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design by 김비)

 

 

 

2회: 이상의 그리스도, 제로에의 의지


 

윤인로



1) 이상(1910~1937)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렇게 써도 좋을까. 근대와 그 정신의 어떤 불모에서 시작했던 자, 시작과 동시에 좌초를 직감했던 자, 폐허와 공포 속에서 전율할 수만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장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폐허라는 공포 속에서만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의 방법이자 태도였던 기하학으로 충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 그런 이상의 형상은 다음 한 문장을 받아쓰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아무런 정신의 땅이 없었던 당시의 현실에 주목해서 바라볼 때, 기독이라든가 기하학으로서의 자기 충전은 충분히 불가피한 분출구였는지 모른다.”[김주연, <시문화의 의미와 한계>, 김용직 편, <이상(李箱)>, 문학과지성사, 1977, 146] 이상의 기독(基督),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각혈의 아침>에서 자신을 불세출의 그리스도라고 치겠다는 한 문장을 보았을 때, 그것은 우스웠고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이 작성한 두 개의 이미지-시에 골몰하면서부터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종언’(<얼마 안되는 변해>)에 대해, 그 파국에의 의지에 대해 미약한 논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강의실의 학생들에게나 옆 사람에게 거듭 이상의 그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면서 논리를 풀었다. 책임의사 이상이 반복하며 변이시켰던 그 두 개의 진단서, 두 개의 이미지-시란 바로 <진단 0:1>(<조선과 건축>, 1932. 7)<오감도 시 제4>(<조선중앙일보>, 1934. 7)이다.

 


 

   



 

2) <오감도(烏瞰圖)> 또는 <조감도(鳥瞰圖)>. 조감도는 투시도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지적 시점에서의 관찰, 해부, 투시. 그것이 이상의 조감도다. 전지적 조감은 전체를 인지하는 신의 시점과 멀지 않다. 그런 신의 시선을 통해 이상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를 상품의 거대한 집적체로, 그 상품들의 교환 효과로, ‘세계의 세속화된 신으로 경배받는 화폐의 절대적 힘의 관철로 투시(透視)해낸다. 그 투시의 속성은 엑스선(X-ray)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 번쯤 찍어보았으니 얼마간 알지 않는가.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 물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희고 검은 회색의 계열로 드러날 뿐이다. 이상은 이렇게 쓴다.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했고, “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灰色)의명랑한색조”(1: 233)로 현상하게 된다고. 까마귀()의 시선(), 그것은 그렇게 세계를 온통 투시된 회색으로 인지하는 삶의 방법이자 태도다. 일단 이렇게 요약해 놓자. 여기 조감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다. 그 새는 전지적이기에 신적이다. 그 신의 시선은 투시하는 엑스선이다. 식민지의 수도 경성의 모더니티가, 결핵성 뇌매독을 앓는 이상 자신의 몸이, 연인과 우정과 가족이라는 타인과의 관계가 바로 그 엑스선에 의해 관통되어 이면의 회색으로 드러난다. 이는 이상이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의 위용을 일말의 매혹이나 두려움 없이 앙상한 철골과 유리로, 그것들을 접합하는 수식과 방정식으로 투시했던 것과 등가이다. 이상은 그렇게 투시하며 걷는 까마귀/신이다. 그는 경성의 모더니티 속을 걷는, 혹은 그 위를 날고 있는 산보자이다. 그런데 그가 걷는 곳은 모더니티의 수도파리가 아니었다. 죽었다 깨도 그는 파리의 산보자일 수 없었다(그리고 그 사실조차가 이상의 엑스선에 의해 투시된다). 그는 걷되 모조되거나 위조된 근대의 경성을 걷는 중이다. 걷되 절름발이로 걷는다. “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바리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끗끗내잇다”(1: 99) 절름거리는 신, 불구의 신은 말한다. 무사태평한 근대성이야말로 병원이라고, 치료되어야 할 질환을 가졌음에도 병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 바로 근대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므로 이제 근대라는 질병을 진찰했던 책임의사 이상의 진단서 두 장을, 오감도라는 신의 투시도를 보면 되겠다.

 

3) 위에 인용된 이미지-<오감도 4>의 거꾸로 된 숫자열에 대해서는, 가치체계의 전도(임종국), 수적 환상과 양가치적 표현(김종은), 욕구와 현실의 균형 붕괴(정귀영), 원순열의 선순열로의 치환(송기숙) 등의 해석이 있다. 이상전집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이승훈은 <오감도 4>에서 이분법적 합리주의의 대립들을 읽는다.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대립, 질병과 건강의 대립, 남녀의 대립 등등. 그는 진단의 결과를 가리키는 진단 01’이라는 한 구절에서 무(0)와 유(1)의 대립, 나아가 죽음과 생활의 대립을 읽는다. 이와 같은 독법의 카테고리 안에 <오감도 4>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 또한 들어 있다. 내게 <오감도 4>는 당시 병참학(logistics)의 규율체제로 재편되고 있던 근대성의 운용을 메시아적 파국의 입장에서 재정의하도록 이끄는 텍스트였다. 그런 사정은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다르게 끌어안을 수 있다는 믿음의 조건을 되씹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물으면서 시작하자. 저 두 장의 진단서에 내장된 반복과 차이는 어떤 힘을 내뿜는가.

