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살아남는 법을 생각한다. 

 

 

 

소설가 金 飛

 

 

 

 

 

 

 

 

  나는 살아남는 법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삶의 대의를 위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싸우며 스스로의 삶을 일으키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여전히 나의 생존만을 고민한다. 날마다 나를 위협하는 이 세계와 그리고 여전히 모호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는, 존립 자체를 흔드는 나의 정체성으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내가 아닌 나를 만나고 내가 아닌 나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나는 너무 자주 말을 잃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생존을 꿈꿔야 한다. 꿈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서 만나야 한다.

 

  나는 흔들리고 위태로운 존재들을 위해 이 글을 썼다. 고작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생명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의 삶을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를 빗대어 어쭙잖은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경계 위에 살 필요가 없었던 누군가에게 이 글은 자의식 가득한 개인적 서사에 불과할 것이며, 보다 큰 뜻과 의미를 지닌 삶을 목표로 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뻔 한 말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마저 매일 환기해야 하는 생명들을 알고 있기에, 까치발을 딛고 경계 위에 살아야 하는 존재들을 알고 있기에.

 

  인간적이지 않은 삶이어도 상관없다. 정의롭거나 희망에 가득 찬 삶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가슴 속으로 들고 나는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우리들의 생은 폄하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될 당위를 지녔다.

 

  여러 가지 형용할 수 없는 위협과 불안으로 짓눌려있는 생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칼끝 같은 당신의 삶 위에 꼿꼿이 서는 묘기를 보여주기 바란다. 당신의 발에서 흐른 피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으로 발아래 그려지기를 바라고, 당신이 외치는 비명이나 절규가 토해지고 토해져 한 권의 신음으로 세상 속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들의 값 비싼 서가에 꽂혀 끝내 외면당하더라도 당신들의 삶이 선뜩하게 어딘가에 남겨지기를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당신의 불안을 모르거나 강박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헤아리지 못한다더라도, 당신이 밟아가고 있는 그 시간의 칼날들은 그 어떤 생의 시간보다 또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당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조차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입을 크게 벌리고 온몸을 찢으며 당신을 집어삼키고 있는 아픔을 쏟아내시라. 목이 끊어져 그 자리에서 갈가리 흩어지더라도, 볼썽사나운 꼴로 엉엉 울며 그곳에 몇 개의 살덩이로 조각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당신의 삶을 토하라, 외치라, 절규하라.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당신의 삶을,

  당신만이라도 사랑해야겠기에.

  거기, 살아있는 당신이 바로 사랑이기에.

 

  불안으로 흔들리는 당신을 알고 있다. 강박에 짓눌린 당신을 알고 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롭고 고독한 생을 알고 있다. 고독하다는 말조차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당신의 시간을 알고 있다. 아름답고 찬란한 문명으로 갈가리 찢겨버린 당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 흉측한 세상의 말로 얼굴을 가리고 혼자서 엉엉 울고 있는 당신을 알고 있다.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워한 언어임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부끄러운 것이 글이어서, 나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뻔뻔스러운 나를 기억하기로 한다. 나의 생존이 곧 세상의 희망임을 새기며, 이 글의 마지막을 적는다.

 

  돌아볼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태로움일 것이다. 사무치게 고독하고 외로울 때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는 근원을 스스로 지워버린 내게, 삶은 날개 없는 비상을 닮았다. 날마다 뛰어내려야 하는 추락일 것이다. 떨어져 내려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면 낙화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질 것이며, 흔들리는 것이 나의 미래라면 온몸을 뒤틀며 세상에 없는 춤을 출 것이다. 무엇으로든 나는 그곳에 반드시 생존할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어디에서든 낮은 곳으로, 가장 밝은 곳으로부터 등을 지고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고독한 당신의 걸음은 곧 인간을 향한 걸음이다. 어떤 색의 발자국이든 누군가 뒤따를 수 있는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꼬리를 물며 이어질 우리들의 생존에, 나 또한 찬사를 보낸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날들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정일의 시 '지하인간' 에서

 

 

 

 

 

 

 

 

 

제17화 해체 (3)  

 

 

 

소설가 金 飛

 

 

 

 

 

 

 

 

 모두가 말하듯이, 결혼은 사랑의 도착점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따라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어쩌면 순진하게도) 결혼이라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모성의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고독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삶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나마 누군가와 함께 그 고독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다가 다시 또 홀로 죽음이라는 삶을 마무리하는 고독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에 대한 그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 어떤 제도나 사회적 제약이 있건 없건, 어차피 모든 결혼은 사랑이라는 몸체를 지녔고 그 나머지는 그곳에서 뻗어나온 무수히 많은 부수적 논쟁이나 논란일 것이다. 21세기의 결혼 앞에 사랑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결국 모든 결혼이라는 관계가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와 현실이 아무리 그것을 농락하려고 해도, 사랑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또 하나, 혼란 속에서 경계 위에서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가난'이다. 어쩌면 '가난'이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득세한 이 시대를 환기할 때 가장 치명적이고 위태로운 현실을 일깨우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어차피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고 있기에 인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 물질문명의 자본주의 세계는, 그래서 계속해서 '인간'이나 '사람'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은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지만 나는 그러한 '가난'의 풍경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한다.

 

