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은실  (한신대 연구교수)

 

70-80년대였다. 어릴 적 살던 곳 주변 담벼락에는 (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리었던) 초등학교를 들어갔거나 아직 입학을 하지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친 아이들이 붉거나 검은 글씨로 크고 작게 써 놓은 낙서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특히, 초등학교 근처 담벼락이 심했다. ‘얼레리 꼴레리 00랑 00랑 00했데요’라는, 군데군데 말이 00으로 비워져 있는 낙서도 있었다. 사실 그런 류의 낙서가 태반이었다. 가끔 실명도 등장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쓰고자 했는지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또 무슨 말인지를 누구나 대충은 짐작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했다. 종종 욕설 또는 생식기 모양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던 적도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내용들이 태반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굳이 그 낙서를 누가 왜 언제 했는지 밝히려 애쓰지는 않았다. 담벼락 욕설은 일상에 불쑥 끼어든 불쾌한 일이기는 했지만 일상을 휘저을 만큼의 영향력은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담벼락 욕설은 담벼락 욕설의 세계가 있었고 일상은 또 일상의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낙서자의 마음을 은밀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을 터였다.

 

요즘은 담벼락에서 이런 낙서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신 인터넷 게시판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 이주민 혐오, 특정 지역민 혐오, 독재자 칭송, 역사 왜곡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온상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가 아마 대표적인 곳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그 내용은 훨씬 더 심각해져서 특정인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도를 넘어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

 

일베는 ‘디씨 인사이드(디씨)’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독립해 나온 일종의 파생 사이트이다. 지난 6월 7일, 팟캐스트(podcast) “김종배의 이슈털어주는 남자(이털남)”에 출연한 디씨 운영자 김유식씨는 디씨와 일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일베’는 디씨에서 하루 동안 가장 조회 수가 높은 게시물들을 따로 모아두는 게시판이었다. 이런 게시물들 중 상당수는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올라온 소위 ‘선정적 제목을 단 음란물’이었다. 그런데 운영자가 사이트 관리 차원에서 음란성 게시물들을 지속적으로 삭제하자 이 게시물들이 삭제되기 전에 미리 다른 곳에다가 퍼다 모아두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파생되어 생겨난 사이트가 바로 ‘일베’다. 의사이자 컴퓨터 천재라고 알려진 모씨가 주도적으로 만든 사이트라고 알려지기도 한 일베는 이후 약 8명 정도가 함께 운영해 왔고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수의 사용자를 모으게 된다.

 

디씨에서 유래된 일베가 갖는 특징 몇 가지를 보면 흥미롭다. 우선, 이런 인터넷 사이트의 특성에 대해 김유식씨는 흔히 생각하게 되는 익명성을 드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맞대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든다. 2007년, 인터넷 실명제가 전면화되면서 사실상 익명성을 완전히 보장받는 것이 한국 내 사이트에서는 이미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대면적 관계라는 특성은 게시글에서 서로 존댓말을 쓰지 않는 문화, 즉, 반말문화로 변천한다. 반말은 이 사이트에서 일종의 규범이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연령, 성별, 상하 위계 등 대면 대화에서 지켜질 것이 기대되는 대화 규범은 해체되고 대화 상대들 사이에서 특정한 형태의 ‘평등’이 실천되고 있다.

 

