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동-시간의 종은 울리지 않는다

 

 

金 飛

 

 

 

 

 

 

  지하철 하단역에는 부산의 서쪽으로 운행하는 많은 마을버스들이 선다. 보통은 지역마다 예닐곱의 노선, 많아봐야 열 개 남짓의 마을버스가 운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단역에는 21번까지 번호가 붙은 마을버스가 있다. 지역에 따라 숫자를 붙이는 방식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작은 버스들이 서로 다른 번호를 달고 바삐 오가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마을들이 얼마나 많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걸까, 괜히 조바심이 나는 것만 같았다. 마을마다 버스의 크기 또한 달랐고 마을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차림새 또한 달랐으니, 우리가 사는 세계의 다가가기 쉽지 않은 거리감 또한 얼마나 먼 것인지.

  이번에 내가 목표로 한 곳은 강서구의 명지동이었다. 명지동은 이미 남쪽으로 대단지의 신도시가 들어서 있었고 부산 진해 경제 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그에 속하는 건물들과 또 다른 신도시들이 건축 중이었다. 나는 이미 건축된 신도시와 그리고 건축 예정인 또 다른 신도시 사이에, 서쪽 바다의 끄트머리 마을인 '하신'을 목적지로 정하고 하단역에서 14번 마을버스를 탔다.

  여러 개의 비닐 봉투를 든 몇몇 어르신들이 작고 허름한 버스에 올라섰고, 이미 서로 면식이 있으신 분들인지 그들은 버스 안에서 편하게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셨다. 서로 다른 정류장에 내리는 모습을 보니 이웃한 주민들도 아니었던 모양인데 매번 같은 곳을 가는 버스에 오르며 어르신들은 이미 서로 이웃인 모양이었다.

버스는 을숙도를 가로질러 부산의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조용한 시골 마을을 지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버스는 덜컹거리며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황량한 벌판의 아득한 끄트머리에 시멘트 고층 건물들이 들어차고 있었고 버스가 달리는 도로 옆에서도 똑같은 건물들이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마을버스는 양쪽으로 황량한 건축 부지 사이를 요동치며 지나갔다. 과연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을까, 그런 의구심을 가지게 될 즈음 버스는 거대한 건축 부지 옆으로 들어섰고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마을의 집들이 나란히 일렬로 드러났다. 그 중에 한 정류장에 마지막 손님을 내려드리고 버스 기사는 맨 뒷자리에 앉은 나를 흘끔거렸다. '중신'이라는 곳에서 또 다시 버스가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도 내가 내리지 않자 기사는 거울 속으로 내게 소리쳤다.

  "어디 가시오?"

  "하신 가는데요? 이 버스 하신 가는 거 맞지요?"

  "그 마을 없어진지가 언제인데 거기를 간다고 그래요?"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답해놓고 기사는 나를 먼지가 뒤덮인 마을 끄트머리에 내려주었다. 나를 내려주고도 버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알고 보니 그 황량한 곳이 버스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하단역으로 돌아가는 회차 지점인 모양이었다.

  "하신은 원래 어느 쪽인가요?"

  도저히 그대로 돌아갈 수 없어 물었더니 기사는 잘려나간 풀 숲 너머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쪽으로 내려서는데 마구잡이로 파헤쳐놓은 길 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다. 흉터처럼 남겨진 나무 몇 그루가 시퍼렇게 물들어가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버스도 사람도 오지 않는 정류장이 흉물처럼 흙더미 위에 홀로 섰다.

  나는 끊겨진 길을 따라 잘려나간 풀숲을 넘어 또 다른 흙더미 위로 올라섰다. 먼지를 뒤집어썼을지언정 그 너머에 내가 가고 싶었던 마을이, 사람들이 살아있던 그 풍경이 내 앞에 나타나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흙더미 위에 올라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또 다른 황량한 벌판이었다. 어떤 건물의 흔적이었는지 시멘트 바닥이 발아래 썩고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나뒹굴었다. 그 너머에 바다 쪽으로 또 다시 잘려나간 풀숲이 보였지만 더 이상 다가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곳에 버려진 듯 서 있었고,

  모두에게 버려진 마을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온 몸을 휘감는 사이 멀리 풀 숲 속에서 커다란 봉지를 든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혹시나 아직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물었더니 그들은 그저 쑥을 캐러 찾아온 외지인이었다. 그 풀숲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그렇게 허허벌판을 서성거리다가 그대로 돌아 나오고 말았다. 명지동의 그 지역은 바다 쪽으로 다가가면서 상신, 중신, 하신으로 나뉘는 모양인데, 좀 전에 내가 보았던 먼지를 뒤집어 쓴 마을이 바로 '중신'이었다. '하신'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한 쪽에는 공사장을 가로막은 거대한 회색 벽을 두른 채 중신의 평성마을은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듯 고요하게 그곳에 있었다. 과거 어느 시간 속에 열심히 땅을 갈고 곡물을 키웠을 농기구들이 패잔병처럼 회색 벽 아래 놓여 있었고 미래를 꿈꾸었을 작은 나무 주택마저 사람을 잃고 한 쪽이 무너져 있었다. 골목의 끄트머리 녹이 슨 철문 너머로 노란 꽃송이 몇 개가 나를 반기듯 고개를 내밀었지만 허탈하고 쓸쓸한 마음은 쉽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건축 부지 반대편에는 초록의 곡식이 익어가는 벌판이 보였지만 내게는 그저 황량한 세계의 전조처럼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간절히 무언가를 기도했을 교회 앞에 서서 나는 한참을 서성거렸다. 시절도 모르고 푸르게 이파리를 키워가는 나무들을 올려보며 한숨을 쉬는데, 나무들 사이에 커다란 첨탑 하나가 보였다. 그 속에 시커멓게 녹이 슬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종이 있었다. 언젠가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어떤 미래를 위해 마을에 울려 퍼졌을 종소리.

  찍어낸 듯 똑같은 건물들이 높이 들어선 새로운 마을에도 그렇게 종은 울려 퍼질까. 어떤 미래를 떠올리며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져버렸을 사라진 주민들은 지금쯤 그 종소리가 그립지는 않을까. 머지않아 그 아픈 기억마저 사라져버릴 미래 속에 우리는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종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고향이 사람을 지킨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을 지킨 것은 결국 사람이겠지만 새로운 고향 속에서 모두들 사라져버린 마을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면. 시절을 후회하고 참혹해하며 우리들의 손으로 망가뜨린 시간과 그리움들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으면.

 

  헛된 바람을 떠올리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라져버린 시간의 눈물처럼 아픈 비였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금성동-참새와 제비가 사는 마을

 

 

金 飛

 

 

 

 

 

 

  어떤 이름에는 분명하게 환기되는 것들이 있다. '바다'라고 하면 푸른빛 물결과 모래사장이 떠오르지만 우리는 그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잊게 마련이고, 그 바다가 허락한 존재의 시간을 감히 가늠하지 못한다. ''을 떠올리면 반드시 올라가야하는 정상이나 초록의 풍경들을 생각하지만, 진정한 산의 이름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으며 그 어떤 산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기억한다는 것은 망각한다는 것이며,

알고 있다는 것은 곧 모르고 있다는 참혹한 고백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산을 알기 위해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산자락이었고, 익히 알고 있는 마을이 아니라 모르는 마을이었다. 금정산은 부산의 지붕이라 하여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며 17킬로미터의 금정산성이 길게 뻗어 있어 일 년 내내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분주히 오고가는 명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금정산이나 금정산성이 아니라 그 산 자락에 파묻혀 길게 뻗어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이 바로 내가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찾아간 금성동이었다.