 가난하다는 말은 자본의 시대에서 도태되어 있다는 선뜩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가족중심주의의 한국 사회는 서로 주고받으며 자본과 부를 대물림한다. 결국, 가난의 운명은 쉽게 전복되지 않으며, 사회나 시대에 대한 박탈감은 더욱더 그러한 숙명을 지닌 개인을 억압하게 마련이다. 거기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린 교육 현실이 가난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교육을 통해 계층 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은 단순히 계층의 대물림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는 말은 이 시대의 잔혹한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가난'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참으로 맞춤인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는 인간,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는 없는 인간. 도태되고 소외되어 홀로 떨어진 자유로운 인간. 물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가장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시대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인이 자본이라는 세상의 틀을 벗어버리고 오롯이 개인의 인간됨을 사유하고 그것을 확장하여 소외되고 버려진 인간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척박한 사회가 도착하게 될 미래의 어느 어두운 모퉁이에 생명의 빛처럼 내리쬘 수 있는 고귀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나 스스로도 내 생각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판타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던 나의 가난을 떠올리며 나는 왜 그때의 그 가난에 매몰되어 있기만 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물네 시간을 정신없이 짓누르는 가난한 일상이 나의 사유와 고민의 여유마저 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난 속에서 인간을 사유하고 생을 사유하는 일이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리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가난에 짓눌려있던 그 시간이 가끔 몸서리치도록 후회스럽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정체성이라는 혼돈을 짓밟고서,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의 가치 있는 생을 살기 위해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면,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 피어난 경계 위의 꽃처럼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가난해도 괜찮은 삶을 꿈꿀 수 있었을 텐데.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인간을 깨우치는 삶을 받아들여, 평생 가난 속에 묶여있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공존하는 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의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가난은 숙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을 매몰시키는 증거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계 위에 서 있는 위태로움은 때로는 탁월한 균형감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기도 한다. 생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최악의 조건이나 환경도 삶의 마지막이 아니며, 그곳은 또다시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부여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어느 것이든 '예술'에 흠뻑 몸을 담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엄청난 돈을 들여 '예술'이나 '예술가'를 사고파는 시대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의미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 예술 또한 모든 인간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향유하는 그 중심일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돈이나 물질에 기댈 필요는 없는 것일 테고.

 이 잔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의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난이 농락되도록 허락하지 않으며, 가난과 고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앞에 예술로 탄생시켜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 척박한 현실을 뚫고 일어선 기적의 풍경일 것이다.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시련의 한가운데일수록 그렇게 태어난 나를 위한 예술품들은, 그 어떤 화려한 자본의 생산품보다 뼛속까지 나를 위로하는 고마운 생의 선물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모두 가난하다. 자본의 유무, 혹은 부의 크기에 따라 가난을 가늠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 만족하는 부유함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가난의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난이기도 하고 또한 결핍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결핍되어있기에 공존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할 테고.

 그러므로 나는 인간은 반드시 가난이나 결핍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거나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이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사유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지켜야할 것이다.

설령 그 속에서 그 어떤 예술이나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물며 그 안에서 인간이나 삶을 건져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가난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결핍이나 가난은 분명히 위로되고 위안받게 될테니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바로 나의 삶이 있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아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결핍과 가난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에.

 

 

 

 

 

 

 

 

 

제16화 해체 (2)  

 

 

 

소설가 金 飛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 안에 갇힌 스스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대물림'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탄생으로 인해 주어진 생활환경과 삶은 인간을 꼼짝없이 어떤 한계 속에 몰아넣고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폭력과 억압의 상처를 지닌 개인은 가족 안에서의 소외로 인해, 가족 중심 사회인 이 세계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소외되고 도태된다. 모든 것을 가족의 탓이라거나 가족을 중심으로 미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는 세계는, 당연히 존중받고 축복받아야 할 한 개인의 삶을 꼼짝없이 묶어놓고 만다.
  이러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삶을 시작하는 불운한 개인은 일찍이 자신의 삶을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탄생 자체만으로도 이미 '삶'이라는 축복을 지닌 채 세상에 나왔다. 그것이 억압되고 폭력적으로 환기되며 그러한 현실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냉정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을 지닌 가족이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결국 가족이라는 그 출발점은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며, 아득히 보이지도 않는 그 출발점을 자꾸 돌아보며 주춤거리는 일은 스스로의 삶을 옥죄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깨우치며 지지받는 스스로의 삶을 인식하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해체이며 또한 진정으로 존중되어야 할 '가족'의 의미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가족 중심 사회는 결국 해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중매체에 끝없이 오르내리는 가족주의에 대한 맹신은 결국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머지않아 깨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가족주의의 재생산이 미래에 스스로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오히려 편협한 사고방식을 주입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깨우치면서,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직면하게 될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흉터를 닮은 관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애정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공존과 공감의 의미이다. 이 사회가 가족보다 더 커다란 공존으로 인해 유지되고 발전해 나아가며 그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는 개인이 탄생하고 성장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일깨우는 일이, 이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를 환기해야 하는 단 하나의 남겨진 가치일 것이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아마도 결혼이라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 삶의 전환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제도 속으로의 편입.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미 다양한 사랑의 형태로 혹은 가족의 형태로 도전받아왔고, 또한 앞으로도 무수히 도전받게 될 것이다. 


  최초의 결혼은 당연히 생존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즉 필요 때문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수컷의 번식 욕망과 결혼이라는 제도의 관련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었지만, 그리고 또한 결혼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주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시대 혹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 근거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예속되기 위하여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합당한 필요조건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결혼은 왜 필요한가? 번식 욕구라거나 신분상승이나 재산증식의 욕망이라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목적과 똑같은 요건들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그것이 아닌 사랑이라거나 삶의 안정감 혹은 친밀한 유대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혼이라는 제도의 의미는 달라진다. 전자를 목적으로 한다면 결혼이라는 것은 진정 투쟁하며 경쟁하듯 싸워내야 할 테고, 후자가 목적이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두 사람만의 교류가 그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기 위해 결혼을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분명히 어떤 것은 주가 되고 또 다른 것은 부가될 텐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최초의 감정에 의해 발화되는 판타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이든 결국 시간이 지나며 잃어버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던 건 아니었는지.
  결혼하게 되면, '책임감'이라는 게 생긴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근거해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 책임감이라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생겨난 책임감이라는 건 어쩐지 주체적인 에너지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주체적인 힘이 아닌 타의적인 힘에 기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결핍된 삶을 맞이하게 될 증거가 아닌가?
  어쩌면 현대 시대의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이 개인의 힘으로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적인 인격체가 만나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목표가 결핍된 채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처음부터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 되어버린 한국의 결혼 제도는, 어쩔 수 없이 불안요소들을 껴안은 채 판타지에 기대어 삶을 배팅하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을 시도하는 것인 건지도.
  물론 그 모든 불안 요소들을 견디며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결혼한 당사자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이상적인 가정이 존재할 수도 것이다. 그것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 또한 옳은 일은 아닐 것이고.
  그러나 결혼 상대를 물색하며 가장 많이 내세우는 조건이라는 '보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참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성소수자라는 개인으로써 그것은 달성할 수 없는 지점이기는 하지만(당연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결국 그것 역시 소외를 양산하고 인간을 획일화된 틀 안에 묶어놓는다는 차원에서 과연 그것이 그들의 말대로 이 다양한 인간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근원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결국, 가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 또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해체라는 숙명 앞에 서 있다.

