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生輪廻: 이상(李箱) 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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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임재(parousia)의 리얼-리즘: 타인의 자화상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들
윤인로
“욕망을 지지한다”는 외우(畏友)의 말, 말의 힘. 이상의 문학에 대해 쓴다고 했을 때 들었던 그 말은 내게 옥죄어오는 세속의 관계들/올가미들이 일거에 걷어치워지는 순간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 순간의 말은 구원의 지속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욕망을 지지받는다는 것. 그것은 쓰기와 삶, 쓰는 삶의 밑돌에 다름 아니다. 「날개」 이후의 이상 만큼 그 욕망을 지지받았던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연구목록만 40페이지. 그 막대한 두께를 뚫고 하나의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 주목하게 됐던 건, ‘여기는 폐허다’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자화상」과 그림 <자화상>이었다.
△ <1928년 자화상>과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자화상>
이상의 자화상, 이상이라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기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이들 중엔 임종국, 이어령, 고석규가 있었다. 이른바 전후(戰後)의 청년들, 전후세대. 이상의 문학을 발굴하고 그 위상을 정초했던 그들의 이상 연구에서 더 깊이, 더 많이 숙고되지 않고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눙쳐지거나 누락되고 망각된 의미망이 있다는 사실. 그 의미망을 오늘 다시 복기(復碁)함으로써 여기 다르게 복귀시키려는 비평적 의지. 지금 쓰고 있는 글은 그와 같은 진단과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상 전집, 임종국
이상의 문학을 ‘불화하는 천사’, ‘순교자의 분노’로 지목했던 <이상선집>(백양당, 1949)의 김기림을 잊지 않고 잃지 않은 이, 그가 바로 이상의 전집을 묶고 있던 청년 임종국(林鐘國, 1929~1989)이었다. 임종국이라는 전후. 달리 말해 전후의 이상, 전후에 의한 이상. 오늘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상의 빳빳한 전집들은 임종국의 열정과 열망이 매만진 최초의 전집에 빚지고 있다. <이상전집>(전3권, 태성사, 1956). 그 시대를 향한 진술 하나. “황량한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상이었다. 안암동 골짜기에서는 정외과의 임종국이 동숭동 문리대에서는 이어령이 이상 깃발을 높이 든 이래로 이상문학은 뻗어가고 있거니와, 그때부터 지금껏 이상작품 텍스트에 정성을 쏟아온 임종국의 안타까움(…)” 임종국에게 이상은 전후 이래 40년의 시간이었다. 기존의 통용된 가치들과 합의된 의지들이 냉전의 질서에 의해 부수어지고 깨지던 전후라는 근대의 제로상태 속에서, 그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이상의 문학은 발굴되고 정립되었다. 식민지의 삶이 군국(軍國)의 이윤과 그 체제를 위한 합성의 단순한 질료로 형질전환되고 있던 당대(1931~1937), 줄여 말해 이상의 근대, 근대성(modernity). 그 질서, 그 레짐 속으로 이상의 문학은 거듭 폐허와 파국으로, 끝의 선포로, 최후의 고지로, 줄여 말해 새로운 신(神)의 도래로 장전되고 있었다. 1939년의 김기림을 자신의 「이상 연구」 첫머리에 제사(題詞)로 인용하고 있는 임종국, 그의 문장들을 보라.
그러면 근대의 초극이란 무엇인가? 절대자의 폐허, 다시 말하면 보편적 이성이 사망한 지구상에다 새로운 ‘신’을 발현하여 군림시키는 작업이었다. (…) 스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가 되어 버린 이 ‘비극의 담당자’는, 절대자의 폐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속도적 사건―절망, 부정, 불안, 허무, 자의식 과잉, 데카단, 항거 등 일체의 정신상의 경향―을 그의 문학에다 반영함으로서, 실로 보기 드문 혼돈 무질서상을 일신에 구현하고 만 것이었다.
