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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f-com 웹진 1호 정념과 어소시에이션.pdf

 

 

 

 

 

 

 

 

 

 

 

 

 

 

 

 

 

반짝임,

그 순간의 무늬

 

무더웠던 20128월의 여름,

한일 국제 워크숍 <냉전의 감각과 정념의 공동체>을 니혼대에서 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 아프꼼(aff-com)팀원들과 그 만남에 ''해주신 분들의 메시지를 담아 돌아왔다. 이 메시지는 아직 오지 않은, 또 다른 미래의 만남을 위한 정표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만남과 연대의 기억들로 아프꼼(aff-com)도 이후의 웹진작업을 이어나갈 예정이며, 그 속에서 연대의 쾌락과 외로움, 슬픔, 기쁨들이 기록되어 지길 바란다.

 

 

by_ 신콩떡

 

 

 

 

 

 

 

 

 

 

 

준비해오시고 준비해주신 모든 분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시 즐거운 시간 함께 보낼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일본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돌아가시길 빕니다.

2012. 8. 감사한 마음을 담아. 신지영

 

 

오늘 여러 가지 부족한 일본어 실력으로 선생님들의 말씀이

잘 전달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냥 이야기를 나눌 때도 '오해'는 생기는 법.

이것도 하나의 의사소통법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언젠가 다른 곳에서 또 만나뵙기를!!

류충희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또 만나요.

고영란

 

   

오늘 하루를 위해서 몇날 며칠을 준비하신 아프꼼 분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권명아 교수님, 양순주 선생님, 신현아 선생님,

송진희 선생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한 하루였어요.

또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나 뵙길 바랍니다.

2012. 8. 11. 이현준

 

 

오늘은 갑자기 끼어들게 되어서 죄송하고요,

그래도 마지막에 여러분들과 말씀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또 도쿄에 오실 때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

신혜원

 

 

   

今回々なになって翻訳を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翻訳何回やってもしいですとても勉強になりましたしい出会また出会いなおすことがでたよいでした감사합니다.

Takahashi Azusa

 

 

 

とてもしいでした普段硏究ではなかなかられたい議論がありとても有意義誕生日(!)をすごせましたそしてなんだが元気ましたあれがとうございます

德永

 

 

東京부산態本 함께 한 날, 감사합니다. ^^

신명직

 

  

でした準備翻訳通訳など今日えてくたさったほんとう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次回もまた刺激的にできればとってい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Nakaya Izumi

 

 

素人その運動わりたいとdたことまた日本でもっと一般々が自律的大学っり民衆運動をしていくことが大切だとうから

Nezu Soshi

 

 

ひらいさんのんで地下大学にくるようになりましたガソリンスタンドではたらいていますじぶんの人生をもっとくしたいので参加しています

淸水 士郞

 

 

Do it yourself, Create Anarchy!

Keisuke Nareta (Irregular Rhythm Asylum)

 

 

 

 

 

 

 

 

 

 

 

 

 

 

 

 

 

 

고독의 시간과의 만남: 인문학과 제도를 묻다

니시야마 유지 인터뷰

인터뷰어/aff-com

2012.8.14/일본대학 문리학부의 고영란 선생님 연구실

 

 

 

aff-com

국제철학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인 <철학에의 권리>를 토대로 니시야마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안과 밖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프꼼의 경우 대학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여러 가지 발명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제도 안과 밖을 오가는 실험들에 대해서 온전히 학교/제도 밖에서 움직이시는 분들의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니시야마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저의 다큐멘터리는 우선, 쟈크 데리다가 만든 콜레주(국제철학학교)에 대한 것이지만, 데리다를 소개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 인문학, 철학에 있어서의 현상과 문제점,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큰 문제의 틀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실존적인 입장에서 나온 물음이기도 합니다. 제가 연구원으로 있었을 때에 3년 계약이 끝나면 무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제가 제도의 안과 밖,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하는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의 안과 밖을 다른 말로 하면 제도와 운동이 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대학을 제도의 안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것을 밖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의 구분을 엄밀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안과 밖 구분 없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대학에서 하는 수업에도 대학 밖의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활동을 대학 밖으로 열어가는 것이 작은 것으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홈페이지의 활동을 들 수 있는데, 해외에서의 활동과 수업에 관한 기록들 모두를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즐겁기 때문입니다. 대학 안에서 학생들을 통해서 연구와 교육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밖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aff-com

대학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위치가 바뀌었을 때 자신의 포지션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부분 역시 많은 이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하십니까.

 

니시야마 유지

저는 한국에 몇 번 간적이 있습니다. 연세대, 서울대, 성균관대에 갈 때마다 <수유+너머><철학 아카데미> 분들과 함께 갔는데 매번 느낀 것은, 한국에는 제도의 안과 밖의 구분이 확실하게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수유'에 가면 제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공부에 대한 순수한 커뮤니티에 관한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그러한 것이 없는 듯합니다. 일본에는 대학원생만 26만 명이고, 대학은 국립이 150, 사립까지 포함해서 770개 정도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한국의 대학원생의 수는 24만 명이고 대학의 수는 160개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두 나라를 비교해 본다면, 한국은 우수한 대학원생이라도 대학 안에서 직장을 얻기가 어려울 듯하고, 역으로 말하면 질이 높은 코뮨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체적으로 좋은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긴 세월 비정규직으로 있었고, 지금의 준교수 포지션은 32세에 얻었습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면 불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게 사실이지만, 비정규직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는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내셔널 아카데미>가 있는데 그 산하에 <영아카데미>가 작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학자의 국회'가 신설된 것입니다. 현재 영아카데미는 30, 40대가 주축이며, 같은 젊은 세대들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아카데미는 세계 각국에 만들어져서 서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비정규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만, 또한 그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aff-com

니시야마 선생님이 일본에서 활동하시는 지평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국제철학학교나 연구모임과 같은 성격의 '공동체'들에는 한편, a라는 개인이 모여 하나의 공론장을 만들고, 공론의 제도를 통해서 '사회적인 개인들'의 목소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꼼은 '컨스텔라시옹'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지평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아지트'가 홀로 서있기 보다는, 다른 아지트와 만나고 접속하여, 전체적인 시야 안의 차이와 연대의 지평 속에서 관계를 통하여 계속 자신과 다른 이들이 함께 변해가고 움직이는 것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은 a들의 연대를 통해 생겨나는 공론장과 그 공론장 속에서 a들이 사회적인 발화를 해나가는 의미들을 통해서 이 '지평'의 의미를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일본 같은 경우 '지하대학'이나 'WINC', '코엔지', '자유대학'과 같은 크고 작은 아지트들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아지트'들 간에 어떠한 어소시에이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니시야마 선생님의 활동은 이러한 아지트들의 지평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니시야마 유지

짐작하기로는 부산이라는 지역이 서울보다는 크지 않고, 대학도 많지 않을 듯한데 제도 안/밖에서 아프꼼의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들으면서 굉장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밖의 활동과 연결되는 부분에 있어서 공동체나 코뮨의 문제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WINC는 대학의 안에서 그러한 재원을 받는 것이고, 코엔지는 재원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각각의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도 밖의 '얼터너티브'라고 할 때에, 이는 결국 자본의 얼터너티브라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꼼은 제도 밖이기도 하고 안이기도 한데, 사회적인 연결 자체가 제도 밖과 안을 나누지 않고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방법을 취하신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인문학의 어소시에이션을 말씀하실 때 먼저 코뮨을 만들고, 그 다음에 코뮨과 코뮨을 연결시키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역으로 인문학에 필요한 것은 고독(solitude)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박사논문은 <고독과 우애와 공동체>에 대해서 다룬 것입니다. 저는 여러 나라와 각 대학에서 영화를 상영하면 할수록 혼자가 되고 싶다, 고독해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혼자서 책을 쓰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나 가치들을 현재 사회 속에 어떻게 연결시키는가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인문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고독, 즉 혼자서 책을 내고, 혼자서 쓰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 중입니다.

 

니시야마 유지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를 보면, 국제철학학교의 내부적 결속이 어렵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국제철학학교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공재'로서의 구조로 존재하고 있고, 그 곳에서 강의하고 참여하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구조를 '통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열린 곳으로, '공공재'로서 존재하고 있으나 반대로 내부적인 결속은 어려워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공동체'에서 '내부적인 결속'이라 했을 때, 그 결속이 갖는 층차가 주는 고민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시야마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내부적인 결속의 어려움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아프꼼이 affectcommune의 합성어인데, 먼저 일반적인 지금의 근대적인 사고에서 생각하면 굉장히 부정적(negative)이고 위험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대는 사회와 계약에 의해, 그 계약을 넘어섬으로서 계약을 한 개인들의 관계성에 의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다음 단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코뮤니티의 com-, 유니온이라 것은 하나의 가치가 전제되어, 원래는 커뮤니언(communion)이라는 기독교적인 단어이며 '다같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위화감과 같은 것이 근대화의 과정에 한 가지로 있었으며, 아프꼼에서 사용하는 공동체와 같은 단어에도 이런 위화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합쳐서 아프꼼이라고 사용하는 것은 매우 강한 선언이 아닐까 하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공동체(community) 대신 '공공성(public)'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하나의 원리가 아닌 보다 열린 장소, 또한 정념이 아니라 '관심(interesting)'을 공유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관심(interest)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보면, '하나가 아닌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는 조금은 드라이한 이미지로, 공공성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지금 커뮤니티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에도, 예를 들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오히려 정동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이'에 있는 이탈가능한, 참여가능한 그리하여 빠지거나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의미로 공동체를 구현시키고 그런 공동체가 긍정적(positive)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아프꼼이 정동이나 공동체라는 말을 간판으로 내건 것은 처음부터 아주 큰 과제, 문제의식을 짊어지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큰 도전이고 모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aff-com

근대적인 사고에서 정동이라는 것은 이성이나 사회적인 계약이라는 것에 비해, 부적절한 것들이라고 간주된 것으로 이제까지는 부정적인 에너지로서 이야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동체라는 것은 블랑쇼가 얘기했듯이 '불가능한 공동체',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오해를 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그 말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아직은 오지 않은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함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할 말을 찾아야 함을 환기하는 것이지, 공동체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그 말을 사용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합니다. ^^

 

aff-com

한편으로 오랫동안 존재했던 대안 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고립되지 않기 위한 어소시에이션을 만들며 외부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러다보면 고독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됩니다.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의 노동들이 고독할 수 있는 내면의 에너지를 소진시켜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면에서 홀로 공부하는 것, 즉 학자로서 글을 많이 써나가고, 그것을 통해서 세계에 기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든 공공적인 의미로든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시야마 선생님의 고민이나 이후 활동의 잠정적 방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니시야마 유지

