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윤리란 무엇인가?

 

 

오영진

 

 

 우선 윤인로의 작업에 대해 비평을 하기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이상이나 김수영같은 작가는 한국문학연구자에게 일종의 해석학적 쟁투가 벌어지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전자는 특유의 난해함과 수수께끼로 이루어진 ‘미로’로서, 후자는 무엇이든 떼어 잘라먹을 수 있는 ‘먹기 좋은 빵’이 풍부한 ‘곳간’으로서 말이다. 말하자면 ‘이상’연구는 21세기를 넘어선 지금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힐리스 밀러라면 이것이야 말로 탈출 불가능한 텍스트의 미로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해석을 거미줄에 얽혀 있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으로 은유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해석은 오히려 그 거미줄에 또 다른 줄을 첨가하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해 미로를 탈출하기는커녕 미로를 건설하게 된다. 비아냥이 아니다. 문학해석학의 무한한 동력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상은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지칭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詩는 절멸의 시대에 던지는 메시아의 메시지로 이해된다. 이는 그와 기독교 표상 간 문제를 다룸에 있어 ‘이상’이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배치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상의 사도로서 그 계보 속에 무의식적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수많은 이상의 사도들을 보아왔다. 시인 이상이 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복원하여 복음으로서 전달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아온 이들의 역사를 연구사 검토라는 이름으로 마주한다. 윤인로의 글에도 이러한 사도들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는 이 계보 속에 놓이게 되는가? 이 점에서 윤인로의 작업의 의미가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해석학이 아니라 윤리학으로서 ‘이상’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윤인로’라는 사도의 윤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2회연재분). 읽기 행위는 감응을 통해 존경심뿐 아니라 책임감을 낳는다. ‘이상’을 읽고 난 후 우리는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니까 ‘이상’의 텍스트는 수수께끼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서 작동한다. 바흐친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미하일 바흐친,『예술과 책임』, 『말의 미학』, 길, 2006. p. 25.)

 반면, 이러한 언급은 어떠한가?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서 풍자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상문학이 1930년대라는 시대를 타고 넘어서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이다. 이제 남은 일은 페가수스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일이다. (중략) 이상을 20세기 1930년대로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된다.”(정정호, 「이상시의 “이상한 가역반응”」,『비평문학』제 38호, 2010. p. 503.) ‘이상’의 사도들은 왜 ‘이상’을 보편-세계문학으로 위치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는가? 그리고 왜 이 작업은 자신의 불행이 아닌 식민지 근대, 아니 나아가 근대성 전체와 싸웠던 메시아가 되는 방식으로만 이상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같은 태도야말로 ‘이상’이 제기했던 질문을 의미 있게 반복하는 일을 막는다. 단지 센티멘탈한 ‘이상’을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상연구에 있어 ‘순교’라는 레토릭을, ‘원한’을 제거해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령제를 지내지는 말자는 말이다.

 다행히 윤인로는 ‘이상’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상’을 경유해 ‘지금’-‘여기’를 바라보려 한다. 그는 ‘이상’의 ‘도주’에 대해 말하다가도 ‘김진숙’의 ‘점거’에 대해 논한다. 이 둘은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 난데없는 침입이야말로 ‘이상’이라는 문제제기가 온당히 반복되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가 ‘이상’을 파국의 지형도 속에 넣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고, 초인의 시선을 부여하고, 절멸이자 구원의 시를 노래하게 하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것이야말로 어디까지 오염된 것인지도 모르는 후쿠시마의 방사능과 프레카리아트들의 불안과 냉소, 냉전질서의 반복조짐, 부정선거의 음모 등이 난무하는 ‘지금’-‘여기’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도의 윤리란 신의 말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반복시키는 일에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까마귀가, 엑스레이의 투시가, 예수 아니 바울이 다시 필요한 것이다.

 시인들은 종종 성인의 페르소나를 사용한다 자신의 시집을 ‘새로운 성경’이라고 부르며 사랑의 이미지를 주조한 월트 휘트먼의 ‘예수’, 지천명의 윤리 속에서 자기성찰을 꾀한 김수영의 ‘공자’, 시인이란 세계를 주유(周遊)하며 보살피는 ‘석가’나 ‘수운’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역설한 신동엽이 그렇다. 이들에게 성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자기이해 그리고 그로 인해 세워지는 새로운 “도덕질서의 이미지”(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음, 2010. p. 49.)까지 포함한다. 윤인로는 이상에게 ‘예수’의 페르소나가 있으며, 이는 세계의 파국을 목전에 직감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작동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의 부스러기를 구원하자는 목소리가 아니다. 대신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수행한다. 그는 근대의 속도를 제어하기보다는 가속화한다.

 그런데 이 속도는 빛의 속도를 지향하고 급기야 제로로 향한다. 먼 과거를 불러들여 마취시키는 ‘향수의 시’가 아니라 미래를 가속화시키는 ‘미래의 시’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속도에 중독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속도를 제로로 돌리기 위해 되려 빛의 속도를 지향한다. 폴 비릴리오에 의하면 원형의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달리는 일은 실상 정지상태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지는 빛의 속도와도 같을 것이다. 윤인로가 논하는 ‘도주-속도’와 ‘점거-정지’의 변증법은 이런 논리에서 성립하는 듯 보인다. 마리네티가 속도의 미학을 통해 윤리를 사상시켰다면, 이상은 속도의 윤리학을 통해 미학을 부숴버린다. 윤인로에 의하면 이러한 파괴가 시인에게 ‘장래’에 대한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하고 강제한다. 즉 아름다움이 아닌 책임을 안긴다.

 또 이러한 자기소멸은 도착적인 죽음충동이 아닐 것이다. “갈갈이 찢어진 사도의 몸이 법을 기립시키고 재정초하는 장소”(5회 연재분)가 되기 때문이다. 각혈에 물든 이상의 몸은 병리학적 대상이 아니라 “분만된 보석”이 매번 거듭 탄생하는 장소인 것이다. 여기에 작동하는 메시아의 윤리는 아버지-신의 명령을 따라 죽어야 할 운명에 직감하고 체념한 일이 아니다. 윤인로에 의하면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윤인로는 시인 이상에 대해 속도중독이 아닌 초속도-정지로, 도착적 죽음충동이 아닌 (반복적으로) 도래할 역사의 기다림으로 그 이해의 축을 변경하고 있다. 이는 이상 텍스트 해석학에 한 조각을 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인로의 글은 시인 ‘이상’의 문학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한 비교연구 같은 것도 아니다. 특정한 종교적 표상이 작품 속에 반복되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대신 임박한 파국에 맞서는 윤리적 주체를 ‘이상’을 통해 고민해보는 일은 중요하다.

윤인로의 글은 해석학의 놀이가 아니라 윤리학의 명령을 수행중인 것이다. 대체로 윤인로의 기획에 동의를 하는 듯 보이는 필자의 글은 그러나 그 모자란 만큼의 차액을 내놓기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오영진 : 현대시를 연구하면서 동시에 문화론으로도 그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최근엔 당대의 감정의 구조같은 것을 포착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문화평론가(잡지 쿨트라2014 봄호 데뷔), 수유너머N 회원, 인문학협동조합 교육복지위원장

 

 

 

 

 

 

 

 

 

 

 

 

구원에 대하여

윤인로 선생님의 <차생윤회>에 덧붙이는 글

 

 

심 미 영

 

 

인간은 절망한다. 더 깊이 절망한다. 절망이 곧 삶이고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삶을 존속시킨다. 구원받고 싶다. 구원은 없다. 절망 가운데 구원을 생각한다. 카프카의 짧은 글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남자처럼 우리는 법의 문 앞에서 영원히 들어가길 기다리다 그렇게 죽어 사라질 존재. 희미한 형상으로 남아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사실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것으로 쓰러질 안타까운 모두.

이상의 차생윤회(此生輪廻)를 보며 동시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윤인로 선생님이 언젠가 수업 시간에 설명한 부분 중 하나.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도둑놈 중 한 명이 구원받은 동시에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는다. 지독한 생의 굴레. 혹은 그야말로 차생윤회.

 

블라디미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블라디미르의 물음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측정한다. 복음서를 쓴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12.5%가 된다. 8분의 1의 구원 가능성과 8분의 7의 절망.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이 1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 사실 1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이 물음과 이상의 차생윤회(此生輪廻)를 병치시킨다.

 

(3,6), (9,4), (5,3) 등과 같이 모눈종이 위에 하나의 점으로 표상되는 삶들. 계산 가능해지고 하나의 오차없이 추적 할 수 있는 삶들.

 

()과 율()의 조절적 관리 및 정비를 통한 통치 환경의 최적화 상태 속에서, 다시 말해 안전 메커니즘속에서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다버리게 되는 사람들, 이른바 인구.

 

구획 가능하고 측정 가능 한, 숫자로 환원되는 삶. 이름하야 우리는 인구. 인류라는 이름을 지우고, 인구라는 이름표를 가슴팍에 붙이고서, 01 사이를 오가며, ()을 진단한다. 그 속에 포함될 수 없는,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삶을 경멸한다. 하나의 좌표로 내 생의 위치를 점찍고 그 점에서 다음 점으로, 또 하나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렇게 생은 연속된다. 그러므로 삶은 피로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는 건 피로하다. 목표가 없는 삶을 사는 것(좌표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3,6)이라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음 (9,4)로 나아가기까지 우리는 8분의 7의 절망 속에서 8분의 1이라는 구원을 꿈꾼다. 삶은 숫자다. 구원은 확률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사실 그 무엇보다 사는 게 무섭다. 또 공포다.

이상도 그러한 공포를 마주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모든 중간들은 지독히도 춥다.”는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윤인로 선생님은 그 중간이 폐기된 결과가 차생윤회라고 했지만, 중간을 폐기하고 무너진 이상에 나는 더욱 몰입한다.

 

하루 종로를 오르내리는 동안에 세 번 적선을 베푼 일이 있다. () 기록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한푼 받아들고 연해 고개를 끄덕이고 꽁무니를 빼는 꼴을 보면서 네 놈 덕에 내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알기나 아니?’하고 심히 궁한 허영심에서 고소하였다. 자신 역() 지상에 살 자격이 그리 없다는 것을 가끔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를 먹여 살리는 내 상부구조가 또 이렇게 만족해하겠지하고 소름이 연 쫙 끼쳤다. 그때의 나는 틀림없이 어떤 점잖은 분들의 허영심과 생활 원동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꾸멀꾸멀하는 거지적() 존재구나 불이 번쩍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 차생윤회)

 

나는 거지에게 적선하며 너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나 또한 저 거지와 다를 바 없이 누군가 자신 때문에 사람노릇 한다는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내가 타자를 동정하는 동시에 나는 타자가 되어 동정받는다. 그 공포. 결국 거지적 존재로 밖에 살 수 없는 비루먹을 삶. 그래도 나는 거지보다는 나은 인생을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위안이 결국 나를 향한 화살이자 괴로움이 된다. 자본의 절대적 힘 아래 비호를 받는 자가 돼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비웃던 거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는, 지독히도 추운 중간. 그 추위를 비단 이상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세대, 현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그 중간에 있으니까. 결국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다버리게 되는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구원과 절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최근 구원이라는 키워드에 빠져 산다. 이따금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의 종착엔 항상 절망밖에 없다. 이렇게 살 바에야 목을 매겠다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말에 나도 목을 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살고 싶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구원을 믿고 싶다는 말이다. 절망과 구원 사이에 끼여 생을 연명한다. 절망 가운데 다시 구원을 믿는다. 12.5%의 구원에 대한 확률이 아니라 01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그 구원을 믿는다. 믿고 싶다.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3년 소설창작연구회 회장

심미영

 

 

 

 

 

 

 

 

 

 

(design by 김비)




4회: 이상과 바울

 

 

 

 

 

 

윤인로

 

 

1

 

기존 세계의 끝이자 다른 세계의 시작인 새벽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것. 앞선 「오감도 7호의 묵시적 최후, 그 끝에 붙인 이상의 표현으로는 천량(天亮)이올때까지”(1: 61). 새벽, 천량. 이른바 어떤 서광. 벅차게 밝아오는 그 빛을 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리아의 수탉이며, 그 울음소리이다. 이상은 씨네포엠의 형식을 가진 대낮(‘건축무한육면각체연작 중 하나)에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ELEVATER FOR AMERICA/ / 세 마리의닭은화문석의층계이다. 룸펜과 모포(毛布)/ / 삘딩이토해내는신문배달부의무리. 도시계획의암시/ / 둘째번의정오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워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있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태양군(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시인/ 꼭끼오./ 순간(瞬間) 자기(磁器)와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1: 79)

 

