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밉고도 고마운 짓

 

 

 

 

소설가 金 飛 

 

 

 

 





  L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가 어느 날, 두터운 붉은색 코트를 둘러 입고,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고 내게 찾아왔다. 평소 사람들 속에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여러 가지 다양한 관심들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고, 또한 쓰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던 그였는데, 아직도 여전히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았는지, 잔뜩 주둥이를 내민 채였다. 분명 작년에 내가 소개해주었던 그의 여자친구 R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싫다, 됐다, 하는 놈을 억지로 끌어다가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 앉혀놓으니, 언제 싫다는 이야기를 했었냐는 듯, 그는 처음 만나던 그 자리에서 서로 사귀기로 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참 어려운 둘이 만났으니 골치 꽤 아플 거로 생각했는데, 자기들끼리 무슨 거사를 치렀던 건지, 그다음 달에 둘이 함께 찾아와 서로는 분명히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사랑에 감사하고, 삶에 감사하고, 그리고 나를 예언자라도 되는 듯 추켜올렸다.

 

  가장 좋았던 것은 소통이라고 했다. 그토록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사람은 처음이라 이야기하며,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낯간지럽게 바라보면서, 쓰다듬고 조몰락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가 들어맞기는 단단히 들어맞은 모양이구나, 내심 벨이 꼴리면서도,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좋은 일이라도 한 것처럼 한동안 기분이 좋았는데, 지난여름부터 이것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찾아와, 서로에 대한 미심쩍은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데다가, 둘 다 참 다가서기 쉽지 않은, 생각 많고 내밀한 성격인 걸 알고 있었으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서는 아무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이것들이 만만한 내 앞에만 오면 통성하는 날나리 신자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쏟아놓았다.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첫 마디는,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줄 알았는데...'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나온 삶, 사랑, 그리고 복잡하고 사연 많은 가정사까지 모두 털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물론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서로의 마음에 깊숙이 가닿고 싶다고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속에 담긴 말들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잘 모르겠어.'였다. 그들이 이야기한 삶과 사랑과 그리고 가족 이야기 중에는 이따금 나까지도 깊이 감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한 번도 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서로서로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사이라 믿었고, 자신들의 소통은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유연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가고 싶은 미래는,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거기는, 가만히 듣고 보니 서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저 다른 단어를, 다른 표현을, 다른 몸짓을 이용해 자신들의 미래와 희망과 행복을 말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그들은 끝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언성을 높여 싸우기만 하고는, 이내 나를 찾아와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곤 했다.

 

  똑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면서, 서로 전혀 다른 곳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답답하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쏟아놓은 말들은 전혀 달랐지만, 그래서 종종 그건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R은 몇 년 동안 독일로 유학을 갈 생각이고, 그의 남자친구 L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주체적이고 생산적인 자신의 미래를 찾아 어디론가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 할 것 같다 이야기했다.

 

  결심이 필요했다. 그들의 결심이 아니라, 나의 결심이었다. 이미 서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소통도 이루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알고 있다.'는 자신의 영리하고 명민한 지식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만큼이나 쓸모없는,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나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그들의 중간에, '전달자'의 역할로 섰다. 그리고 그동안 서로에게 들었던 말들을, 듣게 되는 말들을 상대방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똑같은 말이었지만, 서로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때로는 없는 말들을 보태가면서, 쓸모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몸짓의 언어들은 지워가면서, 최대한 서로가 받아들이기 쉬운 말을 이용해, 서로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을 전달하였다. 때로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방이 진실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지, 서로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입을 통해 전달되는 상대방의 말들을 차분히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자신들의 마음속에 전해지는 똑같은 바람, 똑같은 사랑, 혹은 똑같은 마음을 확인하고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고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반성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 만났을 때, 그들은 이제 또다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그런 두 사람이 되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서로의 이야기들로, 서로 상대방이 자신을 위로하며 어루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내가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어.' 따위의 말들은 당연히 단 한 번도 전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서로, 그런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마저 헤아려주는, 참으로 고맙고 품이 너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테고.

 

 

  어떤 관계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말을 전달하는 일이란, 십중팔구 욕먹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욕먹는 걸 두려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을 맞붙여놓고, 고래고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만 소리 질러 이야기하다가, 등을 돌리게 내버려두는 일 또한 옳지 않다.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어,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이 중간에 선 자의 임무일 터.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이더라도, 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어 서로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하는 해피엔딩을 위한 목표라면, 아무리 엉뚱한 말들을 자기 마음대로 덧붙이고 빼는 얄미운 짓거리라도, 결국 그들은 고마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 !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해두는 말인데, 나에게는 L이라는 친구도, R이라는 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사랑 문제 때문에 왈가왈부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내 지랄 맞은 성격과도 어울리지 않고. L은 내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사랑의 예언자: 에리히프롬의 생애>의 저자,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iedman)의 첫 알파벳이었고, R은 독자(Reader)를 의미하는 첫 알파벳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결국 독자와 저자 두 사람 모두 헤피엔딩으로 마무리 될 수 있는, '얄밉고도 고마운 짓'이 되기를 바라고 있고.

 

 




사진: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iedman)의 <사랑의 예언자에리히프롬의 생애> 표지







 



제10화 기웃거리기의 힘

 

 

 

 

소설가 金 飛 

 

 

 

 






  그러나 '괴물'이 되라는 말은 어쩌면 지금의 제도와 관습에 익숙해진 모두에게 폭력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스스로 지켜온 인간의 모습이, 돈과 물질과 권력에 의해서 조종되고 통제되며, 오직 그것들을 통해 의미를 가지는 타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괴물적인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괴물'의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어불성설로 들릴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건 필연적으로 불안이나 흔들림으로 환기될 것이며, 당연히 두려움을 동반한다. 변해야 한다는 노력들은 또다시 강박이 될 것이며, 그건 오랜 시간이 걸려 우리들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할지도 모른다. 모든 꿈을 꾸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결국 그건 꿈을 이룬 자들을 위한 들러리가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건 아주 비겁하고 치졸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제 괴물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괴물이 되기로 했으니, 그 따위 손가락질 쯤 껄껄 웃어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 자신도 '괴물'같은 용기를 끌어올려 건네는 제안이다. 어차피 획일적인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만큼, 이 길고 지난한 삶의 시간 속에 '외도'라고 손가락질 받을만한 일 쯤은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기웃거리기'다. 


  모든 변화는 두근거림이다.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설렘이기도 하고, 또한 현재의 무언가를 포기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모든 설렘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지녔으며, 모든 두려움은 반대로 반드시 설렘을 동반하기 마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 앞에서 우린 '두렵다' 혹은 '설렌다' 말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선택한 감정일 뿐,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혹은 설레게 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두근거림이며, 또한 똑같은 심장박동이다. 

  앞에서 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억압하는, 이 경계로 나누어진 세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이 세계의 억압이나 불안을 절감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문제일 수도 있고, 환경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한 문제, 직업이나 취미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변화를 꾀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털어내는 일이다. 어떤 변화 앞에, 자신의 두근거림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그것을 설렘이라고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환기할 필요는 없다. 설렘의 두근거림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 대신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먼저 조금씩 지워내는 일이 먼저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일까? 공포에 질린 누군가가, 자신이 심장박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기웃거리기'다.  


  어떤 경계가 있다. 당신은 경계 안쪽에 있다. 그러나 그 경계가 당신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 너머의 무언가가 자꾸 당신을 끌어당긴다. 경계의 안쪽은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계의 안쪽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경계로 다가가라. 


