겁고 신나하던 2015년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 풍경은 그 증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980년대 부천 노동법률상담소에서, 
‘난장이는 없다’는 ‘난시(亂視)’ 시절을 거쳐
동아시아의 ‘가리봉 공단’을 만나기까지

 


권명아: 10월에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가 성대하게 끝났습니다.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의 일본 첫 개봉이기도 했는데요. 저도 참여했습니다만,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에서 <위로공단>을 본다는 것이 참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했습니다. 또 <위로공단>의 서사가 마치 신명직 선생님이 걸어온 지난 생애사와도 겹쳐져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소개 겸 감회를 말씀해주세요.

 

신명직: 영화 <위로공단>을 작은 프리뷰 화면으로 보면서 좀 뭉클했습니다. 80년대 가리봉 그 시절 그 사람들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돌이켜보니 저 역시 예외가 아니더라구요. 훌쩍 30년 넘게 흐른 세월들을 임흥순 감독님이 잘 포착해 주셨어요. 하지만 영화 <위로공단>이 그때 그 시절을 단지 회고하는 영화였다면 아마도 우리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았을 거예요. 한반도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가리봉으로 공단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너무 반가웠어요.

   사실 1992년 무렵, 그러니까 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 이후 임금도 많이 오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동조합도 많이 생겨나면서 제 자신이 무척 초라해 보인 적이 있어요. 그 때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생고생해서 함께 노조를 만든 간부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희들 대신 인권변호사를 찾아가더라구요. 처음엔 무척 섭섭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는 건 박수치고 환영할만한 일이었던 거죠. 사실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70년대 말에 나온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난장이의 벗 ‘지섭’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거든요. 이젠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 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제 난장이는 없다.’

   하지만 ‘이제 난장이는 없다’고 했던 제 말이 틀렸다는 것은, 제가 대학원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보다 싼 임금을 찾아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빠져나간 한국계 기업들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알게 되었거든요. 문제는 ‘국경’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경’을 들어내고, 경계를 동남아시아까지 확장시키자, 너무도 많은 ‘난장이’들이 ‘전태일’들이 한꺼번에 뚜벅뚜벅 걸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네요.

   영화 <위로공단> 속 캄보디아 이야기는, 한국 국경 너머 존재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난장이’를 찾아 떠난 저의 궤적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한국의 ‘난장이’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난장이①=가리봉 ‘외딴방’ 여공에서, 난장이②=가리봉 이주노동자와 난장이③=비정규직 노동자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었던 것이지요. 87년 대 투쟁 이후 오른 임금 인상분이 글로벌 자본의 집요한 공격으로 다시 원위치되고 말았다는 것. 결국 ‘난장이가 없다’는 저의 말은 ‘착각’이거나 ‘거짓’이었던 거죠. 영화 <위로공단>은 바로 저와 같은 난시자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 6년,
본국으로 돌아간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지의 노동자와
한국, 일본을 연결하기 위한 ‘한국계 규슈인’의 여정.
대학이라는 현장과 이주노동, 공정무역을 어떻게 연결할까?

 

 

권명아 : 먼저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에서는 NPO법인 형태로 대학, 시민사회, 지역이 연결되는 ‘운동체’ 형식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NPO법인은 어떤 형태인가요? 설립 과정, 국가나 대학, 지역사회의 지원이나 연계 방식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또 NPO법인과 대학, 지역의 ‘그린코프’ 같은 협동조합을 연결하는 방식은 일본사회에서 일반적인가요? 아니면 선생님 나름의 경험의 결과인가요? 한국은 최근 대학 위기 속에서 ‘협동조합’ 형식으로 대안 대학이나 협동체를 만드는 것이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협동조합 운동과 NPO 형식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도 선생님 의견은 어떠신지요?

신명직: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어능력시험’ 장소를 구마모토에도 유치하는 것이었어요. 규슈에서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 대학 다음으로 저희 대학에서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지요. 그 다음으로 케이팝과 한국어 스키트(촌극)를 경연 형식으로 치루는 한국어대회를 시작했고, 이어서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와 동아시아 공생 커피 사업을 새로 시작하면서 NPO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업을 공식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죠. NPO는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법인화된 NGO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산, 결산 상황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보고해야 할 의무가 따르죠. 일정 규모가 되지 않을 경우 좀 번거로운 게 사실입니다. 일본엔 생활협동조합은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협동조합 개념은 그다지 활용되지 않고, NPO유형의 법인체가 최근 크라우딩 펀드를 기반으로 발전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나온 10년을 돌이켜보면 가장 발전한 것이 안정성과 지속성인데, 여전히 불안한 것 역시 안정성과 지속성일 것 같습니다. ① 동아시아 공생 커피를 지역생협에 공급하고, ②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오픈해 지역의 장애인 단체에서 쿠키를 구입, 판매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이루고, 관련 교육과정을 개발할 뿐 아니라, ③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와 한국어대회 학생 스태프 역시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긴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연결시킬 전문 인력 없이는 유지, 발전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 인력의 양성과 이들의 경제적 자립이 가능할 만큼의 파이를 키워내야 비로소 안정적인 재생산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 이외에 최근 다른 동아시아 지역과의 연계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곳은 라오스입니다. 라오스 볼라벤 고원의 자이커피 생두를 수입해서 로스팅한 ‘라오스의 향기’를 구마모토 지역사회와 대학에 공급하고 있는데요. 학생들과 함께 라오스 볼라벤 고원에서의 현지 워크숍,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 관련 대학생 그룹과의 공동 워크숍 등이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오스 커피마을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대규모 유기농 콩농장, 지금까지 함께 오랜 여정을 함께해 온 네팔의 커피마을 등과도 지속적으로 공생 네트워킹을 계속해나갈 예정입니다.

   제가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를 만든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네요.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넘어선 대안의 시스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지를 고민하던 끝에, ‘한국계 규슈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이런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희 NPO가 하는 일 중 하나는 ‘공정무역 커피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95년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접한 파키스탄의 전태일 ‘이크발마시’(아동노동을 세계에 고발하다 죽음을 당한)를 찾아 꽤 오랫동안 네팔을 방문해 왔는데, 아동노동 문제 역시 글로벌한 경제 시스템-양극화(격차)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때 발견한 것이 공정무역이었습니다. 거대한 글로벌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운동을 하다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지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이 대안의 시스템을 구축해갈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한국의 이주노동자 단체와 한국과 일본의 공정무역 단체의 도움을 받아 네팔의 커피 생두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신용장도 작성하고 세관 검사까지 다 받은 뒤, 차를 몰고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생두를 실어 나르던 어느 날 하루 해가 저무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하늘을 쳐다보다 문득 이건 너무 원시적이다 싶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해온 사람들과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느꼈죠. 수소문 끝에 지역 생협에 저희 공정무역 커피를 소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히말라야의 향기’(네팔 커피)에서 ‘라오스의 향기’(라오스 볼라벤 고원 커피)로 중심축을 옮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공정무역도 사업인지라, 역시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직접무역 방식에서 일본의 ATJ(Alter Trade Japan)를 통해 커피 생두를 공급받는 간접무역 방식으로 형식을 바꾸었습니다. 최소한 컨테이너 규모로 생두를 수입하지 않으면 단가가 비싸져서 ‘공정’의 정신 역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저의 ‘현장’이 대학이라는 것. 현장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대학과 지역사회 사이에 글로벌한 시스템을 네트워킹할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동아시아 공생 북카페’입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대학과 지역사회를 연결시킬 단단한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NPO법인 동아시아 공생 문화 센터’는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을 기반으로 ‘동아
시아 공생 영화제’를 지속해왔고,최근에는 동아시아 공생 북카페를 학교 내에
열었다. 이 일들은 모두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고 있다. 
공생 문화 센터와 영화제, 공정무역 카페 등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또 이런 경험과 활동을 대학제도 내에 정착시킬 방안은?

 

 

권명아 : 초기의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에 비해 금년 영화제 때는 학생들 참여도 훨씬 많아졌고, 동아시아 공생 카페 역시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또 대학에서의 이른바 일반적인 교육 방식과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신명직: 저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이 신나고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장한 목소리와 결의에 찬 눈빛도 때론 중요하겠지만, 그건 그리 오래 가지도 여럿이 함께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최근 일본 젊은이들이 자기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 역시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 달리, 진지하지만 흥겹고 경쾌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저희 학생들도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하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물론 처음엔 다들 소극적이었죠. 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름의 성과를 내자 학생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크고 작건 간에 일하는 과정이 즐거울 때, 또 자신들이 한 일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박수를 받을 때, 힘들어도 이겨내고 또 다른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공생 카페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면서, 사람(교육과 배치), 물건(물품), 돈(회계)을 관리할 시스템을 정착시켰는데, 이를 통해 학생들은 카페 운영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자발성이 늘 일정한 것이 아니어서, 자발성의 진폭이 큰 만큼 시스템을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시스템을 학제화하여, 학부를 넘어선 학제간 실습(혹은 인턴) 커리큘럼 같은 것을 만들어, 실습이 가미된 학과간 공통 옴니버스 수업을 제도화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옥스퍼드 대학과 옥스팜, 혹은 페어트레이드 대학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실험들이 위기에 처한 대학 교육과 인문학 교육에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구마모토 지역 주민과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은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나? 
그리고 한국학 교육이 신나고 재미있는 실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권명아: 일본에서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학은 점점 더 위기에 봉착하고 있고, 대학제도 내에서 매우 협소한역할에 할당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교수자의 경우도 ‘한국어 교육’만으로는 매우 제한된 역할을 하게 되어서 교육자로서의 보람을 찾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일들은 기존의 일본 대학에서의 ‘한국학 교육’이나 ‘한국어 교육’의 제한된 역할을 넘어서려는 노력이자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 역시 사실 일본에서의 ‘한국학 교육’처럼 제한된 역할에 한정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선생님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공정무역 카페, NPO법인과 지역 생협과의 연계 활동이 이런 대학의 위기를 어느 정도 타개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신명직: 일본 학생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소중한 지점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국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학생들인 거죠. 제가 학생들과 함께 추진해가고 있는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나 공정무역 카페는 그러한 학생들의 의지를 조금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들의 70~80퍼센트는 케이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케이팝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심도는 훨씬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는 고등학교 시절 독학으로 한국어를 체득한 학생들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 곧 케이팝을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싶었죠. 지금까지 8년에 걸쳐 ‘함께 말해 봐요 한국어대회’를 개최해 왔습니다. 한류 붐이 한창이던 시절의 여세를 몰아,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매년 200여 명이 출전하고 500여 명이 함께하는 ‘축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어 촌극과 케이팝을 중심으로 한 축제에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보여주는 열정도 학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어대회 기간과 영화제 기간에 한정해서 공정무역 카페를 준비・운영해왔는데, 이를 통해 한국만이 아닌 더 넓은 세계로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8년여를 준비한 끝에, 학교 안에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상설 공정무역 카페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능동성을 유발시킬 다양한 실험이 절실한 사회적 요구와 맞아떨어질 때, 대학의 위기 혹은 인문학의 위기는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에너지 대량 소비와 원전, 경제성장률의 둔화, 글로벌화로 인한 양극화(격차) 등은 대학사회에 그 돌파구를 요청하고 있고,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이를 돌파할 대안을 제시할 경우 대학은 물론 지역사회 역시 크게 환영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마모토에서의 10년여의 실험은 이제 실험 단계를 거쳐 제도화에로의 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의지와 전망 모두 그리 어두운 편은 아닌 듯합니다.

 

 

 

노동운동에서, 일본 정착까지 
“초심을 잃지 않되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현장을 바꾸어가기”

 

 

권명아: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시다가 대학원에 늦게 진학하시고, 일본으로 가서 정착을 하셨습니다. 사실 일본에 유학을 하신 것도 아니신데 일본 대학에 직업을 갖고 정착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좀 알고 싶습니다.

신명직: 아마도 ‘한류’가 저를 일본에 정착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일본에 와서 정착을 고민하던 시점이 한류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1차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죠. 2002년 한일월드컵, 2004년 <겨울연가> 현상이 저를 일본에 정착하게 만든 배경인 것 같습니다. 사실 <겨울연가> 현상은, 근대 이후 일본문화가 대륙으로 건너갔던 것과는 거꾸로 대륙 쪽의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온 최초의 현상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문화가 정치, 외교 혹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죠. 이 ‘한류’ 현상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느냐 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의 한류는 ‘동아시아의 공생’과 무관하지 않죠. 구마모토에 정착한 이후 한류를 동아시아의 공생과 관련된 새로운 시스템의 동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전념해 온 것 같네요.

   제가 좋아하는 웹툰 <송곳>이 최근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되고 있더군요. 1990년대 초에 그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노동상담소를 2010년대 브라운관에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의 노동상담소는 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대중문화와 디지털 혹은 글로벌한 로컬사회와 보다 긴밀하게 결합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게 아닐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하고 있는 일들이 예전 그러니까 젊은 시절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초심을 잃지 않되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현장을 바꾸어 가려했던 것 같습니다.

 

 

 

뿌리내릴 지역사회로서의 구마모토 발견
한류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공생의 꿈
한국어대회에서 공생 영화제로, 다시 꿈꾸는 다큐영화 제작

 

 

권명아: 처음 일본에 가셨을 때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셨을 때랑, 구마모토에 이주해서, 대학을 기반으로 이주노동과 지역사회를 고민하면서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만들면서, 이어지면서도 달라진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변화와 연속은 어떤 것들일까요? 그 변화 속에 도쿄와 구마모토라는 지역적 차이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신명직: 제가 도쿄에 있을 때는 뿌리내릴 지역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구마모토라는 곳에 와서야 비로소 뿌리내릴 지역사회를 갖게 되었죠. 하지만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에의 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어 보는 게, 저의 남은 대학생활 10년 동안의 꿈이기도 하죠. 동아시아 공생 영화제를 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향한 제 꿈은 점점 더 커진 것 같기도 합니다. 대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하기보다 제 주변의 일상을 조금씩 담아나가려 하는데요.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가 되기 위해선 보다 의미 있는 일상을 살아가야겠죠.

