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콩떡

 

 

얼마 전, ‘지역의 문청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을 접했다. 그러니까 황량한, 또는 소박한 땅에서 무엇인가 지금과는 다른 것을 바랐고, 찾아내고 싶어했던 아이들. 그렇게 그 땅을 떠나지만 늘 사라져버리고 행방을 찾을 수 없어서 말할 수도, 말해줄 수도 없는 아이들에 대한 질문. 자신의 삶의 반경 바깥의 다른 것을 바랄만큼은 용감했고, 반경을 완전히 떠나지는 못할 만큼은 소심했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질문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청’들, 또는 ‘문청’이 되려는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아담이 되는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듯하다. 저 멀리의 누군가가 되는대로 갈긴 ‘필독서 100권’의 목록보다는 손바닥만한 삶의 반경 너머를 잠깐 꿈꾸게 해줄 시와 소설과 먼 곳의, 또는 오래된 혁명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참고서이다. 그러면 참고서의 지문을 읽고 그 중 눈이 가는 작품을 사서 읽는다. 무엇을 읽어야하는지의 지표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은 이 조악한 나침반을 들고서도 사막에서 물의 냄새를 찾듯 더듬거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늘 오래된 이야기만 읽던 아이들은 최신의 이야기를 고르는데는 대부분 머뭇거린다.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는 알량한 자존심 뒤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동네의 큰 서점에 가서도 책등이 빛이 바랜 채로 구석을 ‘장식’하던 <하서명작선>을 샀던 기억이 난다. 참고서 바깥의 세계를 혼자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에게 ‘명작선’이라는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책을 사는 부모에게도, 책을 읽는 아이에게도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읽는다는 신뢰를 주었던 ‘하서명작선’에는 ‘역자 소개’가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참고서가 아닌 책을 읽는 아이에게 군말없이 책을 사주고, 선생들은 낯선 책의 제목이 ‘권장도서’에 포함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지나갔다. 군말이 없다. 누구도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쓰는지를 몰랐던 아이들. 처음의 질문을 바꾸어서 다시 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문청’이었을까? 문청은 독특한 단어이다. ‘문학청년’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글 쓰는 청년’, ‘소설쓰는 청년’이라면, 책과 글을 사랑하고 독특한 단어와 미려한 문장에 대한 애착을 갖는 ‘문청’은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공유가 존재하는 문학적ㆍ문화적 기반 위에서 나올 수 있는 기표이다. (그리고 ‘문청’이라는 ‘줄임말’이 만들어진다는 것에서, 그 단어가 어렵잖게 유통될 수 있는 기반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지역, 그러니까 삶의 반경 안에 ‘문청’이라는 기표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문청’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의 반경 안에 ‘문청’이라는 말이 없음에도, 글과 이야기에 여전히 매혹되었던 아이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아이들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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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빠진 문장 중에는 '결국 '나'라는 주어를 잔뜩 쓰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ㅠㅠ 이 타이밍에 자기 고백적, 또는 자기 분석적인 이야기를 하고 앉아있는 것은 다음 중 무엇 때문일까요?

 

1. 마감이 닥쳐오니 딴 일이 손에 붙어서

2.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라서

위의 말은 농이고, 사실 지역의 문청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하는 질문이 계속 떨어지지 않아서 조금 떨어내보기 위해 썼습니다. (정확히는 쓰다말았습니...) '문학청년'과 '문청'의 차이를 생각했고, '문청'이 아닌 어떤 아이들은 어떤 지표나 좌표도 갖지 못한 아이들이 아닐까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레알 문청들은 어떻게 크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편파적입니다ㅠㅠ 걔들도 탈출을 꿈꿨을까요? 적어도 교보문고 이야기를 디즈니랜드 이야기 듣듯 듣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교보문고가 디즈니랜드처럼 상상 속의 공간이었던 아이들. 문청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책을 좋아하던 아이들. 백일장에서 상을 타는 것 말고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던, '글'이 소통하는 것임을 몰랐던 아이들. 늘 저 멀리의 독자였던 아이들. 지긋지긋한 반경의 바깥을 원하던 아이들. 늙은 애비 버려두고 영영 안돌아오는 아이들은 무엇이 되었을까..요? 답은 아직 쓰지 못했어도 '삶의 반경'을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라는 주어를 많이 쓴 것이 마음이 걸립니다. 퇴행적인 현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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