 

  토플러에 따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핵가족 시대를 넘어서, 새롭게 이름 붙여야 할 가족과 결혼의 시대 앞에 다가와 있다. 동성애 부부는 물론이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기대지 않고 파트너쉽을 유지하는 부부들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새로운 가족과 결혼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하니, 분명한 것은 기존의 가족과 결혼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목전에 도달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족의 존재 의미가 '유대'와 '소통'이었던 것처럼, 결혼의 존재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그 중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고. 飛  

 

 

 

 

 

 

 

 

 

제15화 해체 (1)  

 

 

 

소설가 金 飛

 

 

 

 

 

 

 

  해체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지닌 이들에게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존재로, 불안한 존재로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경계성은 무엇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경계 안으로 포섭함으로써 모호하고 흐릿한 존재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나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 사람들은 나의 외향만을 두고 나를 하나의 성별로 규정했지만, 내 안에는 내가 아닌 내가 존재했고, 그것은 내가 아닌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해 억압된 나였으며,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내 삶의 존재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잘못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간단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또한 결국 하나의 인간을 유린하는 부족한 수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혼란은 언제나 내 삶의 일부였다. 유년기 시절에는 외부의 세계로 인해, 그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무지했던 내가 혼란스러웠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내 몸이 남성으로 성장하면서 도망치거나 숨어들 수도 없는, 즉물적 혼란이 내 삶을 짓눌렀다. 오직 생존 하나만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세상이 알려준 경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나 자신과 싸웠고, 그것이 오히려 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혼란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를 둘러싼 혼란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더욱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태어나 사는 세계로부터 농락당한 배신감은 나를 더욱 이기적이고 지독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야 나는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살게 했던 생존의 방식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운 존재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나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던 외부의 세계가 뻔뻔스럽게도 나를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미 깨닫고 있다. 그것 역시 '나'라는 한 개인을 무책임하게 남용하는 이 세계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혼란이나 혼돈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생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를 해체해야 한다.

 

  이 세계 안에 살지 않고, 내 안에 살고자 한다. 모든 세상의 선언들을 불신하며, 질서와 규칙을 나의 이름으로 다시 부여한다. 언어를 조합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선뜩하고 눈부신 언어로 다시 조합한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생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규정되고 조작된 인간이 아닌 알몸의 인간으로 세상과 마주 서야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는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나와 관계를 맺었던 인간들과의 만남을 해체하고자 한다. 나를 닮은 인간, 나와 유전자적 조직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 나의 생존에 앞선 그들의 생존 방식이 어떠했든 '가족'이라고 부르는 통칭의 사람들은 나의 생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렇다, '도움'이다. 나는 그것을 '가족애'라던가 '혈연'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움'이라고 간략화시켜 버렸다. 물론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는 그것을 '천륜'이라거나 심지어 '본능'이라고 말하며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의 개별화된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면 그 한계까지 다가가, 가족이라거나 혈연이라는 관계를 유연하게 농락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부인할 수 없는 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나도 내 가족들과 공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일란성을 경험했고 또한 앞으로도 더욱더 자주 그것을 깨우치게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유전자적 일란성까지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말이다. 유전자나 핏줄이란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똑같은 덩어리 몇 개의 산물일 뿐, 그 속에 개인을, 개인의 삶을 묶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나의 생존에 기여한 '도움'을 잊지 않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미래 어느 순간으로 기약하면 되는 것일 뿐 그들과 나의 개별성을 일찍부터 깨우쳐야 하는 것이, 우리와 같은 혼란과 불안 속에 사는 인간들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첫 번째 해체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족의 힘이나 그 중요성에 관해 너무도 자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입하고 있지만, 그것은 파편화된 세계를 지양하기 위해 개인적 삶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환기한 결과일 뿐, 오히려 인간이 개별적인 스스로 삶을 인식하고 가족의 틀 안에 갇히지 않은 채 그것을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 독립된 삶을 영유해 나아간다면, 그것이 오히려 가족이나 혈연 안에 갇힌 사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건강한 사회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미 가족주의와 혈연에 집착하며 더욱 폭력적이 된 세계를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격하고 있으며, 집착적으로 언론이나 대중매체가 환기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분명 과격하게 들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안온하고 평화로운 가족 안에서 건강한 사상과 생각을 교육받으며 자란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볼 때면 참으로 고맙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감상이 떠오르기는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이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가족의 해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오직 자기 자신의 가족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들의 행복만을 기원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너무 많은 가족들의 모습은 오히려 이다음 언젠가 집단 이기주의의 원형을 양산해낼 수도 있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도 가족은 없었다. 유전자적 일란성을 공유하고 있는 혈연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족'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자주 망설여진다.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가지 이유로 해체된 가족의 구성원들은 버려지거나 혹은 누군가를 저버린 것으로 인해 필요 없는 죄책감이나 상실감으로 자기 자신을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사회가 앞장서서 그러한 불안과 혼란의 정서가 마치 당연하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사회에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가족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하나의 마을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지금의 가족은 개별화되고 단절된 채 섬처럼 서로 괴리되어 있다. 그러한 파편화된 사회를 한탄하며 부정적으로만 환기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기존의 가족의 개념, 가족에 대한 이해를 근원적으로 다시 재고해 가족을 가진 사람이든 가족을 갖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소외되거나 폭력적으로 환기되지 않은 채 정당한 개인의 삶을 추구하고 유지할 수 있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족은 없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족으로 보살피고 아껴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탄생과 결부된 사람들의 최초의 '도움'을 잊지 않으면서, 내 가까이에서 나의 생존을 돕고 나와 함께 삶을 일구어나간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에게는 귀하게 여겨야 하고 존중해야 할, 진정한 나의 가족이다. 

 

  가족은 그렇게, 재정립되기 위해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혈연으로 묶인 몇몇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그 경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오가야 하는 공존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족이 해체되었기에 인간의 개인화 혹은 사회의 파편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혈연 중심주의에 묶여 있기 때문에, 혈연의 가족이 아닌 다른 의미의 가족을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생존하는 법을 외면하고 있기에, 이 사회의 파편화는 더욱 지속하고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飛

 

 

 

 

 

 

 

 

 

 

제14화 정체성은 없다.  