지금 고독인가 고독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비슷한 논점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필요한 것은 다른 분야와 비교하면, 돈보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문학은, 사람이 천문대를 만들어 방대한 돈을 들여 운영하고 있으나 그것이 중단되면 천문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상대적으로 그 정도로 돈이 들지도 않습니다. 두 가지 극단적인 시간의 속도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연결되거나 활동을 할 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소모됩니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시간은 놀랄 정도로 굉장히 느리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주간 1회의 수업에서 프랑스어로 2-3페이지 정도 천천히 진도를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회적인 관념과는 다른 느린 시간의 흐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인문학의 하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aff-com

아프꼼은 국제철학학교와 같이 젊은 연구자나 이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국제철학학교도 이러한 점에서의 제도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국제철학학교는 프랑스의 사례이고, 아프꼼은 한국에서 그런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니시야마 선생님은 일본이라는 문맥에서 그런 활동들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또한 니시야마 선생님이 하고 있는 작업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젊은 세대들과의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니시야마 유지

저는 지금 <인문학과 제도>라는 논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돈을 투자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연구를 장려하거나, 대학 내의 새로운 학과나 학부를 만들거나 하는 등의 새로운 제도가 많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어떤 인문학 제도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대학에 있어서의 여백 혹은 공백에 대한 부분, 그 안에서의 실험적인 제도를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이러한 논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전환점에서는 레지스탕스로서의 인문학이라는 제도가 생겨났기 때문에 우선은 과거의 그러한 것을 모아서 살펴보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젊은 세대들과 연결될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여러 장소에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하면서 만나거나, 상영회를 하면서 일본의 전국 대학을 돌면서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영화 상영회를 할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한국 등에서 사귄 친구들이 같이 동참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유동적인 관계성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Interview: Passion for another life

희미한

불빛의

연대기

 

 

 

아프꼼(aff-com)의 이름과 언어에는 언제나 '만남'이 스며있다. 아프꼼의 안에서의 만남, 바깥에서의 만남, 아프꼼과의 만남, 만남, 만남. '만남'으로 하여, 나도, 당신도, 아프꼼도, 즉 우리는 언제나 다른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 변화의 모습들은 너무나 미미한 그리하여 또 희미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만남'의 연대기(年代記/連帶記)를 남겨보고자 한다.

 

<인터뷰: 희미한 불빛의 연대기>는 아프꼼에서 기획 중인 다큐멘터리 <Passion for another life>를 촬영하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인터뷰의 시작을, 그간 해 온 <인터뷰a>의 형식에서 그 이행의 흐름을 더듬어본다. association 속의, 또는 agit 속의 하나 또는 한 명인 'a'를 찾아서. 그리고 세속의 물결 속에서 떠내려 갈 듯한 진지-agit를 말없이 지키는 a에게서 말을 캐내어, a들을 agit, agit들을 다시 association으로 이어내려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aagit가 홀로 빛나다 사라지지 않도록 그 사이-사이 연대의 선을 긋는 지도를 만들어, 그것으로 세속의 물결을 함께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다시 되짚었을 때 'a-agit-association'으로의 직관적인 이어짐은 한편으로 어떠한 '낙관'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코뮨' 또는 '공동체', 즉 체제의 물결 속에서 다른 삶의 길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모임의 안에서 '낙관''기쁨'은 늘 수많은 실패와 상처, 슬픔에 뒤이어서야 겨우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낙관''기쁨'은 늘 수많은 미래의 언어를 갖지만, 수많은 실패와 상처, 슬픔은 늘 과거의 언어로만 남아 애써 잊혀지거나 지워질 따름이다.

 

그러니 실은 우리가 그 a-들에게서 찾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a-agit-association' 의 사이를 위태롭게 잇고 있는 한 가닥의 '이음'이 갖는 낙차에 대한 것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의 질문은 이제 '슬픔'으로 이행되어 간다.

 

그러나 '슬픔'의 안에는 언제나 한 가닥의 기쁨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긴 어둠 속에서 하나의 희미한 불빛이 잠시 빛나 간신히 다른 불빛에 닿는 순간, 그 희미한 불빛들의 만남은 막막한 어둠과 함께 조우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을 물으며, 비탄과 자조의 후일담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말을 길어내고자 한다.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마음과, 막다른 곳에 도달했던 마음, '함께-있음'을 갈망했던 마음이 있었던 자리들이 폐허로 남지 않기를. 그리하여 실패와 상처, 슬픔이 더 이상 후일담으로 소비되지 않고, 그 다음의 더 나은 실패를 향해 다시 나아가는 힘이 되기를. 그리고 그 순간의 빛남과 어둠이 과거의 말로 잊혀지지 않기를. 우리의 기록이 그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이유이다. 빛나는 그 순간만큼은 꼭 기쁨이 아니더라도, 찬란할 것이다. 그러므로 희미한 불빛의 연대기는 끝내는 종결되지 않을 '이행'의 선상에서, 그 슬픔과 상처, 미래의 언어를 길어내기 위한 시도이자 기록이 될 것이다.

 

 

 

 

 

코뮨: 어둠의 말, 반짝임의 연대

 

신지영 인터뷰

 

 

인터뷰어/aff-com

2012.8.12/ 도쿄 신주쿠의 사회과학서점 모색사(模索舍) 앞 까페

 

 

 

 

aff-com

신지영 선생님에게도 연구자로서나 개인의 생애사로서나 일반적인 경로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과 일찍 어린시기에 만나온 경험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러한 궤적과 경험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에 있어서는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신지영

저는 꽤 개인적인 사람이었는데도, 늘 집단에 있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집단'에 대한 첫 경험은 인하대 걸개그림동아리 '터갈이'라는 곳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과학을 책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걸개그림을 그리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배웠어요. 처음엔 데모에 가자고 하면 안 나가겠다고 하거나, 그런 선배들과 싸우기 위해 맑스주의 서적을 보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때 동아리에서 겪었던 공통의 경험들이 너무나 가슴 뛰었습니다. 저희는 커다란 걸개 그림을 옥상이나 강당에 펼쳐놓고 함께 그리곤 했는데 수업을 듣다 나오면 그림이 바뀌어있고, 전혀 다른 그림이 되어가고, 노래 부르고, 이야기하고, 그 때의 바람과 하늘, 그 공간의 기억이 원형으로 남아있습니다. , 저는 낯을 많이 가리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도 잡일을 주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잡일을 해야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일하면 낯을 가릴 수가 없으니까요. 그게 공동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괴로운 순간도 많았지만 빛나는 순간을 기억해 보면, 우리가 모두 반짝반짝했던 것 같아요.

 

aff-com

선생님이 갖고 있는 원형의 기억이나 관계와 일에 대한 말들이 집단이라는 '현장' 속에서 함께 몸으로 움직였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순간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러한 경험들이 신지영 선생님의 연구주제로도 이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지영

'수유+너머'에 가서는, '수유+너머'가 근대성과 자료읽기로 시작했기 때문에, 자료 읽는 연습을 참 많이 하면서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석사와 박사논문 주제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연설하고 좌담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고 논의하는 장소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원래는 더 뜨거운 공간을 보고 싶었습니다. 공식적인 담론장이 아닌 비공식적인 담론장을 다루고 싶어서, '소문'같은 공간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렇게 말과 언어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몸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연설, 토론에 대해서 쓸 때도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더 생생한 것들, 그러니까 코뮨, 공동체 등에서 느꼈던 것을 풀어낼 수 있는 주제를 꼭 다루고 싶었습니다. 제 공부는 근대성, 자료읽기, 한국문학과 같은 것과, 사회학, 철학, 운동사나 활동과 같은 것이 늘 함께 가는데, 그러면서도 그 둘이 분리되어 있었어요. 현재 일본에서 하고 있는 '1950년대 서클 마을'이라는 주제는 2008년에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제 문제로 느껴졌고 늘 분리되어 있던 두 가지가 합쳐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왜 이렇게 하지 못했지, 나는 그때 왜 이 말을 하지 못했지, 이건 우리가 더 잘했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내 문제로 바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다니가와 간(谷川雁)을 번역하겠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공부를 하면서 모리사키 카즈에(森崎和江)나 이치무레 미치코(石牟禮道子), 그리고 <무명통신> 만났어요. 1950년대 서클 운동도 여러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초기적 형태의 서클들도 있고요. 그 중에서도 큐슈 지방의 <서클 마을(サークル>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활동이 기존의 서클 마을에 대한 비판을 함께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나, 코뮨 안에서의 문제들, 어둠 속에서 생기는 어둠 같은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훨씬 깊고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공부하면서 비자도 장기간으로 받고, 또 내 글을 읽어줄 수 있는 제도를 찾았는데, 박사과정만한 것이 없더군요. 그래서 어차피 글을 쓸 것이라면 박사논문을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사상사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마을들을 연결시켜서, 내가 고민했었고, 수유+너머가 고민했었고, 대추리 지킴이들이 고민했었고, 홈리스 운동들이 고민했던 것들, 고민하고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제 스스로 역사 속에서 만나는 말들을 통해서 그런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여전히 코뮨이나 운동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를 계속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게라도 그런 것들을 꼭 해야지 라고 늘 생각하고 지금도 조촐하게나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명이건 여섯 명이건, 세 명이건, , 셋은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요. 둘은 서로 시선이 분산이 안 되니까 안 되고, 셋만 되면 일단은 된다고 생각해요.

 

aff-com

그렇지요. ''이라는 건 사실 작은 힘이죠. 선생님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작은 힘에 대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큰 사회 전체를 환기시키고 역사의 기획으로 남아서 이 시대의 대표로 남는 것만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지 않고 사람들은 몰라도, 나름대로 자기 바닥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처럼 말이지요.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세상을 바꾸기보다 자기 '바닥'을 변화시키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런 의미로 이 '바닥들'에서 남들은 잘 모르지만,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을 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신지영 선생님에게 그 바닥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듣고 싶기도 합니다.

