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나를 살해하는 두려움 

 

 

 

소설가 金 飛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에겐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다. 아이에겐 먹고 배설하며 잠을 자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있을 뿐이며, 그것을 기초로 그 충족 여부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아주 기본적인 감각으로 모든 삶의 시간이 추동된다. 배가 고프면 빼 울어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배가 부르면 수면 욕구에 의존해 잠을 잔다. 수면 욕구와 식욕 모두가 채워진 상태라면, 그제야 아기는 말똥말똥 눈을 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본다. 물론 그때 아기를 지배하는 감정 역시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자신의 주변 환경의 모든 것들을 만지고 입에 넣는 행위를 할 때 즈음, 아기의 부모나 가족들은 처음 아기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르친다. '위험'을 가르치며 안온함과 평화를 알게 하고, 고통이라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아이는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습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생존이나 안위와 정 반대의 지점에 가져다 놓게 된다. 생존과 직결된 것이 아닌 두려움이나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감정을 환기한다.
  그러나 '놀람'에서 기인한 본능적 두려움이 아니라면, 모든 두려움은 허상이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감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들로 인해 학습된 것일 뿐, 그건 우리 안에 근원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 해, 두려움은 가변적이며 또한 상대적이다.

 

  나의 두려움을 말하자면, 나는 혼자 있는 고립이나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더욱더 두려워한다. 한밤중에 혼자 산길을 걸어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나는 골목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낯선 사람을 더욱 두려워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뱀이나 바퀴벌레, 심지어 시궁창에 쥐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거미를 보면 소름이 돋고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물론 나는 내 두려움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건 나도 모르는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새겨진 흔적일 것이고, 그것이 기계적으로 나의 두려움을 작동시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그렇게 각자의 두려움, 서로 다른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그 두려움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의 두려움이나 공포는, 모두 어떤 기억, 혹은 최초의 환경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은데,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모든 시간은 변해왔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또한 그만큼 변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두려움 또한 시간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수정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경계를 넘어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그 경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향해 기웃거리며 우리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판올림하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그 모든 변화의 과정과 함께, 타래처럼 끌려 나오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두려움'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소모되고 고갈되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종양처럼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가는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던 대상인 최초의 거미는 분명, '손톱만 한' 크기였겠지만, 그 당시 덩치가 작고 왜소했을 것이 분명한 나에게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내 손바닥 크기로 환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소수자인 나로서는, 사람들의 그렇게 크기를 부풀린 두려움, 혹은 혐오와 너무 자주 직면한다. 성전환자의 수술이나 치료 과정이 한 인간의 치열하고 목숨을 건 생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편견만을 근거로 끔찍하고 잔인한 두려움과 혐오를 환기해, 극도의 반감을 추동시킨다.
  동성애자들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평범한 남자, 평범한 여자에 다름 아닌 그들에게 '동성애자'라는 이름을 붙여, 오직 그들의 성행위 방식, 혹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어느 종교 서적의 몇몇 구절들을 들먹이며, 그들을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치환해버린다.
  그렇게 근거 없는 혐오와 반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변화란, 또다시 스스로 생존과 안위를 위해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절대 바꾸려 들지 않으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킨다고 믿고 있는 것을 맹신해버린다. 누군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안전과, 자신 가족들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어버린다. 그러한 믿음과 편견이 단단해지면 단단해질수록 무의미한 정당성을 획득한 그들의 두려움은 또 다른 편견으로 도약해버릴 것이고.

 

  그들에겐 성소수자인 우리가 (인간 종족을 멸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겠지만, 우리들에겐 좀처럼 변하지 않는,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그들의 신념이 가장 끔찍한 공포이자 두려움이다. 그들의 평화와 우리들의 평화가 결코 서로 다른 것일 리는 없음에도, 그들은 성소수자들과의 공존이, 마치 스스로 안위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주입하고 교육한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공포와 두려움을 말하며, 더욱 끔찍하고 잔인한 논리를 합리화하는 그들의 행위는,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가두는 일이며, 인류의 생존을 언급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감정은, 더는 우리들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우리를 어느 고립된 곳에, 사방이 틀어 막힌 곳에 가두어버린다. 자신도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자신을 옥죄는 공포는, 오히려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게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불안에 떨게 하는 바로 그 근원이다. 그들이 믿고 있는 공포나 두려움에는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건 모두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전에 변화되고 수정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흉터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 남아, 현재의 우리를 비이성적 논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이미 흐릿해져 버린 시간의 기록일 뿐, 그건 현재의 안온함을 지켜주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하거나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또다시 어떤 경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이며, 오히려 그 모든 두려움을 직면할 때, 두려움은 더는 두렵지 않은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 불안과 강박으로 피폐해진 우리가 있다. 두려움이라는 낡고 형편없는 감정에 의존해, 미래를 말하고 평화를 말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있다. 뿔을 달고 꼬리를 그려 더욱 흉포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그려버리는 어떤 그림이 있다. 물론 그건 다른 누구의 모습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다. 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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