  그리고 두 발은 여전히 경계 안쪽에 단단히 디딘 채, 고개를 길게 빼서 경계 너머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경계 너머에 있는 그들과 눈인사라도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가능하다면 그들과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눌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게 무슨 짓이냐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올 것이다. 특히 당신이 의지하고 있던 경계의 안쪽에, 그 안온함과 권위, 혹은 계급은, 불안의 손가락이든, 비난의 손가락이든, 그게 아니라면 위협의 손가락이든 당신의 눈앞에 내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이 디디고 서 있는 경계 안쪽의 두 발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비난과 위협의 손가락이 당신을 가리키게 되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디디고 있는 두 발의 단단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 돌아가겠다는 비겁함도 좋고, 너무 힘들다면 그저 경계 너머의 형편없음을 알기 위해 기웃거리는 중이다, 비겁하고 야비한 핑계도 상관없다. 기웃거리기 위해, 결코 당신은 당당하거나 떳떳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내게 성정체성 문제로 상담을 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양쪽 모두의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다면 의료적 조치 이전에 양쪽 모두의 생활을 다 해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정도 시기에는 여자로 살아보고, 또 다른 기간에는 남자로 살아보는 일을 직접 시도해 보라고 조언한다. 그저 반대성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반대성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며, 스물네 시간 그 역할에 맞추어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라면, 여성으로 옷을 입고 외모를 가꾸는 것만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육체적 성인 남자로서 행동하고 남자의 성 역할을 최대치로 시도해보는 것이고, 반대로 남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라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 함께, 여성인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이완시켜 조금은 중성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살아볼 것을 권한다. 그것마저도 자신과 맞지 않다면, 남자이거나 혹은 여자의 정체성을 모두 던져버리고, 어떤 때는 남자의 정체성으로, 또 다른 때는 여자의 정체성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고,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두 발이 '인간'의 정체성을 단단히 디디고 있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야비해도 괜찮다, 비겁해도 상관없다. '인간'을 잃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어떤 경계를 넘어서든 상관없는 일이다. 


  기웃거림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두 발의 단단함을 믿고 있다면 어디로든 우리는 넘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학생의 경계 안에 있다면, 그 경계의 끄트머리까지 달려가서 경계 너머를 기웃거리며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고, 자신이 직장인이나 가족의 경계 안에 있다면 그 경계 끄트머리까지 달려가 그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고, 언제든 돌아서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다. 혼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느 방향으로든 자신이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경계의 끝까지 달려가, 마음껏 그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돌아오면 되는 일이고. '인간'이라는 단단하게 디디고 있는 두 발의 의미를 잃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첫걸음을 떼어 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길들여왔던 생각에서,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분명히 강박이고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이나 신념, 혹은 믿음도 지우지 않으며, 그 위에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업데이트'다. 飛 





 

 

[생의 뜨락] ‘아무 말’, 불현듯 그 곳에 가고 싶게 되는.


 


최혁규(문화연대)


 

 

 

현재 문화운동은 어디쯤 머물러 있으며 어딜 향해 가고 있을까? 거리를 배회하며 술집을 어슬렁거리고 영화의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지금의 나는 활동가로서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민운동의 안팎에서 기존의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함께 새로운 시민운동을 논의하고 있듯이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떤 시민운동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열정과 열정의 부족인지, 혹은 기존의 운동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실무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지 그게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일단 현상에 대한 진단을 해보면, 몸도 마음도 뻑뻑하니 스스로가 메마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폴리네르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정신이 메마를 때는 아무 말이나 써놓고 곧장 앞으로 나가라”고. 그래서 이 글은 추동력을 얻기 위한 ‘아무 말’이다.

 

이전의 나를 돌이켜보니 이렇다. 비싼 등록금을 낸 학교엔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돌아다녔다. 반항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니었다. 갑자기 스무 살의 문턱을 넘자 그냥 모든 것이 지리멸렬해졌고, 술에 젖어 하루를 잊은 채 잠이 드는 게 좋았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를 통해 시네마테크에 발길을 들이게 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루 줄곧 영화를 몇 편 보고 밤이 되면 거기서 만나게 된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러다 보니 그 공간이 너무 소중해졌고 영화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구의 말마따나 나에게 시네마테크는 학교였다. 또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공간이 사라질 위험에 닥치게 되었고 나 포함 시네마테크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시네마테크를 지켜내는 게 정말 절실한 문제였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영화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던 생각뿐이었다. 지금 그 당시의 릴레이 글 중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거대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곳이 밀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숲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숲길을 개척해 나가기도 한다. 그 길의 초석을 마련해준 곳이 시네마테크다. 장황한 밀림 속에서 방황하고 갈피를 못 잡던 나(혹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여러 길을 안내해주고, 설명해주고,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인심 좋은 노인 같다고나 할까. 이 분은 모진 풍파를 견뎌낸 일화들을 즐겁게, 때론 슬프게, 때론 무섭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가끔은 졸기도 하고) 가야 할 길을 묻곤 한다. 시공간을 넘어선 영화와 대화, 동행자들과 대화, 그리고 곧 다가올 대화들. 숲길에서의 대화는 가끔 모진 돌에 걸려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게 해준다. 시네마테크는 내게 그런 존재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서 영화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다. “나도 한때는 영화 정말 좋아했었는데” 혹은 “나도 너만 할 때는 영화광이지” 등의 말들이었는데, 그 말들을 들었을 때의 나의 반응은 항상 하나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항상 현재진행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시네마테크에서 내가 처음 본 영화는 루이스 부뉴엘의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이 영화의 제목을 비유해서 이야기하자면,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영화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글을 쓰다 보니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현재에도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누군가도 그럴 것이라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그렇게 꾸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산더민데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불현듯 그곳에 가고 싶다. 이 아무 말이나 써놓고 그곳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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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규
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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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02) 서울 마포구 공덕동 120-10 백광빌딩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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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아름다운 길

 

 

 

 

소설가 金 飛

 

 

 

 

 

 

  '변이'란 똑같은 종에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종류와 모양, 혹은 개체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 변이는 처음부터 정상, 혹은 비정상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 혹은 또 다른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하는 것이다.

  질서와 균형을 획일성이나 통일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잘못된 습성을 지녔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는 결국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똑같은 자아를 가진 누군가를 존중하는 법 대신에 그들을 지배하고 그 우위에 서려는 집착을 드러내면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짓밟으려는 '괴물성'을 지녔다.

  자아의 영혼을 살찌우고 충만하게 하는 법을 채득했던 것이 아니라, 겉모습의 미추(美醜), 계급의 고저(高低)만을 보고 판단하는 습성을 지닌 현대인에겐, 처음부터 타인을 판단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떤 모습이건간에, 그들의 외모가 자신들이 판단하는 '' 혹은 '화려함'에 부합하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치환해버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나쁜 사람, 혹은 자신과는 다른 하등한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그렇게 인간의 자아가 결여되어있는 이들은, 또한 언변이 뛰어나며 목소리 또한 크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움직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들에겐, 모두를 단번에 끌어모으는 구호나,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언변으로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유지하려 애를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논리와 이성이 따로 존재하며, 진실되게 마음을 울리는 그 어떤 경구(警句), 그들에게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권위를 뽐내기 위한 자랑거리로 전락해버린다. 그로 인해 추앙받고 존중받는 일들을 즐기면서 자신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간적인 자아를 지녔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그것에 귀를 기울여줄 군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두 한꺼번에 허물어지게 될, 화려하게 눈을 현혹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하는 창의적 방법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오로지 돈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십 수백 가지의 새로운 것을 돈으로 사들이고 그리고 너무도 쉽게 그것들에 흥미를 잃고 또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사들이지만, 돈이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는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다. 또 다시 기계 속 부품 하나가 되어 거대한 무언가가 굴러가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소외되고 버려진 스스로의 자아는 어딘가에서 잔뜩 쪼그라들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외향적으로나 태생적으로나, 그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너무도 쉽게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들에게 혐오를 드러내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누군가, 혹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야만 자신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과 상처를 주는 말들은 더욱 무차별적이 되고 또한 무자비해진다.