 

신지영

다니가와 간의 글 중에 인상 깊었던 말 중에, ''연대의 쾌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모여서 심포지엄을 하고 책을 내는 것도 연대의 쾌락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과는 다르게, 이 모임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었고, 저기도 저런 문제가 있었고, 그리고 그 비슷한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면 그건 인류 사상 단 한 번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밖으로 나가서 집회를 하는 것과 안에서 바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위해 밥을 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중요한 운동이냐는 것처럼. 길 위에서 써야 한다고는 하지만 내가 내 안의 내밀한 문제들을 더 깊이 고민하고 글을 쓰기 위해 내 안으로 침잠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은 늘 부딪힙니다. 그 문제들은 인류사상 한 번도 해결되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거리에서 무엇인가 공론장이 벌어지고 만들어지면 그냥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리에서도 밥 짓는 사람이 있어요. 또 청소하는 사람도 있지요. 또 밥 짓는 사람들 속에도 집회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또한 사람들은 왜 둘만 모이면 권력관계가 발생하는가, 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 버릴까, 정말 가난한 사람들끼리는 더욱 연대하기가 어려운가, 단지 우리의 선입견일까? 권력이라고 다 나쁜 것인가, 등등. 이런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연대의 쾌락인 거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이런 고민을 나누는 것, 코뮨의 고민을 나누는 것, 이게 연대의 쾌락이 아닐까요.

 

aff-com

우리가 부대낌을 에너지로 바꾸는 발명을 하겠다는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아프꼼은 우리가 하고자하는 작업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체가 그 안에 하나의 관계의 축으로, ''라는 대표성을 갖는 게 아니라 이 멤버들이 모두 대표성을 갖고 그 안에 기입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기쁨의 정념도 있고 부정적인 정념도 생겨나는데, 신지영 선생님이 서클운동 속에서 부정적인 정념을 보고 싶다는 것처럼, 희망으로서 이후의 기쁨에 대한 에너지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중요해도 막상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무게들이 아닌가, 합니다. 당위로서의 기쁨, 도래할 미래에 대한 말은 너무나 많지만 현실이 받아 안고 있는 무게, 부대낌이 주는 힘겨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그 말은 금기시되었고 코뮨 내에서도 코뮨을 해치는 것으로 취급되거나, 청산에 대한 말로 취급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도 지금도 이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말을 갖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지영

거대한 슬픔과 거대한 기쁨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기왕에 <무명통신>을 봤었던 것은, 실질적인 문제들을 지적하면서도 그런 삶의 중력을 피하지 않고서 공유감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뻤던 순간에도 늘 슬픔이 함께 했었고, 아주 슬픈 순간에도 들여다보면 어둠 깊숙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기쁨이 있었고, 그 무게감과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코뮨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말들을 <무명통신>이나 여자들의 탄광에서 보려는 거예요. 물론 그곳에는 모리사키 카즈에라는 훌륭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이 그 말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무명(無名)의 여성 탄광부들과의 활동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사키 카즈에''이에요. 무명입니다. 무명. 그런데 사실 무명은 정말 슬픈 것이지요. 숨막히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슬프지만, 이름이 없는 것이 얼마나 슬픈가요. 근데 이 슬픔에는 어떤 계기들이 있어요. 그런 상태로 돌아가서 그 여자들은 말을 만들어냅니다.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이지요. 그게 곧 자신들의 말을 만드는 것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걸 표현한 거 같습니다. 그 슬픔과 자신들이 갖고 있는 원한과 슬픔과 부정적인 정념의 거대한 에너지들. 그 속에서 태어나는 말들그리고 <무명통신>이나 여자들의 말이나, 서클 마을을 통해서 그런 말들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 식으로 말하면 원한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니체가 매우 비판한 낙타의 감성이 갖고 있는 그 에너지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반짝임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쌈짓돈이라고 했었던 건, 쌈짓돈을 꺼낼 땐 늘 한숨과 함께 꺼냅니다. 한숨이 왜 나냐면 없는 살림에 꼭 필요하면 쓰려고 혹은 보물처럼 모아 두었던 것인데, 결국 꺼낼 때에는 남을 위해서 꺼내게 되는 것이거든요. 가족이나 자식이나......내 소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유를 위해서, 즉 공유를 위해서 꺼내는 돈이지요. 따라서 쌈짓돈을 갖는다는 건 소유가 아니라 점유입니다. 공유를 위해 꺼낼 돈을 점유하는 방식이에요.

 

사실 공동체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건 소유가 아니라 점유입니다. 소유는 원래 없기 때문에, 공유되어 있는 것들을 누가 얼마나 센 힘으로 점유하느냐가 중요하지요. 따라서 점유가 소유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소유의 형태를 띤 점유가 아닌 방식의 공유가 가능한가라는 걸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쌈짓돈에는 바로 이것들이 다 같이 뭉쳐있는 것 같아요. 쌈짓돈을 모을 때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슬픈 정서와 애달픔을 공감하고 공유하고 있고, 세월이 지날수록 쌈짓돈에는 그런 체취들이 배어들지요. 꺼낼 때도 내가 꺼내지만 그 순간 소비하는 개인이 있는 게 아닙니다. ''라고 할 때에도 다른 여러 ''들이 함께 있고, '나의 쌈짓돈'을 꺼낼 때에는 나처럼 갖지 못한 사람들 가족들 갖지 못했던 세월들이 한숨이라는 정동이 되어서 섞이지요. 이 쌈짓돈을 '꺼내는' 이런 지점을 말로 끄집어내면요, 이처럼 쌈짓돈 '꺼낼 때'가 바로 슬픔의 정동이 또 다른 정동으로 이행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삶을 향한 발걸음들,

        기쁨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길들

 

ㅡ<정념과 어소시에이션> 웹진 1호를 발간하며

 

권명아 (aff-com)

 

 

 

 

 

 

1.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연구모임 a, 아프꼼(aff-com),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aa-ff-com이 된다고 해서,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견고한 제도의 벽이 흔들리지도 않으며, 관성적인 일상적 삶의 패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서로에게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기이한 쾌락을 얻는 동종 집단의 폐쇄적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그 안에 단 하나의 타인(타자가 아닌)의 존재조차 용납하지 못한다. 형님-동생들은 여전히 자기들 외의 모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뒤얽혀 하나가 되고, 인문학은 일주일의 속된 삶을 '속죄'하는 주일의 교회가 된지 오래다. 웹진 하나가 이 세상에 더 추가된다고 해도, 이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프꼼은 대단한 이념을 표방하는 반제도권 조직도 아니고, 학문적 이상을 높이 내걸고 쇠락한 인문학계를 구원하려는 야망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는 것일까? 아마 그 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지 않을까? 혹자는 내게 강박적으로 이 일에 매달린다고 하고, 혹자는 끝없이 아프꼼의 정체를 심문한다. ''너희는 무엇이냐''라고. 아프꼼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무엇을 행하는 것, 그것이 아프꼼일 뿐. 그렇다.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 집요하게,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매달리는 것. 이러한 매달림, 끈질김이야말로,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모든 것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불안한 이 시대에 우리가 취할 수밖에 없는 실천의 방식은 아닐까?

 

아프꼼은 이미 만들어진 이념형을 현실에서 실험하는 형태로 움직여오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선생'의 공부를 따라 암송하는 구조 역시 지양하고자 한 것이 노력의 지점 중 하나이다. 이념과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한 코뮨의 모델들이 그 나름의 의미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점에 낙착했는지를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프꼼이 무이념적으로 움직이는 무규정적 덩어리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대안적 이념이던, 희망이던, 미리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는 것보다, 걸어감으로써,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길을 만들어보려는 것이 아프꼼의 이념이자 실천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아프꼼은 실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출발점으로부터는 아주 멀리 걸어왔다. 그러나 대학이나, 학문장, 지역 엘리트 재생산 구조, 익숙함으로 구조화된 '공동체'의 질서는 견고하기에, 걸음을 멈추면, 다시 그 질서에 손쉽게 안착하게 된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여 누군가에게는 강박증으로, 혹은 누군가에게는 일중독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만, 아프꼼은 그런 긴장감으로, 긴박함으로 이 길에 매달려 있다. 그러니, 그 길은 게릴라전에 가까운 몸의 움직임을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다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하나의 발명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그런 긴박감이 없이 가능할까? 그런 길이 있다면, 그 또한 아프꼼의 또 다른 모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세를 초월한 재야에 안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장악하고 유린하고, 포획해버리는 자본과 제도와 익숙한 공동체의 '자연스런 폭력'이 횡행하는 세속을 우리 현장으로 삼아, 바로 그 속에서 온 몸으로 다른 것이 되기를 꿈꾼다. 하여, 매달릴 수밖에. 그것이 아프꼼이다.

 

2. 돌봄, 혹은 돌아봄: 실패로부터

 

그러나 6년 전 연구모임을 시작할 때, 애초부터 지금 같은 게릴라전을 예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 꾸었던 꿈은 이 연구모임이 '후배들'에게 어떤 자매애적인 공동체, 혹은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을 수 있는, 나름의 터전 같은 것이 되기를 꿈꾸었다. 아프꼼은 진지전을 통해 서로를 돌보는, 돌봄의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나름의 희망이 있었지만, 양자는 불협화음과 모순 속에서 공회전을 거듭해왔다.

 

오거나이저로서 연구모임 a를 꾸릴 때도, 아프꼼으로 이행할 때도,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삶의 기반이 소진되어 가는 이 시대에 그래도 이 모임이 작으나마 '돌봄'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연구모임 a의 활동이 '아지트'라는 화두를 내걸고 진행된 것도 이 때문이다. 돌봄의 공동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자매애적 친밀성의 나눔은 페미니즘 운동체들이 공통으로 기반하고 있는 이상이기도 하지만, 삶의 모든 안정적 기반을 약탈해버린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욱 절실해진 이상이라 할 것이다. 특히 지역 엘리트로 살아남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지역의 인문예술 종사자들에게 금세라도 무너져버릴 수 있는 취약한 삶의 기반을 서로 돌아보고, 나누는 돌봄의 관계는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일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소회를 밝히자면, 오랜 세월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이 '생명'을 어디까지 위태롭게 하는가를 경험하고, 목도하고,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위태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길을 절실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같잖은 '소명의식'도 갖고 있었다 할 것이다.

