研究会aff-comでウェブマガジン

<情念とアソシエーション>1号発刊

 

研究aff-comウェブマガジン<情念アソシエーション>1発刊した。
これまでaff-comは自分の生活現場でその現場をより解放的な方法で変革させるために努力すると同時に、そのような歩いている異なる人々と集まり出会い持続的に試みてきた。そしてこの出会いを通じて、より多くの衝突より広い地平作り出しながら、今後模索しようとした。その延長線上で研究aff-com、既存様々な活動もとにウェブマガジンベースにした新しい媒体運動試してみようと思う

 

ウェブマガジン<情念アソシエーション>発刊は、aff-comこれまで世界各地で、制度内外で会ってきた生活のための情熱記録して伝え、より多くの人々一緒にこのを共有することを趣旨とする。

 

したがって、今回aff-com作業一つ転換点を迎えたという意味込めて、これまでaff-com作業についての批評一緒に2012年度における韓日ワークショップきっかけに出会った様々な活動の集まり出会い記録詰めた

 

 

<情念アソシエーション>1号の目次は次のとおりである。

權明娥 <他の生活に向かって足並み、喜びだけでは歩いて行けない道>

申知瑛 <コミューン病気から始まる連帯喜び>

ByeonJeonghui <aff-comを批評する>

KimDaesung <廃墟の所限界の所焦がす>

ImTaehun <ピンクのコミュニティで学ぶ人文科学運動未来>

現場記録の「言葉」伝える

申賢娥 <ワークショップ、国境歩いて越える>

紸 <不透明な私のから>

宋眞熙 <そこに「あり」残っているもの孤独の出口>

インタビュー(Passion for another life):薄明かり年代記/連帶記

コミューン言葉、きらめき連帯_申知瑛インタビュー

孤独時間出会い人文科学制度問う_西山雄二インタビュー

らめき、その瞬間模様_メッセージ

 

 

 

残念ながら、今回の1は、

韓国語版しかないのでウェブマガジン記事日本語で見られない

したがって、今回簡単な紹介と目次掲載することでかわる

韓国語版ウェブマガジンの全文はリンク参照。

(http://www.aff-com.net/entry/웹진-정념과-어소시에이션-배부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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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등등인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현대 정념론>의 첫번째 챕터인 1. 정념론의 현대적 의미 입니다.

감정, 정동, 정념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정념론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뒷부분은 디기 어려운데ㅜㅜ 아직은 이해할 수 있어요! 흐흣*^^*

일본어 세미나팀 수고하셨습니다~!

 

 

(14)

 

1. 정념론의 현대적 의미

 

1.

 

「정념론」은 오래되고 새로운 문제이다. 먼저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충동적, 비합리적, 무의식적인 기능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념론은 인간이 감정, 이모션(emotion), 욕망 등을 가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발달하고, 인공위성과 우주선이 날게 되어도, 또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의해 인간관계가 합리화 된다고 해서 인간은 그것들(감정, 이모션, 욕망 등)의 기능을 잃는다거나, 청산하거나 할 수 없고, 여전히 그것들은 인간의 문제로서 남는다고 하는 의미로 말해진다. ‘인간의 문제로서 남는다’란 그것만이 인간의 문제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후적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또,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할 때 가차없이 비판을 받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미 아는 것이지만 앞서 말했던 사실은 이따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보통 널리 ‘감정’이라고 말해지는 이 기능의 문제가, 어떤 시대에도 인간과 함께 있고, 시대와 같이 오래되고, 동시에 새롭다고 해도, 원래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인 「감정」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시대와 함께 변해가고 있다. 옛날부터 「감정」은, 신화, 예술(15)(연극, 노래, 시, 회화 등), 종교, 또 웅변 등의 형태로 토로되었지만, 논의되는 일은 적고, 논의할 수 있는 경우에도, 꺼려해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형편으로, 가치판단이 앞서고, 확실히 대상화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상식은, 「이성」을 「감정」과 대립시키지만, 이 대립적인 파악방법은, 이번 경우에도 무관하지 않다. 오랫동안, 「이성」은 인간의 것이기 보다, 인간을 넘어선 「신」의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실로 그것 때문에, 「감정」의 문제가 인간의 「감정」의 문제로서, 확실히 파악되는데 이르지 못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 인간의 「감정」으로 대상화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대립물로서 「감정」도 말하자면 「자신의 내부」로서 파악되기 위해서는, 이성이 확실히 인간의 것이 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인간적 이성이 주체화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적 이성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초 17세기에 「감정」의 문제가 자각적으로 문제로서 크게 받아들여지고, 여기에 「감정」론의 새로운 발전의 실마리가 열린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실이고, 동시에 의미 깊은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그 「이성」을 「자연의 빛」이라고도 불렀지만, 데카르트에 한하지 않고, 예로부터, 이성은 어둠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 하고 (신의 것으로서 이성은 「은총의 빛」이라고 불렸다), 그것과의 대조에 있어서 「감정」은, 어둡고, 전망을 예측할 수 없는, 맹목적인, 이른바 「어둠의 힘」이라고 되어 있다. 빛은 계속해서 어둠을 비추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다면, 어둠은 빛이 닿지 않은 장소가 존재하는 것, 카오스의 풍성함과 창조의 근원이 자신에게 속한다고 (16)주장한다. 역사상 반복해서 나타났던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비합리주의)와의 대립과 뒤얽힘은, 그러한 것이었고, 그러한 사정은 이후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대립과 함께 「뒤얽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에토스(의사) 혹은 파토스(정념)에도 유지되지 않는 합리주의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에토스적인 것, 혹은 파토스적인 것과, 합리주의와 결합, 또는 그 관계야말로 함께 다루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면 안 된다. 분명히 근대의 합리주의문명은 자연에 있어서의 ‘인간 판도의 확대’(F. 베이컨)를 이룬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성공이 눈부시게 빛나면 빛날수록 합리주의 문명 스스로가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세계도 인간도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존재라고 점점 더, 믿게 되었다. 인간성의 어두운 악마적인 힘은, 중세 혹은 그 이전의 시대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지식의 결여에 의한다든가, 기만적인 왕후나 승려의 교활한 음모 따위로 설명되었다. ……사람들은 근대 민주주의(democracy)의 완성이, 모든 음험한 힘을 지워 없애 버렸다고, 아무런 의혹도 없이 믿어오고 있었다. 이른바 세계는, 근대도시의 밝게 조명된 거리와 같이, 훌륭하고 안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파시즘이 대두해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도대체 이와 같은 악으로의 경향이나 힘에로의 갈망, 이런 약자의 권리 무시나 복종에의 동경을 가질 수 있다는 등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자유로부터의 도피』). 이 프롬의 말은, 「문명」사회 속에서의 어두운 충동적인 힘에 의한 반역으로서의 파시즘, 특히, 과학기술을 구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최고도로 합리적이었던 나치즘의 도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프롬이 지적하는 바에서도 있는 것이지만,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비합리적인 것의 노골적인 표현은, 문명사회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문명사회의 가운데‘에서야말로’ 비로소 보여지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빛의 밝기가 증가함에 따라, 대조적으로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은 한층 더 어두워지는 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 어둠은, 문명과 합리주의에의 신뢰가 있으면 있는 만큼, 출현이 의외성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문명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나치즘을 심판했던 미소양국이, 매카시즘과 스탈린주의에 휩쓸린 것은, 역사의 속임수라고 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해도, 합리주의문명의 가운데에는, 비합리적이고 노골적인 힘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노골적인 힘은, 기쁨, 슬픔, 사랑, 증오, 웃음, 분노, 희망, 불안, 의욕, 절망 등,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여러 「감정」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고, 많은 경우, 그것들의 이른바 비합법적인 동원에 의해서 초래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념론」이라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감정」론의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좁은 의미에서의 감정과, 정동(정서, emotion) 및 정념(정열, passion)으로 구별하고, 그 세 가지를 격렬함의 차이로서 파악하고 있다. 즉, 정동은, 그 영향이 뚜렷이 신체에 나타날 정도로 강렬한 일시적인 감정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갖추어진 (18)본래의 경향이 움직일 수 없게 될 때에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행동이 한층 강하게 속박되고, 자연의 흐름이 막히고 인간이 고뇌에 처해지게 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 정념이라고 부른다. (島崎敏樹, 『감정의 세계』) 결국은 이것과 연결되지만, 이 감정, 정동, 정념의 전체를 아우르는 영역을 「정념론」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던 것은 데카르트였다. 근대의 「감정」(넓은 의미의) 론 에 있어 데카르트이 위치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지만, 그 「감정」론이 특히 「정념론」으로써 다루어졌던 것은 단순히 문자 혹은 용어상의 자의성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기타등등인

