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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 25개의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읽는 한국 문학사와 명작




■ 강좌의 기본 개념 소개

1990년대 이후로 탈-담론의 영향 아래에서 문학 개념과 범주에 대한 재구 작업이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 풍속론적, 문화(사)적 접근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 그간의 작업이 문학의 개념과 범주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문학사의 중심성/특권성에 대한 성찰 작업이 문학사 자체와 텍스트 분석에 소홀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는 텍스트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문학, 문학사에 대한 재-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다양한 시선과 접근들, 문학 연구자, 신진 연구자, 당대 문학을 생산/소비하는 주체들이 함께 모여 문학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초국가적인 근대 문학의 유통 체계와 근대적 대중예술, 그리고 그보다 더 거대한 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생장해온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를 읽는다.

1. 2000년대 이후의 새로운 인문학과 한국 문학 연구의 흐름을 반영하여 한국 문학사의 대표작들을 다시 읽거나, 반대로 기존의 민족주의-남성-엘리트 중심의 문학사에서는 조명을 받지 못한 ‘저주받은 걸작’을 읽는다.

1. ‘교양’이나 ‘학습’을 목적으로 문학사와 정전을 읽는다는 고정관념을 뒤집고 ‘사유와 상상력의 놀이거리’로 명작을 다시 읽고, 문학사를 가로지르는 중심성을 해체하면서 복수의 문학사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1. 한국 문학 연구의 신예들뿐 아니라, 작가와 국문학계 바깥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한국 문학(사)에 관한 신선하고 발랄한 해석이 백가쟁명하는 강좌이다.

1. 기성의 문학사처럼 ‘체계’와 ‘위계’로써 문학사를 다시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25개의 강좌는 최소한의 비슷한 내용을 기준으로는 범주화했으나, 시대순을 따르지도 않았다. 강연자가 고른 작품의 질과 특징도 아주 제각각 자유롭고 다양하다.

1. 대학 제도 안팎을 넘나들면서 문학 애호가와 연구자들이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강좌를 만들고자 한다.

1. ‘근대문학의 종언’ 혹은 ‘포스트 근대문학의 시대’에 이런 관점에서 다시 우리 문학의 흐름을 짚어 새로운 문학연구와 비평의 길을 모색한다.

■ 강좌의 구성

―본 프로그램은 아래의 순서로 2011년 11월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각 시즌당 5개의 강좌로 구성된다.

시즌 1 :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1)
시즌 2 :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2)
시즌 3 : 역사와 문자의 저주를 뚫고 : 한국 문학사의 저주 받은 걸작들
시즌 4, 5 : 기획 중.

―기획위원 : 천정환(성균관대), 소영현(연세대), 임태훈(성공회대) 등
―장소 : 필운동 푸른역사 아카데미. 시간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
―참가비 : 시즌(5개 강좌) 당 8만원. 개별 강좌 등록은 받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문의 : 문학(사)강좌 간사 임태훈(junorex@naver.com/ 010-3293-7670)

■ 강좌 시즌 1 :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1)

‘문학사’를 욕망하지 않는 시대에 ‘문학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곤혹스러움의 정체는 가감 없이 토로되고 신랄하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가와 제도의 역사에 복무하는 기존 문학사를 위한 심폐소생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새로운 문학(들)을 위한 산파술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1. 권보드래 (11월 28일 월요일) ‘하나이면서 여럿인’ 문학 :『백조』와 그 주변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은 과연 민족주의적인 텍스트인가? 신채호의 글쓰기를 한국과 조선인민공화국, 나아가 중국 소수민족 문학사에서 공유할 수 있는가? 192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사랑의 불꽃』에 시민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 …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되, 첫 강의에서는 지금껏 ‘예술’과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된 문학사에서 가려져 있던 균열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하나로 호명할 수 없는, 끓어오르면서 얽혀 있는 존재들을 가로질러 ‘문학’의 새로운 용법을 탐색할 수 있을지― 집중적으로는 1920년대 초반 낭만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지역과 계층을 넘나들고 국경 너머도 기웃거리며, ‘하나이면서 여럿인’ 문학을 겹쳐 그릴 수 있는지 토론해 본다.
강사 소개 : 근대 초기 한국에서 소설과 문학의 개념·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연애의 시대: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등의 책을 냈고, 지금은 ‘1910년대와 3·1 운동’, ‘4월 항쟁과 1950~60년대 한국사회’라는 두 가지 주제를 축으로 공부하고 있다. ‘3·1 운동의 문화사’를 제대로 써 보는 게 꿈이다.

