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生輪廻: 이상(李箱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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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이상이 읽은 것, 이상의 비교론: 요시다 잇스이, 메피스토펠레스, 지하생활자

 

 

윤인로

 

 

1) 2회 연재분에 들어 있던오감도 4호」의 그 회색 수열, 하늘에서 근대를 투시하는 그 까마귀의 시선은 당대 일본의 전위시 잡지 『시와 시론(詩論)의 요시다 잇스이(吉田一穗)를 변용한 것이다. 이상의 문학과 그 잡지 사이의 관련에 주목한 내실 있는 공동연구서(란명 외, 이상(李箱)적 월경과 시의 생성―『시와 시론』수용 및 그 주변』, 역락, 2010)에는 이상의 영향관계에 대한 세세한 연구들이 들어있는데, 아쉽게도 요시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 잡지의 창간호부터 시를 썼던 요시다의 까마귀를 기르는 차라투스트라」(시와 시론』 11)는 까마귀의 형상에 임재하는 신성의 이미지를 부여하면서, “()까마귀()”, “()”, “낙원재흥의 고려”[송민호·김예리 옮김, 란명 외, 앞의 책 부록, 467] 같은 시어들로 의미의 포인트를 삼고 있다. 이는 오감(烏瞰)이라는 신의 시선을 근대적/건축적 체제의 으로의 폭력적 형질전환과 결부시키는 오감도 4호」와 맞닿아 있다. 이에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시 갈까마귀()(시와 시론』 6)1연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 나는 문득 마른 풀 위에 버려진 어떤 한 장의 검은 상의를 발견했다. 나는 또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이형진 옮김, 란명, 앞의 책 부록, 477]. 그 미지의 목소리는 명령한다. 멈춰라, 너의 옷을 벗어라, 벌거벗어라, 그 검은 상의를 주워 입어라, 날아라!, 날아라!, 울어라!……. 까마귀를 입으라고, 까마귀로 비상하라고 명령하는 그 목소리 또한 이상이 말하는 오감의 의미/의지와 상관적이다. 시와 시론』에는 이상의 주요 시어들이 산적해 있다. 거울, 공복, 내과, 뇌수, 나비, 총구, 군화, 앵무, 열풍, , , (), 바둑판 등등. 그러하되 그 시어들은 이상에게선 대부분 철저히 변용되고 있는 것이라서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엄밀히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내적 관련의 강도로 보자면 역시 요시다이며, 그의 신약(新約)(시와 시론』 1)은 이상 문학의 중핵과 만나고 있다.

 

2) 요시다의 신약」 1연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법정에서는 가발을 쓴 법관이 그들의 하늘의 돌을 가지고, 땅의 아들들의 손에 빌려준 망치와 낫을 깨부수었다. 우리들은 곧장 항소했다.”(위의 부록, 451) 하늘의 돌을 쥐고 신성의 외투를 걸친 법관들의 폭력에 의해 깨부수어지는 땅에서의 혁명(망치와 낫). 속죄를 염원하는 수인(囚人) 이상과 같이(수인이 만든 소정원」) 요시다의 인물들은 감옥에서 새로운 해의 출현을 두고, “미래에 목말랐던 젊고 아름다운 한 개의 태양을 두고, “우리들의 신약의 피다!”(451)라고 고함친다. 그 함성을 따르는 마지막 연은 이렇다. “우리들이 올라왔던 곳에 단두대가 있다. 공포에 매혹되었던 자빈코프가, 라 그리마·크리스테(ラグリマ·クリステ: 그리스도의 눈물)의 방순(芳醇)함을 알게 된 것 같이, 그 자신의 순수한 생명의 술잔을 기울이길 다하였다. () [논증과 규정의] 관념론을 부정하고 다시 옛 관념에 빠진 특히 스콜라 냄새 풍기는 유물론자는, 시온의 여인과 검을 가지고 혼약한다. 우리들은 먼저 어떤 사람보다도 자기 내심의 법도를 따라,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자유로운 감성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일 테지, 예로 그것이 우리들의 가는 다마스코에의 길, 피에 목마른 불모의 땅이라고 해도, 내가 감성에 꽃피운 사막의 장미를 찾아낼 것이다.”(455) 유물론과 시온의 결합. 불화의 칼, 그 날끝에서 맹서한 약동하는 혼약. 그렇게 비약(Elan)하는 순수한 생명이 구제를 위한 다마스쿠스에의 길을, 그 불모의 사막을 순례한다. 앞질러 말하건대, 그 순례의 길이 바로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이상이 걸어가는 길이다.

