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정체성은 없다.  

 

 

 

소설가 金 飛 

 

 

 

 

 

 

 

나는,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기도 하며,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나는 나의 존재를 깨우치기도 한다. 내가 여기에 없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어떤 존재가, ''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혼돈이나 혼란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이 어떤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이름으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호출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이 세계의 일방적인 호출로 인해 '여성'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박탈당한다. '학생'이라는 이름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의 인간도, 획일화된 교육의 틀 속에서, 혹은 '학생'이라는 이름의 편견 속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가장'이라거나 '남자'의 이름도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인간을 어떤 틀 속에 꼼짝없이 가두어버리며, 하물며 '여성'이라거나 '장애인'이라는 말은 더욱더 폭력적으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강압적인 틀을 지워버린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그렇게 모든 각자의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 수동적이고 획일적인 지시에 의해 국가나 제도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데 일조해왔지만, '시간'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층위의 거부할 수 없는 움직임은 이 세계와 인간을 단 한 순간도 어느 한 곳에 머무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우주의 시간으로는 일각에 지나지 않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흘렀을 뿐, 우리의 세계는 지금 어떤 모퉁이를 돌며 시간의 관성을 견디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병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비'라는 이름을 가지면서, '남성'이라는 틀 속에서 빠져나와 '여성'이라는 이름 속에 편입되면서, 그리고 그 속에서 전에 없던 평온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다른 층위의 혼란과 혼돈 앞에 서 있는 나를 목격한다. 거듭해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혼돈은 언제나 이방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친근했고 때로는 낯설었지만, 언제나 그건 일정한 거리감 속에 존재하는 이방인이었다. 그 혼돈 앞에서 매번 얼굴이 굳어가던 것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살아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고.

나는 지금까지 무수히도 여러 번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말했지만, 이제 나는 더는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건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삶과 시간을 희생하고 있는 나와 같은 처지의 소수자들에게는 반역이나 배반처럼 들리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정체성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인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나도 혼란 속에 있으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의심과 의혹의 눈초리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외부의 시선이나 편견 따위 이제 뻔뻔스러울 정도로 내성이 생기긴 했지만, 내 안에서 어긋나며 찔러오는 무언가를 나는 분명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두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자리한 흉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정체성이라는 말에 붙들리면 붙들릴수록 오히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거기는 더욱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기에.

 

나는 비겁한 삶을 지향한다. '지양(止揚)'이 아니다. 분명한 '지향(志向)'이다. 나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논리적으로 스스로 입장을 서술하며 턱을 높이 치켜드는 그런 삶이 아니라, 얼버무리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해 머쓱하게 웃고 마는 그런 얼굴로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것이, 결국 내 삶이 궁극적으로 도착하게 될 지점일 것이다. 타인을 생각하고, 이 사회를 고민하고, 내 나라를 걱정하고, 이 세계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나는 오롯이 나 혼자만 생각하며, 흔들리고 불안한 나를 감지하면서,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 나 하나만을 겨우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세상이라는 인간을 생각하는 대신, 오직 나 하나의 목숨에 매달려 벌벌 떨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며 살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따위 비겁하고 비루한 삶이 어디 있느냐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온다면, 구구절절 어려운 수사와 언어들로 나의 선택과 논리를 증명하는 대신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세상의 말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밝혀낸 반면 그만큼 너무 많은 것들을 소외시켜왔다. 쏟아져 나온 말들을 신뢰하면서, 그 속에 매달리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정체성이라는 몇 개의 기호 앞에 우리는 너무 무기력해져 버렸으며,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일인데 그 앞에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고 희망을 찾아간 반면, 그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삶을 져버리고 목숨을 잃었다. 정체성이 또렷한 것일수록 그만큼 당당하고 화려했으며, 정체성이 없는 존재는 언제나 괴물적으로 환기되어왔다. 물론 어느 것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올바르게 호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서성거리고 더듬거리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도 갇히지 않은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나 자신을 두지 않고 위태롭고 흔들리는, 부유하며 사는 삶을 날마다 꿈꾸면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혹은 놓쳐버린 나를 닮은 인간들에게 괜찮다고 그들의 어깨를 토닥일 수 있는 그런 삶을. 비겁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내 안에서 나를 위한 삶을 놓지 않고 사는 끈질기고 지독한 생의 애착을.

 

'정체성은 없다. 정체화가 있을 뿐이다.' - 자크 데리다

 

 

 

 

 

 

 

 

제13화 무명의 생

 

 

 

소설가 金 飛 

 

 

 

 

 

 

그래서 나는, 나를 띄워보낸다.

 

  지상의 관념 위에 나를 붙들고있던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이제 나는 나를 허공으로 띄워올린다. 경계 속에 나를 속박시켰던 편견과 강박, 그리고 또 다른 감옥일 수 밖에 없었던 전환과 변신, 끈질기게 나를 붙들었던 괴물같은 인간성과, 어디에서 기인하는지조차 알지못했던 두려움의 끈을 벗어버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땅을 박차 올라 허공에 나를 띄운다.
  날개도 없는 것의 날갯짓은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높이에 불과하겠지만, 자신들의 경계 속에 안온함을 누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그건 고작 투신이거나 추락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온 힘을 다 해 나 자신을 들어올린다.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모든 정체성이 사라져버린 공간. 그 어떤 이성이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관념의 공동.
  허공에 떠올랐기에, 어떤 땅 위에 발 딛고 있지 않기에, 나는 분명 위태롭고 위험해보일 것이다. 버릇처럼 그건 또 다시 내게 불안과 두려움을 추동시키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언제든 기꺼이 허공 속으로 몸을 내던질 것이다. 어디론가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발버둥치거나 비명지르며, 지상의 세계 어딘가에 도착한 생존을 갈구하지 않는다. 오지 않은 미래에 짓눌려, 일각의 현재를 희생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나의 고독을 알고 있다. 손에 든 최초의 무언가 어긋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그런 고민과 사유 속에 발을 빠트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장애라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잠시 잠깐의 착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이 장애인지 착각인지 그들의 논쟁이 시끄러워지는 동안, 작은 상자 속에서 나는 언제나 공포에 질리며 혼자서 몸을 떨어야했다. 아무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절박함이 나를 깨우며, 나는 어쩌면 세상이 말하는 인간의 허물을 벗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른 채, 인간이 되기 위해, 세상이 말하는 그들과 똑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 해 경계를 넘어서며 이리저리 분주하기만 했다. 때로는 도약이었고, 때로는 추락이었으며, 어떤 시간 속에서 그건 추억이었고, 또 다른 시간 속에 그건 악몽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내가 도착하게될 허공을 빈틈없이 탐색해야했다. 설령 그것이 어리석고 모자란 것일지라도, 끝내 나는 내가 다다르게 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부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서로 다른 경계 속에서 서로 다른 땅을 디디고 있는 자들에게, 나는 분명 침입하거나 침범하는 이방인이겠지만, 섣불리 희망에 기대거나 절망에 쓰러지지 않으며, 나는 표정이 지워진 냉혹한 얼굴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말소시켜야한다.
  다른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었던 혼자만의 투쟁으로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들을 지워버린 이기적인 삶이지만, 나는 그것 만으로도 나의 생존을 담보할 수만 있다면, 내 이 모호한 삶의 의미를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너무 오래도록 확신을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혼돈과 혼란으로 태어난 생명, 그래서 더욱 나는 내 삶에 또렷하고 분명한 무언가를 갈구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체성이라 말하지만, 그건 언제나 어긋나기만하는 엇갈림이며, 결코 들어맞지 않는 과녁일 뿐이다. 내가 나를 가리키면서 나를 알지 못하고, 내가 나를 말하면서 내가 아닌 세상의 명령만을 중얼거리며, 내가 나의 삶을 살면서도, 나는 언제나 살해당한 채였다. 어떤 세상의 틀 속에서도, 나는 위협당하며 살아야하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서야 나를 미지의 공간 속으로 띄워보내고자 한다. 세상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깨끗한 여백의 시간을 나에게 선물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거나 오염되지 않으며,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시간. 분명히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고 비난받게 될, 그러나 결코 두렵지 않은 모멸의 시간.

 

  앞으로도 나는 너무 오래도록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끝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며, 나를 살게하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희망이나 미래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파헤치는 집요함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판타지에 붙들려 온 몸을 흔들며 내달리는 질주가 아니라, 여기 이 자리에 선 나를 잊지 않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나의 걸음을 시작하는 일이, 바로 내가 살아야할 나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 이 땅 위엔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있던 해답이란 건, 어쩌면 우리들의 발 밑에 들러붙어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날마다 그것을 뭉개고 짓밟으며,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게도 허망한 미래만을 뒤쫓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야한다. 세상이 부여한 표피와 흔적들을 벗어버리고, 부유하며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게 나만의 의미와 이름을 붙이고 불러야하는 것이다. 오래 전 인디언들의 이름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푸른 태양의 일격'이라던가, '용감한 하늘의 심판자'여도 좋다. '초록 생명의 흙'이라던가, '검은 사유의 시간'이어도 괜찮다. '꿈'을 '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사랑'을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족'을 '동지'라거나 '적'이라고 해도 좋고, '친구'를 '연인'이라고 말해도, 혹은 '이방인'이라고 말하더라도, 부유하는 우리들 곁에 다가온 누군가는 똑같은 얼굴로,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거나, 혹은 지나칠 것이다.

 

  새로운 나의 호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며, 나의 호출에 응답하는 것들을 기쁘게 맞이함으로써, 나는 나를 부르고 세상을 부르며, 그것으로 인해 또 다시 진정한 나의 이름이 호출되는 환희를 깨닫게될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이 세계를 나의 부속품으로 만들어,  작고 보잘것 없겠지만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나의 시간을, 나의 차원을, 나의 세계를 살아야한다.

