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하여

윤인로 선생님의 <차생윤회>에 덧붙이는 글

 

 

심 미 영

 

 

인간은 절망한다. 더 깊이 절망한다. 절망이 곧 삶이고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삶을 존속시킨다. 구원받고 싶다. 구원은 없다. 절망 가운데 구원을 생각한다. 카프카의 짧은 글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남자처럼 우리는 법의 문 앞에서 영원히 들어가길 기다리다 그렇게 죽어 사라질 존재. 희미한 형상으로 남아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사실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것으로 쓰러질 안타까운 모두.

이상의 차생윤회(此生輪廻)를 보며 동시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윤인로 선생님이 언젠가 수업 시간에 설명한 부분 중 하나.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도둑놈 중 한 명이 구원받은 동시에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는다. 지독한 생의 굴레. 혹은 그야말로 차생윤회.

 

블라디미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블라디미르의 물음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측정한다. 복음서를 쓴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12.5%가 된다. 8분의 1의 구원 가능성과 8분의 7의 절망.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이 1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 사실 1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이 물음과 이상의 차생윤회(此生輪廻)를 병치시킨다.

 

(3,6), (9,4), (5,3) 등과 같이 모눈종이 위에 하나의 점으로 표상되는 삶들. 계산 가능해지고 하나의 오차없이 추적 할 수 있는 삶들.

 

()과 율()의 조절적 관리 및 정비를 통한 통치 환경의 최적화 상태 속에서, 다시 말해 안전 메커니즘속에서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다버리게 되는 사람들, 이른바 인구.

 

구획 가능하고 측정 가능 한, 숫자로 환원되는 삶. 이름하야 우리는 인구. 인류라는 이름을 지우고, 인구라는 이름표를 가슴팍에 붙이고서, 01 사이를 오가며, ()을 진단한다. 그 속에 포함될 수 없는,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삶을 경멸한다. 하나의 좌표로 내 생의 위치를 점찍고 그 점에서 다음 점으로, 또 하나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렇게 생은 연속된다. 그러므로 삶은 피로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는 건 피로하다. 목표가 없는 삶을 사는 것(좌표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3,6)이라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음 (9,4)로 나아가기까지 우리는 8분의 7의 절망 속에서 8분의 1이라는 구원을 꿈꾼다. 삶은 숫자다. 구원은 확률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사실 그 무엇보다 사는 게 무섭다. 또 공포다.

이상도 그러한 공포를 마주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모든 중간들은 지독히도 춥다.”는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윤인로 선생님은 그 중간이 폐기된 결과가 차생윤회라고 했지만, 중간을 폐기하고 무너진 이상에 나는 더욱 몰입한다.

 

하루 종로를 오르내리는 동안에 세 번 적선을 베푼 일이 있다. () 기록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한푼 받아들고 연해 고개를 끄덕이고 꽁무니를 빼는 꼴을 보면서 네 놈 덕에 내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알기나 아니?’하고 심히 궁한 허영심에서 고소하였다. 자신 역() 지상에 살 자격이 그리 없다는 것을 가끔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를 먹여 살리는 내 상부구조가 또 이렇게 만족해하겠지하고 소름이 연 쫙 끼쳤다. 그때의 나는 틀림없이 어떤 점잖은 분들의 허영심과 생활 원동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꾸멀꾸멀하는 거지적() 존재구나 불이 번쩍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 차생윤회)

 

나는 거지에게 적선하며 너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나 또한 저 거지와 다를 바 없이 누군가 자신 때문에 사람노릇 한다는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내가 타자를 동정하는 동시에 나는 타자가 되어 동정받는다. 그 공포. 결국 거지적 존재로 밖에 살 수 없는 비루먹을 삶. 그래도 나는 거지보다는 나은 인생을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위안이 결국 나를 향한 화살이자 괴로움이 된다. 자본의 절대적 힘 아래 비호를 받는 자가 돼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비웃던 거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는, 지독히도 추운 중간. 그 추위를 비단 이상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세대, 현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그 중간에 있으니까. 결국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다버리게 되는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구원과 절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최근 구원이라는 키워드에 빠져 산다. 이따금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의 종착엔 항상 절망밖에 없다. 이렇게 살 바에야 목을 매겠다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말에 나도 목을 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살고 싶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구원을 믿고 싶다는 말이다. 절망과 구원 사이에 끼여 생을 연명한다. 절망 가운데 다시 구원을 믿는다. 12.5%의 구원에 대한 확률이 아니라 01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그 구원을 믿는다. 믿고 싶다.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3년 소설창작연구회 회장

심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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