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세미나>를 여는 책,  <권력과 저항> 리뷰(사토 요시우키, 김상운 옮김, 난장, 2012)

:구조주의를 넘어서 권력에 대한 저항 전략을 구성하라!”

 

아프꼼에서는 7월 중순부터 푸코세미나를 새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따뜻하게 응답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이 모임은 다양한 전공 분야의 선생님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꼼의 얼굴이신 권명아 선생님 이하 아프꼼이 계속해가는 로컬래인(local 來人)의 길에 새로운 래인커머(來人/Rain Comer)로 합류한 저 김명주와 최성희 선생님, 영화 매체와 더불어 서양현대사를 전공하시는 조원옥 선생님, 프랑스 현대사상과 접속하며 영문학을 전공하시는 사공일 선생님, 푸코 전공자로서 한창 논문을 만드는 과정 중인 안현수 선생님, 그리고 아프꼼의 과거와 현재를 든든히 받혀주고 있는 신현아 선생님, 김선우 선생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 기획은 푸코 저작을 모두 훑어보는 것이었으나 세미나의 기조를 잡는 책으로 <권력과 저항>을 먼저 읽으면서 <감시와 처벌>부터 저작 및 강의록을 순차적으로 읽어가기로 했습니다. 그와 병행해서 필요한 글들을 따로 읽는 일들이 끼어들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푸코를 새로이 혹은 다시 읽는 과정이 우리 시대의 화급한 정치적 과제에 대해서나 조금 더 장기적인 과제인 공동의 삶을 구성해나가는 과제에 많은 문제를 제기하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리뷰를 연재하는 과정이 어떤 모색의 과정이길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현대 프랑스철학과 그 정치철학적 쓸모?

 

애초에 잠시 유행 현상인양 폄훼하던 시선이 겸연쩍게도 프랑스산() 철학은 여전히 우리 인문학계를 장악(?)하고 있고 그 시효 만료를 예견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랑시에르, 바디우, 낭시 등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세대 철학자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고 네그리, 지젝, 바우만, 아감벤 등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우리시대의 정치철학을 구성 중인 이들 역시 프랑스 현대사상과의 직/간접적 영향 관계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 프랑스 사유가 확보한 생존력과 별개로 이 사유가 우리시대에 던지고 있는 적실성과 유효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 <권력과 저항>은 현대 프랑스 사유가 갖는 정치철학적 쓸모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 책은 1990년대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알튀세르 이하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 네 명의 철학자들을 중심에 두고 이들의 사유를 구조주의적 권력이론에 대한 저항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 저자의 의도는 일단 무리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이는데, 이처럼 그 의도를 달성하는 데에는 앞서 언급한 네 철학자들을 상대하는 공동의 카운터파트너를 설정한 데 힘입었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자크 라캉이다. 이 확고부동의 맷집을 지닌 라캉을 반대축으로 해서 서로 다른 사유 내용과 지향을 지녔다고 보이는 철학자들을 모으고 그들 사유의 맥락을 자신의 방식으로 독해하는 솜씨는 관전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

저자가 지닌 문제의식은 실은 우리 인문학계가 공유했던 현대 프랑스 사유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집필 동기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푸코의 권력 이론을 통해 우리를 주체로 생산하고 일상적 실천 속에서 주체를 계속 재생산하는 미시권력의 메커니즘, 즉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이 사회 도처에서 그물망처럼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도, 그와 동시에 이런 식으로 우리를 주체로 생산/재생산하는 권력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 이론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물론 저자의 우려는 단순히 프랑스권 사유의 유효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권력이론에 대한 비판 이론이 대응 가능한 방법론을 구성할 수 있는가 여부에 있다. , “권력에 의해 생산된 주체가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전략이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내재적인 방법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일각의 주체로의 회귀론(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주체’, 뤽 페리나 알랭 르노의 근대적 주체’)이 반복될 것이고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혁명적 성과도 은폐되어 버릴 것이라는점이다.