 

  이제부터 나의 정체성은 없다. 세상에는 나의 이름을 호출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모호하고 흐릿한 하나의 인간일 뿐,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사람도, 국민도 아니다. 오직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끝까지 살아남으며, 빈 몸으로 마음껏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언제나 꿈틀거리며 다시 태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을 향유할 준비가 되어있는, 역동적 생명이 될 것이다. 날마다 새로워지게 될, 무명(無名)의 생이다. 飛

 

 

 

 

 

 

(design by 김비)




3회: 각혈하는 몸이란 무엇인가

 

 

 

 

윤인로

 

 

 

1) 단편 「지도의 암실」에 나오는 한 대목, 묵시적 끝의 통찰. “태양은제온도에조을닐 것이다 쏘다트릴것이다 사람은딱정벌러지처럼뛸것이다 따뜻할것이다 넘어질것이다 색깜한피조각이뗑그렁소리를내이며 떨어져깨여질것이다 땅우에눌어부틀것이다 내음새가날것이다 구들것이다 사람의피부에검은빗으로 도금을올닐것이다 사람은부듸질 것이다 소리가날것이다/ 사원에서종소리가걸어올것이다 오다가여긔서놀고갈것이다 놀다가가지안이할것이다.”(2: 154) 지도 제작술의 근대를 암흑의 암실로 인지하는 묵시적 힘. 그것은 가시지 않고 보존되는 사원의 종소리, 매회 매번으로 지속되는 신의 조종소리로 번지고 퍼진다. 증식하는 조종소리. 거기에 가브리엘 천사를 가브리엘천사균으로 적었던 이상의 근거와 맥락이 있다. 각혈의 아침중 한 대목을 보자.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 가브리엘천사균(天使菌) (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 이 살균제(殺菌劑)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담(血痰)이었다(?)(1: 208)

 

이상은 야만적인 법률을 침식하는 광부를 세균이라고 표현했고, 속이는 법의 저울을 달아 재는 신의 저울은 대천사 가브리엘의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광부/세균과 하나의 계열체를 이루는 것은 법에 대한 기소과정 속에서이며, 그런 사정을 응축한 말이 가브리엘천사균이다. 이상에게 균(), 세균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사상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세균학의 창시자 로베르토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던 1882년 이래 세균은 병원체(病原體)’였다. 그것은 의학 사상의 패러다임만 바꾼 게 아니라 정치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사고의 틀도 바꾸었다. 병든 국가를 치료해야한다는 말, 사회의 암적 존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일상의 말에서 드러나는 건, 그 말들이 정치의 문제를 제1원인을 찾는 병원체의 사상에 근거해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학적 사상 속에서 국가의 암적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만하는 것이 된다. 없으니까 없다고 진단되는 게 아니라 늘 개발되고 발굴되어야만 된다. 병원체라는 의학적 사상은 정치적 데마고기의 힘이다. 이상에게 세균은 병원체가 아니었다. 이상에게 세균은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었다. 병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정치적 이면을 투시했던 이가 이상이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2) 이상은 결핵균이 사는 장소로서의 자신의 몸을 진단하는 의사들을 곳곳에서 신성의 이름으로 언급한다. “의사믿기를 하는님같이하는 그”(병상이후」, 3: 140), “예언자”(병상이후」, 3: 139), “반왜소형(胖矮小形)의 신()”(오감도 5호」, 1: 90), “하이한천사”(내과」, 1: 156), “()베드로”(각혈의 아침」, 1: 209)가 그런 예들이다. 과학적인/절대적인 의학적 지식을 위임받아 대행하는 의사의 진단과 치료란 그 자체로 신적 권능을 지닌 것이다. 그들의 진단은 병의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알다시피 원래 하나의 원인을 확정지으려는 사상이야말로 신학형이상학적인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141] ‘의사가 곧 성직자라고 했던 건 계보학의 빛으로 계몽된 근대의 암실을 비추었던 푸코였다. 이상이 자신의 몸을 결핵균의 감염으로 진단하던 의사를 신성의 이름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사야말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힘의 절대적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와 동시에 의사 앞에 앉은 이가 진단과 치료의 단순한 대상으로 되는 과정을 문제시했다는 것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이상에게 의사는 사목(司牧)하는 목자였으며, 환자는 의사라는 목자의 보살핌과 계도를 치료와 구원의 아우라 속에서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신자였다. 이상은 의사와 환자의 그런 관계 속에서 의학적 형상-질료 도식으로 된 근대성의 위-(-)를 투시했다. 병의 근본원인을 찾는 의사/목자의 진단과 구원의 과정은 그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병의 발생과 등가적인 것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원인이 먼저 있어서 병이 발생된 게 아니라, 그 병을 병이라고 진단하고 확정하기 위해 원인은 사후적으로 그 병과 등가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성한 제1원인을 찾는 병원체의 사상은 세속화된 신으로서의 화폐장치의 발생 및 운동과 상동적이다. 풀어 말해, 등가화될 수 있는 것들이 먼저 있고 그 다음으로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생긴 게 아니라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등가화될 수 없는 것들을 등가화될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확립해간 과정과 병원체의 사상은 유비적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하나의 계열 안에서 등가적인 것으로 될 수 없는 병원체와 병은 의학이라는 신학적 프로파간다에 의해 등가화되는 것이다. 병원체라는 사상은 의학 안에서 이뤄지는 화폐적 등가화의 과정이다. 그 의학적/화폐적 전도와 전치를, 그 유혈적 과정의 재생산을 보증하는 병원체의 사상을, 세균의 이데올로기를, -계에 봉헌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균을 살균(殺菌)’하는 일. 줄여 말해 세균이라는 제1을 박멸시키는 일. ‘가브리엘천사균이라는 살균제가 그 일을 행한다.

 

3) 이상에게 병이란 통계화(census) 가능한 상태로서의 국세(國勢)를 증진시키기 위한 내치의 중심요소로서의 의료시스템에 의해 진단분류되는 것이었다. 병은 어떤 분류표, 기호론적 체계에 의해 존재하며, 그런 한에서 병은 원래 시작부터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143쪽]이었다. 중앙집중화된 의료체계에 의해 분류된 병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이미 언제나 절대적으로 받들어야할 국민건강이라는 의학적/정치적/신학적 의미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다. 자신의 병에 대한 의사의 진단행위에서 이상은 그렇게 분류된 의미의 위압성을 인지했다. 이상이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라고 적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히스테리의 몸이 의미의 질서에 한 조각, 한 지대의 시니피앙스-결여를 관철시키는 정치적 비판의 몸이었듯, 이상의 자기 진단된 병든 몸 또한 그러하다. 앞서 인용한각혈의 아침」에서의 가브리엘천사균은 각혈한 이상이 자신의 피와 가래에 섞인 폐결핵균을 표현한 것이다. 그 자기 진단은 그 자체로 의학적/정치적 병원체의 사상이 만든 의미의 매트릭스에 하나의 결여와 구멍으로서 발생하는 시니피앙스-결여(a-signifance)이며, 그것의 수행이고, (‘a-’)의 융기이자 기립이다. 그때 이상의 결핵은 국세의 내치에 봉헌하는 의미의 카테고리를 절단하는 병이 된다. 그때 이상의 폐결핵균은 세고 재고 쪼개는 저울로서 임재하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된다. 그렇게 이상의 병은 표준적 분류법을 깨고 그 바깥을 개시하는 신학적/정치적 비판의 의미를 획득하고 구성한다. ‘책임의사로서 스스로를 진단하던 진단 0:1의 소멸과 파국의 그 제로, 그 공백은 이미 좌표 바깥을 향해 있는 의미로서의 병의 한 사례이기도 했다(1회 연재분 참조).

 

4) 앞서 인용한 얼마 안되는 변해에서 문제의 별빛을 채광하던 그 광부, 파국의 파편들을 채집하고 수집하던 그 광부로 돌아오자. 그는 별빛의 광산을 채굴하는 자다. 그의 그 채굴은 폐허는 봄”(1: 200)이라고 말하는 자, 폐허로서의 봄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가 수행하는 굴착과 한 계열을 이룬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묻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나는 흙을 판다 // 흙속에는 봄의 식자(植字)가 있다// 지상에 봄이 만재(滿載)될 때 내가 묻은 것은 광맥(鑛脈)이 되는 것이다 (…) 봄이 아주 와버렸을 때에는 나는 나의 광굴(鑛窟)의 문을 굳게 닫을까 한다.”(1: 201) ‘을 파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묻은 자. 지금 그는 자신의 그 모든 것이 흙속에 있는 폐허로서의 봄의 파편들과 혼재되는 시간 속에 있다. 광부가 별빛을 채광하고 수집하듯, 그는 흩어진 봄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재배열함으로써 의미를 현현시키는 식자공이다. 이상은 산촌여정에서 낱글자들로 성경을 제작하고 있는 식자공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바 있으며, 그런 한에서 봄의 파편들로 구성되는 그 의미란 신성과 결합해 있다. 식자공/광부는 흙 혹은 지상, 이른바 대지의 법과 의미의 질서를 굴착하는 자다. 다시 한 번, 그는 지구를굴착하라”(1: 77)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지하생활자였다.

