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순응하는 불안

 

소설가  金 飛

 

 

 

 

 

 

 

 

돌아보면, 나 자신도 마찬가지 그렇게 상자 속을 넘나들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런 경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남자' 혹은 '아들'이라는 경계로 호출되면서, 나는 필연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불안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기억에서 지우거나 무시할 수 있는 상실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건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만든 그러한 경계의 안 쪽이 내가 있어야할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어리석었다. 폭력적인 세상의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도 나는 겨우 울음을 터뜨릴 줄 밖에 몰랐던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그렇게 위협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경계를 그었던 권위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일이었다. 이것은 불안한 자아를 가진 인간이 자연스레 자신에게 주어진 체계나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권위에 굴복하며 생존을 꾀하는 방식인데, 위기에 몰렸던 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생존하기 위하여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안의 남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들의 걷는 모습과, 말투, 그리고 행동 양식들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것을 목표로 훈련 계획을 치밀하게 만들어 이행했다. 그들과 똑같은 모습,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속의 보통 사람들과 꼭 닮은 모습이 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믿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내게 주어진 것이란 오직 그것 뿐이었고,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만들어져 하나의 길이 되어버린 곳으로 발길을 옮겼던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그 때에는 그것을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나약한 자아를 가진 자가 가장 쉽고 간편하게 자신의 안정을 꾀하는, '순응'이었던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위의 효력을 극대화하고 통제하기 쉬운,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인간을 생산해내는 제도나 조직을 우리들은 사회 곳곳에서 경험한다. 당연히 불쾌하고 불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가 당했던 일반화의 오류,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떤 경계 안에 편입되었던 자동성,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버린 경계의 안정감, 권위의 달콤함 등을 최고의 인간됨이라고 믿어버린 채, 그것들을 다시 주변의 누군가에게, 특히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에게 추천하여 그들을 자신과 같은 획일화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사회화'라는 이름의 '순응'이다.

'순응'의 습성이란 당연히 모든 종류의 불안을 느끼는 자들에게 해당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경계'로 인해 만들어지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순응을 통해 그 안정감을 도모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경계의 긍정적 의미를 환기시키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경계 안에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며, 그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 위해 경계 속에 순응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경계의 이쪽 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책상 하나를 두고, 쪼그라든 경계를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못했던 남자 아이 쪽에서도, 경계에 순응하기 위해 무수히도 여러 번 스스로를 합리화시켰을 것이고, 쪼그라든 경계를 바라보며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여자 아이 쪽에서도 마찬가지, 그건 여러 번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말해야하는 경계에 대한 순응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계 없는 그 커다란 책상 하나의 넓고 완벽한 안정감은 이미 그들이 가질 수 없는 상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 '순응'의 생존 방식에 성공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순응하는데 실패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을 '낙오자' 혹은 '패배자'라는 또 다른 폭력적인 낙인을 찍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성취자' 혹은 '승리자'라고 선언하며, 우리들 스스로의 안정감을 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성취하고 승리한 세계라는 것 또한 고작 경계 너머를 상실한 불안하고 협소한, 제일 작은 몫이며,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실패나 상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낙오자' 혹은 '바보 같은 패배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였고, 패배자였다. 나는 그렇게 믿었으며 그 사실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았던) 세상이 만들어놓은 '남자'라는 경계 속에 '순응'하려는 노력이 극에 달하면서, 나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려야했다. 날마다 무언가 목을 죄어오는 듯했고, 세상으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거울 속에 누군가 서 있었지만, 그건 낯설고 이물스러운 존재에 불과했다. 그토록 치열하고 열심히 '순응'하려는 노력으로, ''라는 존재는 세상 속에서 '증발'되어버리고 말았다. 남자의 모습으로 대학교까지 졸업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작은 골방에 처박혔던 것은, 영락없이 상자 안에 갇힌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자꾸 움츠러들고 짓눌리면서 나는 조금씩 내가 '순응'했던 세상에게 종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죽음만이 내가 도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경계였다. 그 속으로 파고드는 것만이, 세상이라는 경계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내게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최초의 주체적 결정, 혹은 (자아를 버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자아의 획득이라고 믿게 되었다.

'순응'할 줄 밖에 몰랐던,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자' 속에 갇힌 인간의 마지막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믿음이나 절박함은 또 다시 강박을 만들고, 공교롭게도 그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긋기'의 훈련에 의한 것이었으며, 경계를 긋는 행위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 모두들 믿고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을 그토록 치명적인 곳까지 밀어낸 그 뿌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우리들 자신을 벼랑 밖으로 밀어붙여야할 것만 같은 절박함에, 생의 마지막이자 최악의 강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고.

알코올 중독인 누군가에게는 술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의 문제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안에 편입되지 못한 열패감이고 그것으로 인한 상실과 그에 따르는 우울 때문이며, 자신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극한에 다다른 '강박'일 것이다.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아든 누군가는, 그것이 자신의 삶이나 미래의 풍경과는 그리 큰 관련이 없는, 삶의 옳고 그름에 대한 근거가 절대 될 수 없는 숫자 몇 개의 수치화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극단적인 시도를 서슴지 않게 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경계 안 쪽에만 머물며 내내 안정되고 평화로웠다고 믿었던 그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대'라는 경계로 인해, 그리고 (사실 '획일화'일 뿐인) '성공'이라는 강박으로 인해 앞으로 남은 수 십 년의 가능성의 삶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긋는 경계가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건, 그 어떤 행위보다 폭력적이며 위협적인 건지도 모른다. 그것에 순응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라고 밀어내는 건, 우리들 자신은 물론 우리들의 다음 세대까지 벼랑 밖으로 밀고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존을 위한 것이라 말하며,

우리는 지금도 벼랑 쪽으로 걷고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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