 

4) <진단 0:1>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둔 월간지에, 일본의 국어로, 김해경이라는 본명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계열로, 시가 아니라 만필로 기고되었다. <오감도 4>는 조선인이 읽는 일간신문에, 조선어로, 본명을 가린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오감도>의 일련번호를 달고서, 시로 기고되었다. 하지만 나열해 놓은 이 차이들의 의미는 끝내 잠정적일 수밖엔 없다. 위의 두 텍스트는 의미의 공백을 품은 채로 기호화되어 있으며, 너무 간소화되어 있고, 그 두 텍스트가 이루고 있는 각각의 계열들 또한 일관된 하나의 의미로 집중되지 않고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진단 0:1>에 있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오감도 4>에는 없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건지는 확정할 수 없다. 통념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어떤이라는 단어가 없어진 <오감도 4>가 거울 속의 자신을 진찰할 수 없음에 섭섭해하던 이상의 자가진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그 여지 속으로 위의 두 텍스트가 갖는 차이의 효과가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잠정적인 것 속에서도 확실한 것은 위의 두 텍스트를 병치시켰을 때 드러난다. 가만히 보면 <진단 0:1>의 똑바로 선 수열의 데칼코마니된 거울상이 <오감도 4>의 수열임을 알 수 있다. 수리적 합리성의 인과율과 수량화가 근대적 폭력의 원천들 중 하나가 맞는다면, 저 데칼코마니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수열의 의미야말로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한 근대의 질환과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진단 0:1><오감도 4>의 공통적 반복을 가리키는 가장 선명한 한 구절은 이것이다. ‘0으로 도달하는 급수운동’.

 

5)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건축과에서 기본적인 수학과 작도법을 익혔던 이상은 급수라는 것이 일정한 법칙성을 따라 증감하는 수의 배열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자 김명환은 <진단 0:1>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콤마들을 소수점으로 본다. 그때 이상의 수열은 한 줄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10분의 1씩 곱해짐으로써 0으로 수렴해가는 등비급수였다. 수학자의 이상론. “첫째 줄에 모든 숫자가 소수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나열된 것을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의하여 완벽하게 장악된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책임의사 이상은 그러한 합리주의의 질환을 가진 세상의 미래가 소멸하리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명환,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수학기호와 수식의 의미>,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 문학사상사, 1998, 171] 이 한 대목에 들어 있는 합리주의의 질환이란, 이미 이상의 한 구절 1234567890의질환의구명과시적(詩的)인정서의기각처 복창하고 복기한 것이었다. 구절 속에 들어 있는 ‘12345678890’<진단 0:1>의 첫 줄에 있는 수열과 다르지 않다.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시적이고 반성적인 감응의 수수와 증여, 그 마음의 전 과정을 기각해버리는 폭력의 자리. 그렇게 기각하고 소각하지 않으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는 시스템의 운용원리. 바로 그 통치적 합리성이야말로 <진단 0:1>의 수열이 겨냥하고 있는 타켓이다. 삶을 인도하고 견인하고 배양하는 사목적(司牧的) 통치성의 표상으로서의 ‘1234567890’이 가진 호명과 관리의 권력이 ‘0.123456789’로 극소화되는 과정, 그렇게 제로로 수렴해가는 바로 그 과정/소송이란 무엇인가. 이윤을 위한 법, 이윤이라는 법을 향해 직진하는 통치이성의 끝장이며, 그 최후로의 육박이자 그 육박의 궤적이다.

 

