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판자와 공

 

소설가  金 飛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며,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하나의 판자(板子:널빤지)를 부여받는다. 세상이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계에 순응하고, 자신의 안정감을 위해, 그것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폐기시키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판자의 크기를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무조건 크고 넓은 판자라면, 나를 더욱 더 안정감 있게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때로는 두 팔로 들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로 그 판자를 넓혀간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자신을 깔아뭉갤 듯한 그 위태로운 판자를 아슬아슬하게 들고서도, 자신은 제일 안전하고 바람직한 최고의 삶을 살고 있으며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삶이란 애초부터 판자 위에 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동그란 원형의 공 위에 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공유'하도록 만들어진 우리들의 세상이란 어디로도 구를 수 있는 공의 세계이며, 인간이란 결코 혼자 설 수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야하는, 말 그대로 공처럼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일 테니 말이다.

그 위에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드는 일이란 처음부터 인간의 어리석음이었을 뿐,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한다고 말하며 인간은 언제나 제일 어리석고 안타까운 길을 걸어왔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리 크고 넓은 판자를 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들고 공처럼 둥근 삶 위에 서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삶이라는 공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하나씩 들고 있는 거대한 크기의 판자였다. 삶이란 모든 가능성이고 그래서 그것은 공 같은 모양의 위태로움이겠지만, 최소한 그 위에 판자를 대고 올라서려는 무모한 불안감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판자가 크면 클수록 흔들림은 더욱 심해지고 위태로움은 또한 그만큼 증폭된다. 보기 좋고 훌륭하며 제일 넓은 널빤지를 갖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위태롭고 불안한 자아와 자주 맞닥뜨리고 마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그 동안 무수히 많은 경계를 그어 안정감을 도모해왔으면서도 제일 안 쪽의 경계에 서서 더욱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는 안타까운 우리들의 현재인 것이다.

 

결국,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할 일이다. 무겁게 양 손에 잔뜩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그 동안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불안을 덜어가는 그 첫걸음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단단하게 지켜왔다고 생각했던 생각의 경계를 조금씩 지워나가기 시작해야, 어딘가에 갇힌 것 같았던 스스로의 불안감이 조금씩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안정감을 지켜왔다고 믿었던 경계가 또 다시 '강박'의 힘을 작동시키겠지만,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던 그 경계의 너머도 또한 원래 우리들의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의 잣대로 만들어진 세상의 경계 너머로 우리들 스스로가 폐기해버려 상실했던 것일 뿐, 결국 그건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졌던, 우리들의 것이었다. 모든 미지의 것들이 가장 먼저 두려움으로 환기되듯이 그건 분명 위협적으로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분명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야할 나머지 반쪽이었다. 어쩌면 인간은 우리들 스스로 버리고 폐기해버렸던 그것들 없이는 결코 안정적인 자아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상자 앞에 섰던 그 때의 나도, 어리석게도 그렇게 지탱할 수 없었던 세상의 판자 아래서 버둥거리며 상자 속의 밀폐된 삶만을 꿈꾸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의 억압을 피해, 가장 끔찍한 고립과 밀폐의 공간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렇게 삶이 아닌 조그만 상자 속에서 시간의 종언을 준비하다가 나를 일깨운 것은 '해보고 죽으라', 어느 이방인의 아주 단순하고 과격한 말이었다.

그래, 어차피 똑같은 세상에 대한 종언이며 삶의 마지막일 테니, 상자 속에서 죽으나 경계 바깥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가 몸을 돌려 상자 바깥으로 첫 발을 내디디게 한 첫 번째 동력이었다. 그건 아마도 극도로 짓눌려 있었기에 가장 높이 튀어오를 수 있었던 '강박'의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모든 사람들이 '안정'되고 '옳다'고 말했던 경계 안 쪽이 아니라, 경계 바깥쪽으로 몸을 움직여 한 발 내딛게 되었다. 세상의 말대로라면 거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하고 잔혹한 세계여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경계 너머에 발을 내디딘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 바깥으로 넘어오니 그 동안 나를 짓눌렀던 경계 안쪽의 무게가 스르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지금쯤 폐기된 것들의 끔찍한 철퇴와 불안이 내게 휘몰아쳐야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경계 바깥에 서서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벗어버린 몸이 가벼워졌고, 경계 안쪽에 살며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뿐이었는데, 나는 그 속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었기에, 기대나 희망 따위는 오히려 내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내 발걸음은 겁 없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경계 안쪽에서는 한 번도 뛰지 못했던 질주였는데, 텅 빈 어둠 속에서 나는 마음껏 끝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또 질주하며 되돌아왔다.