파편화된 이미지-컷들의 점프 혹은 변주 속에서 의미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아메리카는 이상이 말하는 동경, 뉴욕, 런던과 같은 근대의 한 정점을 가리킨다. 엘리베이터는 그런 아메리카를 향해 수직으로, 그러므로 직선으로 상승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 기계학, 과학, 수학의 메타포다. 이와 함께 빌딩, 신문, 도시계획, 룸펜 등의 단어들이 단일한 의미망을 이루고 있다. 이상의 대낮은 근대의 대낮을, 근대의 그 벌건 정오를, 근대의 벌거벗은 정점을, 줄여 말해 근대성의 나신(裸身)을 문제시한다. 그런 시선에 「날개」의 결말부에 나오는 정오 싸이렌이 맞닿는다. “이때 뚜하고 정오 싸이렌이울었다. 사람들은 모도 네활개를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것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2: 290) 유리, 강철, 대리석, 지폐, 잉크는대낮의 신문, 빌딩, 엘리베이터, 미국, 도시계획과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 이 계열 곁에 이상이 말하는 이 있다. 날지 못하고 퍼덕이고만 있다. 백화점 상품진열대에서 이상이 맡았던 비누향 또는 비누거품으로 청결히 세척되고만 있다. 그런데 이상은 그런 닭들이 개미집에 모여서 콘크리트를 먹고 있다고 쓴다. 그 개미집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그 개미집이다. 이른바 수정궁또는 ‘2×2=4’의 합리적 세계, 그것이 개미집이다. 유리와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수정궁이라는 개미집, 그 근대적 건축, 건축적 근대 속에서 그 건축의 일부인 콘크리트를 파먹고 있는 이상의 닭, 고지하는 닭/시인. 그 시인은 항시 얼룩고양이 같은 아웃사이더로 태양군의 틈새를 쏘다니고 거닌다. 근대적 대도시를 환히 밝힌 태양의 빛들이 더 이상 내려쬐지 않는 시공간들을, 그 빛의 군집 바깥을 찾아 쏘다니는 시인. 그 시인/반신(半神)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으로 말미암아, 개미집의 붕괴와 최후를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꼭끼오’, 바로 그 순간. 이상은 그 순간의 고지에 의해 근대의 대낮을 보증하는 태양과는 다른 태양,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혹은 자기와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고 적었다. 이상의 수탉은 근대의 대낮을 중지시키는, 자기로 된 태양의 출현을, 새로운 새벽의 도래를 고지한다. “삽짝문을나설라치면언제어느때향선(香線)과같은황혼(黃昏)은벌써왔다는소식이냐, 수탉아, 되도록순사가오기전에고개숙으린채미미한대로울어다오, 태양은이유도없이사보타아지를자행하고있는것은전연사건이외의일이아니면아니된다.”(1: 49) 이상에겐 근대의 정오/정점, 그 대낮의 극한적 현란은 이미 벌써 황혼을 맞아 잦아들거나 누그러들고 있다. 이상이라는 까마귀는 그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 그런 황혼 속에서 근대적 현란의 극한을 최종의 징후로, 끝의 기미로, 형질전환의 임계로 인지하는 이상이라는 수탉이 그 순간 고지의 울음을 운다. ‘부활의 때가 갈리아 수탉의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라고 했던 건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다르게 비상시키려 했던 청년 마르크스였다. 이상은 수탉을 불러 말한다. 미미하고 미약한 상황 그대로 울어달라고. 이상은 새로운 태양, 새로운 광속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세력, 새로운 태양의 사보타지를 획책하고 사주하는 세력, 줄여 말해 을 영원히 유보하는 전()-종말론적 힘의 연락망을 수탉의 사건적 고지를 통해 파열시키려 한다. 이상의 수탉은 조종소리로 운다. 그 울음이 자기로 된 태양을 발생시킨다. 자기 혹은 질그릇은 바울의 어휘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마음속을 비추시어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후서, 4: 6~7)

 

이상이라는 불세출의 그리스도’, 그의 얼굴은 여기는 폐허다라는 문장(「자화상」)으로 표현된바 있다. 자기로 된 태양은 그런 폐허에서 발생하고 출현하는 절대적 신성을 인지하도록 이끄는 밝은 빛이다. 이상과 바울에겐, 이상이라는 사도에겐 그 빛이 바로 보물이며, 그것은 질그릇속에서만 간직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보화, 보물에 대한 한 가지 주석은 다음과 같다. “[보물이란 사건 그 자체, 즉 너무도 불안정한 어떤 일이 일어났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그것과 동질적인 불안정함 속에 겸허하게 지녀야 한다. 세 번째 담론그리스도교은 약함 속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그것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고스도, 표징도,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의한 황홀경도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담론은 자체의 실제적인 내용 말고는 아무런 위세도 없이 공공연한 행동과 가식 없는 선언이라는 초라한 투박함만을 가질 것이다. (…) 질그릇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107쪽]깨지기 쉬운 자기로 된 태양()은 이른바 진리(가 개창되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 사건적 진리란 불안정함과 위기, 위태, 줄여 말해 약함의 속성 안에서만 발생되고 관철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약함의 보존이다. 교조화되고 경화된 혁명의 담론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을 통한 다른 목표의 수행에 방점을 찍는다. 그때 혁명은 언제나 매개적인 것으로, 궁극의 목적달성에 비추어 늘 예비적이고 수단적인 것으로 전치되고 전락한다. ‘약함이란 그런 단순한 매개와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거절한다. 약함은 그런 수단적 지위를 항상적인 불안정과 위기 속에 놓이도록 한다. 약함은 혁명을 혁명 그 자체의 보존과 지속으로 관철시키려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약함 속에서 완성되는 사건, 그 진리공정의 신학정치에 관해서는 윤인로, 철탑 아래로 도래중인 것2013720, 울산의 기록」, 격월간 말과활2(201310~11월호)를 참조. 그 약함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고 사기그릇이다. 그 약함이 바로 질그릇 속에 간직된 신성의 빛이며 사기그릇 속에 보존된 새로운 태양()이다. 그 빛들은 목적-수단의 위계를 부숨으로써 목적의 군림 속에서 이뤄지는 이윤축적을 중단시키고, 목적/율법에 의해 동원되고 환수된 힘들을 되돌려 회복시킨다. “바울에게그리고 이상에게] 그리스도는, 혁명을 정치적 진리의 자족적인 시퀀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래이다. 그리고 기존의 담론 체계들을 중단시키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즉자적으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우리가 율법에서 풀려나는 것이 그것이다.”[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97 도래중인 그리스도, 그리스도라는 도래. 다시 말해 율법화된 레짐으로부터 매일 매회 놓여나고 풀려나는 시공간의 개창 혹은 임재. 이를 위해 보존해야 할 것은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안의 보물, 그 약함, 그 게발트이다.

 

 

2

 

다시 한 번, 대낮을 찢는 닭의 울음소리를 인용하자. ‘꼭끼오./ 순간 자기와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 이번엔 방점을 순간(瞬間)’이라는 시어에 찍으려 한다. 닭의 울음, 바로 그 고지의 순간은 이상이 말하는 도래중인 나의 역사신학을 관통하는 시간감, 별안간’ ‘바야흐로’ ‘금시에’ ‘불원간’ ‘미구에등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이상의 순간이란 한 체제의 통치이성이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제작해내고 신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려는 과정을 중단시키는 때이다. 순간또한 바울의 어휘다. 바울? 그렇다, 사도 바울. 하지만 바울과 이상이 말했던 그 순간이란 바울과 이상의 폭력적 이면을 되겨누는 것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린도전서, 15: 51~53)

 

우리 모두가 잠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 깨어있는 자들, 이른바 메시아의 초병들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최후를 고지하는 마지막 나팔소리가 답파하리라는 것. 그 양각나팔(Shofar)의 음파 혹은 주파 속에서, 다시 말해 그 순식간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은 변신과 전환의 임계에 육박한다. 위의 52절은 위기의 특징들을 표현하고 있다. “52절은 모든 시간을 종적(縱的)으로 파기하며 돌입하는 이 위기의 주목할 만한 특징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눌 수 없는 순간().”[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전경연 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60] 복창한다. 나눌 수 없는 순간, 분할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순간. 나눌 수 없다는 건 느낌과 사고와 행동의 을 지배적 힘의 입맛에 맞게 분절하거나 할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순간이란 해질 수 없는 시간이며, -바깥(으로)의 힘이며, 그 계산불가능성으로 추동되고 준동되는 시간이다. 바울과 이상의 순간은 그렇게 끝내 환원되거나 환수되지 않고 끝까지 잔류하고 잔존하는 잔여와 잔당의 시간, 끝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순간은 유혈적 셈법의 체제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시간이다. 억제되거나 억류될 수 없는 그 차이의 시간 안에서, 매회 끝을 선포하는 지금-여기가 개창된다고 했던 건 마르크스의 독자/상속자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들의 순간은 모든 분절되고 할당된 시간들, 그 위계적 질서를 종적으로내리치고 파기하며 돌입하고 있는 폭력적 위기로서, 지고의 주권적 게발트로서, 이른바 부활의 사건으로서 장전되고 있다.

 

그런 위기의 두 번째 특징은 갑작스러움이다. 뜻밖에 갑자기, 이른바 홀연(忽然)의 시간. ‘-이라는 것은 합의되고 합성된 의미들의 연락망 바깥을 말하는바, 그 바깥이라는 제헌적/구성권력적 성분에 의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하고 산 자들은 변신한다. 부활과 변신, “그것은 다른 역사를 뚫고 그의 길을 가는 구원사이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60~1] 뚫으며 답파하는 구원사(救援史). 이상의 최후작에 속하는 종생기에는 나는 날마다 운명하였다.”(2: 368)는 문장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매회 죽었다가 매번 다시 깨어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상에게 종()과 생()은 한 가지로 반복된다. 첫 소설 십이월십이일에는 만인을위한신은엄슴니다 그러나 자긔한사람의신은누구나잇슴니다”(2: 116)라고 말하는 ’, “만인의 신! 나의 신! ! 무죄!”(2: 120)라고 외치는 그가 있다. 그는 이상의 분신 중 일부이며, 인제죽을때가도라왓나보다! 아니 참으로사라야할날이도라왓나보다!() 이제야 최후로 새우주가 그의앞에는전개되엿든 것이다.”(2: 146)라는 문장 속의 인물이다. 그렇게 이상 소설의 처음과 끝은 최후적 심판과 부활의 이미지로 관통되고 있다. 이상 문학의 주조음으로서의 구원사적 성분.

 

위의 52절이 표현하는 위기의 세 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셋째: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 이것이 이 위기의 결정적 표징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나팔소리는 명령의 신호이다!) () 실로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만 예비적 경고조가 아니라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즉각 출발과 순종을 촉구한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61쪽] 바울의 마지막 나팔소리, 신이 원하기에 신의 절대적 명령으로 발효되는 그 지고한 징후 및 신호는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조종소리와 고지하는 닭울음소리, 더불어 이상이 발하는 여러 최후적 정언명령들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바울과 이상의 묵시적 대음향들은 대지를 구획한 법의 할당된 권역들을 싸그리 일소하는 위기로서 종적으로 내리쳐진다. 그 위기의 음들, 리듬들, 파문들은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폭력, 절대적이고도 지고한 주권으로 즉각 대지의 법륜을 갈아 끼워지도록 촉구하고 강제한다. 바울과 이상, 그들 두 사도가 중시하는 순간이란 바로 그렇게 내리치는 위기/묵시의 힘이며, 그런 한에서 그 힘은 또 하나의 순간, 지금(Jetzt)’의 시간과 만난다. “인식 가능한 지금[Jetzt] 속에서의 이미지는 모든 해독의 기반을 이루는 위기적이며 위험한 순간의 각인을 최고도로 유지하고 있다. () 이 지금 속에서 진리에는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Ⅰ』,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1056 바로 지금’, 다시 말해 정초되고 보존된 기왕의 법계를 폭발 직전에 끌어다 놓는 진리-시간, 이상이 말하는 금시(今時)’바야흐로의 시간. 그것들은 위기적 순간들로 각인된 시간, 그 각인이 최고도로 유지, 지속, 보존되는 시간, 이른바 파루시아의 시간이다. 이 완성, 모든 죽음의 소멸은 그리스도의 최고, 최후의 주권 행위다. 아직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26 복창한다. 아직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

 

파루시아, 임재의 사건은 완수되거나 완성되지 않고 매번 그 완수와 완성을 부결시키고 부정하는 아직 아닌(not yet)’의 시간으로 도래한다. 파루시아의 사건은 언제나 이미 자신의 기각과 기소로 도래하므로, 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매번 직전(直前)에 있는 것이다. 직전에 있고 미-래이므로 바울과 이상은 기다린다. 저 닭울음소리에 뒤이어진 새벽빛 천량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을 고요한 내적 수양이나 마냥 엎드린 기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이란, 기다림의 메시아 정치란, 눈앞에 이미(already)’ 도래해 있는 임재의 사건과 각성의 시간을 꽉 붙잡고 파지한 채로, 그 사건의 완성과 완수를 매번 기각하면서 그 파국적 사건성을 최고도로 지속하려는 항구적인 기도(企圖)이다. 이상의 그런 신학적/정치적 기도는 불안의 정조가 흐르던 성천의 깊은 밤, 「산촌여정」의 한 문장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공기는수정처럼맑아서 별빗만으로라도 넉넉이 조와하는 누가복음도읽을수잇슬것갓슴니다.”(3: 45) 왜 「누가복음」인가.

