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해체 (3)  

 

 

 

소설가 金 飛

 

 

 

 

 

 

 

 

 모두가 말하듯이, 결혼은 사랑의 도착점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따라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어쩌면 순진하게도) 결혼이라는 것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모성의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고독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삶이라는 시간 속에 잠시나마 누군가와 함께 그 고독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다가 다시 또 홀로 죽음이라는 삶을 마무리하는 고독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에 대한 그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 어떤 제도나 사회적 제약이 있건 없건, 어차피 모든 결혼은 사랑이라는 몸체를 지녔고 그 나머지는 그곳에서 뻗어나온 무수히 많은 부수적 논쟁이나 논란일 것이다. 21세기의 결혼 앞에 사랑은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결국 모든 결혼이라는 관계가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와 현실이 아무리 그것을 농락하려고 해도, 사랑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또 하나, 혼란 속에서 경계 위에서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반드시 해체해야 할 것은 '가난'이다. 어쩌면 '가난'이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득세한 이 시대를 환기할 때 가장 치명적이고 위태로운 현실을 일깨우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어차피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살고 있기에 인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 물질문명의 자본주의 세계는, 그래서 계속해서 '인간'이나 '사람'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난'은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지만 나는 그러한 '가난'의 풍경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한다.

 

 가난하다는 말은 자본의 시대에서 도태되어 있다는 선뜩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가족중심주의의 한국 사회는 서로 주고받으며 자본과 부를 대물림한다. 결국, 가난의 운명은 쉽게 전복되지 않으며, 사회나 시대에 대한 박탈감은 더욱더 그러한 숙명을 지닌 개인을 억압하게 마련이다. 거기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린 교육 현실이 가난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교육을 통해 계층 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은 단순히 계층의 대물림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는 말은 이 시대의 잔혹한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가난'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참으로 맞춤인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는 인간,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는 없는 인간. 도태되고 소외되어 홀로 떨어진 자유로운 인간. 물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가장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시대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인이 자본이라는 세상의 틀을 벗어버리고 오롯이 개인의 인간됨을 사유하고 그것을 확장하여 소외되고 버려진 인간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척박한 사회가 도착하게 될 미래의 어느 어두운 모퉁이에 생명의 빛처럼 내리쬘 수 있는 고귀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나 스스로도 내 생각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판타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던 나의 가난을 떠올리며 나는 왜 그때의 그 가난에 매몰되어 있기만 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물네 시간을 정신없이 짓누르는 가난한 일상이 나의 사유와 고민의 여유마저 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가난 속에서 인간을 사유하고 생을 사유하는 일이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리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가난에 짓눌려있던 그 시간이 가끔 몸서리치도록 후회스럽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정체성이라는 혼돈을 짓밟고서,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의 가치 있는 생을 살기 위해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면,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 피어난 경계 위의 꽃처럼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가난해도 괜찮은 삶을 꿈꿀 수 있었을 텐데.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인간을 깨우치는 삶을 받아들여, 평생 가난 속에 묶여있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공존하는 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의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가난은 숙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을 매몰시키는 증거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계 위에 서 있는 위태로움은 때로는 탁월한 균형감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기도 한다. 생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최악의 조건이나 환경도 삶의 마지막이 아니며, 그곳은 또다시 가볍게 몸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부여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어느 것이든 '예술'에 흠뻑 몸을 담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엄청난 돈을 들여 '예술'이나 '예술가'를 사고파는 시대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의미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 예술 또한 모든 인간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향유하는 그 중심일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돈이나 물질에 기댈 필요는 없는 것일 테고.

 이 잔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의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난이 농락되도록 허락하지 않으며, 가난과 고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 앞에 예술로 탄생시켜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 척박한 현실을 뚫고 일어선 기적의 풍경일 것이다.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시련의 한가운데일수록 그렇게 태어난 나를 위한 예술품들은, 그 어떤 화려한 자본의 생산품보다 뼛속까지 나를 위로하는 고마운 생의 선물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모두 가난하다. 자본의 유무, 혹은 부의 크기에 따라 가난을 가늠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 만족하는 부유함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가난의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난이기도 하고 또한 결핍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결핍되어있기에 공존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할 테고.

 그러므로 나는 인간은 반드시 가난이나 결핍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거나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이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사유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지켜야할 것이다.

설령 그 속에서 그 어떤 예술이나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물며 그 안에서 인간이나 삶을 건져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가난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결핍이나 가난은 분명히 위로되고 위안받게 될테니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바로 나의 삶이 있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아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결핍과 가난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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