2. 천정환 (12월 5일 월요일) 지적 격차와 문자문화 매트릭스와 한국 문학사
강사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저서로 『근대의 책 읽기』, 『끝나지 않는 신드롬』, 『대중지성의 시대』, 『혁명과 웃음』(공저),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등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소설 및 문화론 담당)로 재직 중이며 한국 근대 문화사와 현실의 문화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3. 소영현 (12월 12일 월요일) 문학사를 둘러싼 오해들, 복수의 문학사를 위하여
강사 소개 : 연세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근현대 문학, 문화, 주체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웹진 ‘뿔’ ‘작가세계’ 등에서 기획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와 비평집 『분열하는 감각들』등이 있다.

4. 권명아 (12월 19일 월요일) 부랑아들의 문학사

한 인간 존재의 삶의 반경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정해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구조이고 체계이고 이데올로기이며, 통치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어떤 이들에게는 무궁무진한 인생의 무대를 제공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제한된 삶의 반경만을 제공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삶은, 인생은 그저 정해진 굴레를 맴도는 숙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숙명은 곧 사회 구조의 다른 이름이며, 누군가의 삶을 숙명으로 환원시키는 그런 구조는 바로 폭력 그 자체이다. 즉 누군가의 인생이 숙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면, 바로 그러한 인생들을 생산하는 사회야말로 가장 강력한 폭력이 작동하는 사회이다. 4월 혁명 이후 냉전 체제하에서 풍기문란과 관련된 여러 조직과 법제, 제도가 파시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장정일/J의 인생과 대비해서 살펴보다 보면 장정일이 1996년 ‘음란범’이라는 이름으로 치욕스러운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이미 1960년 한 소년이 살해당하던 그 시점에 이미 ‘정해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이 ‘음란범’이 되어버린 것은, 숙명인지 모른다. 이 글은 냉전 체제 하의 풍기문란 통제와 관리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만들어지고, 통제의 그물이 촘촘하게 엮어지는 과정이 장정일/J라는 실존/허구 인물의 삶을 어떻게 가로지르고, 가로막고, 가로채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강사 소개 : “맞장뜨는 여자” 혹은 “맞짱”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이 좋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에 대해 줄곧 연구하고, 글 쓰고 있다. 연간 수편의 젠더 비평을 잡지에 기고하고 있으나, 다들 “요즘은 비평은 안하시고 논문만 쓰시나 봐요?”라고 할 때마다, “당신들이 잡지를 안 보시나보죠?”라고 속으로만 답하곤 한다. 비평가도 꼭 “문학” 비평가여야만 하는지, 분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강박증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걸 아쉽게 여기며, 매번 필자 소개를 쓸 때마다, (그냥) 비평가, 저술가, 연구자,,,이렇게 써보지만, 책으로 확인하면 항상 “문학비평가”라고 수정되어 있는 걸 확인하게 될 때, 그냥 조금 한숨이 나온다. 매사 너무 비관하지도, 한탄하지도, 실망하지도 말고, 그저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입만 열면 열변을 토하고, 한숨을 쉬는 비판 강박증 환자 같은 지식인들처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부산에서 자리 잡은 것이 이제 6년이 되어간다. 좌충우돌, 우여곡절이 많은 시절이었으나, 분명, 행복하다. 그 행복의 대부분은 좌충우돌과 우여곡절을 함께 한 부산의 친구들이 준 것이다. 그 행복이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부산의 여러 동료들, 친구들과의 연구와 재미있는 활동들이 조금 더 의미 있는 일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net-a라는 이름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http://aff-com.net/, http://cafe.naver.com/agitproject 등에서 이런 활동의 일단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5. 이현우(로쟈) (12월 26일 월요일) 지젝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1990년대 한국문학
※ 12월 26일 강좌가 끝난 뒤 송연회가 있습니다.
오늘날 ‘최선의 무리’들조차도 문학의 ‘상징적 순수함’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지 못하며 냉소적․회의적 포즈로 물러나 앉는다(대학의 문학 강의실이나 문학인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반면에 ‘최악의 무리’(군중)는 온갖 광신적 행동에 동참한다. 문학이라고 포장된 온갖 것들에 재미를 붙이고 의견을 보탠다. 남은 선택지는 ‘침몰해가는’ ‘순결한 의식’이다. 이 순결함의 사례로 지젝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 등장하는 뉴랜드의 아내를 든다. 그녀는 남편이 오렌스카 백작부인과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사실을 품위 있게 무시하고 그의 충실함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
강사 소개 : ‘로쟈’라는 ID 혹은 필명으로 알려진 그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연구교수로 활동하며,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고 있으며, 이른바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레닌 재장전』(공역)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2009)『책을 읽을 자유』(2010)『무엇이 정의인가?』(공저)가 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저술(교양) 부문]을 수상하였다.