 

  스스로 그토록 인간답고 이성적이라 말하면서, 자아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괴물의 꼬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돈의, 물질의, 외향이나 계급의, 그리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경계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그들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의미를 잃어버린, 기계의 톱니바퀴 하나를 닮은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괴물이 된 서로가 오로지 더 높은 계급, 더 많은 물질만을 추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괴물적으로 집착하면서, 반대로 도태나 패배를 삶의 모든 것이라 규정하며 스스로의 삶을 모두 포기해버리는 극단적인 짓까지도 서슴치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보다, 인간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상위에 놓아야할 가치나 제도, 혹은 물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순환되어야하는 일이며,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 교육이란, 인간에게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심어주고 그 위에 제도와 물질의 의미라는 가지를 자라게 하는 것이어야하며,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그 명제 하나만으로도, 모든 타인은 나만큼이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증거라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나는 경계로 인한 모든 불안과 억압을 떨치고 일어나는 방법을 말하기 위해 '변이'에 대해서 말했고, 그리고 다시 '인간'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있다. 변이와 인간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괴물'이라고 부르고 자신도 모르게 우리들도 괴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렇다면 나는 이제 우리 모두 '아름다운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를 쓰고 그 누군가가 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괴물성,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세상의 경계에 대한 억압이나 불안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괴물'이 되라고 말이다. 세상이 규정하는 보통 사람이 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는 대신, 세상이 말하는 '보통'이나 '정상'과는 다른 나의 모든 것들을 오히려 더욱 소중한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 삶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괴물' 말이다.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사는 공동체적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말하겠지만, 우리들은 이미 그런 '아름다운 괴물들'을 너무 여러번 목격해왔다. 장애나 가난, 혹은 다른 종류의 소수성이나 특수성은 획일적인 이 시대에 당연히 스스로를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근원이겠지만, 그들은 그것에 짓눌려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세상이 말하는 인간적 삶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괴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괴물'이라는 한계를 끌어안고 태어나, 자신이 그런 '괴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 어떤 인간도 구현하지 못한 참된 인간성을 보여주며 인간됨을 증명한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매달리고 있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물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역설일 것이다.

 

  성전환자라는 이름의 내 안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 되고자하는 집념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이나 혼돈을 지우기 위해,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 오래도록 발버둥치면서, 나는 그걸 모두 다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일으켜세웠던 것은, 이젠 내겐 아무런 선택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나는 경계를 넘어섰고, 경계 너머는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그런 이상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심각한 불안과 억압을 내게 주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또 다시 지금과 똑같은 속도로 지난하게 흘러가는 시간 뿐, 어차피 내게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한 현실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이완시켰다. 텅 빈 존재가 되고 나니, 어디로든 마음껏 흔들리며 날려가는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딘가로 나 자신을 띄워보내면서,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나 여자 따위의 정체성이 아니라,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창의적이고 즐거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 대해 남자나,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역설하는 대신 그저 편안한 대로 판단하시라 말했더니, 아무런 강박이나 억압도 없는 가벼워진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억지로 만들고 꾸며진 내가 아니라, 진정으로 순수한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남자, 혹은 여자로 나뉘어진 세상의 눈에 나는 '괴물'처럼 보이겠지만(실제로 내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몇몇 사람들은 그런 악의적인 말들로 나를 지칭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제야 ''라는 하나의 인간의 정체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고마운 깨우침이었으며, 가벼워진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참된 인간의 무게였다.

 

 

 

 

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1회: 임재(parousia)의 리얼-리즘타인의 자화상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들

 

윤인로

 

 

욕망을 지지한다는 외우(畏友)의 말, 말의 힘. 이상의 문학에 대해 쓴다고 했을 때 들었던 그 말은 내게 옥죄어오는 세속의 관계들/올가미들이 일거에 걷어치워지는 순간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 순간의 말은 구원의 지속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욕망을 지지받는다는 것. 그것은 쓰기와 삶, 쓰는 삶의 밑돌에 다름 아니다. 날개이후의 이상 만큼 그 욕망을 지지받았던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연구목록만 40페이지. 그 막대한 두께를 뚫고 하나의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 주목하게 됐던 건, ‘여기는 폐허다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자화상과 그림 <자화상>이었다.

 

 

<1928년 자화상>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자화상>

 

이상의 자화상, 이상이라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기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이들 중엔 임종국, 이어령, 고석규가 있었다. 이른바 전후(戰後)의 청년들, 전후세대. 이상의 문학을 발굴하고 그 위상을 정초했던 그들의 이상 연구에서 더 깊이, 더 많이 숙고되지 않고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눙쳐지거나 누락되고 망각된 의미망이 있다는 사실. 그 의미망을 오늘 다시 복기(復碁)함으로써 여기 다르게 복귀시키려는 비평적 의지. 지금 쓰고 있는 글은 그와 같은 진단과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상 전집, 임종국

 

이상의 문학을 불화하는 천사’, ‘순교자의 분노로 지목했던 <이상선집>(백양당, 1949)의 김기림을 잊지 않고 잃지 않은 이, 그가 바로 이상의 전집을 묶고 있던 청년 임종국(林鐘國, 1929~1989)이었다. 임종국이라는 전후. 달리 말해 전후의 이상, 전후에 의한 이상. 오늘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상의 빳빳한 전집들은 임종국의 열정과 열망이 매만진 최초의 전집에 빚지고 있다. <이상전집>(3, 태성사, 1956). 그 시대를 향한 진술 하나. “황량한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상이었다. 안암동 골짜기에서는 정외과의 임종국이 동숭동 문리대에서는 이어령이 이상 깃발을 높이 든 이래로 이상문학은 뻗어가고 있거니와, 그때부터 지금껏 이상작품 텍스트에 정성을 쏟아온 임종국의 안타까움()”[각주:1] 임종국에게 이상은 전후 이래 40년의 시간이었다. 기존의 통용된 가치들과 합의된 의지들이 냉전의 질서에 의해 부수어지고 깨지던 전후라는 근대의 제로상태 속에서, 그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이상의 문학은 발굴되고 정립되었다. 식민지의 삶이 군국(軍國)의 이윤과 그 체제를 위한 합성의 단순한 질료로 형질전환되고 있던 당대(1931~1937), 줄여 말해 이상의 근대, 근대성(modernity). 그 질서, 그 레짐 속으로 이상의 문학은 거듭 폐허와 파국으로, 끝의 선포로, 최후의 고지로, 줄여 말해 새로운 신()의 도래로 장전되고 있었다. 1939년의 김기림을 자신의 이상 연구첫머리에 제사(題詞)로 인용하고 있는 임종국, 그의 문장들을 보라.

 

그러면 근대의 초극이란 무엇인가? 절대자의 폐허, 다시 말하면 보편적 이성이 사망한 지구상에다 새로운 을 발현하여 군림시키는 작업이었다. () 스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가 되어 버린 이 비극의 담당자, 절대자의 폐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속도적 사건절망, 부정, 불안, 허무, 자의식 과잉, 데카단, 항거 등 일체의 정신상의 경향을 그의 문학에다 반영함으로서, 실로 보기 드문 혼돈 무질서상을 일신에 구현하고 만 것이었다.[각주:2]

 

위의 문장들, 이상을 바라보고 쓴 임종국의 그 문장들은 실은 임종국 자신을 향해 쓴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에게 이상은 전후라는 시대, 전후라는 삶의 끝간데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었고 요청되었으며, 그래서 발현되었다. 임종국은 김기림에 이어 이상의 문학을 이른바 근대초극을 위한 의지의 상관물로 읽는다. 그 연장선에서 이상의 시작(詩作)절대자의 폐허속으로, 다시 말해 군림하고 명령하는 절대적 가치들의 파탄, 사망, 소멸의 상황 속으로 새로운 신을 발현시키고 다시 군림시키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속도적 사건의 발생이라고 명명한 건 임종국의 혜안이다. 그런 혜안 속에서 임종국은 이상 문학의 정신사적 위치근대의 폐허를 확인하고, 또 그로 인하여 동요하던 근대적 자아실존하는 인간상에 표현을 주고, 또 그 초극을 몸소 교시(敎示)하였[각주:3]던 점에서 구한다. 근대의 폐허. 이상은 자신의 자화상에서 여기는 폐허다라고 적었다. 1955년 현재, 임종국은 그 자화상에서 자기 자신의 표정을 본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얼굴을, 전후라는 상황의 표징을 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상의 자화상에는 오늘 이상을 읽는 독자들의 표정과 삶의 조건이 담겨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의 그 음울한 표정과 대면하고 자기 삶의 그 파열된 조건과 대결하는 것이 오늘 이상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당위로서, 강한 요청으로서 주어지고 있다는 것.

