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경계가 없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을꺼야.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변정희

 

 

 

 동아대학교 석당홀은 고급 공연장인 채로 늙어버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아프꼼과의 그 숱한 만남 속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서늘한 장소였다. 지난해 12월 13일 금요일 저녁, 이곳에서 아프꼼과 극단 새벽이 공동 기획한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 열렸다. 그것은 말과 이미지들로 쌓아올린 무대를 통해 우리에게 왔다. 단 하루 열렸다 닫히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이 극장에서는 총 4개의 프로그램을 상연하였다. 말-이미지의 극장에서는 Werner Fritsch 감독의 <ATEM DES LAOTSE>을, 새벽의 극장에서는 <밤이 염세적이다>(원작: 배수아, 각색: 아프꼼의 권명아, 연출: 극단 새벽의 이성민, 출연: 장옥진, 정선욱)를, 목소리의 극장에서는 낭독 공연을, 정동의 극장에서는 <환을 켜다>를 만날 수 있었다.

 흰 천과 검은 천이 드리워진 무대 위에서, 어지럽게 배돌고 있는 글자들은 한때 배수아 작가의 말들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였다. 무대 위에서, 영상 속에서 이미지가 된 말들은, 우리 사이에 숱하게 주고받은 말들이라기보다 차마 주고받지 못한, 미처 대화가 되지 못한, 도저히 이해받지 못한, 너에게로 가 닿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간 아프꼼의 독창적인 실험들이 ‘함께, 있는, 우리, 사이’에 숨겨진 텍스트들을 무수히 끄집어내었다면, 밤으로부터 시작한 이 새벽의 무대는 텍스트조차 되지 못한 무수한 말들을 통해 거꾸로 ‘우리 사이’를 비추었다.

몇 번의 극장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말과 글자들은 이미지에서 사람의 몸으로, 목소리로, 다시 이미지로 돌고  돌았다. 사람의 몸을 타고 흐르는 글자들이 이런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밤이 염세적이다.”, “밤이 무거운 신음을 토한다.” 과연 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피조물들의 시간. 저 글과 말과 이미지들이 경계 없이 쏟아져나오는 시간. 국적없는 모든 것들이 허용되는 시간. 밤이 점점 아늑해지기 시작하지만, 결국 침묵과 소란스러움으로 뒤엉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므로, 염세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허용하는 밤이 염세적이라면, 그렇다면 너는, 아침의 흰 빛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밤과 아침,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선 극장 안에서, 나는 이미지를 겹치듯 안젤라 카터의 <서커스의 밤>을 떠올렸다. 날개달린 여인, 광대와 서커스, 거짓과 웃음과 혼돈의 검은 밤은 이윽고 시베리아의 대평원으로 무대로 옮겨가고, 흰 눈으로 뒤덮인 평원은 속속들이 밤이 뒤덮고 있던 것들을 지상 위에 전시하면서 날카로운 대조를 이끌어냈다. 살아있는 것들의 검은 밤(正)이 하얀 세상을 만나고 난 뒤(反)에 그것이 죽음이 될지, 새로운 세계를 경유하는 통로(合)가 될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새벽은 흰 빛과 검은 빛이 충돌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흰 것이 종이요, 검은 것이 글자이듯, 그토록 ‘밤이 염세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토록 염세적이었기에, 흰 빛을 만나기 시작한 새벽의 극장은 온갖 글자들을, 말들을 쏟아내었다. 흰 빛과 검은 빛이 부딪쳐서 글자가 되고 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흰 빛과 검은 빛, 그 충돌과 갈등의 생산성!

 연극 <밤이 염세적이다>는 어둠 속에서 두 배우가 이렇게 외치는 말로 시작한다. “벽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벽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우리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는 그러한 순차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이 새벽에 밤을, 이윽고 다가올 아침을, 너를, 나를, 이해받지 못하는 나와 너와의 만남을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새벽은 새로운 벽이 아니던가? 저기 저 새-벽을 보라. 저 벽이야말로 너를 만나게 되는 바로 그 경계의 시간이다.

 

 

 

 

 

 

 

 

 밤과 벽에 대한 태도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최성희

 

   

나는 오래된 기억처럼 이 극을 만난다. 흑백영화 같은 연극을 보는 것, 독백의 늪에 빠진 여성을 보는 것 모두 내게는 떠올리기 힘겨운 과거 같은 느낌을 준다. 만약 완성품을 보는 관객으로서만 참여했다면 그런 거리감은 줄어들지 않고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이 연극을 구상할 때 옆에서 지켜보았고 2부 낭송극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 극단 새벽과 배수아의 소설을 결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이질적 결합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무척 궁금하였다. 그때까지 배수아는 내게 소문의 작가에 불과했고 그의 작품을 직접 접한 적이 없었지만, 소문들을 종합해서 나는 그녀가 꽤 모던적인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반면 극단 새벽은 열악한 부산 연극계에서 리얼리즘적인 성향을 지닌 채 버텨가고 있는 작고 오래된 극단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과 연극의 만남은 특이할 것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그것이 매개되는 방식은 특이할 수 있다. 아프콤의 <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은 그런 특이한 조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내게 흥미를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을 시도여서 이 극이 만들어지는 중간중간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대중적이지도 뚜렷한 서사도 없는 이 소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까?

 

 

 

 

 

중간 점검 때 낭송극 참여자들과 함께 모여 본 극에서 연기할 배우들을 만났다. 처음엔 여리여리하고 순한 느낌을 주는 두 여 학생이라고만 여겼는데, 대사를 읊는 순간 그이들의 인상이 확 바뀐다. 마치 불이 켜지듯, 그들 속에서 연기가 돋아났다. 여리여리한 여학생은 사라지고 세상을 겪을 만큼 겪고 알 만큼 아는 단단한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순간 나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런 게 연극의 묘미야! 그것을 연극이 자기도 몰랐던 모습을 끌어낸다고 말한다면 뭔가 미진한 느낌이다.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게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신들림에 가깝다.

공연 날, 막이 오르고 두 배우가 보이자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흑백의 무대는 몰입도가 높았고 배우들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선명하고 아슬아슬하였다. 위에서 내려온 흑백의 긴 끈에 매달린 두 몸. 이 두 몸이 천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렇게 배수아의 밤이 염세적이다는 밤과 벽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염세적이다가 아닌 염세적이다라는 선명한 이유가, 밤이 단순히 낮의 이분법적 대비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의 몸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제시된다. 검은색 전신 타이즈를 입은 두 배우는 밤의 몸이다. 하얀 천에 둘러싸인 밤, 검은 천에 둘러싸인 밤. 두 밤이 흑백의 천속에서 손짓하며, 혹은 몸부림치며 말하기 시작한다.

한 배우가 벽 속의 벽, 벽 속의 벽. 나는 오직 말을 가지지 않은 물고기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할 때 심장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그 말들이 내게는 아우성처럼 들린다. 누군가 홀로 잠자리에 누워 속으로 중얼거리며 세상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계속되는 오해와 곡해들, 그 소통의 불가능성에 참담함을 느끼면서 좌절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다음은 뭘까? 그녀는 밤을 고향으로 삼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밤을 살았다.

그건 처음에는 분명 처형이었으나

곧 내 나라 내 몸이 되었다. . .

나는 영원한 등록을 마쳤다.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나는 밤이라고 대답했다.

.. .....