 

 

 

소설가 金 飛 

 

 

 

 

 

 

 

나는,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기도 하며,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나는 나의 존재를 깨우치기도 한다. 내가 여기에 없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어떤 존재가, ''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혼돈이나 혼란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이 어떤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이름으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호출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이 세계의 일방적인 호출로 인해 '여성'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박탈당한다. '학생'이라는 이름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의 인간도, 획일화된 교육의 틀 속에서, 혹은 '학생'이라는 이름의 편견 속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가장'이라거나 '남자'의 이름도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인간을 어떤 틀 속에 꼼짝없이 가두어버리며, 하물며 '여성'이라거나 '장애인'이라는 말은 더욱더 폭력적으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강압적인 틀을 지워버린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그렇게 모든 각자의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 수동적이고 획일적인 지시에 의해 국가나 제도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데 일조해왔지만, '시간'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층위의 거부할 수 없는 움직임은 이 세계와 인간을 단 한 순간도 어느 한 곳에 머무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우주의 시간으로는 일각에 지나지 않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흘렀을 뿐, 우리의 세계는 지금 어떤 모퉁이를 돌며 시간의 관성을 견디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병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비'라는 이름을 가지면서, '남성'이라는 틀 속에서 빠져나와 '여성'이라는 이름 속에 편입되면서, 그리고 그 속에서 전에 없던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다른 층위의 혼란과 혼돈 앞에 서 있는 나를 목격한다. 거듭해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혼돈은 언제나 이방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친근했고 때로는 낯설었지만, 언제나 그건 일정한 거리감 속에 존재하는 이방인이었다. 그 혼돈 앞에서 매번 얼굴이 굳어가던 것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살아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고.

나는 지금까지 무수히도 여러 번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말했지만, 이제 나는 더는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건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삶과 시간을 희생하고 있는 나와 같은 처지의 소수자들에게는 반역이나 배반처럼 들리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정체성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인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나도 혼란 속에 있으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의심과 의혹의 눈초리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외부의 시선이나 편견 따위 이제 뻔뻔스러울 정도로 내성이 생기긴 했지만, 내 안에서 어긋나며 찔러오는 무언가를 나는 분명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두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자리한 흉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정체성이라는 말에 붙들리면 붙들릴수록 오히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거기는 더욱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기에.

 

나는 비겁한 삶을 지향한다. '지양(止揚)'이 아니다. 분명한 '지향(志向)'이다. 나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논리적으로 스스로 입장을 서술하며 턱을 높이 치켜드는 그런 삶이 아니라, 얼버무리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해 머쓱하게 웃고 마는 그런 얼굴로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것이, 결국 내 삶이 궁극적으로 도착하게 될 지점일 것이다. 타인을 생각하고, 이 사회를 고민하고, 내 나라를 걱정하고, 이 세계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나는 오롯이 나 혼자만 생각하며, 흔들리고 불안한 나를 감지하면서,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 나 하나만을 겨우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세상이라는 인간을 생각하는 대신, 오직 나 하나의 목숨에 매달려 벌벌 떨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며 살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따위 비겁하고 비루한 삶이 어디 있느냐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온다면, 구구절절 어려운 수사와 언어들로 나의 선택과 논리를 증명하는 대신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세상의 말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밝혀낸 반면 그만큼 너무 많은 것들을 소외시켜왔다. 쏟아져 나온 말들을 신뢰하면서, 그 속에 매달리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정체성이라는 몇 개의 기호 앞에 우리는 너무 무기력해져 버렸으며,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일인데 그 앞에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고 희망을 찾아간 반면, 그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삶을 져버리고 목숨을 잃었다. 정체성이 또렷한 것일수록 그만큼 당당하고 화려했으며, 정체성이 없는 존재는 언제나 괴물적으로 환기되어왔다. 물론 어느 것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올바르게 호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서성거리고 더듬거리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도 갇히지 않은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나 자신을 두지 않고 위태롭고 흔들리는, 부유하며 사는 삶을 날마다 꿈꾸면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혹은 놓쳐버린 나를 닮은 인간들에게 괜찮다고 그들의 어깨를 토닥일 수 있는 그런 삶을. 비겁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내 안에서 나를 위한 삶을 놓지 않고 사는 끈질기고 지독한 생의 애착을.

 

'정체성은 없다. 정체화가 있을 뿐이다.' - 자크 데리다

 

 

 

 

 

 

 

 

제13화 무명의 생

 

 

 

소설가 金 飛 

 

 

 

 

 

 

그래서 나는, 나를 띄워보낸다.

 