 

3) 요시다에 이어, 이상이 읽었던 파우스트에 대해 내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상의 다음 문장에서 시작하자.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1: 64) 지금부턴 이 문장이 들어 있는 파국의 설계도 다섯 번째 장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영원한 망각은 이름의 분류법을, 할당된 죄의 연관을 거듭 지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정되고 구속된, 대패질되고 못질된,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는 구원된다. 이상에게 이름의 망각은 심판하는 신의 도래이자 그 세속화이다. 그러므로 건망이여라는 부름은 폐지함과 동시에 구원하는 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응대이다. ‘건망이여신이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부름, 그 소명과 함께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수”(1: 48)가 생기를 띤 채로 기립한다. 그런 한에서 숫자의 콤비내이션, 곧 사목적 벡터의 조합을 폭력적으로 삭제하고 송두리째 망각해버리는 인문적 뇌수의 회생과 함께 신의 폭력, 그 최후적 심판의 날은 매번 도래하는 중이다. 그 날을 두고 이상은 속도를 조절하는 날이라고 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불원간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일치하는것은그것들의반복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1: 64) 무슨 뜻인가.

 

4) 속도를 조절하는 날, 자기 구성적 속도를 통해 좌표의 숫자를 지워버리는 바로 그 날, ‘를 모으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 사람이 모으는 나는 누구인가. 이상이 말하는 그 사람은 좌표의 붕괴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었고, 나는 저 ()렌즈를 통과한 방사의 에너지들로 좌표를 붕괴시키는 광선이었다. 지금 좌표의 붕괴, 실재의 개시를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나/광선이라는 파국의 힘을 맞이하고 상봉하는 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는 이상의 또 하나의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그때 그들에겐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1: 63)이었다. 도주하는 속도의 현재 속에서 미래와 과거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수된다다시 한 번 크레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과거에 써진 유서와 미래에 써질 유서를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인지했던 건 크레인을 점거중인 김진숙이었다. 그 현장의 고통, 그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인 김진숙의 점거는 이상이 말하는 도주와 먼 거리에 있질 않다. 현실이 텍스트를 이끈다. 모든 텍스트가 현실보다 덜 긴급한 건 아니지만, 모든 현실은 텍스트보다 조금 더 긴급하다. 이에 대해선 졸고,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 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를 참조http://blog.aladin.co.kr/rororo/5188326 속도를 조절하는 날, ‘무수한 과거현재가 구별될 수 없이 일치하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다음 한 대목을 더 읽자. “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1: 63)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이다. 이상은 악령나갈문이없다.”(1: 218)라고 썼고, 그런 그를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령이라고 지칭했던 건 이상의 죽음에 맞서 그를 추억하던 김기림이었다. 이 변주되고 있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보자. 파우스트의 변심을 놓고 주님과 내기를 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그와 같은 악령들을 단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주님.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가. 파우스트를 꾀기 위해 만났던 그 첫날,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창조하는 힘의 일부분이지요./ () 나는 항상 부정(否定)하는 정령이외다!/ 그것도 당연한 일인즉, 생성하는 일체의 것은/ 필히 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간단히 말해서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내 본래의 특성이랍니다.”[J. W.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6, 41.] 메피스토펠레스는 항구적인 부정의 정령이다. 그는 생성을 소멸로 견인하는 필연의 법으로서, 불모와 절멸을 인입시키는 죄, 붕괴, 악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게 때문에 신은 그 악령을 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쉽게 느슨해지고 무조건 휴식하려고만 하는 인간들을 각성시키려 했고, 그런 신의 의지를 받들어 대행하는 자가 메피스토펠레스였기 때문이다. 사도 메피스토펠레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악령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였다. 악령은 신의 악역이었다. 그 악령은 신이라는 정(), 이미 합()인 정으로 온통 수렴되는 반()이다. “영원히 창조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창조된 모든 것은 무()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마련이다!”[J. W. 괴테, 『파우스트, 366라는 악령의 말은 이미 언제나 신의 주권적 의지 속에서 발화중인 말이며, 그런 한에서 신의 말의 대언(代言)이다. 이상이 말하는 방사된 나/광선은 그렇게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사도의 임무를 행하는 중이다.