 

 

나의 고향이 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배타시와 체념들이 떠올라 아득해진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무수히 많은 벽을 접해야 했던 사람들, 체념을 반복하다 그 꺼풀이 내려앉아 끝내 그 벽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는 방식을 찾아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각자 저마다 사정은 다를 것이나, 우린 누구나 누군가를 만나길 열망하지만 막상 만나면 어김없이 벽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사람이 벽이라고 느끼는 것은 꼭 사랑하지 않거나 잘 몰라서가 아니다. 너무나 잘 아는 부모도, 연인도 벽이 될 수 있다. 서로 무던하게 지내는 형제도, 조카도, 친구도 벽으로 느껴지곤 한다. 공유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 벽이 더 두터워지기도 하고, 공유하는 것이 적어서 불투명한 벽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예전에 내가 생각하는 벽은 사회적인 제도와 인식의 문제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까이 부대끼고 사는 사람 사이의 벽이 더 부각되기 시작한다. 배수아가 특별한 사랑이 특별한 벽의 언어이다라고 말하는 건 그 극단적인 경우일 터이다. 이는 연극에서 두 배우가 무대의 보이지 않는 벽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지그재그로 오가는 몸짓을 하며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라며 말할 때 참 탁월하게 잘 표현하였구나 싶었다.

우리는 어떻게 벽을 대해야 할까? 소설에서 수니는 벽의 언어를 터득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밤의 삶으로 옮겨왔다고. 연극에서 배우는 노끈에 자신을 동여맨다. 항상 행복한 낮을 살기를 허무하게 희망하기보다 오히려 밤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밤은 단지 네거티브가 아님은 밤을 온전히 사는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선 아직 그 경지를 다 더듬을 수 없다.

 

나는 오롯이 이 공연 프로젝트를 통하여 배수아를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획이 시작된 이래 배수아의 몇몇 소설을 읽게 되었고, 이 작가는 20~30대의 자의식 강한 도시 여성들이 겪는 부침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때론 너무 냉소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건 젊은 여성들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반응들로 이해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냉소에조차 너그러울 수 없는 나는 생생한 삶의 느낌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돌아보곤 했다. 낭송극의 참여자로 건네받은 쪽지에는 배수아의

 

 

 

 

 

 

  뜨거운 염세의 없음

 

 : 배수아의 새벽의 극장 리뷰

 

 

 

김비

 

 

 

  

 추운 날이었다. 나는 아마도 말해야 하는 말들을 손에 들고 있었을 것이다. '염세적'이라는 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밤이 아닌 아침을 생각하고 있었다. 밤은 내게 익숙했고, 오히려 아침이 낯설었다. 내게 염세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아침이었을 것이다.

 

 하필 맨 앞줄에 앉자, 두 개의 세계가 내 앞에 눈을 떴다. 하나는 바로 나의 눈앞에서 작지만 선명한 그림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너머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말들의 잔해에 의해 갈가리 찢긴 채로 벽 위에, 혹은 말 너머에서 내 앞에 흩어졌다. 두 개의 세계는 같은 것을 보여주고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세계 중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를 지우고 망각하며. 소외시키고 소외되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 유언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정교하게 토해진 말들은 내 머리 위에 신음이거나 혹은 노래처럼 부유한다. 내가 보고 있는 하나뿐인 세계 속에 누군가 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누군가가, 색깔을 잃어버린 세계가 스쳐 가듯 화면 속에 스며든다.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말과 화면 속 세계가 기묘하게도 서로에게 다가간다. 말은 세계가 되고, 세계는 말이 되며 서로를 향해 허물어진다, 속도를 높인다. 어긋나거나 뒤틀리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말이 소멸해버린 세계 속에도 말은 있을 것이며, 세계가 사라져버린 말 속에서도 세계는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조각난 말의 잔해들 속에서 알몸으로 우리 앞에 나온다. 서로 다른 몸으로 버려진 말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벽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다. 그들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인식하며 벽 앞에 매달린다. 벽에게 말을 걸고 벽을 말하고 벽을 두드리며 벽을 향해 절규한다. 비명의 다른 이름인 말, 말을 절규한다. 그러나 벽은 꼼짝하지 않는다. 벽은 탄생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소멸되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를 두드리거나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으며 우리들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발버둥 치듯 이 세계의 벽을 뜨겁게 토해놓는 우리들에게, 벽은 그저 이렇게 말한다.

 

 '실례지만,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벽에 맞서기 위해 하나가 된다. 나무가 되기도 하고, 밤이라는 고향을 지닌 올빼미가 되기도 한다. 날개를 펴지만, 그들은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한다. 기껏해야 추처럼 앞 뒤로 오르내리고 있을 뿐, 의미 없는 웃음으로 제 자리를 돌며 자위하고 있을 뿐. 몸부림치듯 서로 다른 기호를 그리며 그들은 간절히 소통하고자 한다. 이해할 수 없음을 확인하며, 소통의 없음을 각인시키며 점점 목소리를 높인다. 서로 다른 기호로, 서로 다른 말들로, 그러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소통의 없으므로 그들은 소통한다. 소통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다시 또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기호를 그리고, 또다시 똑같은 말을 토해놓는다.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소통을 바라며. 겨우 간신히 '밤이 염세적'이라고 입을 모아 웅얼거리며.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말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말들을 들고, 갈가리 분해된 문장들을 들고서 우리는 말을 말해야 하고 또다시 입을 벌려 비명을 닮은 소리들을 토해야 한다. 소통의 없음을, 사라진 세계를, 분해된 말들을. 서로 다른 목소리로 서로 다른 말들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반복되는 없음을 반복하며, 끝없이 그렇게 제 자리를 돌고 있다. 낙인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찍히는 말들, 흉터처럼 퍼렇게 멍들어 시간 속에 각인된 언어들.

 

 말의 남루한 몸을 들여다본 것만 같아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이 밀려왔다. 입을 벌릴 때마다 염세로 뒤틀린 말들이 흐느적거리며 기어 나올 것만 같은 공포에 나는 사로잡히고 있었다. 나의 말이 부끄럽다. 아니, 나의 말이 자랑스럽다. 나의 말이 산다. 나의 말이 죽는다. 나의 말이 다가간다, 되돌아온다. 나의 말이 소외시킨다, 소외된다. 점점 더 소리를 높이며 다급해진 나의 말이 빨라진다, 차라리 비명이 된다. '밤이 염세적이다'고 말하지도 못한 채 뜨거워진 것들을 집어삼키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오는데, 내 머리 위 어디선가 건들거리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새처럼 울고 있었다.

 

 '실례지만,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아프콤 에세: 권명아 

 

  • 만일 내가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친구들에게 했을 것이다.....(중략)

    함께 말을 나눌 사람이 없던 나날 동안, 그러니까, 내가 '이름없는 나날'이라고 부르는 이 나날 동안 나는 혼자서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날 동안 외로운 저녁이면 함께 만나서 밥을 먹고 깔깔거리고 걱정 나누고, 했던

    서울 사는 육년 동안 만났던 그이들. 그이들이 있어서 좋았던 그 저녁을 위하여, 그 저녁을 위하여, 나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잔을 올려야 하리라.

    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중에서 

 

예니 에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의 한 인물은 긴 삶의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되뇌인다.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의 발밑에서 판자 통행로의 널빤지가 가볍게 흔들리고, 그는 생각한다."

또 이렇게도 되뇌인다.