6) <진단 0:1><오감도 4>의 병치를 다시 보자. <진단 0:1>의 가로쓰기와는 달리 <오감도 4>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도록 세로쓰기로 인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일간신문의 세로쓰기 편제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진단 0:1>을 데칼코마니한 <오감도 4>가 위에 인용한 이미지 그대로 인쇄될 거라고 예상했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오감도 4>를 인쇄된 그대로 읽으면 <진단 0:1>에 이어져 있는 희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진단 0:1>의 진단서가 ‘1234567890’에서 ‘0.123456789’로 나아가는 제로로의 수렴이었다면, <오감도 4>의 진단서는 ‘1111111111’에서 ‘0000000000’으로의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전환 혹은 전복으로 드러난다. 이상에게 제로()시스템의 절멸이자 재시작을 위한 영도(零度)였다. 그런 한에서, <진단 0:1>제로로의 수렴은 말 그대로 제로로의 무한한 근접이지 아직 제로가 아니며 끝내 제로가 아니다. <진단 0:1>의 제로로의 수렴에 들러붙어 있는 콤마 이하의 수들이 통치하는 힘의 꺼지지 않는 불씨이자 탄력적인 잔여라고 했을 때, <오감도 4>에선 그것조차가 완전히 잘려나가고 없다. 이상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발견한 모든 함수상수의 콤마이하를 잘라없앴다.’ <오감도 4>의 수열, 까마귀/이상의 진단서. 그 고공에서의 전지적 엑스선이라는 신의 시선이 근대적 통치합리성의 폭력을 투시함으로써 작성해 놓은 처방전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런 것이다. 숫자의 소멸’. 소멸하는 숫자, 제로에의 의지. 그것은 분명 역사철학적이다. 아니 역사신학적이다. 이상이 상상하고 감행했던 파국의 역사신학(이에 대해선 다음 연재를 참조). 그것이 절대적 제로의 신성한 힘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성을 겨냥한 것인 한, 그것은 분명 정언명령적이다. ‘절대(絶對)에 모일 것.’ 다시 쓴다. 절대에 모일 것. 그렇게 절대에 모인다는 것은 어떤 신성에의 도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절대적 신성으로 고양된다는 것은 세계의 절멸을 예감하고 기다리며 끝내 고지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폭력에로의 육박이다. 다시 말해 절대에 모일 것이라는 이상의 정언명령은 장치들의 항구성에 종언을 선포하는 절대적 시작의 다른 표현이다. “저항과 메시아주의는 모두 절대적 시작이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다니엘 벤사이드, <저항>, 김은주 옮김, 이후, 2003, 45] 절대적 시작의 게발트. 어떻게 끝날지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러 왔다고 했던 건 <매트릭스>의 부활한 네오였다. 그의 메시아성, 시스템에 대한 그 폭력적 파산과 중지의 도래. 엔딩의 이미지를 이상의 데칼코마니된 진단서 이미지들과 다시 한 번 병치시킴으로써 조금 더 말하자. ‘모든 기구(機構)[system]는 연한(年限)이다.’라는 끝의 선포. 그것은 이상의 것이면서 동시에 네오의 것이었다.

 


 


 

위의 이미지는 네오(the One/‘’)라는 메시아적 힘의 시점으로 본 매트릭스의 통치원리이다. 그것은 무작위적 수의 변환과 구획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이상이 <진단 0:1><오감도 4>의 데칼코마니라는 신의 투시도를 통해 통치의 이면과 원리를 수와 수식으로 인식했던 것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수식의 작용을 정지시키는 ‘FAILURE’란 무엇인가. 시스템에 기능부전과 장애와 불이행과 불신임을 도래시키는 힘, 줄여 말해 최고도의 불복종의 지속을 인입시키는 메시아적 힘의 선포. 그것은 절멸의 제로의 고지이다. 네오와 이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발전소의 그 감옥을, 사막 같은 그 실재(the real)를 함께 체감했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동시대인이다. 그들은 신화적 폭력의 시스템을 걷어치우는 신성한 힘을 통해 축적의 동력으로 은폐되고 저당 잡혀 있던 바로 그 실재를 개시하고 해방한다. 그들의 표현은 신의 힘을 정치적 세속화의 강건한 도상 위로 전용하고 전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리 있는 경로들이다. 그들은 기가 막히는 초월적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이 아니라, 정체성의 분할을 통해 축적하는 시스템의 구획선들을 초과하고 위반하는 자들이다. “신은 우리가 물리적인 분리의 한계를 초월할 때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제임스 롤러, <우리가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184] 그들 신인(神人)이 하는 일이 바로 저 절대적 시작이다. 그들의 끝내주는 시작이 바로 절대적 시작인 것이다.

 

7) 근대의 질환을 진단하던 이상은 <진단 0:1><오감도 4> 사이 <각혈의 아침>(1933. 1. 20)에서 약한 목소리로 자신을 가장 不世出의 그리스도”(1-1: 208)라고 지칭한다. 그를 두고 절대의 애정을 갈구했던 한 프로테스탄트라고 썼던 건 김기림이었다. 그에게 이상은 저 노아의 홍수, 그 칠흑 같은 암야를 뚫고 타는 눈으로 절대를 향해 치달아 올랐던 시인이었다. 그 절대란 무엇인가. 다시 물어,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신의 예감을 체현하고 신의 말을 고지하는 자이다. 이상이라는 그리스도. 그는 적그리스도가 설계한 건축체계 속으로 사멸(死滅)의 가나안, ‘도시의 붕락(崩落)’수도의 폐허(廢墟)’를 통고한다. ‘그런다음에는세상것이발아치안는다 그러고야음이야음에계속된다’. 수식화의 관리와 관할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영토는 이제 그 무엇도 발아하지 않는 야음의 지속에 놓인다. 그것이 이상이 말하는 최후의 이미지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그런정도로아펐다. 최후(最後).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최후>) 뉴턴의 사과에서 출발했던 근대의 끝, 그 어떤 정신도 발아할 수 없게 된 최후의 사막.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좀 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물음이 우리들 공통의 질문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초고를 끝낸 지금,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





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