 

대학에 얹혀있는 집단으로서 이러한 고민 혹은 딜레마는 더욱 가중된다. 돌봄에 대한 소명의식은 손쉽게 전유되거나 소비되고, 혹은 제도에서 익숙하게 습득한 인정투쟁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프꼼은 이 부분에서 실패를 거듭해왔다. 누군가는 이러한 돌봄의 관계가 오히려 공동체를 망치는 일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 조언의 함의를 모르지 않지만, 배움을 주는 것 혹은 인문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의 방기가 아닐까 하는 질문에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관성적이고 권력적인 대학/문화 제도에 내재한 엘리트 양성과 '후학양성'의 관행과 권력관계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선생 세대들과 전혀 다른 존재론적 위기감에 직면해 있는 '후배'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삶/연구/존재의 지속성을 가늠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 이 길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아마 오거나이저로서 나의 역량의 문제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오거나이저로서, 선배로서, 선생으로서 나는 얼마간, 아니 많은 부분 실패했다고 생각된다. 창간의 포부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념이지만, 웹진의 창간은 실은 이 실패로부터 오로지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3. 다른 삶을 향한 발걸음들, 기쁨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길들

 

하여 그간의 다양한 코뮨 및 아지트들과의 어소시에이션의 한 결실로 웹진 창간호를 꾸려보았다. 또 그간 만나왔던 다양한 a들에게 그들의 코뮨의 경험과 ''을 전해 듣기를 청하였다. 이를 통해 아프꼼의 작업에 대한 비평적 개입을 나누는 것이 웹진 창간호의 주요한 목적이다. 웹진 창간을 통해 아프꼼은 약간의 행로의 변화를 갖게 될 예정이다. 물론 이러한 행로의 변화는 연구모임 a가 아프꼼이 되는 이행의 과정, 그리고 무수한 이행의 과정들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모임 a의 활동의 근저에 놓인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실은 <지역에서, 함께-있음>에 연구모임 a를 기입하는 것, 혹은 <지역에서의 함께-있음의 구조>에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었다. 변정희의 아프꼼(aff-com)을 비평하다에서도 논의되듯이 ''지금의 아프꼼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어떤 실패의 기록들'이라면, 그 실패는 마땅히 연대의 실패와 더불어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본다. '비평의 자리'가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이 웹진의 창간은 한편으로는 그간 <지역에서의 함께-있음>에 대한 시도의 실패를 딛고, 그 실패를 다른 연대의 에너지로 삼고자 하는 또 다른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도는 자연스럽게 지역을 넘어서,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함께-있음에 대한 시도로의 행로의 변환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웹진의 창간을 이끈 추동력으로서의 국경을 넘는 워크숍의 시도이기도 하였다. 김대성의 폐허의 자리에서, 한계의 자리에서 말을 태우다에서 전하듯이, ''분리되어 있는 간격을 극복하려는 의지들의 결집, 그것이 바로 매체다.'' ''누군가를 부르는 (조난) 신호와 그 요청에 응답하려는 의지의 결집으로 매체가 구성될 수 있을 때, 그 자리는 (존재)미학의 장소가 된다.''

 

그런 점에서 바로 코뮨과 연대의 쾌락, 다른 삶을 향한 열정은 이 실패로부터 차이를 향해, 코뮨의 포기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프꼼은, 매달리는 것이다. 신지영의 글 코뮨의 병에서 시작되는 연대의 쾌락에서 비평을 얻었듯이, 코뮨의 실패에서 비롯된 코뮨을 부정하는 ''그 마음 속에는 코뮨을 만든다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질투, 그리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을 '차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뒤섞여 코뮨 속에서 경험한 수많은 감정들과 겹쳐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러한 의심과 질투와 변명 속에는 실은 코뮨-함께 함-에 대한 욕망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감정들을 코뮨의 연대로 이행시킬 수 있을까?'' 해서, 아프꼼은 실패로부터, 다시 코뮨에 매달리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패로부터 다시 매달림으로라는 기조에는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임태훈의 핑크빛 공동체에서 배우는 인문학 운동의 미래에서 논의되듯이, ''의심과 착오, 실망의 순간조차 운동의 과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은 철부지들의 핑크빛 공동체가 그러하듯, 갑갑한 생활에 억눌려 있더라도 좀처럼 기죽지 않고 더 재밌는 일에 작당하는 발랄한 마음과 몸에서 구할 수 있다. 놀이의 흥분과 웃음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의 미래를 예감하는 전조다.'' 그런 점에서 아프꼼은 슬픔의 정념과 실패의 에너지를 놀이의 흥분과 웃음의 에너지로 이행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은 아프꼼의 실패이자 어떤 지역적 차이이기도 하다는 것을 임태훈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 아프꼼이 터하고 있는 지역은 '' '', '', ''의 삼각 교양 편대''의 과잉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과소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 차이를 넘어서는 지평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 지평은 역설적으로 지역의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안과 밖을 넘나드는 그 걸음에서 우리는 너무나 좁디좁은 우리의 닫힌 지평의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신현아의 워크숍, 국경을 걸어서 넘다, 양순주의 불투명한 나의 목소리로부터는 이 발걸음 속에서 부대낀 정동의 기록이다. 연구모임 a에서부터 우리는 무수하게 다른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고, 복잡한 도시의 한 모퉁이를 분주히 방문하였다. 오랜 세월 길을 나섰지만, 응답은 오지 않았고, 만남은 실패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지역을 넘어선 만남에서의 응답은 우리가 그 실패를 넘을 수 있는 동력이 되곤 했다. 해서 신현아의 글이 전하듯이 매번 우리는 당신들을 만날 때마다, ''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의 걸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만났던 벽을 당신들은 어떻게 넘어갔는지 고민을 나누고, 서로의 보폭을 견주어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걷는 길이 '반경'의 테두리를 맴돌 때, 이 만남의 힘으로 다시 넘어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다.

 

양순주의 불투명한 나의 목소리로부터에서도 논의되지만 우리가 어소시에이션이라는 화두를 연구모임의 출발점에서부터 부여잡고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다. 연구모임 a라는 이름일 때도, 아프꼼의 경우도 ''제도의 안과 밖에 걸쳐있는 다소 기이한 포즈는 어떤 이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여지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워크숍에서 만난 니시야마 유지 선생과 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점을 주기도 하였다. 자크 데리다가 창립한 국제철학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철학에의 권리>와 니시야마 유지 선생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규모나 역사는 다르지만, 국제철학학교와 이에 대한 반응들을 아프꼼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었다. 양순주의 글에서도 지적되듯이 ''국제철학학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도이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그 특별한 방식이란 대학도, 공공연구기관도 아닌 '어소시에이션'으로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준제도로서의 취약함'에서부터 콜레주가 시작되었다는 배경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제도의 사이, 구멍에 있는 아프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송진희의 그곳에 '있음'으로 남아있는 것들: 외로움의 출처와 출구에서 날카롭게 지적되듯이 ''그 값은 실천을 동반했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쓰지 않고, 하지 않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인문'이 그리고 '공부''쓰기'만 해서는 '하기'의 말의 중요성을 영영 모를 일이다. 그 흘러넘침의 '', '하기'의 말들을 올해 일본에서 열린 워크숍의 기간 동안 만났던 이들의 실천 속에서 엿보며 그 중요성을 배우고 깨달았다.'' 그래서 웹진에 실린 글들은 ''어쩌면 '현장'의 이들은 단번에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속삭임에 가까운'' 말들이다.

 

앞서 아프꼼이 아직은 실패와 슬픔의 정념을 웃음과 기쁨의 에너지로 이행시켜나가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했다. 그러나 코뮨의 ''을 앓고 있는, 혹은 연대의 쾌락이 단지 기쁨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실천과 현장 속에서 경험한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이것이 아프꼼만의 일은 아니라는 말을 건네주었다. 함께-있음을, 코뮨을 단지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간수하고, 해나가고, 건사해본 사람이라면 함께-있음이라는 것이 이를 건사하기 위한 고달픈 노동과 돌봄의 살림살이의 '소모전'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건사하는 노동과 돌봄의 살림살이야말로 코뮨의 실천의 밑바닥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과 살림살이를 해나가는 사람만이 진정 '바닥'에 내려앉는 것이다. 신지영의 글에서도 지적되듯이 코뮨에서 ''폴리스(비오스)의 권력관계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오이코스(조에)의 권력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프꼼의 삶은 고될 수밖에 없다. 송진희가 전하듯이 이렇게 고된 삶은 우리를 외롭게 하기도 한다.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부대끼는 선분과 접촉면들에 닿을수록 몸과 마음도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야 동료들과 선생님들의 '외로움'이 들리기 시작하고 외로움의 무게는 그 공동체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깊숙이 자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고된 삶과 외로움을 통해, 생색나지 않는 돌봄의 살림살이를 통해서만 비로소 코뮨은 우리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송진희의 말을 빌자면 ''현장을 갖는다는 것은 기꺼이 현장이 되려는 자, 현장을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뛰어들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현장을 꿈꾸기 전에, 현장을 가지게 되었고, 현장의 치열함을 매순간 맛보며 나가떨어지거나 발목 잡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프꼼의 고된 삶이, 외로운 처지가, 꼭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길에서 만난 당신들에게서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들에 <다른 삶을 향한 열정>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 열정은 ''아직은 닿지 못한 그 세계에 대한 열정''이고, ''그 열정엔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현실적인 장벽도 없다. 그 세계를 끊임없이 꿈꿀 수 있는 동력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그 열정을 꽃 피우는 순간은 서로 반대편의 고속열차가 스쳐지나가는 순간처럼 아주 짧다는 것'', 그것이 아프꼼의 삶이자, 당신들이 전해준 코뮨의 길, 연대의 쾌락이기도 하다.

 

그 작은 순간의 기록을 우리는 반짝임, 그 순간의 무늬라는 이름으로도 남겨보았다. 또 앞서 논했던 신지영, 니시야마 유지와의 인터뷰로, 희미한 불빛의 연대기라는 이름의 기록을 얻었다.

 

실패와 고된 노동과 돌봄의 살림살이의 기진맥진과 외로움 끝에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우리의 고단했던 길에 응답해주었던 모든 a들에게 또다시 인사를 전하고 싶다. 우리가 만난(association) 그 모든 a(agit이자 anyone)들에게, 실패와 슬픔과 환희와 웃음과 엇갈린 길, 되돌아갈 수 없는 길 혹은 함께 걸어가는 길의 모든 a들에게 안녕을!

 

우리는 당신들과의 실패와 슬픔과 순간의 환희를 통해 비로소 a-ff-com, 모든, 누구나인 a들이 걸어가는 코뮨(com), 그 연대의 쾌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코뮨의 병에서 시작되는 연대의 쾌락

 

아프꼼(aff-com)의 웹진 창간을 축하하며

 

신지영 (히토츠바시 대학)

 

 

 

 

1. 코뮨의 병은 연대의 조건

 

대학원에서 내 별명은 수유+너머 대학원생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신문반을, 대학교 때에는 그림패를 했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줄곧 수유+너머에서 활동했으니, 늘 학교에 슬쩍 발을 걸치곤 대부분은 모임/코뮨에 있으려고 했던 셈이다. 그러나 코뮨에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힘든 시기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내게 어렵고도 소중해서 어쩐지 생각하길 멈출 수가 없는 말은 여전히 '코뮨'이다.