"몸을 돌리는 일은 그가 터득한 하나의 기술, 혹은 그를 터득해버린 기술이니,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똑바로 앞을 향해서 헤엄치든가 아니면 턴을 하든가 어느 쪽이든 수영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날 밤 그는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와, 농담처럼 시작하다가 정말로 강물로 뛰어들었고, 그 친구는 아직까지도 몸을 돌리지 않고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동독에서 나고 자란 그는 대학 시험을 앞둔 어느날, 친구와 함께 서독으로 탈출하려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헤엄쳐서 서독으로 넘어가기 위해. 친구는 아직까지도 몸을 돌리지 않고, 강물 속에 있고, 그는 붙잡혀 감옥에 다녀온 후, 대학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노동자로 살아왔고, 그렇게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호숫가의 집이 주인공이다. 소설은 이 집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일순간, 어느 국면들을 짧게 전한다. 그 짧음은 실은 아무 의미도 없다. 거기 '모든' 것이 있기에.

 

 

  • 하루는 길고 세상은 늙어가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서있을 뿐이다. 한 명이 가면 한 명이 뒤를 이으면서,
  • 게오르크 뷔히너, <<보이체크>> 

소설은 뷔히너의 유명한 희곡의 한 구절로 시작된다.


<<그 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그 집', 아니 그 집이 있던 장소인 호숫가의 기원인 빙하기부터 시작되어 흘러흘러 가는 사람, 삶,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흘러 간다. 모든 것이.

그러나, 그 핵심에 놓인 것은 '역사'이기도 하다. 일차 세계 대전과 이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이 호숫가의 집은 폭력으로 얼룩진다. 그런 점에서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매우 특이한 '역사서사'이기도 하다.

하여 이 소설에서 삶과 사람의 인생은 어떤 점에서는 고였다가는 흘러가버리는 호수의 물처럼 혹은 똑바로 가던, 턴을 하던 결국 은 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흘러가버린다는 점에서 모두 덧없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소설 역시 그런 덧없음 속에서 바로 삶의 의미를 길어올린다. 유한한 인간의 무한함.

이런 구절을 사랑한다.

"지금 그의 등 뒤에 놓인 호수, 끝이 보이는 그 호수 가운데서 끝없음을 느꼈듯이, 혼란의 소용돌이라는 지표를 뚫고 행복은 자라난다."

이런 덧없음의 유한성 속에서 깊은 무한성을 길어올리는 또다른 작품이 떠오른다. 아주아주 다른 이야기이지만.

 

 

  • 나는 다만 들려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한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으며 또한 얼마나 복합적인가, 하는 것을.

 

 

막심 빌러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렸겠지만, 작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두 작품에 관심을 갖게된 중요한 이유는 실은 작가보다는 번역자 때문이다. 예니 예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배수아가 번역한 작품이고, 막심 빌러의 <<사랑을 위한 일곱 번의 시도>>는 허수경이 번역한 작품이다.

그러하니, 여기서 말하는 책들, 혹은 책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우연적인 연쇄고리에 의해 연결된 것일 뿐이다. 별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이 실은 배수아와 허수경의 글을 읽어나가며, 그저 읽고 있는 중이랄까.

아니 허수경의 <<길모퉁이 중국식당>>의 표현을 빌면 함께 말을 나눌 말 사람이 없던 그 시절 동안,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외로운 저녁의 독백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며, 그런 의미로 이 책들을 따라간다.  

이름없는 시간이라 허수경이 불렀던 그런 시간, 그건 '나'의 이름 없음이 아니다.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의 없음.

"명아야"

하고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 바로 이름 없는 시간인 것이다.

이름없는 시간에 하여 말보다 글에 집착하게 되듯이, 그렇게, 글에, 글 속의 당신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배수아, 허수경.

이렇게.

 

  • 허수경, 그녀 자신의 경험이 많이 녹아있는 소설.
  • <<박하>>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의 옮긴이의 말에서 허수경은 이렇게 말한다.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사랑의 순간이 있다. 막심 빌러의 <<사랑하기 위한 일곱번의 시도>>는 그런 이야기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지나가는 사랑, 삶을 열어주는 사랑, 삶을 닫아버리는 사랑.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복 있으라.

불우한 사랑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 있으라.

 

허수경을 빌어, 나도 기원한다.

당신들 모두에게 축복있기를.

 

 


 

 


 

 

 

 

 



 

 

청년과 힐링: 중2병과 힐링-> 현시창이지만 힐링은 필요없어

 

안녕하세요 신콩떡입니다. 오늘은 가볍게, 얼마 전에 있었던 저의 강연 후기를 올려보고자 합니다.

불초 소생인 저는 11월 24일 부산작가회의 주최 연속 강좌 <청년과 시민 힐링을 묻다>에 강연자로 나서게 되었었더랬습니다. 여기에 제가 가게 된 것은 아무래도 평소에 '청년'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논문을 써오고, 나도 청년이고, 나도 앞날이 깝깝하고, 근데 청년이란 단어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지역에서 뭔가 해보려고 버둥버둥을 해왔고, 주위에 청년 친구들도 많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하여, 그렇다 하면 신콩떡이가 청년과 힐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주시어, 제가 감히 '청년'들에 대해서, 그리고 '힐링'에 대해서 어떤 말을 떼 보는 자리에 서보게 된 것입니다.

 

두둥

 

그렇다. 힐링.

세상은 수많은 힐링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지금까지 알아온 힐링은

 

이런거,

 

힐링과 헌팅을 동시에 시전하는 드웦여사제

 

이런거,

 

힐링을 통해 체력이 쭉쭉 차오릅니다.

 

...입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힐링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힐링>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들,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시작해서 줄줄줄줄이 현실의 청년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청년에게 '열정'과 '패기'를 요구할 거라면 오히려 "그따위 힐링 집어치워라!" 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청년이 가질 수 있는 패왕색의 패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크게 주목해서 보지 않았더랬습니다.

하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힐링이 대세고, 실제로 수많은 청년들은 위로받고 싶어합니다. 내 주위의 어느 지인은 "열번만 흔들려도 사람이 죽지, 죽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지인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를 읽으며, 그래 난 아직 더 흔들려도 된다! 라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니까요. 아무래도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힐링'은 꽤나 필요하고, 효과가 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도서 목록에서 <괜찮아>를 검색만해도 책이 우르르 쏟아지고, 심지어는 '청년 멘토'로 시작한 안철수가 어느새 대권의 핵이 될 만큼 세력이 커진 것도 그런 흐름 속에 있지 않나 해요. 그러니 이렇게 치유 대상으로 더욱 호명될 수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 청년은 더욱 아픈 환자가 되어가는구나, 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참에 마음잡고 힐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들을 읽었지요. <힐링>에는 한편으로 개인적 극복과 위안을 중요시하는 김난도류의 서적이 있는가 하면, <ㅇㅇ치료>와 같이 인문/예술을 통해 심신을 '치료'하는 치유의 방식도 있는 것이지요. 최근 '자존감'이라는 말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나아감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었는데, 인문/예술을 통한 '치료'로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마음, 자존감, 정신과 같은 것들을 다스립니다. 즉 글, 음악, 미술, 등등의 시도를 통해 억압되거나 흩어져있을 뿐이었던 자신을 표현해보면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되찾아가고, 또 이를 통하여 사회로 복귀하고, 또 '치료'로 끝나지 않는 지속적인 수양을 통해 앞으로의 자신을 함께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시도들에 대한 보고를 파악하기에는 저의 부족함으로 어려운 점이 너무나 많았고, 전혀 확인되지 않은 것이지만, 이러한 방식이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정'과 같은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공동체를 위한 정상성의 회복을 향한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힐링과 치유에 대해 무언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도 하고 싶은데,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면 청년을 향한 힐링 담론에서 지금 제일 잘나가는 김난도느님의 어록을 정리하자면,