 

5) 이상이라는 광부는 임박한 폐허로서의 봄이 대지에 쉼 없이 누적되고 적재될 때 자신이 굴착한 지하와 거기에 묻은 자신의 모든 것이 빛들로 된 광맥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폐허라는 봄, 거듭 도래중인 그 파국의 봄이 이미-벌써 아주 와버린 것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그 봄의 임재가 완료완결완수된 사태로 마무리되고 말 때 그는 자신의 그 지하라는 장소, 광굴이 봉쇄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에게 봄이란 무엇인가. 매번-매회 도래하는, 항구적으로 임재하는 메시아적인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광부는 최후의 종언을 기다리는 사도다. “폐허가된육신을 가진 사도, “갈갈이 찌어진 사도(使徒)”. 풍마우세(風磨雨洗)로 저절로다말라 업서지고”(3: 58) “마멸되는 몸”(1: 112). 이상은 앞서 폐허는 봄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하나의 계열체가 만들어진다. 폐허=, 폐허=, 폐허===메시아적인 것. 폐허는 이상 자신의 몸이기도 했다. 그 몸이 곧 봄이다. 그 봄/몸이 곧 메시아적인 것이며 제헌적인 것이다. 갈갈이 찢어진 몸, 사도의 몸, 사도적 몸이 법을 기립시키고 재정초하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몸이 폐허가 되고, 찢어지고, 다 말라 없어지고, 마멸된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이건 () 신의 심판과도 같다. 신은 사라지지만, 그 뒤에 자기의 심판을 남겨둔다.”[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31쪽]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 그 신의 심판은 언제 어떻게 도래하는가. 매번의 사라짐을 통해 매회 도래한다. 부과된 법의 지상에서 거듭 사라짐으로써, 다시 말해 관리되는 의미의 대지를 굴착해 만든 지하에서의 생활을 지속하고 보존함으로써 매회 도래하는 게 최후의 종언이다. 얼마 안되는 변해의 마지막 한 대목은 폭열(爆裂)하는 몸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몸은 무언가를 분만하는 중이다.

 

그는 아득하였다./ 그의 뇌수는 거의 생식기처럼 흥분하였다. 당장이라도 폭열할 것만 같은 동통(疼痛)이 그의 중축(中軸)을 엄습하였다./ 이것은 무슨 전조인가?/ 그는 조용히 사각진 달의 채광(採鑛)을 주워서, 그리고는 지식과 법률의 창문을 내렸다. 채광은 그를 싣고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몇억의 세포의 간극을 통과하는 광선은 그를 붕어와 같이 아름답게 하였다./ 순간, 그는 제풀로 비상하게 잘 제련된 보석을 교묘하게 분만하였던 것이다./ 그는 월광의 파편 위에 쓰러졌다.(3: 158)

 

폭발해서 찢어질듯 쑤시고 욱신거리는 몸. 이상에게 자신의 그런 몸은 어떤 전조(前兆)’로 인지된다. 그 기미 혹은 징후는 파국과 끝을 표현할 때 인유되던 과 그 빛들을 그러모으는 광부의 이미지에 이어진 것이다. 세계의 끝 속에서 지식과 법률에 의해 관리되고 구조화된 의미의 질서는 그 문을 닫는다. 법의 암전, 의미의 폐절. 이상이 말하는 전조가 그와 같다. 별과 달의 빛들에 실려 있는 빛나는 몸, ‘-섬광’(낭시)이 바로 그 전조를 실현한다. 당대의 전시상황을 지시하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 “이군웅할거를보라/ 이전쟁을보라/ 그들의알력의발열(發熱)의한복판”(1: 44)에서 이상은 비밀심문실에 구속된 채로 경찰의 취조를 받고 있는 피의자였다. 그 경찰은 이상에게 말한다. “「물론너는광부이니라/ 참고 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과같이광채나고있었다한다.”(1: 75) 전시의 체제로 도래중인 파국, 임박한 훼멸의 시간들을 캐고 수집하고 있는 광부의 몸은 빛으로 되어있다. 몸의 세세한 모든 곳으로 광선이 통과하고 있는 광부. 그는 빛의 인간이며, 그런 한에서 선에관한각서에 나오는 광속의 인간이다. 그가 지금 분만하고 있는 것, 그것이 보석이다. 분만된 그 보석은 어떤 의미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는가. 이 마지막 질문을 위한 또 하나의 분만. “창부가 분만한 사아(死兒)의 피부전면에 문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암호를 해제(解題)하였다. 그 사아의 선조는 옛날에 기관차를 치어서 그 기관차로 하여금 혈액임리, 도망치게 한 당대의 호걸이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1: 191) 무슨 말인가.

 

6) 세리(稅吏)와 창녀. 그들이 가장 먼저 천상으로 들어가리라고 했던 이는마태복음의 그리스도 예수였다. 이상에게 창녀는 때때로 마리아와 결합됨으로써 성창녀(聖娼女)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녀는 성스러움과 속악함을 분리하는 척도적 기준을 작동 정지시키는 비식별역으로서의 경계 영역을 개시하고 구성하는 자다. 창녀가 분만한 아이는 분리와 분류의 무화 속에서 신성을 갖는다. 정전 바깥의 복음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자는 창녀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도마복음105) 창녀와 창녀의 아이는 표준적이므로 지배적인 분류표 속에서 고아, 과부, 병자, 이방인만큼이나 핍박받고 내몰리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진정한 생명을 봉헌하는 이들을 두고 창녀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말씀(logos)은 분류의 기준과 구획의 척도를 전복시킴으로써 분류표의 바깥을, 좌표 바깥을, 다시 말해 분류불가능한 경계의 장소를, 새로운 법과 생명이 정초되는 대지를 설립한다. 창녀의 아들은 그들척도를 들이미는 자들의 눈과 기준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는 새로운 생명기준을 인식한 것이다.”[주원규, 창녀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http://blog.daum./innovator-bay(2013. 8. 16) 도마복음에 대한 주원규의 강해를 통해 그의 소설들을 예감하게 된다.]

 

7) 이상의 창녀가 분만한 아이는 죽은 아이로 드러나되, 피부 전면에 문신이 새겨진 아이로, 몸 전체가 암호인 아이로 드러난다. 그 암호와 그 암호를 해독하는 는 벨사살의 연회장 뒷벽에 적혀있던 신의 암호 같은 문자와 그걸 해독하는 다니엘에 겹쳐진다. 몸피에 새겨진 그 암호라는 것이 핍박받았던 선조들이 기관차와 싸워 승리했던 자들임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던 한, 그 암호는 벨사살을 저울에 달고 그 왕국을 쪼갰던 신의 문자와 상관적이다. 무슨 말인가. 선조들과 기관차의 충돌이 문제이다. 알려진 한 대목.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356쪽]이상이 말하는 선조들은 혁명이라는 기관차가 견인하는 발전의 역사, 그 직선적 레일을 절단한다. 선조들은 그 기관차의 승객이지만,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겨 그 기관차의 엔진을 끔으로써 그 기관차의 속도를 거스른다. 비상 브레이크로 제동을 거는 그들 억압받던 선조들. 이는 삶의 진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주의적인 입장과 파시즘의 공모 및 묵계를 기각하는 맥락에서 제출된 키워드들이다. 날개의 다음 한 문장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혼미와 혼동과 퇴락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2: 286) 더불어 이상은 3인터내슈날당원들한테서 몰매를 맞는 상황 속에서 지구의 재정이면을 엄밀자세히 검산하는 기회를 얻었다.”(1: 190)고 쓴다. 혁명의 기관차 속에서 이상과 이상의 창녀가 분만한 아이와 그 아이의 선조는 진정한 비상사태의 도래로서 함께 발생하는 중이다. 그들의 한 손은 혁명의 기관차가 주재하는 직선적 발전의 체제, 그 돌벽에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면서,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직선의 레짐을 통째로 세고 재고 쪼개는 최후적 저울을 들었다. 저울 든 그들은 매번 매회 창녀의 아이로서 분만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폭력적 질서에 의해 내팽개쳐진 분란과 불화의 , 그리스도의 그 칼을 다시 집어 드는 자들이며, 화평과 조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혀로 발화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그 작은 칼(小刀)이 거듭 다른 칼들을, 다른 그리스도들을 분만한다. “내동댕이쳐진 小刀는 다시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낳고 그 小刀가 또 小刀를 분만하고 그 小刀가 또……”(1: 155) 칼이 칼을 분만한다. 심판이 심판을, 최후가 최후를 분만한다. 그 항구적인 의 분만들 속에서 누리고 구가하는 새로운 생명이 거듭 탄생한다. 이상이 말하는 분만된 보석의 뜻과 의지가 그와 같다.

 

 

 

..............................................................................................................

 

 

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4회: 이상이 읽은 것, 이상의 비교론: 요시다 잇스이, 메피스토펠레스, 지하생활자

 

 

윤인로

 

 

1) 2회 연재분에 들어 있던오감도 4호」의 그 회색 수열, 하늘에서 근대를 투시하는 그 까마귀의 시선은 당대 일본의 전위시 잡지 『시와 시론(詩論)의 요시다 잇스이(吉田一穗)를 변용한 것이다. 이상의 문학과 그 잡지 사이의 관련에 주목한 내실 있는 공동연구서(란명 외, 이상(李箱)적 월경과 시의 생성―『시와 시론』수용 및 그 주변』, 역락, 2010)에는 이상의 영향관계에 대한 세세한 연구들이 들어있는데, 아쉽게도 요시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 잡지의 창간호부터 시를 썼던 요시다의 까마귀를 기르는 차라투스트라」(시와 시론』 11)는 까마귀의 형상에 임재하는 신성의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까마귀()”, “()”, “낙원재흥의 고려”[송민호·김예리 옮김, 란명 외, 앞의 책 부록, 467] 같은 시어들로 의미의 포인트를 삼고 있다. 이는 오감(烏瞰)이라는 신의 시선을 근대적/건축적 체제의 으로의 폭력적 형질전환과 결부시키는 오감도 4호」와 맞닿아 있다. 이에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시 갈까마귀()(시와 시론』 6)1연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 나는 문득 마른 풀 위에 버려진 어떤 한 장의 검은 상의를 발견했다. 나는 또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이형진 옮김, 란명, 앞의 책 부록, 477]. 그 미지의 목소리는 명령한다. 멈춰라, 너의 옷을 벗어라, 벌거벗어라, 그 검은 상의를 주워 입어라, 날아라!, 날아라!, 울어라!……. 까마귀를 입으라고, 까마귀로 비상하라고 명령하는 그 목소리 또한 이상이 말하는 오감의 의미/의지와 상관적이다. 시와 시론』에는 이상의 주요 시어들이 산적해 있다. 거울, 공복, 내과, 뇌수, 나비, 총구, 군화, 앵무, 열풍, , , (), 바둑판 등등. 그러하되 그 시어들은 이상에게선 대부분 철저히 변용되고 있는 것이라서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엄밀히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내적 관련의 강도로 보자면 역시 요시다이며, 그의 신약(新約)(시와 시론』 1)은 이상 문학의 중핵과 만나고 있다.