 

 

10월 29일 일본어 세미나에서는 나카무라 유지로의 <현대정념론> 의 젤 뒷부분에 있는 <해설>부분을 읽었습니다.

세미나 한 내용과, 그날 다 다루지 못한 내용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올립니다.

 

 

(401)

해설

 

쿠메 히로시(토호우가쿠엔대학 교수)

 

1.

 

이 학술문고에 수록된 나카무라 유지로씨의 저작으로서, 우선 본서가 선택된 것은, 필시, 본서가 씨가 세상에 질문었던 최초의 본격적인 저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30년에 걸쳐서 나카무라씨의 왕성한 저작활동에는 당목(주목)해야하는 것이 있다. 1993년에는, 그것이 대집성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즉, 테마별로 집성된 10권의 『나카무라 유지로 저작집』(이와나미 서점)과, 에세이만을 묶은 『나카무라 유지로 에세이 집성』전6권(청토사)이다. 그 다산하는 태도도 그와 같으면서, 그 내용의 복잡다단함, 다채로움에는, 누구라도 깜짝놀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씨의 저작의 스타일을 반영해서인가, 그 책을 만드는 기획작업에는, 그야말로 철학서인듯한 딱딱함이 없고, 손에 잡고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고 싶어지게 하는 친숙함이 있다.

 

물론, 저작집간행의 완결이 나카무라씨의 철학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하나의 단락에 지나지 않는 것은, 그 후의 씨의 작업모양에도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반상(바둑판)위에 항상 말을 전진시켜간다고 하는 분위기이다. 거기서 이 책의 내용에 관해서 거론하기전에,(402)나는 우선 나카무라 유지로씨의 철학하는 태도, 방법이, 현대일본의 사상계에 있어서, 얼마만큼 독자성을 가지고있는지에 대해서 서술해 보고싶다.

 

1994년 1월에 행해진 「일본의 철학의 아포리아와 나의 행보」라는 제목의 강연 서두에서 나카무라씨는, <일본에서 철학이 가능한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저작집 간행 직후의 저자의 것으로서는, 정말로 무거운 문제이다. 역으로, 그것은 어떤 도달점에 도달했던 자라서 가능한 물음일지도 모른다. 메이지 이래, 일본의 철학연구자는, 고대 그리스로부터의 서양철학,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거대한 지적 유산을 수용하고, 소화하려고 다대한 노력을 지불해 왔다. 소화불량을 일으키면서도, 철학사적 연구의 면에서는, 일본도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연구와 참으로 철학하는 것이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본서의 논문 「철학의 일본적 착각과 환상」으로 지적되고 있는 1960년경의 우리나라의 철학계의 상황과 90년대의 현상황이란, 아쉽게도 그다지 변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철학의 학설을 단지 받드는 것은 아니고, 「의심하면서 스스로 재발견해야한다」고 하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나카무라 유지로씨야말로, 현대일본의 몇 안되는 「철학자」인 한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카무라씨가 중기 이후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철학에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일본에서 철학이 가능할까>라고 하는 문제의식을 니시다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카무라씨는 언제나 논단 저널리즘의 제일선에서 일을 계속해 왔다. 그것은 (403)나카무라씨가 일부 철학 전문가가 아닌, 폭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해서 집필을 계속해 온 것을 의미한다. 즉 은어(jargon)처럼 보이는 철학용어를 보통 사용하지 않는 독자를 향해 말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난해하고 난삽한 것이 되기 쉬운 서양철학의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여, 얼마나 알기 쉽고 명료하게, 뜻이 잘 통하는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나카무라씨의 문체는 그러한 노력의 끝에 얻게 된 것이다. 『감성의 각성』을 집필할 때에는, 「처음으로, 말소리를 내어 귀로 듣고 알 수 있도록 구어체로 쓰고, 그런 후에 문장으로서 어미를 정리한다.」라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그의 표현에 대한 고심과 생각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의 독자를 향해서 말을 건다고 하는 것은, 문제를 철학사적으로 해명하고 끝낸다고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 것이다. 17세기 서구의 데카르트의 사상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또 그것이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서」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항상 질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예를들면, 2천년 전에 쓰여진 「성서」의 텍스트가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서」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라고 하는 시점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설교자와 닮아있다. 그 점에서도 이 「현대정념론」이라고 하는 책 제목에 있는 「현대」의 의의는 깊은 것이다.

 

나카무라씨의 철학방법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몇개의 주제를 평행시키고, 끈기 있게 추구해 가는 태도, 또, 하나의 주제가 다음의 주제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그것은 마치, 몇개인가의 주제가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 나가는 동안에, 갈라지고, 다시금 가지와 가지가 유기적으로 이어져 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예를 들면, 『현대정념론』의 정념의 주제는, 『감성의 각성』에서 더욱더 (404)폭넓게 고찰되고, 그곳으로부터 「공통감각」의 주제가 발견되고, 다음으로 『공통감각론』에서는 「장소」의 주제가 탄생하고, 얼마 안있어 그것이 니시다 철학과 결부된다, 고 했던 형태이다. 주제별로 편집된 앞의 『저작집』은, 「정념론」「제도론」「언어론」에서「파토스론」에 이르기까지, 열개의 주제로 나눌 수 있는 광범위함과 함께,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것과 에세이를 포함한다면, 나카무라씨가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은, 놀랄만한 범위와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박식(博識)을 위한 박식(博識)은 아니고, 오히려 모든 것을 사색을 위해 유용하게 쓰려 한다고 말한다면, 실용주의적인 의도가 거기에 관철되고 있는것처럼 생각된다. 토리와케씨는, 구제고교(旧制高校)의 이과에 입학했던 경력에서도 수긍될 수 있듯이, 프랙탈(fractal) 이론, 카오스 이론, 리듬 진동론 등의 과학이론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에 편입시키고 있다. 그 좋은 예는 『형상의 오딧세이』(1991)일 것이다.