 "재테크하지 말고 종잣돈을 써버리면서 너에게 투자하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란다. 아 그 고생은 물론 여행, 자기성찰, 봉사 이런 것들이지^^", "불안하니? 그건 다 니가 조급해해서 그래^^", "정 힘들면 당장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삶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와 같은 정신나간 소리들을 읊고 있어서 도저히 뭔가...긍정해주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아니 못해.... 적어도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사는 친구, 또는 종잣돈이고 나발이고 없이 졸업 이후가 바로 생존으로 연결되는 친구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거 긍정 도저히 못하겠어요......물론 간간이 옳은 말도 있긴 한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에요. "시간 관리 잘하고 일찍 일어나라."......응?.....이건 우리 엄마도 2n년째 하는 소리잖아? 여기서 우리는 잠깐 다른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청년 멘토들이 하는 후눈한 말들은 대부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들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는 내용들인데 대체 왜 책을 사보고 있는 걸까요...? 백만명씩이나?

 

 

그것은 한편으로 '멘토'의 실체는 '존경받은 삶', '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며, 그 존경과 바름의 기준은 결국 돈을 잘벌고, 사회적 명예를 쌓았느냐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걸 말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사 자격증도 따고 남는 돈으로 컴덕질도 해서 회사도 세우고 떼돈을 버신 안철수님은 백만멘티들의 지지율로 대선까지 진출하지만, 최소한 일하는 사람이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현실이자 바람을 외치며 고공농성을 한 김진숙은 멘토가 되지 못하죠. 그리고 또 우리의 부모들, 친구들, 선생님들의 말들 또한 멘토의 말이 되지 못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말들을 믿을 수가 없는 시대, 듣지 않는 시대, 그래서 결국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시대입니다. 물론 힐링에 그런 것만이 전부는 아니겠죠. 오히려 작은 위안이 더욱 소중한 시대이기도 하고, 호의가 더 귀중해지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청년들, 대체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서 안심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사람들에게, 힐링은 오히려 너무 잔인하고 무책임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정해버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꼭 치유가 그런 것만은 아니죠. 다 괜찮아, 다 괜찮아, 니가 더 힘내면 돼, 같은 청년 멘토들과 스님 힐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앞서 말했던 ㅇㅇ치유와 같은 것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오히려 너무 어렵고, 뭔가 연구사정리를 디비 파야 할 것 같고, 그런데 개론적인 이야기에서 보다 앞서나간 논문들은 생각보다 구하기 어렵고.....으아아아....신콩떡 죽네ㅠ (멘붕)

 

그래서 저는 처음에 세운 주제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진상들을 부리고 엎어져있고 퍼져있고......사죄드립니다.

 

본디, <중2병이지만 사랑이 하고 싶어>라는 쿄애니 3분기 신작애니의 '중2병'걸린 '다크 프레임 마스터'를 통해서 다른 삶을 통해서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래서 긍정적인 힐링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라는 뜨뜻미지근란도란도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역시 어려웠습니다. 중2병을 이야기하든, 인류보완계획을 이야기하든, 결국 나는 힐링에 대해 이야기해야하는데,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청년 힐링들이 결국 이런 것들이라면 내가 어떻게 이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고 조언을 듣고 한 결과.......

 

그래, 우리는 어쩌면 이런 현시창의 세계에 살고 있다, 고 말해버릴거야! 힐링 따위로 안된다구! 맨날 개인적인 열정이나 용기 따위 이야기하지마! 계급, 사회, 경제, 젠더적으로 얽힌 문제인 거 뻔히 알면서 네놈 책 팔아처먹으려고 이딴 글 쓰지 말란 말이야! 이딴거 안된다고 하는 게 바로 용기다 이 놈들아! 맨날 멘토들만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정작 당사자들은 <ㅇㅇ의 힐링 콘서트에는 오늘도 1000명의 참석자들이...> 이딴 기록으로나 남는 게 무슨 힐링이야! 힐링은 결국 자기가 이야기하고 위치를 찾는 거잖아! 힐링 콘서트 참가비내고 관객석 앉아 있다가 가면 그게 결국 청년들 위치냐? 응? 그래 놓고 맨날 열정돋우라고 쪼으지! 쪼으지마! 쪼으지 말라고!

...........라고 하기로 엇나간 결심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ㅠ_ㅠ........

그리고 강연 당일........저는 무시무시하게 슬픈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그래요, 꿈은 안철수인데 현실은 지방대 잉여야! 잉여라구!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이야기에서 시작을 하기로 합니다.

 

"이 책은ㅡ 그냥 말없이 읽어주세요."

그리고,

-반드시 크게 들을 것.

 

 

그리고 나머지는 다음 편에.............

 

 

 

 

 

 

 

 

 

 

 

 

 

길을 찾다. 그리고 막다른 길들.

 

코엔지의 오래된 작은 사회과학 인문과학 서점. 지도를 그려준, 오랜 벗, 그녀와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삶의 불가해함. 혹은 부대낌과 꼬뮨의 막다른 길들. 그 중 하나는, 사람들, 관계들, 평생을, 끝이 오지 않을것처럼, 영원히 빛날 것 같던, 그 찬란한 부대낌의 순간들.

 

그러나 오히려 두려운 것, 마주보아야 할 것,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부대낌의 끝장. 관계의 끝은 실로, 영원한 마지막처럼, 되돌아오기 어려운 어두운 심연을 남긴다는 것, 그 심연을 본 후, 우리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길로 나아간다는 것, 그리하여, 삶은 실로 서로 다른 길로, 그리고 결코 만날 수 없는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뒤돌아볼 수 없다는 것. 삶이든, 관계이든, 부대낌이든, 꼬뮨이든, 그 근저에 놓인 두려움의 하나일터.

 

하여, 겸허할수밖에 없다. 사라진 것, 되돌이킬 수 없는 것, 그리고 남은 것들.

 


사라져가는 그 부대낌의 잔상처럼, 점점 희미해져가는, 그러나 그 희미해져감을 다시 찬란한 부대낌의 에너지로 이행시키는 그런, 코엔지의 길목에서 문득 두서없는 생각.

 

그러나, 사라진 것, 되돌이킬 수 없는 것, 그리고 남은 것들을 생각한다. 혹은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가야 하는 길에 대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에 대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지하도서실에서 밤을 새고 허기를 채우러 집으로 왔습니다. 마감은 코앞이나, 책 뚜껑은 이제 열었으니 밤을 한 번 지새는 걸로는 택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내내 깨어있는 것은 저만이 아니었지요. 나 외에도 모두가 깨어있었다는 것이 참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도 혼자 깨어있지 않아서 이유없이 조금 힘이 납니다. <연구모임>이라는 것은 사실 이런 것인 듯도 합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에, 그래도 누군가 같이 있구나, 하는 것.