방종적 ‘자유’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높은 조회 수를 얻고 싶어 하는 혹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미끼가 될 수 있는 선정적인 제목의 게시글이나 ‘음란’ 동영상물을 올려놓기도 하는데 일베에서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도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방종적 ‘자유’가 철저히 실천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누구 하나가 특출하게 영웅시되거나 칭송받는 특별한 위치를 누리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규범처럼 공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튀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나대니즘’이라고 보고 철저히 이런 이를 ‘디스’, 즉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튀는 행위를 배격한다. 오프라인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도 특정 사용자들끼리의 유대가 생겨나고 이를 통해 특정인이 사이트에 대한 장악력을 갖게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마지막으로 또한 흥미로운 특징은 이들이 보이는 소위 ‘팩트(fact)’ 숭배주의다. 이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데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어 보인다. 김유식씨에 따르면 인터넷 사업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 지원이 시작된 ‘90년대 후반 이후 노무현 대통령 선출과 탄핵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소위 좌파성향 사용자들이 여론세력으로 자리 잡은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인터넷 상에서 우파성향을 대놓고 드러내기가 힘들었던 이들의 불만을 키워왔는데 이처럼 불만에 찬 소위 ‘우익’ 인터넷 사용자들이 소위 ‘진보’세력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한편에 이미 위치해 있었다. 이에 더해 노무현 정부 말기, 실정으로 평가되는 이런저런 일들이 터지자 야당을 지지해 왔던 이들 중에서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등장했는데 이를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자 이에 대해 불만과 반발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진보’ 세력에 대해 각을 세우는 또 다른 한편에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 초기에 터진 ‘광우병 사태’와 ‘촛불’ 정국 하에서 미국산 소고기와 광우병에 대한 소위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갑론을박에 대해 일종의 의혹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또 한편에 등장하게 된다. 때마침 대중화되고 있었던 디지털카메라는 소위 ‘인증샷’ 문화를 형성하는 중이었고 이런 분위기는 그동안 인터넷 공간에서 ‘숨죽이며’ 지내오던 ‘불만을 가진’ 인터넷 사용자들의 대거집결과 만나게 된다. ‘광우병 사태’와 ‘촛불’은 곧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인터넷 이용자들의 상당수(김유식씨는 오십퍼센트 정도라고 말한다)가 소위 ‘보수/우파 성향’으로 ‘돌아섰’다고 말해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일련의 전개과정에서 핵심적인 영향력을 가진 용어로 등장한 것이 바로 ‘팩트’라는 것이다. ‘팩트’ 중심주의는 ‘인증샷’, ‘감성팔이’와 같은 신조어의 등장과 맞닿아있다.

 

디씨에서 유래된 일베의 이러한 문화는 흥미로운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반말, 반영웅주의, 팩트 중심주의, 반규제주의 등이 가리키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반말을 평등 추구로, 반 영웅주의를 개별 개인의 중요성으로, 팩트 숭배를 이성과 합리성 중심주의로, 규제의 부재를 자유의 실천으로 바꿔 말해 보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개인, 자유, 평등, 이성중심주의(혹은 합리주의)를 핵심가치로 하여 부상한 근대이다.

 

일제 식민지, 6.25 내전, 이후 진행된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며 진행된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소위 서구사회의 근대화 과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며 전개되어 왔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겪어야 했던 탓에 제도적, 형식적 차원에서의 근대성과 일상적, 내용적 차원에서의 근대성은 상이한 속도로 서로 어긋나며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산업화와 경제 개발은 군사독재 하에서 이뤄졌고 공적 관계에서는 사적 관계가 여전히 중요한 자원으로 역할해 왔으며 개인은 출생 후 한 번도 원 가족의 영향력 아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사회, ‘개인 자아’ 보다는 회사나 가족의 영향력에 묻혀있는 ‘조직 자아’ 혹은 ‘가족 자아’가 의식과 문화를 지배해 온 사회, 소위 근대적인 것과 전근대적 것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한국 사회의 개인들은 개인이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 자유인이지만 조직과 집단에 자유를 담보 잡혀서, 평등하지만 위계에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면서, 민주사회이지만 시민이 아니라 영웅을 대접하며,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돈과 권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사회를 살아왔다.

 

김유식씨의 주장대로 인터넷 이용자들의 반 정도가 ‘보수/우파 성향’으로 실제로 전향을 했고 이들이 실제로 ‘보수/우파 성향’을 내면화 혹은 체화하고 있는지는 찬찬히 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디씨나 일베와 같은 곳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핵심에 노무현 정부에 대한 엄청난 실망과 피로감이 깔려 있다는 것도 짐작하게 해준다.