 

2) 요시다의 신약」 1연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법정에서는 가발을 쓴 법관이 그들의 하늘의 돌을 가지고, 땅의 아들들의 손에 빌려준 망치와 낫을 깨부수었다. 우리들은 곧장 항소했다.”(위의 부록, 451) 하늘의 돌을 쥐고 신성의 외투를 걸친 법관들의 폭력에 의해 깨부수어지는 땅에서의 혁명(망치와 낫). 속죄를 염원하는 수인(囚人) 이상과 같이(수인이 만든 소정원」) 요시다의 인물들은 감옥에서 새로운 해의 출현을 두고, “미래에 목말랐던 젊고 아름다운 한 개의 태양을 두고, “우리들의 신약의 피다!”(451)라고 고함친다. 그 함성을 따르는 마지막 연은 이렇다. “우리들이 올라왔던 곳에 단두대가 있다. 공포에 매혹되었던 자빈코프가, 라 그리마·크리스테(ラグリマ·クリステ: 그리스도의 눈물)의 방순(芳醇)함을 알게 된 것 같이, 그 자신의 순수한 생명의 술잔을 기울이길 다하였다. () [논증과 규정의] 관념론을 부정하고 다시 옛 관념에 빠진 특히 스콜라 냄새 풍기는 유물론자는, 시온의 여인과 검을 가지고 혼약한다. 우리들은 먼저 어떤 사람보다도 자기 내심의 법도를 따라,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자유로운 감성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일 테지, 예로 그것이 우리들의 가는 다마스코에의 길, 피에 목마른 불모의 땅이라고 해도, 내가 감성에 꽃피운 사막의 장미를 찾아낼 것이다.”(455) 유물론과 시온의 결합. 불화의 칼, 그 날끝에서 맹서한 약동하는 혼약. 그렇게 비약(Elan)하는 순수한 생명이 구제를 위한 다마스쿠스에의 길을, 그 불모의 사막을 순례한다. 앞질러 말하건대, 그 순례의 길이 바로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이상이 걸어가는 길이다.

 

3) 요시다에 이어, 이상이 읽었던 파우스트에 대해 내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상의 다음 문장에서 시작하자.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1: 64) 지금부턴 이 문장이 들어 있는 파국의 설계도 다섯 번째 장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영원한 망각은 이름의 분류법을, 할당된 죄의 연관을 거듭 지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정되고 구속된, 대패질되고 못질된,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는 구원된다. 이상에게 이름의 망각은 심판하는 신의 도래이자 그 세속화이다. 그러므로 건망이여라는 부름은 폐지함과 동시에 구원하는 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응대이다. ‘건망이여신이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부름, 그 소명과 함께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수”(1: 48)가 생기를 띤 채로 기립한다. 그런 한에서 숫자의 콤비내이션, 곧 사목적 벡터의 조합을 폭력적으로 삭제하고 송두리째 망각해버리는 인문적 뇌수의 회생과 함께 신의 폭력, 그 최후적 심판의 날은 매번 도래하는 중이다. 그 날을 두고 이상은 속도를 조절하는 날이라고 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불원간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일치하는것은그것들의반복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1: 64) 무슨 뜻인가.

 

4) 속도를 조절하는 날, 자기 구성적 속도를 통해 좌표의 숫자를 지워버리는 바로 그 날, ‘를 모으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 사람이 모으는 나는 누구인가. 이상이 말하는 그 사람은 좌표의 붕괴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었고, 나는 저 ()렌즈를 통과한 방사의 에너지들로 좌표를 붕괴시키는 광선이었다. 지금 좌표의 붕괴, 실재의 개시를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나/광선이라는 파국의 힘을 맞이하고 상봉하는 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는 이상의 또 하나의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그때 그들에겐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1: 63)이었다. 도주하는 속도의 현재 속에서 미래와 과거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수된다다시 한 번 크레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과거에 써진 유서와 미래에 써질 유서를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인지했던 건 크레인을 점거중인 김진숙이었다. 그 현장의 고통, 그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인 김진숙의 점거는 이상이 말하는 도주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현실이 텍스트를 이끈다. 모든 텍스트가 현실보다 덜 긴급한 건 아니지만, 모든 현실은 텍스트보다 조금 더 긴급하다. 이에 대해선 졸고,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 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를 참조http://blog.aladin.co.kr/rororo/5188326 속도를 조절하는 날, ‘무수한 과거현재가 구별될 수 없이 일치하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다음 한 대목을 더 읽자. “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1: 63)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이다. 이상은 악령나갈문이없다.”(1: 218)라고 썼고, 그런 그를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령이라고 지칭했던 건 이상의 죽음에 맞서 그를 추억하던 김기림이었다. 이 변주되고 있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보자. 파우스트의 변심을 놓고 주님과 내기를 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그와 같은 악령들을 단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주님.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가. 파우스트를 꾀기 위해 만났던 그 첫날,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분이지요./ () 나는 항상 부정(否定)하는 정령이외다!/ 그것도 당연한 일인즉, 생성하는 일체의 것은/ 필히 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간단히 말해서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내 본래의 특성이랍니다.”[J. W.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6, 41.] 메피스토펠레스는 항구적인 부정의 정령이다. 그는 생성을 소멸로 견인하는 필연의 법으로서, 불모와 절멸을 인입시키는 죄, 붕괴, 악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게 때문에 신은 그 악령을 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쉽게 느슨해지고 무조건 휴식하려고만 하는 인간들을 각성시키려 했고, 그런 신의 의지를 받들어 대행하는 자가 메피스토펠레스였기 때문이다. 사도 메피스토펠레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악령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였다. 악령은 신의 악역이었다. 그 악령은 신이라는 정(), 이미 합()인 정으로 온통 수렴되는 반()이다. “영원히 창조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창조된 모든 것은 무()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마련이다!”[J. W. 괴테, 『파우스트, 366라는 악령의 말은 이미 언제나 신의 주권적 의지 속에서 발화중인 말이며, 그런 한에서 신의 말의 대언(代言)이다. 이상이 말하는 방사된 나/광선은 그렇게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사도의 임무를 행하는 중이다.

 

5) 그렇게 ()렌즈를 통과한 악령 메피스토펠레스가 바로 무수한 나이다. 그들 수없는 나/악령은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 침묵이 악령의 것인 한, 침묵은 신성의 일이다. 침묵하는 악령들은 축적이라는 목적의 구조 안에서 불-(Un-Zeit)에 발생함으로써 그 목적의 흐름을 중절(中絶)시키고, 목적에 의해 합성되고 편성된 사람과 사물에 성스러운 무효용성’(M. 피카르트)을 선물한다. 무목적적인 침묵, 그것은 목적을 산산이 흩어버리려는 신의 심판에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그렇게 좌표의 노모스를 내리치는 신의 파국의 도래 속에서 좌표의 보존을 위해 통합되고 단일화된 과거는 무수한 과거로 되고, 무수한 과거의 사건들은 서로의 대화를 경청하며, 현재는 그 경청의 상황과 만남으로써, 다시 말해 과거의 유일무이성과 특유함을 보존함으로써 과거와 하나로 합수한다. 그 합수의 상황이 최후의 날, 속도를 조절하는 날의 사건이다. 그 날을 발생시키는 자, 그가 바로 이상이 스스로를 두고 말했던 래도(來到)할 나이다.

 

6) 이상은 「차생윤회」를 비롯한 몇 군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윤식의 진단이 앞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2×2=4의 출입구를 향해 질주할 때 거꾸로 질주하는 한 아이가 이상이다. 공포에 질려 질주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 방향은 서로 역방이었다. 이 점에서 이상 문학은 도스토예프스키, 사도 바울의 계보로 이어졌다.”[김윤식, 이상 문학과 지방성 극복의 과제세계사적 시선 속에서 바라보기」,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년』, 문학사상사, 1998, 47. 바울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로 넘기도록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이상은 근대적 속도, 이른바 질주정의 근대적 건축체제에 소멸과 파국의 제로()를 대치시킨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한다(분량 때문에 여기 세세히 언급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상은 「8씨의 출발」지구를 굴착하라”,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같은 정언명령들로 김기림의 매개를 통해 알게된 마리네티/무솔리니의 질주정을 비판한다. 질주정, 이른바 속도의 통치는 속도의 미학화와 한 몸이다. 마리네티-무솔리니는 조각가-통치자이며, 그 두 쌍은 형상-질료의 짝과 동시적이며 등질적이다. 대중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대중의 우매함과 미결정성을 혐오하고 매도하는 어떤 도착 속에 그들의 절대적 속도가 들어있다. 그런 도착적 속도 위에서 마리네티는 대중이라는 재료를 조각하며, 그 속도의 도착성 속에서 무솔리니는 대중을 이른바 갈채의 도가니로 휘몰아간다. 질주정이라는 신성의 공동정부의 수반들인 마리네티와 무솔리니는 형상-질료라는 착취적 도식을 깨는 자가 아니라 그 도식을 깨기 위한 작업복을 걸치고는 그 도식을 완성시키는 자들이며, 그런 한에서 그들은 그 도식의 적자(嫡子)이자 샴쌍둥이였다. ‘지구를 굴착하라는 정언명령은 그들 절대적 신성의 수반들을, 돌려 말해 질주하는 속도의 적그리스도들을 살해하라는 뜻이자 힘이었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지구를 굴착함으로써 시방 지하의 세계를 개창하고 있는 자, 이른바 파국의 지하생활자. 그는 분류표의 세계 안에 파괴와 붕괴의 게발트로, 방해의 바리케이트로 틈입하면서 어떤 이익을 발생시키는 중이다. “이 이익의 특징은 일체의 분류를 파괴하고, 인류애를 내세우는 자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체계를 송두리째 때려 부수는 데 있다. 요컨대 이 이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1998, 33쪽] 무슨 말인가.