  지상의 관념 위에 나를 붙들고있던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이제 나는 나를 허공으로 띄워올린다. 경계 속에 나를 속박시켰던 편견과 강박, 그리고 또 다른 감옥일 수 밖에 없었던 전환과 변신, 끈질기게 나를 붙들었던 괴물같은 인간성과, 어디에서 기인하는지조차 알지못했던 두려움의 끈을 벗어버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땅을 박차 올라 허공에 나를 띄운다.
  날개도 없는 것의 날갯짓은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높이에 불과하겠지만, 자신들의 경계 속에 안온함을 누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그건 고작 투신이거나 추락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온 힘을 다 해 나 자신을 들어올린다.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모든 정체성이 사라져버린 공간. 그 어떤 이성이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관념의 공동.
  허공에 떠올랐기에, 어떤 땅 위에 발 딛고 있지 않기에, 나는 분명 위태롭고 위험해보일 것이다. 버릇처럼 그건 또 다시 내게 불안과 두려움을 추동시키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언제든 기꺼이 허공 속으로 몸을 내던질 것이다. 어디론가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발버둥치거나 비명지르며, 지상의 세계 어딘가에 도착한 생존을 갈구하지 않는다. 오지 않은 미래에 짓눌려, 일각의 현재를 희생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나의 고독을 알고 있다. 손에 든 최초의 무언가 어긋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그런 고민과 사유 속에 발을 빠트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장애라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잠시 잠깐의 착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이 장애인지 착각인지 그들의 논쟁이 시끄러워지는 동안, 작은 상자 속에서 나는 언제나 공포에 질리며 혼자서 몸을 떨어야했다. 아무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절박함이 나를 깨우며, 나는 어쩌면 세상이 말하는 인간의 허물을 벗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른 채, 인간이 되기 위해, 세상이 말하는 그들과 똑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 해 경계를 넘어서며 이리저리 분주하기만 했다. 때로는 도약이었고, 때로는 추락이었으며, 어떤 시간 속에서 그건 추억이었고, 또 다른 시간 속에 그건 악몽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내가 도착하게될 허공을 빈틈없이 탐색해야했다. 설령 그것이 어리석고 모자란 것일지라도, 끝내 나는 내가 다다르게 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부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서로 다른 경계 속에서 서로 다른 땅을 디디고 있는 자들에게, 나는 분명 침입하거나 침범하는 이방인이겠지만, 섣불리 희망에 기대거나 절망에 쓰러지지 않으며, 나는 표정이 지워진 냉혹한 얼굴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말소시켜야한다.
  다른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었던 혼자만의 투쟁으로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들을 지워버린 이기적인 삶이지만, 나는 그것 만으로도 나의 생존을 담보할 수만 있다면, 내 이 모호한 삶의 의미를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너무 오래도록 확신을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혼돈과 혼란으로 태어난 생명, 그래서 더욱 나는 내 삶에 또렷하고 분명한 무언가를 갈구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체성이라 말하지만, 그건 언제나 어긋나기만하는 엇갈림이며, 결코 들어맞지 않는 과녁일 뿐이다. 내가 나를 가리키면서 나를 알지 못하고, 내가 나를 말하면서 내가 아닌 세상의 명령만을 중얼거리며, 내가 나의 삶을 살면서도, 나는 언제나 살해당한 채였다. 어떤 세상의 틀 속에서도, 나는 위협당하며 살아야하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서야 나를 미지의 공간 속으로 띄워보내고자 한다. 세상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깨끗한 여백의 시간을 나에게 선물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거나 오염되지 않으며,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시간. 분명히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고 비난받게 될, 그러나 결코 두렵지 않은 모멸의 시간.

 

  앞으로도 나는 너무 오래도록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끝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며, 나를 살게하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희망이나 미래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파헤치는 집요함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판타지에 붙들려 온 몸을 흔들며 내달리는 질주가 아니라, 여기 이 자리에 선 나를 잊지 않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나의 걸음을 시작하는 일이, 바로 내가 살아야할 나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 이 땅 위엔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있던 해답이란 건, 어쩌면 우리들의 발 밑에 들러붙어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날마다 그것을 뭉개고 짓밟으며,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게도 허망한 미래만을 뒤쫓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야한다. 세상이 부여한 표피와 흔적들을 벗어버리고, 부유하며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게 나만의 의미와 이름을 붙이고 불러야하는 것이다. 오래 전 인디언들의 이름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푸른 태양의 일격'이라던가, '용감한 하늘의 심판자'여도 좋다. '초록 생명의 흙'이라던가, '검은 사유의 시간'이어도 괜찮다. '꿈'을 '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사랑'을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족'을 '동지'라거나 '적'이라고 해도 좋고, '친구'를 '연인'이라고 말해도, 혹은 '이방인'이라고 말하더라도, 부유하는 우리들 곁에 다가온 누군가는 똑같은 얼굴로,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거나, 혹은 지나칠 것이다.

 

  새로운 나의 호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며, 나의 호출에 응답하는 것들을 기쁘게 맞이함으로써, 나는 나를 부르고 세상을 부르며, 그것으로 인해 또 다시 진정한 나의 이름이 호출되는 환희를 깨닫게될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이 세계를 나의 부속품으로 만들어,  작고 보잘것 없겠지만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나의 시간을, 나의 차원을, 나의 세계를 살아야한다.

 

  이제부터 나의 정체성은 없다. 세상에는 나의 이름을 호출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모호하고 흐릿한 하나의 인간일 뿐,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사람도, 국민도 아니다. 오직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끝까지 살아남으며, 빈 몸으로 마음껏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언제나 꿈틀거리며 다시 태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을 향유할 준비가 되어있는, 역동적 생명이 될 것이다. 날마다 새로워지게 될, 무명(無名)의 생이다. 飛

 

 

 

 

 

 

 

제12화 나를 살해하는 두려움 

 

 

 

소설가 金 飛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에겐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다. 아이에겐 먹고 배설하며 잠을 자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있을 뿐이며, 그것을 기초로 그 충족 여부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아주 기본적인 감각으로 모든 삶의 시간이 추동된다. 배가 고프면 빼 울어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배가 부르면 수면 욕구에 의존해 잠을 잔다. 수면 욕구와 식욕 모두가 채워진 상태라면, 그제야 아기는 말똥말똥 눈을 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본다. 물론 그때 아기를 지배하는 감정 역시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자신의 주변 환경의 모든 것들을 만지고 입에 넣는 행위를 할 때 즈음, 아기의 부모나 가족들은 처음 아기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르친다. '위험'을 가르치며 안온함과 평화를 알게 하고, 고통이라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아이는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습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생존이나 안위와 정 반대의 지점에 가져다 놓게 된다. 생존과 직결된 것이 아닌 두려움이나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감정을 환기한다.
  그러나 '놀람'에서 기인한 본능적 두려움이 아니라면, 모든 두려움은 허상이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감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들로 인해 학습된 것일 뿐, 그건 우리 안에 근원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 해, 두려움은 가변적이며 또한 상대적이다.