 

5) 그렇게 ()렌즈를 통과한 악령 메피스토펠레스가 바로 무수한 나이다. 그들 수없는 나/악령은 말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 침묵이 악령의 것인 한, 침묵은 신성의 일이다. 침묵하는 악령들은 축적이라는 목적의 구조 안에서 불-(Un-Zeit)에 발생함으로써 그 목적의 흐름을 중절(中絶)시키고, 목적에 의해 합성되고 편성된 사람과 사물에 성스러운 무효용성’(M. 피카르트)을 선물한다. 무목적적인 침묵, 그것은 목적을 산산이 흩어버리려는 신의 심판에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그렇게 좌표의 노모스를 내리치는 신의 파국의 도래 속에서 좌표의 보존을 위해 통합되고 단일화된 과거는 무수한 과거로 되고, 무수한 과거의 사건들은 서로의 대화를 경청하며, 현재는 그 경청의 상황과 만남으로써, 다시 말해 과거의 유일무이성과 특유함을 보존함으로써 과거와 하나로 합수한다. 그 합수의 상황이 최후의 날, 속도를 조절하는 날의 사건이다. 그 날을 발생시키는 자, 그가 바로 이상이 스스로를 두고 말했던 래도(來到)할 나이다.

 

6) 이상은 「차생윤회」를 비롯한 몇 군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윤식의 진단이 앞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2×2=4의 출입구를 향해 질주할 때 거꾸로 질주하는 한 아이가 이상이다. 공포에 질려 질주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 방향은 서로 역방이었다. 이 점에서 이상 문학은 도스토예프스키, 사도 바울의 계보로 이어졌다.”[김윤식, 이상 문학과 지방성 극복의 과제세계사적 시선 속에서 바라보기」, 권영민 편, 『이상문학연구 60년』, 문학사상사, 1998, 47. 바울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로 넘기도록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이상은 근대적 속도, 이른바 질주정의 근대적 건축체제에 소멸과 파국의 제로()를 대치시킨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한다(분량 때문에 여기 세세히 언급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상은 「8씨의 출발」지구를 굴착하라”,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같은 정언명령들로 김기림의 매개를 통해 알게된 마리네티/무솔리니의 질주정을 비판한다. 질주정, 이른바 속도의 통치는 속도의 미학화와 한 몸이다. 마리네티-무솔리니는 조각가-통치자이며, 그 두 쌍은 형상-질료의 짝과 동시적이며 등질적이다. 대중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대중의 우매함과 미결정성을 혐오하고 매도하는 어떤 도착 속에 그들의 절대적 속도가 들어있다. 그런 도착적 속도 위에서 마리네티는 대중이라는 재료를 조각하며, 그 속도의 도착성 속에서 무솔리니는 대중을 이른바 갈채의 도가니로 휘몰아간다. 질주정이라는 신성의 공동정부의 수반들인 마리네티와 무솔리니는 형상-질료라는 착취적 도식을 깨는 자가 아니라 그 도식을 깨기 위한 작업복을 걸치고는 그 도식을 완성시키는 자들이며, 그런 한에서 그들은 그 도식의 적자(嫡子)이자 샴쌍둥이였다. ‘지구를 굴착하라는 정언명령은 그들 절대적 신성의 수반들을, 돌려 말해 질주하는 속도의 적그리스도들을 살해하라는 뜻이자 힘이었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지구를 굴착함으로써 시방 지하의 세계를 개창하고 있는 자, 이른바 파국의 지하생활자. 그는 분류표의 세계 안에 파괴와 붕괴의 게발트로, 방해의 바리케이트로 틈입하면서 어떤 이익을 발생시키는 중이다. “이 이익의 특징은 일체의 분류를 파괴하고, 인류애를 내세우는 자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체계를 송두리째 때려 부수는 데 있다. 요컨대 이 이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1998, 33쪽] 무슨 말인가.

 

7) 지하생활자는 상식과 과학이 가르쳐주면 인간은 그것을 반드시 해득하게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그런 확신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유로운 의욕을 단순한 질료로 치부함으로써 인간을 피아노의 건반이나 휴대용 오르간의 핀같은 것으로 격하한다는 것이다. Z백호가 가르치는 비상의 기예가 일방적으로 해득되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상은 악기의 건반이나 핀이기를 거절하는 지하생활자와 한솥밥을 먹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동거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의욕에 뒤따르는 이익. 다시 말해, 축적이라는 목적에 의해 분류된 좌표의 바깥을 발생시키는 힘에의 의욕이 생산하는 이익. 그 이익이 좌표화된 삶 속에서, 이른바 이름()의 분류 속에서, 환속화한 신의 방조와 묵인 속에서 분리와 분할로 재생산되고 합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숫자의 바둑판을 탄핵한다. 그 좌표-바깥으로의 힘을 향한 지하생활자의 의욕과 의지가 일체의 분류법을 작동 정지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을 앓았던 간질(epilepsy)이 일상의 정상성이 절단되는 시간의 발생이었던 것처럼, 분류법 일반을 폐절시키는 분류불가능한 힘에의 의지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인류애의 이름으로 설계되고 있는 정상적 이익의 생산을 저지하고 중지(picnolepsy)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총파업, 지하생활자의 무위(無爲)”[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28쪽]. 그 사보타지 속에서 분류불가능한/예외적 이익이 재생산되고 향유된다. 그 사보타지의 장소, 주이상스의 자리를 두고 이상은 엘리스의 나라라고 적었다. 거기서 통상의 법은 끝난다. “아리스나라가튼 불가사의한나라에제출된외교문서에 우리들이가지고잇는법률을적용하려고하는 것은 도로(徒勞)요 무효(無效)인줄압니다.”(3: 39)