  금성동은 크게 공해부락이라고 알려진 공해마을과 죽전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 죽전마을로 향했다. 금성동 주민센터에서 버스에서 내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정산을 향해 산성 쪽으로 올라간 반면 나는 그들에게서 홀로 떨어져나와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정산과 금정산성을 찾는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카페들이 커다란 간판을 드리우고 있는 너머에, 주민들의 마을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꽃 한 송이와 악어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금성초등학교의 교문이 보였다. 초등학교에 들어서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던 것은 운동장 한 켠의 스탠드를 빽빽이 채운 아이들의 그림이었다. 보통은 다양한 이름의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채워넣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곳엔 아이들 스스로가 예술가가 되어 자신들의 그림을 빼곡히 채워넣고 있었다.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꿈을 목격하는 일은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초등학교를 빠져나와 나는 마을의 바깥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벽에는 무수히 많은 낙서들이 포개져 시간의 문양을 만들어 놓았고, 양지 바른 곳에 내어놓은 의자 옆에 엄마의 심부름을 하는지 여자 아이 하나가 쓰레기봉투를 내어놓다가 나를 보았다. 외지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텐데도 아이는 스스럼없이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나도 아이에게 '그래, 안녕?' 말해주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인사 한 번으로 나는 환대라도 받은 듯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봄꽃들이 흐드러지는 봄날 한 낮인데도 어느 집의 굴뚝에서는 새 하얀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뜨겁게 데워져야하는 시간이 필요한지 새 하얀 구름과 뒤섞이며 그 풍경은 묘하게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들이 박혀 있는 비탈에 세워진 허름한 집과 그 건너편에 새로 지은 근사한 전원주택은 괜스레 들뜬 마음을 시리게 했고, 나는 산비탈에 위태롭게 세워진 집 쪽으로 다가가려고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다시 돌아내려왔다. 나의 발걸음이 그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남루한 시간이 반드시 악몽은 아니란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앞에서 멀리 사진 몇 장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또 다른 골목을 가로지르며 나는 새로 지어진 주택들과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허름한 집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을 보았다. 똑같이 소중한 시간을 지나온 그들의 현재가 서로에게 상처나 쓸모없는 박탈감을 주지 말았으면, 나는 그렇게 엇갈리는 풍경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꾸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켰다. 다행히 빼꼼히 열린 허름한 집의 문틈 속에서 어느 가족은 봄 햇살을 받으며 여유로운 점심 식사를 나누고 계셨다. 그 정겨운 시간에 폐가 될까 나는 그 집 대문 옆에 나란히 달린 문 두 개를 사진 속에 담고는 또 다시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쪽파를 심은 화분 몇 개는 줄을 맞춰 나란히 몸을 말리고 있었고, 새로 지어진 연립의 벽에는 똑 같은 모양의 계량기가 다른 숫자를 턱 밑에 새기고 나란했다. 아무리 서로 다른 시간을 건너왔더라도, 우리의 미래나 희망의 간극은 그토록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더라도 결국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겠구나.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버린 골목을 다시 거슬러 내려오면서 나는 어느새 모두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웃이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 다시 등산객들이 분주한 큰 길을 건너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사슴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공존의 이미지를 새긴 난간이 보였고, 누군가 벽에 그려넣은 여러 가지 시구절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 '제비가 철새고 참새가 주인인데, 제비가 참새를 죽일 수 있겠소.' 하는 구절은 이곳에서 일상의 삶을 지어가는 그들의 바람이자 믿음처럼 읽혔다. 아무리 달라지고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바람,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이 오래도록 계속 이어지리라 믿고 싶은 그들의 믿음.

 

 

 

 

 

 

  종점인 죽전 마을 정류장에서 나는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벚꽃이 흐트러진 가로수길을 따라 공해마을로 가니 일찍 부지런을 떨었던 등산객들이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남문 정류장에서는 또 다른 무리의 등산객들이 버스에 몸을 실었고 자신들의 특별한 여정을 기억하느라 그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고불고불 이어지는 금정산 산자락을 따라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향했고, 맨 앞자리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던 나는 어리석게도 하늘 속에서 참새와 제비가 나란히 같이 나는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름이 없는 하늘을 훼손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의 터전과 유영을 존중하며 즐거이 노닐 수 있는 광경을. 그러나 속상해선지 부끄러워선지 자꾸만 내 얼굴은 붉어지고 있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사도의 윤리란 무엇인가?

 

 

오영진

 

 

 우선 윤인로의 작업에 대해 비평을 하기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이상이나 김수영같은 작가는 한국문학연구자에게 일종의 해석학적 쟁투가 벌어지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전자는 특유의 난해함과 수수께끼로 이루어진 ‘미로’로서, 후자는 무엇이든 떼어 잘라먹을 수 있는 ‘먹기 좋은 빵’이 풍부한 ‘곳간’으로서 말이다. 말하자면 ‘이상’연구는 21세기를 넘어선 지금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힐리스 밀러라면 이것이야 말로 탈출 불가능한 텍스트의 미로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해석을 거미줄에 얽혀 있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으로 은유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해석은 오히려 그 거미줄에 또 다른 줄을 첨가하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해 미로를 탈출하기는커녕 미로를 건설하게 된다. 비아냥이 아니다. 문학해석학의 무한한 동력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상은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지칭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詩는 절멸의 시대에 던지는 메시아의 메시지로 이해된다. 이는 그와 기독교 표상 간 문제를 다룸에 있어 ‘이상’이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배치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상의 사도로서 그 계보 속에 무의식적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수많은 이상의 사도들을 보아왔다. 시인 이상이 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복원하여 복음으로서 전달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아온 이들의 역사를 연구사 검토라는 이름으로 마주한다. 윤인로의 글에도 이러한 사도들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는 이 계보 속에 놓이게 되는가? 이 점에서 윤인로의 작업의 의미가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해석학이 아니라 윤리학으로서 ‘이상’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윤인로’라는 사도의 윤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2회연재분). 읽기 행위는 감응을 통해 존경심뿐 아니라 책임감을 낳는다. ‘이상’을 읽고 난 후 우리는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니까 ‘이상’의 텍스트는 수수께끼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서 작동한다. 바흐친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미하일 바흐친,『예술과 책임』, 『말의 미학』, 길, 2006. p. 25.)

 반면, 이러한 언급은 어떠한가?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서 풍자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상문학이 1930년대라는 시대를 타고 넘어서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이다. 이제 남은 일은 페가수스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일이다. (중략) 이상을 20세기 1930년대로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된다.”(정정호, 「이상시의 “이상한 가역반응”」,『비평문학』제 38호, 2010. p. 503.) ‘이상’의 사도들은 왜 ‘이상’을 보편-세계문학으로 위치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는가? 그리고 왜 이 작업은 자신의 불행이 아닌 식민지 근대, 아니 나아가 근대성 전체와 싸웠던 메시아가 되는 방식으로만 이상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같은 태도야말로 ‘이상’이 제기했던 질문을 의미 있게 반복하는 일을 막는다. 단지 센티멘탈한 ‘이상’을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상연구에 있어 ‘순교’라는 레토릭을, ‘원한’을 제거해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령제를 지내지는 말자는 말이다.

 다행히 윤인로는 ‘이상’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상’을 경유해 ‘지금’-‘여기’를 바라보려 한다. 그는 ‘이상’의 ‘도주’에 대해 말하다가도 ‘김진숙’의 ‘점거’에 대해 논한다. 이 둘은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 난데없는 침입이야말로 ‘이상’이라는 문제제기가 온당히 반복되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가 ‘이상’을 파국의 지형도 속에 넣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고, 초인의 시선을 부여하고, 절멸이자 구원의 시를 노래하게 하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것이야말로 어디까지 오염된 것인지도 모르는 후쿠시마의 방사능과 프레카리아트들의 불안과 냉소, 냉전질서의 반복조짐, 부정선거의 음모 등이 난무하는 ‘지금’-‘여기’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도의 윤리란 신의 말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반복시키는 일에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까마귀가, 엑스레이의 투시가, 예수 아니 바울이 다시 필요한 것이다.

 시인들은 종종 성인의 페르소나를 사용한다 자신의 시집을 ‘새로운 성경’이라고 부르며 사랑의 이미지를 주조한 월트 휘트먼의 ‘예수’, 지천명의 윤리 속에서 자기성찰을 꾀한 김수영의 ‘공자’, 시인이란 세계를 주유(周遊)하며 보살피는 ‘석가’나 ‘수운’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역설한 신동엽이 그렇다. 이들에게 성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자기이해 그리고 그로 인해 세워지는 새로운 “도덕질서의 이미지”(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음, 2010. p. 49.)까지 포함한다. 윤인로는 이상에게 ‘예수’의 페르소나가 있으며, 이는 세계의 파국을 목전에 직감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작동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의 부스러기를 구원하자는 목소리가 아니다. 대신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수행한다. 그는 근대의 속도를 제어하기보다는 가속화한다.

 그런데 이 속도는 빛의 속도를 지향하고 급기야 제로로 향한다. 먼 과거를 불러들여 마취시키는 ‘향수의 시’가 아니라 미래를 가속화시키는 ‘미래의 시’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속도에 중독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속도를 제로로 돌리기 위해 되려 빛의 속도를 지향한다. 폴 비릴리오에 의하면 원형의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달리는 일은 실상 정지상태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지는 빛의 속도와도 같을 것이다. 윤인로가 논하는 ‘도주-속도’와 ‘점거-정지’의 변증법은 이런 논리에서 성립하는 듯 보인다. 마리네티가 속도의 미학을 통해 윤리를 사상시켰다면, 이상은 속도의 윤리학을 통해 미학을 부숴버린다. 윤인로에 의하면 이러한 파괴가 시인에게 ‘장래’에 대한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하고 강제한다. 즉 아름다움이 아닌 책임을 안긴다.

 또 이러한 자기소멸은 도착적인 죽음충동이 아닐 것이다. “갈갈이 찢어진 사도의 몸이 법을 기립시키고 재정초하는 장소”(5회 연재분)가 되기 때문이다. 각혈에 물든 이상의 몸은 병리학적 대상이 아니라 “분만된 보석”이 매번 거듭 탄생하는 장소인 것이다. 여기에 작동하는 메시아의 윤리는 아버지-신의 명령을 따라 죽어야 할 운명에 직감하고 체념한 일이 아니다. 윤인로에 의하면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윤인로는 시인 이상에 대해 속도중독이 아닌 초속도-정지로, 도착적 죽음충동이 아닌 (반복적으로) 도래할 역사의 기다림으로 그 이해의 축을 변경하고 있다. 이는 이상 텍스트 해석학에 한 조각을 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인로의 글은 시인 ‘이상’의 문학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한 비교연구 같은 것도 아니다. 특정한 종교적 표상이 작품 속에 반복되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대신 임박한 파국에 맞서는 윤리적 주체를 ‘이상’을 통해 고민해보는 일은 중요하다.