위의 문장들, 이상을 바라보고 쓴 임종국의 그 문장들은 실은 임종국 자신을 향해 쓴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에게 이상은 전후라는 시대, 전후라는 삶의 끝간데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필요했었고 요청되었으며, 그래서 발현되었다. 임종국은 김기림에 이어 이상의 문학을 이른바 ‘근대초극’을 위한 의지의 상관물로 읽는다. 그 연장선에서 이상의 시작(詩作)은 ‘절대자의 폐허’ 속으로, 다시 말해 군림하고 명령하는 절대적 가치들의 파탄, 사망, 소멸의 상황 속으로 ‘새로운 신을 발현’시키고 다시 군림시키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속도적 사건의 발생’이라고 명명한 건 임종국의 혜안이다. 그런 혜안 속에서 임종국은 이상 문학의 ‘정신사적 위치’를 “근대의 폐허를 확인하고, 또 그로 인하여 동요하던 근대적 자아―실존하는 인간상―에 표현을 주고, 또 그 초극을 몸소 교시(敎示)하였”던 점에서 구한다. 근대의 폐허. 이상은 자신의 「자화상」에서 ‘여기는 폐허다’라고 적었다. 1955년 현재, 임종국은 그 자화상에서 자기 자신의 표정을 본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얼굴을, 전후라는 상황의 표징을 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상의 자화상에는 오늘 이상을 읽는 독자들의 표정과 삶의 조건이 담겨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의 그 음울한 표정과 대면하고 자기 삶의 그 파열된 조건과 대결하는 것이 오늘 이상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당위로서, 강한 요청으로서 주어지고 있다는 것.
한편, ‘무중력 상태’와 ‘화전민 의식’으로 전후를 경험했던 이어령에게 이상의 문학이란 이런 것이었다. “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무의미하고 무질서하고 맹목적인 ‘일상성으로서의 현실’과 그를 의식하고 그 공백 가운데 ‘자기 생’을 설정하려는 선악과[善惡果]의 ‘의식 세계’와…… 이런 부단의 모순으로 찬 인간 조건을 한 몸에 향수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고난과 그 비극이 곧 ‘상’의 예술이 되었으며 거기에서 자기를 해방시키고자 한 의지가 그 예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어령은 이상의 문학을 겹겹의 모순으로 된 인간 조건의 표현으로 읽었다. 그가 나열하는 그 모순의 양극단이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세계, 무의미와 의미, 맹목과 모랄, 비본래적인 것과 본래적인 것 등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상극 대립한 두 조건을 한꺼번에 수행하여 할 휴머니티는 그야말로 낭자한 유혈극의 참상을 자아냈다.” 이 문장에 과장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령에 따르면, 이상은 그와 같은 유혈의 비참 속에서 신의 조화로운 질서를, 신이 만든 무의미하고 무질서하며 맹목적인 일상으로 인지하고 경험했다. 다시 말해 이상의 문학은 의미와 가치, 조리(條理)와 정관(定款)으로 된 근대적 체제 안에서 그것의 무참한 부조리와 정관의 파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상이 ‘선악과의 의식세계’가 뜻하는, 신의 명령에 대한 거부와 위반의 의지 속에서 ‘자기 생(生)’을 기립시키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어령의 이상은 신의 정관을 거역했던 아담이었다. 신의 중력을 차단하고선 동토를 녹이고 박토를 개간해야했던 화전민. 그가 이상이었고, 이어령이었다.
신의 질서와 자기의 생. 그 두 극의 대립과 결렬, 이반과 모순. 이상은 최초의 소설 「十二月十二日」에서 ‘모순이야말로 진리의 한 형식’이라고 적었다. 그와 같은 모순에 대한 감각을 일러 이어령은 ‘현대적 자의식’이라 불렀다. “이러한 현대적 자의식의 세계 앞에 나타난 현실의 세계란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실화(失花)’와 ‘실락원’이었다. 그 실낙원의 일상생활 가운데 ‘천사는 아무데도 없으며’, ‘파라다이스는 빈터’인 것이다. 천사의 시체만이 사는 현실적 일상 세계에는 ‘절대적 공허’뿐(…) [이상은] 이 실낙원의 현실 세계에 ‘천사를 다시 불러서 돌아오게 하는 응원기’ 같은 것을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이상의 「실낙원」으로부터 분비되고 있는 문장들이다. 이상은 빈터가 된 파라다이스에서 자기의 생을 기립시키려 한다. 신의 질서로 파송된 천사는 이상의 현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공허 속에서 이상은 스스로 ‘불세출의 그리스도’(「각혈의 아침」)가 되어야 했으며, 새로운 천사로 발생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신의 질서를 찢고 ‘자기의 생’을 재정초하는 과업을 밀고나가야 했다. “그는 오로지 ‘이것이 내 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미지의 경지를 향하여 묵묵히 접근해 갔었을 뿐이다.” 자기의 생(生)이라는 미지의 경지, 자기의 진상(眞相)에 대한 추구와 밝힘. 이상의 그 생, 그 진상에의 접근이란 이른바 ‘리얼(real)’에의 격동하는 욕동에 다름 아니다. 알다시피, 모더니스트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한 양태로 불러일으켰던 이는 비평가 최재서였다.
