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밉고도 고마운 짓

 

 

 

 

소설가 金 飛 

 

 

 

 





  L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가 어느 날, 두터운 붉은색 코트를 둘러 입고,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고 내게 찾아왔다. 평소 사람들 속에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여러 가지 다양한 관심들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고, 또한 쓰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던 그였는데, 아직도 여전히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았는지, 잔뜩 주둥이를 내민 채였다. 분명 작년에 내가 소개해주었던 그의 여자친구 R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싫다, 됐다, 하는 놈을 억지로 끌어다가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 앉혀놓으니, 언제 싫다는 이야기를 했었냐는 듯, 그는 처음 만나던 그 자리에서 서로 사귀기로 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참 어려운 둘이 만났으니 골치 꽤 아플 거로 생각했는데, 자기들끼리 무슨 거사를 치렀던 건지, 그다음 달에 둘이 함께 찾아와 서로는 분명히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사랑에 감사하고, 삶에 감사하고, 그리고 나를 예언자라도 되는 듯 추켜올렸다.

 

  가장 좋았던 것은 소통이라고 했다. 그토록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사람은 처음이라 이야기하며,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낯간지럽게 바라보면서, 쓰다듬고 조몰락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가 들어맞기는 단단히 들어맞은 모양이구나, 내심 벨이 꼴리면서도,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좋은 일이라도 한 것처럼 한동안 기분이 좋았는데, 지난여름부터 이것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찾아와, 서로에 대한 미심쩍은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데다가, 둘 다 참 다가서기 쉽지 않은, 생각 많고 내밀한 성격인 걸 알고 있었으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서는 아무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이것들이 만만한 내 앞에만 오면 통성하는 날나리 신자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쏟아놓았다.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첫 마디는,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줄 알았는데...'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나온 삶, 사랑, 그리고 복잡하고 사연 많은 가정사까지 모두 털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물론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서로의 마음에 깊숙이 가닿고 싶다고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속에 담긴 말들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잘 모르겠어.'였다. 그들이 이야기한 삶과 사랑과 그리고 가족 이야기 중에는 이따금 나까지도 깊이 감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한 번도 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서로서로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사이라 믿었고, 자신들의 소통은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유연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가고 싶은 미래는,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거기는, 가만히 듣고 보니 서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저 다른 단어를, 다른 표현을, 다른 몸짓을 이용해 자신들의 미래와 희망과 행복을 말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그들은 끝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언성을 높여 싸우기만 하고는, 이내 나를 찾아와 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곤 했다.

 

  똑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면서, 서로 전혀 다른 곳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답답하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쏟아놓은 말들은 전혀 달랐지만, 그래서 종종 그건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말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R은 몇 년 동안 독일로 유학을 갈 생각이고, 그의 남자친구 L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주체적이고 생산적인 자신의 미래를 찾아 어디론가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 할 것 같다 이야기했다.

 

  결심이 필요했다. 그들의 결심이 아니라, 나의 결심이었다. 이미 서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소통도 이루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알고 있다.'는 자신의 영리하고 명민한 지식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만큼이나 쓸모없는,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나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그들의 중간에, '전달자'의 역할로 섰다. 그리고 그동안 서로에게 들었던 말들을, 듣게 되는 말들을 상대방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똑같은 말이었지만, 서로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때로는 없는 말들을 보태가면서, 쓸모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몸짓의 언어들은 지워가면서, 최대한 서로가 받아들이기 쉬운 말을 이용해, 서로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을 전달하였다. 때로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방이 진실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지, 서로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입을 통해 전달되는 상대방의 말들을 차분히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자신들의 마음속에 전해지는 똑같은 바람, 똑같은 사랑, 혹은 똑같은 마음을 확인하고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고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반성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 만났을 때, 그들은 이제 또다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그런 두 사람이 되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서로의 이야기들로, 서로 상대방이 자신을 위로하며 어루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내가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어.' 따위의 말들은 당연히 단 한 번도 전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서로, 그런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마저 헤아려주는, 참으로 고맙고 품이 너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테고.

 

 

  어떤 관계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말을 전달하는 일이란, 십중팔구 욕먹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욕먹는 걸 두려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을 맞붙여놓고, 고래고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만 소리 질러 이야기하다가, 등을 돌리게 내버려두는 일 또한 옳지 않다.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어,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이 중간에 선 자의 임무일 터.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이더라도, 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어 서로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하는 해피엔딩을 위한 목표라면, 아무리 엉뚱한 말들을 자기 마음대로 덧붙이고 빼는 얄미운 짓거리라도, 결국 그들은 고마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 !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해두는 말인데, 나에게는 L이라는 친구도, R이라는 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사랑 문제 때문에 왈가왈부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내 지랄 맞은 성격과도 어울리지 않고. L은 내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사랑의 예언자: 에리히프롬의 생애>의 저자,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iedman)의 첫 알파벳이었고, R은 독자(Reader)를 의미하는 첫 알파벳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결국 독자와 저자 두 사람 모두 헤피엔딩으로 마무리 될 수 있는, '얄밉고도 고마운 짓'이 되기를 바라고 있고.

 

 




사진: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iedman)의 <사랑의 예언자에리히프롬의 생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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