 

사실 어려운 순간들에 옆에 있어 주었던 것은 코뮨이 아니라 가족이나 코뮨 밖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들 속에서 내가 새로운 코뮨을 느낄 때였다. 일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요기 공원의 여성 노숙자 공동체, 프리타 노조 활동, 1950년대 서클 활동, 거리의 수많은 코뮨들. 나는 그 모든 잠재성 주변을 기웃거렸다. 코뮨의 병은 연대의 계기였다! 코뮨의 병은 또 다른 코뮨과의 연대=쾌락을 통해서만 그 병에서 벗어날 계기와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혹 또 다른 병으로의 이행일지라도.

 

2. 잔잔히 다가온 움직임

 

어느 더운 여름 날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던 아프꼼(aff-com)과의 만남은, 병을 위로받고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경험 중 하나였다. 아프꼼 분들은 강연회, 세미나, 심포지엄, 서평회, 일본 단체들과의 접속 등 다양한 형태를 실험해 왔다. <냉전과 정념의 공동체> 워크숍은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내년의 활동을 기약하는 터닝 포인트였다.

 

2년여에 걸쳐 '태어나고 있는 코뮨'인 아프꼼은 '빠른 움직임'을 지녔지만 동시에 잔잔한 배려들을 지니고 있었다. 일상적 세미나, 심포지엄, 시민강연, 서평회 등을 할 때마다 편지가 왔고 그럴 때마다 만남의 순간 스치듯 지나갔던 다짐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요즘 이런 걸 해요!''라고 알리는 것은 그 장소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고 또 다른 활동으로 연결시킨다. '출사표'보다 '후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동시에 그 많은 것을 하느라 얼마나 바빴을까 생각하게도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프꼼에서 보내오는 메일의 부드러움에 조금씩 빠져들었던 것 같다. 아프꼼에서 보내오는 메일에는 기계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늘 풍성한 잉여들이 있었다. 이번 일에서 느끼는 기대와 자신들의 의지,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한숨과 걱정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는 단단하고 잔잔한 배려. 설명하고 설명하는 메일, 아니 '편지'를 받으며 때로는 기대하고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설레면서 조금씩 친숙해져 갔다. 잔잔히 다가오는 움직임들은 얼마나 강력한지!

 

집단의 '명명(命名)'은 일종의 사건이다. 익숙했던 그 분들이 아프꼼이라는 이름으로 워크숍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여태까지와는 다른 관계가 시작될 것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다. 'aff-com''affect''commune'의 합성어이다. 코뮨에서 느끼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모든 정동들과 ''부대끼며'' 용감무쌍하게 ''이행의 실험''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부대낌''이행'은 이 모임의 키워드이다. 이것이 코뮨의 활동과, 학술적 활동, 그리고 각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수렴될 수 있을까? 이번 심포지엄은 이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따라서 내용만큼이나 발표방식이 중요했다. 시기는 그 어떤 순간보다 많은 접촉면과 이행면이 발생했던 전후 냉전기였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이것이었다. '부정적인 정동들'과 정면에서 마주하려는 이 워크숍이, 과연 무엇을 이행시킬 수 있을까?

 

코뮨의 능력을 가늠할 때에는 잡일만큼 정확한 게 없다. 나는 습관처럼 어떤 단체에 가든 차를 내오는 사람을 보게 된다. 심포지엄을 하면 번역하고 통역하는 사람의 이름이 제대로 명시되어 있는가를 보게 된다. 혹시나 그러한 잡일을 하는 사람들 간에 층층시하(層層侍下) 같은 관계가 있지는 않은가 걱정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곳 행사는 제 손으로 다 치뤘지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분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편이다. 폴리스(비오스)의 권력관계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오이코스(조에)의 권력관계이기 때문이다.

 

<냉전과 정념의 공동체> 워크숍 날엔 일찍 간다고 갔는데도 이미 발표제본, 책상배열, 간식준비까지 전부 되어 있었다. 준비를 총괄하시던 고영란님이 말씀하셨다. ''이 팀은 팀워크가 너무 좋아요!'' 눈치를 보면서 하는 일인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서 하는 일인지는 금방 느껴지기 마련이다. 또한 발표방식도 누구 한 사람 소외되지 않도록 준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차원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줘야 해. 그래야 소외되는 일 없이 서로 금방 친해지거든.'' 좋은 코뮨은 친구를 위해 움직이고 친구가 움직이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3. '이행할 수 없음''이행시켰던'

 

이날의 테마는 긍정적인 정동으로 이행될 수 없었던 부정적인 정동들이 어떠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는가를 되묻는 것이었다. 이는 그러한 정동들이 왜 사회에서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되었는가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이행할 수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행할 수 없음'이 무엇을 이행시킬 수 있었는가를 동시에 질문해야 한다고 느꼈다.

 

권명아님의 <전쟁상태적 신체의 정동>은 이행할 수 없었던 존재들이 냉전 하에서 내뿜는 숨찬 숨소리를 통해 기존의 연구들이 간과해 왔던 전후 문학의 정동을 전달해 주었다. 신명직님의 <냉전기 재일 코리안 시티즌십의 변화>는 나에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려운 주제였다. 국가나 민족을 선택할 수 없었던 재일 조선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것 뿐 아니라, 일본의 시티즌도 한국의 시티즌도 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만들어냈던 가치였다고 어렴풋이 느낀다. 시티즌으로도 이행할 수 없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또 다른' 재일, '또 다른' 조선의 잠재성 말이다. 나는 <'쌈짓돈'의 공유, '듣고-쓰기'라는 표현: 탄광촌 여자 코뮨<무명통신 1959~ 1961>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뜸만 들이고 시작하지 못했던 주제인데 시작할 용기와 기회를 주신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도쿠나가 나츠코님의 <타자에의 공감과 정념>은 가정에 소속을 둔 여성들이 에로스를 표현할 때, 그것이 사회 제도에 어떠한 파격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양순주님의 <냉전의 문턱과 언어화의 경계>는 전후 냉전기의 언어상황을 '비언어''전달 불가능성'이라는 말로 포착했다. 내게는 비언어와 전달 불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곧 새로운 코뮨의 언어는 어떠해야 할까라는 질문인 듯이 느껴졌다. 송진희님의 <냉전의 이마고>는 유일한 영상 프리젠테이션이었다. 전후에 대한 여러 영상들 속을 두더지처럼 파고 돌아다니는 움직임은 웅얼거리는 증언을 배경으로 계속되었다. 영상 속에 숨겨진 비명들을 완전히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형태로 드러내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둠 속에 있는 것들은 어둠의 표현법이 있으니까. 또한, 영상은 이날의 발표들을 언어가 필요 없이 직접 느끼게끔 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일본어-한국어 사이의 통역을 통해야 하는 관계로부터, 감각에 직접 부대껴 오는 언어의 세계로 이행했다. 다양한 매체의 합동 발표는 앞으로도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지니리라 생각했다.

 

한편, 이날 참여자들의 견해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상충되는 입장도 많았다. 그런 점에서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이런 간극들을 풍부한 설명으로 채워주신 사회자 와타나베님, 섬세한 차이들을 드러내 주신 토론자 고영란님, 나카야님, 마루카와님께 감사드린다. 그 중에서도 소유의 문제를 전후 중국의 토지개혁이라는 테마와 연결시켜 말씀해 주셨던 마루카와님의 발언은 인상적이었다. 대만과 중국연구자로서의 시각이 전후 냉전기의 코뮨적 문제를 사고할 때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모든 논의가 어떤 언어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도 언급해 두고 싶다. 이날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전부 할 수 있는 발표자가 많았다. 따라서 한명 한명이 제각각 다른 언어 환경을 만들어 냈고 일본어-한국어 사이의 통역이라는 룰은 계속해서 깨지곤 했다. 통역자였던 류충희님과 이현준님은 각각의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했다. 따라서 그 어떤 통역보다도 어려웠으리라 짐작한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한쪽 언어만 할 수 있는 분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언어상황이 한국 대 일본이라는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넘어서, 훨씬 다양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었으리라 믿는다. 번역을 해 주신 와다님과 다카하시님은 식민지기 조선 문학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이며, 이정희님은 일본의 한국 유학생이다. 이처럼 이행중인 번역자들의 번역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훨씬 더 풍성한 의미들을 우리 속에 만들어 냈으리라 믿는다.

 

이날의 워크숍은 일반적인 연구 발표가 아니라 연구 계획을 나누고 점검하기 위한 자리였다. 회의실을 비워줘야 하는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다 못한 이야기는 뒤풀이에서 나누었다. 신현아님이 <아프꼼>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고, 고영란 선생님의 제의로 이날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워크숍을 함께 준비하고 아프꼼 활동을 함께 해온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아프꼼이 일본과 맺어온 이 관계들 속에 부산이라는 지역성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 것일까? 이번 워크숍이 일본 대 한국이라는 틀과는 다른 분위기가 되었던 데에는 부산의 지역성이 끼친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꼼이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오기보다, 부산 속 코뮨으로서 일본 속 소수자들과 만나가길 바래 보았다.

 

 

4. 연대의 쾌락

 

1950년대 말 일본의 큐슈 지방의 탄광마을에서 <서클마을> 활동을 했던 다니가와 간은 <정치적 전위와 서클>이라는 글에서 '이익을 위한 연대''연대의 쾌락'을 구분한다. 서로의 이익을 증가시키려는 연대는 그저 기능적인 집단에 머물게 될 뿐 아니라 이익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위'들이 이익이나 정의를 내걸고 연대를 하는 데 반해, 대중들은 연대를 통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쾌락을 느낀다. 쾌락은 니체나 스피노자가 말했던 긍정의 힘과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쾌락은 기쁨만을 강조하기보다는 희로애락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워크숍이 끝난 다음날 아나키스트 서점 <모색사模索舍> 앞에서 했던 인터뷰는 내게 '연대의 쾌락'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경험했던 코뮨의 기억과 감정들이-긍정적인 감정 뿐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도-편안하게 풀려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분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는 듯했다. 아마도 아프꼼 분들이 기꺼이 부대낄 용기와 함께 또 다른 코뮨으로 이행하기 위한 욕망이 있었고,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게 아니었을까?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이 낳은 병은 '유토피아가 없다'라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유토피아가 없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깊은 디스토피아 속에서 유토피아적 이행의 계기를 발견할 때 비로소, 위로를 받고 다시 해볼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닐까? 코뮨에 한번 덴 사람들은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코뮨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있기 때문에 코뮨을 거부하고 싶어질 때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 본 적이 있다. 그 마음속에는 코뮨을 만든다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질투, 그리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을 '차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뒤섞여 코뮨 속에서 경험한 수많은 감정들과 겹쳐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러한 의심과 질투와 변명 속에는 실은 코뮨-함께 함-에 대한 욕망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감정들을 코뮨의 연대로 이행시킬 수 있을까? 질투하고 변명하고 항변했던 나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듯이. 이 위로와 용기의 순간들이 부대낌과 이행을 모토로 한 아프꼼 여러분들에 의해서 창조되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도래하고 있는 아프꼼들에게 미리 찬사를 보낸다.

