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변이의 길

 

 

 

 

소설가 金 飛

 

 

 

 

 

  현대시대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기괴하다'는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을 목격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차원의 기괴함을 낳아 더욱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저 말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지키고 있다 말하는 '이성',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이성이나 진실은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회의(懷疑)하도록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진정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탓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가고, 또 다시 울부짖으며 인간을 찾아 헤맨다. 물론 그것 역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몸서리쳤던 바로 그 '기괴함'이다.

 

  변이는, 이토록 혼돈스러운 시대에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지나침인데, 그건 하필 인간답다고 외치는 이성과 진실, 혹은 규범이나 경계로 인해 더욱 높이 튀어오른다. 그리고 그건 또 다시 상상할 수 없는 층위의 깊고 무거운 불안을 우리들의 머리 위에 드리우게 되고.

 

  이것을 비단 현대 시대의 암울하고 종말론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극도의 불안과 억압에 시달렸던 인간이, 생존을 위해, 혹은 불안에 대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또 다른 극단적인 방식을 드러냈던 예는, 과거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도 분명하게 발견된다.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의 출현으로, 커다랗게 돌아가는 톱니 하나로 몰락해버린 인간이라는 존재가 상실된 자아의 내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하여 소비주의에 눈을 돌리게 되고, 스스로의 자아와 영혼을 살찌우려는 노력 대신, 물질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이는 외향을 화려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지배하는 권위를 획득하여 그 권위를 휘두름으로써 공허한 스스로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층위의 불안과 억압은 더욱 거대해졌다. 시스템이라는 하나의 기계 속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평등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불안과 억압은 또 다른 층위로 높이 쌓아올려져 버렸다.

  현대의 우리가 쉽게 접하는 각종 언론 매체의 외모 지상주의나,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집착 또한, 결국 그러한 자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불안의 열매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우려되는 것은,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포기해버린 인간이, 스스로의 상실과 불안에 대한 걱정스러운 징후임이 분명한 현실을 두고, 그것을 시대의 흐름, 혹은 변화되거나 발전된 세계의 당연한 순리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해버리는 경우이다.

  몇 만원의 돈을 위해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면서도 그는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자동차 한 대 값의 가방 하나를 들고서 행복해하면서도 그녀는 그것이 세상의 흐름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자신의 자신감이나 존재감을 회복시킨다고 선언한다.

  내 아이를 감싸기만 하고 보살펴 세상 물정 모르는 나약하고 힘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 이토록 위태롭고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낸 시대에 가장 바람직하고 선호되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방식인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하게 비틀려 있다. 종양이나 질환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미 너무 멀리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몇 만원의 돈은 고독이나 소외를 보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며, 번쩍거리고 휘황찬란한 텅 빈 가방 하나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자신감이나 존재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고, 내 아이에게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만능의 슈퍼부모가 되는 일은, 거친 일들까지 기꺼이 함께하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보여주는 일이거나 벼랑 밖으로 아이를 떨어뜨려 어떤 불안이나 상실도 떨치고 일어나 생존하는 초능력을 키워야하는 일이어야 함에도, 이상하게도 모든 것들은 기괴하게, 그것도 가장 부정적인 방향으로 뒤틀려있다.

 

  성전환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들의 전환 방식에도 마찬가지였다. 성 정체성 혼란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들에게 올바른 생존의 방식은, 진정으로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들을 떨치고 일어나 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일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체성 혼란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반대성으로의 수술이나 전환이 생존의 방법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성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성별 따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것 또한 또 다른 방식의 생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올바른 길, 혹은 안전한 길이라고 말하면서 전환하지 않은 삶을 맹목적으로 강요하고 설교했었던 것처럼, 반대로 성전환자라는 우리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반대성으로의 치료나 전환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불안을 지워줄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단 하나의 목표로 설정해놓고 그쪽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 바로 성전환자라는 이름의 우리들이 몰두하고 있는, 똑같이 기이하게 뒤틀려버린 생존의 방식이다.