 

 

 

이주노동과 동아시아 공생을 로컬에서 접목시킨다는 것의 의미
대학이 지역사회와 만나는 길목에 위치한 동아시아 공생 카페
동아시아 공생 마을과 거리 만들기, 그리고 공정무역 마르셰(시장)

 

 

권명아: 선생님의 생애사의 변화와 이른바 ‘운동 방식’의 변화가 흥미롭게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청년기의 노동운동, 일본 이주, 도쿄에서의 다큐멘터리 운동과 구마모토에서의 이주노동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공생 평화 문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생애사의 변화와 관련이 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식을 하셨는지요? 이제 어떤 점에서는 ‘은퇴’를 준비하실 나이이기도 합니다. 일본사회의 뉴커머로서 이후의 삶과 지역을 연결하는 어떤 또 다른 ‘운동의 형식’을 고민하고 계신지요?

신명직: 제가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카페, 지역 생협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커피 사업은 여전히 영세한 규모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커피’나 스페인의 ‘몬드라곤’처럼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의 규모로 성장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점’에서 ‘선’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동아시아와 규슈를 포괄하는 작지만 큰 ‘면’을 이루어가는 꿈을 늘 꾸고 있죠. 네팔이나 라오스의 커피마을뿐 아니라 구마모토를 비롯한 규슈에서의 새로운 고용-노동의 창출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기존의 ‘노동’이 아닌 새로운 ‘노동’을 향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정무역 프로젝트는 ‘이주노동’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 네팔 커피 생두를 수입하던 시절, 저에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한국에서 이주노동 운동을 하다 귀국한 네팔 청년들이었습니다. 네팔 현지에서 새로운 지역 만들기 운동을 하는 이들은 동아시아를 새롭게 만들어갈 중요한 동력-에이전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한국의 노동 문제에서 이주노동 문제로 넘어온 것은 저의 존재와도 무관하지 않죠. 제 자신이 전문직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1국의 노동 문제에서 글로벌한 노동 문제로 트랜스내셔널화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동아시아의 이주노동 문제와 오랫동안 접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지만, 이주해 온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보다 중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아시아 커피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유기농 콩, 혹은 유기농 면화 등을 생산하는 마을 사람들이 이주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노동과 이주노동, 동아시아 공생 프로젝트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의 차이일 뿐, 별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도쿄나 서울의 우뚝 선 대기업 건물 앞에 서게 될 경우, 주눅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구멍가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같은 거죠. 하여 남은 10년 동안 지금의 파이를 키우는 일에 보다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공생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지역사회 공정무역 단체와 함께 추진하고 있는 ‘공정무역 마르셰(시장)’, 대학 공정무역 카페를 거점으로 확장시켜 갈 ‘동아시아 공생 거리’ 만들기 사업 등이 이에 해당될 것 같네요. 지역사회와 보다 밀착한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 갈 생각입니다. 어디까지 가능할진 모르지만 가는 데까지 가 봐야죠.

 

 

 

 

 

 

 

 

 

나는 소중한 봄

-서울 시립 청소녀 건강센터 <나는 봄>의 백재희 선생님과의 만남

 

 

 

장수희, 정선욱(래인커머)

 

 

 

 

 

 

 

 

   아프꼼은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과 함께 한국의 여성 활동가/연구자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살림에서는 성매매특별법 시행 10주년을 맞이하여 이에 대한 인터뷰를 준비하였고, 아프꼼에서는 여성 연구자/활동가로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선배들의 경험을 듣고 싶었다. 이 기록들은 여성 연구자/ 활동가 선배들과의 만남의 기록이며, 아프꼼과 살림의 네트워킹과 움직임의 기록이다.

 

   1112일의 일본 워크샵 이후, 아프꼼은 서울에 가서 살림의 변정희 선생님과 정경숙 소장님과 함께 <나는 봄>을 찾았다. 마당의 흡연 공간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고 있는 소녀들-이것이 <나는 봄>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청소녀 건강센터라 뭔가 엄격하고 병원같은 분위기일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 자유로운 곳이구나, 그리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적인 느낌!

 

   서울특별시청소녀건강센터 <나는 봄>은 가출과 성매매 위기에 노출된 청소녀들이 스스로의 몸을 돌보고 상처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의료지원, 심리지원, 교육지원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봄>지원은 구체적으로 산부인과, 치과, 가정의학과 등의 진료와 정신보건 상담을 할 수 있는 의료지원, 가출 중 이곳을 찾는 청소녀들에게 음식나눔을 하거나, 생일상 이벤트를 하는 등 청소녀들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었다.

 

 

청소녀 지원의 현장

 

   우리가 인터뷰 한 공간 바로 옆에는 자활학교가 있어서 많은 청소녀들이 들락날락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청소녀들이 창문사이로, 혹은 문을 살짝 열고 백재희 선생님께 인사하거나 손을 흔들면 선생님도 같이 손을 흔들고 그 아이의 일정을 묻곤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안해주면 삐져요.” 하고 웃는다.

백재희 선생님은 소녀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는 봄>에 하나씩하나씩 구비하고 만들어 나가는 형식으로 일해왔다고 한다. 제일 먼저 신경썼던 것은 음식과 질병. 보통의 감기나 배앓이 같은 것은 편의점에서도 약을 살 수 있지만, 소녀들의 입장에서 치과나 산부인과 진료 같은 것은 돈도 많이 들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장소였다. 물론 기존의 병원과 연계하여 소녀들을 지원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소녀들도 연계된 병원이라는 공간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러면 소녀들은 자유롭게 오지 못하게 될 경우도 많고, 자신의 이야기나 상황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털어놓지 않을 때도 많다고 했다. 소녀들은 조금 더 친해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놀라지 않겠다라고 생각되어야만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소녀들은 선생님들에게 종종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하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생일상을 차려주는 행사 때는 진짜 엄마가 해줬던 음식을 차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 친해진 뒤에 엄마의 모습을 한 선생님이 니 내한테 엄마 같다고 그랬제, 세상에 어느 엄마가 딸이 밖에서 자는 거를 좋아하겠냐.’라고 말할 때도 있다고 한다.

   백재희 선생님은 해가 갈수록 <나는 봄>을 들락날락 거리는 소녀들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을 보면서 이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소녀들이 이곳을 마음껏 마음껏 드나들고, 편하게 와서 밥도 먹고, 밥도 싸가기도하고, 진료도 받고, 성교육이나 교육도 받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성매매피해자에 대한 지원

 

   막달레나 상담소, 용감한 여성 연구소에서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오신 백재희 선생님. 막달레나 상담소에서 만난 용산 성매매집결지의 언니들과 했던 <판도라>라는 사진작업을 소개해 주셨다. 다큐멘터리 <꿈꾸는 카메라>에서처럼 마음대로 남기고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세요라고 했을 때, 언니들은 아무렇게나 마음껏 사진을 찍어왔고, 사진을 하나하나 설명해 가면서 같이 모여서 봤다고 한다. 우리들의 눈에 보여진 것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백재희 선생님은 그 사진 하나하나에 얽힌 의미가 너무 거대해서 그 작업은 절대 다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은 과제라고 하신다.

   백재희 선생님은 용산 성매매집결지가 사라질 즈음의 당사자들은 용산이라는 장소에 대한 감정이 수몰지역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용산집결지가 사라지고 재개발 되면서 가장 큰 성매매 업주의 집 마당에서 다함께 고별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 다 같은 임대 아파트를 신청했고, 운좋게도 한 동에 우루루 모두 당첨되었다고 한다.

   성매매 당사자들은 집결지 내에서만 생활해왔기 때문에, 혼자서 이주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가 되는게 너무 무서워서 이주 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사 간 낯선 동네가 두려워서 언니들은 다 같이 손잡고 지하철을 타고 용산으로 나들이를 매일같이 나갔다고 한다. 그 공간과 분리되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들을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당사자들은 용산과 분리가 되고 또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쓰기도 했다. 언니들은 지역성당에서 새로운 사회생활을 만들어나가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나 교수친구 있다.’ 하고 자랑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나갔다고 한다. 매년 만나서 술먹고 놀고 하지만 그런걸 준비하면서 언니들이 소속감도 느끼고, 싸움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한다고 얘기해주셨다.

 

 

연구자와 활동가

 

   용감한 여성 연구소는 막달레나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이 연구소의 제 일원칙이 연구위원이 안나오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재희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날라리처럼 살고싶은 사람들이 날라리처럼 모인 곳이라서 무조건 연구소에 출근해야 하는 강압 보다는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때, 하고싶은 만큼만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첫 책은 실무자가 글을 가져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실수를 해서, 내 생각이 이렇게나 깨졌다.’라는 실패의 기록들을 적어나간 것이라고 한다. 그 책이 바로 『용감한 여성들(늑대를 타고 달리는)』이다. 책을 만드는 도중에는 글들 중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글에 다 드러나서, 당시 같이 글을 쓰고 연구했던 어린 활동가들과 글을 함께 쓰고 읽으며 격론을 나누었다고 한다. 실무자들은 활동가인 우리가 왜 글까지 써야 하느냐는 반발도 했었지만, 연구자가 아닌 실무자, 활동가가 가진 자신만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겹고 어렵지만 진행했던 것이 이 책을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회상하였다. 백재희 선생님은 그것은 활동가가 연구자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고 하신다. 연구자들은 현장 활동가들의 자료들을 빼먹어가는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화살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활동과 연구가 서로 소통되기 위한 것, 그래서 활동가의 자신의 언어를 갖기 위한 작업, 노력이 바로 글쓰기작업이었고, 연구였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당사자들이 원하는 이야기, 하고싶어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내는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신다. 활동가들이 언어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당사자들도 그 언어를 쟁취하기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백재희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기억나는 한마디는 내가 잘 쉬어야만 상대편을 잘 대해주고, 배려해주고, 지지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여러 행정적인 일들과 인력부족으로 소모되기 쉬운 연구자/활동가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닐까.

 

달팽이를 만나다

 

 

 

정선욱(래인커머)

 

 

 

 

 

이성민 선생님은 1984년 극단 새벽을 창단하고 삼십 년째 동인제 극단으로 극단을 이끌어오고 있다. 극단 새벽의 상임 연출가로서 극단의 주요 작품들을 직접 쓰고, 연출한다. 요즘은 효로 연극학교를 통해 부산의 연극인을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은 커다랗고 오래된 잠바를 입은 작고 마른 몸에 희끗희끗하게 흰머리가 나 있지만 눈썹이 곧고 눈빛이 똑바른 조금 무서운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몇 번 만나고난 뒤 나에게 그는 따듯하고 귀여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키우는 강아지 봄둥이에게 무릎에 앉을 거예요 내려갈 거예요? 하고 존대를 하기도 하고, 항상 들를 때 마다 밥은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하면서 찰기가 도는 현미밥을 한 그릇 뜨고는 수저를 턱 내 주기도 했다. 나랑 친구가 웃긴 말을 하거나 하면 괜히 웃음을 감추면서 윗입술만 살짝 움직여 웃곤 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무서웠던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따듯한 느낌만 남아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인터뷰 요청을 했고, 그는 나를 왜 인터뷰해요 하면서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면, 극단 사무실로 오세요.”라는 말에 한동안 매일같이 들렀던 극단 새벽 사무실을 향했다. 근현대사 박물관을 지나고 중앙성당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니 극단 새벽의 사무실 간판이 보였다. 아래층의 밥집을 지나 왠지 바닥이 찐득찐득한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면 벽마다 지난 공연의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왕왕 짖어대며 반겼다. 공평하게 한 마리씩 안아줘야만 조용해지는 강아지들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긴 기둥에는 지역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민들레의 꿈 프로젝트에 대해 적혀있었다. 사무실의 반 이상이 책으로 둘러싸여있었고, 책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는 극단 새벽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들레의 꿈 프로젝트가 떠올라 민들레 차를 사갈까 하다가 국화차를 사왔다는 내 말에 다들 웃었다. 웃으면서도 멋쩍게 인사를 하고 그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약간 어색하기도 했고, 인터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한 마음에 사실 처음에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몇 분을 그를 쳐다보기만 하며, 그는 천천히 커피만 마시며 흘려보냈다. 입을 열어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요즘 잘 지내시는지, 저는 학교 다니느라 불규칙해져서 살이 또 찌고 있다든지 하는 얘기들만 계속 해 댔다. 그는 또 윗입술만 슬쩍 올려 웃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흐흐, 인터뷰 할 줄 모른다. 보니까.”

 

그는 반쯤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그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어머니는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어리고, 할머니는 나이가 드셨다. 이런 여러 이유로, 그는 낮에는 학교를 가고 밤에는 일을 하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부산역으로 가서 기차에서 내려온 썬데이서울을 팔고, 그걸 팔고나면 미군부대 근처의 바 텍사스촌에서 껌이나 담배를 팔았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어 그 바의 여종업원들이 미군들과 여인숙에나 들어갈 때쯤이 되면 여인숙 거리를 다니며 여종업원들에게 찹쌀떡과 김밥을 팔았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네 시쯤, 그는 두어 시간쯤 잠들었다가 다시 학교를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특별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들도 다들 신문 배달 알바 같은 정도는 다 했었고, 다들 어려웠다. 그는 그저 학생치고 많이 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꽤 바쁜 학교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 2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은 매우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캡틴 같은 선생님이었다. 국어 선생님인데도 역사를 더 많이 가르치고,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내용들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면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심지어 그는 유신이었던 당시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정상적인지를 틈만 나면이야기 했다.