 

7) 지하생활자는 상식과 과학이 가르쳐주면 인간은 그것을 반드시 해득하게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그런 확신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유로운 의욕을 단순한 질료로 치부함으로써 인간을 피아노의 건반이나 휴대용 오르간의 핀같은 것으로 격하한다는 것이다. Z백호가 가르치는 비상의 기예가 일방적으로 해득되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상은 악기의 건반이나 핀이기를 거절하는 지하생활자와 한솥밥을 먹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동거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의욕에 뒤따르는 이익. 다시 말해, 축적이라는 목적에 의해 분류된 좌표의 바깥을 발생시키는 힘에의 의욕이 생산하는 이익. 그 이익이 좌표화된 삶 속에서, 이른바 이름()의 분류 속에서, 환속화한 신의 방조와 묵인 속에서 분리와 분할로 재생산되고 합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숫자의 바둑판을 탄핵한다. 그 좌표-바깥으로의 힘을 향한 지하생활자의 의욕과 의지가 일체의 분류법을 작동 정지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을 앓았던 간질(epilepsy)이 일상의 정상성이 절단되는 시간의 발생이었던 것처럼, 분류법 일반을 폐절시키는 분류불가능한 힘에의 의지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인류애의 이름으로 설계되고 있는 정상적 이익의 생산을 저지하고 중지(picnolepsy)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총파업, 지하생활자의 무위(無爲)”[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28쪽]. 그 사보타지 속에서 분류불가능한/예외적 이익이 재생산되고 향유된다. 그 사보타지의 장소, 주이상스의 자리를 두고 이상은 엘리스의 나라라고 적었다. 거기서 통상의 법은 끝난다. “아리스나라가튼 불가사의한나라에제출된외교문서에 우리들이가지고잇는법률을적용하려고하는 것은 도로(徒勞)요 무효(無效)인줄압니다.”(3: 39)

 

8)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좌표-바깥에의 의지와 의욕을 두고 이성도 비근한 생리작용도 모두 포함하는 인간의 전체생활의 발현인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40쪽]라고 적었다. 이성과 몸의 위계적 이분법을 거절하고 있는 이 문장은 즉각 「8씨의 출발」의 한 문장과 맞닿는다. ‘지구를 굴착하라와 동시적인 또 하나의 정언명령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가 그것이다. 이는 먹고 자고 싸는 몸의 작용을 동물의 영역이자 이성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암흑의 영역이라고 격하시킨 분류법의 지배적 통념과 상식을 내다버리라는 뜻이다. 함께 내다버리면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을 향해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8라는 당위를 제출한다. 무성격적 존재, 또는 무성(無性, nihil-ism)의 존재. 그것은 일체의 분류법과 적대하는 지하생활자들의 파괴적 성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성격적이란 어떤 상태인가. 성격을 특정하거나 고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성격을 특정할 수 있다는 건 성격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류된 성격이란 계산가능성 위에서 규격화한 성태성질이다. 무성격적이란 함부로 좍좍 그어지고 있는 분리선들, 구획들, 돌벽들에 대한 폭력적 망각의 지속이며, 그런 한에서 무성격적 존재란 분류법의 영토 안에 무(nihil)의 치외법권으로, 멸형의 공백(zero)으로 설립되고 기립하는 중이다. 무성격적 존재는 무성(니힐), 공백(영점), 멸형(파국)의 힘을 관철시키는 자다. 분류법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무성은 자기원인적이므로 어떤 절대이다(다시, “절대에모일것”). 절대적 무성은 신성의 한 조건이자 양태이다. 무성격적 지하생활자들의 사보타지, 무위의 힘은 무성의 한 조건이자 무성의 한 표출이었다.

 

9) 재갈물린 지하생활자가 기다리는 그 날, 물린 재갈을 풀고 둑이 터지고 홍수가 난 듯 말할 수 있게 되는 그 날, 그럼으로써 새로운 로고스/노모스를 개창하는 그 날, 다시 말해 지하생활자들이 세상에 뛰쳐나오는 [그]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54 비로소 소멸하게 되는 것은 이론도덕이다. 바로 그 날, “인간 자신의 이익의 체계로 온 인류를 갱생시키려는 이론인간에겐 무언가 도덕적인 훌륭한 의욕이 필요하다는 현인들의 확신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37에 파국의 조종이 울린다. 이론에 의해 보증되는 인간의 이익구조가 인류의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그 어떤 분류법에도 귀속되지 않는 의지. 지배의 현자들/설계자들이 만든 도덕률로부터, 곧 마음을 죄의 생산공장으로 만드는 집단적 도덕률로부터 사람들 스스로를 폭력적으로 떼어내고 성별(聖別)시키는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의욕. 줄여 말해 분류불가능한 무성격/무성에의 의지. 그 의지와 접촉하는 이상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의 내부로 향해서 도덕의 기념비가 무너지면서 쓰러져 버렸다. 중상. 세상은 착오를 전한다.”(1: 191) 착오의 사회를 굴착하면서 밝아지는 아침하늘天亮을 기다리는천량이올때까지”(1: 61) 기다리고 있는이상 곁의 도스토예프스키 곁의 니체 곁의 서광.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9. 지하에서 수행되는 일들을 축적에 봉헌하는 이론과 도덕의 관점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비판으로서의 비평의 하한선 혹은 마지노선이 거기에 있다.

 

 

 

 

 

 

..............................................................................................................

 

 

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즐거움과 뜨거움 주고받기

 

 


최혁규(문화연대

 

 

 

 국정원 선거 개입 규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철도 민영화 반대 등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연일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고 각계각층에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정권은 귀를 막아 우리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리의 움직임을 불법행위로 규정하며 경찰을 동원해 목소리를 틀어막으려 한다. 심지어 청년들이 안녕들하십니까라고 쓰며 서로의 안부에 관심을 두는 행위마저 비난하고 제지하고 있다. 여전히 권력을 잡은 자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자기 생각대로 왜곡해버리거나 그냥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간다. 공감의 능력 자체가 퇴화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시국에 각 문제와 연대하며 자신의 투쟁을 묵묵히 이어나가는 여러 투쟁장들이 있다. 콜트콜텍 투쟁장은 그중에 하나고, 나는 문화연대 활동을 통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고 있다. 콜트 기타의 부당한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에 맞서 싸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은 지난 124일로 2500일을 넘겼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 사회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장기투쟁 장이다. 개인적으로 작년부터 이들의 투쟁을 가까이서 봐왔는데, 밴드 결성, 시 낭독, 기타 만들기 워크샵, 연극 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 주체로서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벅찼다. 또한, 투쟁에 함께하고 있는 여러 인권활동가와 문화활동가들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최근 연극 <구일만 햄릿>과 콘서트 <기타 레전드, 기타노동자를 만나다>가 있었다. 연극 <구일만 햄릿>은 막무가내종합예술집단 진동젤리의 각색 및 연출로 기타노동자들 네 명과 문화연대 활동가 최미경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했다. 전문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극적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담고 있는 죽느냐 사느냐라는 실존의 문제를 기타노동자들 당사자들이 콜트콜텍 투쟁의 맥락에서 소화하고 있는 이 연극은 말 그대로 하나의 의미 있는 작품이다. 또한 <기타 레전드, 기타노동자를 만나다>는 지난 111일 콜트콜텍의 박영호 사장이 만든 콜트문화재단의 주최로 열린 ‘G6 콘서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콘서트에 참여했던 뮤지션 신대철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부당해고한 곳에서 주최한 콘서트인 줄 몰랐다며 기타노동자들에게 사과의 메세지를 전달했고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꼭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킨 행사가 게이트플라워즈, 한상원, 신대철, 최이철이 참여한 <기타 레전드, 기타노동자를 만나다> 콘서트다. 기타 레전드들의 연주엔 기타를 연주하고 그들의 손길만이 아니라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손길이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연극 <구일만 햄릿><기타 레전드, 기타를 만나다> 콘서트는 기타노동자 자신들이 투쟁이면서도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연대한 즐거운 투쟁이었다. 함께 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열기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내년 110()콜텍 기타 노동자의 정리해고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가 진행될 예정이다. 그래서 연말까지 릴레이 시위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3명의 활동가가 서초구에 있는 서울고등법원에 앞에서 재판부의 올바른 판결을 촉구하는 일인시위를 했다. 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어떤 분위기 지나가면서 쌍화탕 몇 병을 사서 건네주고 가셨다.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작은 병 하나였지만 그 사람의 온기가 전달되고 있었다. 문득 나는 콜트콜텍 투쟁에 함께 하며 온기를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기타 연주, 시 낭독, 연극 등을 통해 문화적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보며 내가 온기를 전달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하고 함께한다는 것은 이렇게 즐거움과 뜨거움을 주고받는 것 아닐까?

 

 

 

**************************************

 

최혁규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 문화정책센터
(121-802) 서울 마포구 공덕동 120-10 백광빌딩 3층
Tel) 02-745-1603/ Fax. 02-737-3837
http://www.culturalaction.org/xe/

 

: 문화의 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을 꿈꿉니다.

 

 

 

 

 

제12화 나를 살해하는 두려움 

 

 

 

소설가 金 飛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에겐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다. 아이에겐 먹고 배설하며 잠을 자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있을 뿐이며, 그것을 기초로 그 충족 여부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아주 기본적인 감각으로 모든 삶의 시간이 추동된다. 배가 고프면 빼 울어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배가 부르면 수면 욕구에 의존해 잠을 잔다. 수면 욕구와 식욕 모두가 채워진 상태라면, 그제야 아기는 말똥말똥 눈을 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본다. 물론 그때 아기를 지배하는 감정 역시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자신의 주변 환경의 모든 것들을 만지고 입에 넣는 행위를 할 때 즈음, 아기의 부모나 가족들은 처음 아기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르친다. '위험'을 가르치며 안온함과 평화를 알게 하고, 고통이라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아이는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습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생존이나 안위와 정 반대의 지점에 가져다 놓게 된다. 생존과 직결된 것이 아닌 두려움이나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감정을 환기한다.
  그러나 '놀람'에서 기인한 본능적 두려움이 아니라면, 모든 두려움은 허상이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감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들로 인해 학습된 것일 뿐, 그건 우리 안에 근원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 해, 두려움은 가변적이며 또한 상대적이다.