 

나카무라 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독일 관념론적 철학이 여전히 일본 철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에 있어, 데카르트, 파스칼, 알랭(アラン,Emile-Auguste Chartier), 그리고 푸코라는 프랑스 철학을 이론적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카무라씨가 로고스보다도 파토스를, 관념보다도 정념을 철학적 주제로 취하는 것도, 그것과 관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개념화」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주제이다. 「내적관찰의 존중」「과학적 방법과의 밀접한 관계」「인간에의 모럴리스트적 관심」이라는 프랑스 철학의 특색을, 우리들은 나카무라씨의 (405)저작으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뿐 아니라, 『니시다철학의 탈구축』(1987)에서는, 저자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반철학적」시점을 받아들여 대상의 본질을 비추어 내는 것에 노력하여, 그 결과, 종래의 교토학파적 이해의 맹점에 대하여, 니시다 철학의 새로운 발견이 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2.

 

자, 『현대정념론』으로 되돌아가자.

본서의 제2편, 제3편의 논문이 집필된 것은, 1960년 전후의 시기이고, 그것은 흔히 말하는 60년안보개정을 둘러싸고 국내가 시끄럽다고 하고있던 즈음이다. 17세 소년에 의한 천소사회당위원장 척살사건(浅沼社会党委員長刺殺事件), 후쿠자와 시치로우(深沢七郎)의 『풍류몽담(風流夢譚)』사건등은, 「이미 전후가 아니다」(もはや戦後ではない)라고 말해지며, 사람들이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모색하고 있던 전환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본서의 각 논문은, 그러한 시대의 움직임에 참가하면서 생산된 것이다. 전후 얼마되지 않는 즈음의 「진보적 문화인」이나, 좌익 이데올로기의 계몽적 합리주의적 논조로는 법칙 할 수 없고, 일본적 심정의 비합리적인 것, 파토스적인 것이, 내셔널리즘이나 전통에의 회귀라고하는 형태를 가지고 현재화해 오고 있었다. 저자는 그러한 동향을 「정념」이라고 하는 시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랑가(ランガ―)의 말하자면 「창조적 개념」으로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제1편의 「사회화된 정념」은, 새롭게 다시 쓴 것이고, 데카르트의 (406)고전적 정념론을, 알랭, 사르트르, 프로이트들에게 연결하고, 그것을 사회화, 현대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제 1편부터, 말하자면 연역적으로, 제 2편 이하로 읽어나가는 것 보다도, 제2편 이하부터, 귀납적으로 제 1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하나의 읽는 방법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의 정념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볼 때, 누구든지 「우리의 중심인 천황제」로 생각해 도달할 것이고, 그것을 빼내고는, 내셔널리즘도, 전통도 논할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제도」의 문제이고 동시에 「감성」의 문제이며, 그 국민적 감성에는 표리(앞/뒤, 안팎)가 있고, 그 「내면의 감성」이란, 구체적으로는 「나라야마적, 순례가적인, 무정하고 으스스한 것」이라는 지적은 핵심에 닿고 있다. 그리고 전전의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郞),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전후의 후쿠다 츠네아리(福田恆存), 다카야마 미치오(竹山道雄)들이 전쟁직후의 일본문화의 전면부정(全称否定)에 대항해서, 일본문화의 자주성의 거점을 일본인의 「미의식」으로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심정적 천황제」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전통론을, 타니가와 간(谷川雁)의 이론을 따르면서 「마이너스의 생산성」이라고 단정하였다. 마이너스 전통론의 극복은 「논리와 감성, 의식과 잠재의식……」등의 강렬한 변증법(Dialektik)의 실천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미의식」의 문제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에 의해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미」와 「정치」의 대립으로 집약된다. 이 책의 원본의 부제가 「미와 정치의 사이」로 된 이유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상상력의 활동은 대상을 공무화(空無化)하는 것이고, 미는 「공무한(공허한?)」가상에 관계되기 때문에, 미는 「상상계」에 속하고, 거기에 있어서, 「현실계」에 속하는 정치와는 대립하는 것(407)이 된다. 그러한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한다면, 「심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실계와 상상계를 끊임없이 혼동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일본인의 미의식은 상상계와 현실계의 두 개의 차원에 동시에 자신을 두고, 일상생활에도 용이하게 미를 찾아낸다. 그 반면, 정치는 미와는 관계가 없고,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미와 대치된다. 가토 슈이치(加藤周一)를 만나서 조차, 미와 정치는 「싸늘하게 갈라져 구별된다(?)」. 그러나 미와 정치의 공통의 기반을 구하는 것이, 미를 은둔자의 미학에서 끌어낼 뿐 아니라, 정치이론에도 심리적 근거를 주는 것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결코 절충주의는 아니다.

 

제3편이나 제4편의 절반을 차지하는 체호프(Chekhov, Anton Pavlovich)론에는 「체호프 극의 매력에 사로잡힌」저자의 투철한 체호프 이해가 넘치고, 그것은 결국 「연극적 지」에 대한 고찰로 발전해 간다. 「러시아 혁명의 반세계」에 있어서의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론은, 현재 잡지 『헤르메스』에 연재중인 「악의 철학 노트」에 결부된다. 이와 같이 『현대정념론』에는 그 후에 전개된 주제의 예형으로 가득찬 것이지만, 유일한 예외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이다. 이 책에서는 아직 부정적인 취급 밖에 받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전술한 것과 같이, 니시다 철학은 나카무라씨의 큰 주제로 성장해 간다. 저자에 있어서도 의외인 이 결과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필연의 결과라고 납득되어 온다. 나카무라씨가 발굴해 온 니시다 철학의 현실성(actuality)을, 우리들은 기대하고 있다

 

 

 

 

1) 1960년 안보투쟁은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해 일어난 시민 주도의 대규모 평화운동이다.

2) 1960년 10월 12일 도쿄에서 있었던 「삼당수 입회 연설회」에서 浅沼稲次郎 사회당 위원장(61세)의 연설 도중 학생복의 소년이 가지고 있던 단도로 사회당 위원장을 척살한 사건. 소년은 山口二矢(17세)로 원대일본애국당이었다.

3) 1960년 후쿠자와 시치로우가 『중앙공론』12월호에 개재한 소설「풍류몽담」에 대해 일어난 우익 테러 사건

4) 1956년 영문학자, 비평가인 나카노 요시오(中野好夫,1903~1985)가 『문예춘추』에 발표한 평론의 제목. 일본 정부는 『경제백서』에서 일본의 부흥을 선언하는 의미로 ‘이미 전후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으나, 나카노 요시오는 ‘전후’를 꺼내기만 하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방면으로 편리한 이유가 되었다면서 일본인이 ‘전후’에 응석부리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요지의 평론을 썼다.

