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동 참여형 설치-답사-놀이

을 켜다

 

아프콤이 진행하는 <로컬 來人> 2회 행사인 환을 켜다는 부산의 가장 오래된 지역인 중앙동 일대를 돌아보며,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여러 샛길들을 찾고, 참여형 설치미술을 통해 함께 놀이하고, 역사학 전문 강사와 함께 일대를 답사하며 이야기로 풀어내보려는 시도입니다. 하여 설치와 답사 및 촬영으로 이루어지는 이 프로그램에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 신청을 받습니다!

 

affcom11@gmail.com

간단한 자기소개와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만나서 함께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아♥

 

 

 

幻을 켜다 幻과 시간의 켜를 통해 이야기를 돌이켜보다

 

삶은 시간의 켜다. 혹은 이미지의 켜다.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는 일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거기 포착된 시간 뿐 아니라, 포착되지 않은 무수한 시간의 켜들을 본다. 나의 삶을 구성하는 무수한 물질적인 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마모되어 가지만, 그 덧없음은 이미지 속에, 기억 속에 간직된다.

 

그래서 이미지와 기억은 인간의 삶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기억, 그 환영이 삶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따라서 우리의 삶의 물질적 조건들은 매시간 幻으로 몸을 바꾼다.

허니 우리 삶은 물질과 幻의 자리바꿈과 변용으로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삶은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삶은 오히려 幻 속에서 그 빛을 더욱 발한다.

어떤 幻을 만드는가는 어떤 삶을 사는가와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인생의 매순간 내가 마주한 장소를 사람을, 시간을 幻으로 변용한다.

사진, 이미지, 회화, 건축, 문학, 영화, 음악.

인간이 존재한 이래 지속된 예술은 모두 이러한 幻의 저장소이다.

 

하여, 내가 마주한 장소, 사람, 시간을 幻으로 변용하는 능력은 인간 누구나 평등하게 지니고 있는 역능이다.

 

장소, 사람, 시간을 환으로 변용하고, 또 그 幻(이미지, 사진, 문학, 영화)의 켜들을 통해 삶의 켜들(역사)을 다시 만나보자.

 

 

 

일정 및 장소

 

 시간: 20131026() 1~ 630

 장소: 부산 중앙동 40계단 및 그 일대

 

<타임 테이블>

<비고>

공연 시작 전

퍼포먼스로서 나타나는 하나의 축제의 장

공연 전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노래와 춤, 악기 공연

1303

기조 강연 및 아리아드네의 실

간단한 이야기와 작품 설치

3- 5

중앙동 거리 답사

전성현 교수님과

참여자

5630

게시판 작업

 

 

 

각 코너의 세부적인 내용은 이러합니다~

 

  1) 장소의 과 이야기의 켜: 권명아

장소가 문자 내러티브에서 어떻게 환의 켜를 쌓아가는 지 문화연구자인 권명아 선생님의 강좌

 

  2) 아리아드네의 실

1)의 이야기와 함께 중앙동 일대에서 기억과 삶의 를 마을 곳곳에 엮어가는 참여형 설치와 퍼포먼스

 

  3) 역사의 과 기억의 터 : 전성현

 중앙동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와 기억, 그리고 현재의 장소 속에서 만나보는 역사 산책을 역사연구자이신 전성현 선생님의 안내로 나설 예정이다.

 

 

 

 

신청 접수: 아프콤 이메일 (affcom11@gmail.com)


 

후원: 부산문화재단

본 행사는 부산문화재단 2013년 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의 일부 지원으로 진행됩니다.

 

 

 

 


 

[프레시안 books] 권명아의 <음란과 혁명>

이승원 <사라진 직업의 역사> 저자·인천대학교 초빙교수 

2013-08-02

 

 

 

 <춘향전>은 음란소설일까?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인 국민소설을 음란물로 치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청소년인 춘향과 몽룡이 광한루에서 만난 지 채 열 두 시간도 되지 않아 거사를 치른 상황과 "귓밥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 같은 혀를 물고" "이불 안에서 쌍쌍이 날아드는 비둘기같이 꾹꿍 끙끙 으흥거려 뒤로 돌려 담쏙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떠는 장면 묘사를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고전이니, 문학작품이니, 예술성이 있으니 괜찮은 것일까. 실제로 1900년대 초 <춘향전>은 '음탕소설'로 지목되어 계몽 지식인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뿐만 아니라 <홍길동전>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질타를 받았다. 어쩐 연유에서였을까.