■ 강좌 시즌 2 :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2)

‘문학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잇는 단선적인 구조로밖에 구성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문학사’가 포괄할 수 있는 콘텐츠의 범주는 어디까지 확장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칵테일 문학사’는 비선형적·병치적 시간 관계 속에 문학의 사건을 재배치하고, 동시에 전통적인 문학사의 범주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미디어와 텍스트를 매쉬업(mash-up)하는 새로운 문학사(들)의 성과와 구상을 밝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1. 신형기 (2012년 1월 9일) 1960년대, 소설, 혁신담론

강사 소개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해방직후의 문학운동론』, 『북한문학사』,『민족이야기를 넘어서』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최명익과 쇄신의 꿈」 등이 있다.

2. 이혜령 (2012년 1월 16일) '식민지 서사'와 사회주의자 - 염상섭의 <삼대>와 <광분>

강사 소개 :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한국 근대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소설과 골상학적 타자들』(2007), 『흔들리는 언어들』(공저, 2008), 「해방(기): 총든 청년의 나날들」(2009), 「문지방의 언어들―통역체제로서 식민지 언어현상에 대한 소고」(2010)가 있다.

3. 이영미 (2012년 1월 30일) 1964년의 말문학과 그 의미 : 박정희와의 허니문시대 끝나다
이 강의에서 다루는 작품은, 본격문학이 아닌 대중문학, 그 중에서도 글문학이 아닌 말문학이다. 그 중 1964년에 크게 인기를 모은 영화와 대중가요를 대상으로 하여, 박정희 정권의 민정이양시대가 시작하는 1960년대 중반 한국사회와 대중들의 세계전유방식의 변화를 읽어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강좌는 한국근현대문학사에 두 가지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하나는 ‘말문학이 문학사 서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가요, 방송극, 영화 등의 대중문학을 통해 그 시대와 사회의 변화, 수용자들의 세계전유방식을 읽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한편으로 1980년대까지의 한국문학사 서술에 대한 문제 제기임은 물론이거니와,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새로운 문학사 연구 경향인 문화론적 접근 역시 이 문제 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한국문학의 범주를 새롭게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강사 소개 : 『1920년대 대중화논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30년 가까이 연극, 노래, 방송극 등 말문학에 대한 연구와 평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한국대중가요사』,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 『이강백 희곡의 세계』,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 『마당극 리얼리즘 민족극』, 『서태지와 꽃다지』, 『민족예술운동의 역사와 이론』 등 다수이며, 『한국현대예술사대계』 전6권, 『남북한 공연예술의 대화』 등을 기획, 공동집필했다.