최재서는 이어령에 앞서, 이상의 문학이 ‘상극’의 과정태이며 그 투쟁 속에서 발현하고 있는 것이 ‘순수의식’이라고 보았다. 다음 문장들에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심화’로 부르는 최재서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 생활과 의식, 상식과 예지(叡智), 다리와 날개가 상극(相剋)하고 투쟁하는 현대인의 일(一)타입을 본다. 정신이 육체를 초화(焦火)하고 의식이 생활을 압도하고 예지가 상식을 극복하고 날개가 다리를 휩슬고나갈때에 이상의 예술은 탄생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보통소설이 끗나는 곳―즉 생활과 행동이 끗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예술의 세계는 생활과 행동 이후에 오는 순의식(純意識)의 세계이다.” 육체를 그을리고 태우는 정신, 생활을 압도하는 의식, 상식을 넘어서는 직관적 지혜, 지상(을 딛고 선 다리들)을 쓸어버리는 천상과 초월에의 의지(날개). 「날개」를 읽고 있는 최재서는 당대의 생활이 불태워지고 압도당하며 극복되고 휩쓸려나갈 때, 다시 말해 지상에서의 생활이 종언을 고하는 그때 이상의 문학은 탄생한다고 말한다. 최재서가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저 ‘순의식’, 그것은 지상의 일상에 끝이 고지되는 바로 그 ‘때’와 관련된 것이다. 순의식, 그것에는 ‘끝’과 ‘정지’의 시간의식이 주요성분으로 함유되어 있다. 그 지상의 정지시간 속에서 이상의 생(生)은 생장하며, 그 생의 진상은 그렇게 정지된 지상 위에서만 개시된다. 이상의 문학을 리얼리즘의 심화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지상의 질서를 중단시키는 생(real)에의 의지, 그 생을 향한 이상의 욕동과 충동에의 이끌림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만이다. 이상의 그 욕동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 중엔 비평가 임화가 있었다.
임화는 1938년 한 해의 조선문학을 혼돈, 무방향, 방황으로 규정하고선 ‘출로(出路)’를 발견할 수 없는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 함정 속에서도 이상은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게 임화의 생각이다. “불행히 그의 두뇌 가운데 세계는 왕왕 도착된 채 투영되었고 가끔 물구나무를 서서 현실을 바라보기를 즐긴 사람이다. (…) 그의 작품이 소설로선 형태도 안갖추고 그처럼 난삽했음에 불구하고 일부 독자에게 강렬한 감명을 준 것은 보통사람이 다 같이 느끼면서도 한걸음 더 들어가보기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세계의 진상(眞相) 일부를 개시한 때문이다.” 이상은 당대의 모두가 느끼면서도 대면하기를 기피하는 두려운 것, 곧 세계의 ‘진상’ 일부를 개시했다. 삶의 합의된 정관이 찢겨지는, 이른바 ‘실재’의 발생과 현현이라는 걸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용기. 임화가 인정했던 건 다름 아닌 이상의 그 용기와 근기(根氣)였다. 실재, 또는 진상을 향한 이상의 그런 기운이 분출되는 것은 임화가 말하는 것처럼 ‘물구나무’서서 세계를 ‘도착’된 것으로 인지할 때이다. 세계의 상을 도착된 것으로 투시한다는 건 조리정연한 질서로서의 세계가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환상이기에 안락하며 안락하기에 환상을 부여잡는, 환상에의 페티시즘. 이상은 그 스스로가 바로 그런 ‘환각의 인(人)’(「동해(童骸)」)임을 가감 없이 노출한다. 매끈한 환상의 질서 안에서 그 스스로가 환각의 인간임을 폭로할 때, 그 질서는 더 이상 지탱되지 못하며, 그때 그 인간은 더 이상 환각의 인간이기를 멈추고 생(生)의 진상(the real)을 경험하는 인간으로 된다. 