 

  나의 두려움을 말하자면, 나는 혼자 있는 고립이나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더욱더 두려워한다. 한밤중에 혼자 산길을 걸어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나는 골목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낯선 사람을 더욱 두려워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뱀이나 바퀴벌레, 심지어 시궁창에 쥐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거미를 보면 소름이 돋고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물론 나는 내 두려움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건 나도 모르는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새겨진 흔적일 것이고, 그것이 기계적으로 나의 두려움을 작동시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그렇게 각자의 두려움, 서로 다른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그 두려움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의 두려움이나 공포는, 모두 어떤 기억, 혹은 최초의 환경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은데,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모든 시간은 변해왔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또한 그만큼 변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두려움 또한 시간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수정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경계를 넘어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그 경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향해 기웃거리며 우리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판올림하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그 모든 변화의 과정과 함께, 타래처럼 끌려 나오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두려움'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소모되고 고갈되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종양처럼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가는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던 대상인 최초의 거미는 분명, '손톱만 한' 크기였겠지만, 그 당시 덩치가 작고 왜소했을 것이 분명한 나에게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내 손바닥 크기로 환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소수자인 나로서는, 사람들의 그렇게 크기를 부풀린 두려움, 혹은 혐오와 너무 자주 직면한다. 성전환자의 수술이나 치료 과정이 한 인간의 치열하고 목숨을 건 생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편견만을 근거로 끔찍하고 잔인한 두려움과 혐오를 환기해, 극도의 반감을 추동시킨다.
  동성애자들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평범한 남자, 평범한 여자에 다름 아닌 그들에게 '동성애자'라는 이름을 붙여, 오직 그들의 성행위 방식, 혹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어느 종교 서적의 몇몇 구절들을 들먹이며, 그들을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치환해버린다.
  그렇게 근거 없는 혐오와 반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변화란, 또다시 스스로 생존과 안위를 위해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절대 바꾸려 들지 않으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킨다고 믿고 있는 것을 맹신해버린다. 누군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안전과, 자신 가족들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어버린다. 그러한 믿음과 편견이 단단해지면 단단해질수록 무의미한 정당성을 획득한 그들의 두려움은 또 다른 편견으로 도약해버릴 것이고.

 

  그들에겐 성소수자인 우리가 (인간 종족을 멸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겠지만, 우리들에겐 좀처럼 변하지 않는,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그들의 신념이 가장 끔찍한 공포이자 두려움이다. 그들의 평화와 우리들의 평화가 결코 서로 다른 것일 리는 없음에도, 그들은 성소수자들과의 공존이, 마치 스스로 안위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주입하고 교육한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공포와 두려움을 말하며, 더욱 끔찍하고 잔인한 논리를 합리화하는 그들의 행위는,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가두는 일이며, 인류의 생존을 언급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감정은, 더는 우리들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우리를 어느 고립된 곳에, 사방이 틀어 막힌 곳에 가두어버린다. 자신도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자신을 옥죄는 공포는, 오히려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게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불안에 떨게 하는 바로 그 근원이다. 그들이 믿고 있는 공포나 두려움에는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건 모두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전에 변화되고 수정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흉터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 남아, 현재의 우리를 비이성적 논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이미 흐릿해져 버린 시간의 기록일 뿐, 그건 현재의 안온함을 지켜주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하거나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또다시 어떤 경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이며, 오히려 그 모든 두려움을 직면할 때, 두려움은 더는 두렵지 않은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 불안과 강박으로 피폐해진 우리가 있다. 두려움이라는 낡고 형편없는 감정에 의존해, 미래를 말하고 평화를 말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있다. 뿔을 달고 꼬리를 그려 더욱 흉포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그려버리는 어떤 그림이 있다. 물론 그건 다른 누구의 모습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다. 飛

 

 

 

 

 


 

 

제11화 업데이트 혹은 판올림

 

 

 

 

소설가 金 飛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 '급변하고 있다'고 묘사되는 이 세계의 미친 속도는, 날마다 우리 모두를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시간 속에 던져놓고 만다. 우리들은 그저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시대를 따라 뛰고 있는 근육질의 사고를 하는 인간들의 무리 가장 끄트머리에서, 질질 끌려가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육질의 사고와 생각으로 뛰고 있는 그들도, 최첨단의 이름을 부여받지는 못한다. 결국, 그들도 자신들의 앞에 누군가를 따라 정신없이 뛰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은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며, 온몸에 미래와 희망이라는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의 펌프질은 그토록 절박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고작 외향적인 몸짓을 커다랗게 불리고만 있는 짓일 뿐, 생각이나 사고란 애초부터 그렇게 '미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빠르고 세심한 속도로 움직이는 생각과 사고란, 그래서 더욱 느려지고 지난한 것일 뿐, 이 세계의 미친 속도를 따라 움직이는, 그런 근육질의 사고와 생각은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거나 혹은 복종일 뿐이다.

 

   근육질의 몸집으로 누군가를 따라 최전선에서 뛰고 있든, 그 중간 즈음 어디에서 무리에 휩쓸려 어정쩡한 모습으로 뛰고 있든, 맨 뒤에 질질 끌려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리의 끄트머리에 매달려있든,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날마다 또다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진보든 보수든, 미래지향적이든 과거 회귀적이든,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이나 사고의 새로움이란 기계처럼 레버를 올려갈 수 없으니만큼) 급변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미친' 속도는, 우리들의 사고를 새롭게 하려고 뒤따라야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다 못해, 스스로 믿고 있는 것들을 맹신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미친' 속도로 합리화하며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최신의 구식'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절감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지점에 스스로 생각의 뿌리를 박아놓고, 그 위에 가지를 뻗어, 사람들의 발길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놓고 만다. 뿔뿔이 흩어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그들이 향하고 있는 거기는,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밝은 미래'도 아니요,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계'도 아니다.

 

  거긴 그저, 언젠가 고립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어두운 모퉁이일 뿐이다.

 

   업데이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건, 그런 이유다. 업데이트란 '판올림'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건 전환이나 치환처럼 들리겠지만, 판올림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혹은 하나의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옮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업데이트에는 바뀌는 것이 존재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변화이며 혁신이기는 하지만, 그건 포기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판올림은, 변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혁신이란 이름에 다시 한 번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변화를 꾀하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그 위에 또 다른 변화를,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하며,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로 이미 새로워진 것에 다가가며, 또다시 그것을 다른 층위로 도약시키려는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변화가 시작되고,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시작할 즈음에,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은 몇 번씩이나 새로워지며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업데이트, 혹은 판올림의 진정한 의미다.

 

   그렇게 시시각각 새로워질 수 있는 생각의 판올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시각이 중요할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 모든 현실에 닫혀있고, 또한 등을 돌리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경계 안쪽에 갇혀 있거나, 상자 속에 갇힌 것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전환을 위해, 똑같은 강박으로 또 다른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모든 변화를 떠올리며 자신만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진정한 판올림이며 또한 업데이트이다.