윤인로의 글은 해석학의 놀이가 아니라 윤리학의 명령을 수행중인 것이다. 대체로 윤인로의 기획에 동의를 하는 듯 보이는 필자의 글은 그러나 그 모자란 만큼의 차액을 내놓기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오영진 : 현대시를 연구하면서 동시에 문화론으로도 그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최근엔 당대의 감정의 구조같은 것을 포착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문화평론가(잡지 쿨트라2014 봄호 데뷔), 수유너머N 회원, 인문학협동조합 교육복지위원장

 

 

 

 

 

 

 

 

prologue, 바깥, 서성거리다, 만나다 

 

 

 

소설가 金 飛

 

 

 

 

 

 

생각해보면 언제나 누군가의, 어딘가의 '()'이 그리웠던 것 같다. 따스하고 훈훈한 공기 속에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이 있는 집 안, 정다운 친구들이 웃으며 맞아주는 학교 안, 사랑한다고 더듬거리며 두 팔을 벌리는 누군가의 품 안.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살던 고향집은 방 안에서도 자리끼가 꽝꽝 어는 낡고 버려진 집이었고,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학교 안에서 나는 언제나 그들과는 다른 '이방인'이었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의 품에 안긴 것도 겨우 마흔이 되어서였고.

언제나 바깥을 서성거리는 느낌은 거대한 바다에 던져진 것만 같다. 아니면 사람들이 꽉 들어차 앉아있는 광장 속에 벌을 서듯 혼자만 두 팔을 들고 서 있는 느낌이거나. 안에서 들어오라는 손짓도 조롱처럼 느껴지고, 어서 여기 앉으라 내미는 자리도 그래서는 안될 것만 같은 불편함이다. 그럴 필요 없다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더욱 더 고립을 부추기고, 말없이 건네오는 손길조차 진심의 표피처럼 징그럽기만하다.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으니 그 시절의 소외가 추동시킨 것들을 담담하게 나열하고 있지만, 어디에도 나를 내려놓지 않고 부유한 채 살아가겠다는 고집은 그 시간들의 흉터인지도 모른다. '담담하다'고 말해놓고 심장 밑이 찌르르 아파오는 것을 보면, 어쩌면 나는 그저 평온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듯하고.

 

어딘가의 안쪽은, 그렇게 언제나 바깥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곳에 내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오랜 생활을 이어가던 경기도에서 부산에 내려온지 이제 만 2년이 지났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부산이 아닌, 부산의 외곽도시 양산에 자리를 잡았지만 나는 어차피 양산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부산의 근처라고 이야기해야한다. 내 소설 '빠쓰정류장' 속 주인공인 '리브'가 용문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결국 양평의 근처라고 말해야했던 것처럼.

게다가 대부분의 모임들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부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보니, 부산은 양산이라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보다 훨씬 더 가깝다. 고백하자면 일일이 설명해야하는 것이 귀찮아 아예 '부산'이라고 얼버무리고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토록 부산이라는 이름은 명치 끝에 얹힌 밥 한 숟갈처럼 언제나 나에게 생각의 몸을 뒤척이게 했다.

부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래서 더욱 간절해졌을 것이다. 매일 부산에 가면서도, 어딘가 내가 미처 만나지 못한 부산의 얼굴이 존재할 것만 같은 기시감은 2년 넘게 부산을 오가면서도 매번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만들었다. 지하철에 앉아서도, 버스에 올라서도 창 밖에 지나가는 풍경들은 여전히 낯설고 그래서 설렌다.

물론 나는 짝지(''을 말하는 경상도 사투리이자, '지팡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다. 물론 우리 커플이 서로를 부르는데 쓰는 말이기도 하고.)의 손을 붙들고 두어 번 갈맷길을 걷거나 못 가본 관광지를 다녀보기도 했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구들에게 부산을 소개시켜주기 위해 안내인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가 부산의 온전한 속살을 마주했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어차피 내가 마주한 것은 나와 똑같은 관광객들이거나 스스로의 정체성은 숨긴 채 열심히 걷고 있는 누군가, 혹은 그들 앞에 뻗은 무수히 많은 길들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없는 것을 기다리며 혹은 찾으며, 이렇게 애타게 부산이라는 이름을 연거푸 중얼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부산을 알고 싶다. 부산을 만나고 싶다. 부산이라는 이름을 휘장처럼 두른 번쩍거리는 곳이 아니라, 부산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숨결이 화석처럼 새겨진 곳들에 (괜찮다면)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고 싶다. 물질 문명이 쌓아올린 시대, 자본과 돈이 중심이 되어버린 시대. 어쩌면 사람들은 주목받고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바깥으로 밀려나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닌 물질의 화려함에 이끌린 우리들에게, 소외되고 버려진 바깥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더욱 절실히 필요한 뉘우침의 시간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부산의 중심이 아니라, '바깥'을 서성거리기로 한다. 화려하고 번뜩이는 마천루의 풍경들이 아니라 모두들 등지고 서있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고자 한다.

 

몇 개의 마을이 될지, 내가 만나게될 시간이 어떤 모습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나는 기껏해야 괴상한 취미를 가진 관광객들 중에 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최대한 그들의 삶을 훼손하지 않으며 누군가 쏟아버린 물자국처럼 시커먼 바닥 위에 흩어졌다가 잠시 잠깐의 햇살 속에 말끔하게 말라버리고 말겠다. 매번 들고다니던 카메라도 내버려둔 채, 이번에는 작은 휴대폰 카메라에 그곳의 모습을 담을 생각이다. 그만큼 사진의 품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겠지만 벽 위에 남겨진 누군가의 서툰 낙서가 때로는 그 어떤 명화보다 아름답게 보이듯, 나는 나의 흐릿하고 모호한 기록이 부산이라는 도시에, 풍경에, 그리고 그 속에 삶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넉 장 혹은 다섯 장의 사진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내게 허락한 것임을 겸허히 깨달으며 부산이 살아있는 부산의 '바깥'으로 짧은 여행을 시작하고자 한다.

 

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남쪽나라.

그 바깥에는 내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20096월 부산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

 

 

 

 

 

 

 

에필로그, 살아남는 법을 생각한다. 

 

 

 

소설가 金 飛

 

 

 

 

 

 

 

 

  나는 살아남는 법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삶의 대의를 위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싸우며 스스로의 삶을 일으키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여전히 나의 생존만을 고민한다. 날마다 나를 위협하는 이 세계와 그리고 여전히 모호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는, 존립 자체를 흔드는 나의 정체성으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내가 아닌 나를 만나고 내가 아닌 나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나는 너무 자주 말을 잃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생존을 꿈꿔야 한다. 꿈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서 만나야 한다.

 

  나는 흔들리고 위태로운 존재들을 위해 이 글을 썼다. 고작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생명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의 삶을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를 빗대어 어쭙잖은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경계 위에 살 필요가 없었던 누군가에게 이 글은 자의식 가득한 개인적 서사에 불과할 것이며, 보다 큰 뜻과 의미를 지닌 삶을 목표로 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뻔 한 말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마저 매일 환기해야 하는 생명들을 알고 있기에, 까치발을 딛고 경계 위에 살아야 하는 존재들을 알고 있기에.

 

  인간적이지 않은 삶이어도 상관없다. 정의롭거나 희망에 가득 찬 삶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가슴 속으로 들고 나는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우리들의 생은 폄하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될 당위를 지녔다.

 

  여러 가지 형용할 수 없는 위협과 불안으로 짓눌려있는 생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칼끝 같은 당신의 삶 위에 꼿꼿이 서는 묘기를 보여주기 바란다. 당신의 발에서 흐른 피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으로 발아래 그려지기를 바라고, 당신이 외치는 비명이나 절규가 토해지고 토해져 한 권의 신음으로 세상 속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들의 값 비싼 서가에 꽂혀 끝내 외면당하더라도 당신들의 삶이 선뜩하게 어딘가에 남겨지기를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당신의 불안을 모르거나 강박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헤아리지 못한다더라도, 당신이 밟아가고 있는 그 시간의 칼날들은 그 어떤 생의 시간보다 또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당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조차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입을 크게 벌리고 온몸을 찢으며 당신을 집어삼키고 있는 아픔을 쏟아내시라. 목이 끊어져 그 자리에서 갈가리 흩어지더라도, 볼썽사나운 꼴로 엉엉 울며 그곳에 몇 개의 살덩이로 조각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당신의 삶을 토하라, 외치라, 절규하라.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당신의 삶을,

  당신만이라도 사랑해야겠기에.

  거기, 살아있는 당신이 바로 사랑이기에.