 

 

3

 

임박한 임재, 도래중인 끝. 그 임박함, 그 도래를 표현하는 두 복음서의 두 문장은 이런 것이다. 이른바 때가 찼다.”(「마가복음」, 1: 15)라는 한 문장과 이상이 별빛 아래서 읽고 있었던 곧 끝이 오는 것은 아니다”(「누가복음, 21: 9)라는 한 문장. 때가 찼다는 건 이미에 이어진다. 아직 끝이 온 게 아니라는 건 아직 아닌에 이어진다. 성천의 이상은 때가 찼다고 말하는 마가의 그리스도를 따라 삶을 지닌 모든 것은 모두 피를 말려 쓰러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3: 203)라고 적었다. 그것은 누가의 계시록, 곧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 합의된 가치체계가 때가 이르면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누가복음, 21: 6)고 했던 누가의 그리스도와 맞닿는다. 그런 한에서, 지금 이상은 마가와 누가가 공동으로 그려놓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그 두 복음서의 을 향한 공통적 시간감 속에 들어있다. 그러하되, 바로 그런 시간감을 문제시하는 것이 곧 끝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누가복음이고 이상은 그런 누가복음을 좋아한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일소되리라는 말에 곧바로 이어진 문장들을 보자.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좇지 말라”(누가복음, 21: 7~8)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때가 찼다고 말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외투를 입은 적그리스도. ()에 의해 설계된 상황을 구제의 상황이 아니라고, 임재가 아니라고, 도래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시간, 시간들. 임재 안의 반()-임재, 도래 안의 비-도래를 항구적으로 판별하고 결정하고 각성해내는 순간, 순간들. 이상에게 누가복음은 그 시간 그 순간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성천의 이상은 (내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화평이 아니라 불을 던지고 분쟁케 하려는’(누가복음, 21: 51) 신적 힘의 발생을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 “[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 49)라는 아직 아닌의 상황 속에서 목격하고 경험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 이미 안의 아직, 아직 안의 이미. 파루시아의 상황이 발생하는 때가 그와 같다. 바로 그 때, 그 파루시아의 힘은 끝을 영원히 유예하고 지연시키는 자들과, 그 유예를 통해 축적하는 자들과, 다시 말해 그들의 체제, 그 전()-종말론적 레짐과 항구적인 적대에 돌입한다. 바로 그 항구적 적대의 전장(arena)을 보존하고 지속하는 일. 그것이 기다림의 메시아 정치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3: 215) 기다린다는 것의 뜻과 의지가 그와 같다. 이미와 아직 사이로 도래중인 새벽, 천량, 서광.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 주권을 함께 관철시키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다는 문장을 여러 번 사용한다. 썩을 몸이 다시는 썩지 않을 구원을 입으리라는 것, 죽을 것이 불사의 시간과 부활의 사건을 입으리라는 것도 그런 옷 입음의 신학에 이어진 것이다. ‘왜 오늘 바울인가라는 물음에, 바울 의인(義認)론의 구체적 실천 현장의 중요성과 그 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성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답하고 있는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바울의 옷 입음론을 두고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바울 식의 옷 입음론은 보는 이보이는 이라는 이분법을 가정하고 있다. 한데 자신이 보이는 이라면, ‘보는 이는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언정 결코 자신과 대면할 수 없는 존재, 곧 타자다. 그이는 실제로는 무한정의 거리에 있다. 그이는 실제로는 우리와는 결단코 유사해질 수 없는 전지전능의 존재다. () 하여 그런 이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이의 은총(charis)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이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순종(hypakoe)을 의미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바울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바울의 신학은 전능한 보는 이앞에서의 삶의 수동성을 내포한다.[김진호, 「죄론과 시선의 규율권력, 리부팅 바울』, 삼인, 2013, 230

 

문자로 된 유대주의의 율법이 내면을 만들었을 때, 신은 인간의 그 내면성과 죄업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는 보는 이의 시선으로 그 인간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보는 이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보이는 자로 모듈할 때, 다시 말해 보는 이의 시선에 자기 의지의 격률을 동일시하고 순종할 때, 그는 선민(選民)이 되고 죄인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은 회당 체제 안의 유대인, 자유인, 남성이 자신들의 신성한 권리를 옹립하기 위해 이방인, 노예, 여성을 하위의 주체들로, 타락한 죄인들로 배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른바 유대주의의 죄인-선민 메커니즘’. 이를 적으로 설정하고 비판하기 위한 방책이 바울의 옷 입음론이었던바, 그것이 실은 적의 논리와 생리를 내재적으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게 김진호의 생각이다. 보는 이와 보이는 이의 날카로운 분리 속에서 자기의 옷 입음을 주시하는 보는 이의 시선에 자기를 일방적으로 동일화하는 삶. 바울의 논법이 생산한 삶이 그와 같다. 적과 단절하려는 의지가 적을 반복하게 하는 상황. 적을 극복하려는 기도가 적과의 내밀한 연루 속에서만 관철되고 있었던 실황. 그 곤혹과 곤욕. 바울의 옷 입음론은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주체 생산의 매커니즘을 배태하고 있었다. 삶에 외재적으로 주어지고 시혜되는 은총, 삶과 무한정한 거리로 이격되어 있는 신, 삶과 완벽하게 분리된 초월적 신성, 다시 말해 대면할 수 없는 신, 붕 뜬 신. 지상의 의미연관을 거세한 구원, 지상의 고통에 눈감는 전지전능. 그것들이 삶을 수동적인 것으로, 항구적인 하위의 것으로 제작해낸다. 그리고 거기에 파시즘의 운동원리가 있다. “파시즘은 바로 이런 신성화된 권력의 순응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개념이다.”[김진호, 죄론과 시선의 규율권력, 231 이상이 말하는 살신(殺神)에의 의지가 바로 그런 신성화된 권력의 작동에 소송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다시 전면에 내세워야 할 이상의 텍스트는 이상 자신의 곤혹스런 이면 혹은 정면 차생윤회」이다. 거듭 인용했었던 그 텍스트의 핵심어들을 상기해 주셨으면 한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표를 한 장 만들면 다음과 같다.

 

 

바울

이상

마지막 나팔소리

고지하는 닭울음소리

순식간/홀연히

순간/바야흐로

부활/불사

날마다 운명함, 살아야할 날이 돌아옴

옷 입음론

초인법률초월론

복종적 주체 생산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광인, 전염병자, 주정꾼, 걸인

신성화된 권력, 파시즘

모종의 권력, 일제학살, 결단적 우생학

「고린도전서」, 15: 53

「차생윤회」

 

 

이렇게 두 번 질문하자. 이상은 불세출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자인가. 이상 안에서 이상 자신의 그 옷 입음을 응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상은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이다. 그 옷 입음을 주시하는 그 보는 이의 시선-권력은 법률을 초월하는 이른바 초인의 것이다. 지금 이상은 그 초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모듈하고 동일시하는 중이다. 「차생윤회영웅적 결단(英斷)’을 통해 법-바깥을 개시하는 초인의 힘에 이상 자신을 오차 없이 포개는 과정의 폭력적 속성을 노출한다. 우생학적 결단, 일제학살. 다시 말해 피, , 정상과 병리의 분리, 광기에 들리고 술에 절고 불로(不勞)에 빠진 자들의 거대한 일소, 최종적 절멸. 그런 초인의 권력이 모종(某種)’의 것인 까닭은 그 권력이 이상 자신 안에 있는 초인의 것이면서도, 실은 이상 자신이 결코 마주하거나 만날 수 없는 무한정한 거리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동일시하려는 자기 안의 초인은 끝끝내 그런 동일시를 수락하지 않는다. 동일시는 항구적으로 유예되며 대리보충된다. 그 과정에서 이상은 지상에서의 자기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이격된 초인의 볼모가 된다. 붕 뜬 초인, 지상에 부재하는 초인의 전지전능은 모조된 구원을 선포하면서 그 선포에 동조(同調)되는 힘으로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삶을 생산한다. 이른바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은 그러므로 일조일석에 싸그리 말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항구적으로 양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상은 자신이 했던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 속에서 이상의 초인은 위조된 구원의 체제, 곧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을 동력으로 옹립되는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설계하고 제작한다. 그때 구원(Erlösung)은 절멸(Endlösung)과 등가적이며 등질적으로 된다. 구원은 분명 절멸과 동시적이어야 하지만, 그 절멸이 이상의 초인에 의한 절멸일 수는 없다. 오늘 근대라는 체제로부터의 구원은 분명 절멸과 동시적이어야 하지만, 그 절멸은 이상의 초인이 살해되는 상황 속에서의 절멸이 아니면 안 된다. 차생윤회의 이상은 근대라는 체제에 보증을 서면서 구속되어 있는 볼모이자 죄인이다. 죄수 이상은 수인(囚人)이만들은소정원」에서 이렇게 적었다. “()를내어버리고싶다. 죄를내어던지고싶다.”(1: 153) 속죄, 죄로부터의 속량. 그것은 자신이 봉헌하는 자기 안의 초인에 대한 동일시를 중단함으로써 초인의 그 시선-권력을 절단하는 일에서 출발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중단, 그 절단의 힘은 이상의 무엇에서 발생하고 발족하는가. 그 힘은 이상의 권태, 권태의 신학정치에서 발원하고 발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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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연재를 마치며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6회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애써주신 웹진 <아프꼼>의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안다고 믿고 싶지만, 그 앎이 저의 단선적인 앎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충격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충격을 완충할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충격에 섬세하게 파괴될 수 있는 생활의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학위논문에서 부분적으로 뽑아낸 단락들로 연재를 이어간 것이라 비약이 심했을 터입니다. 글 전체를 읽어주십시요, 라고 무릅쓰고 부탁드리고 싶은 까닭은 비약의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해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글 전체에 산재해 있을 다른 문제들의 증폭과 증여를 위해서입니다.

 

 

 

 

 

 

 

 

 

 

 

 

 

 

 

 

 

 

(design by 김비)




3회: 각혈하는 몸이란 무엇인가

 

 

 

 

윤인로

 

 

 

1) 단편 「지도의 암실」에 나오는 한 대목, 묵시적 끝의 통찰. “태양은제온도에조을닐 것이다 쏘다트릴것이다 사람은딱정벌러지처럼뛸것이다 따뜻할것이다 넘어질것이다 색깜한피조각이뗑그렁소리를내이며 떨어져깨여질것이다 땅우에눌어부틀것이다 내음새가날것이다 구들것이다 사람의피부에검은빗으로 도금을올닐것이다 사람은부듸질 것이다 소리가날것이다/ 사원에서종소리가걸어올것이다 오다가여긔서놀고갈것이다 놀다가가지안이할것이다.”(2: 154) 지도 제작술의 근대를 암흑의 암실로 인지하는 묵시적 힘. 그것은 가시지 않고 보존되는 사원의 종소리, 매회 매번으로 지속되는 신의 조종소리로 번지고 퍼진다. 증식하는 조종소리. 거기에 가브리엘 천사를 가브리엘천사균으로 적었던 이상의 근거와 맥락이 있다. 각혈의 아침중 한 대목을 보자.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 가브리엘천사균(天使菌) (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 이 살균제(殺菌劑)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담(血痰)이었다(?)(1: 208)

 

이상은 야만적인 법률을 침식하는 광부를 세균이라고 표현했고, 속이는 법의 저울을 달아 재는 신의 저울은 대천사 가브리엘의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광부/세균과 하나의 계열체를 이루는 것은 법에 대한 기소과정 속에서이며, 그런 사정을 응축한 말이 가브리엘천사균이다. 이상에게 균(), 세균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사상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세균학의 창시자 로베르토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던 1882년 이래 세균은 병원체(病原體)’였다. 그것은 의학 사상의 패러다임만 바꾼 게 아니라 정치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사고의 틀도 바꾸었다. 병든 국가를 치료해야한다는 말, 사회의 암적 존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일상의 말에서 드러나는 건, 그 말들이 정치의 문제를 제1원인을 찾는 병원체의 사상에 근거해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학적 사상 속에서 국가의 암적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만하는 것이 된다. 없으니까 없다고 진단되는 게 아니라 늘 개발되고 발굴되어야만 된다. 병원체라는 의학적 사상은 정치적 데마고기의 힘이다. 이상에게 세균은 병원체가 아니었다. 이상에게 세균은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었다. 병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정치적 이면을 투시했던 이가 이상이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2) 이상은 결핵균이 사는 장소로서의 자신의 몸을 진단하는 의사들을 곳곳에서 신성의 이름으로 언급한다. “의사믿기를 하는님같이하는 그”(병상이후」, 3: 140), “예언자”(병상이후」, 3: 139), “반왜소형(胖矮小形)의 신()”(오감도 5호」, 1: 90), “하이한천사”(내과」, 1: 156), “()베드로”(각혈의 아침」, 1: 209)가 그런 예들이다. 과학적인/절대적인 의학적 지식을 위임받아 대행하는 의사의 진단과 치료란 그 자체로 신적 권능을 지닌 것이다. 그들의 진단은 병의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알다시피 원래 하나의 원인을 확정지으려는 사상이야말로 신학형이상학적인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141] ‘의사가 곧 성직자라고 했던 건 계보학의 빛으로 계몽된 근대의 암실을 비추었던 푸코였다. 이상이 자신의 몸을 결핵균의 감염으로 진단하던 의사를 신성의 이름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사야말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힘의 절대적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와 동시에 의사 앞에 앉은 이가 진단과 치료의 단순한 대상으로 되는 과정을 문제시했다는 것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이상에게 의사는 사목(司牧)하는 목자였으며, 환자는 의사라는 목자의 보살핌과 계도를 치료와 구원의 아우라 속에서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신자였다. 이상은 의사와 환자의 그런 관계 속에서 의학적 형상-질료 도식으로 된 근대성의 위-(-)를 투시했다. 병의 근본원인을 찾는 의사/목자의 진단과 구원의 과정은 그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병의 발생과 등가적인 것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원인이 먼저 있어서 병이 발생된 게 아니라, 그 병을 병이라고 진단하고 확정하기 위해 원인은 사후적으로 그 병과 등가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성한 제1원인을 찾는 병원체의 사상은 세속화된 신으로서의 화폐장치의 발생 및 운동과 상동적이다. 풀어 말해, 등가화될 수 있는 것들이 먼저 있고 그 다음으로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생긴 게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등가화될 수 없는 것들을 등가화될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확립해간 과정과 병원체의 사상은 유비적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하나의 계열 안에서 등가적인 것으로 될 수 없는 병원체와 병은 의학이라는 신학적 프로파간다에 의해 등가화되는 것이다. 병원체라는 사상은 의학 안에서 이뤄지는 화폐적 등가화의 과정이다. 그 의학적/화폐적 전도와 전치를, 그 유혈적 과정의 재생산을 보증하는 병원체의 사상을, 세균의 이데올로기를, -계에 봉헌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균을 살균(殺菌)’하는 일. 줄여 말해 세균이라는 제1을 박멸시키는 일. ‘가브리엘천사균이라는 살균제가 그 일을 행한다.