 

 

 

 

*참고 사이트*

60년 안보투쟁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B%B3%B4%ED%88%AC%EC%9F%81

浅沼社会党委員長刺殺事件

http://yabusaka.moo.jp/asanuma.htm

風流夢譚事件

http://100.yahoo.co.jp/detail/%E3%80%8E%E9%A2%A8%E6%B5%81%E5%A4%A2%E8%AD%9A%E3%80%8F%E4%BA%8B%E4%BB%B6/

 관리자

 

 

 *기타 등등님이 올리신 본문 내용입니다.

 

 

 

이번 여름, 프로젝트 팀원들이 일본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신미나토 마을에 참가해서 작업을 진행했었다. 요코하마의 뜨거운 여름은 재일조선인 2세 작가 유미리의 작품들 속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뜨거운 여름에 프로젝트 팀원들은 프로젝트 작업 진행 뿐 아니라, 팀원 내/외의 여러가지 경험들을 했었다. 그것은 크게 불화/사랑(?)으로 나누어 버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린 그때, <정념>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지금도 다르지 않을지도.) 


[현대정념론]은 팀원들이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와서 진보초 거리를 누비고 다니다가 구매한 책이다. 나는 나카무라 유지로라는 이름도 처음 알게 되었고, 그의 저작이 한국에도 세권 정도 번역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양일모․고동호가 함께 옮긴 [공통감각론]은 나카무라 유지로의 대표 저작인 것 같다. [공통감각론]의 <맺음말>과 <저자의 뒷 이야기>만 읽어봤는데, 차분하고 어렵지 않게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오늘 업데이트 될 현대정념론의 <학술문고판 머리말>과 비슷한 느낌이다.


나카무라 유지로는 팔순을 훌쩍 넘긴 일본의 철학자인데, 일본 위키백과를 검색해 보면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수의 저작들이 연대별로 정리되어 있다. 70대까지도 계속 저서를 낸 것 보면, 지금도 뭔가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것 같다. 후배 철학자 오오츠카 노부카즈(大塚 信一)의 『철학자 나카무라유지로의 작업 <익살꾼적인 모럴리스트>의 삶의 방법과 모험』(2008)(大塚信一『哲学者・中村雄二郎の仕事 <道化的モラリスト>の生き方と冒険』(トランスビュー))의 책도 참고해 볼 만 할 듯.


앞으로도 홈페이지에 계속 업데이트 할 [현대정념론]은 단락별로 업데이트 할 생각이다. 다음 강독 세미나 이후에는 <해설>이 업데이트 할려고 한다. <해설>은 쿠메히로시(久米博)라는 일본의 철학자이다. 쿠메히로시는 일본 위키 백과에 저서보다 다수의 번역서 목록이 인상적이다. 나카무라 유지로가 프랑스 철학을 일본어로 번역 소개를 주로 했다고 하는데, 쿠메히로시도 많은 작업을 함께 해 온 모양이다. 쿠메히로시의 저작은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그럼, 일단 [현대정념론] <머리말>개봉박두.ㅋ 


(3)학술문고판 머리

최초의 내 책인 [현대정념론]이, 이번 「학술문고」의 한권으로서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책이 나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젊은 시기에 썼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읽어보면, 미숙하기도 하고, 허세를 부리거나 하고 있고, 낯간지러운 점도 많이 있지만, 그런데도 나의 철학적인 출발의 글로써, 스스로의 사고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을 있는 힘을 다해내고 있다. 나중이 되어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써두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다.

 

지금 <철학적인 출발의 글>이라고 했지만, 이 표현에도 약간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초판이 나온 것은 1962년이지만, 당시에 이 책은 일본의 철학책으로서는 두가지 점에서 특이한 것이었다. 하나는, 과거의 철학사상이나 철학자에 관한 연구 소개가 없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념이나 감정과 같이 당시, 일본의 철학계에서는 거의 주제화 되어 있지 않았던 신변적 문제를 정면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같이 된 것은, 처음부터, 철학을 무엇인가 견고한 틀을 가진, 점잖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감성에서 출발해서, 다양한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또,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본다면-감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해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만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것(4)에 의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자기를 외계로 향해서 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표제가 「현대 정념론」이거나, 감정에서 출발 등으로 말하거나 하면 어쨌든 저자의 입장 그 자체가 <정념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쉽다. 사실 간행 될 당시는 시대가 전후일본의 계몽주의가 계속 이어졌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책은 표제부터 선정적이고 저속한 책으로 오해받는 일마저 있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정념론」이 데카르트도 다루었던 명백한 철학의 문제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념론이라는 것은 데카르트의 경우도 그렇듯이, 합리주의의 산물이고 그렇게 때문에 정념이나 감정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것들을 대상화하여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념론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과의 대립이 주된 문제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무엇이 비합리적이고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가는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변하지만 그러한 대립 속에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간의 삶이 영위되어지고 있는 이상 주제로서 퇴색되지 않는 이점이 있다.

초판의 「발문」(「본서의 구성과 방법」) 중에서 앞에 서술한 것과 거의 같은 취지의 이야기가 당시 나의 말로 쓰여 있다. 다음에 그것을 참고로 실어 두겠다.


나에게 있어 철학과 사상은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 비합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과의 뒤얽힘, 양자의 대립 및 결속, 그것에 있어서의 인간적인 지혜와 삶의 치혈한 표현으로써 문제시 되었다. (5)또, 그런 까닭에 자연히 나의 기본적인 방법론으로서 선택하고 있었던 것은, 철학이나 사상, 즉 인간이 가진 복잡함과 모순성을 이원론적 대립의 교차나 중첩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 인간습속의 관찰자, 인간성의 연구자라는 의미에서의 모럴리스트적인, 사물을 보는 유연한 안목을 잃지 않는 것, 게다가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장’의 문제로서 고려하는 것 등이 있다.


한편, [현대정념론]은 초판이 케이소오서방에서 나온 것이 앞에 서술되었듯이 1962년이었지만, 그때는 제 1장 「사회화된 정념」, 제2장 「전통과 내셔널리즘」, 제3장 「정념과 미와 정치를 둘러싼 문제」라고 하는 전 3장의 구성이었다. 이 이후로 같은 케이소오서방에서 69년에 제 4장 「비판과 드라마에 있어서의 정념」을 더한 증보판이, 또 80년에는 내용은 그대로 서브타이틀만을 처음의 「미와 정치의 사이」에서 「인간을 발견하다」로 바꾼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종류의 책으로서는 혜택받고 있다고 생각하고있었지만, 이번 코우단샤학술문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책으로서의 생명을 더욱더 갱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기쁘다. 그래서 이 기회에 편집부의 권유로, 제 5장 「정념ㆍ제도ㆍ파토스의 지식체계(知)」에 「근대원리를 상대화하는 것」 및 「일본의 철학의 아포리아와 나의 행보」라는 두 개의 글을 더하여, 전 5장의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들을 모아서 [현대정념론]의 문제가, 최근의 (6)나의 작업에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읽고 이해 해주면 다행이다. 더욱이 이번의 학술문고판은 결정판으로서 부제목을 일절 붙이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작년 이와나미서점에서 간행된 「나카무라유지로 저작집」(전10권) 의 제 1권이 「정념론」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것과의 관계에 대해서 한마디 해둔다. 이 저작집은 주제별로 되어 한 권 속에 「현대 정념론」과 「감성의 각성」이라는 내용을 포함하지만, 분량 상 한 권에 이 두 권을 담는 것이 불가능하고 고심 끝에 보다 이론화 되어있는 후자를 중심으로 편집하고 전자에 대해서는 제 1장중에 세 개의 글을 서론적으로 담는 것에 그쳤다.