 

  불안으로 흔들리는 당신을 알고 있다. 강박에 짓눌린 당신을 알고 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롭고 고독한 생을 알고 있다. 고독하다는 말조차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당신의 시간을 알고 있다. 아름답고 찬란한 문명으로 갈가리 찢겨버린 당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 흉측한 세상의 말로 얼굴을 가리고 혼자서 엉엉 울고 있는 당신을 알고 있다.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워한 언어임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부끄러운 것이 글이어서, 나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뻔뻔스러운 나를 기억하기로 한다. 나의 생존이 곧 세상의 희망임을 새기며, 이 글의 마지막을 적는다.

 

  돌아볼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태로움일 것이다. 사무치게 고독하고 외로울 때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는 근원을 스스로 지워버린 내게, 삶은 날개 없는 비상을 닮았다. 날마다 뛰어내려야 하는 추락일 것이다. 떨어져 내려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면 낙화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질 것이며, 흔들리는 것이 나의 미래라면 온몸을 뒤틀며 세상에 없는 춤을 출 것이다. 무엇으로든 나는 그곳에 반드시 생존할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어디에서든 낮은 곳으로, 가장 밝은 곳으로부터 등을 지고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고독한 당신의 걸음은 곧 인간을 향한 걸음이다. 어떤 색의 발자국이든 누군가 뒤따를 수 있는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꼬리를 물며 이어질 우리들의 생존에, 나 또한 찬사를 보낸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날들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정일의 시 '지하인간' 에서

 

 

 

 

 

 

 

 

 

제17화 해체 (3)  

 

 

 

소설가 金 飛

 

 

 

 

 

 

 

 

 모두가 말하듯이, 결혼은 사랑의 도착점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따라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어쩌면 순진하게도) 결혼이라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모성의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고독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삶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나마 누군가와 함께 그 고독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다가 다시 또 홀로 죽음이라는 삶을 마무리하는 고독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에 대한 그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 어떤 제도나 사회적 제약이 있건 없건, 어차피 모든 결혼은 사랑이라는 몸체를 지녔고 그 나머지는 그곳에서 뻗어나온 무수히 많은 부수적 논쟁이나 논란일 것이다. 21세기의 결혼 앞에 사랑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결국 모든 결혼이라는 관계가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와 현실이 아무리 그것을 농락하려고 해도, 사랑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또 하나, 혼란 속에서 경계 위에서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가난'이다. 어쩌면 '가난'이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득세한 이 시대를 환기할 때 가장 치명적이고 위태로운 현실을 일깨우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어차피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고 있기에 인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 물질문명의 자본주의 세계는, 그래서 계속해서 '인간'이나 '사람'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은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지만 나는 그러한 '가난'의 풍경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한다.

 

 가난하다는 말은 자본의 시대에서 도태되어 있다는 선뜩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가족중심주의의 한국 사회는 서로 주고받으며 자본과 부를 대물림한다. 결국, 가난의 운명은 쉽게 전복되지 않으며, 사회나 시대에 대한 박탈감은 더욱더 그러한 숙명을 지닌 개인을 억압하게 마련이다. 거기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린 교육 현실이 가난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교육을 통해 계층 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은 단순히 계층의 대물림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는 말은 이 시대의 잔혹한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가난'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참으로 맞춤인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는 인간,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는 없는 인간. 도태되고 소외되어 홀로 떨어진 자유로운 인간. 물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가장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시대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인이 자본이라는 세상의 틀을 벗어버리고 오롯이 개인의 인간됨을 사유하고 그것을 확장하여 소외되고 버려진 인간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척박한 사회가 도착하게 될 미래의 어느 어두운 모퉁이에 생명의 빛처럼 내리쬘 수 있는 고귀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나 스스로도 내 생각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판타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던 나의 가난을 떠올리며 나는 왜 그때의 그 가난에 매몰되어 있기만 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물네 시간을 정신없이 짓누르는 가난한 일상이 나의 사유와 고민의 여유마저 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난 속에서 인간을 사유하고 생을 사유하는 일이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리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가난에 짓눌려있던 그 시간이 가끔 몸서리치도록 후회스럽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정체성이라는 혼돈을 짓밟고서,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의 가치 있는 생을 살기 위해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면,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 피어난 경계 위의 꽃처럼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가난해도 괜찮은 삶을 꿈꿀 수 있었을 텐데.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인간을 깨우치는 삶을 받아들여, 평생 가난 속에 묶여있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공존하는 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의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가난은 숙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을 매몰시키는 증거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계 위에 서 있는 위태로움은 때로는 탁월한 균형감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기도 한다. 생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최악의 조건이나 환경도 삶의 마지막이 아니며, 그곳은 또다시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부여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어느 것이든 '예술'에 흠뻑 몸을 담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엄청난 돈을 들여 '예술'이나 '예술가'를 사고파는 시대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의미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 예술 또한 모든 인간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향유하는 그 중심일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돈이나 물질에 기댈 필요는 없는 것일 테고.

 이 잔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의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난이 농락되도록 허락하지 않으며, 가난과 고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앞에 예술로 탄생시켜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 척박한 현실을 뚫고 일어선 기적의 풍경일 것이다.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시련의 한가운데일수록 그렇게 태어난 나를 위한 예술품들은, 그 어떤 화려한 자본의 생산품보다 뼛속까지 나를 위로하는 고마운 생의 선물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모두 가난하다. 자본의 유무, 혹은 부의 크기에 따라 가난을 가늠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 만족하는 부유함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가난의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난이기도 하고 또한 결핍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결핍되어있기에 공존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할 테고.

 그러므로 나는 인간은 반드시 가난이나 결핍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거나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이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사유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지켜야할 것이다.

설령 그 속에서 그 어떤 예술이나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물며 그 안에서 인간이나 삶을 건져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가난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결핍이나 가난은 분명히 위로되고 위안받게 될테니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바로 나의 삶이 있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아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결핍과 가난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에.

 

 

 

 

 

 

 

 

 

 

 

구원에 대하여

윤인로 선생님의 <차생윤회>에 덧붙이는 글

 

 

심 미 영

 

 

인간은 절망한다. 더 깊이 절망한다. 절망이 곧 삶이고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삶을 존속시킨다. 구원받고 싶다. 구원은 없다. 절망 가운데 구원을 생각한다. 카프카의 짧은 글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남자처럼 우리는 법의 문 앞에서 영원히 들어가길 기다리다 그렇게 죽어 사라질 존재. 희미한 형상으로 남아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사실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것으로 쓰러질 안타까운 모두.

이상의 차생윤회(此生輪廻)를 보며 동시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윤인로 선생님이 언젠가 수업 시간에 설명한 부분 중 하나.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도둑놈 중 한 명이 구원받은 동시에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는다. 지독한 생의 굴레. 혹은 그야말로 차생윤회.

 

블라디미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블라디미르의 물음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측정한다. 복음서를 쓴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12.5%가 된다. 8분의 1의 구원 가능성과 8분의 7의 절망.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이 1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 사실 1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이 물음과 이상의 차생윤회(此生輪廻)를 병치시킨다.

 

(3,6), (9,4), (5,3) 등과 같이 모눈종이 위에 하나의 점으로 표상되는 삶들. 계산 가능해지고 하나의 오차없이 추적 할 수 있는 삶들.

 

()과 율()의 조절적 관리 및 정비를 통한 통치 환경의 최적화 상태 속에서, 다시 말해 안전 메커니즘속에서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다버리게 되는 사람들, 이른바 인구.

 

구획 가능하고 측정 가능 한, 숫자로 환원되는 삶. 이름하야 우리는 인구. 인류라는 이름을 지우고, 인구라는 이름표를 가슴팍에 붙이고서, 01 사이를 오가며, ()을 진단한다. 그 속에 포함될 수 없는,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삶을 경멸한다. 하나의 좌표로 내 생의 위치를 점찍고 그 점에서 다음 점으로, 또 하나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렇게 생은 연속된다. 그러므로 삶은 피로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는 건 피로하다. 목표가 없는 삶을 사는 것(좌표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3,6)이라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음 (9,4)로 나아가기까지 우리는 8분의 7의 절망 속에서 8분의 1이라는 구원을 꿈꾼다. 삶은 숫자다. 구원은 확률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사실 그 무엇보다 사는 게 무섭다. 또 공포다.

이상도 그러한 공포를 마주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모든 중간들은 지독히도 춥다.”는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윤인로 선생님은 그 중간이 폐기된 결과가 차생윤회라고 했지만, 중간을 폐기하고 무너진 이상에 나는 더욱 몰입한다.