 

노무현이 누구인가? 소위 바닥에서부터 스스로를 키워 일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노짱’, 민주화된 한국사회의 상징적 인물이 아니었던가? 과거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김대중과는 또 다른 인물이었던 ‘보통사람’ 노무현.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내내 그를 선출한 국민들마저도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고 실망하게 만들었으며 급기야 퇴임 후 얼마가 지나지 않아 부엉이 바위 위에서 떨어져 최후를 맞았던 사람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저 대통령이 되었던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바닥에서부터 스스로를 일으켜 일어나 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근대한국사회의 ‘보통사람’의 비참하고 쓸쓸한 말로라고 봐질 수도 있다.

 

정권은 다시 보수 기득권으로 넘어갔고 동시에 한국사회는 ‘88만원 세대’의 시대를 맞닥뜨리게 된다. ‘88만원 세대’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삼포세대’, 미래를 꿈조차 꾸어볼 수 없는 시대의 이름이다. 그리고 ‘청년 실업’과 ‘남성연대’가 쌍생아처럼 함께 부상하였다. ‘진보’세력이 한때 기득권을 누리게 되었었음에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노라 약속하였던 이는 부엉이 바위 위에서 사라졌다.

 

이후 노무현은 자학적 분노의 아이콘이 되었다. 가장 불안한 이들이 이 불안의 근원을 노무현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탄생시킨 시대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탄생시킨 세력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노무현에 대한 그토록 극심한 분노를 자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은 반말, 반영웅주의, 팩트 중심주의, 반규제주의 등을 통해 평등, 개인, 이성중심주의, 자유 등과 같은 가치를 주장하고 때로는 나름의 역량 안에서 실천하고 있기도 해 보인다.

 

이와 같은 이들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쩌면 그동안 형식과 내용이 속도를 맞추지 못했던, 제도와 일상이 속도를 맞추지 못했던 한국사회가 이제 그 속도를 맞추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힘겨운 진통의 징후로 봐야 하지는 않을까? 혹은 근대적 가치의 정수인 민주주의의 민주화, 민주화의 결실을 안팎으로 누려보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 그것의 진정한 제자리를 찾아달라고 외치는 일종의 아우성, 민주화의 민주화를 외치는 아우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슬프고 안타깝게도 근대화 과정은 여성, 유색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심지어 근대 산업의 ‘역군’이었던 노동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일어난 역사가 아니었다. 근대는 처음부터 배제와 차별을 작동시키며 등장했다. 경계를 발명하고 안과 밖을 구분하고 차이진 것들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고 정상성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다시 경계가 확정되는 과정, 이로써 처음에는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했던 안과 밖이 일종의 자연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를 얻고 이 사이의 차이가 (더 이상 발명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지위를 얻고, 이렇게 구축된 ‘사실’을 근거로 정상성과 위계가 재강화되어 왔던 과정이었다. 여성, 유색인, 그리고 소수자 등은 안과 밖이라는 경계에서는 밖을, 나와 너의 경계에서는 너를, 위와 아래의 경계에서는 아래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는 비정상을 할당받는 위치에 놓여져 왔으며 따라서 안, 나, 위, 정상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밖, 너(타자), 아래, 비정상 등의 위치에 쉽사리 가해지는 혐오와 차별,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근대의 역사는 곧 차별과 폭력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베충은 근대의 가치를 호출하며 근대화를 그리고 민주화의 민주화를 웅얼거리듯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초기의 남성들이 그리하였듯이 철저하게 누구보다도 여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며 그리하고 있다. 여성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임금노동자 여성들의 70퍼센트는 (저임금)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으며 정규직 남성 평균임금과 비정규직 여성 평균임금은 100 대 40이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고용에서의, 승진에서의 차별도 여전하며, 가정, 직장,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각종 성폭력으로 여전히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저임으로 지불되거나 아예 지불되지도 않는 돌봄 노동과 양육노동, 그리고 인간출산이 여전히 여성들의 책임이자 의무로 떠넘겨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눈감고 있다.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후 가부장의 물적 토대를 잃고 가부장으로서의 권위와 지위까지 잃게 된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고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남성의 위치, 가부장의 위치를 재건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들도 ‘진상녀’, ‘개똥녀’, ‘택시녀’를 비난하고 혐오하면서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봉합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환향녀’, ‘탕녀’, ‘양공주’를 새로운 언어로, 그러나 구태의연한 내용으로 다시금 호출하고 있다.