온 몸에 열이 오르며 땀이 흘렀다. 생전 처음 느껴지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나는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니 나 혼자 내 길을 찾아가면서 느리고 어눌했지만, 한 발짝뿐인 걸음도, 누군가 타인이나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의 것이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내일도 딱 그만큼만 나아가리라 다짐하는 내 모습은, 모두가 '그래야한다'고 말했던 세상이 만든 경계 안 쪽에서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나의 미래를 내 손으로 그려가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거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지만, 두근거리는 내 심장은 불안이 아니라 '설렘'이었다. 비로소 나 자신의 삶을 내 스스로 찾아가는,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자아의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판자를 팽개쳤다. 아니, 나는 강압적인 세상의 경계로 인해 나의 판자를 빼앗겨 밀쳐지고 말았다. 나는 그것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를 안정되게 지탱해줄 것은 사라져버렸으니 나는 어디론가 까마득한 추락이나 몰락만을 기다려야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덕분에 나는 맨 발로 공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위태롭고 흔들리며 당장에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며 그 흔들림은 덜하고 불안은 조금씩 설렘이 되어갔다. 천천히 다리를 벌리고 발을 움직여 휘어진 면에 맞추어 두 발을 대고 서 있으니, 불안감이나 위태로움은 어느새 지워져버렸고 나는 조금씩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상이 만든 판자가 아니라, 삶이라는 둥근 공 위에 맨 몸으로 서서 나는 그렇게 조금씩 균형을 잡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잔뜩 웅크린 모습이 아니라 두 팔을 활짝 벌리면 안정감이 더해졌고, 제 자리에서만 발을 통통 구르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벌리면 벌릴수록, 다리를 더 동그랗게 만들면 만들수록 나는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손끝에 누군가의 손이 맞닿게 되면, 어디선가 나처럼 판자를 버리고 공 위에서 균형을 잡는 누군가의 흔들리는 손을 만지게 되면, 아슬아슬하게 공 위에 선 내 몸은 자연스레 그 쪽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과 손을 잡으면서 내게 존재하던 불안이나 위태로움은 더욱 더 말끔하게 지워져갔다.

손을 잡은 그들은 내가 모르던 공 위에 서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주었고, 그의 손을 잡은 또 다른 누군가는 공 위에서 자기만의 묘기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불안과 위태로움을 바라보아주면서, 어느새 나는 공 위에서 흔들리며 삶을 꿈꾸고 있었다. 여전히 위태롭고 불안했지만, 그건 세상의 경계 안쪽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이었으며, 내 생애 처음으로 발견한, 미래라는 걸 꿈꾸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흔들린다는 건 불안이나 위태로움이 아니라,

그건 가능성이었다.

 

 

 

 

 

 

제4화 순응하는 불안

 

소설가  金 飛

 

 

 

 

 

 

 

 

돌아보면, 나 자신도 마찬가지 그렇게 상자 속을 넘나들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런 경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남자' 혹은 '아들'이라는 경계로 호출되면서, 나는 필연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불안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기억에서 지우거나 무시할 수 있는 상실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건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만든 그러한 경계의 안 쪽이 내가 있어야할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어리석었다. 폭력적인 세상의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도 나는 겨우 울음을 터뜨릴 줄 밖에 몰랐던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그렇게 위협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경계를 그었던 권위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일이었다. 이것은 불안한 자아를 가진 인간이 자연스레 자신에게 주어진 체계나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권위에 굴복하며 생존을 꾀하는 방식인데, 위기에 몰렸던 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생존하기 위하여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안의 남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들의 걷는 모습과, 말투, 그리고 행동 양식들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것을 목표로 훈련 계획을 치밀하게 만들어 이행했다. 그들과 똑같은 모습,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속의 보통 사람들과 꼭 닮은 모습이 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믿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내게 주어진 것이란 오직 그것 뿐이었고,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만들어져 하나의 길이 되어버린 곳으로 발길을 옮겼던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그 때에는 그것을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나약한 자아를 가진 자가 가장 쉽고 간편하게 자신의 안정을 꾀하는, '순응'이었던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위의 효력을 극대화하고 통제하기 쉬운,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인간을 생산해내는 제도나 조직을 우리들은 사회 곳곳에서 경험한다. 당연히 불쾌하고 불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가 당했던 일반화의 오류,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떤 경계 안에 편입되었던 자동성,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버린 경계의 안정감, 권위의 달콤함 등을 최고의 인간됨이라고 믿어버린 채, 그것들을 다시 주변의 누군가에게, 특히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에게 추천하여 그들을 자신과 같은 획일화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사회화'라는 이름의 '순응'이다.

