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낌은 복합적입니다. 일단 사람들과의 부대낌도 있겠죠. 또 속이 부대낀다고 말할 때는 어떤 다른 물질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의 신체반응을 뜻하죠. 정동이라는 말은 신체적 반응과 힘의 부딪침, 이 두 가지를 모두 함축합니다. 부대낌은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속이 부대껴서 구토할 때와 같죠.” 그래서 부대낌은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이 어쨌든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부분이다.
권 교수는 이 부대낌을 보는 것이 거대한 사회 변화의 서사 속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양상을 볼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그도 말하듯 1980년대 한국 사회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파토스(열정)로 충만한 시대였다면 20여년이 흐른 지금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아파지(무관심)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파토스에서 아파지로의 변화만을 보면 두 가지로 환원되지 않는 들끓고 있는 양상들, 예컨대 슬픔, 외로움, 사랑 같은 것들을 볼 수가 없죠. 어떤 때는 이것이 정치적 열정으로 가기도 하고 때로는 무관심으로 가기도 하는데 지금까지는 사회문제적 현상이라든지 아니면 심리적 치유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죠.”예를 들어 권 교수는 용산 참사와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 등으로 이뤄진 촛불과 광장과 조문 행렬이 극장가와 서점으로 이동하는 것에 주목한다. 죽음과 상실, 그에 따른 슬픔과 죄책감 같은 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영화 <
해운대>나 <워낭소리> 등에 똑같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쪽 모두 “죽음에 대한 감응이 책임이라는 윤리의 자리를
만들기보다
공동체의 익숙한 삶을 정상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본다. <엄마를 부탁해>나 <워낭소리>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에서 공동체에서마저 버려진 다른 죽음에 대한 감응력을 막는다. <해운대>는 재난 뒤 죽음의 책임에 대한 반성보다는 정성스레
바닷가를
청소하는 장면 즉 공동체의 정상화 과정만을 길게 비춘다. 죽음을 계기로 나와 타인을 결부시키기보다 생존의
불안감만을 느끼며 자신의 삶만을 보존하려는 본능만을 강화하는 익숙한 장면과도 겹친다.
이렇듯 대중의 에너지 혹은 부대낌은 “그 자체로 진보적이거나 희망적인 무언가를 가져다 줄 보고”는 아니다. 하지만 권 교수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진보와 보수, 민주와 반민주, 이명박도 노무현도 다 마찬가지다. 모두 망조다.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다’라는 환멸감을 보는 시각도 그렇다. 그는 이런 경향을 “무지한 대중의 보수주의적 회귀”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를 부르짖었던 무솔리니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진보와 보수 등 현존하는 모든 이념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과 피로감”에 스며든 파시즘의 징후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 교수는 ‘환멸과 외로움’의 문제야말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지점이라고 본다.이런 분석은 거시적 혹은 미시적 사회 분석이라는 틀을 넘어 한 개인을 통과해 전체 사회의 구조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다. “한 개인의 내적인 변화와 그 결과로서의 행위, 그것이 이뤄지는 광장과 그 행동을 촉발시키는 매개로써의 이미지들”을 꿰서 정동 혹은 부대낌을 보자는 것이다.
“<나는 꼼수다>와 같은 경우도 이미지를 통해 촉발된 전형적인 정동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실제 삶이나 현실에서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해줄 만한 명료한 방향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미세하고 들끓는 운동 중인, 발생 중인 것들이 있어요. 이것을 보지 않으면 변화의 흐름을 가늠하는데 늘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이번 책은 권 교수 등이 2007년부터 부산 지역에서 일궈 온 인문학습공동체 ‘아프-꼼(aff-com)’이 앞으로 내놓을 총서의 첫 번째다.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지방에서 공동체를 끌고 나간다는 것, 그리고 익숙지 않은 방법론으로 부딪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실패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아가는데 방점을 두는 것이 우리가 가진 힘”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