  실제로 여자로 사는 것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생존을 위한 치료와 전환을 떠올리면서 무작정 반대성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생각하고 염두하며 그것에만 몰두한다. 여자로 전환하는 성전환자는 여성스러운 외모와 화장, 혹은 성형수술과 다이어트 등에만 몰두할 뿐 한 여성으로서 다시 태어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어떤 것인지 고민할 기회조차 갖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남성으로 전환하는 성전환자는, 남자로 '보여지는 것'만을 생각하며 근육과 수염을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남성적인 권위와 힘을 훈련하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성전환자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적인 여자, 혹은 여성적인 남자, 그도 아니면 그 모든 성의 억압에서 탈피한 초월적인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안타깝고 속상한 성전환자라는 우리들 속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자신도 모르는 무엇으로 인해 조금씩 변해왔다. 그것은 생존이거나, 혹은 '좋아진 세상'의 일면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인간의 생존, 인간의 존엄, 그리고 인간인 나 자신의 존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다.

  돈 몇 푼을 들고 그것이 소외나 불안을 위로해줄 것이라 말하며, 가방이나 자동차, 혹은 번쩍거리는 것을 가리켜 자신감이라 선언하고 있다. 미래를 준비한다고 말하며 통장의 잔고만을 떠올리면서 그것만으로 노후의 시간들이 안정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으며, 우리들의 미래는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 확신한다. 물질만을 쫓아 그렇게 살다가 죽는 누군가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일을,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주저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변이 또한 그렇게 두 개의 양면성을 지녔다. 그것은 인간 생존의 필연적인 과정이면서도, 또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몰락의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딘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 도착해있으면서도 자신은 길을 찾았다고 말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득문득 자신을 휘감는 불안감과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생존을 갈구하는 습성을 지닌 우리들에게 변이는 필연적이지만 그건 결국 또 다시, 두 가지 갈래길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물론 인간이 그 중심에 있지 않다면, 어느 쪽이든 퇴화의 길일 것이다.

 

 

[생의 뜨락] 지평선 혹은 수평선이 사라져버린 삶

 

 

 

최혁규 / 문화연대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의 <죽편1-여행>

 

 

 

 

 

 

이 지면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문화비평이라는 범주에서 나의 기존의 글쓰기를 반추해봤을 때 특정 대상 없이 글을 쓴 경우가 많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영화, 문학, 음악, 만화 등의 텍스트를 통해 문화에 다가갔으며, 그 글 속에서 나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 속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텍스트 뒤에 숨기 급했으며 심지어 숨는 것에 희열을 느끼곤 했다. 대부분의 문화비평적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글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무엇에 대해서인 글에서 그 무엇에 를 대입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덧 다른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글에서 지우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내 온몸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스스로의 몸을 통해 비평을 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스스로를 활동가로 위치지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가라는 단어는 분명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사회역사적 맥락보다 활동'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문화적인 현상과 이론적인 부분들을 결합시키는 작업들보다 내 삶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과 타자의 삶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활동가로 지내면서 내 몸이 만나고 있는 수많은 현상들에 대해 성찰적 글쓰기를 하고 싶다.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 바로 이것을 나의 몸을 통과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새겨진 문화들은 어떻게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을까? 개인들의 욕망이 다양해진 만큼, 한 개인의 욕망 또한 다양해지고 세분화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다양한 욕망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며, 그 연결망들은 타자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은유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타인들, 공동체, 사회와 은유하려는 시도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는 이런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서로가 느끼는 문화정치경제적 경험에 대한 온도차를 감지하길 거부해버리면서. 어쩌면 높디높은 빌딩들과 촘촘히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치이는 삶을 살면서 수평선 혹은 지평선을 바라보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도시/시골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몸이 위치한 곳과 내 시선이 닿는 저 먼 곳을 잇는 법을 상실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제 우리는 멀리 바라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 몸에서 시작해서 최대한 멀리까지 한 번 은유해보고자 한다. 내 몸의 욕망들 그리고 내 피부로 느끼는 다양한 욕망들이 그 너머의 다른 욕망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쉽지 않은 모험이겠지만 백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 먼 여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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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웹진 아프꼼에서 이번 달부터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최혁규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해서, 그 생의 뜨락에 여러분들을 초대하기 위해 조금씩 터를 쓸어놓으려 하오니, 많은 발자국들을 찍어주시기를. 현재 최혁규님은 밀양에서의 연대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혁규님에 대한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는, 더 아픈 이야기들을 돌보는 시간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시기를.