요 며칠 간은 12시 전에 헤어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야 체력이 좋다지만 (끈기와 집중력은 반비례) 다른 세 사람은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도 간혹 듭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이 지킴이님들은 '서로가' 괜찮을지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괜찮을지 노심초사 한다." 활자로 쓰면, 당혹스러우리만치 평이하고 그저 착한 한 문장이 되어버리는 이 문장. 하지만 또 어딘가의 지킴이님들은 아마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로가 괜찮을지 걱정하고 추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시간을 거쳐야 겨우 한 문장 써볼 수 있는 것인 듯합니다. 피로조차 챙길 수 없는 정신에도, 내가 멘붕하면 저이도 멘붕하겠구나, 내가 엎어지면 저이도 엎어지겠구나, 그럼 우리는 다같이 망하는구나ㅠㅠ....라고 머리가 알아도 몸이 끝내 배반하는 이 '함께-있음'의 피로를 다스리기까지, 아니 조금 다스려보기 시작하는 것도 이제 겨우 다시 시작인 듯합니다. 정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음에도 무섭도록 그 전염력이 강하여, 너무나 쉽게 전혀 다른 것으로 모두가 휩싸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스려보기 시작한다, 는 말도 실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말을 저는 적습니다. 이 것이 기쁩니다.

 

사람이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것일진대, 이 <장소>는 무엇이란 말이더냐

 

물론,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국경을 넘는 것이 어디 쉽던가요. 하지만 이번에는 선배-선생님들의 빈자리가 정말 크군요. 대체 예전엔 워크샵을 어떻게 했던 거야?! 라는 충격과 공포의 나날입니다.

지역적 한계를 넘고, 삶의 반경을 넘어, 국경을 넘어. 우리는 왜 그렇게 순례를 하였던 것일까. 작은 실수에도 기절할 듯 놀라고 송구해하며, 왜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것일까. 우리와 함께 할, 또 다른 얼굴의 친구를 찾기 위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해봅니다. 국경을 넘어서 삶의 반경이 아주 넓어졌을까? 저는 이 팀에서 <국경을 넘는> 일에 가장 많이 참여하였습니다만, 사실 여전히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평생 비행기 한 번 타볼 일이 없이 살아오다가, 여러분들이 손을 잡아주어 뚜릿뚜릿하며 국경을 넘게 되었으니, 실로 진일보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정말로 국경을 넘게 되는 것은 절박한 부딪힘과 스스로가 완전히 깨졌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도든, 중앙이든 무엇이든. 지역을 넘어서 국경을 향한다고 할 때, 그 말 안에는 어떻게든 (중앙)이 들어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강고한 벽이 저에게는 언제나 물음표로 남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서울에 가본 일이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기도 하구요...)

이런 생각은 지난 밤에 읽은 책 두 권과 함께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주제인 <20대 담론>을 다루고 있는 두 권의 책에서 발화하는 '20대'들은 거의 대부분이 서울의 명문대이거나, 또는 서울의 갖가지 문화판/집회판 속에서 키워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외에도 모으면 열권 안되게 읽은 것 같은데, 심지어는 교지편집부 기자들이 <20대의 삶>을 주제로 자신의 삶을 소소히 쓰는 글을 묶은 책은, 전원이 서울대학교 학생이고, 우리도 똑같이 취업걱정하고 힘들다는 내용입니다. 뭐라고,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요. 그놈의 중앙이 뭐길래.

촛불판을 통해 키워져서 이까지 왔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연대와 광장의 즐거움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좋겠다고 가슴뿌듯하게 말하는 것을 보며, 저 역시도 부산에서도 크게 일어났던 2008년 촛불시위를 통해 여러가지 행동들에 참여하게 되었음에도 반가움보다는 거제도에서 한 열몇명 촛불 들고 있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우스개가 되었던 고향친구가 생각나서 울컥하기부터 하는 것은 제가 거제시에 대한 애향심이 넘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미선이효순이 촛불광장, 노무현탄핵촛불광장, 쇠고기반대촛불광장, 그 많은 광장들. 자부심에 넘치는 그 광장의 사람들은 한 번도 광장을 가져보지 못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그래도 조본좌님의 책에선 거의 유일하게, <20대 세대론> 안에서의 지방과 중앙의 격차를 언급해주고 있죠..)

연구모임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갑자기 읽은 책 이야기로 흘러가버려서 수습이 안되네요.. 아 갑자기 뒷목이 땡기는 것은 내가 밤을 샜기 때문일 거야.

매일매일의 연구모임에서 일이든 관계든 공부든 뭐든 사유로 남기자고 시작하는 것인데, 첫번째부터 취지랑 어긋나버려서;;; 그냥 공황상태라서 그러려니 해주세요...

 

덧) 인터뷰어가 집이 잘사냐고 묻자, 우리집은 청담동이긴 한데 외곽이라 중산층이에요...라거나 아버지 약사고 어머니 교사신데 그냥 중산층이죠...라고 하질 않나, (중간계급욕망론이 요기잉네^^) '우연히' 좋은 학벌을 얻어 (진중권나 박민규나 등등 왜 명문대 가놓고 꼭 컨닝해서 우연히 간 거 뿐이라고 말할까 옛날부터 이런 말 하는 사람들 제일 짜증났다)회당 20만원짜리 과외를 했지만 자기는 과외학생에게 집회참가권유도 하고 저소득층 봉사활동도 한다고 하는 등등의 진보적 인터뷰이 미친놈들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를 부르주아라고 외쳐야겠다고 생각.

지금은 새벽 1시를 넘어가는 시간,

아이폰의 지메일 알림이 쉬지 않고 울립니다.

우리 팀원들이 워크샵에 대한 안내 메일을 보내고 있는 중인것이죠. 다들, 지금도 밤을 새며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아프꼼이 하는 일들을 아는 분들은, 아프꼼 팀원이 한 수십명 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간 만나온 대부분의 대안 꼬뮨이나 모임들(물론 아주 큰 대안 꼬뮨을 제외하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세상을 후딱 바꾸는 그런 일은 아니지만, 나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 현장들을 더 인간다운 방식으로 변혁시켜보려, 작지만, 온 삶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런 모임에는 나름 <대표 표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실은 그 모임을 지켜가는 <지킴이>들이 있습니다. 지킴이들은 모임과 '공동체'와 꼬뮨을 가꾸고 만들어가고, 지켜가기 위해, 매일매일을, 자신의 전 삶과 존재를 말 그대로 바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들에 참여도 하고,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지킴이들은 묵묵히 그 모임을 지켜나갑니다. 아주 힘껏.

그러다보니, 그런 대안적 모임에 잠시 스쳐지나가거나, 그 모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모임과 자신의 <참여>에 대해 참으로 많은 말과 후일담과 참관기를 남기지만, 막상, 지킴이들은 <말>을 잃고, <기억>을 잃고 <후일담>을 잃게 마련입니다.

해서, 많은 경우, 우리는 지킴이들의 말을, 기억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이전에도.

게다가, 아프꼼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대안적 모임의 대표표상의 경우, <대표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실은 대안적 모임을 통해서 말과, 자신의 자리와, 나름의 <보람>을 갖게 되지만, 어찌보면 지킴이들의 경우 <대표표상>과는 달리, 말도, 자리도, 보람도 갖기가 어렵습니다.

아프꼼 역시 이런 딜레마를 고스란히 갖고 있습니다. 아프꼼의 지킴이들은 몇년간, 이 모임을 변화시키고, 지키고, 가꾸기 위해, 자신을 탕진하고, 소진하고, 나가떨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삶 모두를 바쳐왔습니다. 그러면서 <보람>도 있었겠으나, 더 실제적으로는 공부할 시간도 없고, 글은 더 집중이 안되고, 몸은 항상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곤 했습니다.