 

그러한 것으로 저작집의 1권으로서 정리해야만 하는 형태로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 「현대 정념론」이 그런 형태로 밖에 탄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 심하게 불만을 느꼈다. 이 책에서의 여러 가지 기획과 고찰의 전체에 내가 강하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럴 때에 학술 문고 편집부의 스즈키 잇슨(鈴木一守)씨에게 이 기획의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쿠메히로시(久米博)씨가 해설의 수고를 해주시기로 된 것도 큰 행복이다.

 


1994년 6월


나카무라 유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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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등등인

 

 

10월 15일 부터 나카무라 유지로 선생님의 <현대 정념론> 강독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는 <공통감각론>, <21세기 문제군>, 우에노 치즈코와 함께 쓴 <인간을 넘어서>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교보 문고에 소개된 나카무라 유지로 선생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나카무라 유지로

1925년생. 1950년 도쿄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바슐라르, 푸코 등 주로 프랑스 철학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했다. 현재 메이지 대학교 교수이며 학계와 언론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자는 『정념론』과 『파스칼과 그 시대』라는 저작을 출간한 이후, 언어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폭넓은 시야와 신선한 감성을 유지하면서 일본 사상계에 다이내믹한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그는 주로 철학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면서, 근대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식 체계의 구축과 실천을 강조하다. 한편 『근대 일본 세계와 제도』 등을 통해 일본 사상의 연구 자체에 대한 검토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임상철학(臨床哲學)”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장본이기도 하며, 최근에는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철학 아고라”를 통해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그의 저서들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21세기 문제군』을 포함하여 <나카무라 유지로 저작집>으로 20권이 출간되었다. 특히 『공통감각론』은 사회생활에서의 상식의 중요성에 주목한 저자가 잃어버린 “공통감각”의 복원을 주장하는 걸작이다.[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이번 세미나에서는 서문과 1장 조금을 읽었는데요, 읽은 내용은 금요일(21일)에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세미나는 10월 29일 7시이고, 책 마지막 부분의 <해설>을 먼저 읽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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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화의 장소성의 변화를 통한 정념커뮤니티의 탐색
-최인호와 장정일을 중심으로-

 

신 현 아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 문제적인 존재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청년’들의 문화가 ‘통기타ㆍ청바지ㆍ생맥주’로 표상되는 ‘이질적인 것’들로 대두되기 시작하고, 이는 1974년 김병익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에 최인호, 이장희 등을 ‘청년문화’의 기수로 호명하면서 청년문화논쟁으로 촉발되게 된다. 이렇게 사회의 ‘이질적인 것’이자 ‘새로운 것’으로 등장한 70년대의 ‘청년문화’는 논쟁을 거치며 ‘반문화, 도깨비문화, 부분문화, 퇴폐문화’ 등의 규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청년문화’는 여전히 하나의 규정 안에 머물 수 없는 ‘돌출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青年文化の場所性の変化を通じる情念コミュニティの探索
-崔仁浩とチャン・ジョンイルを中心に-
シン・ヒョンア

韓国社会で「青年」が問題となる存在として台頭されたのは1970年代のことだ。「青年」たちの文化が「ギター、ジーパン、生ビール」に表象される「異質なこと」などで台頭し始め、これは1974年ギム・ビョングイックが『東亜日報』に起稿した「今日の若い偶像たち」に崔仁浩、 イ・ジャzzなどを「青年文化」の旗持ちで名を呼びながら青年文化論争を起こすように
なる。このように社会の「異質なもの」と同時に「新しいもの」として登場した70年代の「青年文化」は論争を経て「カウンターカルチャー[counter-culture]、お化け文化、部分文化、擾廃文化」などの規定されるようになる。しかし「青年文化」は相変らず一つの規定の中にとどまれない突出なこととして残っている。

 

 

이러한 청년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청년문화 논쟁의 분석이나 당대의 스타일에 대한 논쟁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70년대의 ‘청년문화’는 돌출적으로 나타나 사라진 ‘논쟁’이나 ‘스타일’의 문제로만이 아닌 ‘대중문화적 외피를 두른 동시에 지배 이데올로기 및 민중문화론의 민중문화적 엄숙성에 대한 거부와 이탈을 동시에 보여준 케이스’로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청년문화’가 당시 사회의 맥락 안에 위치한 대중적인 문화인 동시에 ‘주류문화’와 ‘저항담론’를 모두 빗겨나가는 가장자리의 문화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는 ‘규정되지 않고 빗겨나가는 것’으로서의 청년문화와 그 안에서 주체들이 만들어내었던 ‘장소’, 그 ‘장소’에서 보여지는 ‘정념’,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정념 커뮤니티’를 통하여 ‘청년문화’는 무엇이었나를 다시 되짚어 볼 것이다.

 

 

このような青年文化に関する大部分の研究は青年文化論争の分析やあの時代のスタイルに関する論争に止っているのが事実だ。しかし70年代の「青年文化」は突き出たように表して、消えた「論争」や「スタイル」の問題だけではなく、「大衆文化的の皮に囲まれた同時に、支配のイデオロギおよび民衆文化論の民衆文化的の厳粛性に関する拒否と逸脱を同時に示したケース」として接する必要がある。これは「青年文化」が当時の社会の流れに位置する大衆的な文化の同時に「主流文化」と「抵抗世論」を全部外れるふちの文化だというのを示した。すなわちここでは「規定されなく外れるもの」としての青年文化とその中で主体らが作り出した「場所」、その「場所」の中で現れる「パトス」、それらが作り出す「パトスのコミュニティ」を通じて「青年文化」何だったというのをたどり直すつもりだ。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청년문화논쟁 및 청년문학 텍스트를 통하여 ‘청년’이라는 주체들이 어떤 ‘장소’를 만들어내고 표상했는가를 볼 것이다. 여기서의 ‘장소’는 주체들이 스치고 머물며 남기는 흔적들로 만들어지는 독특한 아우라와 물질성을 가진 곳으로, 당시의 주체들이 ‘장소’를 만들면서 투여했던 의식과 열망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에서 만들어진 커뮤니티가 어떠한 ‘정념’을 갖고 있었나를 묻는 것을 통하여 그 ‘장소’가 다시 주체들을 어떻게 규정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년문화’를 당시의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대중문화인 동시에 ‘규정되지 않고 빗겨나가는 것’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70년대의 ‘청년문학’으로 꼽혔던 최인호의 소설, 그리고 그 이후의 다시 ‘돌출적인 것’으로 등장했던 장정일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청년’, 그리고 그들의 ‘장소’와 거기에서 파생되었던 논쟁들을 보려고 한다.