 

3) 이상에게 병이란 통계화(census) 가능한 상태로서의 국세(國勢)를 증진시키기 위한 내치의 중심요소로서의 의료시스템에 의해 진단분류되는 것이었다. 병은 어떤 분류표, 기호론적 체계에 의해 존재하며, 그런 한에서 병은 원래 시작부터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143쪽]이었다. 중앙집중화된 의료체계에 의해 분류된 병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이미 언제나 절대적으로 받들어야할 국민건강이라는 의학적/정치적/신학적 의미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다. 자신의 병에 대한 의사의 진단행위에서 이상은 그렇게 분류된 의미의 위압성을 인지했다. 이상이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라고 적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히스테리의 몸이 의미의 질서에 한 조각, 한 지대의 시니피앙스-결여를 관철시키는 정치적 비판의 몸이었듯, 이상의 자기 진단된 병든 몸 또한 그러하다. 앞서 인용한각혈의 아침」에서의 가브리엘천사균은 각혈한 이상이 자신의 피와 가래에 섞인 폐결핵균을 표현한 것이다. 그 자기 진단은 그 자체로 의학적/정치적 병원체의 사상이 만든 의미의 매트릭스에 하나의 결여와 구멍으로서 발생하는 시니피앙스-결여(a-signifance)이며, 그것의 수행이고, (‘a-’)의 융기이자 기립이다. 그때 이상의 결핵은 국세의 내치에 봉헌하는 의미의 카테고리를 절단하는 병이 된다. 그때 이상의 폐결핵균은 세고 재고 쪼개는 저울로서 임재하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된다. 그렇게 이상의 병은 표준적 분류법을 깨고 그 바깥을 개시하는 신학적/정치적 비판의 의미를 획득하고 구성한다. ‘책임의사로서 스스로를 진단하던 진단 0:1의 소멸과 파국의 그 제로, 그 공백은 이미 좌표 바깥을 향해 있는 의미로서의 병의 한 사례이기도 했다(1회 연재분 참조).

 

4) 앞서 인용한 얼마 안되는 변해에서 문제의 별빛을 채광하던 그 광부, 파국의 파편들을 채집하고 수집하던 그 광부로 돌아오자. 그는 별빛의 광산을 채굴하는 자다. 그의 그 채굴은 폐허는 봄”(1: 200)이라고 말하는 자, 폐허로서의 봄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가 수행하는 굴착과 한 계열을 이룬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묻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나는 흙을 판다 // 흙속에는 봄의 식자(植字)가 있다// 지상에 봄이 만재(滿載)될 때 내가 묻은 것은 광맥(鑛脈)이 되는 것이다 (…) 봄이 아주 와버렸을 때에는 나는 나의 광굴(鑛窟)의 문을 굳게 닫을까 한다.”(1: 201) ‘을 파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묻은 자. 지금 그는 자신의 그 모든 것이 흙속에 있는 폐허로서의 봄의 파편들과 혼재되는 시간 속에 있다. 광부가 별빛을 채광하고 수집하듯, 그는 흩어진 봄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재배열함으로써 의미를 현현시키는 식자공이다. 이상은 산촌여정에서 낱글자들로 성경을 제작하고 있는 식자공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바 있으며, 그런 한에서 봄의 파편들로 구성되는 그 의미란 신성과 결합해 있다. 식자공/광부는 흙 혹은 지상, 이른바 대지의 법과 의미의 질서를 굴착하는 자다. 다시 한 번, 그는 지구를굴착하라”(1: 77)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지하생활자였다.

 

5) 이상이라는 광부는 임박한 폐허로서의 봄이 대지에 쉼 없이 누적되고 적재될 때 자신이 굴착한 지하와 거기에 묻은 자신의 모든 것이 빛들로 된 광맥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폐허라는 봄, 거듭 도래중인 그 파국의 봄이 이미-벌써 아주 와버린 것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그 봄의 임재가 완료완결완수된 사태로 마무리되고 말 때 그는 자신의 그 지하라는 장소, 광굴이 봉쇄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에게 봄이란 무엇인가. 매번-매회 도래하는, 항구적으로 임재하는 메시아적인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광부는 최후의 종언을 기다리는 사도다. “폐허가된육신을 가진 사도, “갈갈이 찌어진 사도(使徒)”. 풍마우세(風磨雨洗)로 저절로다말라 업서지고”(3: 58) “마멸되는 몸”(1: 112). 이상은 앞서 폐허는 봄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하나의 계열체가 만들어진다. 폐허=, 폐허=, 폐허===메시아적인 것. 폐허는 이상 자신의 몸이기도 했다. 그 몸이 곧 봄이다. 그 봄/몸이 곧 메시아적인 것이며 제헌적인 것이다. 갈갈이 찢어진 몸, 사도의 몸, 사도적 몸이 법을 기립시키고 재정초하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몸이 폐허가 되고, 찢어지고, 다 말라 없어지고, 마멸된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이건 () 신의 심판과도 같다. 신은 사라지지만, 그 뒤에 자기의 심판을 남겨둔다.”[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31쪽]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 그 신의 심판은 언제 어떻게 도래하는가. 매번의 사라짐을 통해 매회 도래한다. 부과된 법의 지상에서 거듭 사라짐으로써, 다시 말해 관리되는 의미의 대지를 굴착해 만든 지하에서의 생활을 지속하고 보존함으로써 매회 도래하는 게 최후의 종언이다. 얼마 안되는 변해의 마지막 한 대목은 폭열(爆裂)하는 몸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몸은 무언가를 분만하는 중이다.

 

그는 아득하였다./ 그의 뇌수는 거의 생식기처럼 흥분하였다. 당장이라도 폭열할 것만 같은 동통(疼痛)이 그의 중축(中軸)을 엄습하였다./ 이것은 무슨 전조인가?/ 그는 조용히 사각진 달의 채광(採鑛)을 주워서, 그리고는 지식과 법률의 창문을 내렸다. 채광은 그를 싣고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몇억의 세포의 간극을 통과하는 광선은 그를 붕어와 같이 아름답게 하였다./ 순간, 그는 제풀로 비상하게 잘 제련된 보석을 교묘하게 분만하였던 것이다./ 그는 월광의 파편 위에 쓰러졌다.(3: 158)

 

폭발해서 찢어질듯 쑤시고 욱신거리는 몸. 이상에게 자신의 그런 몸은 어떤 전조(前兆)’로 인지된다. 그 기미 혹은 징후는 파국과 끝을 표현할 때 인유되던 과 그 빛들을 그러모으는 광부의 이미지에 이어진 것이다. 세계의 끝 속에서 지식과 법률에 의해 관리되고 구조화된 의미의 질서는 그 문을 닫는다. 법의 암전, 의미의 폐절. 이상이 말하는 전조가 그와 같다. 별과 달의 빛들에 실려 있는 빛나는 몸, ‘-섬광’(낭시)이 바로 그 전조를 실현한다. 당대의 전시상황을 지시하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 “이군웅할거를보라/ 이전쟁을보라/ 그들의알력의발열(發熱)의한복판”(1: 44)에서 이상은 비밀심문실에 구속된 채로 경찰의 취조를 받고 있는 피의자였다. 그 경찰은 이상에게 말한다. “「물론너는광부이니라/ 참고 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과같이광채나고있었다한다.”(1: 75) 전시의 체제로 도래중인 파국, 임박한 훼멸의 시간들을 캐고 수집하고 있는 광부의 몸은 빛으로 되어있다. 몸의 세세한 모든 곳으로 광선이 통과하고 있는 광부. 그는 빛의 인간이며, 그런 한에서 선에관한각서에 나오는 광속의 인간이다. 그가 지금 분만하고 있는 것, 그것이 보석이다. 분만된 그 보석은 어떤 의미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는가. 이 마지막 질문을 위한 또 하나의 분만. “창부가 분만한 사아(死兒)의 피부전면에 문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암호를 해제(解題)하였다. 그 사아의 선조는 옛날에 기관차를 치어서 그 기관차로 하여금 혈액임리, 도망치게 한 당대의 호걸이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1: 191) 무슨 말인가.

 

6) 세리(稅吏)와 창녀. 그들이 가장 먼저 천상으로 들어가리라고 했던 이는마태복음의 그리스도 예수였다. 이상에게 창녀는 때때로 마리아와 결합됨으로써 성창녀(聖娼女)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녀는 성스러움과 속악함을 분리하는 척도적 기준을 작동 정지시키는 비식별역으로서의 경계 영역을 개시하고 구성하는 자다. 창녀가 분만한 아이는 분리와 분류의 무화 속에서 신성을 갖는다. 정전 바깥의 복음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자는 창녀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도마복음105) 창녀와 창녀의 아이는 표준적이므로 지배적인 분류표 속에서 고아, 과부, 병자, 이방인만큼이나 핍박받고 내몰리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진정한 생명을 봉헌하는 이들을 두고 창녀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말씀(logos)은 분류의 기준과 구획의 척도를 전복시킴으로써 분류표의 바깥을, 좌표 바깥을, 다시 말해 분류불가능한 경계의 장소를, 새로운 법과 생명이 정초되는 대지를 설립한다. 창녀의 아들은 그들척도를 들이미는 자들의 눈과 기준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는 새로운 생명기준을 인식한 것이다.”[주원규, 창녀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http://blog.daum./innovator-bay(2013. 8. 16) 도마복음에 대한 주원규의 강해를 통해 그의 소설들을 예감하게 된다.]

 

7) 이상의 창녀가 분만한 아이는 죽은 아이로 드러나되, 피부 전면에 문신이 새겨진 아이로, 몸 전체가 암호인 아이로 드러난다. 그 암호와 그 암호를 해독하는 는 벨사살의 연회장 뒷벽에 적혀있던 신의 암호 같은 문자와 그걸 해독하는 다니엘에 겹쳐진다. 몸피에 새겨진 그 암호라는 것이 핍박받았던 선조들이 기관차와 싸워 승리했던 자들임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던 한, 그 암호는 벨사살을 저울에 달고 그 왕국을 쪼갰던 신의 문자와 상관적이다. 무슨 말인가. 선조들과 기관차의 충돌이 문제이다. 알려진 한 대목.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356쪽]이상이 말하는 선조들은 혁명이라는 기관차가 견인하는 발전의 역사, 그 직선적 레일을 절단한다. 선조들은 그 기관차의 승객이지만,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겨 그 기관차의 엔진을 끔으로써 그 기관차의 속도를 거스른다. 비상 브레이크로 제동을 거는 그들 억압받던 선조들. 이는 삶의 진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주의적인 입장과 파시즘의 공모 및 묵계를 기각하는 맥락에서 제출된 키워드들이다. 날개의 다음 한 문장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혼미와 혼동과 퇴락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2: 286) 더불어 이상은 3인터내슈날당원들한테서 몰매를 맞는 상황 속에서 지구의 재정이면을 엄밀자세히 검산하는 기회를 얻었다.”(1: 190)고 쓴다. 혁명의 기관차 속에서 이상과 이상의 창녀가 분만한 아이와 그 아이의 선조는 진정한 비상사태의 도래로서 함께 발생하는 중이다. 그들의 한 손은 혁명의 기관차가 주재하는 직선적 발전의 체제, 그 돌벽에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면서,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직선의 레짐을 통째로 세고 재고 쪼개는 최후적 저울을 들었다. 저울 든 그들은 매번 매회 창녀의 아이로서 분만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폭력적 질서에 의해 내팽개쳐진 분란과 불화의 , 그리스도의 그 칼을 다시 집어 드는 자들이며, 화평과 조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혀로 발화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그 작은 칼(小刀)이 거듭 다른 칼들을, 다른 그리스도들을 분만한다. “내동댕이쳐진 小刀는 다시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분만하고 그 小刀가 또……”(1: 155) 칼이 칼을 분만한다. 심판이 심판을, 최후가 최후를 분만한다. 그 항구적인 의 분만들 속에서 누리고 구가하는 새로운 생명이 거듭 탄생한다. 이상이 말하는 분만된 보석의 뜻과 의지가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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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4회: 이상이 읽은 것, 이상의 비교론: 요시다 잇스이, 메피스토펠레스, 지하생활자

 

 

윤인로

 

 

1) 2회 연재분에 들어 있던오감도 4호」의 그 회색 수열, 하늘에서 근대를 투시하는 그 까마귀의 시선은 당대 일본의 전위시 잡지 『시와 시론(詩論)의 요시다 잇스이(吉田一穗)를 변용한 것이다. 이상의 문학과 그 잡지 사이의 관련에 주목한 내실 있는 공동연구서(란명 외, 이상(李箱)적 월경과 시의 생성―『시와 시론』수용 및 그 주변』, 역락, 2010)에는 이상의 영향관계에 대한 세세한 연구들이 들어있는데, 아쉽게도 요시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 잡지의 창간호부터 시를 썼던 요시다의 까마귀를 기르는 차라투스트라」(시와 시론』 11)는 까마귀의 형상에 임재하는 신성의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까마귀()”, “()”, “낙원재흥의 고려”[송민호·김예리 옮김, 란명 외, 앞의 책 부록, 467] 같은 시어들로 의미의 포인트를 삼고 있다. 이는 오감(烏瞰)이라는 신의 시선을 근대적/건축적 체제의 으로의 폭력적 형질전환과 결부시키는 오감도 4호」와 맞닿아 있다. 이에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시 갈까마귀()(시와 시론』 6)1연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 나는 문득 마른 풀 위에 버려진 어떤 한 장의 검은 상의를 발견했다. 나는 또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이형진 옮김, 란명, 앞의 책 부록, 477]. 그 미지의 목소리는 명령한다. 멈춰라, 너의 옷을 벗어라, 벌거벗어라, 그 검은 상의를 주워 입어라, 날아라!, 날아라!, 울어라!……. 까마귀를 입으라고, 까마귀로 비상하라고 명령하는 그 목소리 또한 이상이 말하는 오감의 의미/의지와 상관적이다. 시와 시론』에는 이상의 주요 시어들이 산적해 있다. 거울, 공복, 내과, 뇌수, 나비, 총구, 군화, 앵무, 열풍, , , (), 바둑판 등등. 그러하되 그 시어들은 이상에게선 대부분 철저히 변용되고 있는 것이라서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엄밀히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내적 관련의 강도로 보자면 역시 요시다이며, 그의 신약(新約)(시와 시론』 1)은 이상 문학의 중핵과 만나고 있다.