4. 백문임 (2012년 2월 6일) 임화와 조선영화사

강사 소개 : 연세대 국문과에서〈임꺽정 연구〉로 석사 학위를,〈한국 공포영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 대중문화의 여성 주인공 이미지를 분석한《춘향의 딸들―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동시대 한국 영화에 대한 평론들을 묶은《줌-아웃 : 한국영화의 정치학》등을 썼고,《카메라 폴리티카 : 현대 할리우드 영화의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등을 옮겼다.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5. 정여울 (2012년 2월 13일) 팩션 공화국에서 역사소설 읽기

강사 소개 : 문학평론가.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한국문학과 영화’라는 강좌를 맡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서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시네필 다이어리> 1, 2, <소통; 미디어로 세상과 관계맺는 법>,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등이 있음.

■ 강좌 시즌 3 : 역사와 문자의 저주를 뚫고 : 한국 문학사의 저주 받은 걸작들

언제까지 ‘교양’이나 ‘학습’을 목적으로 문학사와 소설 명작을 읽을 것인가? ‘사유와 상상력의 놀잇거리’로 그동안 문학사에서 배제되었던 저주받은 걸작을 읽는다. 너무 이르거나 뒤늦게 도착한 탓에, 더러는 제도의 편견과 무지에 가려 당대 독서 대중에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던 잊혀진 작가와 작품이 있다. 국문학 연구의 새로운 전위를 꿈꾸는 젊은 연구자들이 그것들을 ‘오늘의 텍스트’로 재발견/재발명한다. (2012년 3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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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슬리의 심포중 한 패널은 리사 짐머만 선생이 기획한 <affect>에 관한 발표였습니다.

앞서 말한 튀빙겐 대학의 박사과정생 역시 이 패널에서 오끼나와인의 전쟁 기억과 어펙트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또한명의 흥미로운 발표는, 중국과 일본 문학 전공자이신 선생님의 티벳과 타이완 문학에서 affect/affectless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발표였습니다. 발표자 선생님은 아주 평화롭고, 다정하달까....그런 매너로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발표였으나, 저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그분 발표의 어떤 이면에서 affect는 무언가, 티벳과 타이완이 서구화되기 이전, 원래, 타이완과 티벳에 있던 <그 무언가>와 등가를 이루는 듯한 느낌. 반면 지적인 것은 서구적인 것, 외부에서 들어온 것, 그리고 affectless한 것으로 양분화되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구에 의한 식민화로 상실한 그 무엇과, 서구적 지식 세계의 이성우위의 사고에 의해, 가치가 절하된 affect의 위상이 겹쳐지면서, 이런 인상을 주게 된 것이지요. 이는 정념이나 정동에 관한 연구가 빠지기 쉬운 어려운 점이기도 하구요.

 

아감벤은 정념을 게니우스라는 차원에서 논의하기도 하는데. 그는 개별자에게 게니우스와 자아라는 것(서구적 개념으로서)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태풍}에서의 에어리얼과 프로스페로의 관계와 같다고 말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논의이고, 정념에 관한 연구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만일 이 비유가 서구와 식민지 사이에 대비될 때, 식민지는 <서양>이 잃어버린 <영적인 세계/정념/어팩트/:게니우스>의 선을 따라, 결국 다시 식민화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혹시나 무례한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을 때, 무언가 그 발표자 선생님의 예의 그 평정이 깨어지는 느낌이랄까....아,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질문이 혹시라도, 아시안 스터디즈의 <원주민>인 동양인 학자가 서양인 학자인 <이방인>에게 던지는 주도권 홈타운의 주민의 발언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뭐냐면, 아마도 그 발표의 요지 뿐 아니라, 발표자 선생님의 포지션은 암암리에 <티벳이나 타이완>에 대한 애착과 동경에 의해 이뤄진 것, 즉 <티벳과 타이완>이라는 "학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을 통해 구성된, 그래서 서구적인 '분열적' 정신과 달리 매우 평온하고, "다정한" 그런 매너를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선생님은 심포에 참여한 누구보다, 제도적인 학자같은 권위주의적 태도나 형식주의적 매너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정말 어펙트한 태도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 입장에서는 그 발표를 들으며 내내, 토마스 울프(? 기억이 가물)의 소설 제목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구절이 자꾸 떠올랐지만, 그런 <고향>은 누구에게나 애착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이를 통한 안정감과 평정심의 원천으로서 필요하다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 드넓은 세상에서도, 결국 학자들이던 사람들이던, 한편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두 선택지 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궤적이 그렇게 간단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말이죠. 그리고, 그 발표장에서의 포지션과 고향과 제도와 매너와에 대한 생각들은 제 궤적, 혹은 포지션에 대한 생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부산에서 저 나름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여전히, 저는 <왜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냐?>는 질문을, 팀 내부에서조차 듣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화두는 제가 부산에 도착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벗어날 수 없는 삶의 화두이고,