한편, ‘무중력 상태화전민 의식으로 전후를 경험했던 이어령에게 이상의 문학이란 이런 것이었다. “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무의미하고 무질서하고 맹목적인 일상성으로서의 현실과 그를 의식하고 그 공백 가운데 자기 생을 설정하려는 선악과[善惡果]의식 세계…… 이런 부단의 모순으로 찬 인간 조건을 한 몸에 향수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고난과 그 비극이 곧 의 예술이 되었으며 거기에서 자기를 해방시키고자 한 의지가 그 예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각주:4]이었다.” 이어령은 이상의 문학을 겹겹의 모순으로 된 인간 조건의 표현으로 읽었다. 그가 나열하는 그 모순의 양극단이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세계, 무의미와 의미, 맹목과 모랄, 비본래적인 것과 본래적인 것 등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상극 대립한 두 조건을 한꺼번에 수행하여 할 휴머니티는 그야말로 낭자한 유혈극의 참상을 자아냈다.”[각주:5] 이 문장에 과장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령에 따르면, 이상은 그와 같은 유혈의 비참 속에서 신의 조화로운 질서를, 신이 만든 무의미하고 무질서하며 맹목적인 일상으로 인지하고 경험했다. 다시 말해 이상의 문학은 의미와 가치, 조리(條理)와 정관(定款)으로 된 근대적 체제 안에서 그것의 무참한 부조리와 정관의 파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상이 선악과의 의식세계가 뜻하는, 신의 명령에 대한 거부와 위반의 의지 속에서 자기 생()’을 기립시키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어령의 이상은 신의 정관을 거역했던 아담이었다. 신의 중력을 차단하고선 동토를 녹이고 박토를 개간해야했던 화전민. 그가 이상이었고, 이어령이었다.

신의 질서와 자기의 생. 그 두 극의 대립과 결렬, 이반과 모순. 이상은 최초의 소설 十二月十二日에서 모순이야말로 진리의 한 형식이라고 적었다. 그와 같은 모순에 대한 감각을 일러 이어령은 현대적 자의식이라 불렀다. “이러한 현대적 자의식의 세계 앞에 나타난 현실의 세계란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실화(失花)’실락원이었다. 그 실낙원의 일상생활 가운데 천사는 아무데도 없으며’, ‘파라다이스는 빈터인 것이다. 천사의 시체만이 사는 현실적 일상 세계에는 절대적 공허() [이상은] 이 실낙원의 현실 세계에 천사를 다시 불러서 돌아오게 하는 응원기같은 것을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각주:6] 이상의 실낙원으로부터 분비되고 있는 문장들이다. 이상은 빈터가 된 파라다이스에서 자기의 생을 기립시키려 한다. 신의 질서로 파송된 천사는 이상의 현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공허 속에서 이상은 스스로 불세출의 그리스도’(각혈의 아침)가 되어야 했으며, 새로운 천사로 발생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신의 질서를 찢고 자기의 생을 재정초하는 과업을 밀고나가야 했다. “그는 오로지 이것이 내 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미지의 경지를 향하여 묵묵히 접근해 갔었을 뿐이다.”[각주:7] 자기의 생()이라는 미지의 경지, 자기의 진상(眞相)에 대한 추구와 밝힘. 이상의 그 생, 그 진상에의 접근이란 이른바 리얼(real)’에의 격동하는 욕동에 다름 아니다. 알다시피, 모더니스트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한 양태로 불러일으켰던 이는 비평가 최재서였다.

최재서는 이어령에 앞서, 이상의 문학이 상극의 과정태이며 그 투쟁 속에서 발현하고 있는 것이 순수의식이라고 보았다. 다음 문장들에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심화로 부르는 최재서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 생활과 의식, 상식과 예지(叡智), 다리와 날개가 상극(相剋)하고 투쟁하는 현대인의 일()타입을 본다. 정신이 육체를 초화(焦火)하고 의식이 생활을 압도하고 예지가 상식을 극복하고 날개가 다리를 휩슬고나갈때에 이상의 예술은 탄생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보통소설이 끗나는 곳즉 생활과 행동이 끗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예술의 세계는 생활과 행동 이후에 오는 순의식(純意識)의 세계이다.”[각주:8] 육체를 그을리고 태우는 정신, 생활을 압도하는 의식, 상식을 넘어서는 직관적 지혜, 지상(을 딛고 선 다리들)을 쓸어버리는 천상과 초월에의 의지(날개). 날개를 읽고 있는 최재서는 당대의 생활이 불태워지고 압도당하며 극복되고 휩쓸려나갈 때, 다시 말해 지상에서의 생활이 종언을 고하는 그때 이상의 문학은 탄생한다고 말한다. 최재서가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저 순의식’, 그것은 지상의 일상에 끝이 고지되는 바로 그 와 관련된 것이다. 순의식, 그것에는 정지의 시간의식이 주요성분으로 함유되어 있다. 그 지상의 정지시간 속에서 이상의 생()은 생장하며, 그 생의 진상은 그렇게 정지된 지상 위에서만 개시된다.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심화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지상의 질서를 중단시키는 생(real)에의 의지, 그 생을 향한 이상의 욕동과 충동에의 이끌림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만이다. 이상의 그 욕동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 중엔 비평가 임화가 있었다.

임화는 1938년 한 해의 조선문학을 혼돈, 무방향, 방황으로 규정하고선 출로(出路)’를 발견할 수 없는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 함정 속에서도 이상은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게 임화의 생각이다. “불행히 그의 두뇌 가운데 세계는 왕왕 도착된 채 투영되었고 가끔 물구나무를 서서 현실을 바라보기를 즐긴 사람이다. () 그의 작품이 소설로선 형태도 안갖추고 그처럼 난삽했음에 불구하고 일부 독자에게 강렬한 감명을 준 것은 보통사람이 다 같이 느끼면서도 한걸음 더 들어가보기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세계의 진상(眞相) 일부를 개시한 때문이다.”[각주:9] 이상은 당대의 모두가 느끼면서도 대면하기를 기피하는 두려운 것, 곧 세계의 진상일부를 개시했다. 삶의 합의된 정관이 찢겨지는, 이른바 실재의 발생과 현현이라는 걸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용기. 임화가 인정했던 건 다름 아닌 이상의 그 용기와 근기(根氣)였다. 실재, 또는 진상을 향한 이상의 그런 기운이 분출되는 것은 임화가 말하는 것처럼 물구나무서서 세계를 도착된 것으로 인지할 때이다. 세계의 상을 도착된 것으로 투시한다는 건 조리정연한 질서로서의 세계가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환상이기에 안락하며 안락하기에 환상을 부여잡는, 환상에의 페티시즘. 이상은 그 스스로가 바로 그런 환각의 인()’(동해(童骸))임을 가감 없이 노출한다. 매끈한 환상의 질서 안에서 그 스스로가 환각의 인간임을 폭로할 때, 그 질서는 더 이상 지탱되지 못하며, 그때 그 인간은 더 이상 환각의 인간이기를 멈추고 생()의 진상(the real)을 경험하는 인간으로 된다. 그렇게 모더니스트 이상은 물구나무슨 형태의 레알이스트였다.”[각주:10] 리얼리즘(real-ism)의 심화란 물구나무로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던바, 이상은 도착과 역설의 감각 속에서 실재와 마주함으로써 그 자신 실재의 일부가 된다. 실재주의자(real-ist) 이상.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임화의 방황하는 문학정신193812월에 발표되었고 그 해의 문학을 혼돈출로 없음으로 진단했다. 임화는 5개월 뒤, 자신의 그런 진단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신학적 처방전을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1939. 5)에서 구하고 있다. 전시체제로 합성되고 있던 삶과 마주한 임화가 근대의 결함을 지적하는 입장과 논리를 보라. “자연과 인간이 신()을 매개로 교섭하던 시대의 수미일관성과 따이나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직접으로 인간과 자연이 교섭한 근대의 결함이 이 적절한 매개자(媒介者)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각주:11] 임화가 말하는 적절한 매개자로서, 인간과 세계의 교섭에 있어 수미일관성과 역동성을 선사하는 존재다. 임화의 그 신은 근대의 자질과 속성을 가감 없이 노출시키던 전시상태의 혼돈과 방황을 끝낼 수 있는 이었다. 임화에 따르자면, 그 신, 그 힘은 근대적 사회와 상극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중이다. “보편화된 인간적 태도의 양대 형태로서 신()과 사회(社會)! 20세기는 이것의 상극(相剋)이 명일의 운명을 복()하지 아니할까? 세계사(世界史)의 무대엔 언제나 영웅은 두 번 의장을 고처 등장한다고 한다. 한번은 비극배우로 또 한번은 희극배우로!/ 카톨리시즘은 이 양자의 하자(何者)인지?” 임화에게 단일신이란 인간이 세계를 단일한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체계로 인식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가지기 시작한 데, 비로소 만들어 낼 수[각주:12] 있었던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사회는 적대하든 공모하든 동일한 레벨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적 능력과 의지의 상관물이었다. 임화는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두 가지 보편적 형식으로 신과 사회를 들었고, 20세기의 운명이 그 둘의 쟁투의 현장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압축하고 있는 것이 임화의 질문이다. 세계사의 무대에 오른 카톨리시즘은 비극을 상연할 것인가, 희극을 상연할 것인가라는 그 질문.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임화의 그 질문에 대한 동시대적인답변은 임화와 함께, 임화에 앞서 이상이 제출하고 있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임화의 질문이 너무 늦었다거나 이상의 답변이 너무 빨랐음에 있는 게 아니라, 차생윤회(此生輪廻)라는 이상의 텍스트가 저 비극과 희극의 반복되는 무대의 내적인 균열을 다시 사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각주:13] 그러므로 문제는 이상의 문학이 신성성(神聖性) 속에서 추구하고 있는 실재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일이다. 다시, 문제는 실재주의자 이상이다.