 

그때 주로 말했던 게 뭐냐면 1인분주의 사회, 지금으로 따지면 개인주의 같은 거죠. 이런 삶을 살면 자기는 행복한지 몰라도 결국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타인한테 고통을 주게 된다. 그렇게 된다. 본인은 못 느낀다. 그래서 세상에게 무관심하고 세상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일생을 살다가게 되면은 자기는 행복할지 몰라도 자기 외에 불행해 지는 사람이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제일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감수성도 예민했고.”

 

그 선생님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그 후로도 부산의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에게 야학을 하며 수업을 해주기도 하고,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가담하게 되고, 해고되고, 수배되기도 했다. 여공들을 가르치고, 구로공단에서 전구소켓을 만들면서 그는 여공들과 노동자들에게 진짜 현실의 세상을 오히려 배웠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 그는 작품을 쓸 때 어딘지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로 글을 쓰게 되었다.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에는 10대 탈학교 학생인 영희와 20대 지방대 백수인 철수를 위로하는 4050대 삼촌과 이모, 엄마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왔다.’에는 소녀였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4050대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살아온 경험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다수로 근처에 지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기록해나갔다. 그 단상들이 겹쳐지고 겹쳐지면 어느새 그 생각들은 서로 연결 되었고, 하나의 구상이 되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요. 일단 어, , 사는 얘기 하다보니까 노동자들도 여성들도 많이 만나고 학생들도 만나고. 관련된 것들을 그때그때 사람만나고 얘기하는 게, 일이예요 나는. 그 사람만나고 이야기 하는 그 속에서 작품이 그려지고 하는 거죠.”

 

이렇게 글을 써서 그런지 그는 절대 다작하는 극작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쉬엄쉬엄 지치지 않게 계속해서 글을 쓰고 또 그것을 무대에 올리고 공연했다. 그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일이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억지로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니까 글 쓰는 거는 식욕하고 같아요. 막 허기를 느끼고 밥 먹는 것처럼 쓰고 싶으면 쓰여져요. 그냥 아니 뭐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여지는 거지 억지로 쓸라고 하면 글도 막 어거지가 되고 일상에서 느끼는 게 중요한 거죠. 반응을 자꾸 해야 돼요. 그때그때 느껴지는 것들을 언제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냥 잡다한 것에 느껴지는 것을 쭉 기록 해 놓는 거죠. 그냥 단편적인 생각을 그러면 아무 상관도 없는 단상들이 결국 연결이 될 수도 있고, 글 쓰는 사람이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끼고 부지런히 기록하는 거예요.”

 

그는 억지로 뭔가를 느끼려고 노력하거나 느껴지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뭔가 느껴지고 마음에 와 닿으면 그것이 뭘까 왜 이렇게 느껴지는 걸까 하고 계속 생각하고 끝없이 고민했다. 그는 그 와닿음충격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만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무언가를 다시생각하게 하는 어떤 충격. 그게 웃긴 일이 될 수도, 슬픈 일이 될 수도, 화날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왜 웃었을까, 왜 슬펐을까, 왜 화가난걸까 하고 생각해보고 돌이켜보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째 충격은 할머니에게서였다. 그는 어릴 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그 집 앞마당에서 토끼를 키웠다. 하지만 동물을 기르기에는 그가 너무 어렸던지 토끼는 자주 아프고 점점 약해져갔다. 어느 날 그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키우던 토끼가 온데간데없었다. 할머니는 토끼가 아파서 어디 보냈다고만 했다. 하지만 그가 저녁을 먹을 때 나온 고기는 왠지 평소와 식감이 달랐고,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내 토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할머니는 거의 전부 같은 존재였고, 그런 사람이 자기가 기르던 토끼를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린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로 그는 한 달이나 넘게 할머니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왜 할머니가 그럴 수 있는지 계속 생각했고. 어린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할머니를 몇 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충격이 내가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계기가 되거든요. 그게 뭐 삶과 죽음과 이런 것들은 복잡한 문제들인데 그 복잡한 생각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는 거고. 그담에 이제 사람이 철들어 가는 게 끊임없이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상처받으면서 세상을 알아가요. 연애하다가 상처받기도 하고, 또 무엇을 함께 도모하다가 상처받기도 하고 계속해서 그담에 일상에서 뭘 할라고 목표를 세우면 자꾸 안 되고, 좌절당하고, 그러면서 성숙해가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얘기가 잘되고 원하는 대로 되면 이 생각이 발전을 안하는 거예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근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가 자꾸 깊어지고 또 예술가는 거기서 이제 창작이라는 생각으로 성장하는 거죠. 예술이 그런 거죠. 우리가 사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술이 나오지, 아무 문제없다고 하는데 예술 할 일이 없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무슨 소재가 없어지는데, 모든 예술 작품의 기본은 갈등인데 이 갈등이라는 거는 세상의 문제거든요. 갈등이 없는 소설을 누가 읽고 갈등이 없는 드라마를 누가 봐요. 그거를 아무 재미도 없는데.”

 

그러고 가장 기본적인 갈등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인간다움과 자기 본능 사이의 괴리에서 부터 출발해요. 그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갈등 구조가 항상 있어요. 그게 예술이라는 게 그래요 그래서 예술가는 불온한 상상력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러고 자기 안에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갈구하는 세상이 있어야 되요. 왜냐면 지금 사는 세상이 별로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 다라면 예술을 해야 될 이유가 없는데. 그니까 식욕이 없는 사람은 의욕이 안 생기는 거랑 똑같아요. 창작욕구도 그런 건데 창작 욕구는 허기예요. 허기. 삶에 허기진 거예요. 끊임없이 배고프고 그런 거예요.”

 

그는 끝없이 허기졌고, 끝없이 식욕이 돌았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해 낼 힘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조건만 되면 언제든지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써 내거나 표현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극단을 운영하면서 모든 단원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할 만큼 돈을 벌기란 거의 불가능 했다. 그는 삶을 때때로 돌아보고 반성했다. 정말 필요한 것인지 되묻게 되었고,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봐 내려고 애썼다.

 

글 쓰는 거는 두 가지가 중요한 거 같아요. 글 쓰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다 누리고 살려고 하면 그 생각을 좀 버리고 자기 삶을 재구성 하는 게 좀 필요하고 최소한의 내가 꼭 필요한 것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지는 게 중요한 거 같애요. 두 번째는 그 최소한의 것을 충족하게 하는 이를테면 조건을 만드는 거예요. 아르바이트나 자기 시간을 좀 할애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글 쓰는데 주고 그러면 되요. 내가 돈 잘 벌고 하겠다 하면서 글도 쓰겠다 하고 생각하면 글 쓰는 거는 포기하는 게 좋아요.”

 

그는 또 생각했다. 다 같이 살면 안 될까. 그는 극단의 이름으로 연립주택 한 채를 통째로 샀고, 그와 단원들은 방을 하나씩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 집이면서 내 집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함께 살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그가 꿈꾸는 세상이기도 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그 굉장히 단순해요. 그니까 그 내 것이 있는 우리 것이 소통되는 세상이죠. 이전 사회주의라는 나라와 지금 자본주의가 무엇이 문제냐 하면 이전 사회주의를 했던 몰락한 국가를 보면 우리 것만 계속 강조하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내꺼만 계속 내 것이 있는 우리 사회가 가능한데 그걸 해결을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그게 안 되면 너무 하나만 강조되면은 나는 그 우리에 귀속이 되는 거예요. 우리로 뒤섞이잖아요. 그러면 개인의 고통을 딛고 우리가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된단 말이에요.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자본주의는 소위 그 우리가 없죠. 우리라는 개념이 실종되어버리니까 또 유일하게 우리가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이름이 민족이니 지역이니 국가니 이따위 것들이 들어오는데 웃기지.”

 

그는 끊임없이 그가 꿈꾸는 세상을 무대 위에 올린다. 아마 그가 꿈꾸는 세상이 올 때까지 그의 극본은 무수히 만들어 질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가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할 것이고,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써나갈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패닉 이라는 그룹의 달팽이라는 곡이 있다. 그 노래가사에서 달팽이는 뜨거운 해가 높이 떠서 몸을 녹이고, 열심히 달린 몇 시간이 다른 이의 고작 몇 발자국이라 하더라도 저 넓고 거친 세상 끝에 바라던 바다가 있을 거라는 걸 믿고 꿈꾸고 상기하면서 모든 걸 바쳐서 바다를 향해 간다. 그걸 듣는 나는 항상 어디선가 바싹 말라버릴 달팽이를 생각하며 불쌍해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계속 가는 달팽이를 대단하게 여기기도 했다. 말꼬리를 늘이며 천천히 이야기 하는 그를 보며 그 달팽이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달팽이의 삶은 바싹 말라 쭈글쭈글해지지 않았고, 무언가 한 발자국이 달에 착륙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단하다는 듯이 자축하지도 않았다. 달팽이의 삶은 멀리서 보기에는 가물었지만 달팽이는 또 다른 달팽이들과 함께 수분을 나누었고, 걸을 수 있을 때, 걸을 수 있는 만큼 더 나아가며 끝없이 나아갔다. 그는 항상 나 때문에 말라갈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지내는 것 같았다. 또한 그의 한걸음이 큰 것일지 작은 것일지는 신경 쓰지 않고 바라는 세상이 있는 곳으로 꾸준히 발끝을 향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삼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쩌면 그의 생 내내. 그는 바다에 가까워지길 바라며 그렇게 조급하지 않게, 하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 닥치고, 밀양

 

2013. 05. 25.

밀양 부북면 평밭마을에서의 기록

 

양순주

 

  대치 상황.

 

  밀양으로 가기 전날과 가던 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페북을 통해 여러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침에 매체에 뜬 속보는 공사 중단을 알렸다고 했지만, 현장에 있던 몇몇 인부들과 어르신들의 사소한 다툼 또한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매체는 중단을 공시(公示)하면서 현장의 목소리 정도는 사소한 것으로 가볍게, 묵살(默殺)해 버린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밀양 곳곳으로 찾아들어왔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은 침묵한다. 중단을 선언하며.

 

  다시 시작된 공사 첫째날 어떤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사진은 그들(한전/정부)이 가까스로 막아놓았던 사실을 폭로(暴露)하고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여론은 밀양을 조금씩, 그러나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내 눈 앞의 현실이 아니니까, 또 깊은 산 속 마을의 일이니까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한전/정부)과 공모(共謀)하고 있다.

 

  그들(한전/정부)은 각지에서 출발한 탈핵희망버스의 밀양행을, 그렇게 구성되는 다중의 역능이라는 두려움을, 공사 중단이라는 이쁜 말로 포장해 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좋아요>라는 루트를 통해 그 사실을 전파한다. 그리고 또 밀양으로 간다. 그렇기에 그들과 우리는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그 대립은 우리의 시작에의 선언이다.

 

 

              

 

 

  마을 비석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나무들 사이사이에 둘러쳐진 밧줄이 얽혀있다. 그 뒤 산길가 바닥에, 돗자리 위에, 의자에 평밭마을 어르신들이 누워있다. 길 위, 노상(路上)에서 생활한지는 이미 오래다. 그리고 잇달은 경운기들. 일손(사람/경운기)은 멈춰있다. 삶의 중지. 그들(밀양 어르신)에게는 집안일을 돌볼 여력이 없다. 꽃나무에 물을 줄 시간조차도.

 

 

  765kV out!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와 같이 면적이 넓은 나라에서 장거리로 발생하는 전기손실률을 줄이기 위해 개발된 765kV의 초고압 송전탑이 대한민국의 어느 마을에 꼭 필요한 것인가. 일반적으로는 345kV인 고압 송전탑이 건설되어 있으나 이번 경우엔 765kV에 달하는 초고압 송전탑이며, 이것이 산을, 들판 한가운데를, 주민들의 생활권을 관통하려 한다.  

 

  애초에는 보상을 위한 협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가 9억원이 넘는 논에 공시지가라는 명목으로 3000만원이라는 금액을 염치없이 내밀며, 그들(한전/정부)은 보상(補償)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그 날밤 할아버지의 죽음(2012년 1월 이치우 어르신(74) 분신). 어르신의 삶의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은 그들(한전/정부)은 이제, 무엇으로 다시 보상해 줄 것인가. 아니 보상이라는 말따위를 어떻게 뻔뻔스레 들이밀 수 있을까.

 

  보상이라는 하잘것 없는 미끼에 속아줄 이들은 이제 없다. 그들(밀양 어르신)은 죽어도 좋다고까지 말했다고도 한다.

 

  한전이 말하는 보상 범위는 현행 송전선로 좌우 34M에서 94M로 확대된 것뿐이다. 765kV인 초고압 송전탑은 높이만해도 140M라고 한다. 그런 초고압 송전탑과 그 선로에 100M도 되지 않는 반경 안에 사람이 산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가능하겠는가. 8년이라는 시간을 싸워오며 얻은 것이 고작 60M가 늘어난 보상 범위라고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대학/원을 다닌 시간과 맞먹는 기나긴 시간동안 그들(밀양 어르신)이 싸워서 지키고자 한 것을 60M로 보상해 준다고 하는 그들(한전/정부)의 말은 어디로부터 튀어나오는 것인가. 