당시 조선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춘향전>과 <홍길동전>은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작품에 불과했다. 청소년은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이다. 이들이 <춘향전>을 읽고 일찍 성욕에 눈을 뜨고, <홍길동전>의 허황된 이야기에 흠뻑 빠져 현실을 무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일부 계몽지식인들은 계몽주의와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인간의 감성을 통제하고 훈육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향전>과 <홍길동전>은 '청소년 풍기문란물'이었던 셈이다.

▲ <음란과 혁명>(권명아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1940년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홍길동전>이 또다시 문제가 되었다. 일본의 작가 나카오카 히로오(中岡宏夫)가 <홍길동전>을 신시체로 개작했다. 일본의 통치 권력은 <홍길동전>을 "조선 내 풍속 괴란"이란 근거를 들어 검열했다. <홍길동전>의 개작 내용 중에 "공산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점"이 있다는 이유에서였으며, 이 공산주의 색채가 조선의 풍속을 괴란시킨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대체 풍속이 뭐기에, 도대체 풍기문란이 뭐기에 지식인들과 통치 권력은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 책이 바로 권명아의 <음란과 혁명>(책세상 펴냄)이다. <음란과 혁명>은 풍기문란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자, 한국 근현대사 100여 년의 역사를 풍기문란의 관점에서 탈구축한 역작이다.


저자의 분석처럼 풍기문란은 음란과 짝을 이루는 말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풍기문란은 단순히 포르노그래피나 화류계에서 펼쳐지는 불구적 욕망의 배설만을 뜻하지 않는다. 풍기문란은 통치 권력에 의해 "부적절한 정념"으로 치부되는 것이자, "그 자체로는 규정을 갖지 않는 무규정적인 개념"으로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인 것이다.


한국에서 풍기문란에 대한 단속과 통제의 역사는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한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통치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풍속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성(色), 마약, 음주, 도박, 음란물, 사치(과소비), 복장, 끽연, 영화, 광고, 놀이 등 일상의 전 분야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이라는 이분법을 적용하여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했다. 이른바 황국의 신민화의 전략 중 하나였던 셈이다. 이렇게 탄생한 풍기문란죄는 해방 이후 냉전 체제를 지나 오늘날의 일상에도 존속되고 있다.


결국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풍기문란죄는 "전형적인 파시즘적 법제"이자 인간의 감각과 정념과 정동에 대한 "사전 검열"이자 "정신 개조와 생활 개선이라는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 "삶에 대한 총체적 지배와 개조"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하는 식별법이며, 건전함과 건전하지 못함의 이항대립을 통해 국민(들) 사이를 적대적 관계로 재정립하는 식민 통치 기술이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풍기문란죄는 해방 이후 남한의 냉전 체제 속에서도 그대로 이행되었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는 식민지의 유산인 셈이다. 풍기문란은 1970년대에 이르러 망국과 퇴폐의 논리에 근거하여 단속되고 통제되었다.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 등은 애교에 가까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목적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가 아닌 자의 삶을 구별 짓고 구획해 나갔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닌 자의 삶이란 사회적 통념이라는 두루뭉술하고 무규정적인 근거에 위배되는 삶이자 "다스릴 수 없는 자들"의 삶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통치 권력은 국민의 풍기를 단속하려고 했던 것일까. 풍기란 일종의 정념의 흐름이자 정념이 세상을 물들이며 형성되는 풍경이다.

