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윤리란 무엇인가?

 

 

오영진

 

 

 우선 윤인로의 작업에 대해 비평을 하기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이상이나 김수영같은 작가는 한국문학연구자에게 일종의 해석학적 쟁투가 벌어지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전자는 특유의 난해함과 수수께끼로 이루어진 ‘미로’로서, 후자는 무엇이든 떼어 잘라먹을 수 있는 ‘먹기 좋은 빵’이 풍부한 ‘곳간’으로서 말이다. 말하자면 ‘이상’연구는 21세기를 넘어선 지금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힐리스 밀러라면 이것이야 말로 탈출 불가능한 텍스트의 미로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해석을 거미줄에 얽혀 있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으로 은유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해석은 오히려 그 거미줄에 또 다른 줄을 첨가하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해 미로를 탈출하기는커녕 미로를 건설하게 된다. 비아냥이 아니다. 문학해석학의 무한한 동력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상은 “불세출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지칭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詩는 절멸의 시대에 던지는 메시아의 메시지로 이해된다. 이는 그와 기독교 표상 간 문제를 다룸에 있어 ‘이상’이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배치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상의 사도로서 그 계보 속에 무의식적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수많은 이상의 사도들을 보아왔다. 시인 이상이 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복원하여 복음으로서 전달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아온 이들의 역사를 연구사 검토라는 이름으로 마주한다. 윤인로의 글에도 이러한 사도들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는 이 계보 속에 놓이게 되는가? 이 점에서 윤인로의 작업의 의미가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해석학이 아니라 윤리학으로서 ‘이상’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윤인로’라는 사도의 윤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곳에 이상과 함께 섰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의 힘은 어떤 질감을 가진 것인가”(2회연재분). 읽기 행위는 감응을 통해 존경심뿐 아니라 책임감을 낳는다. ‘이상’을 읽고 난 후 우리는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니까 ‘이상’의 텍스트는 수수께끼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서 작동한다. 바흐친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미하일 바흐친,『예술과 책임』, 『말의 미학』, 길, 2006. p. 25.)

 반면, 이러한 언급은 어떠한가?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서 풍자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상문학이 1930년대라는 시대를 타고 넘어서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이다. 이제 남은 일은 페가수스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일이다. (중략) 이상을 20세기 1930년대로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된다.”(정정호, 「이상시의 “이상한 가역반응”」,『비평문학』제 38호, 2010. p. 503.) ‘이상’의 사도들은 왜 ‘이상’을 보편-세계문학으로 위치시키려 하는 경향이 있는가? 그리고 왜 이 작업은 자신의 불행이 아닌 식민지 근대, 아니 나아가 근대성 전체와 싸웠던 메시아가 되는 방식으로만 이상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같은 태도야말로 ‘이상’이 제기했던 질문을 의미 있게 반복하는 일을 막는다. 단지 센티멘탈한 ‘이상’을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상연구에 있어 ‘순교’라는 레토릭을, ‘원한’을 제거해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령제를 지내지는 말자는 말이다.

 다행히 윤인로는 ‘이상’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상’을 경유해 ‘지금’-‘여기’를 바라보려 한다. 그는 ‘이상’의 ‘도주’에 대해 말하다가도 ‘김진숙’의 ‘점거’에 대해 논한다. 이 둘은 “현재의 고통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합수중”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 난데없는 침입이야말로 ‘이상’이라는 문제제기가 온당히 반복되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가 ‘이상’을 파국의 지형도 속에 넣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고, 초인의 시선을 부여하고, 절멸이자 구원의 시를 노래하게 하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것이야말로 어디까지 오염된 것인지도 모르는 후쿠시마의 방사능과 프레카리아트들의 불안과 냉소, 냉전질서의 반복조짐, 부정선거의 음모 등이 난무하는 ‘지금’-‘여기’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도의 윤리란 신의 말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반복시키는 일에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까마귀가, 엑스레이의 투시가, 예수 아니 바울이 다시 필요한 것이다.

 시인들은 종종 성인의 페르소나를 사용한다 자신의 시집을 ‘새로운 성경’이라고 부르며 사랑의 이미지를 주조한 월트 휘트먼의 ‘예수’, 지천명의 윤리 속에서 자기성찰을 꾀한 김수영의 ‘공자’, 시인이란 세계를 주유(周遊)하며 보살피는 ‘석가’나 ‘수운’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역설한 신동엽이 그렇다. 이들에게 성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자기이해 그리고 그로 인해 세워지는 새로운 “도덕질서의 이미지”(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음, 2010. p. 49.)까지 포함한다. 윤인로는 이상에게 ‘예수’의 페르소나가 있으며, 이는 세계의 파국을 목전에 직감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작동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의 부스러기를 구원하자는 목소리가 아니다. 대신 “붕괴와 파국이라는 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일을 수행한다. 그는 근대의 속도를 제어하기보다는 가속화한다.

 그런데 이 속도는 빛의 속도를 지향하고 급기야 제로로 향한다. 먼 과거를 불러들여 마취시키는 ‘향수의 시’가 아니라 미래를 가속화시키는 ‘미래의 시’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속도에 중독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속도를 제로로 돌리기 위해 되려 빛의 속도를 지향한다. 폴 비릴리오에 의하면 원형의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달리는 일은 실상 정지상태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지는 빛의 속도와도 같을 것이다. 윤인로가 논하는 ‘도주-속도’와 ‘점거-정지’의 변증법은 이런 논리에서 성립하는 듯 보인다. 마리네티가 속도의 미학을 통해 윤리를 사상시켰다면, 이상은 속도의 윤리학을 통해 미학을 부숴버린다. 윤인로에 의하면 이러한 파괴가 시인에게 ‘장래’에 대한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하고 강제한다. 즉 아름다움이 아닌 책임을 안긴다.

 또 이러한 자기소멸은 도착적인 죽음충동이 아닐 것이다. “갈갈이 찢어진 사도의 몸이 법을 기립시키고 재정초하는 장소”(5회 연재분)가 되기 때문이다. 각혈에 물든 이상의 몸은 병리학적 대상이 아니라 “분만된 보석”이 매번 거듭 탄생하는 장소인 것이다. 여기에 작동하는 메시아의 윤리는 아버지-신의 명령을 따라 죽어야 할 운명에 직감하고 체념한 일이 아니다. 윤인로에 의하면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윤인로는 시인 이상에 대해 속도중독이 아닌 초속도-정지로, 도착적 죽음충동이 아닌 (반복적으로) 도래할 역사의 기다림으로 그 이해의 축을 변경하고 있다. 이는 이상 텍스트 해석학에 한 조각을 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인로의 글은 시인 ‘이상’의 문학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한 비교연구 같은 것도 아니다. 특정한 종교적 표상이 작품 속에 반복되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대신 임박한 파국에 맞서는 윤리적 주체를 ‘이상’을 통해 고민해보는 일은 중요하다.

윤인로의 글은 해석학의 놀이가 아니라 윤리학의 명령을 수행중인 것이다. 대체로 윤인로의 기획에 동의를 하는 듯 보이는 필자의 글은 그러나 그 모자란 만큼의 차액을 내놓기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오영진 : 현대시를 연구하면서 동시에 문화론으로도 그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최근엔 당대의 감정의 구조같은 것을 포착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문화평론가(잡지 쿨트라2014 봄호 데뷔), 수유너머N 회원, 인문학협동조합 교육복지위원장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