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변이의 길

 

 

 

 

소설가 金 飛

 

 

 

 

 

  현대시대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기괴하다'는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을 목격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차원의 기괴함을 낳아 더욱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저 말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지키고 있다 말하는 '이성',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이성이나 진실은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회의(懷疑)하도록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정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탓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가고, 또 다시 울부짖으며 인간을 찾아 헤맨다. 물론 그것 역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몸서리쳤던 바로 그 '기괴함'이다.

 

  변이는, 이토록 혼돈스러운 시대에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지나침인데, 그건 하필 인간답다고 외치는 이성과 진실, 혹은 규범이나 경계로 인해 더욱 높이 튀어오른다. 그리고 그건 또 다시 상상할 수 없는 층위의 깊고 무거운 불안을 우리들의 머리 위에 드리우게 되고.

 

  이것을 비단 현대 시대의 암울하고 종말론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극도의 불안과 억압에 시달렸던 인간이, 생존을 위해, 혹은 불안에 대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또 다른 극단적인 방식을 드러냈던 예는, 과거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도 분명하게 발견된다.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의 출현으로, 커다랗게 돌아가는 톱니 하나로 몰락해버린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실된 자아의 내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하여 소비주의에 눈을 돌리게 되고, 스스로의 자아와 영혼을 살찌우려는 노력 대신, 물질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이는 외향을 화려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지배하는 권위를 획득하여 그 권위를 휘두름으로써 공허한 스스로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층위의 불안과 억압은 더욱 거대해졌다. 시스템이라는 하나의 기계 속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평등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불안과 억압은 또 다른 층위로 높이 쌓아올려져 버렸다.

  현대의 우리가 쉽게 접하는 각종 언론 매체의 외모 지상주의나,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집착 또한, 결국 그러한 자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불안의 열매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우려되는 것은,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포기해버린 인간이, 스스로의 상실과 불안에 대한 걱정스러운 징후임이 분명한 현실을 두고, 그것을 시대의 흐름, 혹은 변화되거나 발전된 세계의 당연한 순리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해버리는 경우이다.

  몇 만원의 돈을 위해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면서도 그는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자동차 한 대 값의 가방 하나를 들고서 행복해하면서도 그녀는 그것이 세상의 흐름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자신의 자신감이나 존재감을 회복시킨다고 선언한다.

  내 아이를 감싸기만 하고 보살펴 세상 물정 모르는 나약하고 힘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 이토록 위태롭고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낸 시대에 가장 바람직하고 선호되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방식인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하게 비틀려 있다. 종양이나 질환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미 너무 멀리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몇 만원의 돈은 고독이나 소외를 보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며, 번쩍거리고 휘황찬란한 텅 빈 가방 하나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자신감이나 존재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고, 내 아이에게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만능의 슈퍼부모가 되는 일은, 거친 일들까지 기꺼이 함께하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보여주는 일이거나 벼랑 밖으로 아이를 떨어뜨려 어떤 불안이나 상실도 떨치고 일어나 생존하는 초능력을 키워야하는 일이어야 함에도, 이상하게도 모든 것들은 기괴하게, 그것도 가장 부정적인 방향으로 뒤틀려있다.

 

  성전환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들의 전환 방식에도 마찬가지였다. 성 정체성 혼란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들에게 올바른 생존의 방식은, 진정으로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들을 떨치고 일어나 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일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체성 혼란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반대성으로의 수술이나 전환이 생존의 방법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성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성별 따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것 또한 또 다른 방식의 생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올바른 길, 혹은 안전한 길이라고 말하면서 전환하지 않은 삶을 맹목적으로 강요하고 설교했었던 것처럼, 반대로 성전환자라는 우리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반대성으로의 치료나 전환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불안을 지워줄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단 하나의 목표로 설정해놓고 그쪽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 바로 성전환자라는 이름의 우리들이 몰두하고 있는, 똑같이 기이하게 뒤틀려버린 생존의 방식이다.

  실제로 여자로 사는 것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생존을 위한 치료와 전환을 떠올리면서 무작정 반대성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생각하고 염두하며 그것에만 몰두한다. 여자로 전환하는 성전환자는 여성스러운 외모와 화장, 혹은 성형수술과 다이어트 등에만 몰두할 뿐 한 여성으로서 다시 태어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어떤 것인지 고민할 기회조차 갖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남성으로 전환하는 성전환자는, 남자로 '보여지는 것'만을 생각하며 근육과 수염을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남성적인 권위와 힘을 훈련하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성전환자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적인 여자, 혹은 여성적인 남자, 그도 아니면 그 모든 성의 억압에서 탈피한 초월적인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안타깝고 속상한 성전환자라는 우리들 속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자신도 모르는 무엇으로 인해 조금씩 변해왔다. 그것은 생존이거나, 혹은 '좋아진 세상'의 일면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인간의 생존, 인간의 존엄, 그리고 인간인 나 자신의 존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다.

  돈 몇 푼을 들고 그것이 소외나 불안을 위로해줄 것이라 말하며, 가방이나 자동차, 혹은 번쩍거리는 것을 가리켜 자신감이라 선언하고 있다. 미래를 준비한다고 말하며 통장의 잔고만을 떠올리면서 그것만으로 노후의 시간들이 안정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으며, 우리들의 미래는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 확신한다. 물질만을 쫓아 그렇게 살다가 죽는 누군가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일을,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주저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변이 또한 그렇게 두 개의 양면성을 지녔다. 그것은 인간 생존의 필연적인 과정이면서도, 또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몰락의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딘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 도착해있으면서도 자신은 길을 찾았다고 말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득문득 자신을 휘감는 불안감과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생존을 갈구하는 습성을 지닌 우리들에게 변이는 필연적이지만 그건 결국 또 다시, 두 가지 갈래길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물론 인간이 그 중심에 있지 않다면, 어느 쪽이든 퇴화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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