"사랑·열정·분노·분개 등의 정념은 특정 주체로 하여금 사회적 연대나 정치적 결사로 이끄는 동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반대로 다른 주체들에게는 사랑·열정·분노·분개 같은 정념이 사회적 연대나 정치적 결사에 미달하는, 부적절하고 문란한 결속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간주된다."(248쪽)

문란한 정념이란 성적인 열정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말이 아니다. 문란은 특정한 통치 권력이 만들어 놓은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는 모든 정념, 열정, 감각, 정동을 뜻한다. 그리하여 문란함에 대한 단속, 즉 풍기문란에 대한 규제와 단속은 곧 "폭력적인 절멸의 정치"와 다름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 총독부 권력이 조선인들의 풍기문란을 단속하면서 시작된 음란과 문란에 대한 통제는, 4.19혁명의 실패와 5.16쿠데타 그리고 냉전 체제와 개발독재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청년과 학생들의 문화를 미시적으로 감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또한 <내게 거짓말을 해봐>(김영사 펴냄)를 쓴 작가 장정일을 음란범으로 만들고 그를 풍기문란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통치 체제가 규정한 선량한 시민이 아닌 모든 자들은 곧 내부의 적이자 척결해야할 사회의 악이 된 것이다.

이 책의 요지는 '풍기문란을 허하라!'라는 단순한 구호이거나 풍기문란자들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차이의 문화를 인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음란과 풍기문란이란 개념을 통해 이 척박한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풍기문란이라는 무규정적인 개념의 정치성과 통치성이다.

"불안은 기존의 인간주의적 개념인 정념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논하자면 한국인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정념이자, 사회적 권력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정동이다."(348쪽)

"한 인간 존재의 삶의 반경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정해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구조이고 체계이고 이데올로기이며 통치성이다."(308쪽)

대한민국 통치의 역사는 불안을 숙주로 삼아 지속되어 왔다. 불안의 증거는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실체 없는 실체였다. 풍기문란은 부적절한 정념이자 불온한 정념이다. 불온한 것은 통치의 규율로 포획되지 않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기에 통치 권력은 언제나 그 불온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절멸하려 든다. 그러나 그 부적절한 정념과 불온한 정념은 불합리한 세계의 견고한 아성을 언젠가는 균열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제6화 전환의 두 얼굴

 

소설가  金 飛

 

 

 

 

 

 

 

 

  그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생의 전환은 아주 달콤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왔던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짓눌리다가,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는 행위는 그 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너무도 또렷하고 선명한 해답처럼 느껴진다.

  오랜 기간의 직장 생활을 통한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또한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에 짓눌려 너덜너덜해진 자아를 가지게된 누군가는, 당장 그 회사를 그만두고 한적한 동네의 모퉁이에 작지만 향기로운 카페 하나를 갖는 극적인 전환만이 자신의 삶을 일으키는, 늦었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히 필요했던 완벽한 생존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라고 믿게 된다.

  결혼이라는 판타지가 허물어지고 육아와 가정이라는 현실에 시달리는 주부라는 이름의 누군가에게, 혼자서 마음껏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재단하는 싱글 여성의 모습, 혹은 오직 자신의 꿈만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독신 여성의 모습은 결혼생활이라는 분주하고 어지러운 현실을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며, 또한 전환일 것이다.

  부모의 억압과 속박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는 가출이, 책임과 구속이라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짓눌려있던 누군가에게는 싱글의 삶이 자신을 구원해줄 생의 '전환'일 것이며,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고시원을 돌며 전전긍긍하는 실업자에게는 4대보험이 보장되는 근사한 기업으로의 취직이,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한 모태솔로들에게는 누군가와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기분을 가져보는 일이 자신의 지루한 삶을 구원해줄 유일한 '전환'일 것이다.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위에서 나는 여러번 반복해서 '전환'이라는 구원의 방식을 말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맞물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전환이 삶의 구원이고, 억압되어 불안한 시간들을 지워줄 수 있는 탈출구라고 말했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전환들은 이상하게도 서로 반대 쪽에서 이어져 있다. 서로의 전환이, 바로 누군가가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불안이고 또한 억압이었다는 사실. 서로의 억압이고 불안이었던 경계 안 쪽이, 바로 누군가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전환의 그 한 가운데였다는 사실.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이란, 처음부터 그렇게 두 얼굴을 지녔다. 언제나 우리는 한쪽 얼굴만을 바라보며 그 반대편을 상상하지만, 거기에는 이 쪽을 상상하며 갈구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우리들을 경계 안으로 몰아넣고 억압하던 영악한 세상의 권위는, 끔찍하게도 이것을 다시 자신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더욱 공고히하는 근거로 악용하기도 한다. 어차피 경계의 너머도 여기 너희들이 서 있는 경계의 안 쪽처럼 똑같은 반 쪽의 상실이며 불안일테니, 경계를 넘으려고 애를 쓰는 행위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괜한 시도라고 단언하면서, 야비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이자 또 다른 층위의 억압을 설득한다.

