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해체 (1)  

 

 

 

소설가 金 飛

 

 

 

 

 

 

 

  해체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지닌 이들에게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존재로, 불안한 존재로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경계성은 무엇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경계 안으로 포섭함으로써 모호하고 흐릿한 존재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나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 사람들은 나의 외향만을 두고 나를 하나의 성별로 규정했지만, 내 안에는 내가 아닌 내가 존재했고, 그것은 내가 아닌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해 억압된 나였으며,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내 삶의 존재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잘못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간단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또한 결국 하나의 인간을 유린하는 부족한 수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혼란은 언제나 내 삶의 일부였다. 유년기 시절에는 외부의 세계로 인해, 그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무지했던 내가 혼란스러웠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내 몸이 남성으로 성장하면서 도망치거나 숨어들 수도 없는, 즉물적 혼란이 내 삶을 짓눌렀다. 오직 생존 하나만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세상이 알려준 경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나 자신과 싸웠고, 그것이 오히려 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혼란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를 둘러싼 혼란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더욱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태어나 사는 세계로부터 농락당한 배신감은 나를 더욱 이기적이고 지독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야 나는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살게 했던 생존의 방식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운 존재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나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던 외부의 세계가 뻔뻔스럽게도 나를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미 깨닫고 있다. 그것 역시 '나'라는 한 개인을 무책임하게 남용하는 이 세계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혼란이나 혼돈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생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를 해체해야 한다.

 

  이 세계 안에 살지 않고, 내 안에 살고자 한다. 모든 세상의 선언들을 불신하며, 질서와 규칙을 나의 이름으로 다시 부여한다. 언어를 조합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선뜩하고 눈부신 언어로 다시 조합한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생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규정되고 조작된 인간이 아닌 알몸의 인간으로 세상과 마주 서야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는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나와 관계를 맺었던 인간들과의 만남을 해체하고자 한다. 나를 닮은 인간, 나와 유전자적 조직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 나의 생존에 앞선 그들의 생존 방식이 어떠했든 '가족'이라고 부르는 통칭의 사람들은 나의 생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렇다, '도움'이다. 나는 그것을 '가족애'라던가 '혈연'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움'이라고 간략화시켜 버렸다. 물론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는 그것을 '천륜'이라거나 심지어 '본능'이라고 말하며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의 개별화된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면 그 한계까지 다가가, 가족이라거나 혈연이라는 관계를 유연하게 농락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부인할 수 없는 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나도 내 가족들과 공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일란성을 경험했고 또한 앞으로도 더욱더 자주 그것을 깨우치게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유전자적 일란성까지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말이다. 유전자나 핏줄이란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똑같은 덩어리 몇 개의 산물일 뿐, 그 속에 개인을, 개인의 삶을 묶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이 나의 생존에 기여한 '도움'을 잊지 않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미래 어느 순간으로 기약하면 되는 것일 뿐 그들과 나의 개별성을 일찍부터 깨우쳐야 하는 것이, 우리와 같은 혼란과 불안 속에 사는 인간들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첫 번째 해체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족의 힘이나 그 중요성에 관해 너무도 자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입하고 있지만, 그것은 파편화된 세계를 지양하기 위해 개인적 삶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환기한 결과일 뿐, 오히려 인간이 개별적인 스스로 삶을 인식하고 가족의 틀 안에 갇히지 않은 채 그것을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 독립된 삶을 영유해 나아간다면, 그것이 오히려 가족이나 혈연 안에 갇힌 사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건강한 사회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미 가족주의와 혈연에 집착하며 더욱 폭력적이 된 세계를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격하고 있으며, 집착적으로 언론이나 대중매체가 환기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분명 과격하게 들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안온하고 평화로운 가족 안에서 건강한 사상과 생각을 교육받으며 자란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볼 때면 참으로 고맙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감상이 떠오르기는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이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가족의 해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오직 자기 자신의 가족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들의 행복만을 기원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너무 많은 가족들의 모습은 오히려 이다음 언젠가 집단 이기주의의 원형을 양산해낼 수도 있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도 가족은 없었다. 유전자적 일란성을 공유하고 있는 혈연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족'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자주 망설여진다.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가지 이유로 해체된 가족의 구성원들은 버려지거나 혹은 누군가를 저버린 것으로 인해 필요 없는 죄책감이나 상실감으로 자기 자신을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사회가 앞장서서 그러한 불안과 혼란의 정서가 마치 당연하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사회에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가족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하나의 마을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지금의 가족은 개별화되고 단절된 채 섬처럼 서로 괴리되어 있다. 그러한 파편화된 사회를 한탄하며 부정적으로만 환기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기존의 가족의 개념, 가족에 대한 이해를 근원적으로 다시 재고해 가족을 가진 사람이든 가족을 갖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소외되거나 폭력적으로 환기되지 않은 채 정당한 개인의 삶을 추구하고 유지할 수 있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족은 없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족으로 보살피고 아껴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탄생과 결부된 사람들의 최초의 '도움'을 잊지 않으면서, 내 가까이에서 나의 생존을 돕고 나와 함께 삶을 일구어나간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에게는 귀하게 여겨야 하고 존중해야 할, 진정한 나의 가족이다. 

 

  가족은 그렇게, 재정립되기 위해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혈연으로 묶인 몇몇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그 경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오가야 하는 공존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족이 해체되었기에 인간의 개인화 혹은 사회의 파편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혈연 중심주의에 묶여 있기 때문에, 혈연의 가족이 아닌 다른 의미의 가족을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생존하는 법을 외면하고 있기에, 이 사회의 파편화는 더욱 지속하고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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