 

 

 

 

 

 

7화 변이를 위하여

 

 

 

소설가 金 飛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당연했다. 내 삶의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고 여겼던 곳으로 온 힘을 다 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삼십 여 년의 삶을 버리면서 죽을힘을 다 해 그곳으로 질주했던 건데, 거긴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의 질시와 비난을 각오하며 있는 힘을 다 해 그곳으로 뛰어들었던 건데, 나는 또 다시 예전 그 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남자라는 세상의 경계가 나를 짓누르고 억압했던 것처럼, 또 다시 여자라는 경계가 그만큼의 크기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도 간절히 희망을 바라고 있었기에, 그 억압은 더욱 지독했고 고통스러웠다.

  상자가 떠올랐다. 차라리 상자 속이 마음 편한 곳이었는데. 사방에서 나를 가두며 좁고 편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자 속에 있으면 어떤 경계에 의해서도 재단되거나 억압되지 않으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극도의 불안에 떠밀린 모두가 그러하듯, 나는 가장 내밀하고 어두운 곳에서, 고립되고 피폐한 속에서 어리석게도 내 희망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여기 전환의 한 가운데와 꼭 닮은, 내가 폐기해버렸던, 그래서 그곳으로부터 도망쳐나왔던 거기가 떠올랐다. 나를 억압했던 것들, 매 순간 나를 짓누르며 옴짝달짝 못하게 만들었던 시간들. 폭력적으로 나를 호출하고 그것에 끌려가며 나를 구겨넣던 비겁하고 나약했던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을 떨치기 위해 이렇게 힘겹게 여기 전환의 한 가운데 와 있는데, 나는 왜 여전히 똑같은 불안과 억압으로 몸을 떨고 있어야하는 것일까?

 

  손을 들어 너덜너덜해진 나의 전환을 들여다보았다. 부서져버린 희망과 꿈들이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분명히 그건 단단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리조각처럼 쪼개져 그것들은 내 온 몸을 찌르고 있었다. 잘못된 지도를 들고 걸었던 여행자처럼 나는 내가 모르는, 전혀 기대하고 예상하지 않았던 어딘가에 와 있었다. 그것도 내가 도망쳐 나온 가장 끔찍했던 거기와 너무도 닮아있는 풍경이었다.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 누가 없는 거냐고, 내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자, 세상에 없는 거냐고. 그러나 웅성거리며 들려온 건 똑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찍어낸 듯한 사람들이거나, 거대해진 자신들의 판자를 직직 끌며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들의 거칠어진 숨소리뿐이었다. 밤이 온 것도 아니었는데 세상은 너무도 어두웠고, 오직 몸을 구겨넣을 수 있는 작은 상자 하나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처박혀있을 수 있는 그 좁은 공간만 생각났다.

  위협은 즉각적이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한꺼번에 머릿속에 나열되는 위협적인 장면들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눈앞에 그려졌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내 모습은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떠올랐고, 그런 내 앞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사람들의 절규와 혐오가 너무도 생생했다.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그것 보라고, 내가 무어라고 했느냐고 비웃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꽝꽝 울렸다. 그토록 좁고 협소한 경계 속에서, 너무도 거대한 판자를 들고 낑낑거리던 사람들이 주저앉은 나를 보며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가장 안전하고 바람직한 삶이란, 그렇게 주어진 경계에 순응하며 사는 일이 아니었느냐고, 그들은 주저 앉아버린 내 앞에, 기립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한 자의 포효를 들려주었다.