  기다란 책상 위에 선 하나를 그어놓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좁고 답답하다고 느끼게 되었던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두 사람 모두는, 어느 순간 과감하게 '전환'을 시도하며 서로 자리를 바꾸어앉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상대방의 공간이 더 넓고 자유로우며 전환으로 내가 얻게 된 공간은 여전히 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모든 각오와 용기를 끌어모아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란, 결국 그렇게 단 하나의 절대적 위로이자, 또한 그렇게 반드시 마주해야하는 위협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전환은 너무도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달콤함 정도가 아니라, 그 동안 홀쭉했던 내 자아의 어딘가를 포만감으로 가득 채우는 경험이었다. 웅크렸던 몸을 펴고 나는 마음껏 세상을 질주해 다녔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기 위하여, 나는 머리를 길렀고 화장을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예쁜 화장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화장품을 가져다가 발라보기도 했다. 예쁘고 화려한 치마를 입어보기도 하고, 높은 구두를 신어보면서 거울 속에 비춘 내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완벽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여성스러운 말투와 몸짓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여성스럽지 못한 것들을 내 안에서 짚어내고 그것들을 지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곰곰히 생각하고 연습했으며, 내 걸음걸이와 행동들의 어떤 부분이 여성스럽지 않은지 일일이 따져가면서 '여성'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의 몸짓을 흉내내느라 나는 적잖은 땀을 흘려야했다.

  얼굴이 너무 큰데, 코가 너무 작은데, 그리고 눈도 너무 작잖아? 여성스럽지 못한 것들을 내 안에서 발견할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소스라치며 그것들을 지우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성형수술을 해야하는 건 아닐까, 큰 키는 수술을 할 수도 없는데 어쩌지? 나는 어느 순간 전전긍긍하며 어떤 것들에 쫓기고 있는 나 자신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 뿐만 아니라,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보다 더욱 더 심한 본능적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채찍질하며, 세상이 그어놓은 또 다른 반쪽의 경계 너머로 나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거기는 또 다시, 불안을 지우려고 여러번 그었던 반대쪽의 경계 안 쪽이며, 결국엔 잔뜩 쪼그라든 상자였다. 나는 어느새 필사적으로 내가 빠져나왔던 그 상자 속으로 천천히 다시 걸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환은 그렇게 다른 얼굴을 내밀며 우리들을 유혹한다. 멀리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작정 아름다워보이는 자연적인 섭리를 이용해, 전환은 가장 먼데 있기에 가장 거부하기 힘든 유혹으로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앞에서 나는 경계로 인해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갖게 되며, 그것이 쌓여 우리들의 불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건 반대 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경계 너머의 아득한 반대편으로의 전환은, 바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여기 이 억압되고 짓눌린 구석에 몰린 이 자리와 꼭 닮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직장을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전환'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누렸던 권위의 안정감을 '상실'하게 되고, 결혼 생활의 억압이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고통 받던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관계라는 경계로 인해 유지되고 있던 안정감을 '상실'하며 외로움이라는 또 다른 불안을 마주해야하는 것이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불안을 다스리는데, 우리의 상실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어떤 마음 가짐이어야하는가를 아주 손쉽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해답이란 처음부터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에 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전환이란 또 다른 이름의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며, 거긴 그토록 아름답게만 보였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자아의 실현을 위한 해답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상실과, 그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으로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발걸음만 성급하고 지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매달렸던,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의 뒤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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