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동-참새와 제비가 사는 마을

 

 

金 飛

 

 

 

 

 

 

  어떤 이름에는 분명하게 환기되는 것들이 있다. '바다'라고 하면 푸른빛 물결과 모래사장이 떠오르지만 우리는 그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잊게 마련이고, 그 바다가 허락한 존재의 시간을 감히 가늠하지 못한다. ''을 떠올리면 반드시 올라가야하는 정상이나 초록의 풍경들을 생각하지만, 진정한 산의 이름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으며 그 어떤 산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기억한다는 것은 망각한다는 것이며,

알고 있다는 것은 곧 모르고 있다는 참혹한 고백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산을 알기 위해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산자락이었고, 익히 알고 있는 마을이 아니라 모르는 마을이었다. 금정산은 부산의 지붕이라 하여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며 17킬로미터의 금정산성이 길게 뻗어 있어 일 년 내내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분주히 오고가는 명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금정산이나 금정산성이 아니라 그 산 자락에 파묻혀 길게 뻗어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이 바로 내가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찾아간 금성동이었다.

  금성동은 크게 공해부락이라고 알려진 공해마을과 죽전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 죽전마을로 향했다. 금성동 주민센터에서 버스에서 내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정산을 향해 산성 쪽으로 올라간 반면 나는 그들에게서 홀로 떨어져나와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정산과 금정산성을 찾는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카페들이 커다란 간판을 드리우고 있는 너머에, 주민들의 마을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꽃 한 송이와 악어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금성초등학교의 교문이 보였다. 초등학교에 들어서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던 것은 운동장 한 켠의 스탠드를 빽빽이 채운 아이들의 그림이었다. 보통은 다양한 이름의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채워넣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곳엔 아이들 스스로가 예술가가 되어 자신들의 그림을 빼곡히 채워넣고 있었다.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꿈을 목격하는 일은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초등학교를 빠져나와 나는 마을의 바깥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벽에는 무수히 많은 낙서들이 포개져 시간의 문양을 만들어 놓았고, 양지 바른 곳에 내어놓은 의자 옆에 엄마의 심부름을 하는지 여자 아이 하나가 쓰레기봉투를 내어놓다가 나를 보았다. 외지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텐데도 아이는 스스럼없이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나도 아이에게 '그래, 안녕?' 말해주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인사 한 번으로 나는 환대라도 받은 듯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봄꽃들이 흐드러지는 봄날 한 낮인데도 어느 집의 굴뚝에서는 새 하얀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뜨겁게 데워져야하는 시간이 필요한지 새 하얀 구름과 뒤섞이며 그 풍경은 묘하게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들이 박혀 있는 비탈에 세워진 허름한 집과 그 건너편에 새로 지은 근사한 전원주택은 괜스레 들뜬 마음을 시리게 했고, 나는 산비탈에 위태롭게 세워진 집 쪽으로 다가가려고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다시 돌아내려왔다. 나의 발걸음이 그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남루한 시간이 반드시 악몽은 아니란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앞에서 멀리 사진 몇 장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또 다른 골목을 가로지르며 나는 새로 지어진 주택들과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허름한 집들이 뒤섞여 있는 풍경을 보았다. 똑같이 소중한 시간을 지나온 그들의 현재가 서로에게 상처나 쓸모없는 박탈감을 주지 말았으면, 나는 그렇게 엇갈리는 풍경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꾸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켰다. 다행히 빼꼼히 열린 허름한 집의 문틈 속에서 어느 가족은 봄 햇살을 받으며 여유로운 점심 식사를 나누고 계셨다. 그 정겨운 시간에 폐가 될까 나는 그 집 대문 옆에 나란히 달린 문 두 개를 사진 속에 담고는 또 다시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쪽파를 심은 화분 몇 개는 줄을 맞춰 나란히 몸을 말리고 있었고, 새로 지어진 연립의 벽에는 똑 같은 모양의 계량기가 다른 숫자를 턱 밑에 새기고 나란했다. 아무리 서로 다른 시간을 건너왔더라도, 우리의 미래나 희망의 간극은 그토록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더라도 결국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겠구나.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버린 골목을 다시 거슬러 내려오면서 나는 어느새 모두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웃이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 다시 등산객들이 분주한 큰 길을 건너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사슴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공존의 이미지를 새긴 난간이 보였고, 누군가 벽에 그려넣은 여러 가지 시구절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 '제비가 철새고 참새가 주인인데, 제비가 참새를 죽일 수 있겠소.' 하는 구절은 이곳에서 일상의 삶을 지어가는 그들의 바람이자 믿음처럼 읽혔다. 아무리 달라지고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바람,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이 오래도록 계속 이어지리라 믿고 싶은 그들의 믿음.

 

 

 

 

 

 

  종점인 죽전 마을 정류장에서 나는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벚꽃이 흐트러진 가로수길을 따라 공해마을로 가니 일찍 부지런을 떨었던 등산객들이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남문 정류장에서는 또 다른 무리의 등산객들이 버스에 몸을 실었고 자신들의 특별한 여정을 기억하느라 그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고불고불 이어지는 금정산 산자락을 따라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향했고, 맨 앞자리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던 나는 어리석게도 하늘 속에서 참새와 제비가 나란히 같이 나는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름이 없는 하늘을 훼손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의 터전과 유영을 존중하며 즐거이 노닐 수 있는 광경을. 그러나 속상해선지 부끄러워선지 자꾸만 내 얼굴은 붉어지고 있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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