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해체 (2)  

 

 

 

소설가 金 飛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 안에 갇힌 스스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대물림'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탄생으로 인해 주어진 생활환경과 삶은 인간을 꼼짝없이 어떤 한계 속에 몰아넣고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폭력과 억압의 상처를 지닌 개인은 가족 안에서의 소외로 인해, 가족 중심 사회인 이 세계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소외되고 도태된다. 모든 것을 가족의 탓이라거나 가족을 중심으로 미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는 세계는, 당연히 존중받고 축복받아야 할 한 개인의 삶을 꼼짝없이 묶어놓고 만다.
  이러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삶을 시작하는 불운한 개인은 일찍이 자신의 삶을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탄생 자체만으로도 이미 '삶'이라는 축복을 지닌 채 세상에 나왔다. 그것이 억압되고 폭력적으로 환기되며 그러한 현실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냉정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을 지닌 가족이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결국 가족이라는 그 출발점은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며, 아득히 보이지도 않는 그 출발점을 자꾸 돌아보며 주춤거리는 일은 스스로의 삶을 옥죄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깨우치며 지지받는 스스로의 삶을 인식하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해체이며 또한 진정으로 존중되어야 할 '가족'의 의미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가족 중심 사회는 결국 해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중매체에 끝없이 오르내리는 가족주의에 대한 맹신은 결국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머지않아 깨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가족주의의 재생산이 미래에 스스로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오히려 편협한 사고방식을 주입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깨우치면서,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직면하게 될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흉터를 닮은 관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애정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공존과 공감의 의미이다. 이 사회가 가족보다 더 커다란 공존으로 인해 유지되고 발전해 나아가며 그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는 개인이 탄생하고 성장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일깨우는 일이, 이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를 환기해야 하는 단 하나의 남겨진 가치일 것이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아마도 결혼이라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 삶의 전환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제도 속으로의 편입.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미 다양한 사랑의 형태로 혹은 가족의 형태로 도전받아왔고, 또한 앞으로도 무수히 도전받게 될 것이다. 


  최초의 결혼은 당연히 생존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즉 필요 때문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수컷의 번식 욕망과 결혼이라는 제도의 관련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었지만, 그리고 또한 결혼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주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시대 혹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 근거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예속되기 위하여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합당한 필요조건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결혼은 왜 필요한가? 번식 욕구라거나 신분상승이나 재산증식의 욕망이라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목적과 똑같은 요건들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그것이 아닌 사랑이라거나 삶의 안정감 혹은 친밀한 유대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혼이라는 제도의 의미는 달라진다. 전자를 목적으로 한다면 결혼이라는 것은 진정 투쟁하며 경쟁하듯 싸워내야 할 테고, 후자가 목적이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두 사람만의 교류가 그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기 위해 결혼을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분명히 어떤 것은 주가 되고 또 다른 것은 부가될 텐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최초의 감정에 의해 발화되는 판타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이든 결국 시간이 지나며 잃어버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던 건 아니었는지.
  결혼하게 되면, '책임감'이라는 게 생긴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근거해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 책임감이라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생겨난 책임감이라는 건 어쩐지 주체적인 에너지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주체적인 힘이 아닌 타의적인 힘에 기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결핍된 삶을 맞이하게 될 증거가 아닌가?
  어쩌면 현대 시대의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이 개인의 힘으로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적인 인격체가 만나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목표가 결핍된 채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처음부터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 되어버린 한국의 결혼 제도는, 어쩔 수 없이 불안요소들을 껴안은 채 판타지에 기대어 삶을 배팅하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을 시도하는 것인 건지도.
  물론 그 모든 불안 요소들을 견디며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결혼한 당사자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이상적인 가정이 존재할 수도 것이다. 그것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 또한 옳은 일은 아닐 것이고.
  그러나 결혼 상대를 물색하며 가장 많이 내세우는 조건이라는 '보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참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성소수자라는 개인으로써 그것은 달성할 수 없는 지점이기는 하지만(당연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결국 그것 역시 소외를 양산하고 인간을 획일화된 틀 안에 묶어놓는다는 차원에서 과연 그것이 그들의 말대로 이 다양한 인간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근원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결국, 가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 또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해체라는 숙명 앞에 서 있다.

 

  토플러에 따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핵가족 시대를 넘어서, 새롭게 이름 붙여야 할 가족과 결혼의 시대 앞에 다가와 있다. 동성애 부부는 물론이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기대지 않고 파트너쉽을 유지하는 부부들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새로운 가족과 결혼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하니, 분명한 것은 기존의 가족과 결혼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목전에 도달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족의 존재 의미가 '유대'와 '소통'이었던 것처럼, 결혼의 존재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그 중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고. 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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