이상의 리얼-리즘. 이에 대한 격조 있는 안티테제는 고석규의 것이다. “이상의 아이러니며 이상의 역설 감정은 모두 나 자신을 위조하며 가장하는 표호(表號) 또는 방패에 불과하였다.”[각주:14] 나는 그런 고석규의 실존론을 택하지 않고, 실재의 생을 향한 이상의 욕동을 지지하는 최재서/임화의 리얼리즘론을 택할 것이다. 그 리얼-리즘으로, 이상의 역설을 두고 고석규가 단순화하고 있는 저 위조의 의지에 대해, 표호의 맥락에 대해, 방패의 파쇄에 대해, 줄여 말해 이상의 각성과 그 실패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 리얼-리즘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 드러나는 고석규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그 (, real) 없음을 기각하고, 그의 실존주의가 폐기한 이상의 그 을 구할 것이다. “이상에게 있는 가정()나의 죽음은 결코 면전에서의 죽음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에게 있은 허무가 결코 면전에서의 허무와 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각주:15] 하나의 죽음과 허무를 실재와의 대면이 없는 죽음과 허무라고 단번에 확언할 수 있게 하는 저 면전(un Face be)’이라는 실존주의의 어휘는 권력화한 판관의 재판봉에 다름 아니다. 면전이라는 척도적 장소는 그러므로 파괴되어야 한다. 그 파괴의 연장선 위에서 고석규의 이상은 재정의되어야 한다. “오직 두 가지 절망과 두 가지 비밀’, 두 가지 텐스와 두 가지 나 자신’, 그리고 두 가지 세기가 서로 요동하며 () 그때 이상은 분명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저들[그것들]의 나지막한 합창을 엿듣는 것이다.”[각주:16] 대립하고 상극하는 그 두 가지 것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 그 모순과 반어 속에서 이상이 듣고 있었던 건 지상의 질서에 끝을 고지하는 파국의 조종(弔鐘) 소리’(어리석은 석반(夕飯))였다. 고석규는 자신이 말하는 나지막한 합창의 실재가 바로 그 조종 소리임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문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던 사상가로 임종국은 키에르케고르를 들었던바, 키에르케고르의 아이러니의 개념에 들어있는 한 문장은 이렇다. ‘아이러니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공허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공허성을 구출한다.’ 이 한 문장은 이상 독자로서의 고석규가 키에르케고르를 일신시키겠다고 말하면서 꺼내든 문장이지만, 고석규의 실존주의가 이상의 실재를 훼멸시키고 있는 한, 인용된 키에르케고르의 한 문장은 인용한 고석규의 목줄을 되겨누는 칼끝이 된다. 이상이라는 아이러니적 주체는 스스로를 공허에 감금하거나 유폐하지 않는다. 그 모순과 아이러니의 장소에서야말로, 다시 말해, 대립하는 양극이 실은 서로의 밑바탕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곤혹스런 상황 속에서야말로 이상은 자신의 공허와 허무를 구출하고 구제할 수 있었다. 이상의 문학이 거하는 그와 같은 난국(aporia)을 일러 임종국은 이율배반에 다름 아니라고, ‘현대판 시지프스의 신화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외부적 현실에 대한 그의 절망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그의 의식의 종착점이어야 할 제6의 단계외향적 반발에 이르러서는, 그 실효성에 관한 심각한 회의로 인하여, 드디어 이율배반에 함입하여 버리고 말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종착점에 다다를 때 마다 도로 출발점으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하는, 말하자면 출구가 봉쇄되어 버린 미로신을 살해한 후의 인간이 함몰한 심연에서의 숨막히는 순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각주:17]

 

임종국의 이상은 종착점이라고 생각한 곳에 다다랐을 때 거기가 또 다른 출발점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안다. 이상의 문학은 북돋우고 닦달하는 당대의 합성된/절대화된/신적인 가치들과 명령들 속에서 맹렬하게 좌초하는 중이다. 이상에게 종착과 끝은 완료되고 완수될 수 있는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이미(already) 종착과 끝을 감지하고 또 경험하고 있지만, 이상에게 그 종착, 그 끝이란 끝내 아직(not yet) 오지 않은 미-(-)의 사건이었다고 해야 한다. ‘이미아직의 동시성, 혹은 등질성. 바로 그 난국의 장소, 난제의 시간 속에서, 임종국의 어휘로는 출구가 봉쇄된 미로와 심연속에서, 이상의 표현으로는 모든 중간들은 지독히 춥다고 할 때의 그 중간 속에서 이상은 “‘절대자의 폐허에다 새로운 신()을 발견하여 군림시키는 줄기찬 작업’”[각주:18]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신의 발견 또는 발생, 이상의 숨막히는 순례’. 그의 그 순례란 기존의 신, 기왕의 신적 질서를 살해하는 살신(殺神)에의 의지와 실천 속에서만 시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상이라는 카라반(caravan). 저 지독히도 추운 중간에서 이상은 이렇게 쓰면서 기립하는 중이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이상의 그 순례를 뒤따르며 그 기립을 함께하는 일을 지금부터 시작해보려 한다.[각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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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 문학평론가. 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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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윤식, 「이상연구 각서」, <이상 소설 연구>, 문학과비평사, 1988, 23쪽. 책의 첫 장을 ‘각서’라는 이름 아래 써야했던 김윤식이었다. 인용한 대목은 그 각서의 끝부분인데, 곱씹어야할 지점은 그 문장들이 이상에 대한 전후세대의 열도(熱度)를 감지하고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이상 연구의 재출발을 위한 동력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시수도 부산의 고석규(「‘반어’에 대하여」)를 포함해 전후세대의 그 열의를 단순한 회고의 대상으로, 연구의 출발을 알리는 수사적 신호탄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이상을 향한 그들의 그 뜨거운 정성(精誠)의 논리와 맥락에 내재적으로/차갑게 틈입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2. 임종국, 「이상 연구」, <고대문화> 1집, 1955(임종국 편, <이상전집> 3, 태성사, 1956, 264쪽). [본문으로]
  3. 임종국, 「이상 연구」, 314쪽. [본문으로]
  4. 이어령, 「이상론―‘순수 의식’의 완성과 그 파벽(破壁)」, <문리대 학보> 3권 2호, 1955(김윤식 편, <이상문학전집> 4, 문학사상사, 1995, 36쪽). [본문으로]
  5. 이어령, 「이상론」, 36쪽. [본문으로]
  6. 이어령, 「이상론」, 37, 39쪽. [본문으로]
  7. 이어령, 「이상론」, 57쪽. [본문으로]
  8. 최재서, 「<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야―리아리즘의 확대와 심화」, <문학과 지성>, 인문사, 1938, 107쪽. [본문으로]
  9. 임화, 「방황하는 문학정신」,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244쪽. [본문으로]
  10. 임화, 「방황하는 문학정신」, 245쪽. [본문으로]
  11. 임화,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 757~758쪽. [본문으로]
  12. 임화,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 758쪽. [본문으로]
  13. 본 논문의 각 장에 거듭 인용되어 있는 「차생윤회」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길을 걷자면 ‘저런인간을랑 좀 죽어 없어졌으면’하고 골이 벌컥 날 만큼 이세상에 살아 있지 않어도 좋을, 산댓자 되려 가지가지 해독이나 끼치는 밖에 재조가 없는 인생들을 더러 본다. (…) 천하의 어떤 우생학자도 초인법률초월론자도 행정자에게 대하야 정말 이 ‘살아 있지 않어도 좋을 인간들’의 일제학살(一齊虐殺)을 제안하거나 요구치는 않나보다. 혹 요구된 일이 전대에 더러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쯕이 한번도 이런 대영단적우생학(大英斷的優生學)을 실천한 행정자는 없는가 십다.”(이상, 「차생윤회」, 임종국 편, <이상전집> 3, 37쪽, 39쪽.) 이것은 다른 누구 아닌 이상의 문장이다. 이에 대해 임종국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 함구가 오늘까지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이는 임종국이 이상의 문학을 ‘새로운 신의 발견과 군림’으로 정의했던 것이 오늘까지 단절되고 장사지내진 것과 내적으로 등가이다. [본문으로]
  14. 고석규, 「시인의 역설」, <문학예술>, 1957(고석규, <여백의 존재성>, 지평, 1990, 253쪽). [본문으로]
  15. 고석규, 「시인의 역설」, 256쪽. [본문으로]
  16. 고석규, 「시인의 역설」, 254쪽. [본문으로]
  17. 임종국, 「이상 연구」, 307쪽. [본문으로]
  18. 임종국, 「이상 연구」, 312쪽. [본문으로]
  19. 이상,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임종국 편, <이상전집> 2, 50쪽. [본문으로]