 

나는 ‘민주화의 민주화’ 요구에 전적인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88만원 세대’의 시대가 된 세상에서 더 이상 미래를 향한 부푼 꿈을 꾸지조차 못하게 된 이들끼리, 청년 시절을 실업 상태나 저임금 임시직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될 이들끼리,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더 나빠질 것만 같아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한 이들끼리, 학자금 대출금만 떠안은 채 알몸으로 대학 밖으로 내던져진 이들끼리,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늘어나는 것은 빚뿐인 ‘삼포세대’들끼리 서로 바람막이가 되어 민주화의 열매를 다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전적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리하여 근대가 가져다 준 개인, 자유, 평등을 철저히 민주화해야한다는 요구에 전적인 동의를 보낸다.

 

그러나 그 욕망과 주장이 차별과 배제와 폭력을 통해 이뤄진다면 그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포함이 또 다른 배제를 통해 이뤄지는 한 민주화의 민주화란 요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베충이여, 그대들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 민주화의 민주화라면 제대로 한 번 욕망해보기를, 다른 이에 대한 배제를 통해 자신만은 포함되기를 욕망하는 찌질한 욕망을 함께 극복해 보기를 제안한다!

<푸코세미나>를 여는 책,  <권력과 저항> 리뷰(사토 요시우키, 김상운 옮김, 난장, 2012)

:구조주의를 넘어서 권력에 대한 저항 전략을 구성하라!”

 

아프꼼에서는 7월 중순부터 푸코세미나를 새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따뜻하게 응답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이 모임은 다양한 전공 분야의 선생님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꼼의 얼굴이신 권명아 선생님 이하 아프꼼이 계속해가는 로컬래인(local 來人)의 길에 새로운 래인커머(來人/Rain Comer)로 합류한 저 김명주와 최성희 선생님, 영화 매체와 더불어 서양현대사를 전공하시는 조원옥 선생님, 프랑스 현대사상과 접속하며 영문학을 전공하시는 사공일 선생님, 푸코 전공자로서 한창 논문을 만드는 과정 중인 안현수 선생님, 그리고 아프꼼의 과거와 현재를 든든히 받혀주고 있는 신현아 선생님, 김선우 선생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 기획은 푸코 저작을 모두 훑어보는 것이었으나 세미나의 기조를 잡는 책으로 <권력과 저항>을 먼저 읽으면서 <감시와 처벌>부터 저작 및 강의록을 순차적으로 읽어가기로 했습니다. 그와 병행해서 필요한 글들을 따로 읽는 일들이 끼어들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푸코를 새로이 혹은 다시 읽는 과정이 우리 시대의 화급한 정치적 과제에 대해서나 조금 더 장기적인 과제인 공동의 삶을 구성해나가는 과제에 많은 문제를 제기하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리뷰를 연재하는 과정이 어떤 모색의 과정이길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현대 프랑스철학과 그 정치철학적 쓸모?

 

애초에 잠시 유행 현상인양 폄훼하던 시선이 겸연쩍게도 프랑스산() 철학은 여전히 우리 인문학계를 장악(?)하고 있고 그 시효 만료를 예견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랑시에르, 바디우, 낭시 등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세대 철학자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고 네그리, 지젝, 바우만, 아감벤 등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우리시대의 정치철학을 구성 중인 이들 역시 프랑스 현대사상과의 직/간접적 영향 관계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 프랑스 사유가 확보한 생존력과 별개로 이 사유가 우리시대에 던지고 있는 적실성과 유효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 <권력과 저항>은 현대 프랑스 사유가 갖는 정치철학적 쓸모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 책은 1990년대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알튀세르 이하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 네 명의 철학자들을 중심에 두고 이들의 사유를 구조주의적 권력이론에 대한 저항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 저자의 의도는 일단 무리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이는데, 이처럼 그 의도를 달성하는 데에는 앞서 언급한 네 철학자들을 상대하는 공동의 카운터파트너를 설정한 데 힘입었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자크 라캉이다. 이 확고부동의 맷집을 지닌 라캉을 반대축으로 해서 서로 다른 사유 내용과 지향을 지녔다고 보이는 철학자들을 모으고 그들 사유의 맥락을 자신의 방식으로 독해하는 솜씨는 관전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