 

  나의 두려움을 말하자면, 나는 혼자 있는 고립이나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더욱더 두려워한다. 한밤중에 혼자 산길을 걸어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나는 골목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낯선 사람을 더욱 두려워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뱀이나 바퀴벌레, 심지어 시궁창에 쥐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거미를 보면 소름이 돋고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물론 나는 내 두려움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건 나도 모르는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새겨진 흔적일 것이고, 그것이 기계적으로 나의 두려움을 작동시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그렇게 각자의 두려움, 서로 다른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그 두려움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의 두려움이나 공포는, 모두 어떤 기억, 혹은 최초의 환경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은데,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모든 시간은 변해왔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또한 그만큼 변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두려움 또한 시간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수정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경계를 넘어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그 경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향해 기웃거리며 우리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판올림하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그 모든 변화의 과정과 함께, 타래처럼 끌려 나오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두려움'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소모되고 고갈되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종양처럼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가는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주었던 대상인 최초의 거미는 분명, '손톱만 한' 크기였겠지만, 그 당시 덩치가 작고 왜소했을 것이 분명한 나에게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내 손바닥 크기로 환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소수자인 나로서는, 사람들의 그렇게 크기를 부풀린 두려움, 혹은 혐오와 너무 자주 직면한다. 성전환자의 수술이나 치료 과정이 한 인간의 치열하고 목숨을 건 생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편견만을 근거로 끔찍하고 잔인한 두려움과 혐오를 환기해, 극도의 반감을 추동시킨다.
  동성애자들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평범한 남자, 평범한 여자에 다름 아닌 그들에게 '동성애자'라는 이름을 붙여, 오직 그들의 성행위 방식, 혹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어느 종교 서적의 몇몇 구절들을 들먹이며, 그들을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치환해버린다.
  그렇게 근거 없는 혐오와 반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변화란, 또다시 스스로 생존과 안위를 위해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절대 바꾸려 들지 않으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킨다고 믿고 있는 것을 맹신해버린다. 누군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안전과, 자신 가족들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어버린다. 그러한 믿음과 편견이 단단해지면 단단해질수록 무의미한 정당성을 획득한 그들의 두려움은 또 다른 편견으로 도약해버릴 것이고.

 

  그들에겐 성소수자인 우리가 (인간 종족을 멸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겠지만, 우리들에겐 좀처럼 변하지 않는,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그들의 신념이 가장 끔찍한 공포이자 두려움이다. 그들의 평화와 우리들의 평화가 결코 서로 다른 것일 리는 없음에도, 그들은 성소수자들과의 공존이, 마치 스스로 안위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주입하고 교육한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공포와 두려움을 말하며, 더욱 끔찍하고 잔인한 논리를 합리화하는 그들의 행위는,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가두는 일이며, 인류의 생존을 언급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감정은, 더는 우리들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우리를 어느 고립된 곳에, 사방이 틀어 막힌 곳에 가두어버린다. 자신도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자신을 옥죄는 공포는, 오히려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게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불안에 떨게 하는 바로 그 근원이다. 그들이 믿고 있는 공포나 두려움에는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건 모두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전에 변화되고 수정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흉터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 남아, 현재의 우리를 비이성적 논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이미 흐릿해져 버린 시간의 기록일 뿐, 그건 현재의 안온함을 지켜주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하거나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또다시 어떤 경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이며, 오히려 그 모든 두려움을 직면할 때, 두려움은 더는 두렵지 않은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 불안과 강박으로 피폐해진 우리가 있다. 두려움이라는 낡고 형편없는 감정에 의존해, 미래를 말하고 평화를 말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있다. 뿔을 달고 꼬리를 그려 더욱 흉포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그려버리는 어떤 그림이 있다. 물론 그건 다른 누구의 모습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다. 飛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


 


최혁규(문화연대

 

 

 

 기억에 의하면 문화연대에 들어와서 처음 주어진 미션은 성명서 쓰기였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풍자한 이하 작가의 포스터 작업이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를 받았던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문화연대의 견해를 밝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이었다. 태어나서 써 본 글들이 나의 이야기를 풀거나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는 일기나 리뷰, 칼럼, 비평 등의 글들이 전부라 조직의 견해를 대변하는 성명이라는 형식의 글을 쓰는데 무척이나 애썼다. 분량으로 치면 A4용지로 한 장도 안 되는 글이었는데 계속 썼다 지웠다 를 반복하며 온종일을 보냈다. 개인적인 입장을 숨기려 했기에 어려웠던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조직의 견해를 간결하고도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망설이게 되는 표현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글쓰기였기 때문에 더딜 수밖에 없었다. 성명이나 논평은 진보냐 보수냐를 막론하고 조직이나 단체가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는 영역에서 문제시되는 사안이 있을 때 단체들은 하루빨리 성명이나 논평을 낸다. 쉽게 말해 성명 및 논평 문화가 있다고나 할까. 나 혼자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의 목소리인 만큼 책임감을 갖고 글을 쓰려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몇 번 공동체의 입장을 작성하다 보니 가끔 쟁점이 되는 사안에서 개인적인 입장을 세우기도 하지만 내가 속한 조직의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가질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통의 전망과 목표를 위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긴 하지만 각자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차이가 있고 행여나 그 생각이 조직의 입장에 쉽게 묻혀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 사건사고들은 누가 봐도 어이가 없는 사건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지난 9월 문화체육관광부 김 모 예술정책과장이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와 직원을 불러놓고 협박성 월권 발언을 하고 결국은 재단 대표가 사임했다는 소식, 부산비엔날레 오광수 운영위원장이 투표를 통해 전시감독을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운영위원장의 권한을 운운하며 선정된 감독에게 공동 감독직을 할 것을 강요했다는 소식,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식에서 청와대에 의해 일부 작품이 제외되었다는 의혹제기, 그리고 이 전시에 선정된 작가 2/3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에서 미술계 인사들이 범대책위를 구성해 이를 규탄하고 있다는 소식, 국정원에 의한 진보적 문화예술단체 압수수색 등이 있다. 이들 모두 문화권력의 심각한 불균형 현상과 문화자본이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로, 자율적이고 생동력 있는 문화가 아니라 죽어버린 문화의 거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기에 분노하고 분개할 만 한 일이다. 특히 문화운동에서 문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부당한 권력의 행사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제로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팟캐스트를 통해 이 사건들에 대해 견해를 피력했다. 단체의 목소리를 통해 개인의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고, 개인의 입을 통해 단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 모두가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고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입장을 공통의 것으로 모아내고 구체적인 언어로 명료화시키는 작업은 많은 논의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 작업은 있어서 공동체와 개인 간의 입장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특히 공식적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단체의 경우에는 그 입장을 남에게 설득시킬 논리와 언어를 동반해야 하며 항상 사회적인 책임이 따른다. 때론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고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독단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단체의 경우도 종종 보긴 하지만 과연 이들이 공동체 혹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쨌건 공통의 의견은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무수한 차이로 구성된 공동체나 조직일지라도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같은 목소리를 내는 순간이 있다. 매번은 아니겠지만, 글을 통해서건 말을 통해서건 각자 다른 의견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위한 자리들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

 

최혁규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 문화정책센터
(121-802) 서울 마포구 공덕동 120-10 백광빌딩 3층
Tel) 02-745-1603/ Fax. 02-737-3837
http://www.culturalaction.org/xe/

 

: 문화의 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을 꿈꿉니다.

 

 

 

 

 

 

문화운동! 어디가?


 


최혁규(문화연대)


 

 2013년 문화연대 후원의 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후원의 밤 제목은 “문화연대, 어디가?!” 이다. 재정적인 사정으로 10월 말에 사무실이 이전하기도 했고 앞으로 문화연대의 (문화)운동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지은 이중적인 의미의 제목이다. 실제로 어딘가로 갔고 또 앞으로 어디로 갈지에 대한 고민을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풀려다 보니 “아빠! 어디가?”를 패러디한 것이다. 참 탁월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특히 ‘어디로 간다는 것’은 어쨌거나 출발하는 곳이 있다는 말이니, 어디 가느냐고 묻는 행위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모색과 동시에 현재의 자리에 대한 성찰도 동반하는 것이다. 참 괜찮은 후원의 밤 이름이다.


 거의 모든 시민단체가 매년 후원의 밤 행사를 하는데, 단체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누며 그동안의 활동을 소개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을 함께 다짐하는 자리다. 또한, 적극적인 후원 요청을 통해 앞으로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고 새로운 운동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는 창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후원의 밤은 함께 모여 지난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점검하고,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지를 모색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운동의 점과 선과 면을 엮고 꿰매는 시간. 문화연대가 1999년에 창립되었으니 이번 후원의 밤은 문화연대의 문화운동의 14년이라는 세월을 엮는 셈이다. 나는 그 세월 안에 있다. 하지만 운동이 한 단체나 한 활동가의 것으로 환원되어서도 안 되지만, 활동가나 단체가 운동 속에 가려져서도 안 된다.


 아무튼, 나는 후원의 밤을 준비하기 위해 몇몇 지인에게 연락을 해서 후원을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지인들은 사회운동은 알겠는데 대체 문화운동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술운동은 알 것 같은데 문화운동은 뭐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이야기했다. 사회운동이 더 좋은 사회를 위한 운동이라면 문화운동은 더 좋은 문화를 위한 운동이라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또한, 예술운동은 개별 장르들이나 예술이라는 특화된 형태에 대한 운동이라면 문화운동은 예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적 표현물들에 대한 운동이라고. 그리고 문화적인 것들을 창조하고 향유할 문화적 권리,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차이들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운동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문화운동은 자본의 동학 시스템과 그것이 재생하는 문화 권력에 대해 저항하기도 하고, 자본의 영역 밖에 있는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활동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문화연대의 문화운동이다. 이 운동이 어느새 14년을 맞이했고 지지와 응원을 바라는 후원의 밤 행사를 연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4대 국정기조 중 하나로 문화융성 내세울 정도의 문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그동안의 문화운동에 대한 점검을 통해 앞으로의 문화운동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연대 후원의   밤을 맞이해서 이런 질문을 해본다. 문화운동! 어디가?