 

 

5. 웹진 <아프꼼> 을 상상하며

며칠 전 편지를 받았다. 아프꼼이 웹진을 기반으로 한 매체운동을 벌이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프꼼 1<Passion for another life>에 글을 싣게 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내가 알고 있는 담론공간의 상태를 몇 가지 언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싶다. 1950년대 큐슈에서 만들어진 탄광촌 여자들의 담론공간으로 <무명통신>이라는 잡지가 있다. 이 잡지는 이 활동에 참여했던 어떤 여성의 강간사(强姦死)의 충격으로 폐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강간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하자는 제의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 때문에 거부당했던 데 있었다. 이야기할 공간이 거부당하자 이 잡지에 참여했던 주요 멤버들은 병에 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한편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가 너무 클 때에는 이야기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키우기도 한다. 이처럼 코뮨의 이야기터라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민감하다.

아프꼼의 웹진이 긍정적인 정동 뿐 아니라 부정적인 정동까지 끌어안고 연대하되, 그 부정적인 정동에 먹혀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하길 바래본다. 먼 어느 날, 아프꼼이 어떻게 멋지게 해 왔는가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길. 그 순간 우리의 연대가 곧 쾌락이자 곧 코뮨이길. 아프꼼 웹진 창간에 축복과 기대를 가득 담아 보낸다.

 

 

 

 

 

 

 

 

아프꼼(aff-com)을 비평하다

 

변정희 (반성매매 활동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았다. 모두의 몫이니까. 천천히 하다보 면 잘 될 거 같다.''

- 김일두(net-a<하나의 장르, 바로 그 한 사람> 인터뷰 중에서)

 

바깥의 말을 경유하여 내부를 돌아보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내부가, 내가 돌아서기라도 하면 금방 사라질 듯 느껴질 때 더욱 그렇다. 물론 지금 우리는 누구도 단단하게 자신의 이념은 물론 정체성조차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90년대를 살아갔던 여성주의자들이 당면한 곤혹스러움이 세대 간의 격차였다면, 2010년을 넘어선 오늘날의 우리들은 20대의 혼란과 30대의 피로와 40대의 절망이 마구 뒤섞인 시대를 살고 있으며, '내부'는 그러한 현실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연구모임 아프꼼(aff-com)은 이 내부가 가진 이름 중 하나이다. 한때 그 이름은 <연구모임 a>라고 불렸다. 나는 맨 처음 연구모임 a를 접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학교 안의 모임이면서도 아니고, 학교 밖의 네트워크이면서도 아니며, 웹진 아지트, 네트-a를 비롯한 활동들이 학교의 안과 밖, 제도의 안과 밖, 국경의 안과 밖에 걸쳐져 있었다. 그러나 ''종단하고 횡단하는 너는 대체 누구냐?''라는 질문보다, 실상 그 모임의 이름을 이해하는 것이 내겐 더 흥미로운 일이었다.

 

연구모임 a'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이름 같기도 했고, 무수히 많은 모임 중의 하나인 이름 같기도 했다. 혹은 그 aa를 대신할 무언가/누군가를 위하여 비워 둔 자리 같기도 했고,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기에 공백으로 처리된 자리 같기도 했다. 이처럼 a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다가 마주치게 되는 'aff-com'은 우리에게 또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웹진 아프꼼의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프꼼을 소개한다.

 

 

''연구모임 aff-com(아프꼼)'affect''commune'의 합성어이 다. 이 이름에는 '정동''공동체'에 관한 이론 및 실천을 문제틀로 삼아 삶 속에서 실험하고 연구로 반성하며 글쓰기로 녹여내는 이행 의 작업이 함의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에는 '정동''공동체' 에 대한 이론적 작업과 이 이론이 실제로 부대끼며 이루어지는 삶 의 현장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aff-coma-ff-com으로 더 나누어볼 수도 있다. 개별적인 a와 정동(affect)과 공동체(commune)의 조합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a-ff-com은 개별적인 'a''com'에 이르기까지의 그 무한한 거리를 보여주기도 하는 셈이다. 그러나 commune은 결코 목표지점이 아니다. 정동연구에서 정동(affect)"목표를 설정해놓고 가는 행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무언가를 뚫고 나가는 것으로서의 행위능력"으로 보듯, 무수한 acom이 만나고 헤어지며 다른 'a''com'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다. 때문에 acom 사이의 거리에 그어진 선은 실선이 아니라 수많은 결절이 있는 점선이다. 그것은 '만남과 어긋냄', 혹은 '함께 있음''부대낌'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연구모임 a라는 이름은 그 시작이 적절하다', 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아프꼼에 관한 끊임없는 '재서술'의 일부일 뿐이다.

 

연구모임 a 혹은 아프꼼은 부산에 거점을 두고 이론적인 작업과 실천을 함께 옮겨가는 다양한 변주의 작업들을 수행해왔다. 아프꼼이 줄곧 주목해 온 영역은 하위문화(low-culture) 혹은 식민지 시대, 열전과 냉전의 밑바닥 아래에 있었던 '아직 말이 아닌 말' 혹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글'이었다. (이러한 탐색은 정동연구의 방향과 필연적으로 함께 갈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 작업의 방식은 끊임없이 경계에 서 있었다. 비평과 연구의 경계, 지역과 대학의 경계, 문학과 예술의 경계. 웹진, 서평회와 콜로키움, 영화제와 세미나 등 방사선처럼 뻗어나간 활동을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할뿐더러 그 의미도 제대로 짚지 못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난 겨울, 연구모임 a발전적 해체(혹은 발정적 해체)를 위한 정념세미나에 참가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내가 그 모임에 접속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그 모든 활동은 아프꼼이 표방하듯 '한국에서 대학, 제도, 지역의 관성적이고 타성적인 관계맺음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결속의 형식을 얻으려 노력'해왔던, 사유와 실천의 고된 흔적이기도 하였다.

 

여러 실험과 시도들은, 물론 어떤 결과를 기대하거나 예상한 것이 아닐지라도, 번번이 미끄러지곤 했으며, 제도 안도 밖도 아닌 채로 제도에 얹힌 모습으로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외부와의 결속과 연대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공동체 현장 혹은 공동체를 추구하는 현장의 실험과 자립에 귀를 기울여보아도 별 뾰족한 답이 솟아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답이 있었다 해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언제나 각각의 모임이 처한 조건과 지평 속에서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것은 물적 토대의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의 몸과 언어와 삶은 지겹도록 체계에 손발이 묶여 있으므로, 학교의 제도 안에서 학교 밖을 사유하는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또한 모임의 구성원들 역시 각자의 물적 조건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조건으로 삼는다 하여도 정작 문제는 이런 지점들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혹은 팀원 전체의 공적 담론으로 제기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지난 일정한 시기 동안 '대안적 인문공동체 운동'에 관여하면서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다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현재의 조건과 관계 속에서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논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프꼼의 자리를 평가하는 일은 실상 부산 지역의 대안 공간과 모임들의 연대가 실패해 온 지점을 비추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자생적인 제도 안팎의 여러 모임들은 각자의 생존이 늘 중요한 관건이 되어 왔기에, 또는 다른 이유들로, 아프꼼이 그려왔던/그리고자 했던 지형에 선뜻 응하지 못했다. 주변부라는 조건으로 늘 새로운 종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음에도, 지역은 종종 이상한 방식으로 게토화되어 버리곤 했다. 지금의 아프꼼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어떤 실패의 기록들'이라면, 그 실패는 마땅히 연대의 실패와 더불어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본다. '비평의 자리'가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불어, 아프꼼 팀원의 팀 안에서의 자기 역할이 팀 전체의 운동성으로 외부화되지 못했다는 평가에 덧붙여 말을 좀 더 보태고 싶다. 아프꼼이 접속해 들어간 현장이 자기 삶의 영역과 무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변화와 이행의 현장이 각자의 삶에 마련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생각해 볼 문제다. 이론이 자기 실천의 현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삶과 관계와 접속되는 지점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내다보며, 진지하게 물두하며, 부단히 싸워서 얻어내야만 한다. 정동에 관한 연구를 언어화한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은 둘째 치더라도 정동이 관계와 삶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혹 자기 삶이 곧바로 작업과 연구의 현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던가?

 

위기와 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타자의 자리를 돌()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자리를 삭제하고 동일화의 방식으로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게 된다. 불확실함이 타자의 윤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혼돈은 가능성의 시대가 아니라 역시나 위기의 시대임을 거듭 재확인하게 된다. 때문에 아프꼼이 정동과 공동체를 키워드로 연구모임 a에서 아프꼼으로, 그리고 그 다음의 무엇으로 진행되어 가는 동안, 삶과 관계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일상의 친밀함으로 내몰리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치열함을 갱신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연구모임 a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줄곧 바라본 것, 그리고 발전적 해체를 위한 (동계훈련에 가까웠던) 정념세미나에 참가한 것이 내가 아프꼼에 말을 보탤 수 있는 이력의 전부이다. 또한 모임 내부에서 이루어진 혹독하기까지 했던 자기 비평의 시간들을 알고 있기에, 말과 글을 보태는 것은 더욱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다만 아프꼼을 사유하는 일이 내 자리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기에 용기를 꺾지 않기로 한다. 연구모임 a와 아프꼼이라는 이름들은, 한편으로 불가능한 꿈을 꾸었던 흔적들처럼 다가온다. 그 흔적들이 지금 당장 쓸모가 없을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그때 그 겨울의 현장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겨울의 시기는 연구모임 a가 아프꼼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 오히려 지금과는 다른 몸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었음을 새삼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만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더 많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다시 한 번 더, 그의 말이, 그의 쓰기가 외롭지 않기 위하여.

 

 

 

 

 

 

 

 

 

폐허의 자리에서,

한계의 자리에서 말을 태우다

 

김대성 (문학 평론가)

 

1.