그렇게 모더니스트 이상은 “물구나무슨 형태의 ‘레알이스트’였다.” 리얼리즘(real-ism)의 심화란 물구나무로 서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던바, 이상은 도착과 역설의 감각 속에서 실재와 마주함으로써 그 자신 실재의 일부가 된다. 실재주의자(real-ist) 이상.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임화의 「방황하는 문학정신」은 1938년 12월에 발표되었고 그 해의 문학을 ‘혼돈’과 ‘출로 없음’으로 진단했다. 임화는 5개월 뒤, 자신의 그런 진단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신학적 처방전을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1939. 5)에서 구하고 있다. 전시체제로 합성되고 있던 삶과 마주한 임화가 ‘근대의 결함’을 지적하는 입장과 논리를 보라. “자연과 인간이 신(神)을 매개로 교섭하던 시대의 수미일관성과 ‘따이나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직접으로 인간과 자연이 교섭한 근대의 결함이 이 적절한 매개자(媒介者)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임화가 말하는 ‘신’은 ‘적절한 매개자’로서, 인간과 세계의 교섭에 있어 수미일관성과 역동성을 선사하는 존재다. 임화의 그 신은 근대의 자질과 속성을 가감 없이 노출시키던 전시상태의 혼돈과 방황을 끝낼 수 있는 ‘힘’이었다. 임화에 따르자면, 그 신, 그 힘은 근대적 ‘사회’와 상극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중이다. “보편화된 인간적 태도의 양대 형태로서 신(神)과 사회(社會)! 20세기는 이것의 상극(相剋)이 명일의 운명을 복(卜)하지 아니할까? 세계사(世界史)의 무대엔 언제나 영웅은 두 번 의장을 고처 등장한다고 한다. 한번은 비극배우로 또 한번은 희극배우로!/ 카톨리시즘은 이 양자의 하자(何者)인지?” 임화에게 “단일신이란 인간이 세계를 단일한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체계로 인식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가지기 시작한 데,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신’과 ‘사회’는 적대하든 공모하든 동일한 레벨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적 능력과 의지의 상관물이었다. 임화는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두 가지 보편적 형식으로 신과 사회를 들었고, 20세기의 운명이 그 둘의 쟁투의 현장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압축하고 있는 것이 임화의 질문이다. 세계사의 무대에 오른 카톨리시즘은 비극을 상연할 것인가, 희극을 상연할 것인가라는 그 질문.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임화의 그 질문에 대한 ‘동시대적인’ 답변은 임화와 함께, 임화에 앞서 이상이 제출하고 있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임화의 질문이 너무 늦었다거나 이상의 답변이 너무 빨랐음에 있는 게 아니라, 「차생윤회(此生輪廻)」라는 이상의 텍스트가 저 비극과 희극의 반복되는 무대의 내적인 균열을 다시 사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상의 문학이 신성성(神聖性) 속에서 추구하고 있는 실재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일이다. 다시, 문제는 실재주의자 이상이다.
