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전환의 두 얼굴

 

소설가  金 飛

 

 

 

 

 

 

 

 

  그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생의 전환은 아주 달콤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왔던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짓눌리다가,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는 행위는 그 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너무도 또렷하고 선명한 해답처럼 느껴진다.

  오랜 기간의 직장 생활을 통한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또한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에 짓눌려 너덜너덜해진 자아를 가지게된 누군가는, 당장 그 회사를 그만두고 한적한 동네의 모퉁이에 작지만 향기로운 카페 하나를 갖는 극적인 전환만이 자신의 삶을 일으키는, 늦었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히 필요했던 완벽한 생존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라고 믿게 된다.

  결혼이라는 판타지가 허물어지고 육아와 가정이라는 현실에 시달리는 주부라는 이름의 누군가에게, 혼자서 마음껏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재단하는 싱글 여성의 모습, 혹은 오직 자신의 꿈만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독신 여성의 모습은 결혼생활이라는 분주하고 어지러운 현실을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며, 또한 전환일 것이다.

  부모의 억압과 속박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는 가출이, 책임과 구속이라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짓눌려있던 누군가에게는 싱글의 삶이 자신을 구원해줄 생의 '전환'일 것이며,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고시원을 돌며 전전긍긍하는 실업자에게는 4대보험이 보장되는 근사한 기업으로의 취직이,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한 모태솔로들에게는 누군가와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기분을 가져보는 일이 자신의 지루한 삶을 구원해줄 유일한 '전환'일 것이다.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위에서 나는 여러번 반복해서 '전환'이라는 구원의 방식을 말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맞물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전환이 삶의 구원이고, 억압되어 불안한 시간들을 지워줄 수 있는 탈출구라고 말했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전환들은 이상하게도 서로 반대 쪽에서 이어져 있다. 서로의 전환이, 바로 누군가가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불안이고 또한 억압이었다는 사실. 서로의 억압이고 불안이었던 경계 안 쪽이, 바로 누군가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전환의 그 한 가운데였다는 사실.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이란, 처음부터 그렇게 두 얼굴을 지녔다. 언제나 우리는 한쪽 얼굴만을 바라보며 그 반대편을 상상하지만, 거기에는 이 쪽을 상상하며 갈구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우리들을 경계 안으로 몰아넣고 억압하던 영악한 세상의 권위는, 끔찍하게도 이것을 다시 자신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더욱 공고히하는 근거로 악용하기도 한다. 어차피 경계의 너머도 여기 너희들이 서 있는 경계의 안 쪽처럼 똑같은 반 쪽의 상실이며 불안일테니, 경계를 넘으려고 애를 쓰는 행위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괜한 시도라고 단언하면서, 야비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이자 또 다른 층위의 억압을 설득한다.

  기다란 책상 위에 선 하나를 그어놓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좁고 답답하다고 느끼게 되었던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두 사람 모두는, 어느 순간 과감하게 '전환'을 시도하며 서로 자리를 바꾸어앉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상대방의 공간이 더 넓고 자유로우며 전환으로 내가 얻게 된 공간은 여전히 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모든 각오와 용기를 끌어모아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란, 결국 그렇게 단 하나의 절대적 위로이자, 또한 그렇게 반드시 마주해야하는 위협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전환은 너무도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달콤함 정도가 아니라, 그 동안 홀쭉했던 내 자아의 어딘가를 포만감으로 가득 채우는 경험이었다. 웅크렸던 몸을 펴고 나는 마음껏 세상을 질주해 다녔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기 위하여, 나는 머리를 길렀고 화장을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예쁜 화장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화장품을 가져다가 발라보기도 했다. 예쁘고 화려한 치마를 입어보기도 하고, 높은 구두를 신어보면서 거울 속에 비춘 내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완벽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여성스러운 말투와 몸짓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여성스럽지 못한 것들을 내 안에서 짚어내고 그것들을 지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연습했으며, 내 걸음걸이와 행동들의 어떤 부분이 여성스럽지 않은지 일일이 따져가면서 '여성'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의 몸짓을 흉내내느라 나는 적잖은 땀을 흘려야했다.

  얼굴이 너무 큰데, 코가 너무 작은데, 그리고 눈도 너무 작잖아? 여성스럽지 못한 것들을 내 안에서 발견할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소스라치며 그것들을 지우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성형수술을 해야하는 건 아닐까, 큰 키는 수술을 할 수도 없는데 어쩌지? 나는 어느 순간 전전긍긍하며 어떤 것들에 쫓기고 있는 나 자신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 뿐만 아니라,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보다 더욱 더 심한 본능적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채찍질하며, 세상이 그어놓은 또 다른 반쪽의 경계 너머로 나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거기는 또 다시, 불안을 지우려고 여러번 그었던 반대쪽의 경계 안 쪽이며, 결국엔 잔뜩 쪼그라든 상자였다. 나는 어느새 필사적으로 내가 빠져나왔던 그 상자 속으로 천천히 다시 걸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환은 그렇게 다른 얼굴을 내밀며 우리들을 유혹한다. 멀리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작정 아름다워보이는 자연적인 섭리를 이용해, 전환은 가장 먼데 있기에 가장 거부하기 힘든 유혹으로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앞에서 나는 경계로 인해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갖게 되며, 그것이 쌓여 우리들의 불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건 반대 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경계 너머의 아득한 반대편으로의 전환은, 바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여기 이 억압되고 짓눌린 구석에 몰린 이 자리와 꼭 닮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직장을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전환'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누렸던 권위의 안정감을 '상실'하게 되고, 결혼 생활의 억압이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고통 받던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관계라는 경계로 인해 유지되고 있던 안정감을 '상실'하며 외로움이라는 또 다른 불안을 마주해야하는 것이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불안을 다스리는데, 우리의 상실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어떤 마음 가짐이어야하는가를 아주 손쉽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해답이란 처음부터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에 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전환이란 또 다른 이름의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며, 거긴 그토록 아름답게만 보였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자아의 실현을 위한 해답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상실과, 그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으로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발걸음만 성급하고 지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매달렸던,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의 뒤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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