과연, 나는 <여전히, 이방인인것일까>라는 자문은 제 삶의 불안과, 외로움의 또하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이런 질문과는 또다르게, 외부로부터, 아니 <부산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왜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느냐?>, <왜 부산 사람들과 만나지 않느냐?>는 질문은, 제게 어떤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웰슬리로 떠나기 전의 얼마간도 이런 질문과 분열에 시달렸던 날들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이런 분열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길고, 긴 비행의 시차 속에, 그 현기증 속에 막연히 떠오른 어떤 대답, 아니, 다른 질문을 돌려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들, 제가 만난 사람들, 제가 여기(이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서 살고 있는 일들, <이것은 왜 부산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런 반문을 통해 생각해본다면 제가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부산 사람들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질문, 평가, 혹은 요청은 거꾸로, 부산에서 일을 한다, 혹은 부산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확고한 배타적인 관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즉, 제가 자주 듣곤 하는 <부산에서 일을 한다>,<부산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말의 함의는 달리 생각해보면 부산에 이미 만들어진 제도나, 단체, 부산에서 이미 활동중이고 몫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 제도나, 단체, 인적 연계에 '가입'하고, '한 몫'을 할당받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외지인>들이, 이렇게 이미 구성된 제도나, 인적 연계에 할당된 몫을 감당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행로를 가게 되면 여지없이 <이방인>, <외부인>으로 간주되고, <지워져>버립니다. 그리고 거꾸로, 문제와 책임은 외지인과 이방인의 배타적 태도의 소산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의 말은 들리지 않으니 말이지요.

 

웰슬리의 한 강의동에서, 질문자인 <동양인 여성학자>인 저와 <서양인 여성 학자인 그녀> 사이에 몫을 둘러싼 위치가 결코 단일 할 수 없었듯이, 또 그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서 저와 그분 사이에 몫을 가진 위치에 대한 자기 방어(서구학자로서의 그녀/이때 저는 동양인 학자로서 마치 아시안 스터디즈의 홈타운의 주민으로서의 배타적 권리를 표명하는 것처럼 되어버리죠)와 갖지 못한 위치(아시안 스터디즈를 하는 서구 학자로서의 그녀, 혹은 서구 학계에서 아시안 스터디즈라는 몫없는 자리의 위치/고향이 없는 자로서의 위치)가 복잡하게 전도되고 얽혀있듯이

몫이 없는자와, 몫이 있는 자의 자리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기에 포지션과 몫의 할당, 권력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은 부분 <분열적 내면>을 형성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일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 역시, 결국 이방인의 <애증>의 소산 쯤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향의 동지>나 <떠도는 이방인>이 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짱뜨는 여자가 된 이래, 이미 <고향>따위는 다 떠나버렸다고 생각했고, <이방인> 국외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으나,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맞짱뜨는 여자의 '본질'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결국, <트러블>을 만드는 일(주디스 버틀러의 책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죠). 그러니, 따듯한 고향의 품이나, 고요한 평정심의 세계는 맞짱뜨는 여자의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맞짱의 정념 교실은 여러분에게, 따듯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드리지도, 길을 잃은 당신들에게, 따듯한 안식처를 제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대, 고향의 따듯한 품은 아비의 몫이니 아비의 너른 품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를~

