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만쥬

 

 

 

 

'지난 겨울은 무엇이었을까. '

소설 주인공처럼 잠시 일을 멈추고 창밖을 쳐다보며 떠올려 본다. 지난 겨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 사이에는 밀어낼 정도로 많은 것이 있거나 매질이 없어 전달되지 않을 정도로 부족함을 느꼈다. 지시 공포 보고 처리 전달 선물 거절 약속 미실행 결심 요청 반성 협동 수합..... 주고 받음이 있는 소통이라고 하기엔 다른 말들이다. (하지만 감염→감염→감염→감염도 내가 생각한 소통은 아니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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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는 사람들과 소개하는 우리들

 

평생은, 역사는 반복 만을 할지도 모르며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평생을(평생이길!) 발버둥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하는 길을 선택하는 고귀함을 우리는 대단하게 우러러보지만 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시도했다가 결국 망해버리는 우리도 생각해보면 가치있는 일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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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요청의 자리.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이미 존재하는 시간들을 구태여 연말이나 신년이라는 국면으로 맞게하는 것은 동력을 이끌어 내거나 의욕을 부려보는 것에 어색함이나 멋쩍음 때늦음의 아쉬움을 지워주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러모으는 일은 대단한 능력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러모으는 일은 대단한 능력이다.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초사이어인같은 능력을 발휘하든 매주 번역능력자로 업그레이드되든 공부를 매개로 사람을 모아 혼재하던 정념의 공동체를 만들든. 그리고 이미 존재하던 것과 마주하하고 대면하는 일이 괴롭기도 했다. 이기적인 공부 습관이나 수시로 느슨하고 게을러지는 대부분의 나, 정념과 정동이 순수한 가능성 자체로 발현되기 힘들듯 주로 이해타산적으로 핑계로 악용되기도 했다. 각자의 동력과 의욕과 희망의 갯수만큼 우리는 복잡했고 부대꼈다. ('부대끼다'가 영어로는 suffer인데 그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님을 밝힌다.)그 부대낌을 외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해받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는데 영영 안될것같기도 하다. 지금 또 생각해보니 그것은 군대/국가나 회사 학교 가족 공동체와 달랐기 때문인듯 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은 (특수화시킬 마음은 전혀 없지만)이 공동체를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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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우리를 태운 차를 주차하러 가시고 종업원은 신콩떡에게 과격한 장난을 친다. 약이 오른 신콩떡을 기타등등걸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보고있다. 모라는 기타등등걸의 팔짱을 끼고 있고 선우는 종업원인지 신콩떡인지 모르게 보고 있고 나는 한발짝 뒤에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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