 

  8년을 시간을 날림으로 날조(捏造)한 그들의 말을 이젠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그러니, 지식경제부가 제출한 소요 재원(2013년부터 12년간 1조 3639억원을 345kV 이상 송전선로 지역과 발전소 인근지역에 쓰겠다)이 진정 실효성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거짓된 주장에 맞서, 그 돈을 차라리 인근지역 주민의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는 지중화(송전선로를 땅에 묻는 방식)로 하자고 밀양 어르신들은 주장한다. 이것은 왜, 무엇이 잘못된 주장인가. 공권력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대화로, 이렇게 타당한 대안까지도 제시해 주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생각해보라. 이 하찮은 핸드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인체에 해롭니 어쩌니를 운운하면서, 765kV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렇기에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45층 건물 규모의 거대한 철탑이 내뿜는 발열량, 소음, 전자파. 이 모든 것들 곁에서 당신의 삶은 안녕(安寧)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너무나 당당하다. 애초에는 용역을 데려와 밀양 어르신들을 끌어내고, 이제는 경찰을 대동하여 보호(保護)라는 명목하에 폭력을 행사한다. 경찰은 누구를 보호하는 것인가. 한전은 경찰과 함께 밀양 어르신들을 막아 세우고 그들(밀양 어르신)의 터전으로 침투하여 서서히 그러나 재빠르게 공사를 진행한다. 그들(한전/정부)의 다급함은 결국 발설(發說)되었다. 자신들의 입에서. 한전 부사장의 말을 통해 "UAE 원전을 수주할 때 신고리 3호기가 참고모델이 됐기 때문에 (밀양 송전탑 문제는) 꼭 해결돼야 한다", "2015년까지 (신고리 3호기가) 가동되지 않으면 패널티를 물도록 계약서에 명시돼 있다"는 진짜 이유가 밝혀졌다. 자신들이 작성한 한 장의 종이를 위해 사람들의 삶과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그들(한전/정부)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자들인가. 

 

 

 

 

     

  밀양 어르신들은 송전탑 건설 반대를 주장하며 마을입구를 봉쇄(封鎖)해 두었다. 모든 걸 내어놓고/내려놓고 가로막기 시작한 싸움. 그러나 그들(한전/정부)은 그 선을 무력(武力)으로 침입해 어르신들을 봉쇄시켜놓고 공사를 강행한다. 잘 포장해 묻어둔 것이 터져버린 것을 막기 위해 그들(한전/정부) 역시 싸움에 동참한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고 또 다시, 계속해서 터져나올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의 입을 통해, 그리고 그 사실을 본 무수한 이들을 통해, 또 밀양을 묵묵히 지키며 끝없이 싸우는 어르신들을 통해. 그렇기에 봉쇄는 이미 해제되고 있다. 그 곳에 우리의 시작이 가로놓여 있다. 

 

 

  다시 월요일. 사람들의 일상은 시작된다. 휴일을 맞아 쉼의 시간을 가지고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지금, 밀양의 그들에겐 지난한 싸움의 시간이 곧 그들의 일상이다. 일상이라는 어의(語義)의 괴리(乖離). 그 엄청난 격차 앞에서 나는 한없이 죄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밀양이 아니라 여기, 일상에서, 나의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설적이지만) 우리 모두 닥치고, 밀양!

 

 

 

밀양 잘가는 법 정리

* 밀양은 현재 다양한 마을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참고: 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 http://www.kfem.or.kr/kbbs/bbs/board.php?bo_table=hissue&wr_id=369209 )

** 7곳 현황 (차량 이동 시간은 밀양 시청 기준)

127번 부북면 평밭 마을 (차로 35분~ 40분)
124번 상동면 여수마을 (차로 30분 후 걸어서 2시간), 오고가는 시간이 길러 주민들 12명 숙박 중임
109번 산외면 괴곡 마을, 도곡 마을 (차로 30분 후 걸어서 1시간)
88, 89번 단장면 바드리 마을 (차로 45분)
84, 85번 바드리 마을 (89번에서 차로 20분), 길이 험해서 4륜 차량만 가능
위 농성장 외에도 1~2명의 주민들이 도보로 접근이 가능한 곳에 들어가 있는 상황임.
(바드리 마을주민들은 한전과 합의했기 때문에 동화전 마을과 용회 마을 주민들이 지킴)

저희는 저희가 다녀온 평밭마을을 기준으로 올립니다.

1. 희망버스를 비롯해서 단체출동 모집할 때 같이 탑승한다.

사실 각 마을들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단체로 끼여가는 것이 제일 편하고 길도 잃지 않는 법입니다!

 

2. 그런데 저는 단체도 없고...모르는 사람들이랑 가기 어색한데...한 번 가보고 싶어여...

그렇군요! 그럼 우선 뿌듯함을 높이기 위해 깃발을 만들어 봅시다!

 

 

전투력이 상승한 기분이 듭니까? 그럼 이제 저걸 들고 밀양역으로 출발합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만 개의치 맙시다)

밀양역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4번 버스를 타면 평밭마을로 갑니다. 버스 출발시간은 06:00, 06:15, 07:10, 08:35, 09:35, 10:35, 11:35, 12:35, 15:00, 16:00, 17:00, 18:00, 18:40, 19:20, 20;05 라고 합니다.

문제는 시간대별로 가는 코스가 조금씩 다릅니다!! 저희가 알아낸 것은 16:00시 버스는 평밭마을 입구까지 가지만, 17:00시 버스는 평밭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내린다는 것입니다....그러니 16:00시 버스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평밭마을에 내려서 애절한 얼굴로 쳐다보면 오며가며 차 뒤에 실어주십니다.

 

트럭 뒤에 타고 가는 비상의 수경샘, 아프콤 선우샘, 비상의 창아샘

 

3. 가서 머하져?

제일 중요한 건 어르신들이 집에 가서 같이 쉬실 수 있게 공사현장을 같이 지켜드리는 것입니다. 산좋고 물좋은 천막에서 세미나도 하고 책도 보고 떼굴도 하고 컵라면도 먹고 몸싸움도 하고 그런 것입니다!

 

4. 빈손으로 가도 될까요?

평밭마을 안쪽으로 올라가면 먹을 것을 공수하기 힘이 듭니다! 자기가 먹을 컵라면, 쌀, 쪼꼬바 등등을 챙겨가면 탐탁할 것 같습니다!

 

<평밭마을 입구를 지키는 어르신들과 나무에 매어놓은 밧줄>

삶의 존엄의 값은 얼마일까

신콩떡

 

지난 토요일에는 셋이서 밀양 평밭마을에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 여기저기 연락은 넣어서 가는 방법에 대한 조언은 얻었지만 접근하기 쉽지많은 않았습니다.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서 한참 들어가면 평밭마을 입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다시 한참을 차를 타고 산길을 올라가면, 산 속에 숨어있던 그 안의 평밭마을이 나옵니다. 마을 입구에도 어르신들이 컨테이너 박스에서 더위를 이겨내며 자리를 지키고 계시고, 여기서 한참 들어간 129번 공사현장에서도 천막을 치고 어르신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다다라서 싸들고 온 음료수를 건네드리며 인사를 드리니 한 할머니가 반기며 말씀하십니다.

"부산에서 왔다꼬? 서울에서도 오고 전국에서 우리를 모리는 사람이 읎네!"

정말 깊은 산 속에 웬 땅이 있어 '평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마을에는 올라설 '철탑'도 없고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는 목소리를 알아줄 사람도 없어서 그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8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저 자리에 앉아 지키는 것에 조금씩 손이 닿아 여기저기서 발걸음이 이어졌으니, "전국에서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밤낮으로 새벽같이 교대를 하며 자리를 지켜온 시간에 대한 한풀이이면서도 기쁨같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냥 마을가는 앞길에서 내다본 바깥세상.jpg>

마을 입구에서 한참을 다시 트럭을 타고 들어갔습니다. 정말 무릉도원처럼 숨어있는 평밭마을에서 본 바깥은 너무나 작고 멀었습니다. 전쟁이 나는 줄도 몰랐다고 할 만큼 깊은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 작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건사해온 사람들에게 갑작스런 이주는 단순히 다른 곳에 집을 구하고 이사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만들어온 관계, 삶의 방식, 살아온 세월, 환경 속에서 몸만이 뚝 떼어내 옮겨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평생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삶을 건사해온 사람을 한 순간에 그저 조용히 스러져갈뿐인, 부축받는 삶으로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밀양의 주민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삶을 70년, 80년씩 일궈왔습니다. (심지어 이 시간은 이들에게 이 땅을 나가라고 하는 국가의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입니다.) 한전에서는 '보상'을 이야기하며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곳의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평생을 이 땅에서 일궈온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리고 그 존중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계약, 자본, 보상, 금전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뿐 그 존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온 세월과 삶의 방식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요? 삶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는 요구는 얼마나 돈이 있으면 보상해줄 수 있을까요? 이 곳의 주민들은 이제 자신의 삶의 존엄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땅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송전탑이 이곳에 세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니, 십년이든 언제든 기다리겠다, 지중화를 하거나 다른 대안을 이야기하자고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배우고 다시 말하고 다시 요구하고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밀양에서 부산으로 올 때에는 밀양 어르신의 아드님께서 차를 태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차안에서 한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며 밀양의 여러 상황에 대한 속성강의! 를 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기억나는대로 간단한 인터뷰처럼 재구성해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 힘들어하시니 많이 마음이 안좋으시겠어요..

부모님은 밀양에 계시고 저는 부산에 살면서 주말에 가서 돌봐드리고 하는데요, 지금 상황이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요. 처음에야 저희도 부모님, 이 참에 그냥 바깥으로 나와서 저희랑 사십시다, 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은요, 말릴 수가 없어요. 자식인 저도 못막습니다. 죽을 각오를 다들 하셨어요.

 

한편에서는 보상문제가 아니겠냐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더라구요.

처음에야 보상 이야기가 나오긴 했죠. 근데 보상 기준이 송전탑 30미터 안쪽만 해당이 돼요. 몇 년을 싸우니까 90미터로 늘려주긴 했는데, 그렇게 되면 보상받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이런 송전탑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암이 유발되었다는 연구도 나오고 했는데, 반경 90미터 안이 아니면 그냥 살다가 암에 걸리든 나몰라라 한다는 거예요.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분신을 하셨잖아요..? 그 분 땅 바로 위에 공사가 되거든요. 그 분 땅이 약 9억원쯤 하는 땅인데, 3천만원을 보상해주겠다고 했대요. 그 분이 나는 여기서 나가서 살 수 없다고 막았더니 그 땅을 밀어내버린 거예요. 평생 살아온 땅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기는데, 아무도 그 말은 안들어주고 땅을 밀어버렸으니 분이 오죽하겠어요? 그거는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럼 이제 쟁점이 보상이 아니군요?

이제는 보상이야기로는 될 수 없는 국면이에요. 장장 8년을 싸우는 와중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말 용역 직원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거든요. 무슨 말을 해도 안듣고 들어내서 던져버리는데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보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다가 마을 이웃이 그렇게 갔으니, 그걸 배신하면 안된다는 생각까지 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살아온 것에 대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예요. 그런 걸 갖다가 한전에서는 지역 이기주의니 그렇게 매도를 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목숨을 건다고 하는 게 절대로 농담이 아니에요. 진짜 죽을 각오를 하셨어요.

 

실제로 지역이기주의라는 이야기가 많이 되나요?

이게 벌써 8년을 끌었는데, 저번에 기자분들이 같이 와주셨을 때도 한전에서 할머니들을 질질 끌어냈는데, 그게 그대로 언론을 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분위기가 바뀌기 전에는 한전에서 지역 이기주의니 하는 식으로 계속 말을 했어요.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이야기하는 것이 단순히 내 집 앞이라 싫다, 이런 것이 아니예요. 지금 밀양에 못짓게 하더라도 어느 곳에는 초고압송전탑이 들어서지 않겠어요? 그러면 또 누군가가 밀양에서처럼 또 싸워야겠죠. 그러니 단순히 내 집 앞에 짓지 말라는 것보다는 핵발전의 문제나 지중화(땅 속으로 묻어서 전기를 보내는 것)같은 것들을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같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부 했던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오래 싸우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나씩 다 공부를 하신 거예요. 젊은 사람들도 전혀 모르는 것을 공부하려면 어려운 일인데, 농사만 짓던 분들이 송전탑이니, 친환경 발전이니, 지중화니, 기존 송전선 활용이니, 이런 것들을 공부하신 거죠. 그리고 이렇게 공부하시면서 아 이게 밀양만의 문제는 아니구나, 하시면서 점점 더 송전탑 건설 반대에 대한 신념을 굳히시게 된 거예요. 그런 상황인데 지금 보상금이 이야기가 되겠어요? 이제는 진짜 생각이 딱 확고해지셔서 말릴 수가 없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직접 공부를 하셔서 지중화 건설같은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데, 한전 측에서는 어째서 공사를 강행하는 걸까요?

한전에서 처음에는 겨울철 전력 대란을 대비한다고 말을 했는데 실은 그것도 설득력이 없어요. 송전탑을 못세우면 겨울철 전력 대란 때문에 블랙아웃이 온다고 하지만, 송전탑을 세워도 예비전력에 턱없이 못미쳐요. 그러니까 송전탑 없이도 예비전력으로 가능하고 다른 대안들이 많다는 거죠. 그런데 얼마 전 한전 부사장이 직접 말했잖아요. 이명박정부 때 아랍에미리트에 원전을 수출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수출하는 모델이 신고리 3호기예요. 그리고 이게 2015년 안으로 가동되는 것을 확인해야 계약이 완전히 성립이 된대요. 그래서 이 신고리 3호기의 테스트를 위해서 밀양 송전탑을 세우는 거죠. 어르신들이 지금 십년이 걸리든 괜찮다, 지중화 하자고 해도 한전에서 그렇게 안해주는 게, 2015년 안에 신고리 3호기 테스트를 못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니까 그런 거고요.