 

하루 종로를 오르내리는 동안에 세 번 적선을 베푼 일이 있다. () 기록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한푼 받아들고 연해 고개를 끄덕이고 꽁무니를 빼는 꼴을 보면서 네 놈 덕에 내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알기나 아니?’하고 심히 궁한 허영심에서 고소하였다. 자신 역() 지상에 살 자격이 그리 없다는 것을 가끔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를 먹여 살리는 내 상부구조가 또 이렇게 만족해하겠지하고 소름이 연 쫙 끼쳤다. 그때의 나는 틀림없이 어떤 점잖은 분들의 허영심과 생활 원동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꾸멀꾸멀하는 거지적() 존재구나 불이 번쩍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 차생윤회)

 

나는 거지에게 적선하며 너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나 또한 저 거지와 다를 바 없이 누군가 자신 때문에 사람노릇 한다는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내가 타자를 동정하는 동시에 나는 타자가 되어 동정받는다. 그 공포. 결국 거지적 존재로 밖에 살 수 없는 비루먹을 삶. 그래도 나는 거지보다는 나은 인생을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위안이 결국 나를 향한 화살이자 괴로움이 된다. 자본의 절대적 힘 아래 비호를 받는 자가 돼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비웃던 거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는, 지독히도 추운 중간. 그 추위를 비단 이상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세대, 현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그 중간에 있으니까. 결국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다버리게 되는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구원과 절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최근 구원이라는 키워드에 빠져 산다. 이따금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의 종착엔 항상 절망밖에 없다. 이렇게 살 바에야 목을 매겠다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말에 나도 목을 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살고 싶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구원을 믿고 싶다는 말이다. 절망과 구원 사이에 끼여 생을 연명한다. 절망 가운데 다시 구원을 믿는다. 12.5%의 구원에 대한 확률이 아니라 01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그 구원을 믿는다. 믿고 싶다.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3년 소설창작연구회 회장

심미영

 

 

 

 

 

 

 

 

 

 

제16화 해체 (2)  

 

 

 

소설가 金 飛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 안에 갇힌 스스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대물림'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탄생으로 인해 주어진 생활환경과 삶은 인간을 꼼짝없이 어떤 한계 속에 몰아넣고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폭력과 억압의 상처를 지닌 개인은 가족 안에서의 소외로 인해, 가족 중심 사회인 이 세계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소외되고 도태된다. 모든 것을 가족의 탓이라거나 가족을 중심으로 미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는 세계는, 당연히 존중받고 축복받아야 할 한 개인의 삶을 꼼짝없이 묶어놓고 만다.
  이러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삶을 시작하는 불운한 개인은 일찍이 자신의 삶을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탄생 자체만으로도 이미 '삶'이라는 축복을 지닌 채 세상에 나왔다. 그것이 억압되고 폭력적으로 환기되며 그러한 현실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냉정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을 지닌 가족이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결국 가족이라는 그 출발점은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며, 아득히 보이지도 않는 그 출발점을 자꾸 돌아보며 주춤거리는 일은 스스로의 삶을 옥죄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깨우치며 지지받는 스스로의 삶을 인식하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해체이며 또한 진정으로 존중되어야 할 '가족'의 의미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가족 중심 사회는 결국 해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중매체에 끝없이 오르내리는 가족주의에 대한 맹신은 결국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머지않아 깨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가족주의의 재생산이 미래에 스스로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오히려 편협한 사고방식을 주입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깨우치면서,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직면하게 될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흉터를 닮은 관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애정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공존과 공감의 의미이다. 이 사회가 가족보다 더 커다란 공존으로 인해 유지되고 발전해 나아가며 그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는 개인이 탄생하고 성장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일깨우는 일이, 이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를 환기해야 하는 단 하나의 남겨진 가치일 것이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아마도 결혼이라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 삶의 전환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제도 속으로의 편입.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미 다양한 사랑의 형태로 혹은 가족의 형태로 도전받아왔고, 또한 앞으로도 무수히 도전받게 될 것이다. 


  최초의 결혼은 당연히 생존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즉 필요 때문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수컷의 번식 욕망과 결혼이라는 제도의 관련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었지만, 그리고 또한 결혼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주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시대 혹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 근거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예속되기 위하여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합당한 필요조건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결혼은 왜 필요한가? 번식 욕구라거나 신분상승이나 재산증식의 욕망이라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목적과 똑같은 요건들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그것이 아닌 사랑이라거나 삶의 안정감 혹은 친밀한 유대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혼이라는 제도의 의미는 달라진다. 전자를 목적으로 한다면 결혼이라는 것은 진정 투쟁하며 경쟁하듯 싸워내야 할 테고, 후자가 목적이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두 사람만의 교류가 그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기 위해 결혼을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분명히 어떤 것은 주가 되고 또 다른 것은 부가될 텐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최초의 감정에 의해 발화되는 판타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이든 결국 시간이 지나며 잃어버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던 건 아니었는지.
  결혼하게 되면, '책임감'이라는 게 생긴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근거해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 책임감이라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생겨난 책임감이라는 건 어쩐지 주체적인 에너지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주체적인 힘이 아닌 타의적인 힘에 기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결핍된 삶을 맞이하게 될 증거가 아닌가?
  어쩌면 현대 시대의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이 개인의 힘으로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적인 인격체가 만나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목표가 결핍된 채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처음부터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 되어버린 한국의 결혼 제도는, 어쩔 수 없이 불안요소들을 껴안은 채 판타지에 기대어 삶을 배팅하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을 시도하는 것인 건지도.
  물론 그 모든 불안 요소들을 견디며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결혼한 당사자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이상적인 가정이 존재할 수도 것이다. 그것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 또한 옳은 일은 아닐 것이고.
  그러나 결혼 상대를 물색하며 가장 많이 내세우는 조건이라는 '보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참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성소수자라는 개인으로써 그것은 달성할 수 없는 지점이기는 하지만(당연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결국 그것 역시 소외를 양산하고 인간을 획일화된 틀 안에 묶어놓는다는 차원에서 과연 그것이 그들의 말대로 이 다양한 인간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근원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결국, 가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 또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해체라는 숙명 앞에 서 있다.

 

  토플러에 따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핵가족 시대를 넘어서, 새롭게 이름 붙여야 할 가족과 결혼의 시대 앞에 다가와 있다. 동성애 부부는 물론이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기대지 않고 파트너쉽을 유지하는 부부들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새로운 가족과 결혼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하니, 분명한 것은 기존의 가족과 결혼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목전에 도달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족의 존재 의미가 '유대'와 '소통'이었던 것처럼, 결혼의 존재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그 중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고. 飛  

 

 

 

 

 

 

 

 

 

제15화 해체 (1)  

 

 

 

소설가 金 飛

 

 

 

 

 

 

 

  해체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지닌 이들에게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존재로, 불안한 존재로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경계성은 무엇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경계 안으로 포섭함으로써 모호하고 흐릿한 존재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나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 사람들은 나의 외향만을 두고 나를 하나의 성별로 규정했지만, 내 안에는 내가 아닌 내가 존재했고, 그것은 내가 아닌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해 억압된 나였으며,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내 삶의 존재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잘못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간단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또한 결국 하나의 인간을 유린하는 부족한 수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혼란은 언제나 내 삶의 일부였다. 유년기 시절에는 외부의 세계로 인해, 그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무지했던 내가 혼란스러웠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내 몸이 남성으로 성장하면서 도망치거나 숨어들 수도 없는, 즉물적 혼란이 내 삶을 짓눌렀다. 오직 생존 하나만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세상이 알려준 경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나 자신과 싸웠고, 그것이 오히려 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혼란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를 둘러싼 혼란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더욱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태어나 사는 세계로부터 농락당한 배신감은 나를 더욱 이기적이고 지독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야 나는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살게 했던 생존의 방식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운 존재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나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던 외부의 세계가 뻔뻔스럽게도 나를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미 깨닫고 있다. 그것 역시 '나'라는 한 개인을 무책임하게 남용하는 이 세계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혼란이나 혼돈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생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를 해체해야 한다.

 