이상(李箱) 연구노트

 

 

 

 

 

 

앞으로 2, 4주 금요일, 웹진 아프꼼에 윤인로 선생님의 <이상 연구노트>가 연재됩니다.

이 글은 이상에 대한 연구의 진행인 동시에, 연구자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도정이기도 합니다. 

연구실의 어둑한 불빛 속을 밝혀가며 자아내는 이 미로 속을  함께 묵묵히 지켜보며 따라가주실

눈밝은 분들의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 이상(1910~1937)에 대한 다섯 편, 혹은 여섯 편의 비평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 쓰기의 과정 안팎을 앞으로 6회에 걸쳐 조금씩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이미 마무리된 문장들을 재분류하여 여기 다시 인용하면서, 쓰는 과정에서 폐기됐던 것들과 인지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더하여 지금 다시 촉발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간략히 메모하는 방식으로 연재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필자소개: 윤인로

 

문학평론가. 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8화 변이의 길

 

 

 

 

소설가 金 飛

 

 

 

 

 

  현대시대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기괴하다'는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을 목격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차원의 기괴함을 낳아 더욱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저 말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지키고 있다 말하는 '이성',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이성이나 진실은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회의(懷疑)하도록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정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탓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가고, 또 다시 울부짖으며 인간을 찾아 헤맨다. 물론 그것 역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몸서리쳤던 바로 그 '기괴함'이다.

 

  변이는, 이토록 혼돈스러운 시대에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지나침인데, 그건 하필 인간답다고 외치는 이성과 진실, 혹은 규범이나 경계로 인해 더욱 높이 튀어오른다. 그리고 그건 또 다시 상상할 수 없는 층위의 깊고 무거운 불안을 우리들의 머리 위에 드리우게 되고.

 

  이것을 비단 현대 시대의 암울하고 종말론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극도의 불안과 억압에 시달렸던 인간이, 생존을 위해, 혹은 불안에 대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또 다른 극단적인 방식을 드러냈던 예는, 과거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도 분명하게 발견된다.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의 출현으로, 커다랗게 돌아가는 톱니 하나로 몰락해버린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실된 자아의 내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하여 소비주의에 눈을 돌리게 되고, 스스로의 자아와 영혼을 살찌우려는 노력 대신, 물질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이는 외향을 화려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지배하는 권위를 획득하여 그 권위를 휘두름으로써 공허한 스스로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층위의 불안과 억압은 더욱 거대해졌다. 시스템이라는 하나의 기계 속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평등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불안과 억압은 또 다른 층위로 높이 쌓아올려져 버렸다.

  현대의 우리가 쉽게 접하는 각종 언론 매체의 외모 지상주의나,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집착 또한, 결국 그러한 자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불안의 열매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우려되는 것은,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포기해버린 인간이, 스스로의 상실과 불안에 대한 걱정스러운 징후임이 분명한 현실을 두고, 그것을 시대의 흐름, 혹은 변화되거나 발전된 세계의 당연한 순리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해버리는 경우이다.

  몇 만원의 돈을 위해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면서도 그는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자동차 한 대 값의 가방 하나를 들고서 행복해하면서도 그녀는 그것이 세상의 흐름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자신의 자신감이나 존재감을 회복시킨다고 선언한다.

  내 아이를 감싸기만 하고 보살펴 세상 물정 모르는 나약하고 힘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 이토록 위태롭고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낸 시대에 가장 바람직하고 선호되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방식인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하게 비틀려 있다. 종양이나 질환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미 너무 멀리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몇 만원의 돈은 고독이나 소외를 보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며, 번쩍거리고 휘황찬란한 텅 빈 가방 하나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자신감이나 존재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고, 내 아이에게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만능의 슈퍼부모가 되는 일은, 거친 일들까지 기꺼이 함께하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보여주는 일이거나 벼랑 밖으로 아이를 떨어뜨려 어떤 불안이나 상실도 떨치고 일어나 생존하는 초능력을 키워야하는 일이어야 함에도, 이상하게도 모든 것들은 기괴하게, 그것도 가장 부정적인 방향으로 뒤틀려있다.

 

  성전환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들의 전환 방식에도 마찬가지였다. 성 정체성 혼란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들에게 올바른 생존의 방식은, 진정으로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들을 떨치고 일어나 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일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체성 혼란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반대성으로의 수술이나 전환이 생존의 방법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성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성별 따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것 또한 또 다른 방식의 생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올바른 길, 혹은 안전한 길이라고 말하면서 전환하지 않은 삶을 맹목적으로 강요하고 설교했었던 것처럼, 반대로 성전환자라는 우리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반대성으로의 치료나 전환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불안을 지워줄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단 하나의 목표로 설정해놓고 그쪽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 바로 성전환자라는 이름의 우리들이 몰두하고 있는, 똑같이 기이하게 뒤틀려버린 생존의 방식이다.

  실제로 여자로 사는 것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생존을 위한 치료와 전환을 떠올리면서 무작정 반대성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생각하고 염두하며 그것에만 몰두한다. 여자로 전환하는 성전환자는 여성스러운 외모와 화장, 혹은 성형수술과 다이어트 등에만 몰두할 뿐 한 여성으로서 다시 태어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어떤 것인지 고민할 기회조차 갖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남성으로 전환하는 성전환자는, 남자로 '보여지는 것'만을 생각하며 근육과 수염을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남성적인 권위와 힘을 훈련하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성전환자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적인 여자, 혹은 여성적인 남자, 그도 아니면 그 모든 성의 억압에서 탈피한 초월적인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안타깝고 속상한 성전환자라는 우리들 속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자신도 모르는 무엇으로 인해 조금씩 변해왔다. 그것은 생존이거나, 혹은 '좋아진 세상'의 일면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인간의 생존, 인간의 존엄, 그리고 인간인 나 자신의 존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다.

  돈 몇 푼을 들고 그것이 소외나 불안을 위로해줄 것이라 말하며, 가방이나 자동차, 혹은 번쩍거리는 것을 가리켜 자신감이라 선언하고 있다. 미래를 준비한다고 말하며 통장의 잔고만을 떠올리면서 그것만으로 노후의 시간들이 안정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으며, 우리들의 미래는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 확신한다. 물질만을 쫓아 그렇게 살다가 죽는 누군가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일을,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주저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변이 또한 그렇게 두 개의 양면성을 지녔다. 그것은 인간 생존의 필연적인 과정이면서도, 또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몰락의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딘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 도착해있으면서도 자신은 길을 찾았다고 말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득문득 자신을 휘감는 불안감과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생존을 갈구하는 습성을 지닌 우리들에게 변이는 필연적이지만 그건 결국 또 다시, 두 가지 갈래길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물론 인간이 그 중심에 있지 않다면, 어느 쪽이든 퇴화의 길일 것이다.