 

그렇게 발전소를 돌려도 실제로 전기를 쓰는 것은 저 멀리 대도시의 사람들이거나 산업전기이거나 할 텐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참 어불성설이네요.

안그래도 한전에서 발전소 돌리면 너희는 전기 안쓰나? 라고 하면서 전기를 끊어버렸어요. 어르신들이 전기 써봐야 얼마나 쓰겠습니까. 아침일찍 나와서 해지면 주무시고 저녁에 티비나 잠깐 보실까말까 한데. 어르신들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전기 들어온지도 얼마 안됐고, 여기는 보다시피 전화가 된 것도 5년쯤밖에 안됐습니다.

 

요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이전과는 좀 다른가요?

예. 저번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용역한테 맞는 모습이 언론을 타고 난 이후로는 한전에서 외부사람들을 무서워해요. 이번 주말만 해도 희망버스랑 전국에서 사람들이 오니까 잠깐 철수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어르신들도 힘이 많이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평일입니다. 평일에 와주실 수 있는 분들이 아무래도 적으니까 주말에 잠깐 빠졌다가 평일에 어르신들만 남았을 때 들이닥치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와서 계속 있어주시는 게 제일 힘이 되죠. 그리고 또 여러 곳으로 소식을 전해주시는 분들이 있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그냥 여기서 보신 대로만 말해주세요. 그냥 보신 만큼만요.

 

* 5월 28일 월요일. 한전에서는 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시 공사를 강행하였다.


긴박한 응답_5월25일, 밀양 평밭마을을 다녀오다.

김선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봉쇄되었다. 곧장 진입하지 못하게 양옆 나무를 기둥삼아 매어진 밧줄은 마을의 날선 긴장을 보여주었지만 언제든지 쉽게 끊어질 것 같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고요했다던 그 때와 달리, 마을 밖의 사람들은 마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밀양으로 나섰던 날, 각지에서 몰려 온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로 인해 오늘 공사는 중단되었다. 위태로운 밧줄을 경계삼아 대치해야 할 상황에 잠시 짬이 생겼고 오늘 저녁은 누군가의 후원으로 오랜 투쟁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지친 몸을 달래는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된다고 한다. 이 곳에서 '나'의 논밭이 말라가는 시간 동안 매일매일 언제 또 다시 들이닥치지 모를 적과 언제 찾아올지 기약이 없는 동료들 모두를 함께 기다리는 주민들에게 전할 인사의 말은 입구에 쳐진 밧줄만큼이나 무능한 것이었고 묵묵히 함께 기다리는 것 밖에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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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전탑 127번 철탑 공사장으로 가는 길, 밀양역 버스정류장에서 1시간마다 오는 4번 버스 (16시와 18시 버스만 마을 앞까지 간다.)를 타고 평밭마을로 가는 가장 가까운 정류소에서 내렸다. 주말이라 여러 지역에서 마을로 찾아온 단체들이 많았다. 평밭마을로 간다는 말에 마을 밖으로 나오던 분의 차를 얻어 타고 마을 입구까지 들어섰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미리 온 또 다른 동료들에게도 어떻게 무얼 도울 수 있는지, 어떤 게 이 곳과 사람들을 돕는 것인지를 묻는다. 마을 입구는 밧줄과 주민들, 주민들의 농기구를 차례대로 막아놓아 안으로 들어가거나 안에서 밖으로 나올 길이 모두 막혀있다. 미리 마을 안으로 들여놓은 주민들의 차는 마을 안에서 이동할 때만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어제, 오늘 미리 온 외부사람들은 모두 마을 안으로 들어가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127번 구역까지는 도보로 30분 이상이 걸리고, 어떤 연고나 준비 없이 찾아든 터라 아직 고요한 마을 입구에 잠시 앉아있다 마을 안으로 올라가는 주민의 트럭을 또 덥썩 타고 127번으로 올라 들어간다.  


 127구역에도 마을 입구처럼 임시 움막이 지어져있었다. 움막 안에는 생활할 수 있는 물건들이 모두 마련되어있었고 공사현장 바로 옆에서 공사를 막기 위해 하루 종일 이 곳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움막은 누군가가 살고 있는 집이기도 했다. 흙 땅에 방바닥을 깔아 바닥이 울퉁불퉁한 움막이지만 전기 포트기부터 티비, 이불과 옷장, 싱크대까지 마련되어있는 움막은 실상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하나의 '장소'로서 말해주는 듯했다.
 127구역까지 올라왔지만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없었던 터라 미리 온 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온 선배들과 마을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차에 저 안쪽 마을에서 나오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다급한 인사를 건넸다. '나눔연대'에서 오셨다는 분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127구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고 하여, 뭔가 도울 일이 있겠다는 반가운 생각에 다시 127번 움막으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 쪽으로 나가는 차를 타고 가시던 아주머님께서 배추같은 상추 한 보따리와 쌈장을 급히 챙겨주시고 떠나셨다.










(오른쪽 사진, 127번 움막 주변에는 "박근혜 대통령님께 보내는 글"뿐만 아니라, "핵 폭탄 보다 더 무서운 할머니들"로부터의 경고장, 주민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힘 등 다양한 메시지가 담긴 플랜카드가 걸려져있다. 왼쪽 사진은 현재 잠시 중단된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이미 무너져 언덕이 된 자리에 밧줄이쳐져있다.)











(왼쪽 사진은 127번 구역에서 길을 따라 '평밭마을'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공사중이라는 팻말과 그 너머로 보이는 가구들이다. 오른쪽 사진, 127번 구역 바로 옆에 있던 앞 창이 모두 깨진 차 곳곳에 "765000볼트 초고압 충전 백지화 하라!", "밀양사망"이라는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루라도 자고 가는 것", 마을 주민들만 있는 동안은 한전 직원들, 경찰, 용역들 모두가 쉽게 제압하지만 외부인들과 기자들이 모여드니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모두들 하루 이틀씩 지내고 떠나는 날, 아무런 계획 없이 당도했던 밀양에서 계속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내려가는 주민들의 차를 타고 내려갔다. 평밭마을의 70대 노부부와 아들이 함께 마을 밖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부산으로 돌아간다는 우리의 말에 할머님께서 아들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니 부산까지 같이 타고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밀양을 왔다가는 길 내내, 내 몸을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 조건이란 실상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들의 애씀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한 시간 동안 우릴 태워주신 분은 고향과 부모님들,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주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작스런 투쟁이 아니라 8년 동안 고요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 작년 마을 할아버지의 분신 사건, 억울함, 법과 기업과 경찰, 용역들이 어떻게 마을 곳곳에 침투할 수 있는지. 준비 없이 갔던 길에서 이 이야기들은 돌아가는 나를 점점 수그러뜨렸다. 마을로 들어가는 두 개의 입구는 모두 봉쇄당하여(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을 봉쇄한 것이지만, 나는 부로 '봉쇄당함'이라고 표현했다. 땅으로 진입하지 못한 한전은 헬리콥터로 장비를 운반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처럼 이들이 이 곳에서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을로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막아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마을사람들의 '삶의 반경'은 제한되었지만, 몇몇씩, 조금씩, 번갈아가며 함께 머물면서 이 제한된 반경을 다시 '연대의 반경'으로 넓혀가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 않을까.







제 6회 맑스 코뮤날레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에 다녀왔어요! (5월11일-5월12일)
김선우




  새로운 어휘를 얻는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개창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각자의 특정한 삶의 이력들 속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지나쳐버린 것들과 다시 조우하는 '순간'일 것이며 풀리지 않았던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있던 체중'이 뻥 뚫리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어휘는 삶의 막다른 곳에서 다시 길(삶)을 내어주는 지렛대이자 삶보다 한 발짝 먼저 가 있는 곳이다. 어쩌면 이 막바지에서 제 6회 맑스 코뮤날레가 개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진보적 지식인들이 터해 있는 이 시대에서는 아직 가지 못한 곳을 향한 실험으로서 맑스주의-생태주의-페미니즘, 즉 '적-녹-보'의 힘-관계들 속에서 삼일간 '새로운 삶'의 자리를, 서로의 어휘들을 뒤섞으며 각자가 처한 위기 너머를 상상해볼 수 있는 장이 열렸다.

  새벽6시. 아프꼼의 후기들의 특징이랄만한 것이 있다면 서울에서 혹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행기 역시 무사히 서울에서부터 쓰이지 못하고 '부산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단지 필자가 부산에 살고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역에서 올라오신 한 선생님이 장난스레 불평하시듯 하신 말처럼 서울의 10시란 부산의 6시이기 때문이다. 4시간이라는 '시간차'란 이전과 비교해 짧다면 짧아진 거리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이 일곱 여개의 지역들을 거치는 동안 무시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다산관. 높다란 천장 아래에 벌써부터 수많은 목소리가 들린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목소리, 사진작가들이 만드는 달력 '빛에 빚지다'가 담은 현장의 목소리들, 최저임금 1만원 10인 서명을 기다리는 '알바연대', 갈무리, 메이데이 등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들, 강제퇴거금지를 외치는 방화동 카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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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집운동과 협동조합운동


 11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분과회의는 총 8개가 강의실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었다. <민중의집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선택해 들어간 강의실에는 이미 30여명의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첫 번째 발표는 마포 민중의집 공동 대표이시자, 『민중의 집』(2012)의 저자 정경섭 선생님의 발표가 <민중의집 운동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민중의 집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도출해낸 공간의 정치적 의미와 마포 민중의 집의 사업들을 소개하셨다.