아프꼼은 이 <지킴이>들이 자신의 몫을, 말을, 기억을, 자리를 흔적을 갖을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드는 것을 모임 자체의 목표로 했지만, 그럼에도 역시 모든 대안적 모임의 지킴이들의 슬픈 운명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임의 첫 발걸음부터, 아주 오랜 시간 <고생>과 <멘붕>을 거듭해온, 김대성 ...그의 잃어버린 말과, 보람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또 실무만 잔뜩하다가 새로운 길로 나선 장수희, 그녀의 새로운 발걸음이 좀더 가볍기를! 두 사람은 모두 나름 연구모임 <안식년> 중이지요. 김대성과 장수희, 두 지킴이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못지 않게 오랜 시간, 제 구박을 받으며, 연구모임의 자리를 지켜온 <신콩떡>, 나이는 여전히 가장 막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연구모임의 선배격이지요. 오늘도, 열심히 <실무>를 보며, 글을 써야한다는 제 압박에 밤잠을 설치고, 하릴없이 909에서 밤을 샐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으는 바퀴벌레와 나방과 싸우며

 

지킴이 세월 몇년간 <잃은 것은 몸매요, 얻은 것은?> 미안합니다.

역시 제 압박과 구박에 연구모임 초기 지킴이었으나, 지금은 <파토~스>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김만석.

 

그의 <피로>가 항상 마음에 걸립니다.

새롭게, 그리고 지금도 우리 연구모임을 지켜나가는 두 사람. 양순주, 송진희

송진희는 대학제도에 발을 잡힐 수 있는 우리 연구모임에 진정한 <연구자>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중요한 전환점이 된 지킴이입니다. 일본 체류를 마치자 합류한 양순주, 공부말고는 관심이 없던, 참으로 성실한 연구자였는데, 아프꼼 지킴이가 된 후 공부할 시간이 없어진, 슬픈 지킴이이죠.

하지만 <문체 혁명은 책상머리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말은 실천을 통해서만 온다>는 다짐을 마치 주문처럼 외우며, 오늘도 아프꼼의 지킴이들은 피곤한 하루를 아직도 마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떤 이념, 어떤 명분에도 모든 대안적 모임들은 이 지킴이들이 잃어버린 말과, 기억과 보람, 그리고 무수한 시간들에 의해 지켜집니다. 아프꼼이 수년간 만나온 모든 모임들, 아프꼼은 그 모임의 대표표상보다는 지킴이들과 만나고, 그 말과 기억과 보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아프꼼의 지킴이들의 말과 기억과 보람과 시간과 열정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간 만났던 수많은 지킴이들의 피로한 얼굴과 그럼에도 의연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킴이들의 말과 기억과 보람을 만나고 지켜나가는 일, 아프꼼이 해나갈 일이기도 합니다. 지킴이들,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전쟁과 (국가) 폭력>

 

                                                                                                                                   by_ 신콩떡

지난 25-26일 양 일간 아프콤은 민족문학사연구소와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소명출판에서 후원하는 심포지움 <전쟁과 (국가) 폭력>참석,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추모식 참여,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기념관 및 현장(쌍굴다리) 답사 등을 진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번 답사를 통해 '냉전'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노근리에 직접 가서 그 흔적을 만져보고 전쟁에 '점령당한 영혼'의 흔적들로 우리가 조금이나마 어떻게든 '정동' 될 때, 저희 팀의 2년차 연구주제인 '냉전기의 정념/정동과 공동체'가 그저 '연구주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전쟁상태적 정념과 정서와 영혼을 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품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은 민족문학사연구소와의 만남을 통하여, 더 많은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만들고 연구팀 간의 정동(?)을 일으켜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연구 방향이나 방식이 여러모로 다른 곳의 연구자들과 만나 우리의 지평을 공유하고, 또 확인하는 일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바람으로 참여했던 이틀은 아주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노근리로 가는 무궁화호의 세사람 입니다. (mora님은 사진을 찍으시느라 사진 안에는 없네요..)  노근리가 있는 '영동역'은 KTX가 서지 않는 곳이라 무궁화호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가면서도 노근리에서도 보이는 것은 산과 논이라 배경이 온통 초록이었습니다. 뭔가 옛날의 엠티가는 느낌이라, 누구(..)는 삶을 계란을 찾기도.. 뭔가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기차 안에서도 발표준비에 매진중인 맞장님과 미리 관련 텍스트를 읽고 있는 참연구자 mora님

 

첫째 날의 일정은 심포지움과 이후 이어지는 민족문학사연구소에서 20년에 한 번 개최한다는(그래서 이번이 두 번째라는) 비장의 레크리에이션이 있었습니다.

 

심포지움은 김일환 선생님의 <여성의 전쟁 체험과 순절의 기억: "강도몽유록" 다시 읽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조정이 강화도로 대피하여, 이후를 도모하기로 작전을 짭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 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왕과 세자는 남한산성에 발이 묶이고, 강화도에는 봉림대군과 세자비를 위시한 군사들 및 백성들만이 남아 고립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지도부는 청나라와 강화를 맺고 성문을 열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청군은 유목민의 관습인 '약탈'을 시작하였고 강화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모하였습니다.

<강도몽유록>은 그 당시의 참상을 나름의 '증언'의 형식으로 남겨놓은 작품입니다. 당시 강화도의 참상에 대한 기록과 증언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강도몽유록>의 목소리가 특별한 울림을 지닌다면 그것은 <강도몽유록>에는 강화도에서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이 스님의 꿈에 나타나 전쟁의 책임을 묻는 말을 남기고, 이를 기록하는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일 듯 합니다. 이는 타자인 여성들의 입을 빌려 정치적으로 패전의 명분을 세우고 책임을 피하는 조정의 '공적기록'에 대항하는 '기억'들을 만들어내는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강도몽유록은 '꿈'의 세계를 끌어오고 있으나, 여러 종의 이본들 속에서 '귀신'인 각 여성들이 누구인지를 상당히 명확히 지적하고 있어 단순히 꿈과 허구의 이야기라고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비교 대조를 통해 신원이 비교적 명확히 밝혀진 여성들은 자신의 가문에 속한,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져야 했을 남성들을 비판하고 있으며, 논문은 이 지점에서 발화자로 선정되는 '인물의 선택과 배제'와 배치에 작가가 전하고자하는 정치적 의도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현석 선생님의 <1960년대 소설에 나타난 전쟁경험의 내재화와 자기검열의 문제: 이청준과 김승옥을 중심으로>가 이어졌습니다.

 

 

 

이현석 선생님의 글은 이청준과 김승옥의 소설을 중심으로 '문학과지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문학그룹이 논쟁을 거치며 만들어내는 '정치성'의 내면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과 '정치'는 이들의 소설 속에서 재현될 때, 부재하거나 소거되며 오히려 그 부재의 자리를 남깁니다. 그리고 오히려 커다랗게 다가오는 부재의 자리는 그들이 피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 검열된 내면 안에 침잠시켰던 '정치성'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권명아 선생님의 <전쟁상태적 신체의 정동>이 발표되었습니다.