 

 

[생의 뜨락] 지평선 혹은 수평선이 사라져버린 삶

 

 

 

최혁규 / 문화연대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의 <죽편1-여행>

 

 

 

 

 

 

이 지면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문화비평이라는 범주에서 나의 기존의 글쓰기를 반추해봤을 때 특정 대상 없이 글을 쓴 경우가 많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영화, 문학, 음악, 만화 등의 텍스트를 통해 문화에 다가갔으며, 그 글 속에서 나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 속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텍스트 뒤에 숨기 급했으며 심지어 숨는 것에 희열을 느끼곤 했다. 대부분의 문화비평적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글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무엇에 대해서인 글에서 그 무엇에 를 대입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덧 다른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글에서 지우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내 온몸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스스로의 몸을 통해 비평을 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스스로를 활동가로 위치지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가라는 단어는 분명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사회역사적 맥락보다 활동'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문화적인 현상과 이론적인 부분들을 결합시키는 작업들보다 내 삶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과 타자의 삶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활동가로 지내면서 내 몸이 만나고 있는 수많은 현상들에 대해 성찰적 글쓰기를 하고 싶다.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 바로 이것을 나의 몸을 통과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새겨진 문화들은 어떻게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을까? 개인들의 욕망이 다양해진 만큼, 한 개인의 욕망 또한 다양해지고 세분화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다양한 욕망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며, 그 연결망들은 타자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은유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타인들, 공동체, 사회와 은유하려는 시도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는 이런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서로가 느끼는 문화정치경제적 경험에 대한 온도차를 감지하길 거부해버리면서. 어쩌면 높디높은 빌딩들과 촘촘히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치이는 삶을 살면서 수평선 혹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도시/시골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몸이 위치한 곳과 내 시선이 닿는 저 먼 곳을 잇는 법을 상실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제 우리는 멀리 바라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 몸에서 시작해서 최대한 멀리까지 한 번 은유해보고자 한다. 내 몸의 욕망들 그리고 내 피부로 느끼는 다양한 욕망들이 그 너머의 다른 욕망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쉽지 않은 모험이겠지만 백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 먼 여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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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웹진 아프꼼에서 이번 달부터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최혁규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해서, 그 생의 뜨락에 여러분들을 초대하기 위해 조금씩 터를 쓸어놓으려 하오니, 많은 발자국들을 찍어주시기를. 현재 최혁규님은 밀양에서의 연대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혁규님에 대한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는, 더 아픈 이야기들을 돌보는 시간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시기를.

 

 

 

 

 

 

7화 변이를 위하여

 

 

 

소설가 金 飛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당연했다. 내 삶의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고 여겼던 곳으로 온 힘을 다 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삼십 여 년의 삶을 버리면서 죽을힘을 다 해 그곳으로 질주했던 건데, 거긴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의 질시와 비난을 각오하며 있는 힘을 다 해 그곳으로 뛰어들었던 건데, 나는 또 다시 예전 그 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남자라는 세상의 경계가 나를 짓누르고 억압했던 것처럼, 또 다시 여자라는 경계가 그만큼의 크기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도 간절히 희망을 바라고 있었기에, 그 억압은 더욱 지독했고 고통스러웠다.

  상자가 떠올랐다. 차라리 상자 속이 마음 편한 곳이었는데. 사방에서 나를 가두며 좁고 편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자 속에 있으면 어떤 경계에 의해서도 재단되거나 억압되지 않으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극도의 불안에 떠밀린 모두가 그러하듯, 나는 가장 내밀하고 어두운 곳에서, 고립되고 피폐한 속에서 어리석게도 내 희망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여기 전환의 한 가운데와 꼭 닮은, 내가 폐기해버렸던, 그래서 그곳으로부터 도망쳐나왔던 거기가 떠올랐다. 나를 억압했던 것들, 매 순간 나를 짓누르며 옴짝달짝 못하게 만들었던 시간들. 폭력적으로 나를 호출하고 그것에 끌려가며 나를 구겨넣던 비겁하고 나약했던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을 떨치기 위해 이렇게 힘겹게 여기 전환의 한 가운데 와 있는데, 나는 왜 여전히 똑같은 불안과 억압으로 몸을 떨고 있어야하는 것일까?

 

  손을 들어 너덜너덜해진 나의 전환을 들여다보았다. 부서져버린 희망과 꿈들이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분명히 그건 단단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리조각처럼 쪼개져 그것들은 내 온 몸을 찌르고 있었다. 잘못된 지도를 들고 걸었던 여행자처럼 나는 내가 모르는, 전혀 기대하고 예상하지 않았던 어딘가에 와 있었다. 그것도 내가 도망쳐 나온 가장 끔찍했던 거기와 너무도 닮아있는 풍경이었다.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 누가 없는 거냐고, 내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자, 세상에 없는 거냐고. 그러나 웅성거리며 들려온 건 똑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찍어낸 듯한 사람들이거나, 거대해진 자신들의 판자를 직직 끌며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들의 거칠어진 숨소리뿐이었다. 밤이 온 것도 아니었는데 세상은 너무도 어두웠고, 오직 몸을 구겨넣을 수 있는 작은 상자 하나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처박혀있을 수 있는 그 좁은 공간만 생각났다.

  위협은 즉각적이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한꺼번에 머릿속에 나열되는 위협적인 장면들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눈앞에 그려졌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내 모습은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떠올랐고, 그런 내 앞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사람들의 절규와 혐오가 너무도 생생했다.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그것 보라고, 내가 무어라고 했느냐고 비웃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꽝꽝 울렸다. 그토록 좁고 협소한 경계 속에서, 너무도 거대한 판자를 들고 낑낑거리던 사람들이 주저앉은 나를 보며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가장 안전하고 바람직한 삶이란, 그렇게 주어진 경계에 순응하며 사는 일이 아니었느냐고, 그들은 주저 앉아버린 내 앞에, 기립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한 자의 포효를 들려주었다.

 

  나는 또 다시, 패배한 자였다. 그들이 보여준 승리가 아무리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지라도, 내가 도착한 거기보다는 최소한 나은 것처럼 보였다. 경계를 넘어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전환된 삶을 찾은 거기는, 그보다 훨씬 더 후락하고 형편없는 곳이었다. 아무런 열매도 열리지 않은 황폐한 곳처럼 보였으며, 내가 움켜쥔 건 공포와 절망뿐이었다. 땅 밑이 꺼지며 나는 어딘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쩌면 일종의 향수병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향수병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두고온 고향, 혹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식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온 힘을 다 해 불안을 피하여 도피한 자에게, 그건 또 다시 다른 종류의 더욱 힘 센 강박이 되게 마련이다. 더욱이 천국이라고 믿었던 거기가,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지옥과 꼭 닮은 곳이라는 충격은, 그러한 강박을 벼랑 너머로 밀어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불안에 대한 기억 따위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결부되면서, 뿌리 채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힘겨운 몸을 움직여 우리가 건너온 경계 쪽으로 조금만 더 다가가게 되면 경계너머인 거기도, 전환의 한 가운데인 여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경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또 다른 불안의 한가운데였던 등 뒤가 다시 반짝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다시 몸을 돌려 이쪽이든 저쪽이든 불안의 가운데를 향해 경계에서 멀어지면, 내가 선 곳의 불빛은 사라지고 경계 너머의 불빛이 다시 반짝이게 된다.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무지개의 자리처럼 우리는 빛을 향해 뛰면 뛸수록 오히려 더 빛을 잃어버리는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불안을 지우기 위해, 나를 짓누르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계 안에 몸을 웅크리는 일도 아니고, 경계를 넘는 일도 아니라면,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말하기 위해, 나는 되돌아가지 않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언뜻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결국 '시간의 흐름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비가역적이다.'라는 아주 단순한 정의만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제다.