 

 

 

**************************************

 

최혁규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 문화정책센터
(121-802) 서울 마포구 공덕동 120-10 백광빌딩 3층
Tel) 02-745-1603/ Fax. 02-737-3837
http://www.culturalaction.org/xe/

 

 

 

 

 


 

 

제11화 업데이트 혹은 판올림

 

 

 

 

소설가 金 飛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 '급변하고 있다'고 묘사되는 이 세계의 미친 속도는, 날마다 우리 모두를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시간 속에 던져놓고 만다. 우리들은 그저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시대를 따라 뛰고 있는 근육질의 사고를 하는 인간들의 무리 가장 끄트머리에서, 질질 끌려가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육질의 사고와 생각으로 뛰고 있는 그들도, 최첨단의 이름을 부여받지는 못한다. 결국, 그들도 자신들의 앞에 누군가를 따라 정신없이 뛰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은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며, 온몸에 미래와 희망이라는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의 펌프질은 그토록 절박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고작 외향적인 몸짓을 커다랗게 불리고만 있는 짓일 뿐, 생각이나 사고란 애초부터 그렇게 '미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빠르고 세심한 속도로 움직이는 생각과 사고란, 그래서 더욱 느려지고 지난한 것일 뿐, 이 세계의 미친 속도를 따라 움직이는, 그런 근육질의 사고와 생각은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거나 혹은 복종일 뿐이다.

 

   근육질의 몸집으로 누군가를 따라 최전선에서 뛰고 있든, 그 중간 즈음 어디에서 무리에 휩쓸려 어정쩡한 모습으로 뛰고 있든, 맨 뒤에 질질 끌려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리의 끄트머리에 매달려있든,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날마다 또다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진보든 보수든, 미래지향적이든 과거 회귀적이든,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이나 사고의 새로움이란 기계처럼 레버를 올려갈 수 없으니만큼) 급변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미친' 속도는, 우리들의 사고를 새롭게 하려고 뒤따라야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구식이 되어가다 못해, 스스로 믿고 있는 것들을 맹신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미친' 속도로 합리화하며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최신의 구식'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절감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지점에 스스로 생각의 뿌리를 박아놓고, 그 위에 가지를 뻗어, 사람들의 발길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놓고 만다. 뿔뿔이 흩어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그들이 향하고 있는 거기는,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밝은 미래'도 아니요,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계'도 아니다.

 

  거긴 그저, 언젠가 고립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어두운 모퉁이일 뿐이다.

 

   업데이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건, 그런 이유다. 업데이트란 '판올림'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건 전환이나 치환처럼 들리겠지만, 판올림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혹은 하나의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옮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업데이트에는 바뀌는 것이 존재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변화이며 혁신이기는 하지만, 그건 포기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판올림은, 변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혁신이란 이름에 다시 한 번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변화를 꾀하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그 위에 또 다른 변화를,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하며,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로 이미 새로워진 것에 다가가며, 또다시 그것을 다른 층위로 도약시키려는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변화가 시작되고,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시작할 즈음에,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은 몇 번씩이나 새로워지며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업데이트, 혹은 판올림의 진정한 의미다.

 

   그렇게 시시각각 새로워질 수 있는 생각의 판올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시각이 중요할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 모든 현실에 닫혀있고, 또한 등을 돌리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경계 안쪽에 갇혀 있거나, 상자 속에 갇힌 것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전환을 위해, 똑같은 강박으로 또 다른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모든 변화를 떠올리며 자신만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진정한 판올림이며 또한 업데이트이다.

   업데이트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시기의 규칙성이다. (각자에게 알맞은 판올림의 시기는 모두 다 다를 테니) 일정한 시기를 정해 스스로 생각이나 사고, 혹은 생활 방식을 점검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이니, 당연히 불안을 동반하겠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딛고 있는 두 발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경계를 넘는 일이거나 전환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를 향해 길게 목을 빼 기웃거리는 것에 불과한 '업데이트'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몰랐던 것을 깨우치는 일이며, 그것은 또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삶을 새롭게 할 것이고, 나는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나의 삶은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 오늘도 구식으로 사는 우리가 있다. 머릿속에 든 모든 것들은, 내가 오늘 또다시 마주한 이 현실은, 금세 내 앞을 지나치며 업데이트라는 임무를 내게 떠넘기고,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 깨우치고, 고개를 끄덕인 모든 생각과 신념은, 또 다른 가능성을 그 위에 부여해야 하는 밑그림일 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진리도 아니며,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계시도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태양뿐, 아니, 어쩌면 인간들이 모르는 사이, 우리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태양도, 날마다 조금씩 다른 각도로 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하며,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격변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디디고 있는, 이 변하지 않는다고 맹신하는 자연의 이치인지도.

 

   또다시, 두려울 것이다. 결코,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달라져야 하는 것은, 결코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여기 이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의 책무다.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있는 것을 자책하며 불안하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새겨진 어떤 흔적일 것이다. 물론 그 위에 다른 모양의 시간을 기록해야 하는 임무가 내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飛 


 

 



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2회: 이상의 그리스도, 제로에의 의지


 

윤인로



1) 이상(1910~1937)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렇게 써도 좋을까. 근대와 그 정신의 어떤 불모에서 시작했던 자, 시작과 동시에 좌초를 직감했던 자, 폐허와 공포 속에서 전율할 수만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장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폐허라는 공포 속에서만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의 방법이자 태도였던 기하학으로 충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그런 이상의 형상은 다음 한 문장을 받아쓰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아무런 정신의 땅이 없었던 당시의 현실에 주목해서 바라볼 때, 기독이라든가 기하학으로서의 자기 충전은 충분히 불가피한 분출구였는지 모른다.”[김주연, <시문화의 의미와 한계>, 김용직 편, <이상(李箱)>, 문학과지성사, 1977, 146] 이상의 기독(基督),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각혈의 아침>에서 자신을 불세출의 그리스도라고 치겠다는 한 문장을 보았을 때, 그것은 우스웠고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이 작성한 두 개의 이미지-시에 골몰하면서부터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얼마 안되는 변해>)에 대해, 그 파국에의 의지에 대해 미약한 논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강의실의 학생들에게나 옆 사람에게 거듭 이상의 그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면서 논리를 풀었다. 책임의사 이상이 반복하며 변이시켰던 그 두 개의 진단서, 두 개의 이미지-시란 바로 <진단 0:1>(<조선과 건축>, 1932. 7)<오감도 시 제4>(<조선중앙일보>, 1934. 7)이다.

 


 

   



 

2) <오감도(烏瞰圖)> 또는 <조감도(鳥瞰圖)>. 조감도는 투시도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지적 시점에서의 관찰, 해부, 투시. 그것이 이상의 조감도다. 전지적 조감은 전체를 인지하는 신의 시점과 멀지 않다. 그런 신의 시선을 통해 이상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를 상품의 거대한 집적체로, 그 상품들의 교환 효과로, ‘세계의 세속화된 신으로 경배받는 화폐의 절대적 힘의 관철로 투시(透視)해낸다. 그 투시의 속성은 엑스선(X-ray)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 번쯤 찍어보았으니 얼마간 알지 않는가.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 물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희고 검은 회색의 계열로 드러날 뿐이다. 이상은 이렇게 쓴다.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했고, “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灰色)의명랑한색조”(1: 233)로 현상하게 된다고. 까마귀()의 시선(), 그것은 그렇게 세계를 온통 투시된 회색으로 인지하는 삶의 방법이자 태도다. 일단 이렇게 요약해 놓자. 여기 조감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다. 그 새는 전지적이기에 신적이다. 그 신의 시선은 투시하는 엑스선이다. 식민지의 수도 경성의 모더니티가, 결핵성 뇌매독을 앓는 이상 자신의 몸이, 연인과 우정과 가족이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바로 그 엑스선에 의해 관통되어 이면의 회색으로 드러난다. 이는 이상이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의 위용을 일말의 매혹이나 두려움 없이 앙상한 철골과 유리로, 그것들을 접합하는 수식과 방정식으로 투시했던 것과 등가이다. 이상은 그렇게 투시하며 걷는 까마귀/신이다. 그는 경성의 모더니티 속을 걷는, 혹은 그 위를 날고 있는 산보자이다. 그런데 그가 걷는 곳은 모더니티의 수도파리가 아니었다. 죽었다 깨도 그는 파리의 산보자일 수 없었다(그리고 그 사실조차가 이상의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다). 그는 걷되 모조되거나 위조된 근대의 경성을 걷는 중이다. 걷되 절름발이로 걷는다. “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바리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끗끗내잇다”(1: 99) 절름거리는 신, 불구의 신은 말한다. 무사태평한 근대성이야말로 병원이라고, 치료되어야 할 질환을 가졌음에도 병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 바로 근대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므로 이제 근대라는 질병을 진찰했던 책임의사 이상의 진단서 두 장을, 오감도라는 신의 투시도를 보면 되겠다.