  민중의 집 역사는 100년 가까이 되었고 벨기에 민중의 집(제2인터내셔널회의가 여기서 열렸다.)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카페 출입이 금지되었고 공간 임대도 어려웠기에 당시 협동조합 운동 이후 매장 조합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생활비를 제외한 푼돈을 모아 만든 공간이기에 초기에는 '잔돈의 집'이라 불리기도 하며 서로의 생활양식과 규율들을 만들어 갔다. 하지만 노동조합원들이 스스로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의 어려움도 있었다고 하는데, 생산현장에서는 노동자 객체였지만 대안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특권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이동하는 것에서 부딪히는 어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의집은 고용에 기반 하여 단합하는 노조와 달리 다양한 조직들을 한데 묶는 복합적인 구조라는 특색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오늘날 민중의집의 역할 또한 지역 내 노동조합, 협동조합, 진보전당, 시민단체 "공동의 공간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발표의 후반부에서는 정경섭 선생님이 직접 운영하고 계신 마포 민중의 집이 어떻게 꾸려지고 있는지를 설명하셨다. 민중의집의 모토를 간추려 말해보자면, 한 명의 "독립생활인"을 위한 생활공동체 사업과 정치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사업-생활공동체 사업-정치사업-조직"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정경섭 선생님은 지역 내 진보 인프라(상인, 노동조합조합원, 독립생활인, 중고령 여성노동자, 학부모)를 구축하는 것에 좀 더 힘을 쏟는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 이명원 선생님의 토론으로 유럽의 민중의집 운동과 한국의 민중의집 운동의 역사적, 지역적 차이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도시 안에서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마포라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이루어졌다. 정경섭 선생님은 지역성이 강한 이탈리아의 사례나, 노총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조직화 전략으로 민중의집을 운영하였던 스페인의 경우와 비교해 한국의 경우 노동조합이 주도성을 갖고 추진해가야 할 필요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이 결합되는 공간적 전략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정경섭 선생님의 사례를 돌이켜 보았을 때, '한 사람'마다의 네트워크 작업이 중요성에대해서도 언급하시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 하나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직접 호명하고 그들이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일례로 '중고령 여성 노동자 컴퓨터 교실'이라고 현수막을 걸었을 때 이들이 지역의 무료 컴퓨터 강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당신들을 직접 부른 이 공간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과회의에서 공통된 쟁점 하나로, '정치사업의 부재'라는 문제가 토론의 문제로 언급되었는데, 이명원 선생님 또한 초기에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정치적 의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자기 통치와 주체화에 대해서 진보적 전략을 언급하는 데도 불구하고 정치의제는 생활 이슈에 함몰되고, 실용적인 기능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정경섭 선생님은 오히려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슈를 만들어가는 기획들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진보정당의 문제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답변으로 첫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발표는 시사IN의 차형석 기자님의 <세계의 협동조합>발표가 이어졌다. 본인이 2010년부터 2012년 2년 동안 이탈리아 볼로냐, 스위스, 네덜란드, 캐나다 퀘벡의 협동조합을 방문하고 취재한 기록들을 통해 아직 협동조합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의 협동조합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해주셨다. 볼로냐의 경우만 보더라도, 협동조합은 빼놓을 수 없는 그들의 역사였다. 이탈리아에서 "나는 꼽(co-op)'에 간다"라는 말이 "나는 시장에 간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생협이 일상에 깊이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한 권명아 선생님의 토론을 통해 협동조합과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와  유럽의 경우와 달리 기존의 대안운동이 척박한 한국의 상태에서 협동조합이 정치적인 대안으로 타전될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전자의 문제에 있어서, 차형석 기자님이 취재하신 유럽의 사례들을 보았을 때 협동조합운동은 이미 그 나라의 사회운동과 정치적 주체화가 일정한 기반을 갖추어졌기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역으로 협동조합을 통해서 사회운동과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의 사례가 있을지, 이 두 가지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차형석 기자님은 협동조합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의 경우나 사례들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는 답변과 더불어 퀘백의 경우 경제적 소수자들이기에 결속할 수 있었고, 언어적으로 불어권 지역이라는 강점 또한 작용했으며 볼로냐의 경우 지방정부장악의 긴 역사를 고려했을 때, 한국에 협동조합이 사회적, 경제적인 이슈가 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고려를 바탕에 두고 참조해야 할 점이 있을 것이라는 답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어서 다른경제 포럼의 김성훈 대표님의 <노동자결사체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운동의 만남>발표가 이어졌다. 김성훈 대표님은 기존의 '사회적경제'의 이론적 배경에대해 설명하신 뒤, 사회적경제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경제'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의미와 결의에 대해 설명하셨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현실태로서 시장사회와 임금노동사회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대안모색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조직으로 국한하여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초기 사회적 경제의 본래적 의의를 되찾고 "노동자결사체를 통하여 임금노동사회를 극복하여 모든 이들이 노동의 주체가 되고 능력과 필요에 따라 나누어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지금 퇴색된 의미의 '사회적경제'가 아닌 '다른경제'의 필요를 내놓으셨다. '다른사람, 다른경제, 다른정치'의 몇 가지 선언들은 다음과 같다. 1)내 안의 자본주의 넘어, 나부터 '다른사람'이 되자. 2)'다른경제-자립', 다른 노동에서 시작하는 살림살이, 3)'다른정치-자치', 다른 경제에 토대를 둔 이중권력 형성, 여기서 말하는 '이중권력'이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와 미조직 불안정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만남을 뜻한다. 김성훈 대표님은 다른 노동에 기반한 다른 정치의 주체형성 전략을 4)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을 통해 지역풀뿌리운동에서부터 찾으려고 하셨다.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
 코뮤날레의 두 번째 전체회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체제, 적-녹-보라, 새로운 주체형성'이라는 주제하에 여섯 개의 발표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정갑희 선생님은 '가부장체제'라는 말이 세계자본주의와 좌파의 대안이라는 전체 틀 속에서 어떤 대안이 있을지를 질문하였다. '가부장체제'라는 시대규정을 통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넘어서 현 시대의 체제로 정의하고 가부장체제에서의 행동철학으로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기존의 가부장제론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부로서 여성의 노동을 재생산의 영역으로 이해하였기에 여성들의 생산은 비가시적 영역에 놓여있었던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을 구분하면서 여성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재생산의 영역 또한 생산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재생산은 생산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구분하고 가부장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따로 둔 입장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 있어 고정갑희 선생님은 생산과 재생산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노동의 범주를 확장시킬 것을 주문하는데, 이는 현시대의 '가부장체제'라는 범주가 '성체계의 군사-제국-자본주의적'성격으로 규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랬을 때, 대안운동으로서의 환경, 장애인, 성 소수자 운동 등등을 말하는 것. 공통되는 패러다임으로서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말함.
 이에 대해 문화과학 편집위원 조형근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졌다. 조형근 선생님의 토론 방식은 '가부장체제'의 생산 재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에서 보충되었으면 하는 지점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루어졌다. 토론문을 통해 그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부장체제의 구성요소들(자본주의-군사주의-제국주의)을 자본주의와 동연적인(coextensive) 것으로 정의하는 이런 방식의 접근은, 가부장체제를 자본주의체제보다 역사적으로 더 오래되고 포괄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필자의 입장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가부장체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으로는, 가부장체제가 가부장적 성체계를 기반으로 한다고 했을 때, 이 성체계는 다시 성관계-성노동-성장치라는 삼각구도를 갖는데, 그렇다면 가부장적 성체계와 자본-군사-제국주의적 성체계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셋째, 가부장체제의 역사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아쉽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했기에 토론 이후 발표자들과 토론자들 사이의 또 다른 대화가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두 번째 전체회의 심광현 선생님의 <<적-녹-보라 연대>의 이론적 쟁점과 과제>발표는, 자본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전 지구적 순환고리를 체계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각 운동의 '상호 내재적 포함관계'에 주목하여 각 운동 간의 적극적인 연대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분리되어 있던 각 운동들 간의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선 두 가지 과제가 해명되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을 언급하셨는데, 하나는 상이한 각 운동들의 위치가 어떻게 '자본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실질적 포섭'의 거대한 순환회로로 함께 엮어져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일과 더불어, 이들이 '내재적인 포함 관계'를 가지고 있는 측면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적과 녹의 문제설정의 공통된 영역으로 경제(economy)와 생태(학)(ecology)의 동일한 어원으로 그리스어 'oikos'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자연생태-상품경제-가정의 살림살이-정치경제(자본과 국가의 융합)가 서로 무관한 별개의 차원이 아님을 언급한다. 또한 여성종속의 두 가지 형태인 사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상품경제와 정체경제에 종속되는 공적 가부장제를 구분하는 실비아 월비(Sylvia Walby)의 지적을 통해 여성들의 이중적 구속을 통해 적과 보라의 문제설정 간의 관계를 파악한다. 그렇기에 심광현 선생님은 '적-녹-보라'의 연대의 이론적 체계를 개념지도로 시각화하고자 적-녹, 녹-보라, 적-보라의 하위연대를 살펴보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나누어 살펴본 뒤, 각 운동진영의 이론적, 실천적인 조우를 위한 기획을 고찰한다.
 권정임 선생님의 뒤따른 논평은, '적-녹-보 연대'를 기획하는 데 있어 보라 내부의 차이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공동의 혁명주체로 연대하기 위한 거시적인 쟁점으로써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것을 제안한다. 심광현 선생님은 '녹-보라 연대'를 주로 에코페미니즘의 성과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근거하여 모색하고 있는 반면, '적-보라 연대'의 관점에서는 실비아 윌비와 고정갑희의 이론을 필두로 하는 페미니즘을 근거로 두고 언급하였다. 그렇기에 '적-녹-보 연대'의 기획에서 서로 다른 페미니즘 간의 공통점이 추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영균 선생님은 자본주의체제의 내적한계를 분석하며 이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적-녹-보라의 연대적 주체'를 설정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원리로 노동력, 종족을 생산하는 생식, 에너지를 얻는 자연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노동/노동력, 성-사랑/생식, 자연/에너지저장소를 분리시키고 노동력과 생식, 에너지만을 자본주의 내부로 포획하면서 '노동', '성-사랑', '자연'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박영균 선생님은 자본주의의 내적 완결성이 사실상 그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본에 의해 배제된 자들끼리의 '적-녹-보라'의 연대적 가치를 중심으로 '자본 없이 살기'라는 생산-소비의 자치적 공동체인 '코뮌'을 이 사회 곳곳에서 구성해 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엄남이 선생님은 박영균 선생님의 이러한 '자본 없이 살기'라는 새로운 사회적 전망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으로 토론을 시작하였다. 박영균 선생님은 인간의 자연존재로서 자기규정성을 '자연', '노동', '생식'으로 범주화하는 데 있어 생존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기 삶의 생산을 '노동'으로 범주화하고 다른 생명을 생산(종의 생산)하는 '활동을 단지 생식'으로 범주화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였다. 생식이 매우 젠더화 된 활동으로 여성과 남성이 그 활동들(생리, 배란, 성교, 착상, 임신, 출산, 수유의 일련의 연속적 활동)에 개입하는 방식과 수행하는 노동 그리고 결과물의 전유에 있어서의 권력관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생식'에 관한 맹목에 따라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이라는 부불노동을 자연의 영역으로 치부함으로써 성적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들이 비가시화되는 위험이 있다는 지적 또한 그러하다. '노동'에 대한 박영균 선생님의 설명이 이성애적 성인남성노동자의 시점에 국한되어있다는 것, '생산적 노동'이 은폐한 '비생산적 노동'의 수행자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어졌다. 그리고 박영균 선생님이 자본주의 내/외부의 관계의 모순설정을 오히려 1)남성/여성=자연, 2)남성-노동(여성, 동물, 남반구 생계농)-자연, 3)서구, 북반구 임금노동자/불안정, 미등록 노동자, 노예노동, 남반구 생계노동(엄남이 선생님은 '/'를 지배와 위계 관계로 설정해 설명한다)로 바꿔 보았다면 어떨까라는 의제를 남겨두고 두 번째 토론이 정리되었다.





(자세히 보시면, 앞의 사진과 다른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그리고 녹색사회주의-불편한 동거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 서영표 선생님의 발표는 '녹색사회주의'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여성주의-생태주의 사이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비판패러다임의 준거로서 서영표 선생님은 데이비드 하비의 (욕구(want)나 욕망(desire)과 구별되는) '필요(need)'라는 개념을 통해 연대를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하고 있다. 필요개념은 보편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이라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준거점이 초래할 수 있는 독단론 또는 객관적 이익 개념이 동반할 수 있는 권위주위를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기획하는 데서 사회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생태주의의 이론적 자원까지 동원할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자유주의적으로 구성된 권리담론을 극단까지 몰고 감으로써 재해석할 수 있는 (담론적) 헤게모니 투쟁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황주영 선생님의 토론 또한 서영표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필요'개념에 대한 고찰을 검토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젠더화 된 노동이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기본적 필요와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필요개념은 가부장제를 충분히 비판적으로 겨냥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황주영 선생님은 <<에코페미니즘>>에서 제시하고 있는 '기본적 인간 욕구' 개념을 서영표 선생님의 '필요'개념과 비교하여 보완할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글로컬페미니즘학교'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은숙 선생님의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새로운 주체 형성-노동/생산 개념 확장/재구성과 운동주체> 발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성인남성의 노동으로 대표화 되고 상품 생산 노동, 산업 노동을 중심으로 그 외의 노동을 배제한 점에 대해 비판하며 적녹보라 패러다임에서 노동과 생산이 어떻게 재고될 수 있을지를 설명한다. 이에 대한 토론으로 서동진 선생님은 우선 사회적 의제와 정치적 의제를 먼저 구분하고 토론을 전개하였다. 어떤 종류의 사회적 체계를 만들어내며,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발현되느냐의 문제가 적녹보라 패러다임을 고려할 때에도 서동진 선생님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스무 몇 가지의 단상들로 이루어진 서동진 선생님의 토론문은 '적녹보라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주변을 맴돌며 적, 녹, 보라가 생성되었던 특정한 시기와는 다른 지금, 여기. 적-녹-보라의 연대가 구상된 지금의 한국사회의 단면들을 조각조각 모으고 있다.



 <음란과 혁명: 색을 얻지 못한 자들과 색스러운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권명아 선생님의 마지막 15분가량의 발표가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주체 구성의 역사를 '풍기문란'이라는 역사적 범주로 규명해온 선생님의 연구궤적을 우회하여 적녹보 연대와 새로운 주체 형성이라는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단초들을 제기하는 것으로 발표를 준비하셨다.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문화통제의 두 축으로 사상통제와 풍기문란 통제가 이루어졌다. 사상통제가 일제시기 주로 사회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한 통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풍속통제는 일상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로 이어졌다. 일본의 경우 이 법은 패전 후 전형적인 파시즘 악법으로 간주되어 미군정하에서 폐지되었으며, 성산업에 대한 통제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하였다.(그래서 일본에서는 풍속(후조쿠)라는 말이 핑크산업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된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경우 냉전기 이래 문화통제가 레즈(사회주의)와 핑크(성산업)라는 두 개의 색으로 분할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풍속통제는 일제시기 만들어진 통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아 더욱 도덕화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통제 시스템이 구성되던 일제시기에는 법적 경계에서 레즈와 레즈가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이 유동적이었고,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이 사상통제와 풍속통제의 구별선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그 반대편, 레즈의 편에서도 레즈와 레즈가 아닌 것의 구별이 레즈와 풍속 사이의 구별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권명아 선생님은 이 지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색과 정치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레즈는 어떻게 레즈가 되었는지, 나아가 이른바 '적-녹-보 연대'라는 색의 연합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한국에서의 레즈는 풍속과의 거리두기 또는 차별화를 통해 순정한 레즈의 색을 얻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즈의 순정함이 보장되는 건 풍속의 함의가 제거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인데, 반대로 풍기문란자들은 어떤 색을 얻었을까? (이들의 색은 우리가 음란물이라고 생각하는 핑크와도 다른데) 레즈는 스스로를 레즈로 표상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들의 색을 박탈해야지만 얻을 수 있지만, 풍기문란자들은 이들로부터 색을 박탈당하거나, 색을 얻지 못했거나, 기존의 색으로 표상되지 않는 집단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일제시기 레닌의 '두개의 혼'에 관한 테제를 논거로 삼아 일련의 논쟁이 진행되기도 했었고, 이에 대한 논쟁의 단서가 되었던 이기영의 '서화'(1933)를 통해 권명아 선생님은 풍기문란 통제의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람을 법으로 잡으려는 시도"에 다름없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권명아 선생님의 논의가 이번 전체회의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적-녹-보'라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측면에서 어떤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권명아 선생님은 앞선 "한국에서 레즈는 어떻게 레즈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주체를 구성하는 자의 위치가 아닌, 구성되는 과정을 역으로 좇아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오래도록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관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인도하고 조망하는 '위치'를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색을 가지지 못한 자들', '풍기문란한 자들'의 '색'은 아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지속적인 색을 갖지 못하고 어떤 역사적 순간에 크랙을 일으킨 자들일 뿐이다.