  세상의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 나에게 완벽한 안정감을 줄 수 없다는 깨달음을 가진 내가, 전환하지 않은 그 곳으로 '또 다른 전환'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예전에 내가 떠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을 수는 없다. 이미 거긴 변화와 새로움을 갈구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어버렸으며, 돌아가서 마주하게 된 우리가 떠나온 자리의 황폐함은, 더욱 끔찍하게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시골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간절해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시골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이란 불편함과 고독함을 견디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어 다시 도시로 돌아오더라도, 이미 도시는 그 시간 동안 또 다른 모습의 낯선 공간이 되어 있을 것이며, 도시의 복잡함 속에 억지로 몸을 섞어 지낸다고 하더라도, 시골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알고 있는 그에게, 거긴 시골을 모르던 그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환기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성전환자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남자라는 세상의 경계 안에서 태어나, 그 경계 바깥으로 탈출을 감행하여 여자의 삶을 살아본 후 다시 남자의 경계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남자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일은 요원한 것이다. 게다가 '수술'이라는 비가역적 치료 과정을 반드시 지나치게 되는 우리들에겐, 그건 더더욱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환은, 경계를 넘는 일은 그렇게 어떤 '각오'를 수반한다. 우린 그걸 '결심'이나 '결정'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실제로 지나쳐버리는 어떤 시간,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명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하다. 우린 경계를 지나쳐 넘어오면서 그 경계 안의 모든 것들을 시간 속으로 폐기해버린 것이다. 단순히 손에 든 것들뿐만 아니라, 그 때의 시간들, 불안들, 억압들, 또 반대로 답답하고 불안한 만큼 안정되게 우리를 떠받치고 있던 것들까지 모두 내버려야하는 것이다. 그건 절대 복구나 복원이 불가능하며, 망각해버린 기억처럼 왜곡이나 뒤틀림의 가능성만 존재하게 되는 안타까운 지나침이다.

 

  그렇다면 무기력해져버린 우리들에겐 해답이 없는 걸까?

 

  지금부터 나는, 내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기괴하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무기력해져버린, 길을 잃어버린, 모든 억압과 불안 밑에 깔려 버둥거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존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최악의 경우에도 인간을 되살릴 것이며, 바퀴벌레처럼 그건 끝내 인간을 생존의 방향으로 돌려세우게 될 것이다. 기존의 경계와 관습을 지키려고 필사적인 사람들과, 그 속에서 버려져 스스로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관적인 삶을 자초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뒤엉켜있는, 그런 과도기적 시간 속에 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내 이야기는 물론 부정적으로 환기되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을 또 다른 층위로 도약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본능이라고 믿는다.

 

 그건 바로 '변이(變異)'.

물론, 그건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제6화 전환의 두 얼굴

 

소설가  金 飛

 

 

 

 

 

 

 

 

  그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생의 전환은 아주 달콤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왔던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짓눌리다가,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는 행위는 그 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너무도 또렷하고 선명한 해답처럼 느껴진다.

  오랜 기간의 직장 생활을 통한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또한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에 짓눌려 너덜너덜해진 자아를 가지게된 누군가는, 당장 그 회사를 그만두고 한적한 동네의 모퉁이에 작지만 향기로운 카페 하나를 갖는 극적인 전환만이 자신의 삶을 일으키는, 늦었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히 필요했던 완벽한 생존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라고 믿게 된다.

  결혼이라는 판타지가 허물어지고 육아와 가정이라는 현실에 시달리는 주부라는 이름의 누군가에게, 혼자서 마음껏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재단하는 싱글 여성의 모습, 혹은 오직 자신의 꿈만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독신 여성의 모습은 결혼생활이라는 분주하고 어지러운 현실을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며, 또한 전환일 것이다.

  부모의 억압과 속박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는 가출이, 책임과 구속이라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짓눌려있던 누군가에게는 싱글의 삶이 자신을 구원해줄 생의 '전환'일 것이며,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고시원을 돌며 전전긍긍하는 실업자에게는 4대보험이 보장되는 근사한 기업으로의 취직이,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한 모태솔로들에게는 누군가와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기분을 가져보는 일이 자신의 지루한 삶을 구원해줄 유일한 '전환'일 것이다.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위에서 나는 여러번 반복해서 '전환'이라는 구원의 방식을 말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맞물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전환이 삶의 구원이고, 억압되어 불안한 시간들을 지워줄 수 있는 탈출구라고 말했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전환들은 이상하게도 서로 반대 쪽에서 이어져 있다. 서로의 전환이, 바로 누군가가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불안이고 또한 억압이었다는 사실. 서로의 억압이고 불안이었던 경계 안 쪽이, 바로 누군가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전환의 그 한 가운데였다는 사실.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이란, 처음부터 그렇게 두 얼굴을 지녔다. 언제나 우리는 한쪽 얼굴만을 바라보며 그 반대편을 상상하지만, 거기에는 이 쪽을 상상하며 갈구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우리들을 경계 안으로 몰아넣고 억압하던 영악한 세상의 권위는, 끔찍하게도 이것을 다시 자신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더욱 공고히하는 근거로 악용하기도 한다. 어차피 경계의 너머도 여기 너희들이 서 있는 경계의 안 쪽처럼 똑같은 반 쪽의 상실이며 불안일테니, 경계를 넘으려고 애를 쓰는 행위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괜한 시도라고 단언하면서, 야비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이자 또 다른 층위의 억압을 설득한다.

  기다란 책상 위에 선 하나를 그어놓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좁고 답답하다고 느끼게 되었던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두 사람 모두는, 어느 순간 과감하게 '전환'을 시도하며 서로 자리를 바꾸어앉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상대방의 공간이 더 넓고 자유로우며 전환으로 내가 얻게 된 공간은 여전히 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모든 각오와 용기를 끌어모아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란, 결국 그렇게 단 하나의 절대적 위로이자, 또한 그렇게 반드시 마주해야하는 위협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전환은 너무도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달콤함 정도가 아니라, 그 동안 홀쭉했던 내 자아의 어딘가를 포만감으로 가득 채우는 경험이었다. 웅크렸던 몸을 펴고 나는 마음껏 세상을 질주해 다녔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기 위하여, 나는 머리를 길렀고 화장을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예쁜 화장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화장품을 가져다가 발라보기도 했다. 예쁘고 화려한 치마를 입어보기도 하고, 높은 구두를 신어보면서 거울 속에 비춘 내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완벽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여성스러운 말투와 몸짓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여성스럽지 못한 것들을 내 안에서 짚어내고 그것들을 지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연습했으며, 내 걸음걸이와 행동들의 어떤 부분이 여성스럽지 않은지 일일이 따져가면서 '여성'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의 몸짓을 흉내내느라 나는 적잖은 땀을 흘려야했다.

  얼굴이 너무 큰데, 코가 너무 작은데, 그리고 눈도 너무 작잖아? 여성스럽지 못한 것들을 내 안에서 발견할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소스라치며 그것들을 지우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성형수술을 해야하는 건 아닐까, 큰 키는 수술을 할 수도 없는데 어쩌지? 나는 어느 순간 전전긍긍하며 어떤 것들에 쫓기고 있는 나 자신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 뿐만 아니라,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보다 더욱 더 심한 본능적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채찍질하며, 세상이 그어놓은 또 다른 반쪽의 경계 너머로 나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거기는 또 다시, 불안을 지우려고 여러번 그었던 반대쪽의 경계 안 쪽이며, 결국엔 잔뜩 쪼그라든 상자였다. 나는 어느새 필사적으로 내가 빠져나왔던 그 상자 속으로 천천히 다시 걸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환은 그렇게 다른 얼굴을 내밀며 우리들을 유혹한다. 멀리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작정 아름다워보이는 자연적인 섭리를 이용해, 전환은 가장 먼데 있기에 가장 거부하기 힘든 유혹으로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앞에서 나는 경계로 인해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갖게 되며, 그것이 쌓여 우리들의 불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건 반대 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경계 너머의 아득한 반대편으로의 전환은, 바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여기 이 억압되고 짓눌린 구석에 몰린 이 자리와 꼭 닮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직장을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전환'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누렸던 권위의 안정감을 '상실'하게 되고, 결혼 생활의 억압이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고통 받던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관계라는 경계로 인해 유지되고 있던 안정감을 '상실'하며 외로움이라는 또 다른 불안을 마주해야하는 것이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불안을 다스리는데, 우리의 상실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어떤 마음 가짐이어야하는가를 아주 손쉽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해답이란 처음부터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에 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전환이란 또 다른 이름의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며, 거긴 그토록 아름답게만 보였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자아의 실현을 위한 해답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상실과, 그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으로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발걸음만 성급하고 지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매달렸던,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의 뒤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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