   업데이트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시기의 규칙성이다. (각자에게 알맞은 판올림의 시기는 모두 다 다를 테니) 일정한 시기를 정해 스스로 생각이나 사고, 혹은 생활 방식을 점검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이니, 당연히 불안을 동반하겠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딛고 있는 두 발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경계를 넘는 일이거나 전환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를 향해 길게 목을 빼 기웃거리는 것에 불과한 '업데이트'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몰랐던 것을 깨우치는 일이며, 그것은 또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삶을 새롭게 할 것이고, 나는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나의 삶은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 오늘도 구식으로 사는 우리가 있다. 머릿속에 든 모든 것들은, 내가 오늘 또다시 마주한 이 현실은, 금세 내 앞을 지나치며 업데이트라는 임무를 내게 떠넘기고,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 깨우치고, 고개를 끄덕인 모든 생각과 신념은, 또 다른 가능성을 그 위에 부여해야 하는 밑그림일 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진리도 아니며,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계시도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태양뿐, 아니, 어쩌면 인간들이 모르는 사이, 우리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태양도, 날마다 조금씩 다른 각도로 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하며,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격변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디디고 있는, 이 변하지 않는다고 맹신하는 자연의 이치인지도.

 

   또다시, 두려울 것이다. 결코,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달라져야 하는 것은, 결코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여기 이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의 책무다.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있는 것을 자책하며 불안하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새겨진 어떤 흔적일 것이다. 물론 그 위에 다른 모양의 시간을 기록해야 하는 임무가 내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飛 


 

 



 



제10화 기웃거리기의 힘

 

 

 

 

소설가 金 飛 

 

 

 

 






  그러나 '괴물'이 되라는 말은 어쩌면 지금의 제도와 관습에 익숙해진 모두에게 폭력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스스로 지켜온 인간의 모습이, 돈과 물질과 권력에 의해서 조종되고 통제되며, 오직 그것들을 통해 의미를 가지는 타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괴물적인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괴물'의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어불성설로 들릴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건 필연적으로 불안이나 흔들림으로 환기될 것이며, 당연히 두려움을 동반한다. 변해야 한다는 노력들은 또다시 강박이 될 것이며, 그건 오랜 시간이 걸려 우리들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할지도 모른다. 모든 꿈을 꾸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결국 그건 꿈을 이룬 자들을 위한 들러리가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건 아주 비겁하고 치졸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제 괴물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괴물이 되기로 했으니, 그 따위 손가락질 쯤 껄껄 웃어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 자신도 '괴물'같은 용기를 끌어올려 건네는 제안이다. 어차피 획일적인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만큼, 이 길고 지난한 삶의 시간 속에 '외도'라고 손가락질 받을만한 일 쯤은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기웃거리기'다. 


  모든 변화는 두근거림이다.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설렘이기도 하고, 또한 현재의 무언가를 포기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모든 설렘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지녔으며, 모든 두려움은 반대로 반드시 설렘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 앞에서 우린 '두렵다' 혹은 '설렌다' 말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선택한 감정일 뿐,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혹은 설레게 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두근거림이며, 또한 똑같은 심장박동이다. 

  앞에서 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억압하는, 이 경계로 나누어진 세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이 세계의 억압이나 불안을 절감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문제일 수도 있고, 환경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한 문제, 직업이나 취미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변화를 꾀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털어내는 일이다. 어떤 변화 앞에, 자신의 두근거림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그것을 설렘이라고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환기할 필요는 없다. 설렘의 두근거림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 대신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먼저 조금씩 지워내는 일이 먼저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일까? 공포에 질린 누군가가, 자신이 심장박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기웃거리기'다.  


  어떤 경계가 있다. 당신은 경계 안쪽에 있다. 그러나 그 경계가 당신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 너머의 무언가가 자꾸 당신을 끌어당긴다. 경계의 안쪽은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계의 안쪽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경계로 다가가라. 


  그리고 두 발은 여전히 경계 안쪽에 단단히 디딘 채, 고개를 길게 빼서 경계 너머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경계 너머에 있는 그들과 눈인사라도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가능하다면 그들과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눌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게 무슨 짓이냐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올 것이다. 특히 당신이 의지하고 있던 경계의 안쪽에, 그 안온함과 권위, 혹은 계급은, 불안의 손가락이든, 비난의 손가락이든, 그게 아니라면 위협의 손가락이든 당신의 눈앞에 내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이 디디고 서 있는 경계 안쪽의 두 발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비난과 위협의 손가락이 당신을 가리키게 되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디디고 있는 두 발의 단단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 돌아가겠다는 비겁함도 좋고, 너무 힘들다면 그저 경계 너머의 형편없음을 알기 위해 기웃거리는 중이다, 비겁하고 야비한 핑계도 상관없다. 기웃거리기 위해, 결코 당신은 당당하거나 떳떳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내게 성정체성 문제로 상담을 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양쪽 모두의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다면 의료적 조치 이전에 양쪽 모두의 생활을 다 해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정도 시기에는 여자로 살아보고, 또 다른 기간에는 남자로 살아보는 일을 직접 시도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저 반대성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반대성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며, 스물네 시간 그 역할에 맞추어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라면, 여성으로 옷을 입고 외모를 가꾸는 것만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육체적 성인 남자로서 행동하고 남자의 성 역할을 최대치로 시도해보는 것이고, 반대로 남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라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 함께, 여성인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이완시켜 조금은 중성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살아볼 것을 권한다. 그것마저도 자신과 맞지 않다면, 남자이거나 혹은 여자의 정체성을 모두 던져버리고, 어떤 때는 남자의 정체성으로, 또 다른 때는 여자의 정체성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고,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두 발이 '인간'의 정체성을 단단히 디디고 있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야비해도 괜찮다, 비겁해도 상관없다. '인간'을 잃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어떤 경계를 넘어서든 상관없는 일이다. 