 

2) 요시다의 신약」 1연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법정에서는 가발을 쓴 법관이 그들의 하늘의 돌을 가지고, 땅의 아들들의 손에 빌려준 망치와 낫을 깨부수었다. 우리들은 곧장 항소했다.”(위의 부록, 451) 하늘의 돌을 쥐고 신성의 외투를 걸친 법관들의 폭력에 의해 깨부수어지는 땅에서의 혁명(망치와 낫). 속죄를 염원하는 수인(囚人) 이상과 같이(수인이 만든 소정원」) 요시다의 인물들은 감옥에서 새로운 해의 출현을 두고, “미래에 목말랐던 젊고 아름다운 한 개의 태양을 두고, “우리들의 신약의 피다!”(451)라고 고함친다. 그 함성을 따르는 마지막 연은 이렇다. “우리들이 올라왔던 곳에 단두대가 있다. 공포에 매혹되었던 자빈코프가, 라 그리마·크리스테(ラグリマ·クリステ: 그리스도의 눈물)의 방순(芳醇)함을 알게 된 것 같이, 그 자신의 순수한 생명의 술잔을 기울이길 다하였다. () [논증과 규정의] 관념론을 부정하고 다시 옛 관념에 빠진 특히 스콜라 냄새 풍기는 유물론자는, 시온의 여인과 검을 가지고 혼약한다. 우리들은 먼저 어떤 사람보다도 자기 내심의 법도를 따라,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자유로운 감성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일 테지, 예로 그것이 우리들의 가는 다마스코에의 길, 피에 목마른 불모의 땅이라고 해도, 내가 감성에 꽃피운 사막의 장미를 찾아낼 것이다.”(455) 유물론과 시온의 결합. 불화의 칼, 그 날끝에서 맹서한 약동하는 혼약. 그렇게 비약(Elan)하는 순수한 생명이 구제를 위한 다마스쿠스에의 길을, 그 불모의 사막을 순례한다. 앞질러 말하건대, 그 순례의 길이 바로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이상이 걸어가는 길이다.

 

3) 요시다에 이어, 이상이 읽었던 파우스트에 대해 내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상의 다음 문장에서 시작하자.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1: 64) 지금부턴 이 문장이 들어 있는 파국의 설계도 다섯 번째 장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영원한 망각은 이름의 분류법을, 할당된 죄의 연관을 거듭 지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정되고 구속된, 대패질되고 못질된,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는 구원된다. 이상에게 이름의 망각은 심판하는 신의 도래이자 그 세속화이다. 그러므로 건망이여라는 부름은 폐지함과 동시에 구원하는 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응대이다. ‘건망이여신이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부름, 그 소명과 함께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수”(1: 48)가 생기를 띤 채로 기립한다. 그런 한에서 숫자의 콤비내이션, 곧 사목적 벡터의 조합을 폭력적으로 삭제하고 송두리째 망각해버리는 인문적 뇌수의 회생과 함께 신의 폭력, 그 최후적 심판의 날은 매번 도래하는 중이다. 그 날을 두고 이상은 속도를 조절하는 날이라고 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불원간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일치하는것은그것들의반복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1: 64) 무슨 뜻인가.

 

4) 속도를 조절하는 날, 자기 구성적 속도를 통해 좌표의 숫자를 지워버리는 바로 그 날, ‘를 모으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 사람이 모으는 나는 누구인가. 이상이 말하는 그 사람은 좌표의 붕괴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었고, 나는 저 ()렌즈를 통과한 방사의 에너지들로 좌표를 붕괴시키는 광선이었다. 지금 좌표의 붕괴, 실재의 개시를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나/광선이라는 파국의 힘을 맞이하고 상봉하는 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는 이상의 또 하나의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그때 그들에겐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1: 63)이었다. 도주하는 속도의 현재 속에서 미래와 과거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수된다다시 한 번 크레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과거에 써진 유서와 미래에 써질 유서를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인지했던 건 크레인을 점거중인 김진숙이었다. 그 현장의 고통, 그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인 김진숙의 점거는 이상이 말하는 도주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현실이 텍스트를 이끈다. 모든 텍스트가 현실보다 덜 긴급한 건 아니지만, 모든 현실은 텍스트보다 조금 더 긴급하다. 이에 대해선 졸고,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 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를 참조http://blog.aladin.co.kr/rororo/5188326 속도를 조절하는 날, ‘무수한 과거현재가 구별될 수 없이 일치하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다음 한 대목을 더 읽자. “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1: 63)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이다. 이상은 악령나갈문이없다.”(1: 218)라고 썼고, 그런 그를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령이라고 지칭했던 건 이상의 죽음에 맞서 그를 추억하던 김기림이었다. 이 변주되고 있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보자. 파우스트의 변심을 놓고 주님과 내기를 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그와 같은 악령들을 단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주님.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가. 파우스트를 꾀기 위해 만났던 그 첫날,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분이지요./ () 나는 항상 부정(否定)하는 정령이외다!/ 그것도 당연한 일인즉, 생성하는 일체의 것은/ 필히 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간단히 말해서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내 본래의 특성이랍니다.”[J. W.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6, 41.] 메피스토펠레스는 항구적인 부정의 정령이다. 그는 생성을 소멸로 견인하는 필연의 법으로서, 불모와 절멸을 인입시키는 죄, 붕괴, 악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게 때문에 신은 그 악령을 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쉽게 느슨해지고 무조건 휴식하려고만 하는 인간들을 각성시키려 했고, 그런 신의 의지를 받들어 대행하는 자가 메피스토펠레스였기 때문이다. 사도 메피스토펠레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악령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였다. 악령은 신의 악역이었다. 그 악령은 신이라는 정(), 이미 합()인 정으로 온통 수렴되는 반()이다. “영원히 창조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창조된 모든 것은 무()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마련이다!”[J. W. 괴테, 『파우스트, 366라는 악령의 말은 이미 언제나 신의 주권적 의지 속에서 발화중인 말이며, 그런 한에서 신의 말의 대언(代言)이다. 이상이 말하는 방사된 나/광선은 그렇게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사도의 임무를 행하는 중이다.

 

5) 그렇게 ()렌즈를 통과한 악령 메피스토펠레스가 바로 무수한 나이다. 그들 수없는 나/악령은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 침묵이 악령의 것인 한, 침묵은 신성의 일이다. 침묵하는 악령들은 축적이라는 목적의 구조 안에서 불-(Un-Zeit)에 발생함으로써 그 목적의 흐름을 중절(中絶)시키고, 목적에 의해 합성되고 편성된 사람과 사물에 성스러운 무효용성’(M. 피카르트)을 선물한다. 무목적적인 침묵, 그것은 목적을 산산이 흩어버리려는 신의 심판에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그렇게 좌표의 노모스를 내리치는 신의 파국의 도래 속에서 좌표의 보존을 위해 통합되고 단일화된 과거는 무수한 과거로 되고, 무수한 과거의 사건들은 서로의 대화를 경청하며, 현재는 그 경청의 상황과 만남으로써, 다시 말해 과거의 유일무이성과 특유함을 보존함으로써 과거와 하나로 합수한다. 그 합수의 상황이 최후의 날, 속도를 조절하는 날의 사건이다. 그 날을 발생시키는 자, 그가 바로 이상이 스스로를 두고 말했던 래도(來到)할 나이다.

 

6) 이상은 「차생윤회」를 비롯한 몇 군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윤식의 진단이 앞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2×2=4의 출입구를 향해 질주할 때 거꾸로 질주하는 한 아이가 이상이다. 공포에 질려 질주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 방향은 서로 역방이었다. 이 점에서 이상 문학은 도스토예프스키, 사도 바울의 계보로 이어졌다.”[김윤식, 이상 문학과 지방성 극복의 과제세계사적 시선 속에서 바라보기」,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년』, 문학사상사, 1998, 47. 바울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로 넘기도록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이상은 근대적 속도, 이른바 질주정의 근대적 건축체제에 소멸과 파국의 제로()를 대치시킨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한다(분량 때문에 여기 세세히 언급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상은 「8씨의 출발」지구를 굴착하라”,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같은 정언명령들로 김기림의 매개를 통해 알게된 마리네티/무솔리니의 질주정을 비판한다. 질주정, 이른바 속도의 통치는 속도의 미학화와 한 몸이다. 마리네티-무솔리니는 조각가-통치자이며, 그 두 쌍은 형상-질료의 짝과 동시적이며 등질적이다. 대중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대중의 우매함과 미결정성을 혐오하고 매도하는 어떤 도착 속에 그들의 절대적 속도가 들어있다. 그런 도착적 속도 위에서 마리네티는 대중이라는 재료를 조각하며, 그 속도의 도착성 속에서 무솔리니는 대중을 이른바 갈채의 도가니로 휘몰아간다. 질주정이라는 신성의 공동정부의 수반들인 마리네티와 무솔리니는 형상-질료라는 착취적 도식을 깨는 자가 아니라 그 도식을 깨기 위한 작업복을 걸치고는 그 도식을 완성시키는 자들이며, 그런 한에서 그들은 그 도식의 적자(嫡子)이자 샴쌍둥이였다. ‘지구를 굴착하라는 정언명령은 그들 절대적 신성의 수반들을, 돌려 말해 질주하는 속도의 적그리스도들을 살해하라는 뜻이자 힘이었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지구를 굴착함으로써 시방 지하의 세계를 개창하고 있는 자, 이른바 파국의 지하생활자. 그는 분류표의 세계 안에 파괴와 붕괴의 게발트로, 방해의 바리케이트로 틈입하면서 어떤 이익을 발생시키는 중이다. “이 이익의 특징은 일체의 분류를 파괴하고, 인류애를 내세우는 자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체계를 송두리째 때려 부수는 데 있다. 요컨대 이 이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1998, 33쪽] 무슨 말인가.

 

7) 지하생활자는 상식과 과학이 가르쳐주면 인간은 그것을 반드시 해득하게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그런 확신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유로운 의욕을 단순한 질료로 치부함으로써 인간을 피아노의 건반이나 휴대용 오르간의 핀같은 것으로 격하한다는 것이다. Z백호가 가르치는 비상의 기예가 일방적으로 해득되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상은 악기의 건반이나 핀이기를 거절하는 지하생활자와 한솥밥을 먹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동거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의욕에 뒤따르는 이익. 다시 말해, 축적이라는 목적에 의해 분류된 좌표의 바깥을 발생시키는 힘에의 의욕이 생산하는 이익. 그 이익이 좌표화된 삶 속에서, 이른바 이름()의 분류 속에서, 환속화한 신의 방조와 묵인 속에서 분리와 분할로 재생산되고 합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숫자의 바둑판을 탄핵한다. 그 좌표-바깥으로의 힘을 향한 지하생활자의 의욕과 의지가 일체의 분류법을 작동 정지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을 앓았던 간질(epilepsy)이 일상의 정상성이 절단되는 시간의 발생이었던 것처럼, 분류법 일반을 폐절시키는 분류불가능한 힘에의 의지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인류애의 이름으로 설계되고 있는 정상적 이익의 생산을 저지하고 중지(picnolepsy)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총파업, 지하생활자의 무위(無爲)”[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28쪽]. 그 사보타지 속에서 분류불가능한/예외적 이익이 재생산되고 향유된다. 그 사보타지의 장소, 주이상스의 자리를 두고 이상은 엘리스의 나라라고 적었다. 거기서 통상의 법은 끝난다. “아리스나라가튼 불가사의한나라에제출된외교문서에 우리들이가지고잇는법률을적용하려고하는 것은 도로(徒勞)요 무효(無效)인줄압니다.”(3: 39)

 

8)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좌표-바깥에의 의지와 의욕을 두고 이성도 비근한 생리작용도 모두 포함하는 인간의 전체생활의 발현인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40쪽]라고 적었다. 이성과 몸의 위계적 이분법을 거절하고 있는 이 문장은 즉각 「8씨의 출발」의 한 문장과 맞닿는다. ‘지구를 굴착하라와 동시적인 또 하나의 정언명령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가 그것이다. 이는 먹고 자고 싸는 몸의 작용을 동물의 영역이자 이성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암흑의 영역이라고 격하시킨 분류법의 지배적 통념과 상식을 내다버리라는 뜻이다. 함께 내다버리면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을 향해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8라는 당위를 제출한다. 무성격적 존재, 또는 무성(無性, nihil-ism)의 존재. 그것은 일체의 분류법과 적대하는 지하생활자들의 파괴적 성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성격적이란 어떤 상태인가. 성격을 특정하거나 고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성격을 특정할 수 있다는 건 성격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류된 성격이란 계산가능성 위에서 규격화한 성태성질이다. 무성격적이란 함부로 좍좍 그어지고 있는 분리선들, 구획들, 돌벽들에 대한 폭력적 망각의 지속이며, 그런 한에서 무성격적 존재란 분류법의 영토 안에 무(nihil)의 치외법권으로, 멸형의 공백(zero)으로 설립되고 기립하는 중이다. 무성격적 존재는 무성(니힐), 공백(영점), 멸형(파국)의 힘을 관철시키는 자다. 분류법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무성은 자기원인적이므로 어떤 절대이다(다시, “절대에모일것”). 절대적 무성은 신성의 한 조건이자 양태이다. 무성격적 지하생활자들의 사보타지, 무위의 힘은 무성의 한 조건이자 무성의 한 표출이었다.