 세상의 모든 가난한 곳에 ''이 있다. 폐허 위에, 외로움과 박탈감 속에 ''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파괴되고 분리되어 있는 사물들과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될 준비를 기꺼이 품고서 말이다. 분리되어 있는 간격을 극복하려는 의지들의 결집, 그것이 바로 매체다. 그러니 새로운 매체가 탄생하는 자리란 '대의''자본'이 공모하는 매끄러운 원탁이 아니라 차라리 폐허 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를 부르는 (조난) 신호와 그 요청에 응답하려는 의지의 결집으로 매체가 구성될 수 있을 때, 그 자리는 (존재)미학의 장소가 된다.

 

 

2.

 매체 운동은 선동적인 슬로건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나보다 크고 힘 있어 보이는 것들은 죄다 '제도'라 몰아세우며 과잉되고 고양되는 것은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의 역할을 외려 축소시킬 뿐이다. ''의 진정한 힘은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형식의 창출에 있기에 거부하고 대결해야할 것은 '제도'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있지 않다. 제도가 매번 폐허를 밑천 삼아 저 스스로를 갱신해온 오랜 역사를 상기해보라. 새로운 매체의 창간은 새로운 관계 맺음의 방식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말의 고갈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제도에 대항하는 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되먹히지 않는 새로운 관계 양식을 창출하는 데 있는 것이다.

 

 

3.

매체에 담아내는 것은 ''이지만 매체를 만들어가는 동력은 ''에서 나온다. 이는 각각의 매체들의 성격을 결정하는 심급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에 있음을 가리킨다. 갖은 학설과 이론의 경로를 따라가며 추수하는 말이 아니라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자세로 새로운 관계를 조형해가는 형식 그 자체가 말이 되는, 마치 우수리처럼 얻어지는 말. 마찬가지로 매체의 운동성은 새로운 이론들을 선점하거나 결호 없이 이어나가는 시간이 아닌 새로운 관계 양식을 창출하는 무수한 접속 방식에 있다.

 

4.

  접속의 지점과 만남의 장소를 구축하는 데 애쓰는 매체는 그 자체로 실천적인 성격을 담지한다. 더 이상 연결 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매체는 매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더 많은 만남을, 더 많은 이행을!'이라는 슬로건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오직 관계의 실험을 통해서만 만남과 이행의 에너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을 산출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기꺼이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는 삶이라는 실험실의 발명가의 지위를 짊어져야 한다. 이는 너와 나의 분리를 조건으로 하는 삶이라는 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연구자에 다름 아니다. 매체를 직조하는 말들은 더 많은 만남과 이행을 산출하는 연료다. 말이라는 연료를 태워 우리가 만난다.

 

5.

다시 새로운 매체가 출현할 수 있는 자리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묻자. 무수하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 곳이 아니라 어떤 한계에 봉착한 곳, 매체는 그러한 한계상황을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선택지를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상황을 매번 갱신시켜가는 것, 달리 말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묻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것. 그것은 매체에 쓰기의 경제가 아닌 지우기의 공리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과 조응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을 소유하고 있기에 정작 어떤 말을 해야할지 결정할 수 없다. 말이 가난한 자리란 말의 포화, 말의 과잉, 말의 독점에 의해 교환되거나 갱신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매체에 지우기의 공리를 도입한다는 것은 제도의 논리에 결박되어 있는 포화상태의 말들을 태워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들을 태()울 수 있을 때 모두의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활활 타오를 것이다.

 

 

 

 

 

 

 

 

 

핑크빛 공동체에서 배우는

 

 인문학 운동의 미래

 

 

                                                                                                                   임태훈 (문학 평론가)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마다, '중고딩' 때를 떠올린다.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마다, '중고딩' 때를 떠올린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에는 한 반에 두세 명쯤 음란물 공급책이 있었다. 그 애들을 통해 반 아이들 전부가 이런저런 재밌는 것들을 돌려 볼 수 있었다. 교실은 신성한 수업장소이면서 음란물을 공유하고 즐기는 '핑크빛 공동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어른들이 기대하는 ''하고 '소년少年'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종 일제 단속에 걸려 매타작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혈기왕성한 소년들의 본능에 근거한 공동체가 쉽게 와해될 리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가 돌려 보던 빨간 책과 음란비디오 덕분에 학교는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이었던 듯싶다. 어른들이 아무리 감독을 철저히 해도 우리는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그 시절의 '빨간 책'은 최고의 청소년 문학이자 산소 호흡기였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독서 체험의 기회는 갈수록 줄어든다. 읽을 만한 책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근사하고 화끈한 책은 곳곳에 쌓이고 널렸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해방감, 흥분에 들떠 ''을 함께 읽을 동무를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렵다.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지중지하며 돌려보는 책도 없어졌다. 그때 돌려보던 책의 내용은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여전히 생생하고 애틋한 건 그때의 ''이 뿜어내던 웃음과 친구들이다.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중고딩의 '핑크빛 공동체'만큼만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동안 내가 기획에 참가했거나, 제작이나 운영에 직접 참가한 인문학 운동도 핑크빛 공동체 시절의 경험만큼 강렬해지길 바랐다. 아직 자신 있게 노하우를 말할 수 있을 만한 단계는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은 돌이켜볼수록 아쉬움이 더 크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진행했던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는 다섯 개 시즌, 총 스물다섯 강좌를 장장 1년에 걸쳐 청중에 전한 대장정이었다. 자신하건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는 그 어느 팀에서도 쉽게 시도하지 못할 의욕 충만한 기획이었다. 우리 팀의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기획이 푸른역사 아카데미를 비롯해 여타의 인문학 공간에서 시도될 것이다.

 

그러나 기획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허기를 느꼈다. 매회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생각했다. '', '', ''의 삼각 교양 편대로부터 비켜 나와, 이를테면 음담패설의 낄낄거림 속에서 '', '', ''을 새로운 삶의 강도로 재발명할 방법은 없는 걸까. 그렇게 해서 인문학 운동의 현장에는 전혀 얼씬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새로운 친구로 불러들일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에 함께 해주신 선생님과 청중은 하나같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이상적인 인문학 애호가들이었지만, 그들의 전형성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이 직면한 한계였다. 왜 오는 사람만 여기에 오는 걸까!

 

날이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고민을 깊어지게 한다. 지하철, 버스에서도 모두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다. 지금의 '중고딩'도 더하면 더했지 예외가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출판계의 사정도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책과 멀어진 사람들을 인문학 운동의 현장으로 불러들이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미디어 환경이 달라진 만큼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책이 사라진 그 자리에 책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런 노력을 하는 팀이 있었다. 팟캐스트 방송국인 '책 읽는 라디오(www.bookdio.com)'이었. 이 팀에 합류하면서 그동안 시도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콘셉트를 마음껏 시도했다. 방송 제목은 '음파의 기묘한 책 읽기'였다. '', '', ''을 개그로 버무리고 음담패설로 살짝 맛을 돋웠다. 반응도 기대 이상으로 무척 좋았다. 애청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전남 영광에서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 내가 했던 것보다 더 재밌고 유익한 방송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올해 들었던 가장 기분 좋은 말의 하나다. 그 아이가 만들 미래의 방송이 기대된다. 나는 이미 그 방송의 애청자다.

 

'책 읽는 라디오'에서의 작업은 인문학 운동의 현장을 강의 공간만이 아니라 팟캐스트 플랫폼으로 확장할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미디어 환경은 엄청난 속도로 급변하고 있다. 팟캐스트도 이미 최전성기를 지난 상황이다. 앞으로 대세가 무엇으로 바뀔진 모르겠지만, 그걸 마냥 쫓아다니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빤하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삶의 스타일''인문학'을 유행시키는 게 중요하다. 어느 특정 강의 공간이나 미디어 콘텐츠의 흥행을 기획하고 실천해나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적 수행 과제인 것은 맞지만, 그 과정의 재생산에 머물며 인문학 운동의 모험이 공회전해선 곤란하다. 그 수준에서 자족하기엔 인문학의 경쟁상대는 만만치가 않다.

 

 

 

 

                                              

UFC 이종격투기 경기장(케이지)에서도 인문학 운동은 가능하다.

고정관념 대신 상상력에 기회를 줘야 이 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오늘날 대중이 가장 뜨겁게 열광하는 삶의 스타일은 '재벌 2'. 드라마 주인공만 해도 매번 '재벌 2'가 연기된다. 지난 십 년 이상 계속된 트랜드다. '재벌 2'의 표상이 '인문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촌스럽고 시시하다는 것을, 게다가 속이 텅 빈 허상이라는 사실을 각성케 할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세속적 풍경 안에서 작은 점으로 물러나 있던 인문학을 전경으로 끄집어낼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 이것은 인문학을 근사한 주인공으로 다시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긋지긋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참을 수 없는 폭소를 선사할 광대를 만나려는 구상이다. 이를테면 UFC 이종격투기 경기장(케이지)에서도 인문학 운동은 가능하다. 프로레슬러이자 IT 얼리어답터이며 책과 칼럼을 쓰는 지식노동자이기도 한 김남훈이라면 언젠가 그런 현장을 만들지 모르겠다. 이 실험에 우락부락한 덩치만 필요한 건 아니다. 싸움이라곤 맞는 것밖에 못 하는 어느 약골의 무모한 도전이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상상이 가능하다면 그게 정답이다. 고정관념 대신 상상력에 기회를 줘야 이 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인문학 운동은 늘 허기를 느껴야 한다. 겁쟁이와 비겁자들 틈에서 불온하게 낄낄거릴 수 있는 인문학이야말로, 모든 것이 쓰레기로 바꿔가는 이 세계에서, 배울 거리이기 이전에, 감응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세계의 비루한 질서에 물들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가 많아지도록, 인문학 운동은 더 좋은 실패,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성공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흥을 잃고 짜증만 남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지기도 한다. 머리로는 파이팅을 외치고 신념을 되뇌지만, 몸이 그에 값하는 에너지를 내보내지 않는다.

 

 

 

놀이의 흥분과 웃음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의 미래를 예감하는

전조다.

 

 

중고딩 때의 핑크빛 공동체를 자꾸만 떠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런 의지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부정되고 수정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심과 착오, 실망의 순간조차 운동의 과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은 철부지들의 핑크빛 공동체가 그러하듯, 갑갑한 생활에 억눌려 있더라도 좀처럼 기죽지 않고 더 재밌는 일에 작당하는 발랄한 마음과 몸에서 구할 수 있다. 놀이의 흥분과 웃음이야말로 인문학 운동의 미래를 예감하는 전조다

 

 

 

 

 

 

 

 

 

 

 

<현장의 ''을 전하다>

워크숍: 국경을 걸어서 넘다

 

 

 

신현아 (aff-com)

 

 

 

 

 

 

1. 국경을 걸어서 넘다.