 위 사진은 권명아 선생님이 한국의 근현대사 100년, 19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역사적 작업을 해오면서 얻은 역사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선생님의 풍기문란 연구를 읽는 데 있어 참조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 듯하였다. 한국에서 풍기문란 연구가 전무하고 풍기문란 연구를 음란물에 대한 연구로 제한적으로 생각하지만, 풍기문란 연구는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출현하는가?'를 뒤좇아가는 작업이다. 이는 단지 역사적 사후적 검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념의 정치적 이행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구성하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역사적 전망이라는 것은 혁명적 낙관론이나 비관론이랑도 구별되는 '이행'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100년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정치적 주체화, 정념의 정치적 이행이 당대에는 결실을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현실화가 되며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인 추적의 결과로서 항상 이곳에 이미 당도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전망에 입각한 관점은 당대의 국면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는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은 정세판단의 시급성에 비춰보자면 이러한 관점은 너무 뒤쳐진 논의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적 전망이라는 것은 정세판단이나, 현실주의 양면의 환멸 사이에서 거리를 취하면서도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역사적 믿음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이어서 권명아 선생님은 2012년 전국 농성촌(캠프)지도 이미지를 통해서 게토와 로컬 라인에서 발생하는 고립과 외로움의 정념이 단지 수동적인 정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있음의 변용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였다. 캠프에서 외따로, 홀로 밝혀진 불들을 외롭게 놓아두지 않고 '게토를 아지트로, 부적절한 정념을 정치적인 것으로, 비언어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모든 단수적인 존재들과 만날 때 발생하는 아지트, 그 정치의 자리(constellation)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신병현 선생님의 마지막(급박한) 토론은 5페이지 가량되는 토론문을 요약하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신병헌 선생님의 토론의 전문은 여덟 가지를 통해 논의 지형을 만들었는데, 아래 첨부된 사진을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다. 신병현 선생님의 언급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권명아 선생님의 발표를 단지 내용적 측면에 국한하여 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글쓰기의 시도'로 거듭 읽으셨던 점이다. 게다가 한 명의 독자로서 "옛 원한에 더 얽혀 들어간다"는 말과 "80년대 <광장>과 <태백산맥>을 읽고 만났던 효과를 기대"한다는 말은 어떤 토론자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언급이시라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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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와 마르크스

 드디어 마지막 날인 5월11일. 나는 올라가기 이틀 전, '또문 다락방'을 미리 예약해둔 터라 유이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편안히 하루를 보낸 뒤, 내일 오전 10시 발표를 보기 위해 다락방을 나섰다.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에서는 최원, 박주원 선생님의 발표가 있었다. 전체회의와 달리 토론자가 따로 정해져있지 않았다.



 최원 선생님은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슬로베니아 학파의 논쟁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알튀세르와 라캉 사이의 쟁점을 재구성하였다. 슬로베니아 학파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이 작동할 수 있는 사전적인 조건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주체에 앞서는 진정한 주체, 주체 이전의 주체를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알튀세르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D박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주체 이전의 주체란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최원 선생님은 이데올로기적인 것 또는 상징적인 것에 의해 배제되는 '실재'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는 점과 알튀세르에게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또한 살펴보았다.
 박주원 선생님은 문화가 화두가 된 현 시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문화'를 어떤 의미와 방향으로 제기해야 하는지 성찰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욕망'개념을 검토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문화정치의 방향을 모색해보는 발표가 이어졌다. '욕망'의 문제는 단지 주관적이 역능이 아닌 노동과 시대적 필연성, 보편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하였는데, 마르크스 사상에서 감각 및 욕구는 한 사회의 변화와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 벤담, 리카르도, 슈티르너 등의 욕구 개념이 특정한 욕구의 내용을 마치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절대적인 것으로 정당화시키는 비역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을 다만 고정된 욕구의 단순한 담지자로 대상화(소외)시키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비판은 곧 자본주의가 배태한 욕구와 필요와 가치를 전복할 수 있는 역량을 새로운 필요와 욕구를 산출하는 것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박주원 선생님은 마르크스의 욕구 개념 안에 표현되어 있는 '감성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상과 '자기 가치를 산출하는 행위'로서의 노동행위, 새로운 인간들 간의 연합과 교류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정치'의 방향으로 제안하였다.





후기 자본주의와 로맨스





 12시 30분부터 3시까지 <후기 자본주의와 로맨스>라는 주제아래 이현재, 박이은실, 사미숙 선생님의 발표가 이어졌다. 아침부터 분과 회의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항상 찾아왔지만, '여이연'의 분과 회의는 세 번째 발표가 끝날 때까지 서너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좁은 강의실에 들어왔다. 나중에는 자리가 없어 옆 강의실 책상을 함께 나르면서 사람들은 발표자들 바로 앞까지 자리를 채울 정도였다. 어느 분과 회의보다 자유롭고 참석자들 모두가 함께 세미나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모두가 성실히 듣고 쓰고 말하는 시간이었다. 분과 회의의 키워드는 '낭만적 사랑'과 경제 체제가 시작되는 지점으로서의 '로맨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독해라고 볼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쟁점이 된 것은 사랑을 해방의 정치를 위한 저항으로 볼 수 있는지, 혹은 또 다른 억압의 이면인 것인지를 둘러싼 줄타기를 벌였다고 보아도 좋겠다.






 이현재 선생님은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계급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근대 이후 사랑의 전형인 로맨스의 규칙들을 통해 근대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의 출현과 더불어 탄생한 낭만적 사랑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사랑의 기대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더불어 발전한 낭만적 사랑 즉 로맨스의 이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대중문화 등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로맨스는 나와 파트너의 유일무이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통일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 이야기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소비주의와 경쟁의 극대화, 성적 쾌락의 추구가 근대적 로맨스가 발판으로 삼았던 공사의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소비를 필요로 하는 데이트는 사적인 사랑을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경쟁의 극대화는 탁월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인격적 파트너로 선택할 것을 종용하며,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태도는 사랑을 인격적 관계와 쾌락 충족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로맨스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를 '줄타기와 협상의 문제'로 만든다. 가령 포스트모던적 로맨스 주체는 현실적으로 성을 사고팔지언정 규범적으로는 성의 상품화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이 사실을 적당히 배후에 숨겨두고 따라서 이들은 항상 이 혼종성 속에서 저글링과 줄타기를 한다. 그렇기에 이현재 선생님은 포스트모던 로맨스 주체는 오히려 여성을 순수성의 감옥에서 탈출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지, 이제 진보는 순수한 사랑의 이념을 재고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박이은실 선생님은 앞선 이현재 선생님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로맨스주체들의 소비주의에 대한 경향에 주목하여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사랑을 나누는 방식의 소비자본주의적 변화를 고찰하였다. 중산층 소비문화에 기반한 낭만적 사랑의 문화가 부의 양극화, 불안정한 임금노동의 확산, 소비의 계급화, 소비주의 등과 연동하면서 사랑의 계급화가 초래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사랑의 계급화가 선구매 후지불의 형태로 이뤄지는 신용문화와 연동하면서 사랑이 소비를 부추기고 소비가 빚을 부추기며 빚을 통해 자본의 재축적이 이뤄지는 양상을 '로맨스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발표의 마지막 대목에서 박이은실 선생님은 "로맨스 자본주의, 탈출구는 있을까?"에 대해 언급하실 때, 2013년 12월 24일 서울 여의도에서 일어난 '솔로 대첩'사건을 사례로 어떤 의문의 여지들을 남겨놓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구경꾼들을 포함한 인파가 3,5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보도되었듯, 이 '공개짝짓기'의 다음날은 '빈농 해방을 위한 좌파솔로들의 씁쓸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20여명의 참석자들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여기서 한 참석자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연애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고하는데, 박이은실 선생님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이 대목에서 모두가 씁쓸한 웃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의 문법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이나 공간, 내 시간을 온전히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시간주권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을 따로 또 함께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사미숙 선생님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결합을 '로맨스 유토피아'로 정의하여 로맨틱한 사랑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된 이유를 탐문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성 상품화 담론'을 통해 논증하며, 여성 스스로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선택한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써의 '로맨스'를 '열정적 사랑'과 대비시키며 로맨스에 대한 정의를 조금 더 날카롭게 설명하였는데, 열정적 사랑이 그 순간의 시공간에 집중하여 "당신과 함께 죽어도 좋아!"라면, 로맨스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열정을 순화하는 방식이자 열정적 사랑의 죽음에 대한 갈망과 달리 "당신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살겠다는 것이다. 앞서도 로맨스가 우리의 이야기를 지속하기라고 표현했지만, 왜 낭만적 사랑이 '여성독자'의 몫이 되었을까? 여기서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산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계층적 분화보다 기능적 분화가 우위로 진행되면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 활동의 연장으로써 결혼이 제시되었으며, 사미숙 선생님은 일부일처제 결혼을 재생산과 사유재산을 운영하기 위한 효율적인 '성장치'이자 경제공동체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즉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일은 생존 사업을 이어가기 위한 경제, 법률, 정치에서의 공적인 합리화 과정일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낭만적 사랑은 이미 노동윤리의 언어와 직결되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의 '성 상품화 담론'의 다양한 인식들 중에서, 성 상품화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여성의 성적 '문란함'과 '가정 해체'를 걱정하거나, 내 애인 혹은 남편/부인이 성서비스 구매자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 또한 들려온다고 한다. 이러한 담론 또한 성과 사랑을 일치시켜 일상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로맨스 유토피아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비판적인 대목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 노동자의 권리는 어떻게 존중할 수 있는 것일까? 사미숙 선생님은 로맨스 유토피아가 독점의 대상으로 삼는 섹슈얼리티를 자본으로 삼아 성적 서비스를 상품화한다는 측면에서, 중산층도, 노동계층도 아닌 사회적으로 '비체'이며 성적 하위계층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정작 듣지 않으며 자신들도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성노동자에게만 멍에를 씌운다고 지적하며 아직 우리 모두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10분 동안의 휴식 시간 이후, 플로어 질문을 통한 토론이 이어졌다. 주어진 3시를 꽉꽉 채우고도 모자라 15분 정도를 더 할애하여 토론을 끝마쳤다. 아, 이 시간이야말로 토론이란  왜 필요한가를 보여주었던 자리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NGA의 '섹슈얼리티 공방'에서 오신 이재현님의 질문이 있었다. 좌파학자들의 대안 제시를 공감하는 반면 문제제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든스의 '순수한 관계'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합리적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런 논의들이 낭만적 사랑과 다른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한 에바 일루즈의 <감정자본주의>에서도 성찰적 주체에 대한 비판. 성찰적 주체가 자기 개발적 주체처럼 대상을 선택. 이런 방식의 낭만적 로맨스는 개인의 관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 나와 너를 대상화하는 것. 좌파학자들이 낭만적 사랑을 어떤 식으로 재복원했는지를 질문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관계'라는 표현에 있어서 선생님이 말하는 순수성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사회적인 도덕주의에 거리를 두고 결혼과 가장 거리를 두면서 내가 생각하는 순수함은 개인, 젠더와 상관없이 자기 윤리적인 실천으로서 순수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발표자의 답변은, 어떤 사랑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인가? 낭만적 사랑의 핵심은 '자아실현'의 성취이다. 같이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낭만적 사랑이 돈과 자본의 매개가 될 때,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비하시키는, (남성에 의해서 여성이 억압되는 게 아니라)여성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는 방식이 된다. 로맨스와 성노동이 본질적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특히 성노동과 관련하여 '합리적 사랑'에서 또한 자기실현의 낭만적 사랑의 도식을, 이분화된 공식을 벗어날 수 없지 않겠나. 그리고 소비의 문제에 있어서, 박이은실의 '로맨스 자본주의'라는 말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정치경제학 적녹보의 모순을 얘기해주는 것. 이 순수성의 논리 안에 소비뿐만 아니라, 권력 또한 마찬가지로 매몰된다는 것 이다. 그랬을 때, 어떤 대안을 말 할 수 있는지. 각자에게 맡기는 것. 어떤 윤리적 강령과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낡은 방식이다. 어떤 특정한 사랑관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을 도덕적 법적으로 매도하지 말자는 것.

2)부산대 법대에서 오신 오정진님의 질문, 박이은실 선생님과 사미숙 선생님의 발표를 연계하여 포스트모던 주체에 대해서 질문해보려고 한다. 이현재 선생이 말씀 해체가 경계를 넘나드는 것 양립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 하지만 혼종성에 방점을 두었을 때, 사랑이 다른 것을 흡수 통합하는 경향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3)경상대 정치경제학 오병헌님 또한 흥미로운 질문을 하셨다. 솔로부대를 하면서 군사주의로 나갈 때 비판. 연애경쟁이라는 것 자체. 조직에 있을 때, 운동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된다. 연애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의 정서를 알겠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한 연대를 꾀할 때, 개인들의 다양한 지향들이 얘기하셨듯이 어떠한 물적 조건 아래 각자의 침해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싶다. 현실에서 어떠한 연애의 풍습이 나머지 연애 풍습을 주도하는 형태로 간다는 것.

4)세 분의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로맨스 자본주의 유토피아가 일정한 주체양식에 대한 이야기라면, 기존에 해왔던 여성주의 내에서 비판들. 왜 유독 여성들이 로맨스 낭만적 사랑에 대한 주체로 얘기되는지 벗어나지 못한 측면들. 여성에게 사랑과 결혼이 삶과 결혼을 그 대상이 되는 관계는 읽혀지지 않는 측면이 있기에 어떻게 해소될까?