 

9) 재갈물린 지하생활자가 기다리는 그 날, 물린 재갈을 풀고 둑이 터지고 홍수가 난 듯 말할 수 있게 되는 그 날, 그럼으로써 새로운 로고스/노모스를 개창하는 그 날, 다시 말해 지하생활자들이 세상에 뛰쳐나오는 [그]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54 비로소 소멸하게 되는 것은 이론도덕이다. 바로 그 날, “인간 자신의 이익의 체계로 온 인류를 갱생시키려는 이론인간에겐 무언가 도덕적인 훌륭한 의욕이 필요하다는 현인들의 확신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37에 파국의 조종이 울린다. 이론에 의해 보증되는 인간의 이익구조가 인류의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그 어떤 분류법에도 귀속되지 않는 의지. 지배의 현자들/설계자들이 만든 도덕률로부터, 곧 마음을 죄의 생산공장으로 만드는 집단적 도덕률로부터 사람들 스스로를 폭력적으로 떼어내고 성별(聖別)시키는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의욕. 줄여 말해 분류불가능한 무성격/무성에의 의지. 그 의지와 접촉하는 이상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의 내부로 향해서 도덕의 기념비가 무너지면서 쓰러져 버렸다. 중상. 세상은 착오를 전한다.”(1: 191) 착오의 사회를 굴착하면서 밝아지는 아침하늘天亮을 기다리는천량이올때까지”(1: 61) 기다리고 있는이상 곁의 도스토예프스키 곁의 니체 곁의 서광.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9. 지하에서 수행되는 일들을 축적에 봉헌하는 이론과 도덕의 관점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비판으로서의 비평의 하한선 혹은 마지노선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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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2회: 이상의 그리스도, 제로에의 의지


 

윤인로



1) 이상(1910~1937)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렇게 써도 좋을까. 근대와 그 정신의 어떤 불모에서 시작했던 자, 시작과 동시에 좌초를 직감했던 자, 폐허와 공포 속에서 전율할 수만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장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폐허라는 공포 속에서만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의 방법이자 태도였던 기하학으로 충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그런 이상의 형상은 다음 한 문장을 받아쓰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아무런 정신의 땅이 없었던 당시의 현실에 주목해서 바라볼 때, 기독이라든가 기하학으로서의 자기 충전은 충분히 불가피한 분출구였는지 모른다.”[김주연, <시문화의 의미와 한계>, 김용직 편, <이상(李箱)>, 문학과지성사, 1977, 146] 이상의 기독(基督),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각혈의 아침>에서 자신을 불세출의 그리스도라고 치겠다는 한 문장을 보았을 때, 그것은 우스웠고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이 작성한 두 개의 이미지-시에 골몰하면서부터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얼마 안되는 변해>)에 대해, 그 파국에의 의지에 대해 미약한 논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강의실의 학생들에게나 옆 사람에게 거듭 이상의 그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면서 논리를 풀었다. 책임의사 이상이 반복하며 변이시켰던 그 두 개의 진단서, 두 개의 이미지-시란 바로 <진단 0:1>(<조선과 건축>, 1932. 7)<오감도 시 제4>(<조선중앙일보>, 1934. 7)이다.

 


 

   



 

2) <오감도(烏瞰圖)> 또는 <조감도(鳥瞰圖)>. 조감도는 투시도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지적 시점에서의 관찰, 해부, 투시. 그것이 이상의 조감도다. 전지적 조감은 전체를 인지하는 신의 시점과 멀지 않다. 그런 신의 시선을 통해 이상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를 상품의 거대한 집적체로, 그 상품들의 교환 효과로, ‘세계의 세속화된 신으로 경배받는 화폐의 절대적 힘의 관철로 투시(透視)해낸다. 그 투시의 속성은 엑스선(X-ray)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 번쯤 찍어보았으니 얼마간 알지 않는가.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 물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희고 검은 회색의 계열로 드러날 뿐이다. 이상은 이렇게 쓴다.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했고, “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灰色)의명랑한색조”(1: 233)로 현상하게 된다고. 까마귀()의 시선(), 그것은 그렇게 세계를 온통 투시된 회색으로 인지하는 삶의 방법이자 태도다. 일단 이렇게 요약해 놓자. 여기 조감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다. 그 새는 전지적이기에 신적이다. 그 신의 시선은 투시하는 엑스선이다. 식민지의 수도 경성의 모더니티가, 결핵성 뇌매독을 앓는 이상 자신의 몸이, 연인과 우정과 가족이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바로 그 엑스선에 의해 관통되어 이면의 회색으로 드러난다. 이는 이상이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의 위용을 일말의 매혹이나 두려움 없이 앙상한 철골과 유리로, 그것들을 접합하는 수식과 방정식으로 투시했던 것과 등가이다. 이상은 그렇게 투시하며 걷는 까마귀/신이다. 그는 경성의 모더니티 속을 걷는, 혹은 그 위를 날고 있는 산보자이다. 그런데 그가 걷는 곳은 모더니티의 수도파리가 아니었다. 죽었다 깨도 그는 파리의 산보자일 수 없었다(그리고 그 사실조차가 이상의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다). 그는 걷되 모조되거나 위조된 근대의 경성을 걷는 중이다. 걷되 절름발이로 걷는다. “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바리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끗끗내잇다”(1: 99) 절름거리는 신, 불구의 신은 말한다. 무사태평한 근대성이야말로 병원이라고, 치료되어야 할 질환을 가졌음에도 병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 바로 근대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므로 이제 근대라는 질병을 진찰했던 책임의사 이상의 진단서 두 장을, 오감도라는 신의 투시도를 보면 되겠다.

 

3) 위에 인용된 이미지-<오감도 4>의 거꾸로 된 숫자열에 대해서는, 가치체계의 전도(임종국), 수적 환상과 양가치적 표현(김종은), 욕구와 현실의 균형 붕괴(정귀영), 원순열의 선순열로의 치환(송기숙) 등의 해석이 있다. 이상전집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이승훈은 <오감도 4>에서 이분법적 합리주의의 대립들을 읽는다.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대립, 질병과 건강의 대립, 남녀의 대립 등등. 그는 진단의 결과를 가리키는 진단 01’이라는 한 구절에서 무(0)와 유(1)의 대립, 나아가 죽음과 생활의 대립을 읽는다. 이와 같은 독법의 카테고리 안에 <오감도 4>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 또한 들어 있다. 내게 <오감도 4>는 당시 병참학(logistics)의 규율체제로 재편되고 있던 근대성의 운용을 메시아적 파국의 입장에서 재정의하도록 이끄는 텍스트였다. 그런 사정은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다르게 끌어안을 수 있다는 믿음의 조건을 되씹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물으면서 시작하자. 저 두 장의 진단서에 내장된 반복과 차이는 어떤 힘을 내뿜는가.

 

4) <진단 0:1>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둔 월간지에, 일본의 국어로, 김해경이라는 본명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계열로, 시가 아니라 만필로 기고되었다. <오감도 4>는 조선인이 읽는 일간신문에, 조선어로, 본명을 가린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오감도>의 일련번호를 달고서, 시로 기고되었다. 하지만 나열해 놓은 이 차이들의 의미는 끝내 잠정적일 수밖엔 없다. 위의 두 텍스트는 의미의 공백을 품은 채로 기호화되어 있으며, 너무 간소화되어 있고, 그 두 텍스트가 이루고 있는 각각의 계열들 또한 일관된 하나의 의미로 집중되지 않고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진단 0:1>에 있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오감도 4>에는 없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건지는 확정할 수 없다. 통념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없어진 <오감도 4>가 거울 속의 자신을 진찰할 수 없음에 섭섭해하던 이상의 자가진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그 여지 속으로 위의 두 텍스트가 갖는 차이의 효과가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잠정적인 것 속에서도 확실한 것은 위의 두 텍스트를 병치시켰을 때 드러난다. 가만히 보면 <진단 0:1>의 똑바로 선 수열의 데칼코마니된 거울상이 <오감도 4>의 수열임을 알 수 있다. 수리적 합리성의 인과율과 수량화가 근대적 폭력의 원천들 중 하나가 맞는다면, 저 데칼코마니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수열의 의미야말로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한 근대의 질환과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진단 0:1><오감도 4>의 공통적 반복을 가리키는 가장 선명한 한 구절은 이것이다. ‘0으로 도달하는 급수운동’.

 

5)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건축과에서 기본적인 수학과 작도법을 익혔던 이상은 급수라는 것이 일정한 법칙성을 따라 증감하는 수의 배열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자 김명환은 <진단 0:1>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콤마들을 소수점으로 본다. 그때 이상의 수열은 한 줄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10분의 1씩 곱해짐으로써 0으로 수렴해가는 등비급수였다. 수학자의 이상론. “첫째 줄에 모든 숫자가 소수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나열된 것을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의하여 완벽하게 장악된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책임의사 이상은 그러한 합리주의의 질환을 가진 세상의 미래가 소멸하리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명환,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수학기호와 수식의 의미>,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 문학사상사, 1998, 171] 이 한 대목에 들어 있는 합리주의의 질환이란, 이미 이상의 한 구절 1234567890의질환의구명과시적(詩的)인정서의기각처 복창하고 복기한 것이었다. 구절 속에 들어 있는 ‘12345678890’<진단 0:1>의 첫 줄에 있는 수열과 다르지 않다.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시적이고 반성적인 감응의 수수와 증여, 그 마음의 전 과정을 기각해버리는 폭력의 자리. 그렇게 기각하고 소각하지 않으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는 시스템의 운용원리. 바로 그 통치적 합리성이야말로 <진단 0:1>의 수열이 겨냥하고 있는 타켓이다. 삶을 인도하고 견인하고 배양하는 사목적(司牧的) 통치성의 표상으로서의 ‘1234567890’이 가진 호명과 관리의 권력이 ‘0.123456789’로 극소화되는 과정, 그렇게 제로로 수렴해가는 바로 그 과정/소송이란 무엇인가. 이윤을 위한 법, 이윤이라는 법을 향해 직진하는 통치이성의 끝장이며, 그 최후로의 육박이자 그 육박의 궤적이다.

 

6) <진단 0:1><오감도 4>의 병치를 다시 보자. <진단 0:1>의 가로쓰기와는 달리 <오감도 4>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도록 세로쓰기로 인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일간신문의 세로쓰기 편제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진단 0:1>을 데칼코마니한 <오감도 4>가 위에 인용한 이미지 그대로 인쇄될 거라고 예상했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오감도 4>를 인쇄된 그대로 읽으면 <진단 0:1>에 이어져 있는 희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진단 0:1>의 진단서가 ‘1234567890’에서 ‘0.123456789’로 나아가는 제로로의 수렴이었다면, <오감도 4>의 진단서는 ‘1111111111’에서 ‘0000000000’으로의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전환 혹은 전복으로 드러난다. 이상에게 제로()시스템의 절멸이자 재시작을 위한 영도(零度)였다. 그런 한에서, <진단 0:1>제로로의 수렴은 말 그대로 제로로의 무한한 근접이지 아직 제로가 아니며 끝내 제로가 아니다. <진단 0:1>의 제로로의 수렴에 들러붙어 있는 콤마 이하의 수들이 통치하는 힘의 꺼지지 않는 불씨이자 탄력적인 잔여라고 했을 때, <오감도 4>에선 그것조차가 완전히 잘려나가고 없다. 이상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발견한 모든 함수상수의 콤마이하를 잘라없앴다.’ <오감도 4>의 수열, 까마귀/이상의 진단서. 그 고공에서의 전지적 엑스선이라는 신의 시선이 근대적 통치합리성의 폭력을 투시함으로써 작성해 놓은 처방전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런 것이다. 숫자의 소멸’. 소멸하는 숫자, 제로에의 의지. 그것은 분명 역사철학적이다. 아니 역사신학적이다. 이상이 상상하고 감행했던 파국의 역사신학(이에 대해선 다음 연재를 참조). 그것이 절대적 제로의 신성한 힘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성을 겨냥한 것인 한, 그것은 분명 정언명령적이다. ‘절대(絶對)에 모일 것.’ 다시 쓴다. 절대에 모일 것. 그렇게 절대에 모인다는 것은 어떤 신성에의 도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절대적 신성으로 고양된다는 것은 세계의 절멸을 예감하고 기다리며 끝내 고지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폭력에로의 육박이다. 다시 말해 절대에 모일 것이라는 이상의 정언명령은 장치들의 항구성에 종언을 선포하는 절대적 시작의 다른 표현이다. “저항과 메시아주의는 모두 절대적 시작이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다니엘 벤사이드, <저항>, 김은주 옮김, 이후, 2003, 45] 절대적 시작의 게발트. 어떻게 끝날지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러 왔다고 했던 건 <매트릭스>의 부활한 네오였다. 그의 메시아성, 시스템에 대한 그 폭력적 파산과 중지의 도래. 엔딩의 이미지를 이상의 데칼코마니된 진단서 이미지들과 다시 한 번 병치시킴으로써 조금 더 말하자. ‘모든 기구(機構)[system]는 연한(年限)이다.’라는 끝의 선포. 그것은 이상의 것이면서 동시에 네오의 것이었다.