  이 세계 안에 살지 않고, 내 안에 살고자 한다. 모든 세상의 선언들을 불신하며, 질서와 규칙을 나의 이름으로 다시 부여한다. 언어를 조합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선뜩하고 눈부신 언어로 다시 조합한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생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규정되고 조작된 인간이 아닌 알몸의 인간으로 세상과 마주 서야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는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나와 관계를 맺었던 인간들과의 만남을 해체하고자 한다. 나를 닮은 인간, 나와 유전자적 조직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 나의 생존에 앞선 그들의 생존 방식이 어떠했든 '가족'이라고 부르는 통칭의 사람들은 나의 생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렇다, '도움'이다. 나는 그것을 '가족애'라던가 '혈연'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움'이라고 간략화시켜 버렸다. 물론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는 그것을 '천륜'이라거나 심지어 '본능'이라고 말하며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의 개별화된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면 그 한계까지 다가가, 가족이라거나 혈연이라는 관계를 유연하게 농락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부인할 수 없는 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나도 내 가족들과 공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일란성을 경험했고 또한 앞으로도 더욱더 자주 그것을 깨우치게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유전자적 일란성까지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말이다. 유전자나 핏줄이란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똑같은 덩어리 몇 개의 산물일 뿐, 그 속에 개인을, 개인의 삶을 묶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나의 생존에 기여한 '도움'을 잊지 않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미래 어느 순간으로 기약하면 되는 것일 뿐 그들과 나의 개별성을 일찍부터 깨우쳐야 하는 것이, 우리와 같은 혼란과 불안 속에 사는 인간들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첫 번째 해체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족의 힘이나 그 중요성에 관해 너무도 자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입하고 있지만, 그것은 파편화된 세계를 지양하기 위해 개인적 삶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환기한 결과일 뿐, 오히려 인간이 개별적인 스스로 삶을 인식하고 가족의 틀 안에 갇히지 않은 채 그것을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 독립된 삶을 영유해 나아간다면, 그것이 오히려 가족이나 혈연 안에 갇힌 사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건강한 사회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미 가족주의와 혈연에 집착하며 더욱 폭력적이 된 세계를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격하고 있으며, 집착적으로 언론이나 대중매체가 환기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분명 과격하게 들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안온하고 평화로운 가족 안에서 건강한 사상과 생각을 교육받으며 자란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볼 때면 참으로 고맙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감상이 떠오르기는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이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가족의 해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오직 자기 자신의 가족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들의 행복만을 기원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너무 많은 가족들의 모습은 오히려 이다음 언젠가 집단 이기주의의 원형을 양산해낼 수도 있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도 가족은 없었다. 유전자적 일란성을 공유하고 있는 혈연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족'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자주 망설여진다.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가지 이유로 해체된 가족의 구성원들은 버려지거나 혹은 누군가를 저버린 것으로 인해 필요 없는 죄책감이나 상실감으로 자기 자신을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사회가 앞장서서 그러한 불안과 혼란의 정서가 마치 당연하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사회에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가족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하나의 마을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지금의 가족은 개별화되고 단절된 채 섬처럼 서로 괴리되어 있다. 그러한 파편화된 사회를 한탄하며 부정적으로만 환기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기존의 가족의 개념, 가족에 대한 이해를 근원적으로 다시 재고해 가족을 가진 사람이든 가족을 갖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소외되거나 폭력적으로 환기되지 않은 채 정당한 개인의 삶을 추구하고 유지할 수 있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족은 없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족으로 보살피고 아껴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탄생과 결부된 사람들의 최초의 '도움'을 잊지 않으면서, 내 가까이에서 나의 생존을 돕고 나와 함께 삶을 일구어나간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에게는 귀하게 여겨야 하고 존중해야 할, 진정한 나의 가족이다. 

 

  가족은 그렇게, 재정립되기 위해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혈연으로 묶인 몇몇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그 경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오가야 하는 공존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족이 해체되었기에 인간의 개인화 혹은 사회의 파편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혈연 중심주의에 묶여 있기 때문에, 혈연의 가족이 아닌 다른 의미의 가족을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생존하는 법을 외면하고 있기에, 이 사회의 파편화는 더욱 지속하고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飛

 

 

 

 

 

 

 

 

 

 

(design by 김비)




4회: 이상과 바울

 

 

 

 

 

 

윤인로

 

 

1

 

기존 세계의 끝이자 다른 세계의 시작인 새벽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것. 앞선 「오감도 7호의 묵시적 최후, 그 끝에 붙인 이상의 표현으로는 천량(天亮)이올때까지”(1: 61). 새벽, 천량. 이른바 어떤 서광. 벅차게 밝아오는 그 빛을 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리아의 수탉이며, 그 울음소리이다. 이상은 씨네포엠의 형식을 가진 대낮(‘건축무한육면각체연작 중 하나)에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ELEVATER FOR AMERICA/ / 세 마리의닭은화문석의층계이다. 룸펜과 모포(毛布)/ / 삘딩이토해내는신문배달부의무리. 도시계획의암시/ / 둘째번의정오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워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있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태양군(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시인/ 꼭끼오./ 순간(瞬間) 자기(磁器)와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1: 79)

 

파편화된 이미지-컷들의 점프 혹은 변주 속에서 의미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아메리카는 이상이 말하는 동경, 뉴욕, 런던과 같은 근대의 한 정점을 가리킨다. 엘리베이터는 그런 아메리카를 향해 수직으로, 그러므로 직선으로 상승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 기계학, 과학, 수학의 메타포다. 이와 함께 빌딩, 신문, 도시계획, 룸펜 등의 단어들이 단일한 의미망을 이루고 있다. 이상의 대낮은 근대의 대낮을, 근대의 그 벌건 정오를, 근대의 벌거벗은 정점을, 줄여 말해 근대성의 나신(裸身)을 문제시한다. 그런 시선에 「날개」의 결말부에 나오는 정오 싸이렌이 맞닿는다. “이때 뚜하고 정오 싸이렌이울었다. 사람들은 모도 네활개를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것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2: 290) 유리, 강철, 대리석, 지폐, 잉크는대낮의 신문, 빌딩, 엘리베이터, 미국, 도시계획과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 이 계열 곁에 이상이 말하는 이 있다. 날지 못하고 퍼덕이고만 있다. 백화점 상품진열대에서 이상이 맡았던 비누향 또는 비누거품으로 청결히 세척되고만 있다. 그런데 이상은 그런 닭들이 개미집에 모여서 콘크리트를 먹고 있다고 쓴다. 그 개미집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그 개미집이다. 이른바 수정궁또는 ‘2×2=4’의 합리적 세계, 그것이 개미집이다. 유리와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수정궁이라는 개미집, 그 근대적 건축, 건축적 근대 속에서 그 건축의 일부인 콘크리트를 파먹고 있는 이상의 닭, 고지하는 닭/시인. 그 시인은 항시 얼룩고양이 같은 아웃사이더로 태양군의 틈새를 쏘다니고 거닌다. 근대적 대도시를 환히 밝힌 태양의 빛들이 더 이상 내려쬐지 않는 시공간들을, 그 빛의 군집 바깥을 찾아 쏘다니는 시인. 그 시인/반신(半神)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으로 말미암아, 개미집의 붕괴와 최후를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꼭끼오’, 바로 그 순간. 이상은 그 순간의 고지에 의해 근대의 대낮을 보증하는 태양과는 다른 태양,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혹은 자기와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고 적었다. 이상의 수탉은 근대의 대낮을 중지시키는, 자기로 된 태양의 출현을, 새로운 새벽의 도래를 고지한다. “삽짝문을나설라치면언제어느때향선(香線)과같은황혼(黃昏)은벌써왔다는소식이냐, 수탉아, 되도록순사가오기전에고개숙으린채미미한대로울어다오, 태양은이유도없이사보타아지를자행하고있는것은전연사건이외의일이아니면아니된다.”(1: 49) 이상에겐 근대의 정오/정점, 그 대낮의 극한적 현란은 이미 벌써 황혼을 맞아 잦아들거나 누그러들고 있다. 이상이라는 까마귀는 그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 그런 황혼 속에서 근대적 현란의 극한을 최종의 징후로, 끝의 기미로, 형질전환의 임계로 인지하는 이상이라는 수탉이 그 순간 고지의 울음을 운다. ‘부활의 때가 갈리아 수탉의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라고 했던 건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다르게 비상시키려 했던 청년 마르크스였다. 이상은 수탉을 불러 말한다. 미미하고 미약한 상황 그대로 울어달라고. 이상은 새로운 태양, 새로운 광속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세력, 새로운 태양의 사보타지를 획책하고 사주하는 세력, 줄여 말해 을 영원히 유보하는 전()-종말론적 힘의 연락망을 수탉의 사건적 고지를 통해 파열시키려 한다. 이상의 수탉은 조종소리로 운다. 그 울음이 자기로 된 태양을 발생시킨다. 자기 혹은 질그릇은 바울의 어휘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마음속을 비추시어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후서, 4: 6~7)

 

이상이라는 불세출의 그리스도’, 그의 얼굴은 여기는 폐허다라는 문장(「자화상」)으로 표현된바 있다. 자기로 된 태양은 그런 폐허에서 발생하고 출현하는 절대적 신성을 인지하도록 이끄는 밝은 빛이다. 이상과 바울에겐, 이상이라는 사도에겐 그 빛이 바로 보물이며, 그것은 질그릇속에서만 간직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보화, 보물에 대한 한 가지 주석은 다음과 같다. “[보물이란 사건 그 자체, 즉 너무도 불안정한 어떤 일이 일어났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그것과 동질적인 불안정함 속에 겸허하게 지녀야 한다. 세 번째 담론그리스도교은 약함 속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그것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고스도, 표징도,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의한 황홀경도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담론은 자체의 실제적인 내용 말고는 아무런 위세도 없이 공공연한 행동과 가식 없는 선언이라는 초라한 투박함만을 가질 것이다. (…) 질그릇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107쪽]깨지기 쉬운 자기로 된 태양()은 이른바 진리(가 개창되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 사건적 진리란 불안정함과 위기, 위태, 줄여 말해 약함의 속성 안에서만 발생되고 관철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약함의 보존이다. 교조화되고 경화된 혁명의 담론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을 통한 다른 목표의 수행에 방점을 찍는다. 그때 혁명은 언제나 매개적인 것으로, 궁극의 목적달성에 비추어 늘 예비적이고 수단적인 것으로 전치되고 전락한다. ‘약함이란 그런 단순한 매개와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거절한다. 약함은 그런 수단적 지위를 항상적인 불안정과 위기 속에 놓이도록 한다. 약함은 혁명을 혁명 그 자체의 보존과 지속으로 관철시키려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약함 속에서 완성되는 사건, 그 진리공정의 신학정치에 관해서는 윤인로, 철탑 아래로 도래중인 것2013720, 울산의 기록」, 격월간 말과활2(201310~11월호)를 참조. 그 약함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고 사기그릇이다. 그 약함이 바로 질그릇 속에 간직된 신성의 빛이며 사기그릇 속에 보존된 새로운 태양()이다. 그 빛들은 목적-수단의 위계를 부숨으로써 목적의 군림 속에서 이뤄지는 이윤축적을 중단시키고, 목적/율법에 의해 동원되고 환수된 힘들을 되돌려 회복시킨다. “바울에게그리고 이상에게] 그리스도는, 혁명을 정치적 진리의 자족적인 시퀀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래이다. 그리고 기존의 담론 체계들을 중단시키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즉자적으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우리가 율법에서 풀려나는 것이 그것이다.”[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97 도래중인 그리스도, 그리스도라는 도래. 다시 말해 율법화된 레짐으로부터 매일 매회 놓여나고 풀려나는 시공간의 개창 혹은 임재. 이를 위해 보존해야 할 것은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안의 보물, 그 약함, 그 게발트이다.