이상의 리얼-리즘. 이에 대한 격조 있는 안티테제는 고석규의 것이다. “이상의 아이러니며 이상의 역설 감정은 모두 ‘나 자신’을 위조하며 가장하는 표호(表號) 또는 방패에 불과하였다.” 나는 그런 고석규의 실존론을 택하지 않고, 실재의 생을 향한 이상의 욕동을 지지하는 최재서/임화의 리얼리즘론을 택할 것이다. 그 리얼-리즘으로, 이상의 역설을 두고 고석규가 단순화하고 있는 저 위조의 ‘의지’에 대해, 표호의 ‘맥락’에 대해, 방패의 ‘파쇄’에 대해, 줄여 말해 이상의 각성과 그 실패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 리얼-리즘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 드러나는 고석규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그 ‘실(實, real) 없음’을 기각하고, 그의 실존주의가 폐기한 이상의 그 ‘실’을 구할 것이다. “이상에게 있는 가정(장)된 ‘나의 죽음’은 결코 ‘면전에서’의 죽음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에게 있은 허무가 결코 ‘면전에서’의 허무와 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의 죽음과 허무를 실재와의 대면이 없는 죽음과 허무라고 단번에 확언할 수 있게 하는 저 ‘면전(un Face be)’이라는 실존주의의 어휘는 권력화한 판관의 재판봉에 다름 아니다. 면전이라는 척도적 장소는 그러므로 파괴되어야 한다. 그 파괴의 연장선 위에서 고석규의 이상은 재정의되어야 한다. “오직 두 가지 ‘절망’과 두 가지 ‘비밀’, 두 가지 ‘텐스’와 두 가지 ‘나 자신’, 그리고 두 가지 ‘세기’가 서로 요동하며 (…) 그때 이상은 분명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저들[그것들]의 나지막한 합창을 엿듣는 것이다.” 대립하고 상극하는 그 두 가지 것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 그 모순과 반어 속에서 이상이 듣고 있었던 건 지상의 질서에 끝을 고지하는 ‘파국의 조종(弔鐘) 소리’(「어리석은 석반(夕飯)」)였다. 고석규는 자신이 말하는 ‘나지막한 합창’의 실재가 바로 그 조종 소리임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문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던 사상가로 임종국은 키에르케고르를 들었던바, 키에르케고르의 「아이러니의 개념」에 들어있는 한 문장은 이렇다. ‘아이러니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공허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공허성을 구출한다.’ 이 한 문장은 이상 독자로서의 고석규가 키에르케고르를 ‘일신’시키겠다고 말하면서 꺼내든 문장이지만, 고석규의 실존주의가 이상의 실재를 훼멸시키고 있는 한, 인용된 키에르케고르의 한 문장은 인용한 고석규의 목줄을 되겨누는 칼끝이 된다. 이상이라는 아이러니적 주체는 스스로를 공허에 감금하거나 유폐하지 않는다. 그 모순과 아이러니의 장소에서야말로, 다시 말해, 대립하는 양극이 실은 서로의 밑바탕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곤혹스런 상황 속에서야말로 이상은 자신의 공허와 허무를 구출하고 구제할 수 있었다. 이상의 문학이 거하는 그와 같은 난국(aporia)을 일러 임종국은 ‘이율배반’에 다름 아니라고, ‘현대판 시지프스의 신화’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외부적 현실에 대한 그의 절망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그의 의식의 종착점이어야 할 제6의 단계―외향적 반발―에 이르러서는, 그 실효성에 관한 심각한 회의로 인하여, 드디어 이율배반에 함입하여 버리고 말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종착점에 다다를 때 마다 도로 출발점으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하는, 말하자면 출구가 봉쇄되어 버린 미로―신을 살해한 후의 인간이 함몰한 심연―에서의 숨막히는 순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임종국의 이상은 종착점이라고 생각한 곳에 다다랐을 때 거기가 또 다른 출발점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안다. 이상의 문학은 북돋우고 닦달하는 당대의 합성된/절대화된/신적인 가치들과 명령들 속에서 맹렬하게 좌초하는 중이다. 이상에게 종착과 끝은 완료되고 완수될 수 있는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이미(already) 종착과 끝을 감지하고 또 경험하고 있지만, 이상에게 그 종착, 그 끝이란 끝내 아직(not yet) 오지 않은 미-래(未-來)의 사건이었다고 해야 한다. ‘이미’와 ‘아직’의 동시성, 혹은 등질성. 바로 그 난국의 장소, 난제의 시간 속에서, 임종국의 어휘로는 ‘출구가 봉쇄된 미로와 심연’ 속에서, 이상의 표현으로는 ‘모든 중간들은 지독히 춥다’고 할 때의 그 중간 속에서 이상은 “‘절대자의 폐허에다 새로운 신(神)을 발견하여 군림시키는 줄기찬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신의 발견 또는 발생, 이상의 ‘숨막히는 순례’. 그의 그 순례란 기존의 신, 기왕의 신적 질서를 살해하는 살신(殺神)에의 의지와 실천 속에서만 시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상이라는 카라반(caravan). 저 지독히도 추운 ‘중간’에서 이상은 이렇게 쓰면서 기립하는 중이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이상의 그 순례를 뒤따르며 그 기립을 함께하는 일을 지금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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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 문학평론가. 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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