 

구조주의적 권력이론과 저항 전략의 구성

 

저자는 구조주의적 사유를 저항 전략으로 구성하기 위해 소위 구조주의적 권력이론을 재해석한다. 그것은 주체는 자기 자신이 내면화하고 받아들인 권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하는 것으로 정식화된다(26). 이를 위해 저자는 1부에서 푸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통해 권력장치들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는 푸코의 권력이론이 제출한 일종의 아포리아, 즉 권력에 대한 저항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내재적 비판이 구성한 비인칭적 역량에 의한 생성(‘경제론적 주체’)이라는 전혀 다른 주체 개념을 가능한 하나의 대안으로 본다. 이 주체는 자본주의 경제와 리비도 경제의 접합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푸코는 자기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 후기 푸코의 전회는 규율권력에 의해 형성된 반동적 자아에 대한 저항의 거점을 탐색한다. 즉 신체, 자기를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이질성으로 변용함으로써 어떤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장치들은 복종화된 주체를 생산/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구조, 사회구성체도 생산/재생산한다 점에서 구조의 재생산에 저항하는 단절'rupture의 사유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조변동의 이론이 주체의 이론과 더불어 제시되어야만 하는데, 이 문제는 2부에서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감당하지 못했던  권력장치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를 변형하는 차원에서 구조변동과 우발성의 문제를고찰하는 데리다와 알튀세르를 통해 그 사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저자가 구성하는 권력에 대한 두 가지 저항 전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의 주체적 양상의 변용과 특이성의 구축. 2)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우발성의 침입이 일으키는 구조의 생성변화.

1) 첫 번째 전략은 저항을 주체의 복종화된 양상에 변형을 가하면서 이루어진다. 각각 푸코는 그것을 자기로의 생성’, 들뢰즈/가타리는 타자로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하나의 공통된 저항의 양태를 발견할 수 있다. , 그들에게 저항은 주체의 양상, ‘사유와 삶의 양식을 변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복종화된 주체가 자신의 특이성을 구축함으로써(푸코), 혹은 비인칭적 특이성들을 해방함으로써(들뢰즈/가타리) 자신의 사유와 삶의 스타일을 변형하는 내재성의 구축을 사유하고 있다.

2) 앞서 지적했듯이, 두 번째 저항 전략은 권력장치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변형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런 구조의 생성변화 가능성을 사유하기 위해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우발성개념에 주목한 것인데, 이때 우발성구조의 정적인 재생산을 교란할 수 있는 요소, 즉 재생산 과정의 타자를 가리킨다.”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구조의 생성변화는 정치와 경제라는 상이한 심급 사이의 갈등 관계에서 사유된다. , 주요(경제적) 모순과 종속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모순이 각자의 역할을 바꾸고 융합되는 전위압축과정에서 우발성의 침입 또는 법칙성의 일탈[편위]라는 마주침, 사건으로서의 물질성의 침입에 의해 법칙을 일탈시키는 구조의 생성변화가 초래될 수 있다. 결국 알튀세르에게 생성변화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재 국면, 현재의 정치적 경향(복합상황)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와 달리 데리다가 제시하는 정치적 전략은 전혀 다른 데서 찾아진다. 그것은 현재의 사회에 타자를 무제한으로 수용함으로써 국가주권이라는 잔혹성의 체제를 교란하고 타자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소위 무저항의 저항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증여, 용서, 환대 같은 개념으로 제기된다. 이러한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저항은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진정으로 임박한정치적 명령이 된다. , “도래할 민주주의의 약속은 도래할 사건적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사회에서 저항하라는 정언명령을 구성한다.”(322) 여기서 저자는 데리다적인 도래할 사건의 시간성과 사건과 현재의 저항이라는 이접적인 구성과 알튀세르의 현재 국면의 사건이 시도하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저항을 운명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 읽는다. 사회적 재생산이 사회구성체에 편재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호명에 의거한다면, 라캉적 정신분석 이론은 운명적으로 결정된 주체와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무시간적인 구조를 제공해주었고, 그것은 곧 운명의 철학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구조주의란 운명적 방식으로 결정된 구조와 주체 양태의 변형에 관한 이론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즉, 이 운명적 결정에 대해 푸코, 들뢰즈/가타리는 내재성의 구축을 통한 주체의 복종화된 양태를, 알튀세르와 데리다는 사건이라는 물질성의 침입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고정화된 구조를 변용하고자 했다(324).

 

김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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