 

 

2

 

다시 한 번, 대낮을 찢는 닭의 울음소리를 인용하자. ‘꼭끼오./ 순간 자기와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 이번엔 방점을 순간(瞬間)’이라는 시어에 찍으려 한다. 닭의 울음, 바로 그 고지의 순간은 이상이 말하는 도래중인 나의 역사신학을 관통하는 시간감, 별안간’ ‘바야흐로’ ‘금시에’ ‘불원간’ ‘미구에등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이상의 순간이란 한 체제의 통치이성이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제작해내고 신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려는 과정을 중단시키는 때이다. 순간또한 바울의 어휘다. 바울? 그렇다, 사도 바울. 하지만 바울과 이상이 말했던 그 순간이란 바울과 이상의 폭력적 이면을 되겨누는 것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린도전서, 15: 51~53)

 

우리 모두가 잠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 깨어있는 자들, 이른바 메시아의 초병들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최후를 고지하는 마지막 나팔소리가 답파하리라는 것. 그 양각나팔(Shofar)의 음파 혹은 주파 속에서, 다시 말해 그 순식간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은 변신과 전환의 임계에 육박한다. 위의 52절은 위기의 특징들을 표현하고 있다. “52절은 모든 시간을 종적(縱的)으로 파기하며 돌입하는 이 위기의 주목할 만한 특징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나눌 수 없는 순간().”[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전경연 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60] 복창한다. 나눌 수 없는 순간, 분할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순간. 나눌 수 없다는 건 느낌과 사고와 행동의 을 지배적 힘의 입맛에 맞게 분절하거나 할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시간으로서의 순간이란 해질 수 없는 시간이며, -바깥(으로)의 힘이며, 그 계산불가능성으로 추동되고 준동되는 시간이다. 바울과 이상의 순간은 그렇게 끝내 환원되거나 환수되지 않고 끝까지 잔류하고 잔존하는 잔여와 잔당의 시간, 끝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순간은 유혈적 셈법의 체제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시간이다. 억제되거나 억류될 수 없는 그 차이의 시간 안에서, 매회 끝을 선포하는 지금-여기가 개창된다고 했던 건 마르크스의 독자/상속자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들의 순간은 모든 분절되고 할당된 시간들, 그 위계적 질서를 종적으로내리치고 파기하며 돌입하고 있는 폭력적 위기로서, 지고의 주권적 게발트로서, 이른바 부활의 사건으로서 장전되고 있다.

 

그런 위기의 두 번째 특징은 갑작스러움이다. 뜻밖에 갑자기, 이른바 홀연(忽然)의 시간. ‘-이라는 것은 합의되고 합성된 의미들의 연락망 바깥을 말하는바, 그 바깥이라는 제헌적/구성권력적 성분에 의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하고 산 자들은 변신한다. 부활과 변신, “그것은 다른 역사를 뚫고 그의 길을 가는 구원사이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60~1] 뚫으며 답파하는 구원사(救援史). 이상의 최후작에 속하는 종생기에는 나는 날마다 운명하였다.”(2: 368)는 문장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매회 죽었다가 매번 다시 깨어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상에게 종()과 생()은 한 가지로 반복된다. 첫 소설 십이월십이일에는 만인을위한신은엄슴니다 그러나 자긔한사람의신은누구나잇슴니다”(2: 116)라고 말하는 ’, “만인의 신! 나의 신! ! 무죄!”(2: 120)라고 외치는 그가 있다. 그는 이상의 분신 중 일부이며, 인제죽을때가도라왓나보다! 아니 참으로사라야할날이도라왓나보다!() 이제야 최후로 새우주가 그의앞에는전개되엿든 것이다.”(2: 146)라는 문장 속의 인물이다. 그렇게 이상 소설의 처음과 끝은 최후적 심판과 부활의 이미지로 관통되고 있다. 이상 문학의 주조음으로서의 구원사적 성분.

 

위의 52절이 표현하는 위기의 세 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셋째: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 이것이 이 위기의 결정적 표징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나팔소리는 명령의 신호이다!) () 실로 잠정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만 예비적 경고조가 아니라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즉각 출발과 순종을 촉구한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61쪽] 바울의 마지막 나팔소리, 신이 원하기에 신의 절대적 명령으로 발효되는 그 지고한 징후 및 신호는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조종소리와 고지하는 닭울음소리, 더불어 이상이 발하는 여러 최후적 정언명령들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바울과 이상의 묵시적 대음향들은 대지를 구획한 법의 할당된 권역들을 싸그리 일소하는 위기로서 종적으로 내리쳐진다. 그 위기의 음들, 리듬들, 파문들은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폭력, 절대적이고도 지고한 주권으로 즉각 대지의 법륜을 갈아 끼워지도록 촉구하고 강제한다. 바울과 이상, 그들 두 사도가 중시하는 순간이란 바로 그렇게 내리치는 위기/묵시의 힘이며, 그런 한에서 그 힘은 또 하나의 순간, 지금(Jetzt)’의 시간과 만난다. “인식 가능한 지금[Jetzt] 속에서의 이미지는 모든 해독의 기반을 이루는 위기적이며 위험한 순간의 각인을 최고도로 유지하고 있다. () 이 지금 속에서 진리에는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Ⅰ』,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1056 바로 지금’, 다시 말해 정초되고 보존된 기왕의 법계를 폭발 직전에 끌어다 놓는 진리-시간, 이상이 말하는 금시(今時)’바야흐로의 시간. 그것들은 위기적 순간들로 각인된 시간, 그 각인이 최고도로 유지, 지속, 보존되는 시간, 이른바 파루시아의 시간이다. 이 완성, 모든 죽음의 소멸은 그리스도의 최고, 최후의 주권 행위다. 아직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126 복창한다. 아직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

 

파루시아, 임재의 사건은 완수되거나 완성되지 않고 매번 그 완수와 완성을 부결시키고 부정하는 아직 아닌(not yet)’의 시간으로 도래한다. 파루시아의 사건은 언제나 이미 자신의 기각과 기소로 도래하므로, 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매번 직전(直前)에 있는 것이다. 직전에 있고 미-래이므로 바울과 이상은 기다린다. 저 닭울음소리에 뒤이어진 새벽빛 천량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을 고요한 내적 수양이나 마냥 엎드린 기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이란, 기다림의 메시아 정치란, 눈앞에 이미(already)’ 도래해 있는 임재의 사건과 각성의 시간을 꽉 붙잡고 파지한 채로, 그 사건의 완성과 완수를 매번 기각하면서 그 파국적 사건성을 최고도로 지속하려는 항구적인 기도(企圖)이다. 이상의 그런 신학적/정치적 기도는 불안의 정조가 흐르던 성천의 깊은 밤, 「산촌여정」의 한 문장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공기는수정처럼맑아서 별빗만으로라도 넉넉이 조와하는 누가복음도읽을수잇슬것갓슴니다.”(3: 45) 왜 「누가복음」인가.