 

 

したがってここでは先ず青年文化論争および青年文学テキストを通じて‘青年’という主導者がどんな‘場所’を作り出して表象したかを見る。ここでの‘場所’は主導者がかすめて留まって残す跡で作られる独特のアウラと物質性を持ったところで、当時の主導者が‘場所’を作りながら投与した意識と熱望を見ることができる所でもある。そしてこのような‘場所’で作られたコミュニティがいかどんな‘情念’を持っていたかを尋ねるのを通じてその‘場所’がまた主導者をどのように規定したかを見ることができる。
そして‘青年文化’を当時の社会を読みだすことができる大衆文化と同時に‘規定されないではずれること’で接近するために70年代の‘青年文学’で挙げられたチェ・インホの小説、そしてその後のまた‘突出的なもの’で登場したチャン・ジョンイルの小説で見せてくれる‘青年’、そして彼らの‘場所’とそこで派生した論争を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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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결속 그리고 말: 인터넷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지는 결속방식과 그들의 정체성에 관하여>

 

 

본 글의 목표는 인터넷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결속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익명성의 보장으로 인한 현실의 도피처이자 그로인해 비윤리적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기존의 인식에 문제 제기를 하고, 윤리적 잣대의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결속방식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또한 이 새로운 결속방식이 단순하게 이전과 변별된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새로운 결속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인터넷 공간은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저속하고 문란한 곳으로만 여겨지고 있기에 곧 쓸모없고, 하찮으며, 때로는 범죄의 온상으로까지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 범죄가 끊이질 않고 발생하는 곳이라는 점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인식이 굳어지고 관습화되는 과정과 이 관습화를 견고히 하는 어떠한 구조적인 맥락이 함께 연관되어 있진 않을까 하는 것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이는 그 구조적인 맥락에서 출발해 관습화로 이어졌는지, 혹은 관습화가 구조적인 맥락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한 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진 않습니다. 단지 그러한 관습화와 구조적인 맥락으로 인해 ‘놓쳐지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얘기하고자 함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관습과 구조는 결국 익숙함과 동의어라고 봅니다. 익숙함의 중간에 위치할 때 새로움은 이질성을 수반하고 이 이질성은 결국 새로움에 대한 시선에 제약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 제약이라는 필터링으로 인해 ‘놓쳐지는 것’이 바로 인터넷 네트워크에서의 새로운 결속방식의 양상이며, 그들의 정체성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기존의 인터넷 네트워크에 대한 논의들이 정치적인 담론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것을 규명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가령 조정환 선생님의 논의처럼 <아고라>처럼 촛불집회와 연관 지어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터넷 네트워크의 ‘말’에서 유의미함이 있음을 이끌어내기보다는 그 ‘말’들의 무의미함으로 하여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의미함에 대해 되물을 수 있다는 것을 이끌어내고자 함입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유/무의미라는 말은 곧 기득권들에 의해 사용가치가 있는지 없는지가 평가된다는 점을 말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함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기득세력의 입맛에 맞추는 식으로 되먹힐 우려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푸코의 방식처럼 ‘비정상인’이라 불리는 인터넷 네트워크의 ‘유저’들을 통해 사회의 제도를 더욱 견고히 만들고 있는 지는 아닌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비정상인’들이라는 규정으로 인해 개별자의 이름은 삭제되고 결국엔 ‘비정상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인터넷 네트워크의 ‘말’들에 대한 원색적이고 무조건적인 비난이 인터넷 네트워크를 제도 바깥쪽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넷 네트워크의 결속방식에 대한 고민은 새로운 정치적 대안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고찰하기보다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아닌 곳(제도권적인 공간)과 구분되는 공간으로서 새로운 결속방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결속방식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측면을 수반, 즉 인터넷 네트워크에서의 ‘유저’들의 행동이 어떤 정체성을 형성해 내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子供たちの結び、そして言葉:インタネット上のネットワークで行われる結び方と彼らの正体性に関して>

このテキストの目標はインタネット上のネットワークで行われている結び方について考えてみるのです。単純にインタネットという空間は匿名性が守られている現実の逃げ場で、そのため非倫理的な行為が行われている既存の考えに問題を投げ掛けるし、倫理的な定規(じょうぎ)を越えて新たな結び方を駆逐しているところに注目しようとしています。またこのような新しい結び方が単純に以前と違いがあるというところを説明するのではなく、自分たちの正体性にたいする悩みから始まった新たな結びというところを話そうとしています。

つまり、インタネット上の空間は一般的に卑しいし紊乱なところで思われて、くだらないし、つまらないし、時には犯罪が生産される空間に扱われるところで問題があると考えます。もちろんそのような犯罪が絶えずに発生するところだという考えは同感しますが、このような認識が固くなって、慣習化される過程とこんな慣習が固まるメカニズムが関わ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考えから始まるとしています。これはメカニズムの脈が慣習化されたのか、もしくは慣習化がメカニズムの脈を作ったのかという関係を明らかにするのを狙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ただこのような慣習化とメカニズムのせいで'落とされる物'が何があるのかを話し合いたくて始まったのです。慣習とメカニズムは結局親しいと同意語だと思います。親しいの真ん中にあるとき新たは異質性は伴うし、この異質性は結局新たに対する観点に枠をつけるしかないと思います。この枠で取り除く'落とされる物'が即時にインタネット上のネットワークでの新たな結び方の様子で、彼らの正体性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また、これは既存の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に対する議論たちが政談を作り出していることを糺すわけではありません。例え、ジョウ・ジョンファン先生の議論の一つである「アゴラ(ネット上でコミュニケーションする場所)」のようにキャンドルデモと関係づけて、新しい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可能性を開けたという点を話したいのではありません。

私がここで言いたいことは、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の「言葉」から意味があることを引き出すより、その「言葉」の無意味から私たちが考える有意味に対して問い返せるということを引き出そうとします。ここで使う有・無意味という言葉は、すなわち、既得権者を中心とする評価により、かえって彼らの好みに合わせるだけの意味になる恐れがあると思います。

ほかの角度から見てみると,ミシェル・フーコーの方式のように「アブノーマルな人」と呼ばれる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の「ユーザー」たちを通して「社会制度をもっと堅く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に対して考えてみることも出来ます。結局、「アブノーマルな人」という規定によって個人の名前は削除され、「一つのカテゴリーに分けられた「アブノーマルな人」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を持つしかない存在になったというのです。すなわち、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の「言葉」に対するあからさまで絶対的な謗りが、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を制度の外側に追い出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について考えてみるつもりです。

したがって、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の結束方式に対する悩みは、新しい政治的な代案空間になるかどうかに対して考察するより、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ではない場所(制度的な空間)と区別される空間として新たな結束方式を作り出しているのを念頭に置いています。また、このような結束方式は必然的に存在論的な側面を伴い、すなわちインターネット・ネットワークの「ユーザー」たちの行動がどんなアイデンティティを成しているのかをお話したいと思ってお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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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청소년 문학에 재현된 일본군 위안부 연구

정념 교육을 통한 공감의 공동체의 생산방식에 관하여

 

장 수 희

 

 