'순응'의 습성이란 당연히 모든 종류의 불안을 느끼는 자들에게 해당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경계'로 인해 만들어지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순응을 통해 그 안정감을 도모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경계의 긍정적 의미를 환기시키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경계 안에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며, 그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 위해 경계 속에 순응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경계의 이쪽 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책상 하나를 두고, 쪼그라든 경계를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못했던 남자 아이 쪽에서도, 경계에 순응하기 위해 무수히도 여러 번 스스로를 합리화시켰을 것이고, 쪼그라든 경계를 바라보며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여자 아이 쪽에서도 마찬가지, 그건 여러 번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말해야하는 경계에 대한 순응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계 없는 그 커다란 책상 하나의 넓고 완벽한 안정감은 이미 그들이 가질 수 없는 상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 '순응'의 생존 방식에 성공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순응하는데 실패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을 '낙오자' 혹은 '패배자'라는 또 다른 폭력적인 낙인을 찍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성취자' 혹은 '승리자'라고 선언하며, 우리들 스스로의 안정감을 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성취하고 승리한 세계라는 것 또한 고작 경계 너머를 상실한 불안하고 협소한, 제일 작은 몫이며,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실패나 상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낙오자' 혹은 '바보 같은 패배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였고, 패배자였다. 나는 그렇게 믿었으며 그 사실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았던) 세상이 만들어놓은 '남자'라는 경계 속에 '순응'하려는 노력이 극에 달하면서, 나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려야했다. 날마다 무언가 목을 죄어오는 듯했고, 세상으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거울 속에 누군가 서 있었지만, 그건 낯설고 이물스러운 존재에 불과했다. 그토록 치열하고 열심히 '순응'하려는 노력으로, ''라는 존재는 세상 속에서 '증발'되어버리고 말았다. 남자의 모습으로 대학교까지 졸업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작은 골방에 처박혔던 것은, 영락없이 상자 안에 갇힌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자꾸 움츠러들고 짓눌리면서 나는 조금씩 내가 '순응'했던 세상에게 종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죽음만이 내가 도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경계였다. 그 속으로 파고드는 것만이, 세상이라는 경계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내게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최초의 주체적 결정, 혹은 (자아를 버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자아의 획득이라고 믿게 되었다.

'순응'할 줄 밖에 몰랐던,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자' 속에 갇힌 인간의 마지막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믿음이나 절박함은 또 다시 강박을 만들고, 공교롭게도 그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긋기'의 훈련에 의한 것이었으며, 경계를 긋는 행위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 모두들 믿고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을 그토록 치명적인 곳까지 밀어낸 그 뿌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우리들 자신을 벼랑 밖으로 밀어붙여야할 것만 같은 절박함에, 생의 마지막이자 최악의 강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고.

알코올 중독인 누군가에게는 술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의 문제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 안에 편입되지 못한 열패감이고 그것으로 인한 상실과 그에 따르는 우울 때문이며, 자신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극한에 다다른 '강박'일 것이다.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아든 누군가는, 그것이 자신의 삶이나 미래의 풍경과는 그리 큰 관련이 없는, 삶의 옳고 그름에 대한 근거가 절대 될 수 없는 숫자 몇 개의 수치화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극단적인 시도를 서슴지 않게 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경계 안 쪽에만 머물며 내내 안정되고 평화로웠다고 믿었던 그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대'라는 경계로 인해, 그리고 (사실 '획일화'일 뿐인) '성공'이라는 강박으로 인해 앞으로 남은 수 십 년의 가능성의 삶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긋는 경계가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건, 그 어떤 행위보다 폭력적이며 위협적인 건지도 모른다. 그것에 순응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라고 밀어내는 건, 우리들 자신은 물론 우리들의 다음 세대까지 벼랑 밖으로 밀고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존을 위한 것이라 말하며,

우리는 지금도 벼랑 쪽으로 걷고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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