 

 

3

 

임박한 임재, 도래중인 끝. 그 임박함, 그 도래를 표현하는 두 복음서의 두 문장은 이런 것이다. 이른바 때가 찼다.”(「마가복음」, 1: 15)라는 한 문장과 이상이 별빛 아래서 읽고 있었던 곧 끝이 오는 것은 아니다”(「누가복음, 21: 9)라는 한 문장. 때가 찼다는 건 이미에 이어진다. 아직 끝이 온 게 아니라는 건 아직 아닌에 이어진다. 성천의 이상은 때가 찼다고 말하는 마가의 그리스도를 따라 삶을 지닌 모든 것은 모두 피를 말려 쓰러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3: 203)라고 적었다. 그것은 누가의 계시록, 곧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 합의된 가치체계가 때가 이르면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누가복음, 21: 6)고 했던 누가의 그리스도와 맞닿는다. 그런 한에서, 지금 이상은 마가와 누가가 공동으로 그려놓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그 두 복음서의 을 향한 공통적 시간감 속에 들어있다. 그러하되, 바로 그런 시간감을 문제시하는 것이 곧 끝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누가복음이고 이상은 그런 누가복음을 좋아한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일소되리라는 말에 곧바로 이어진 문장들을 보자.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좇지 말라”(누가복음, 21: 7~8)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때가 찼다고 말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외투를 입은 적그리스도. ()에 의해 설계된 상황을 구제의 상황이 아니라고, 임재가 아니라고, 도래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시간, 시간들. 임재 안의 반()-임재, 도래 안의 비-도래를 항구적으로 판별하고 결정하고 각성해내는 순간, 순간들. 이상에게 누가복음은 그 시간 그 순간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성천의 이상은 (내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화평이 아니라 불을 던지고 분쟁케 하려는’(누가복음, 21: 51) 신적 힘의 발생을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 “[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 49)라는 아직 아닌의 상황 속에서 목격하고 경험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 이미 안의 아직, 아직 안의 이미. 파루시아의 상황이 발생하는 때가 그와 같다. 바로 그 때, 그 파루시아의 힘은 끝을 영원히 유예하고 지연시키는 자들과, 그 유예를 통해 축적하는 자들과, 다시 말해 그들의 체제, 그 전()-종말론적 레짐과 항구적인 적대에 돌입한다. 바로 그 항구적 적대의 전장(arena)을 보존하고 지속하는 일. 그것이 기다림의 메시아 정치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3: 215) 기다린다는 것의 뜻과 의지가 그와 같다. 이미와 아직 사이로 도래중인 새벽, 천량, 서광.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 주권을 함께 관철시키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다는 문장을 여러 번 사용한다. 썩을 몸이 다시는 썩지 않을 구원을 입으리라는 것, 죽을 것이 불사의 시간과 부활의 사건을 입으리라는 것도 그런 옷 입음의 신학에 이어진 것이다. ‘왜 오늘 바울인가라는 물음에, 바울 의인(義認)론의 구체적 실천 현장의 중요성과 그 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성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답하고 있는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바울의 옷 입음론을 두고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바울 식의 옷 입음론은 보는 이보이는 이라는 이분법을 가정하고 있다. 한데 자신이 보이는 이라면, ‘보는 이는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언정 결코 자신과 대면할 수 없는 존재, 곧 타자다. 그이는 실제로는 무한정의 거리에 있다. 그이는 실제로는 우리와는 결단코 유사해질 수 없는 전지전능의 존재다. () 하여 그런 이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이의 은총(charis)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이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순종(hypakoe)을 의미했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바울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바울의 신학은 전능한 보는 이앞에서의 삶의 수동성을 내포한다.[김진호, 「죄론과 시선의 규율권력, 리부팅 바울』, 삼인, 2013, 230

 

문자로 된 유대주의의 율법이 내면을 만들었을 때, 신은 인간의 그 내면성과 죄업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는 보는 이의 시선으로 그 인간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보는 이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보이는 자로 모듈할 때, 다시 말해 보는 이의 시선에 자기 의지의 격률을 동일시하고 순종할 때, 그는 선민(選民)이 되고 죄인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은 회당 체제 안의 유대인, 자유인, 남성이 자신들의 신성한 권리를 옹립하기 위해 이방인, 노예, 여성을 하위의 주체들로, 타락한 죄인들로 배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른바 유대주의의 죄인-선민 메커니즘’. 이를 적으로 설정하고 비판하기 위한 방책이 바울의 옷 입음론이었던바, 그것이 실은 적의 논리와 생리를 내재적으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게 김진호의 생각이다. 보는 이와 보이는 이의 날카로운 분리 속에서 자기의 옷 입음을 주시하는 보는 이의 시선에 자기를 일방적으로 동일화하는 삶. 바울의 논법이 생산한 삶이 그와 같다. 적과 단절하려는 의지가 적을 반복하게 하는 상황. 적을 극복하려는 기도가 적과의 내밀한 연루 속에서만 관철되고 있었던 실황. 그 곤혹과 곤욕. 바울의 옷 입음론은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주체 생산의 매커니즘을 배태하고 있었다. 삶에 외재적으로 주어지고 시혜되는 은총, 삶과 무한정한 거리로 이격되어 있는 신, 삶과 완벽하게 분리된 초월적 신성, 다시 말해 대면할 수 없는 신, 붕 뜬 신. 지상의 의미연관을 거세한 구원, 지상의 고통에 눈감는 전지전능. 그것들이 삶을 수동적인 것으로, 항구적인 하위의 것으로 제작해낸다. 그리고 거기에 파시즘의 운동원리가 있다. “파시즘은 바로 이런 신성화된 권력의 순응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개념이다.”[김진호, 죄론과 시선의 규율권력, 231 이상이 말하는 살신(殺神)에의 의지가 바로 그런 신성화된 권력의 작동에 소송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다시 전면에 내세워야 할 이상의 텍스트는 이상 자신의 곤혹스런 이면 혹은 정면 차생윤회」이다. 거듭 인용했었던 그 텍스트의 핵심어들을 상기해 주셨으면 한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표를 한 장 만들면 다음과 같다.

 

 

바울

이상

마지막 나팔소리

고지하는 닭울음소리

순식간/홀연히

순간/바야흐로

부활/불사

날마다 운명함, 살아야할 날이 돌아옴

옷 입음론

초인법률초월론

복종적 주체 생산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광인, 전염병자, 주정꾼, 걸인

신성화된 권력, 파시즘

모종의 권력, 일제학살, 결단적 우생학

「고린도전서」, 15: 53

「차생윤회」

 

 

이렇게 두 번 질문하자. 이상은 불세출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자인가. 이상 안에서 이상 자신의 그 옷 입음을 응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상은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이다. 그 옷 입음을 주시하는 그 보는 이의 시선-권력은 법률을 초월하는 이른바 초인의 것이다. 지금 이상은 그 초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모듈하고 동일시하는 중이다. 「차생윤회영웅적 결단(英斷)’을 통해 법-바깥을 개시하는 초인의 힘에 이상 자신을 오차 없이 포개는 과정의 폭력적 속성을 노출한다. 우생학적 결단, 일제학살. 다시 말해 피, , 정상과 병리의 분리, 광기에 들리고 술에 절고 불로(不勞)에 빠진 자들의 거대한 일소, 최종적 절멸. 그런 초인의 권력이 모종(某種)’의 것인 까닭은 그 권력이 이상 자신 안에 있는 초인의 것이면서도, 실은 이상 자신이 결코 마주하거나 만날 수 없는 무한정한 거리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동일시하려는 자기 안의 초인은 끝끝내 그런 동일시를 수락하지 않는다. 동일시는 항구적으로 유예되며 대리보충된다. 그 과정에서 이상은 지상에서의 자기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이격된 초인의 볼모가 된다. 붕 뜬 초인, 지상에 부재하는 초인의 전지전능은 모조된 구원을 선포하면서 그 선포에 동조(同調)되는 힘으로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삶을 생산한다. 이른바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은 그러므로 일조일석에 싸그리 말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항구적으로 양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상은 자신이 했던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 속에서 이상의 초인은 위조된 구원의 체제, 곧 살아있지 않아도 좋을 인간들을 동력으로 옹립되는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설계하고 제작한다. 그때 구원(Erlösung)은 절멸(Endlösung)과 등가적이며 등질적으로 된다. 구원은 분명 절멸과 동시적이어야 하지만, 그 절멸이 이상의 초인에 의한 절멸일 수는 없다. 오늘 근대라는 체제로부터의 구원은 분명 절멸과 동시적이어야 하지만, 그 절멸은 이상의 초인이 살해되는 상황 속에서의 절멸이 아니면 안 된다. 차생윤회의 이상은 근대라는 체제에 보증을 서면서 구속되어 있는 볼모이자 죄인이다. 죄수 이상은 수인(囚人)이만들은소정원」에서 이렇게 적었다. “()를내어버리고싶다. 죄를내어던지고싶다.”(1: 153) 속죄, 죄로부터의 속량. 그것은 자신이 봉헌하는 자기 안의 초인에 대한 동일시를 중단함으로써 초인의 그 시선-권력을 절단하는 일에서 출발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중단, 그 절단의 힘은 이상의 무엇에서 발생하고 발족하는가. 그 힘은 이상의 권태, 권태의 신학정치에서 발원하고 발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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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연재를 마치며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6회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애써주신 웹진 <아프꼼>의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안다고 믿고 싶지만, 그 앎이 저의 단선적인 앎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충격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충격을 완충할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충격에 섬세하게 파괴될 수 있는 생활의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학위논문에서 부분적으로 뽑아낸 단락들로 연재를 이어간 것이라 비약이 심했을 터입니다. 글 전체를 읽어주십시요, 라고 무릅쓰고 부탁드리고 싶은 까닭은 비약의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해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글 전체에 산재해 있을 다른 문제들의 증폭과 증여를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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