 

3) 위에 인용된 이미지-<오감도 4>의 거꾸로 된 숫자열에 대해서는, 가치체계의 전도(임종국), 수적 환상과 양가치적 표현(김종은), 욕구와 현실의 균형 붕괴(정귀영), 원순열의 선순열로의 치환(송기숙) 등의 해석이 있다. 이상전집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이승훈은 <오감도 4>에서 이분법적 합리주의의 대립들을 읽는다.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대립, 질병과 건강의 대립, 남녀의 대립 등등. 그는 진단의 결과를 가리키는 진단 01’이라는 한 구절에서 무(0)와 유(1)의 대립, 나아가 죽음과 생활의 대립을 읽는다. 이와 같은 독법의 카테고리 안에 <오감도 4>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 또한 들어 있다. 내게 <오감도 4>는 당시 병참학(logistics)의 규율체제로 재편되고 있던 근대성의 운용을 메시아적 파국의 입장에서 재정의하도록 이끄는 텍스트였다. 그런 사정은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다르게 끌어안을 수 있다는 믿음의 조건을 되씹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물으면서 시작하자. 저 두 장의 진단서에 내장된 반복과 차이는 어떤 힘을 내뿜는가.

 

4) <진단 0:1>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둔 월간지에, 일본의 국어로, 김해경이라는 본명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계열로, 시가 아니라 만필로 기고되었다. <오감도 4>는 조선인이 읽는 일간신문에, 조선어로, 본명을 가린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오감도>의 일련번호를 달고서, 시로 기고되었다. 하지만 나열해 놓은 이 차이들의 의미는 끝내 잠정적일 수밖엔 없다. 위의 두 텍스트는 의미의 공백을 품은 채로 기호화되어 있으며, 너무 간소화되어 있고, 그 두 텍스트가 이루고 있는 각각의 계열들 또한 일관된 하나의 의미로 집중되지 않고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진단 0:1>에 있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오감도 4>에는 없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건지는 확정할 수 없다. 통념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없어진 <오감도 4>가 거울 속의 자신을 진찰할 수 없음에 섭섭해하던 이상의 자가진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그 여지 속으로 위의 두 텍스트가 갖는 차이의 효과가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잠정적인 것 속에서도 확실한 것은 위의 두 텍스트를 병치시켰을 때 드러난다. 가만히 보면 <진단 0:1>의 똑바로 선 수열의 데칼코마니된 거울상이 <오감도 4>의 수열임을 알 수 있다. 수리적 합리성의 인과율과 수량화가 근대적 폭력의 원천들 중 하나가 맞는다면, 저 데칼코마니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수열의 의미야말로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한 근대의 질환과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진단 0:1><오감도 4>의 공통적 반복을 가리키는 가장 선명한 한 구절은 이것이다. ‘0으로 도달하는 급수운동’.

 

5)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건축과에서 기본적인 수학과 작도법을 익혔던 이상은 급수라는 것이 일정한 법칙성을 따라 증감하는 수의 배열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자 김명환은 <진단 0:1>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콤마들을 소수점으로 본다. 그때 이상의 수열은 한 줄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10분의 1씩 곱해짐으로써 0으로 수렴해가는 등비급수였다. 수학자의 이상론. “첫째 줄에 모든 숫자가 소수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나열된 것을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의하여 완벽하게 장악된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책임의사 이상은 그러한 합리주의의 질환을 가진 세상의 미래가 소멸하리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명환,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수학기호와 수식의 의미>,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 문학사상사, 1998, 171] 이 한 대목에 들어 있는 합리주의의 질환이란, 이미 이상의 한 구절 1234567890의질환의구명과시적(詩的)인정서의기각처 복창하고 복기한 것이었다. 구절 속에 들어 있는 ‘12345678890’<진단 0:1>의 첫 줄에 있는 수열과 다르지 않다.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시적이고 반성적인 감응의 수수와 증여, 그 마음의 전 과정을 기각해버리는 폭력의 자리. 그렇게 기각하고 소각하지 않으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는 시스템의 운용원리. 바로 그 통치적 합리성이야말로 <진단 0:1>의 수열이 겨냥하고 있는 타켓이다. 삶을 인도하고 견인하고 배양하는 사목적(司牧的) 통치성의 표상으로서의 ‘1234567890’이 가진 호명과 관리의 권력이 ‘0.123456789’로 극소화되는 과정, 그렇게 제로로 수렴해가는 바로 그 과정/소송이란 무엇인가. 이윤을 위한 법, 이윤이라는 법을 향해 직진하는 통치이성의 끝장이며, 그 최후로의 육박이자 그 육박의 궤적이다.

 

6) <진단 0:1><오감도 4>의 병치를 다시 보자. <진단 0:1>의 가로쓰기와는 달리 <오감도 4>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도록 세로쓰기로 인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일간신문의 세로쓰기 편제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진단 0:1>을 데칼코마니한 <오감도 4>가 위에 인용한 이미지 그대로 인쇄될 거라고 예상했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오감도 4>를 인쇄된 그대로 읽으면 <진단 0:1>에 이어져 있는 희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진단 0:1>의 진단서가 ‘1234567890’에서 ‘0.123456789’로 나아가는 제로로의 수렴이었다면, <오감도 4>의 진단서는 ‘1111111111’에서 ‘0000000000’으로의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전환 혹은 전복으로 드러난다. 이상에게 제로()시스템의 절멸이자 재시작을 위한 영도(零度)였다. 그런 한에서, <진단 0:1>제로로의 수렴은 말 그대로 제로로의 무한한 근접이지 아직 제로가 아니며 끝내 제로가 아니다. <진단 0:1>의 제로로의 수렴에 들러붙어 있는 콤마 이하의 수들이 통치하는 힘의 꺼지지 않는 불씨이자 탄력적인 잔여라고 했을 때, <오감도 4>에선 그것조차가 완전히 잘려나가고 없다. 이상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발견한 모든 함수상수의 콤마이하를 잘라없앴다.’ <오감도 4>의 수열, 까마귀/이상의 진단서. 그 고공에서의 전지적 엑스선이라는 신의 시선이 근대적 통치합리성의 폭력을 투시함으로써 작성해 놓은 처방전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런 것이다. 숫자의 소멸’. 소멸하는 숫자, 제로에의 의지. 그것은 분명 역사철학적이다. 아니 역사신학적이다. 이상이 상상하고 감행했던 파국의 역사신학(이에 대해선 다음 연재를 참조). 그것이 절대적 제로의 신성한 힘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성을 겨냥한 것인 한, 그것은 분명 정언명령적이다. ‘절대(絶對)에 모일 것.’ 다시 쓴다. 절대에 모일 것. 그렇게 절대에 모인다는 것은 어떤 신성에의 도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절대적 신성으로 고양된다는 것은 세계의 절멸을 예감하고 기다리며 끝내 고지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폭력에로의 육박이다. 다시 말해 절대에 모일 것이라는 이상의 정언명령은 장치들의 항구성에 종언을 선포하는 절대적 시작의 다른 표현이다. “저항과 메시아주의는 모두 절대적 시작이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다니엘 벤사이드, <저항>, 김은주 옮김, 이후, 2003, 45] 절대적 시작의 게발트. 어떻게 끝날지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러 왔다고 했던 건 <매트릭스>의 부활한 네오였다. 그의 메시아성, 시스템에 대한 그 폭력적 파산과 중지의 도래. 엔딩의 이미지를 이상의 데칼코마니된 진단서 이미지들과 다시 한 번 병치시킴으로써 조금 더 말하자. ‘모든 기구(機構)[system]는 연한(年限)이다.’라는 끝의 선포. 그것은 이상의 것이면서 동시에 네오의 것이었다.

 


 


 

위의 이미지는 네오(the One/‘’)라는 메시아적 힘의 시점으로 본 매트릭스의 통치원리이다. 그것은 무작위적 수의 변환과 구획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이상이 <진단 0:1><오감도 4>의 데칼코마니라는 신의 투시도를 통해 통치의 이면과 원리를 수와 수식으로 인식했던 것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수식의 작용을 정지시키는 ‘FAILURE’란 무엇인가. 시스템에 기능부전과 장애와 불이행과 불신임을 도래시키는 힘, 줄여 말해 최고도의 불복종의 지속을 인입시키는 메시아적 힘의 선포. 그것은 절멸의 제로의 고지이다. 네오와 이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발전소의 그 감옥을, 사막 같은 그 실재(the real)를 함께 체감했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동시대인이다. 그들은 신화적 폭력의 시스템을 걷어치우는 신성한 힘을 통해 축적의 동력으로 은폐되고 저당 잡혀 있던 바로 그 실재를 개시하고 해방한다. 그들의 표현은 신의 힘을 정치적 세속화의 강건한 도상 위로 전용하고 전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리 있는 경로들이다. 그들은 기가 막히는 초월적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이 아니라, 정체성의 분할을 통해 축적하는 시스템의 구획선들을 초과하고 위반하는 자들이다. “신은 우리가 물리적인 분리의 한계를 초월할 때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제임스 롤러, <우리가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184] 그들 신인(神人)이 하는 일이 바로 저 절대적 시작이다. 그들의 끝내주는 시작이 바로 절대적 시작인 것이다.

 

7) 근대의 질환을 진단하던 이상은 <진단 0:1><오감도 4> 사이 <각혈의 아침>(1933. 1. 20)에서 약한 목소리로 자신을 가장 不世出의 그리스도”(1-1: 208)라고 지칭한다. 그를 두고 절대의 애정을 갈구했던 한 프로테스탄트라고 썼던 건 김기림이었다. 그에게 이상은 저 노아의 홍수, 그 칠흑 같은 암야를 뚫고 타는 눈으로 절대를 향해 치달아 올랐던 시인이었다. 그 절대란 무엇인가. 다시 물어,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신의 예감을 체현하고 신의 말을 고지하는 자이다.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그는 적그리스도가 설계한 건축체계 속으로 사멸(死滅)의 가나안, ‘도시의 붕락(崩落)’수도의 폐허(廢墟)’를 통고한다. ‘그런다음에는세상것이발아치안는다 그러고야음이야음에계속된다’. 수식화의 관리와 관할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영토는 이제 그 무엇도 발아하지 않는 야음의 지속에 놓인다. 그것이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이미지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그런정도로아펐다. 최후(最後).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최후>) 뉴턴의 사과에서 출발했던 근대의 끝, 그 어떤 정신도 발아할 수 없게 된 최후의 사막.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좀 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물음이 우리들 공통의 질문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초고를 끝낸 지금,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





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