 

 

삶을 파괴시키는 전쟁의 기억에서 영원히 놓여나지 못하는 개인은 '점령당한 영혼'으로 남아 평생을 '전쟁상태적 신체'로 살아가게 됩니다. 말 할 수 없음을 말하는 북혼학살의 증언자 정윤조씨와 '미쳐버린 채' 혀와 성기를 절단하였던 <할매꽃>의 작은할아버지, 피엑스(학살자의 장소)와 계동(피학살자의 장소)을 왕복하며 뛰는 <나목>의 경아, 평생 글을 썼지만 한국전쟁 당시 죽은 '오빠'에 대해서 끝내는 정면으로 다룰 수 없었던 박완서선생님 등등.. 열전에서 냉전으로 그리고 다시 탈냉전으로 재빨리 전환되어가는 이 세계에, 그들은 여전히 '전쟁상태적 신체'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종료를 선언하는 듯한 '전후'라는 매끈한 균질적 단어 안에는 사실 전환되어버리는 것, 이행되어가는 것, 여전히 남겨지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전히 '점령당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끝내 '발화', 즉 증언하지 못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는 원근법적 조망이 아니라, 그 개별의 '정동'의 떨림을 보고자 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 발표는 그러한 점령당한 영혼의 정동을 더듬어보고자 하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발표는 김응교 선생님의 <노근리, 그 상처와 화해: 정은용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1994)의 경우>였습니다.

 

 

 

김응교 선생님께서 다루고 계시는 주요 텍스트인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생존자이신 정은용선생님께서 발표하신 르포르타주 형식의 실화소설입니다. 미군에 대한 오점을 입밖에 내는 자체가 '빨갱이'이자 '숙청대상'이 되었던 시대를 견디며,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평생을 바쳐오신 정은용 선생님은 결국 <실화소설>의 이름을 빌려, 대중에게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진실을 알렸고, 이것이 AP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보도되며 노근리는 다시 한 번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다룬 텍스트는 많지만 그 중, 이 소설이 가장 특별하다고 한다면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응교 선생님의 논문은 이 특별한 텍스트가 생존자의 '르포르타주'인 동시에 다성적 목소리들을 끄집어내는 '실화소설'이라는 절묘한 위치에서, 어떻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계속하여 마주하고 있는가를 분석하였습니다.

 

 

 

또 이 자리에는 저자이자 생존자이신 정은용 선생님께서 몸소 자리해주시고, 기념사를 말씀해주셔서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경남 선생님의 사회로, 김정녀 선생님, 구재진 선생님, 전승주 선생님, 정구도 선생님께서 토론자로 참석해주시어 전체 논문에 대하여 심도깊은 논의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90년대적 문학의 경계: 배수아라는 문턱 혹은 특이성

 

신현아

 

 

 

 

 

 

1. 세대론과 종말론: 마녀와 X세대의 시간

 

90년대라는 시간은 언제나 ‘세기말’이라는 감수성으로 기억된다. 99에서 00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 모든 윈도

우즈 체제의 컴퓨터들이 작동을 멈추어버려 전 세계가 전산의 암흑과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하는 ‘Y2K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대표되는 각종 종말론적 미신들이 횡행하였고, 철들지 않는 ‘X세대’들에 대한 보도들은 그들이 짊어질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에 더욱 불을 붙였다. 여성들에게는 사랑스럽거나 예쁘기보다도 ‘마녀’처럼 보이게 하는 검은빛 립스틱이 대유행하였다. 어머니도, 누이도 아닌 눈과 입술을 보라색, 갈색으로 칠한 ‘마녀’들과 폭주하다가 그대로 폭파되어버릴 것만 같은 ‘X세대’들이 ‘세기말적 감수성’을 형성하며 매체를 뒤덮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종말론적 서사가 함의하는 것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지 않는 ‘마녀’나 ‘X세대’들로 인하여 지금까지 계승ㆍ발전되며 진보해온 세계가 누구에게도 계승되지 않은 채로 소비되어 끝나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두려움에는 세계의 진보가 기성세대를 부정하고 다시 새로운 아버지가 되는 가족서사적인 세대론적 인정투쟁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세대론적 공포는 문학장에서도 나타났다. 이는 문학, 또는 근대적 글쓰기의 대표인 ‘소설’이 근대적 주체화의 도구인 동시에 근대적 주체의 탄생에서부터 세대론적 인정투쟁과 계승을 반복케하는 장치로 기능해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근대문학의 종언’에는 이제 소설이 그저 오락이 되어간다는 것, 그럼으로써 소설이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판단과 함께 근대적 글쓰기로서의 소설이 더 이상 근대적 주체화의 중요한 장치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는 암담함이 함께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암담함’은 90년대 문학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자주 출몰하는 수사인, ‘내면적’, ‘내성화’, ‘나르씨시즘’, ‘세계(혹은 역사나 현실)와 무관’, ‘탈사회성’, ‘탈정치적’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수사들은 ‘90년대 문학은 80년대의 계급/민족 담론과 같은 거대담론에 대한 환멸로 인하여 개인적 쾌락을 추구하며 내면으로 침잠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요구와는 유리된 채 나르씨시즘에 젖어들었다’는 내러티브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개인적이고 자폐적인 아이들’로 인해 아버지를 계승하는 세대론적 반복이 단절될 것이라는 공포와 함께, 문학장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소설’의 본령이 정의되는 방식을 함의한다. ‘개인적’, ‘미시적’, ‘사소함’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소설은 그 서사를 통하여 사회의 ‘주요 모순’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개입하고, 현실의 질서에 저항하고 대립함으로써 정치성과 사회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다시 ‘아버지’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스스로를 다시 ‘아버지’라는 주체로 세우는 세대론적 서사에 대한 요구와도 정확히 겹친다.

 

물론 90년대 문학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존재한다. 더 이상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고, 시대의 변혁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세대론적 서사가 아닌 ‘다른 주체성의 서사’에 대한 시도(권명아)로 보거나 ‘섹슈얼리티와 가족 제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제틀이 다원적으로 드러난 것(이광호)으로 보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렇듯 90년대라는 시공간은 세대론적 서사의 종말에 대한 공포, 정치적ㆍ사회적 위상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이야기를 벗어난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실험, 다양성과 차이를 전제로 하는 문제틀의 다각화와 같은 다양한 입장들의 각축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90년대라는 특별했던 시공간 속에서 ‘글쓰기’를 통하여 ‘세대론적 서사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과 ‘삶의 특이성을 쟁취하는 시도’가 어떻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를 보고자 한다. 즉 ‘내면적’, ‘관념적’, ‘탈정치적’, ‘탈사회적’이라고 이야기되는 90년대적 문학의 서사가 소설의 경계를 벗어나는 글쓰기(에쎄)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삶에 대한 열정’이 발현시키는 방식을 살피고, 그러한 열정이 결코 ‘개인적’이거나 ‘자폐적’ㆍ‘내면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모순과 같은 ‘대의’를 담보하지 않고서도, 그 자신의 삶에 의미와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을 통하여서 새로운 관계의 이론과 정치성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식을 보고자 함이다.