 

8)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좌표-바깥에의 의지와 의욕을 두고 이성도 비근한 생리작용도 모두 포함하는 인간의 전체생활의 발현인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40쪽]라고 적었다. 이성과 몸의 위계적 이분법을 거절하고 있는 이 문장은 즉각 「8씨의 출발」의 한 문장과 맞닿는다. ‘지구를 굴착하라와 동시적인 또 하나의 정언명령 생리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유기하라가 그것이다. 이는 먹고 자고 싸는 몸의 작용을 동물의 영역이자 이성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암흑의 영역이라고 격하시킨 분류법의 지배적 통념과 상식을 내다버리라는 뜻이다. 함께 내다버리면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을 향해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8라는 당위를 제출한다. 무성격적 존재, 또는 무성(無性, nihil-ism)의 존재. 그것은 일체의 분류법과 적대하는 지하생활자들의 파괴적 성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성격적이란 어떤 상태인가. 성격을 특정하거나 고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성격을 특정할 수 있다는 건 성격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류된 성격이란 계산가능성 위에서 규격화한 성태성질이다. 무성격적이란 함부로 좍좍 그어지고 있는 분리선들, 구획들, 돌벽들에 대한 폭력적 망각의 지속이며, 그런 한에서 무성격적 존재란 분류법의 영토 안에 무(nihil)의 치외법권으로, 멸형의 공백(zero)으로 설립되고 기립하는 중이다. 무성격적 존재는 무성(니힐), 공백(영점), 멸형(파국)의 힘을 관철시키는 자다. 분류법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무성은 자기원인적이므로 어떤 절대이다(다시, “절대에모일것”). 절대적 무성은 신성의 한 조건이자 양태이다. 무성격적 지하생활자들의 사보타지, 무위의 힘은 무성의 한 조건이자 무성의 한 표출이었다.

 

9) 재갈물린 지하생활자가 기다리는 그 날, 물린 재갈을 풀고 둑이 터지고 홍수가 난 듯 말할 수 있게 되는 그 날, 그럼으로써 새로운 로고스/노모스를 개창하는 그 날, 다시 말해 지하생활자들이 세상에 뛰쳐나오는 [그]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54 비로소 소멸하게 되는 것은 이론도덕이다. 바로 그 날, “인간 자신의 이익의 체계로 온 인류를 갱생시키려는 이론인간에겐 무언가 도덕적인 훌륭한 의욕이 필요하다는 현인들의 확신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37에 파국의 조종이 울린다. 이론에 의해 보증되는 인간의 이익구조가 인류의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그 어떤 분류법에도 귀속되지 않는 의지. 지배의 현자들/설계자들이 만든 도덕률로부터, 곧 마음을 죄의 생산공장으로 만드는 집단적 도덕률로부터 사람들 스스로를 폭력적으로 떼어내고 성별(聖別)시키는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의욕. 줄여 말해 분류불가능한 무성격/무성에의 의지. 그 의지와 접촉하는 이상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의 내부로 향해서 도덕의 기념비가 무너지면서 쓰러져 버렸다. 중상. 세상은 착오를 전한다.”(1: 191) 착오의 사회를 굴착하면서 밝아지는 아침하늘天亮을 기다리는천량이올때까지”(1: 61) 기다리고 있는이상 곁의 도스토예프스키 곁의 니체 곁의 서광.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9. 지하에서 수행되는 일들을 축적에 봉헌하는 이론과 도덕의 관점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비판으로서의 비평의 하한선 혹은 마지노선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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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로문학평론가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신성한 것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에 대해그리고 그 과정과 동시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들의 또 다른 신성한 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계간<오늘의문예비평>, 격월간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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