 
 생각지도 못한 서울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코뮤날레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모두 점심 시간까지 아껴가며 발표를 듣고 질문을 하고, 일찍 도착하여 끝까지 가지않고 열심을 부리는 이박삼일간의 기이한 열정에 덩달아 피곤함도 모른채 여기저기를 쏘다닐 수 있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열정 속에서 치뤄졌던 맑스 코뮤날레의 일박이일간의 에너지를 후기를 마무리하는 지금까지 쭉 이어받았기에 다시 일박이일을 되살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다른 삶을 위한 열정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또 무사히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어소시에이션, 만남을 통해 가능한 어떤 것에 관하여

-대안을 준비하는 문화정책포럼(4월) 참관기

 

 

양순주  

 

 

  4월 24일, 서울에서 있을 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터전하던 곳을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다녀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않지만 또 쉽기만 하지도 않다. 팀의 이름으로 목적을 지니고 다녀오는 것이었기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있었다. 그것은 혼자 또는 함께 여행을 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설렘이 있지만 결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닌, 쿵쾅쿵쾅하면서도 가슴 속에 뭔가가 꽉 막힌 듯한 긴장감. 이전에 상허학회 좌담회를 위한 예비/모임에 참가할 때, 그리고 워크숍을 위해 일본으로 갈 때에 KTX에서, 비행기에서 체감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부산을 떠나 어디론가 가는 길에서 몸이 느낀 것들은 여운을 남기고 또 다시금 어떤 순간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문화적인 삶의 방법들_직접 만들어가는 삶>>이라는 주제로 "대안을 준비하는 문화정책포럼(4월)"이 2013년 4월 24일 수요일에 열렸다. 4개의 모임(시민자치문화센터/극단'뛰다'/aff-com/우리동네사람들)에서 사람들이 초대되어,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들을 이야기해 보는 자리였다. aff-com(이하 아프-꼼)은 <삶-연구-글쓰기의 인터페이스(interface), aff-com>이라는 주제로 연구모임의 궤적과 활동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많지 않았던지라, 또 이전에 있었던 연구모임의 활동들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언어)으로 아프-꼼을 말(소개)하는 게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그 말들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왕에 얻은 기회를 통해 좀더 많은 이들과 아프-꼼의 활동들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해서 소개글과 피피티를 준비하기로 했으나 피피티는 상경하는 기차 속에서도 계속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  

 

 

 

 

 

  이주민문화예술센터 프리포트에 일찍 도착해 있다가 문화연대에서 오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따끈따끈한 피피티를 전해드렸다. 설치되어 있던 노트북과 버전이 안맞아서 완전한 피피티를 보여줄 수는 없었던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포럼이 진행된 장소 역시 의미있는 곳이었는데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 구석구석 둘러보지 못했던 게 아쉽다.

  박찬국(미술가. 논아트밭아트 디렉터) 님의 사회로 오후 3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매월 시행하고 있는 문화접촉 프로그램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셨고, 최근 다른 삶을 살아보려는 의지들이 많이 높아져 새로운 길들을 찾아나서는 것들이 정치적, 사회적인 실천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당일, 참가한 사람들도 꽤 많았고 그 시간, 그곳은 열기와 사람으로 가득찬 공간이 되었다.    

 

 

 

 

 

  이광준(시민자치문화센터 공동소장) 님의 <생태적 문화귀촌과 제작문화>를 필두로 하여 아프-꼼, 임정아(우리동네사람들) 님의 <혼자의 삶에서 여럿의 삶으로>, 배요섭(극단 '뛰다') 님의 <화천에서 연극하기> 순으로 발표들이 이어졌다. 이광준 님은 대안적 삶을 위한 생태문화적 귀촌, 소통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플랫폼으로서의 생태적 문화 귀촌, 이를 위한 생태적 문화귀촌 우물터-공감토론, 아카데미, 지역탐구생활 등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삶을 유희해 낼 수 있는 동력으로써의 제작 문화를 소개, 설명해 주셨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부산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생각다방 산책극장)이나 일본에서 가 보았던 장소(이레귤러 리듬 어사일럼) 등도 생각났다. 아프-꼼은 2008년부터 시작된 연구모임 a로부터 시작된 다양한 기획들-웹진 아지트, 로-컬쳐(Lo-culture), net-a라는 이름으로 국경을 넘어 이루어진 활동들과 더불어 아프-꼼이라는 이름으로 이행되면서 변주된 총서, 어소시에이션 활동 등에 관한 궤적들을 소개했다. 또한 대학, 제도, 지역의 관성적이고 타성적인 관계맺음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결속의 형식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자 실험으로서의 활동들이 지닌 가능성과 에너지, 실패의 위험성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이루어졌다. 그 디테일들을 최대한으로 전달하기 위해 너무 애를 쓴 나머지 다른 분들보다 더 긴 시간동안 발표하기는 했지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다. 임정아 님은 길게는 10년, 짧게는 2년 정도 정토회 청년 활동을 통해 알고 지낸 6명의 친구들과 귀농을 준비하는 우리동네사람들(우동사)에 대한 소개를 해주셨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고, 귀농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에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밥상 모임, 카페오공, 텃밭오공, 공동주거 등의 활동과 그 방향(자립)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함께 생각하면서 어떤 꿈을 같이 꾸고 실현해 나가는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는 즐거운 모습들이 담긴 피피티가 인상깊었다. 배요섭 님은 2001년 한예종 연극원 동기들이 모여 만든 연극창작단체 '뛰다'를 소개해주셨다. 자료집에 실린 글들로만 가지고 형식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시며 공연, 모임이 자리한 공간(화천), 마을 내에서 행한 사업-영정사진, 결혼사진, 마을대동회 잔치와 같은 이벤트들 등을 담은 이미지와 영상들을 보여주셨다. "함께 논의하고, 작업하고, 함께 나누는 것"을 관계를 유지하는 원칙으로 삼아 단체를 이끌어가는 방향에 대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는 점들이 실제 활동에서도 많이 녹아들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특히나 그간 '뛰다'의 작업들을 '진화하는 연극', '저항과 치유의 연극', '유목하는 연극'이라는 말들로 정리해서 '창작과 연구와 공동체'에 관해 다양한 시도들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아프-꼼의 인터페이스와도 공통되는 지점이라 반가웠다. 이렇게 또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나 실험들을 통해, 유사한 고민들을 가지고 삶을 변화시키려하는 이들과 만나게 되는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순간들을 통해서도 활동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순간들을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시도하는 동력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또 그 과정에서 분투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고민을 해야겠다.

  이후 전체토론과 플로어 질의에서는 이러한 점들을 바탕으로 한 공통되는 지점과 차이나는 지점들에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가 이루어졌다. 임정아 님은 예술과 자립, 또 그 실천의 일환으로서의 귀농, 그렇기에 자립은 '혼자서 결단내리고 다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임정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현실에서 부닥치는 감정 문제, 특히 싸움에 대한 이야기들도 듣고 싶다는 의견에 있어서 꽤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배요섭 님은 사적인 문제들이 결부되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공동체에서 특히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일까를 살피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단체에 속해 있으면, 그 단체를 통해 개인이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 지점도 중요한데, 그것이 한편으로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는 점에 공감했다. 개개인 각자는 원하는 것, 역할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것들을 어떻게 조율해 가느냐, 또 그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이라는 얘기도 해주었다. 그외에도 정부 정책 및 지원금 등에 관한 시스템의 문제와 이를 넘기 위한 시도와 발상들에 관해서도 공유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비슷한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고 또 많았지만, 결국에는 다 똑같구나 하는 환원의 논리에 빠지지 않게 박찬국 님께서 마무리를 잘 해주셨다.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차원을 다 달리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속에서 "어떻게 공유문화를 확장해 갈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들을 참석해주신 분들이 다들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하게 있는 것들을 구체화하고 드러내보고 더 튼튼한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는 "상상"이 필요하며 이 때 "상호지지"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지점은, 추상적인 어떤 말보다도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포럼은 마무리되었지만, 정리하면서 아프-꼼에 대해 들어보고 또 평소 때 궁금했던 지점이나 부산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적인 활동, 연구모임 등에 대한 문의가 있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 부산에서 활동을 하다가 상경한 분도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정식집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문화연대 측의 많은 사람들과 활동에 관한 고민, 즐거움, 어려움에 대한 얘기들도 할 수 있었다. 또 그날 수요문화제가 있다고 잠깐이라도 보고 가라고 홍대클럽 빵으로 나를 안내해준 꽃섬 님께도 감사하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김봄눈별 님의 오프닝 공연에 이어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그리고 콜트콜택기타노동자밴드의 노래 한 곡까지를 들을 수 있었다. 기타를 만들기만했지 연주해 볼 엄두는 내지 못했었다던 말들, 그러나 이렇게 연주하면서 더 많은 분들에게 이 상황(콜트콜택 노동자투쟁 등)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고마움의 말들, 특히나 밴드의 공연 전에 이루어진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는 정말 인상깊었다. (고무줄)이 끊어지고, 공장의 문이 닫혀도 우리의 작은 행동은 끝나지 않는다는 의지와 신념, 그리고 밴드의 손과 목소리를 통해 전해 들은 <불놀이>는 정말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것으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그 삶들에 어떠한 말을 붙이기는 어렵다. 그저 한갓의 수사나 말들로 그들의 삶을 덧칠하고 싶지는 않다. 내 몸이 느꼈던 그 전율, 미세한 감각들에 대해 더 많이, 더 깊이 사유하고 또 실천해야겠다는 생각들을 가져본다. 그럼에도 KTX 시간에 급급해 공연을 더 보지 못하고 나왔던 조급함, 한심함에 대한 생각들과 함께. 

 

 

 

 

 

 

 

 

 

 

'aff-com'과 학문 균열내기

 

 

 

 

권명아

 

아프꼼 특집기사로 교수신문 칼럼에 기고되어 있습니다

http://m.kyosu.net/articleView.html?idxno=26850&menu=1

 

 

 

 

 

 

 

 

 

 

 

충원율, 취업률 등 이른바 교육부 지표가 모든 것을 잠식하고 착취하는 오늘날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은 생산성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제 일상적이 돼 버렸다. 인문학자나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모두 이런 규정 속에서 무기력해지거나 분노를 곱씹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별다르지 않을 수도 있으나 많은 인문학자와 연구자들은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aff-com’이라는 이름의 내가 속해 있는 연구 모임 역시 이런 별다른 자리를 모색하는 모임 중 하나다. 아프꼼의 출발점은 저런 분노와 무기력을 곱씹거나, 거기 침잠하는 수동적 휩싸임으로 내버려두지 말고 다른 것을 만드는 에너지로 삼아보자는 발상에서 시작했다. 나는 때로 이것을 속된 말로 ‘적들에게 감사하자!’는 모토로 말하기도 한다. ‘인문학은 생산성이 없다!’는 ‘적’들의 규정과 거기서 비롯되는 분노와 무기력을 고스란히 돌려주면 남는 것은 파국뿐이다.

그러나 그 분노와 무기력을 잘 받아 안아서(파토스란 어원적으로 받아 안다는 뜻이다) 다른 것으로 만들어 이 세상을 향해 되돌려줄 때 그것은 더 이상 파국과 복수나 무기력이 아닌, 다른 세상의 형상이 될 수 있다. 아마 이런 말이 듣는 이들에게는 백일몽이거나 낭만적인 공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아프꼼의 지난 세월과 시도, 그리고 오늘날의 자리는 이것이 공상만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아프꼼의 이러한 이론과 실천은 정동(affect)과 정념(pathos)을 키워드로 삼아서 타자로 열린 지평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주체성을 구축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련의 연구들과 맥을 같이 한다.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논의를 화두로 삼아 기존의 페미니즘과 젠더 연구, 서발턴 연구와 문화연구 등 많은 결들이 이러한 연구에 결합돼 있다.

실천적 차원에서는 기존의 국민국가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관계와 삶의 양식으로서 어소시에이션을 구상하는 실천적 모색들도 아프꼼의 이론과 실천의 맥락이 닿아있는 지점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아프꼼은 대학이나 학회와 같은 기존의 학벌중심과 지연(수도권 중심)으로 강력하게 구축된 학문장이나 인문학의 공간을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환시켜서 새로운 결속의 원리를 구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학문장은 수도권 중심주의의 폐해를 전형적으로 답습할 뿐만 아니라 이를 재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제도다. 따라서 이른바 지방대 출신 연구자들이 서울의 몇몇 거대 대학 중심으로 재생산되는 학문장에 자신을 동등하게 기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게다가 지방의 경우 학문장은 특정 대학을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독점돼 있는 처지여서 지역 연구자들의 입지나 선택지는 매우 제한적이다.

아프꼼은 매우 작은 모임이지만, 이런 학문장의 주어진 조건에 균열을 내기 위한 상징 투쟁을 중요한 이론과 실천의 방법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이것을‘지렛대 이론’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여보기도 했다. 즉 나보다 더 큰 물건을 혼자서 들어 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하나의 좋은 지렛대가 있고, 내가 들어 올릴 물건의 정확한 포인트에 그것을 기입할 수 있다면 나는 나보다 엄청 무거운 저 대상을 들어 올릴 수도 있다.

하여 아프꼼은 너무나 거대하게만 보이는 이 학문장에‘나’와‘너’가 서로에게 지렛대가 돼 주고, 디딤판이 돼서 저 거대한 학문장, 제도, 혹은 세상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다. 해서 그날, 이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아프꼼은 오늘도 이 세상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연구하고, ‘나’와‘너’가 이 세상 속에서 경쟁하고 견제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렛대가 되고 디딤돌이 돼서 이 세상을 들어올려서 다른 세상을 만들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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