 


 


 

위의 이미지는 네오(the One/‘’)라는 메시아적 힘의 시점으로 본 매트릭스의 통치원리이다. 그것은 무작위적 수의 변환과 구획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이상이 <진단 0:1><오감도 4>의 데칼코마니라는 신의 투시도를 통해 통치의 이면과 원리를 수와 수식으로 인식했던 것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수식의 작용을 정지시키는 ‘FAILURE’란 무엇인가. 시스템에 기능부전과 장애와 불이행과 불신임을 도래시키는 힘, 줄여 말해 최고도의 불복종의 지속을 인입시키는 메시아적 힘의 선포. 그것은 절멸의 제로의 고지이다. 네오와 이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발전소의 그 감옥을, 사막 같은 그 실재(the real)를 함께 체감했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동시대인이다. 그들은 신화적 폭력의 시스템을 걷어치우는 신성한 힘을 통해 축적의 동력으로 은폐되고 저당 잡혀 있던 바로 그 실재를 개시하고 해방한다. 그들의 표현은 신의 힘을 정치적 세속화의 강건한 도상 위로 전용하고 전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리 있는 경로들이다. 그들은 기가 막히는 초월적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이 아니라, 정체성의 분할을 통해 축적하는 시스템의 구획선들을 초과하고 위반하는 자들이다. “신은 우리가 물리적인 분리의 한계를 초월할 때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제임스 롤러, <우리가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184] 그들 신인(神人)이 하는 일이 바로 저 절대적 시작이다. 그들의 끝내주는 시작이 바로 절대적 시작인 것이다.

 

7) 근대의 질환을 진단하던 이상은 <진단 0:1><오감도 4> 사이 <각혈의 아침>(1933. 1. 20)에서 약한 목소리로 자신을 가장 不世出의 그리스도”(1-1: 208)라고 지칭한다. 그를 두고 절대의 애정을 갈구했던 한 프로테스탄트라고 썼던 건 김기림이었다. 그에게 이상은 저 노아의 홍수, 그 칠흑 같은 암야를 뚫고 타는 눈으로 절대를 향해 치달아 올랐던 시인이었다. 그 절대란 무엇인가. 다시 물어,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신의 예감을 체현하고 신의 말을 고지하는 자이다.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그는 적그리스도가 설계한 건축체계 속으로 사멸(死滅)의 가나안, ‘도시의 붕락(崩落)’수도의 폐허(廢墟)’를 통고한다. ‘그런다음에는세상것이발아치안는다 그러고야음이야음에계속된다’. 수식화의 관리와 관할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영토는 이제 그 무엇도 발아하지 않는 야음의 지속에 놓인다. 그것이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이미지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그런정도로아펐다. 최후(最後).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최후>) 뉴턴의 사과에서 출발했던 근대의 끝, 그 어떤 정신도 발아할 수 없게 된 최후의 사막.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좀 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물음이 우리들 공통의 질문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초고를 끝낸 지금,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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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1회: 임재(parousia)의 리얼-리즘타인의 자화상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들

 

윤인로

 

 

욕망을 지지한다는 외우(畏友)의 말, 말의 힘. 이상의 문학에 대해 쓴다고 했을 때 들었던 그 말은 내게 옥죄어오는 세속의 관계들/올가미들이 일거에 걷어치워지는 순간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 순간의 말은 구원의 지속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욕망을 지지받는다는 것. 그것은 쓰기와 삶, 쓰는 삶의 밑돌에 다름 아니다. 날개이후의 이상 만큼 그 욕망을 지지받았던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연구목록만 40페이지. 그 막대한 두께를 뚫고 하나의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 주목하게 됐던 건, ‘여기는 폐허다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자화상과 그림 <자화상>이었다.

 

 

<1928년 자화상>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자화상>

 

이상의 자화상, 이상이라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기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이들 중엔 임종국, 이어령, 고석규가 있었다. 이른바 전후(戰後)의 청년들, 전후세대. 이상의 문학을 발굴하고 그 위상을 정초했던 그들의 이상 연구에서 더 깊이, 더 많이 숙고되지 않고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눙쳐지거나 누락되고 망각된 의미망이 있다는 사실. 그 의미망을 오늘 다시 복기(復碁)함으로써 여기 다르게 복귀시키려는 비평적 의지. 지금 쓰고 있는 글은 그와 같은 진단과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상 전집, 임종국

 

이상의 문학을 불화하는 천사’, ‘순교자의 분노로 지목했던 <이상선집>(백양당, 1949)의 김기림을 잊지 않고 잃지 않은 이, 그가 바로 이상의 전집을 묶고 있던 청년 임종국(林鐘國, 1929~1989)이었다. 임종국이라는 전후. 달리 말해 전후의 이상, 전후에 의한 이상. 오늘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상의 빳빳한 전집들은 임종국의 열정과 열망이 매만진 최초의 전집에 빚지고 있다. <이상전집>(3, 태성사, 1956). 그 시대를 향한 진술 하나. “황량한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상이었다. 안암동 골짜기에서는 정외과의 임종국이 동숭동 문리대에서는 이어령이 이상 깃발을 높이 든 이래로 이상문학은 뻗어가고 있거니와, 그때부터 지금껏 이상작품 텍스트에 정성을 쏟아온 임종국의 안타까움()”[각주:1] 임종국에게 이상은 전후 이래 40년의 시간이었다. 기존의 통용된 가치들과 합의된 의지들이 냉전의 질서에 의해 부수어지고 깨지던 전후라는 근대의 제로상태 속에서, 그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이상의 문학은 발굴되고 정립되었다. 식민지의 삶이 군국(軍國)의 이윤과 그 체제를 위한 합성의 단순한 질료로 형질전환되고 있던 당대(1931~1937), 줄여 말해 이상의 근대, 근대성(modernity). 그 질서, 그 레짐 속으로 이상의 문학은 거듭 폐허와 파국으로, 끝의 선포로, 최후의 고지로, 줄여 말해 새로운 신()의 도래로 장전되고 있었다. 1939년의 김기림을 자신의 이상 연구첫머리에 제사(題詞)로 인용하고 있는 임종국, 그의 문장들을 보라.

 

그러면 근대의 초극이란 무엇인가? 절대자의 폐허, 다시 말하면 보편적 이성이 사망한 지구상에다 새로운 을 발현하여 군림시키는 작업이었다. () 스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가 되어 버린 이 비극의 담당자, 절대자의 폐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속도적 사건절망, 부정, 불안, 허무, 자의식 과잉, 데카단, 항거 등 일체의 정신상의 경향을 그의 문학에다 반영함으로서, 실로 보기 드문 혼돈 무질서상을 일신에 구현하고 만 것이었다.[각주:2]

 

위의 문장들, 이상을 바라보고 쓴 임종국의 그 문장들은 실은 임종국 자신을 향해 쓴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에게 이상은 전후라는 시대, 전후라는 삶의 끝간데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었고 요청되었으며, 그래서 발현되었다. 임종국은 김기림에 이어 이상의 문학을 이른바 근대초극을 위한 의지의 상관물로 읽는다. 그 연장선에서 이상의 시작(詩作)절대자의 폐허속으로, 다시 말해 군림하고 명령하는 절대적 가치들의 파탄, 사망, 소멸의 상황 속으로 새로운 신을 발현시키고 다시 군림시키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속도적 사건의 발생이라고 명명한 건 임종국의 혜안이다. 그런 혜안 속에서 임종국은 이상 문학의 정신사적 위치근대의 폐허를 확인하고, 또 그로 인하여 동요하던 근대적 자아실존하는 인간상에 표현을 주고, 또 그 초극을 몸소 교시(敎示)하였[각주:3]던 점에서 구한다. 근대의 폐허. 이상은 자신의 자화상에서 여기는 폐허다라고 적었다. 1955년 현재, 임종국은 그 자화상에서 자기 자신의 표정을 본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얼굴을, 전후라는 상황의 표징을 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상의 자화상에는 오늘 이상을 읽는 독자들의 표정과 삶의 조건이 담겨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의 그 음울한 표정과 대면하고 자기 삶의 그 파열된 조건과 대결하는 것이 오늘 이상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당위로서, 강한 요청으로서 주어지고 있다는 것.

한편, ‘무중력 상태화전민 의식으로 전후를 경험했던 이어령에게 이상의 문학이란 이런 것이었다. “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무의미하고 무질서하고 맹목적인 일상성으로서의 현실과 그를 의식하고 그 공백 가운데 자기 생을 설정하려는 선악과[善惡果]의식 세계…… 이런 부단의 모순으로 찬 인간 조건을 한 몸에 향수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고난과 그 비극이 곧 의 예술이 되었으며 거기에서 자기를 해방시키고자 한 의지가 그 예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각주:4]이었다.” 이어령은 이상의 문학을 겹겹의 모순으로 된 인간 조건의 표현으로 읽었다. 그가 나열하는 그 모순의 양극단이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세계, 무의미와 의미, 맹목과 모랄, 비본래적인 것과 본래적인 것 등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상극 대립한 두 조건을 한꺼번에 수행하여 할 휴머니티는 그야말로 낭자한 유혈극의 참상을 자아냈다.”[각주:5] 이 문장에 과장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령에 따르면, 이상은 그와 같은 유혈의 비참 속에서 신의 조화로운 질서를, 신이 만든 무의미하고 무질서하며 맹목적인 일상으로 인지하고 경험했다. 다시 말해 이상의 문학은 의미와 가치, 조리(條理)와 정관(定款)으로 된 근대적 체제 안에서 그것의 무참한 부조리와 정관의 파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상이 선악과의 의식세계가 뜻하는, 신의 명령에 대한 거부와 위반의 의지 속에서 자기 생()’을 기립시키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어령의 이상은 신의 정관을 거역했던 아담이었다. 신의 중력을 차단하고선 동토를 녹이고 박토를 개간해야했던 화전민. 그가 이상이었고, 이어령이었다.

신의 질서와 자기의 생. 그 두 극의 대립과 결렬, 이반과 모순. 이상은 최초의 소설 十二月十二日에서 모순이야말로 진리의 한 형식이라고 적었다. 그와 같은 모순에 대한 감각을 일러 이어령은 현대적 자의식이라 불렀다. “이러한 현대적 자의식의 세계 앞에 나타난 현실의 세계란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실화(失花)’실락원이었다. 그 실낙원의 일상생활 가운데 천사는 아무데도 없으며’, ‘파라다이스는 빈터인 것이다. 천사의 시체만이 사는 현실적 일상 세계에는 절대적 공허() [이상은] 이 실낙원의 현실 세계에 천사를 다시 불러서 돌아오게 하는 응원기같은 것을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각주:6] 이상의 실낙원으로부터 분비되고 있는 문장들이다. 이상은 빈터가 된 파라다이스에서 자기의 생을 기립시키려 한다. 신의 질서로 파송된 천사는 이상의 현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공허 속에서 이상은 스스로 불세출의 그리스도’(각혈의 아침)가 되어야 했으며, 새로운 천사로 발생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신의 질서를 찢고 자기의 생을 재정초하는 과업을 밀고나가야 했다. “그는 오로지 이것이 내 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미지의 경지를 향하여 묵묵히 접근해 갔었을 뿐이다.”[각주:7] 자기의 생()이라는 미지의 경지, 자기의 진상(眞相)에 대한 추구와 밝힘. 이상의 그 생, 그 진상에의 접근이란 이른바 리얼(real)’에의 격동하는 욕동에 다름 아니다. 알다시피, 모더니스트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한 양태로 불러일으켰던 이는 비평가 최재서였다.

최재서는 이어령에 앞서, 이상의 문학이 상극의 과정태이며 그 투쟁 속에서 발현하고 있는 것이 순수의식이라고 보았다. 다음 문장들에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심화로 부르는 최재서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 생활과 의식, 상식과 예지(叡智), 다리와 날개가 상극(相剋)하고 투쟁하는 현대인의 일()타입을 본다. 정신이 육체를 초화(焦火)하고 의식이 생활을 압도하고 예지가 상식을 극복하고 날개가 다리를 휩슬고나갈때에 이상의 예술은 탄생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보통소설이 끗나는 곳즉 생활과 행동이 끗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예술의 세계는 생활과 행동 이후에 오는 순의식(純意識)의 세계이다.”[각주:8] 육체를 그을리고 태우는 정신, 생활을 압도하는 의식, 상식을 넘어서는 직관적 지혜, 지상(을 딛고 선 다리들)을 쓸어버리는 천상과 초월에의 의지(날개). 날개를 읽고 있는 최재서는 당대의 생활이 불태워지고 압도당하며 극복되고 휩쓸려나갈 때, 다시 말해 지상에서의 생활이 종언을 고하는 그때 이상의 문학은 탄생한다고 말한다. 최재서가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저 순의식’, 그것은 지상의 일상에 끝이 고지되는 바로 그 와 관련된 것이다. 순의식, 그것에는 정지의 시간의식이 주요성분으로 함유되어 있다. 그 지상의 정지시간 속에서 이상의 생()은 생장하며, 그 생의 진상은 그렇게 정지된 지상 위에서만 개시된다.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심화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지상의 질서를 중단시키는 생(real)에의 의지, 그 생을 향한 이상의 욕동과 충동에의 이끌림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만이다. 이상의 그 욕동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 중엔 비평가 임화가 있었다.