공적 역사를 구성하고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역사교과서의 기술에 대한 한일 간의 비교 연구는 1997년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발족과 2001년 일본의 교과서 검정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역사 교과서의 역사 서술에 대한 비교 연구 중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역사교과서 비교의 논점이 되어왔다. 한편, 일본군 위안부가 재현된 소설과 영화에 대한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되어 왔다. 비단 역사학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문학, 한국문학 등의 분야에서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냈다. 이처럼 역사 교과서에 기술된 일본군 위안부는 공식적으로 학생들에게 교육되어 지고, 문학과 영화 등의 파워 있는 문화적 매체를 통해 재현되면서 ‘재현의 정치’, ‘재현의 윤리’와 같은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본 연구는 한국의 어린이/청소년용 도서에 재현된 일본군 위안부를 분석을 통한 “재현의 윤리”에 관한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에게 영향력이 큰 매체는 공교육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과서라기보다, 동시, 동화, 소설, 만화 등의 문화적 매체이다. 공교육 매체의 역사 기술 분석이 국가나 특정 압력 단체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미성년자’라는 수용자를 고려하여 단순하게 재현되는 동시, 동화, 소설, 만화 등의 문화적 매체는 ‘역사의 정확한 전달’과 ‘평이함과 재미’라는 이중적인 곤혹스러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평이함과 재미’라는 것이 미성년자들에게 ‘공포’와 ‘분노’라는 정념을 교육시키는 한편, ‘피해자’의 논리를 단순하게 답습하게 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미성년에게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가 재현되어 있는 텍스트는 ‘공포’와 ‘분노’를 교육받는 정념 교육의 매체일 수 있으며, 재현의 통한 정념의 교육이 민족주의와 공동체 의식을 감각하게 하는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와 접근이 전무하다는 것은 안타깝고 놀라운 일이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재현되어 있는 한국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린이/청소년 문학에 재현되어 있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술의 특징과 서술을 분석한다. 첫째 이들 어린이/청소년 문학은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채택하는 용어에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할 때 '성노예'라고 하기 보다는 '할머니'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어린이/청소년 독자와 일본군 위안부와의 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위안소에서 성을 유린당했던 일본군 위안부를 "할머니"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내 가족이 피해당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감정과 태도에 대해 학습하게 된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를 재현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 문학은 액자식 구성을 통해서 일본군 위안부의 경험을 다음 세대와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는 구성이 흔하다. 이러한 구성적 특징은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작품들이 일본군 위안부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역사적 사실을 다음 세대에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이 끝나고 40년이 넘는 생애 기간을 괄호 속에 넣어버리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전쟁 당시의 위안부 경험에만 주목하고 당시의 감정, 정념만을 미성년자에게 그대로 전수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방법은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를 재현하는 대부분의 매체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일 수 있다.

 

본 연구에서 다루게 될 텍스트는 이규희의 창작집 <두 할머니의 비밀>(주니어 김영사, 2004)와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네버엔딩스토리, 2010)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소재의 어린이/청소년 문학이다. 이규희는 2000년대 이후 한-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동화작품들을 써내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 두 작품에서는 다음 세대들에게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들이 겪었던 일들의 느낌과 감정들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해주려는 서사 전략들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두 할머니의 비밀>에서 주인공은 <나눔의 집>에서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지만, 친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에서는 주인공이 성추행을 당했을 때의 느낌과 병치시키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있다.

 

본 연구는 위의 예로 든 작품들을 토대로 교육되고 있는 정념들(분노, 슬픔, 공포)들을 분석하고 그것이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어떤 구조로 피해자 서사, 민족주의등의 확대된 공감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어린이/청소년 문학에 재현되어 있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분석은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식적 역사 교과서의 분석과는 다른 차원에서 중요하다. 다음 세대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라는 살아있는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이/청소년에게 문화적 파워를 가진 위안부 재현 문학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이/ 청소년이 요즘 가장 많이 보는 매체는 학습 만화이다. 길고 지루하게 느끼기 쉬운 역사를 재미있는 그림과 설명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어린이/청소년들이 역사 분야의 고전들도 쉽게 접촉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 학습만화에서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를 설명할 때 반드시 일본군 위안부가 설명되어 있다. 만화에서의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군이 재현되는 방식은 그림과 함께 분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인 일본군 위안부의 만화 재현은 왜곡되기 쉽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학습만화에서의 일본군 재현은 다루지 못하였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로 미뤄두기로 한다.

 

 

 

 

 

 

 

子供・青少年の文学に再現された日本軍「慰安婦」の研究

情念の教育を通じる共感的な共同体の生産方式に関して

ジャン・スヒ

 公的な歴史を構成し、代表するといえる歴史教科書の記述に対する日・韓の間の比較研究は1997年の日本の「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の発足と、2001年の日本教科書の検定以後、もっと深化して来た。このような歴史教科書の歴史叙述に対する比較研究の中でも日本軍「慰安婦」の問題は日・韓の間で大きい論点になって来た。一方、日本軍「慰安婦」が再現された小説と映画に対する研究も様々に進行されて来た。単に歴史学の分野だけでなく外国文学、韓国文学などの分野で深みのある成果を得た。このように、学生たちは日本軍「慰安婦」の内容が記述された歴史教科書で勉強し、文学と映画などのパワーがある文化的な媒体を通じて再現されながら「再現の政治」、「再現の倫理」のような話題を私たちに与あたえた。

 本の研究は韓国の子供・青少年向きの本に再現された日本軍「慰安婦」の分析を通じる「再現の倫理」に関するのだ。子供・青少年に大きな影響力のある媒体は公教育で使われている教科書というより童詩(どうし)、童話、小説、マンガなどの文化的な媒体だ。公教育の媒体の歴史記述の分析が国家や特定な圧力団体の立場を現わすことなら、「未成年者」という受容者を考慮して単純に再現される童詩、童話、小説、マンガなどの文化的な媒体は「歴史の正確な伝達」と「易しさと楽しみ」という二重的な困惑の間に位地している。また、この「易しさと楽しみ」というものが未成年者たちに「恐怖」と「怒り」という情念を教育させる一方、’被害者’の論理を単純に踏襲するようになる可能性を抱えている。言い換えれば、未成年にとって「日本軍慰安婦」が再現されているテキストは「恐怖」と「怒り」を教えられる情念教育の媒体になりきれる他、再現を通じた情念の教育が民族主義と共同体意識を感ずるようにするのにどれほど効果的なのかを見せられることだと思われる。しかし、これに対する研究と接近が全くないということは切なくて驚くべきだ。

 

 まず、本の論文では日本軍「慰安婦」が再現されている韓国の子供・青少年向きの文学に関して論じることにする。そして、子供・青少年の文学に再現されている日本軍「慰安婦」に関する記述的な特徴と叙述を分析する。第一、これらの子供・青少年向きの文学に再現されている日本軍「慰安婦」の証言を基にする。また、採択される単語に対しては日本軍「慰安婦」を表現する際「性奴隷」というより「ハルモ二(おばあちゃん)」としているが、これは子供・青少年たちである読者と日本軍「慰安婦」との関係から出たと思われる。しかし過去に慰安所で性を蹂躙された日本軍「慰安婦」を「ハルモ二」という単語を使うことで、自分の家族が被害された時の感情と態度を学習するようになる。第三、日本軍「慰安婦」を再現している子供・青少年向きの文学は枠物語、すなわち、日本軍「慰安婦」の経験を次の世代との会話で伝える形が一般的だ。このような構成の特徴は先に述べたように、この作品たちが日本軍「慰安婦」の口述を基にして書かれたこと、歴史の事実を次の世代に説明しようとする意図のためだと思われる。
 