 

 mazzang11

 

 

웰슬리 대학 동아시아학과 초청 강연과, AAS(Association of Asian Studies) New England 발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AAS 공식 일정이 오늘로 마감되고, 저는 내일 오전 출발합니다. 사진과 포스터를 올리려 했으나, 파일 용량이 커서 안올라가는군요. 저는, 강연에서는 <한국전쟁과 commemoration>에 대해서 3시간 정도 강연을 진행 했습니다. 소강당에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주셔서, 아주 재미있는 논의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강연 전에는 학부생들 수업에 참관으로 들어가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아주 진지하고, 활달하고, 지적 호기심에 가득찬 많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며 좋은 에너지를 나누었습니다.

 

이곳 웰슬리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대학 중 하나로, 지금도 워먼 스터디즈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초청 강연 이틀 전날에는 웰슬리 대학의 워먼 스터디즈 학과에서 주최하는 <작가 초청 낭독회>에 참가했습니다. 캐러비안 아메리칸인 시인과 재패니즈 아메리칸인 소설가 두 사람이 참석해서, 자기 작품을 낭송하고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우리 서평회를 떠올리며, 흥미로운 대비를 해보았습니다. 우리 서평회도 이곳, 웰슬리의 낭독회 못지 않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들은 아주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작품을 낭독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흥미로왔습니다. 아마, 자유분방한 작가들이라, 그런듯도 합니다. 특히 캐러비안 아메리칸인 시인은 노래와 퍼포먼스에 가깝게, 그러나, 아주 문학적으로 자기 작품을 수행해서,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이 낭독에 자극받아서, 다음 날 하루 종일 하바드 엔칭 연구소의 연구실에서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다시>하게 되었다는 슬픈 소식도^^

 

옌칭 연구소는 워낙 유명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연구실만 가보았지만^^ 연구실 라이프, 혹은 연구원 라이프는 어디나 다 똑같다는 좀 서글픈 현실^^

거기서 만난 유학생들은 한국 연구원들이나 마찬가지로 도시락 싸들고, 하루 종일 연구실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더군요. 그 유명한 ㅠㅠ 하바드 대학은 마치 관광지나 다름 없고, 약간 '속된' 냄새가 풍기는 곳이라, 다소 의아했습니다. 게다가 엔칭 연구소는 거기서도 거의 무슨 창고같은, 게다가 아주 찾을 수도 없을만한 구석탱이에 있어서, 이곳 학생들은 옌칭을 <아시안 게토>라고 부른다는군요. 하바드 거주자로서의 자부심과 게토 주민으로서의 위축감이 묘하게 겹쳐있는 풍경이 옌칭의 풍경이랄까요...물론 단 며칠간의 인상일뿐.

하버드, 웰슬리에서 많은 학생들과 연구자들, 대학원생들을 만났습니다.정신을 좀 쉬게 한다는 차원에서 미국에서는 가능하면, 내가 떠나온 곳에 대해서는 잠시라도 잊어버리자 생각했으나, 이들의 얼굴들 속에 우리 팀원들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막겹쳐지는 인상이 그리 비관적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어디서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달까요.

 

오늘 오전에 독일 튀빙겐 대학 박사과정 학생이 먼 길을 날아와서, 오끼나와에서 전쟁 기억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제가 했던 강연 논의와 연결점이 많아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친구의 발표를 보면서, 한국에서 <지방 연구자>의 위치를 무언가,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지만,,,,,계속 생각하면,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려고 무진장 노력했습니다. 약간의 단초라면, 외국에 나가면 동아시아, 또 그중에서도 티벳, 오끼나와...등등등 특정 로컬에 대한 관심이 정말 폭발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비해서 보면, 한국의 제주도나 광주는 왜 오끼나와나 티벳같은 <전지구적 문제틀>을 구성하지 못할까요? 실은 아주 단순하게, 이 로컬 전공자들이 전적으로 <지방이거나, 일국사적> 맥락외에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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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까지 적고 있는데. 저를 초청해주신 선생님께서, 저녁 초대를 하셔서,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다시 글을 올리던가, 아니면, 화요일 귀국 후에 다시 보고드리죠.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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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짱의 정념 교실 >1회, 10월 6일 (목)
<카페, 헤세이티>에서.