저자가 지닌 문제의식은 실은 우리 인문학계가 공유했던 현대 프랑스 사유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집필 동기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푸코의 권력 이론을 통해 우리를 주체로 생산하고 일상적 실천 속에서 주체를 계속 재생산하는 미시권력의 메커니즘, 즉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이 사회 도처에서 그물망처럼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해도, 그와 동시에 이런 식으로 우리를 주체로 생산/재생산하는 권력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 이론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물론 저자의 우려는 단순히 프랑스권 사유의 유효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권력이론에 대한 비판 이론이 대응 가능한 방법론을 구성할 수 있는가 여부에 있다. , “권력에 의해 생산된 주체가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전략이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내재적인 방법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일각의 주체로의 회귀론(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주체’, 뤽 페리나 알랭 르노의 근대적 주체’)이 반복될 것이고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혁명적 성과도 은폐되어 버릴 것이라는점이다.

 

구조주의적 권력이론과 저항 전략의 구성

 

저자는 구조주의적 사유를 저항 전략으로 구성하기 위해 소위 구조주의적 권력이론을 재해석한다. 그것은 주체는 자기 자신이 내면화하고 받아들인 권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하는 것으로 정식화된다(26). 이를 위해 저자는 1부에서 푸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통해 권력장치들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는 푸코의 권력이론이 제출한 일종의 아포리아, 즉 권력에 대한 저항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내재적 비판이 구성한 비인칭적 역량에 의한 생성(‘경제론적 주체’)이라는 전혀 다른 주체 개념을 가능한 하나의 대안으로 본다. 이 주체는 자본주의 경제와 리비도 경제의 접합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푸코는 자기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 후기 푸코의 전회는 규율권력에 의해 형성된 반동적 자아에 대한 저항의 거점을 탐색한다. 즉 신체, 자기를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이질성으로 변용함으로써 어떤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장치들은 복종화된 주체를 생산/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구조, 사회구성체도 생산/재생산한다 점에서 구조의 재생산에 저항하는 단절'rupture의 사유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조변동의 이론이 주체의 이론과 더불어 제시되어야만 하는데, 이 문제는 2부에서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감당하지 못했던  권력장치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를 변형하는 차원에서 구조변동과 우발성의 문제를고찰하는 데리다와 알튀세르를 통해 그 사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저자가 구성하는 권력에 대한 두 가지 저항 전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의 주체적 양상의 변용과 특이성의 구축. 2)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우발성의 침입이 일으키는 구조의 생성변화.

1) 첫 번째 전략은 저항을 주체의 복종화된 양상에 변형을 가하면서 이루어진다. 각각 푸코는 그것을 자기로의 생성’, 들뢰즈/가타리는 타자로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하나의 공통된 저항의 양태를 발견할 수 있다. , 그들에게 저항은 주체의 양상, ‘사유와 삶의 양식을 변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복종화된 주체가 자신의 특이성을 구축함으로써(푸코), 혹은 비인칭적 특이성들을 해방함으로써(들뢰즈/가타리) 자신의 사유와 삶의 스타일을 변형하는 내재성의 구축을 사유하고 있다.

