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뜨락] 지평선 혹은 수평선이 사라져버린 삶

 

 

 

최혁규 / 문화연대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의 <죽편1-여행>

 

 

 

 

 

 

이 지면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문화비평이라는 범주에서 나의 기존의 글쓰기를 반추해봤을 때 특정 대상 없이 글을 쓴 경우가 많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영화, 문학, 음악, 만화 등의 텍스트를 통해 문화에 다가갔으며, 그 글 속에서 나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 속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텍스트 뒤에 숨기 급했으며 심지어 숨는 것에 희열을 느끼곤 했다. 대부분의 문화비평적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글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무엇에 대해서인 글에서 그 무엇에 를 대입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덧 다른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글에서 지우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내 온몸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스스로의 몸을 통해 비평을 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스스로를 활동가로 위치지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가라는 단어는 분명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사회역사적 맥락보다 활동'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문화적인 현상과 이론적인 부분들을 결합시키는 작업들보다 내 삶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과 타자의 삶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활동가로 지내면서 내 몸이 만나고 있는 수많은 현상들에 대해 성찰적 글쓰기를 하고 싶다.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 바로 이것을 나의 몸을 통과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새겨진 문화들은 어떻게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을까? 개인들의 욕망이 다양해진 만큼, 한 개인의 욕망 또한 다양해지고 세분화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다양한 욕망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며, 그 연결망들은 타자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은유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타인들, 공동체, 사회와 은유하려는 시도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는 이런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서로가 느끼는 문화정치경제적 경험에 대한 온도차를 감지하길 거부해버리면서. 어쩌면 높디높은 빌딩들과 촘촘히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치이는 삶을 살면서 수평선 혹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도시/시골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몸이 위치한 곳과 내 시선이 닿는 저 먼 곳을 잇는 법을 상실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제 우리는 멀리 바라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 몸에서 시작해서 최대한 멀리까지 한 번 은유해보고자 한다. 내 몸의 욕망들 그리고 내 피부로 느끼는 다양한 욕망들이 그 너머의 다른 욕망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쉽지 않은 모험이겠지만 백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 먼 여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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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웹진 아프꼼에서 이번 달부터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최혁규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해서, 그 생의 뜨락에 여러분들을 초대하기 위해 조금씩 터를 쓸어놓으려 하오니, 많은 발자국들을 찍어주시기를. 현재 최혁규님은 밀양에서의 연대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혁규님에 대한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는, 더 아픈 이야기들을 돌보는 시간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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