<맞짱의 정념 교실> 첫 수업이 부산대 카페 헤세이티에서 진행됐다. 첫 수업에선, 권명아 선생님/연구자의 궤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날의 수업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술 심포지움 장에서, 연구자로써의 선생님과 대안 공간(담론 생성의 장)에서 권명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선생님의 연구의 큰 궤를 굳이 말하자면, 단연 역사작업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일반화된 이론 연구였다면, (비평이나 실천이 아닌)학문으로써의 젠더 연구는 구체성을 논의하는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체화의 역사를 통해 이론을 뚫고, 다른 세계의 역사를 볼 수 있기 떄문이다. 현재, 선생님의 '풍기문란'연구는 어떤 저항성, 포섭되지 않는 "골칫 덩어리들"을 규명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같다. 여기에서 다시 비롯된 '정념'연구는 이 "골칫 덩어리들" 즉, 부적절한 정념의 담지자들-병리적으로 간주되어온-에 대한 정체성 정치의 역사를 탐색하였다. 이 주체들의 정념은 이성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잔여물들이라 간주되어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정념은 번역되어야만 한다.
'풍기문란'에 관한 자료 작업 중, 발견한 <<나나>>는 그것의 검열 문제와 유통과정, 독자층의 위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셨다고 한다. 이미 1924년에 발행된 <<나나>>,에밀 졸라, 가 1941년 검열이 되었다. 명목은 1)치안방해와 2)풍속괘란/풍기문란이었다. 치안 방해는 다시 말해, '사상'에 대한 검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풍속'의 문제는 다시 '민족'의 문제와 직결된다. 1926년 부터, 풍속 경찰과 풍속 영업에 대한 단속이 강행되며, 풍기문란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당대에도 이 범위에 대한 논란은 있어왔다. 그런데 이 범위즉, '풍'mentality의 범위, 검열 기준은 다시 시대적인 도덕률을 반영한다. 게다가 <<나나>>의 유통과정을 살펴보면, 지식인이 읽어야하는 서양 고전 필독서에서, 여성 대중들의 읽을 꺼리로 주체의 위치가 변하며 부적절한 정념으로 담지되었다. 이러한 유통 과정은 주체들에게 정념을 배분하고, 주체의 위치를 나누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어떤 실패의 기록들을 통해 생긴 근원적인 낙관이 있다면, "언젠가는 변한다."라는 것이다. 당대의 논리로 변화가 불가능할지라도, 이후 오지 않는 미래를 만들고 있기에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실패를 통해서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상사나 위인전식의 패러다임이 아닌) 인격화된 연구(개별자의 삶과 목소리)를 진행하며 산자의 생애사적 역사(장정일¹, K씨²)를 다루기 시작하시면서 변화된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5.16이후, 10대 미성년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며, 소년범죄에 대한 항목과 소년범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소년범'이라는 풍기문란의 규준이 생기고 이것이 개인의 삶의 위치를 어떻게 배분하여 그의 삶의 반경을 만드는가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를 통해 해석하는 연구를 진행하시고있다.