しかしこのような叙述の方法は日本軍慰安婦(いあんふ)が戦争が終わって40年以上の生涯を括弧で括る機能を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戦争当時の慰安婦の経験だけ注目し、当時の感情、パトスだけを未成年者にそのまま伝える効果を表す。このような方法は子供/青少年を対象する文学作品だけではなく、日本軍慰安婦を再現する対部分のメディアが持っている危険かもしれない。

 当研究で扱うテキストはイギュヒの創作集の『二人のお祖母さんの秘密』(ジュニア김영사,2004)と『砂時計になった慰安婦のお祖母さん』(ネバーエンディングスーリー 2010)をはじめとして日本軍慰安婦をネタにした子供/青少年文学である。イギュヒは2000年代以降韓日の歴史を中心にした童話作品を書き続けている。そして特にこの二つの作品では次世代に日本軍慰安婦らが味わった事件の感じと感情がどんなものであるかを感じさせる叙述の戦略を使っている。たとえば、次のようなものである。『二人のお祖母さんの秘密』で主人公は<ナヌム(=分わかち合あい)の家>であったお祖母さんの話に悲しむが、祖母が日本軍慰安婦だったのを知るようになるものである。また『砂時計になった慰安婦のお祖母さん』では主人子がセクハラにあった場合の感じと併置しながら日本軍慰安婦が味わったごとを説いている。

 当研究は例にした作品を元に教えているパトス(怒り、悲しみ、恐怖)を分析してそれらがどのような影響力を持て、どのようなメカニズムで被害者に対する叙事、民族主義などの広がっている共感の共同体をどのように作るのかを分析するつもりだ。
子供/青少年文学に再現している日本軍慰安婦に対する分析は国家的な範囲で進行している公式的な歴史教科書の分析とは違う範囲で重要だ。次世代が日本軍の慰安婦に対する歴史的な事実だけではなく、日本軍の慰安婦という生きている歴史を向かい合う姿勢に対して悩まれるネタを与えるからだ。それゆえに、子供/青少年に文化的な力を持っている慰安婦の再現の文学に対する分析と研究は必ず必要だ。

 

 子供/青少年が最近一番良くみるメディアは学習マンガである。長いし、退屈に感じがちの歴史をおもしろい絵と説明で読まれるから子供/青少年たちが歴史分野の古典も読みやすくなる。1990年代以降の学習マンガで日本統治時代末の戦時体制を説明するとき必ず日本軍慰安婦が説明されている。マンガでの日本軍慰安婦と日本軍が再現される方法は絵と一緒に分析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ような分析が皆無な状況で無分別で無批判的な日本軍慰安婦と関するマンガでの再現は歪曲されるがちからだ。当研究では学習マンガでの日本軍の再現は扱わなかった。この分野に対しては次の研究に持ち込んでお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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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の怒り  作家 熊谷達也

(4月16日(土)の『河北新報』朝刊)

 

 

 3月11日の巨大地震と大津波以後、「想定外」「想定を超えている」という言葉が、この国はどれだけ飛び交っていた事か。メディアを通してそれを耳にするたびに、最初から私は腹が立って仕方がなかったしいまだに腹立ちは続いている。

 沿岸部の被災地の人々は、あるいは、私を含め、東北に生きる事で同じ痛みを抱え、困難な未来を共に引き受けようと覚悟している者は、誰一人として「想定外」という言葉は口にしていない。例え確かにそうだと思っていても、目の当たりにした数々の光景はそんな簡単な一言で片付けられるはづがなく、無言を貫くか、懸命になってちがう言葉を捜そうとするかの、どちらかだ。

 人間は何をどう想定しようと、人知をはるかに超えた力を、時に暴力という形で解き放つのが自然だという事を、私たち東北人は誰に教えられることなく知っている。だからこそ私たち東北人は、自然に対して謙虚に向き合い、その厳しさに耐えることを当然としていき続けてきた。だから今回の震災に対しても、失ったもののあまりの大きさに嘆きこそすれ、恨む事はしていない。ただ黙々とその日に出来る事をひとつづつ積み重ね、日常を取り戻すための辛抱をするだけだ。

 だが、内に抱える腹立ちや怒りを今回ばかりは遠慮せずに言葉にしてはいいのではないか。それほど、東京を中心とした首都圏から発信される言葉は、下品なまでに卑しく、呆れ果てるものが多いからだ。ここまで言葉に傷つけられ、それでも黙っている事は、もう出来ない。今回だけは、東北人はキレていい。誰もキレなくても、私はキレる。

 例えば震災直後、大きな決断をしましたと言わんばかりに「2万人の自衛隊員を派遣する」と発表したこの国の政府。その後すぐに「5万」と変更したと思うが、冗談じゃない。被災地にいる我々は、2万はおろか5万だってぜんぜん足りない、最低でも10万は必要だと、誰もが直感的に思ったはずだ。

 

 

 メディアがこぞって原発事故ばかりを騒ぎ立てている間にも、助けようとしたら助けられたかもしれない命が、瓦礫の下でどれだけの数、失われていった事か。暴走しようとする原発を宥めるべく、現場に身を置き続ける作業員や自衛隊員、消防隊員には敬意を払う。しかし、冷たい雪になぶられる瓦礫を、なすすべなく見つめるしかなかった私たちには、東京の放射線騒ぎや計画停電なんかどうでもよかった。燃料の尽きた底冷えのする避難所で空腹を抱えていた被災者はもちろん、同じ寒風の下で幼い子どもの手を引き、愚痴をもらさず何時間もスーパーマーケットに並んでいた仙台市民も、東京のバカ騒ぎに対して、好い加減にしろっ、と心の内では吐き捨てていた。

 東京に電気を送るために、私たちは進んで原発を引き受けたのではない。原発なんかなくても暮らす事は出来ていた。原発がなくては暮らせないように東北の村を作り変えたのは、首都圏のエゴイズムだ。今度原発を作る時には、東京湾に作ればいい。原発道路なんか、私たちには必要ない。

 あるいは、今後は津波の来ない場所に町を再建すべきだと、訳知り顔で言ってのけるものもいる。何度津浪が来ようと、海のそばでしか暮らせない人々の、その気持ちがなぜ分からない。いつも海を見ていた人々の心の在り方に、どうして思いが至らないのか。

 もちろん、東京人だって、私たちの痛みを同じ目線で共有しようとしてくれている人々がいることを、一緒に痛みを引き受けようとしてくれている人々が沢山い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る。しかし、それを差し引いても、私の腹立ちが収まる気配は一向にない。「想定外」などという、想像力のかけらもない安易な言葉に、これ以上傷つけられるのはもう沢山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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