 

2. 근대적 글쓰기가 요구하는 서사가 아닌 글쓰기

‘90년대’ 또는 ‘90년대 문학’이라는 담론장 속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90년대의 문학들에게 부여되는 수사들 간의 각축장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배수아의 소설에 내려지는 ‘소비적’, ‘개인적’, ‘향락적’, ‘탈가족적’, ‘내면적’, ‘여성적’이라는 평가들이 한편으로는 90년대적 문학에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평자들의 입장과 정확히 겹치며, 배수아의 이름이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배수아의 소설 속에서는 가족적인 이야기나, 새로운 남자를 만남으로써 주체가 되는 여자아이의 성장서사와 같은 것들이 비틀어져서 나타난다. 소설 속의 불안한 아이들에게는 명확한 부모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가족관계에는 언제나 ‘사촌’, ‘배다른’, ‘사생아’과 같은 불명료한 관계들이 삽입되어있다. 여기서 부모는 투쟁이나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모호한 기원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커서 왕을 만나는 강청같은 여자가 될 것을 요구받으며, 자신이 공주라는 꿈을 꾸지만, 실제로는 오리장수의 딸일 뿐인 권태로운 일상만이 이어질 뿐이다(「프린세스 안나」). 이처럼 권태로워진 아이들은 파괴적으로 연애를 하고 파티를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 또한 일상이다(<랩소디 인 블루>). 그러한 삶의 마지막은 나이들고 지쳐, ‘조용히 죽어가기만을 바라’며, ‘더 이상의 일은 이제 생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예감만을 남긴다(<부주의한 사랑>). 결혼은 실패하고, 관계들은 깨어져 홀로 남는다(「한나의 검은 살」, 「장화 속 다리에 대한 나쁜 꿈」). 그러니, 배수아의 소설이 ‘번역투’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단순히 ‘한국어 문장’의 번역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문법 바깥의 언어를 마주하였을 때의 불편한 감각이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다시 자신이 새로운 아버지가 되는 청년ㆍ남성의 세대론적 인정투쟁의 서사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소설 속 ‘여자아이’들에게는 ‘아버지’ 또는 ‘새로운 아버지’인 남자 형제들의 속에서 ‘공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는 것 역시 형제적 관계 속에서 벗어나는 순간 바로 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마지막의 끝없이 권태로운 일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로서 남는 시간뿐이다. 그러나 이 때 ‘나’로서 남는, ‘나’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는 결코 자기폐쇄적이거나 자기고백적으로 포장된 자기애적인 서사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나’를 통하여 가부장적 아버지의 세계의 구조에 도달하는 동시에, 그 구조에 편입되지 않고 실패함으로써 오롯이 다시 ‘나’로 남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아무도 반역하지 못하고, 아무도 반란의 음모를 꿈꾸지 못하고 아무도 저항하지 못’(「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심야통신>,p137)하는 이 삶들은 현실의 질서에 저항하고 대립함으로서 정치성을 획득하고 사회에 복무한다는 소설의 본령과는 관계가 멀어보인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은 ‘나 바깥의 불결한 오물’과 싸우라는 지속적인 ‘요청’(김영찬)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족의 이야기, 세계와 대결하는 정치성, 부정과 계승을 통한 세대론적 반복의 서사라는 문학장 속의 소설의 문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배수아의 소설은 그러한 문학장 내의 소설의 공동체적 문법이 아닌 글을 쓰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선언과 도약의 기미를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발견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유로운 글이란 그 형태로나 내용으로나 이미 규정되어 있는 어느 폐쇄된 영역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p197)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이라는 서사의 형태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주된 내용은 독일에 온 ‘나’가 과거 독일에 왔을 때 함께 하였던 M과의 기억을 회상하며, 점점 M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독일에서의 현재의 기억과 과거의 기억은 교차하며, 명확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야기 속의 ‘나’가 작가 자신을 지시하는 듯한 기호들이 반복되면서, 이야기는 종이를 뚫고 현실로 자꾸만 현실로 돌출해 나온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소설이기보다는 그 제목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시도하는(‘~essai sur’) 글쓰기로서의 ‘에세이Essai’라고 하는 것이 적확하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나’는 적극적으로 고독한 이방인으로 남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대의나 공동체적 가치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하나의 특이한 것singularity으로서 만들어나가는 생의 실험 자체로 가능한 것이다. 교실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라 트라비아타>보다는 ‘아바’를 열심히 들었던 ‘나’가 차라리 영화관의 군중 속에서 고립되는 것을 원하게 되는 것으로의 변화는 그 작은 징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특이성’의 텍스트로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M과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놓는 일 그 자체이다. “네가, 뭘 했느냐 하면 말이지, 단지 네가 한 것은 M이 부자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 그것뿐이잖아.”라는 말로 손쉽게 ‘오해’되어버리는, 이방인인 ‘나’와 연약하고 가난한 M이 나누었던 누구에게도 완전히 전달될 수 없을 시간을 되새기고, 이 시간이 자신에게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의미를 부여할 때, ‘나’의 삶은 환원될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즉 이러한 행위는 아버지ㆍ형제ㆍ대의와 같은 공동체적 주체화의 문법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생을 기투하는 시도를 통해 삶의 특이성을 견지함으로서, 자신이 통과한 하나의 세계를 해석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세이’ 또는 ‘글쓰기’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특이성을 갖게 하는 시도로서 기능한다.

‘나는 미래와 과거 사이의 어느 유동적인 부분에 머물고 있을 뿐이며 미래 혹은 과거가 지금의 나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있었으며 글쓰기로 인해서 나는 미래 혹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다시 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M을 생각했다. (p165)’


여기에서 ‘나’는 M을 생각하고, M과 나눴던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것이 ‘나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유동적이고 지속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글쓰기’를 행하고 있다. ‘소설’을 벗어난 ‘에세이’는 근대적 주체화가 요구하는 ‘성장’이 아닌, 자신의 삶의 특이성을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정박점으로 출현한다.

 

 

3. 삶의 특이성과 관계의 방식

이러한 삶의 특이성은 여전히 ‘자의식의 근원의 재현’, ‘강한 정신주의’, ‘나르씨시즘적 기획’(김영찬)과 같은 ‘개인적’, ‘자폐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이는 ‘삶의 특이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특이성을 갖는 것은 너의 삶의 특이성과 충돌하고 난 후에야 뒤늦게 도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특이성의 관계들 사이에서 타자는 대의와 같은 것을 담보하지 않더라도, 그 특이성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가능하다.

M은 몇 마디의 구호나 텔레비전 토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M은 마치 그림이 전혀 없는 책과 같았다. 내가 영혼을 바쳐 읽지 않으면, 나는 M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나는 내가 M을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만날 수 없으며, 그 기회를 내가 영영 잃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M에 대한 그리움을 멈추지 않았다.(p157~158)


여기서 M이 ‘나’에게 ‘영혼을 바쳐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책’일 때, 그것은 누군가의 삶의 특이성은 그 자체로 다른이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텍스트임을, 따라서 그러한 특이성 속에서의 관계는 ‘영혼을 바쳐서 읽는 것’일 때에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즉 그 삶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각 개인은 영혼을 바쳐 읽어야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에세이’가 ‘M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시작’되었던 것처럼, 내 삶의 특이성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끝없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되돌이키고, 그것에서 받은 의미를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나’의 안에서 정착가능한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M’과 ‘나’가 처음 만나 서로에게 정동되기 시작하던 첫 만남의 순간에서 끝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오랜 시간 오직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서 고독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인 것처럼 보였다. 교습법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중에도 나는 M에게 서서히 끌려가고 있었다. 내 표정에서 M은 당황과 불안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M은 흔들리지도 않았고 침착해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M이 고백하기를, 그때 자신도 몹시 떨렸으며 진정하기 위해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고 심지어 우리들에게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던 M이 그 상태로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내가 중단한 부분을 계속했다.

“......서로 관통하고 작용한다.”


이처럼 삶의 특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서로의 관계가 ‘관통하고 작용’하는 결과가 뒤늦게서야 찾아오는 과정이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글쓰기를 통하여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이 때의 ‘글쓰기’는 ‘아버지’와 같은 세계와 대결하거나, 또는 계승하여 다시 자신을 주체화하는 세대론적 서사의 반복을 벗어나면서 각 개인은 어떻게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타자와 관계맺는 것이 가능한가를 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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