2) 앞서 지적했듯이, 두 번째 저항 전략은 권력장치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변형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런 구조의 생성변화 가능성을 사유하기 위해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우발성개념에 주목한 것인데, 이때 우발성구조의 정적인 재생산을 교란할 수 있는 요소, 즉 재생산 과정의 타자를 가리킨다.”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구조의 생성변화는 정치와 경제라는 상이한 심급 사이의 갈등 관계에서 사유된다. , 주요(경제적) 모순과 종속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모순이 각자의 역할을 바꾸고 융합되는 전위압축과정에서 우발성의 침입 또는 법칙성의 일탈[편위]라는 마주침, 사건으로서의 물질성의 침입에 의해 법칙을 일탈시키는 구조의 생성변화가 초래될 수 있다. 결국 알튀세르에게 생성변화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재 국면, 현재의 정치적 경향(복합상황)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와 달리 데리다가 제시하는 정치적 전략은 전혀 다른 데서 찾아진다. 그것은 현재의 사회에 타자를 무제한으로 수용함으로써 국가주권이라는 잔혹성의 체제를 교란하고 타자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소위 무저항의 저항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증여, 용서, 환대 같은 개념으로 제기된다. 이러한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저항은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진정으로 임박한정치적 명령이 된다. , “도래할 민주주의의 약속은 도래할 사건적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사회에서 저항하라는 정언명령을 구성한다.”(322) 여기서 저자는 데리다적인 도래할 사건의 시간성과 사건과 현재의 저항이라는 이접적인 구성과 알튀세르의 현재 국면의 사건이 시도하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저항을 운명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 읽는다. 사회적 재생산이 사회구성체에 편재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호명에 의거한다면, 라캉적 정신분석 이론은 운명적으로 결정된 주체와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무시간적인 구조를 제공해주었고, 그것은 곧 운명의 철학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구조주의란 운명적 방식으로 결정된 구조와 주체 양태의 변형에 관한 이론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즉, 이 운명적 결정에 대해 푸코, 들뢰즈/가타리는 내재성의 구축을 통한 주체의 복종화된 양태를, 알튀세르와 데리다는 사건이라는 물질성의 침입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고정화된 구조를 변용하고자 했다(324).

 

김명주

 

 

 

 이희재 지음. 교양인, 2009.                                                 

 

나는 어려움 없이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번역서 읽기를 꺼려했다. 원서를 읽으면 중간 중간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100% 완벽하게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번역서를 읽을 때보다는 훨씬 생생하게 이야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읽는 재미가 달랐다. 번역서를 읽을 때 문장 호응이 맞지 않거나 현실에서는 잘 쓰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 나오면 읽는 즐거움이 반감될 수밖에 없는데, 원서를 읽으면 그런 문제가 없었고, 책 속 상황이 보다 선명하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내 생각에 번역서가 읽기 불편한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생각된다. 첫째는 번역자의 번역 철학이 의역보다는 직역 쪽에 가까운 경우이다. 영어 도서를 한국어로 옮길 경우, 출발어는 영어이고 도착어는 한국어가 되겠다. 이 때, 도착어로 매끄럽게 들리게 하기보다는 출발어 표현의 의도와 형식을 최대한 존중하고 살리는 데 비중을 두는 경향의 번역자가 번역했다면, 그 결과물은 애초에 한국어로 쓴 책처럼 매끄럽고 눈에 잘 들어오게 되기는 어렵다. 반대로 출발어인 영어 표현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면서도 도착어인 한국어 표현으로도 어색하지 않고 매끄럽게 들리도록 번역하는 경우, 출발어 표현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직역에 비중을 두는 번역자가 번역한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출발어의 문장 구조에 더 잘 어울리는 문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머지 두 가지 이유는, 번역자가 도착어(우리말) 작문에 재능이 없는 사람인 경우이거나, 제대로 번역할 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지 못한 경우(경력이 많은 전문 번역가의 작품인데도 문장이 형편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이유일 거라고 짐작된다)이겠다. 여기서 첫 번째 이유로 언급한 직역의 경우, 직역과 의역 사이의 갈등과 긴장은 모든 번역가가 체험하는 것이며, 번역하는 매 순간 직역과 의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민하게 되는 문제이다.