임화는 1938년 한 해의 조선문학을 혼돈, 무방향, 방황으로 규정하고선 출로(出路)’를 발견할 수 없는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 함정 속에서도 이상은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게 임화의 생각이다. “불행히 그의 두뇌 가운데 세계는 왕왕 도착된 채 투영되었고 가끔 물구나무를 서서 현실을 바라보기를 즐긴 사람이다. () 그의 작품이 소설로선 형태도 안갖추고 그처럼 난삽했음에 불구하고 일부 독자에게 강렬한 감명을 준 것은 보통사람이 다 같이 느끼면서도 한걸음 더 들어가보기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세계의 진상(眞相) 일부를 개시한 때문이다.”[각주:9] 이상은 당대의 모두가 느끼면서도 대면하기를 기피하는 두려운 것, 곧 세계의 진상일부를 개시했다. 삶의 합의된 정관이 찢겨지는, 이른바 실재의 발생과 현현이라는 걸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용기. 임화가 인정했던 건 다름 아닌 이상의 그 용기와 근기(根氣)였다. 실재, 또는 진상을 향한 이상의 그런 기운이 분출되는 것은 임화가 말하는 것처럼 물구나무서서 세계를 도착된 것으로 인지할 때이다. 세계의 상을 도착된 것으로 투시한다는 건 조리정연한 질서로서의 세계가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환상이기에 안락하며 안락하기에 환상을 부여잡는, 환상에의 페티시즘. 이상은 그 스스로가 바로 그런 환각의 인()’(동해(童骸))임을 가감 없이 노출한다. 매끈한 환상의 질서 안에서 그 스스로가 환각의 인간임을 폭로할 때, 그 질서는 더 이상 지탱되지 못하며, 그때 그 인간은 더 이상 환각의 인간이기를 멈추고 생()의 진상(the real)을 경험하는 인간으로 된다. 그렇게 모더니스트 이상은 물구나무슨 형태의 레알이스트였다.”[각주:10] 리얼리즘(real-ism)의 심화란 물구나무로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던바, 이상은 도착과 역설의 감각 속에서 실재와 마주함으로써 그 자신 실재의 일부가 된다. 실재주의자(real-ist) 이상.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임화의 방황하는 문학정신193812월에 발표되었고 그 해의 문학을 혼돈출로 없음으로 진단했다. 임화는 5개월 뒤, 자신의 그런 진단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신학적 처방전을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1939. 5)에서 구하고 있다. 전시체제로 합성되고 있던 삶과 마주한 임화가 근대의 결함을 지적하는 입장과 논리를 보라. “자연과 인간이 신()을 매개로 교섭하던 시대의 수미일관성과 따이나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직접으로 인간과 자연이 교섭한 근대의 결함이 이 적절한 매개자(媒介者)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각주:11] 임화가 말하는 적절한 매개자로서, 인간과 세계의 교섭에 있어 수미일관성과 역동성을 선사하는 존재다. 임화의 그 신은 근대의 자질과 속성을 가감 없이 노출시키던 전시상태의 혼돈과 방황을 끝낼 수 있는 이었다. 임화에 따르자면, 그 신, 그 힘은 근대적 사회와 상극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중이다. “보편화된 인간적 태도의 양대 형태로서 신()과 사회(社會)! 20세기는 이것의 상극(相剋)이 명일의 운명을 복()하지 아니할까? 세계사(世界史)의 무대엔 언제나 영웅은 두 번 의장을 고처 등장한다고 한다. 한번은 비극배우로 또 한번은 희극배우로!/ 카톨리시즘은 이 양자의 하자(何者)인지?” 임화에게 단일신이란 인간이 세계를 단일한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체계로 인식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가지기 시작한 데, 비로소 만들어 낼 수[각주:12] 있었던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사회는 적대하든 공모하든 동일한 레벨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적 능력과 의지의 상관물이었다. 임화는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두 가지 보편적 형식으로 신과 사회를 들었고, 20세기의 운명이 그 둘의 쟁투의 현장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압축하고 있는 것이 임화의 질문이다. 세계사의 무대에 오른 카톨리시즘은 비극을 상연할 것인가, 희극을 상연할 것인가라는 그 질문.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임화의 그 질문에 대한 동시대적인답변은 임화와 함께, 임화에 앞서 이상이 제출하고 있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임화의 질문이 너무 늦었다거나 이상의 답변이 너무 빨랐음에 있는 게 아니라, 차생윤회(此生輪廻)라는 이상의 텍스트가 저 비극과 희극의 반복되는 무대의 내적인 균열을 다시 사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각주:13] 그러므로 문제는 이상의 문학이 신성성(神聖性) 속에서 추구하고 있는 실재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일이다. 다시, 문제는 실재주의자 이상이다.

이상의 리얼-리즘. 이에 대한 격조 있는 안티테제는 고석규의 것이다. “이상의 아이러니며 이상의 역설 감정은 모두 나 자신을 위조하며 가장하는 표호(表號) 또는 방패에 불과하였다.”[각주:14] 나는 그런 고석규의 실존론을 택하지 않고, 실재의 생을 향한 이상의 욕동을 지지하는 최재서/임화의 리얼리즘론을 택할 것이다. 그 리얼-리즘으로, 이상의 역설을 두고 고석규가 단순화하고 있는 저 위조의 의지에 대해, 표호의 맥락에 대해, 방패의 파쇄에 대해, 줄여 말해 이상의 각성과 그 실패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 리얼-리즘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 드러나는 고석규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그 (, real) 없음을 기각하고, 그의 실존주의가 폐기한 이상의 그 을 구할 것이다. “이상에게 있는 가정()나의 죽음은 결코 면전에서의 죽음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에게 있은 허무가 결코 면전에서의 허무와 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각주:15] 하나의 죽음과 허무를 실재와의 대면이 없는 죽음과 허무라고 단번에 확언할 수 있게 하는 저 면전(un Face be)’이라는 실존주의의 어휘는 권력화한 판관의 재판봉에 다름 아니다. 면전이라는 척도적 장소는 그러므로 파괴되어야 한다. 그 파괴의 연장선 위에서 고석규의 이상은 재정의되어야 한다. “오직 두 가지 절망과 두 가지 비밀’, 두 가지 텐스와 두 가지 나 자신’, 그리고 두 가지 세기가 서로 요동하며 () 그때 이상은 분명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저들[그것들]의 나지막한 합창을 엿듣는 것이다.”[각주:16] 대립하고 상극하는 그 두 가지 것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 그 모순과 반어 속에서 이상이 듣고 있었던 건 지상의 질서에 끝을 고지하는 파국의 조종(弔鐘) 소리’(어리석은 석반(夕飯))였다. 고석규는 자신이 말하는 나지막한 합창의 실재가 바로 그 조종 소리임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문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던 사상가로 임종국은 키에르케고르를 들었던바, 키에르케고르의 아이러니의 개념에 들어있는 한 문장은 이렇다. ‘아이러니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공허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공허성을 구출한다.’ 이 한 문장은 이상 독자로서의 고석규가 키에르케고르를 일신시키겠다고 말하면서 꺼내든 문장이지만, 고석규의 실존주의가 이상의 실재를 훼멸시키고 있는 한, 인용된 키에르케고르의 한 문장은 인용한 고석규의 목줄을 되겨누는 칼끝이 된다. 이상이라는 아이러니적 주체는 스스로를 공허에 감금하거나 유폐하지 않는다. 그 모순과 아이러니의 장소에서야말로, 다시 말해, 대립하는 양극이 실은 서로의 밑바탕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곤혹스런 상황 속에서야말로 이상은 자신의 공허와 허무를 구출하고 구제할 수 있었다. 이상의 문학이 거하는 그와 같은 난국(aporia)을 일러 임종국은 이율배반에 다름 아니라고, ‘현대판 시지프스의 신화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외부적 현실에 대한 그의 절망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그의 의식의 종착점이어야 할 제6의 단계외향적 반발에 이르러서는, 그 실효성에 관한 심각한 회의로 인하여, 드디어 이율배반에 함입하여 버리고 말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종착점에 다다를 때 마다 도로 출발점으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하는, 말하자면 출구가 봉쇄되어 버린 미로신을 살해한 후의 인간이 함몰한 심연에서의 숨막히는 순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각주:17]

 

임종국의 이상은 종착점이라고 생각한 곳에 다다랐을 때 거기가 또 다른 출발점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안다. 이상의 문학은 북돋우고 닦달하는 당대의 합성된/절대화된/신적인 가치들과 명령들 속에서 맹렬하게 좌초하는 중이다. 이상에게 종착과 끝은 완료되고 완수될 수 있는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이미(already) 종착과 끝을 감지하고 또 경험하고 있지만, 이상에게 그 종착, 그 끝이란 끝내 아직(not yet) 오지 않은 미-(-)의 사건이었다고 해야 한다. ‘이미아직의 동시성, 혹은 등질성. 바로 그 난국의 장소, 난제의 시간 속에서, 임종국의 어휘로는 출구가 봉쇄된 미로와 심연속에서, 이상의 표현으로는 모든 중간들은 지독히 춥다고 할 때의 그 중간 속에서 이상은 “‘절대자의 폐허에다 새로운 신()을 발견하여 군림시키는 줄기찬 작업’”[각주:18]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신의 발견 또는 발생, 이상의 숨막히는 순례’. 그의 그 순례란 기존의 신, 기왕의 신적 질서를 살해하는 살신(殺神)에의 의지와 실천 속에서만 시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상이라는 카라반(caravan). 저 지독히도 추운 중간에서 이상은 이렇게 쓰면서 기립하는 중이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이상의 그 순례를 뒤따르며 그 기립을 함께하는 일을 지금부터 시작해보려 한다.[각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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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 문학평론가. 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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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윤식, 「이상연구 각서」, <이상 소설 연구>, 문학과비평사, 1988, 23쪽. 책의 첫 장을 ‘각서’라는 이름 아래 써야했던 김윤식이었다. 인용한 대목은 그 각서의 끝부분인데, 곱씹어야할 지점은 그 문장들이 이상에 대한 전후세대의 열도(熱度)를 감지하고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이상 연구의 재출발을 위한 동력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시수도 부산의 고석규(「‘반어’에 대하여」)를 포함해 전후세대의 그 열의를 단순한 회고의 대상으로, 연구의 출발을 알리는 수사적 신호탄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이상을 향한 그들의 그 뜨거운 정성(精誠)의 논리와 맥락에 내재적으로/차갑게 틈입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2. 임종국, 「이상 연구」, <고대문화> 1집, 1955(임종국 편, <이상전집> 3, 태성사, 1956, 264쪽). [본문으로]
  3. 임종국, 「이상 연구」, 314쪽. [본문으로]
  4. 이어령, 「이상론―‘순수 의식’의 완성과 그 파벽(破壁)」, <문리대 학보> 3권 2호, 1955(김윤식 편, <이상문학전집> 4, 문학사상사, 1995, 36쪽). [본문으로]
  5. 이어령, 「이상론」, 36쪽. [본문으로]
  6. 이어령, 「이상론」, 37, 39쪽. [본문으로]
  7. 이어령, 「이상론」, 57쪽. [본문으로]
  8. 최재서, 「<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야―리아리즘의 확대와 심화」, <문학과 지성>, 인문사, 1938, 107쪽. [본문으로]
  9. 임화, 「방황하는 문학정신」,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244쪽. [본문으로]
  10. 임화, 「방황하는 문학정신」, 245쪽. [본문으로]
  11. 임화,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 757~758쪽. [본문으로]
  12. 임화,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 758쪽. [본문으로]
  13. 본 논문의 각 장에 거듭 인용되어 있는 「차생윤회」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길을 걷자면 ‘저런인간을랑 좀 죽어 없어졌으면’하고 골이 벌컥 날 만큼 이세상에 살아 있지 않어도 좋을, 산댓자 되려 가지가지 해독이나 끼치는 밖에 재조가 없는 인생들을 더러 본다. (…) 천하의 어떤 우생학자도 초인법률초월론자도 행정자에게 대하야 정말 이 ‘살아 있지 않어도 좋을 인간들’의 일제학살(一齊虐殺)을 제안하거나 요구치는 않나보다. 혹 요구된 일이 전대에 더러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쯕이 한번도 이런 대영단적우생학(大英斷的優生學)을 실천한 행정자는 없는가 십다.”(이상, 「차생윤회」, 임종국 편, <이상전집> 3, 37쪽, 39쪽.) 이것은 다른 누구 아닌 이상의 문장이다. 이에 대해 임종국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 함구가 오늘까지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이는 임종국이 이상의 문학을 ‘새로운 신의 발견과 군림’으로 정의했던 것이 오늘까지 단절되고 장사지내진 것과 내적으로 등가이다. [본문으로]
  14. 고석규, 「시인의 역설」, <문학예술>, 1957(고석규, <여백의 존재성>, 지평, 1990, 253쪽). [본문으로]
  15. 고석규, 「시인의 역설」, 256쪽. [본문으로]
  16. 고석규, 「시인의 역설」, 254쪽. [본문으로]
  17. 임종국, 「이상 연구」, 307쪽. [본문으로]
  18. 임종국, 「이상 연구」, 312쪽. [본문으로]
  19. 이상,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임종국 편, <이상전집> 2, 50쪽. [본문으로]

이상(李箱) 연구노트

 

 

 

 

 

 

앞으로 2, 4주 금요일, 웹진 아프꼼에 윤인로 선생님의 <이상 연구노트>가 연재됩니다.

이 글은 이상에 대한 연구의 진행인 동시에, 연구자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도정이기도 합니다. 

연구실의 어둑한 불빛 속을 밝혀가며 자아내는 이 미로 속을  함께 묵묵히 지켜보며 따라가주실

눈밝은 분들의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 이상(1910~1937)에 대한 다섯 편, 혹은 여섯 편의 비평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 쓰기의 과정 안팎을 앞으로 6회에 걸쳐 조금씩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이미 마무리된 문장들을 재분류하여 여기 다시 인용하면서, 쓰는 과정에서 폐기됐던 것들과 인지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더하여 지금 다시 촉발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간략히 메모하는 방식으로 연재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필자소개: 윤인로

 

문학평론가. 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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