 

  나는 또 다시, 패배한 자였다. 그들이 보여준 승리가 아무리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지라도, 내가 도착한 거기보다는 최소한 나은 것처럼 보였다. 경계를 넘어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전환된 삶을 찾은 거기는, 그보다 훨씬 더 후락하고 형편없는 곳이었다. 아무런 열매도 열리지 않은 황폐한 곳처럼 보였으며, 내가 움켜쥔 건 공포와 절망뿐이었다. 땅 밑이 꺼지며 나는 어딘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쩌면 일종의 향수병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향수병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두고온 고향, 혹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식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온 힘을 다 해 불안을 피하여 도피한 자에게, 그건 또 다시 다른 종류의 더욱 힘 센 강박이 되게 마련이다. 더욱이 천국이라고 믿었던 거기가,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지옥과 꼭 닮은 곳이라는 충격은, 그러한 강박을 벼랑 너머로 밀어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불안에 대한 기억 따위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결부되면서, 뿌리 채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힘겨운 몸을 움직여 우리가 건너온 경계 쪽으로 조금만 더 다가가게 되면 경계너머인 거기도, 전환의 한 가운데인 여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경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또 다른 불안의 한가운데였던 등 뒤가 다시 반짝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다시 몸을 돌려 이쪽이든 저쪽이든 불안의 가운데를 향해 경계에서 멀어지면, 내가 선 곳의 불빛은 사라지고 경계 너머의 불빛이 다시 반짝이게 된다.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무지개의 자리처럼 우리는 빛을 향해 뛰면 뛸수록 오히려 더 빛을 잃어버리는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불안을 지우기 위해, 나를 짓누르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계 안에 몸을 웅크리는 일도 아니고, 경계를 넘는 일도 아니라면,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말하기 위해, 나는 되돌아가지 않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언뜻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결국 '시간의 흐름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비가역적이다.'라는 아주 단순한 정의만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제다.

  세상의 경계를 뛰어넘는 전환이 나에게 완벽한 안정감을 줄 수 없다는 깨달음을 가진 내가, 전환하지 않은 그 곳으로 '또 다른 전환'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예전에 내가 떠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을 수는 없다. 이미 거긴 변화와 새로움을 갈구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어버렸으며, 돌아가서 마주하게 된 우리가 떠나온 자리의 황폐함은, 더욱 끔찍하게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시골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간절해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시골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이란 불편함과 고독함을 견디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어 다시 도시로 돌아오더라도, 이미 도시는 그 시간 동안 또 다른 모습의 낯선 공간이 되어 있을 것이며, 도시의 복잡함 속에 억지로 몸을 섞어 지낸다고 하더라도, 시골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알고 있는 그에게, 거긴 시골을 모르던 그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환기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성전환자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남자라는 세상의 경계 안에서 태어나, 그 경계 바깥으로 탈출을 감행하여 여자의 삶을 살아본 후 다시 남자의 경계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남자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일은 요원한 것이다. 게다가 '수술'이라는 비가역적 치료 과정을 반드시 지나치게 되는 우리들에겐, 그건 더더욱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환은, 경계를 넘는 일은 그렇게 어떤 '각오'를 수반한다. 우린 그걸 '결심'이나 '결정'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실제로 지나쳐버리는 어떤 시간,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명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하다. 우린 경계를 지나쳐 넘어오면서 그 경계 안의 모든 것들을 시간 속으로 폐기해버린 것이다. 단순히 손에 든 것들뿐만 아니라, 그 때의 시간들, 불안들, 억압들, 또 반대로 답답하고 불안한 만큼 안정되게 우리를 떠받치고 있던 것들까지 모두 내버려야하는 것이다. 그건 절대 복구나 복원이 불가능하며, 망각해버린 기억처럼 왜곡이나 뒤틀림의 가능성만 존재하게 되는 안타까운 지나침이다.

 

  그렇다면 무기력해져버린 우리들에겐 해답이 없는 걸까?

 

  지금부터 나는, 내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기괴하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무기력해져버린, 길을 잃어버린, 모든 억압과 불안 밑에 깔려 버둥거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존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최악의 경우에도 인간을 되살릴 것이며, 바퀴벌레처럼 그건 끝내 인간을 생존의 방향으로 돌려세우게 될 것이다. 기존의 경계와 관습을 지키려고 필사적인 사람들과, 그 속에서 버려져 스스로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관적인 삶을 자초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뒤엉켜있는, 그런 과도기적 시간 속에 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내 이야기는 물론 부정적으로 환기되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을 또 다른 층위로 도약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본능이라고 믿는다.

 

 그건 바로 '변이(變異)'.

물론, 그건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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