 

『번역의 탄생』(이희재 저, 2009, 교양인)에서, 저자는 직역과 의역이라고 보통 이야기되는 번역 경향에 대해 ‘들이밀기’와 ‘길들이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역’보다는 ‘길들이기’라는 표현이, 출발어 표현을 도착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출발어와 도착어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고 도착어 문화에 가장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치환될 수 있는 어휘와 표현을 찾기 위해 품사를 바꾸고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꾸거나, 심지어 말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의 적극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내가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번역이라기보다는 ‘해석’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려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결과물이 읽기에 매끄럽지 못하고 난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원문의 표현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했지만, 번역이라는 행위의 의미심장함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변명할 수 없다. 그 즈음, 나는 『번역의 탄생』을 통해, 직역과 의역 사이의 줄다리기가 역사적․사회적인 맥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별로 번역 문화가 다르며, 한 국가 안에서도 역사적인 변화 과정에 따라 다른 번역 문화가 형성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은 본래 영어가 그리스어나 라틴어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 번역가들이 작품을 번역할 때 직역 중심으로 해오다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와 그 이후 미국의 성장 등으로 영어가 세계 공용어 대우를 받게 되면서 차츰 도착어(영어) 중심의 번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미권의 도착어 중심 번역 경향은 갈수록 심해져서, 요즘은 애초에 작가가 영어로 쓴 것처럼 매끄럽게 번역해야 훌륭한 번역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원작에 영미권에서 이해하기 힘든 소재나 줄거리가 있으면 그 부분을 삭제하거나 심지어는 작가에게 그 부분을 다시 쓰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한편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앙 집권 국가의 틀을 잡고 자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던 프랑스는 영국보다 먼저 의역 중심의 번역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짐작 가능하듯이, 직역 중심의 문화였다. 전문 번역인이 많아지고 번역가 양성 프로그램도 생긴 지금은 덜하지만,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무성의한 직역으로 인해 한 번 읽어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번역물이 꽤 많았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직역 중심의 번역서를 읽어오면서 ‘번역체’라고 불리는 문체도 우리말 안에 자리를 잡았다. 번역체도 하나의 문체로 인식되고, 어떤 번역체는 그렇게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말 본래의 질서에 따른 문체가 더 읽기 쉽고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번역의 탄생』에서, 저자는 번역체를 극복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공식처럼 끼워 맞출 수 있는 것들은 아니고, 우리말의 특성을 이해해야 활용 가능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영어에 비해 한국어는 동적이며 동사의 활용 범위가 넓다. 반면에 영어에서는 명사의 행동 범위가 넓으며, 추상 명사가 주어 자리에 와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명사를 동사로 바꿔주어야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들리는 경우가 제법 있다. 예를 들어, “A careful comparison of them will show you the difference."라는 영어 문장을 “그것들의 자세한 비교는 차이점을 드러낼 것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추상 명사인 ‘비교’를 동사화하여, “그것들을 자세히 비교하면 차이점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옮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영어의 형용사는 한국어의 부사로 옮겨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이처럼 번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제대로 의역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번역의 탄생』이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영어와 한국어의 특성을 비교함으로써 한국어가 가진 개성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자가 시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직역과 의역 사이의 긴장,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맥락을 보여주며, 사전과 인터넷, 시각 자료를 적절히 번역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번역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건 외국어 능력보다 더 요구되는 것이 한국어 능력이라는 것이다. 중급 이상의 외국어 독해 능력을 가졌다면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전이 나와 있고, 구글을 통해 해당 단어의 이미지와 그 용례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한 그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할 일이 많아진다. 다른 문화와 다른 문장 구조를 가진 도착어로 자연스럽게 들리는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 속으로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며 문장을 하나하나 작성해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래도 남아있는 번역체를 줄이고 좀 더 자연스러운 글로 만들기 위해 몇 번이고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도착어로 좀 더 자연스럽게 들리게 옮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도착어 문장력이 좋아야 하지만, 평소에 풍성한 어휘를 담고 있는 우리말 작품을 많이 접해서 어휘력을 늘려야 하고, 우리말로 글을 많이 써봄으로써 번역체에 물들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번역을 시작하고서, 전문 번역가 앞에서 번역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고 푸념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이 하면 앞으로 더 쉬워질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계속 힘들고 어려워요. 번역이 쉬워지면, 그게 망하는 거예요.” 음. 그렇지. 내 번역에 모자람이 많은 것을 알고, 겸손해져야지. 번역은 결국 한 세계를 다른 세계에게로 옮기는 과정인데 그 일이 쉬우면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아무튼 『번역의 탄생』은 초짜 번역가로서 내가 번역이라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말의 개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번역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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