  기웃거림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두 발의 단단함을 믿고 있다면 어디로든 우리는 넘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학생의 경계 안에 있다면, 그 경계의 끄트머리까지 달려가서 경계 너머를 기웃거리며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고, 자신이 직장인이나 가족의 경계 안에 있다면 그 경계 끄트머리까지 달려가 그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고, 언제든 돌아서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다. 혼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느 방향으로든 자신이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경계의 끝까지 달려가, 마음껏 그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돌아오면 되는 일이고. '인간'이라는 단단하게 디디고 있는 두 발의 의미를 잃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첫걸음을 떼어 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길들여왔던 생각에서,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분명히 강박이고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이나 신념, 혹은 믿음도 지우지 않으며, 그 위에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업데이트'다. 飛 





 

 

 

제9화 아름다운 길

 

 

 

 

소설가 金 飛

 

 

 

 

 

 

  '변이'란 똑같은 종에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종류와 모양, 혹은 개체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 변이는 처음부터 정상, 혹은 비정상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 혹은 또 다른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하는 것이다.

  질서와 균형을 획일성이나 통일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잘못된 습성을 지녔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는 결국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똑같은 자아를 가진 누군가를 존중하는 법 대신에 그들을 지배하고 그 우위에 서려는 집착을 드러내면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짓밟으려는 '괴물성'을 지녔다.

  자아의 영혼을 살찌우고 충만하게 하는 법을 채득했던 것이 아니라, 겉모습의 미추(美醜), 계급의 고저(高低)만을 보고 판단하는 습성을 지닌 현대인에겐, 처음부터 타인을 판단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떤 모습이건간에, 그들의 외모가 자신들이 판단하는 '' 혹은 '화려함'에 부합하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치환해버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나쁜 사람, 혹은 자신과는 다른 하등한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그렇게 인간의 자아가 결여되어있는 이들은, 또한 언변이 뛰어나며 목소리 또한 크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움직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들에겐, 모두를 단번에 끌어모으는 구호나,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언변으로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유지하려 애를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논리와 이성이 따로 존재하며, 진실되게 마음을 울리는 그 어떤 경구(警句), 그들에게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권위를 뽐내기 위한 자랑거리로 전락해버린다. 그로 인해 추앙받고 존중받는 일들을 즐기면서 자신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간적인 자아를 지녔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그것에 귀를 기울여줄 군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두 한꺼번에 허물어지게 될, 화려하게 눈을 현혹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하는 창의적 방법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오로지 돈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십 수백 가지의 새로운 것을 돈으로 사들이고 그리고 너무도 쉽게 그것들에 흥미를 잃고 또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사들이지만, 돈이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는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다. 또 다시 기계 속 부품 하나가 되어 거대한 무언가가 굴러가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소외되고 버려진 스스로의 자아는 어딘가에서 잔뜩 쪼그라들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외향적으로나 태생적으로나, 그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너무도 쉽게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들에게 혐오를 드러내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누군가, 혹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야만 자신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과 상처를 주는 말들은 더욱 무차별적이 되고 또한 무자비해진다.

 

  스스로 그토록 인간답고 이성적이라 말하면서, 자아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괴물의 꼬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돈의, 물질의, 외향이나 계급의, 그리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경계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그들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의미를 잃어버린, 기계의 톱니바퀴 하나를 닮은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괴물이 된 서로가 오로지 더 높은 계급, 더 많은 물질만을 추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괴물적으로 집착하면서, 반대로 도태나 패배를 삶의 모든 것이라 규정하며 스스로의 삶을 모두 포기해버리는 극단적인 짓까지도 서슴치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보다, 인간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상위에 놓아야할 가치나 제도, 혹은 물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순환되어야하는 일이며,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 교육이란, 인간에게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심어주고 그 위에 제도와 물질의 의미라는 가지를 자라게 하는 것이어야하며,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그 명제 하나만으로도, 모든 타인은 나만큼이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증거라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나는 경계로 인한 모든 불안과 억압을 떨치고 일어나는 방법을 말하기 위해 '변이'에 대해서 말했고, 그리고 다시 '인간'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있다. 변이와 인간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괴물'이라고 부르고 자신도 모르게 우리들도 괴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렇다면 나는 이제 우리 모두 '아름다운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를 쓰고 그 누군가가 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괴물성,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세상의 경계에 대한 억압이나 불안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괴물'이 되라고 말이다. 세상이 규정하는 보통 사람이 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는 대신, 세상이 말하는 '보통'이나 '정상'과는 다른 나의 모든 것들을 오히려 더욱 소중한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 삶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괴물' 말이다.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적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말하겠지만, 우리들은 이미 그런 '아름다운 괴물들'을 너무 여러번 목격해왔다. 장애나 가난, 혹은 다른 종류의 소수성이나 특수성은 획일적인 이 시대에 당연히 스스로를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근원이겠지만, 그들은 그것에 짓눌려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세상이 말하는 인간적 삶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괴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괴물'이라는 한계를 끌어안고 태어나, 자신이 그런 '괴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 어떤 인간도 구현하지 못한 참된 인간성을 보여주며 인간됨을 증명한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매달리고 있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물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역설일 것이다.

 

  성전환자라는 이름의 내 안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 되고자하는 집념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이나 혼돈을 지우기 위해,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 오래도록 발버둥치면서, 나는 그걸 모두 다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일으켜세웠던 것은, 이젠 내겐 아무런 선택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나는 경계를 넘어섰고, 경계 너머는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그런 이상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심각한 불안과 억압을 내게 주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또 다시 지금과 똑같은 속도로 지난하게 흘러가는 시간 뿐, 어차피 내게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한 현실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이완시켰다. 텅 빈 존재가 되고 나니, 어디로든 마음껏 흔들리며 날려가는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딘가로 나 자신을 띄워보내면서,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나 여자 따위의 정체성이 아니라,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창의적이고 즐거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 대해 남자나,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역설하는 대신 그저 편안한 대로 판단하시라 말했더니, 아무런 강박이나 억압도 없는 가벼워진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억지로 만들고 꾸며진 내가 아니라, 진정으로 순수한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남자, 혹은 여자로 나뉘어진 세상의 눈에 나는 '괴물'처럼 보이겠지만(실제로 내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몇몇 사람들은 그런 악의적인 말들로 나를 지칭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제야 ''라는 하나의 인간의 정체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고마운 깨우침이었으며, 가벼워진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참된 인간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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