이 수업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의 반경, 딛고 있는 '나'라는 주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의 언어가 부재하고 남은 자리엔 선생님과 선배들의 언어를 따라 채워넣고, 세계를 엿배웠다. (비약이라 할지라도) 일제 감정기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들 자신의 '말'을 잃고 대역본을 통해 세계를 배우는, 그 제3의 위치에 나의 갈등적인 지점을 투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번역의 과정 속의 어떤 주체성과 그들이 놓여있는 구조적인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각주

¹ 「소년범, 작가, 음란범-J의 탄생과 종말」, 냉전체제와 검열 심포지엄 발표문

² 「제국의 판타지와 게토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기」, <<황해문화>>, 2010년 여름호 

  mazzang11

 

 

맞짱의 정념 교실 1회 강좌는

번개 형식으로 10월 8일 오후에 헤세이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주제는 <음란함, 식민성, 그리고 에밀 졸라>라는 제 최근 연구 발표를 중심으로

제가 역사적 파시즘에서, 풍기문란으로 그리고 정념에 관한 연구로 이어져 온 행로와

글쓰기 방식의 변화 등에 대해서 함꼐 이야기했습니다.

맞짱의 정념 교실은 당분간 유동적이고 즉흥적인 번개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장소도, 시간도, 인원도, 정하지 않고

즉흥적인 번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련 사진 자료를 올려주세요.  

 mazzang11

 

 

내가 구원하지 못할 너

최승자

어두운 너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등 돌리고 홀로 서 있는 너,

슬픔의 똥, 똥의 밥이다.

(너의 두 손은 뭉그러져 있었다.)

내가 꿈에서도 결코 구원하지 못할 너.

나는 다만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곁눈질로 읽으면서

행간에서 행간으로

너를 체념하거나 너를 초월하면서......

허무의 사제인 나는 오늘밤도

너를 위한 허무의 미사를 집행할 뿐이다.

.........................

"허무의 사제"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그녀, 최승자.

검은 드레스에 담배를 피워물며,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승자를 인용하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오래, 그녀를 멀리했다.

홀로, 고독하게 투병중인 그녀의 소식을 접한 날. 외롭게 홀로 투병중인 싱글 여성들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다.

그녀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쓰려한다.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  

 mora

 

 

 

 

 

 

 

 

 

 

 

 

 

 

 

   

 

 

 

 

 

 

 

  mora

 

 

 

 

 

       발표: 장수희 「아동/청소년 문학에 재션된 일본군위안부 연구 통역: 김유미

      : 정념의 교육을 통한, 공감의 공동체의 생산방식에 관하여」

 

 

      발표: 후쿠미네 유카 (와코우대학 현대사회학과 4년) : 「이주여성의 친밀권」 통역: 김근태

 

 

 

 

 

 

발표 : 신교찬(구마모토가쿠엔대학원 국제문화연구과 입학예정) :

「한국의 청년실업과 일본의 프리타에 관하여」

 

 

 

           발표: 장혜리 「국제결혼의 실례를 통해 조망하는 두 가지 역사의 실천적 공생」

 

 

 

                           토론하는 학생들. 와쿠대학 김근태씨

 

 

                     토론: 신현아,장수희,신교찬,후쿠미네 유카 통역: 안지애

 

 

 

 

동아대학교 김대성 선생님

 

 

 

                                토론하는 학생들. 가쿠인 대학 미키오상

 

 

 

       발표: 와타베 히카루 (와코우대학 현대사회학과 4학년) : 「다문화공생재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전체 토론시간 히키치 야스히코 선생님

 

 

 

 구마모토 가쿠인 대학 신명직 선생님

 

 

 

                       선생님과 학생들의 전체 토론시간 권명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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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김대성 동아대학 석당학술원 전임연구원: 이방인 외국인 지구인 통역: 안지애

 

발표: 쿠리타니 이즈미 (와쿠대학, 현대사회학과 4년) <NGO지ㅇ와 다문화공생> 통역;김근태

 

발표: 모리구치 미키오: 쿠마모토 가쿠인대학 동아시아학과 3년) 통역: 신교찬

: <한국의 영화 <방가방가>에 있어서 동화정책과 다문화>

 

 

아트워크 프리젠테이션, net-a 월경하는 정념의 얼굴들

발표: 신현아,송진희,김선우 통역: 안지애,김유미,장혜리

 

 

 

 

 

 

 

 

  mora

 

 

 

조회 수 : 592
2011.09.25 (00: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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