 

''순수하게 모든 경로를 걸어서 가겠다는 발상은 날아서 가겠다는 생각만큼이나 참으로 비현실적이죠. 그 사이에 수많은 바다와 사막과 끝없는 스텝(steppe) 황무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대적인 국경과 감시 시스템과 무기 상인들과 군인과 관리들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중략) 지금 생각하면, 발가락과 걸어서 가는 여행의 공통점은 육신의 맹목적인 진지함이었을 거예요. 순수하고도 직접적인 진지함,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겁니다. 그 어느 나라의 국경에서도 거절당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진지함을.''

 

월경. 경계를 건넌다는 그 말에는 수많은 겹의 떨림들이 함의되어 있다. '국경'을 넘는 설렘, 자신이 살아온 안온한 공동체의 밖으로 나가보는 두려움, 또는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반경(ghetto)을 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용감함, 그리고 동경, 기쁨, 또 무엇. 실은 우리가 그 동안 '워크숍'이라는 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시간들은 우리가 바리바리 싸안고 갔던 글, 자료, 작업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심정들에도 새겨져있을 것이다.

 

20112, 20118, 20119, 20128, 교토에서 도쿄로, 요코하마로, 구마모토로, 다시 동경으로. 우리는 그 동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수차례 국경을 넘나들어왔다. 이때의 '누군가'는 당신일수도 나일수도 또는 '다시 만난 세계'일 수도 있다. 방점은 모든 곳에 동등한 무게로 찍힌다. 국경을 넘는 것, 만남이라는 것, '누군가'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조금, 변한다는 것, 그 가능성들 중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는 절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우리가 '월경'으로 우리의 삶에 '설정된', 넘을 수 없는 한계로서의 삶의 반경을 넘는 동시에, 우리가 가진 몫에서 오는 내 몸에 익숙한 공동체의 반경을 넘어가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일부러 '국경을 넘는다'는 말을 쓴다. '국경을 넘는다'는 말에는 '외국에 간다'는 말의 편안한 일상성과 달리, '결단'과 같은 모종의 절박함과 긴장감이 스며있다. 그러니 '외국에 간다'는 것이 어떠한 '사건'이 될 수 없는 요즘 세상에 굳이 '국경을 넘는다'는 말을 쓰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거나 과잉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어색함과 과잉의 낙차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국경을 넘어서' 걸어왔던 길의 시작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이제 '월경'이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길이 '신분증명'을 가지고 매끄럽게 이어진 길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다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여권'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게토의 주민들처럼 걷고 걸어서 '국경'을 건넌다. 그러다 '국경'에서 '신분증명'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다만 우리의 이름을 계속하여 말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월경'은 여전히 '사건'이다.

 

 

2. 만나기 위해 걷다.

 

'국경을 넘는 걸음'의 시작이 어떠한 낙차의 틈새에 있었다면, 그렇게 걸어서 향했던 길의 방향 역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매끄러운 길이나 여행자의 걸음이 장소와 장소를 지나는 것으로 이어져있다면, '국경을 넘는 걸음'의 길은 누군가와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것으로 이어져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의 걸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만났던 벽을 당신들은 어떻게 넘어갔는지 고민을 나누고, 서로의 보폭을 견주어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걷는 길이 '반경'의 테두리를 맴돌 때, 이 만남의 힘으로 다시 넘

어갈 수 있기를. 그러나 걷고 있는 사람은 걸어서야만 만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비유로서만이 아니라, 수차례 '월경'을 하는 그 길에서 우리는 정말로 참 많이 걸었다. 길을 헤매면서,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자료를 보러 가면서, 늘 운동화끈을 동여매고 타박타박 걸었으므로, 우리는 '누군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서야만 만날 수 있었던 당신은 역시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서 밟아나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만나서 함께 걷던 시간들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 월경의 길에서 만나는 얼굴들에 어쩐지 서로 마음이 쓰이는 것은 걸음의 기쁨과 노동과 피로가 묻어있음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렇게 월경의 얼굴들과 만났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 이 '월경의 얼굴들'과의 '만남'이 절박했다면 그것은 이러한 면 또한 가진다고 할 것이다. 앞서 우리의 걸음이 '여권'을 갖지 못한 채로, 걸어서 국경을 건너는 걸음과도 같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모종의 긴장감과 절박함'의 걸음이 여행자의 걸음이 될 수 없듯, 또한 순례자의 걸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한 켠에 남아 있다.

 

지는 싸움과 죽는 걸음이 기꺼워도 '이미 많은 이들이 나선' 걸음의 뒤로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슬픔으로, 또는 박탈감과 증오심을 누르고 누르며 나서야 한다면 그 산책의 길은 고통의 순례길이 될 터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걸음이 빈 곳을 향할 뿐이라지만, 이 지는 싸움과 죽는 걸음 뒤에는 무엇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국경'을 넘기 전에 내가 물었던 질문 속에서 나는 우리의 '걸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의 '걸음'이 몫의 반경이든, 게토의 반경이든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의 만남을 끝없이 바라왔다면, 그것은 이 걸음이 싸우고, 지치고, 또 그 와중에 기쁘고, 뻘밭을 걷듯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그 길에 그러한 관계와 변화와 같은 무형의 흔적과 목소리들을 끊임없이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걷다가 지치는 나와 당신이 죽지 않고, 난리를 치면서도, 다시 걸어가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3. 걸음의 보폭, 발자국의 깊이

 

수많은 월경을 걸어서 건너왔다. 그러나 이것이 '걸음'이었음을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알았다. 그것은 함께 걸어온 사람들의, 그리고 걷다가 만난 사람들의 발자국을 뒤늦게서야 보고,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발자국의 깊이가 다른 것을, , 하고 발견하였을 때에야, 함께 건넜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나의 발자국이 경쾌한 보폭으로 가볍게 찍혀있다면, 또 누군가의 발자국은 주위를 살피며 느릿한 보폭으로 찍히고, 또 누군가는 책임의 무게로 발자국이 무겁게 패여 있다. 지금까지 마치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였지만, 실은 나의 발자국은 너무나 가볍게 찍혀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발자국과 보폭이 변하는 것과 차이에도 우리가 걸었던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첫 워크숍에서 첫 외국방문의 설렘으로 가득 차서 교토와 도쿄를 가로지르는 힘든 일정에서도 아무에게나 말을 걸면서 뛰어다녔던 것, 그리고 그 다음번 장기 레지던시 참가로 짧지만 '생활'이 되었을 때 막막하고 우울했던 것, 그리고 언젠가 받았던 환대의 안도감, 그리고 이번의 워크숍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촉을 세우고, 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가늠하고,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걸음의 보폭과 깊이가 바뀌어가는 것은 팀 안에서의 '', 또는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를 다시 가늠하고 세워보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aff-com'이 누군가로서의 'a''com-munity' 속에서 하나의 'a'로서 말하고, 응답받고, 관계 속에 놓이는 주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공론장 속에서 말의 몫을 갖는 것을 바라왔다면, 나의 보폭 또한 그러한 길을 돌아서 또는 엇나가면서도(!) 밟아왔다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이러한 걸음과 발견, 그리고 길을 만들어나가는 '발명'은 삶의 반경을 넘었을 때에야 육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한 학교, 익숙한 지역, 익숙한 레토릭, 익숙한 관계 속에서는 될 수 없었던 ''를 조금씩 발굴하거나 조형해간다. 그러니 국경을 넘어서 만나는 것은 비단 '당신'만이 아니라, ''이기도, '다시 만난 세계'이기도 하다. 이는 만남의 값을 다시 ''의 안으로 환수하는 것이기보다는, 당신도, 나도, 우리도, 세계의 지평이 약간 흔들, 하면서 각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이다. 이 흔들림을 겪기 위해 서로를 찾아 발이 온통 곪아가며 울퉁불퉁한 길을 밟아 건넌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았을 때, 이리저리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꽤 멀리서부터 이어져있는 것이 보인다. 혼자서는 결코 올 수 없는 길을, 다른 보폭, 다른 무게로,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함께 걸어주었구나. 탄식밖에는 뱉을 수 없을 때, 그 음색에는 나뉠 수 없는 의미들이 뒤섞여 반짝인다.

 

4.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

 

'월경'이라는 '걸음'은 지금까지 어떠한 낙차 속에서 시작되어, 누군가를 만나고 그것으로 보폭을 바꿔왔다. 그렇다면 그 걸음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물론 이 '닿는 곳'은 완결된, 또는 종결 가능한 '종착지'로서가 아니라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에 잠시 머무르는 것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는 우리의 걸음과 또 다른 이의 걸음이 만나서, 그 만남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졌다가 사라지는 장소이다. 서로의 보폭을 견주고, 힘듦을 교환하는 걸음 위의 만남이 그것으로 그치거나 스러져버리지 않도록, 모두가 모여 길의 지도를 그려 지평을 만들면서도 동질성의 재생산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 헤어지고 또다시 다음의 장소를 기약하는 그런 장소.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는 장소가 아닌, 걸음과 길들을 이어서 별자리를 그릴 수 있게 하는 장소. 한편으로 우리의 걸음은 그런 장소를 만들고, 기록하기 위해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경의 걸음에서 만나서 함께 노동과 노력과 대화와 고민으로 만들어온 '워크숍' 또한 그러한 열렸다가 사라지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다음 장소에서 다시 당신과 만나기 위해, 당신도 나도 걸음을 걷는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 나는 걸어서 그곳으로 가겠어. 왜냐하면 걸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금 이 시대에 행할 수 있는 가장 나 자체인 것이며, 마음과 육체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인 묘사라고 생각되었으니까요. 내가 더 이상 똑바로 걸을 수 없는 벽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돌아서 가리라. 돌아가는 길은 더욱 멀고, 언젠가 나는 더 이상 걸어서 통과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겠지만, 그러다가 여러 번의 벽을 만나게 되면 나는 마침내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항상 걷고 있었던 그 길 잃은 길을 걸으리라.

 

벽을 만나 돌아가고, 길을 잃더라도, 우리는 그 길 잃은 길 위에서 역시 길 잃은 당신을 만날 것이다. 그러니 걸어간다면, 우리는 다시 당신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걸음의 한 지점을 여기에 기록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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