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권명아의 <음란과 혁명>

이승원 <사라진 직업의 역사> 저자·인천대학교 초빙교수 

2013-08-02

 

 

 

 <춘향전>은 음란소설일까?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인 국민소설을 음란물로 치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청소년인 춘향과 몽룡이 광한루에서 만난 지 채 열 두 시간도 되지 않아 거사를 치른 상황과 "귓밥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 같은 혀를 물고" "이불 안에서 쌍쌍이 날아드는 비둘기같이 꾹꿍 끙끙 으흥거려 뒤로 돌려 담쏙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떠는 장면 묘사를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고전이니, 문학작품이니, 예술성이 있으니 괜찮은 것일까. 실제로 1900년대 초 <춘향전>은 '음탕소설'로 지목되어 계몽 지식인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뿐만 아니라 <홍길동전>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질타를 받았다. 어쩐 연유에서였을까.


당시 조선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춘향전>과 <홍길동전>은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작품에 불과했다. 청소년은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이다. 이들이 <춘향전>을 읽고 일찍 성욕에 눈을 뜨고, <홍길동전>의 허황된 이야기에 흠뻑 빠져 현실을 무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일부 계몽지식인들은 계몽주의와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인간의 감성을 통제하고 훈육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향전>과 <홍길동전>은 '청소년 풍기문란물'이었던 셈이다.

▲ <음란과 혁명>(권명아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1940년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홍길동전>이 또다시 문제가 되었다. 일본의 작가 나카오카 히로오(中岡宏夫)가 <홍길동전>을 신시체로 개작했다. 일본의 통치 권력은 <홍길동전>을 "조선 내 풍속 괴란"이란 근거를 들어 검열했다. <홍길동전>의 개작 내용 중에 "공산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점"이 있다는 이유에서였으며, 이 공산주의 색채가 조선의 풍속을 괴란시킨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대체 풍속이 뭐기에, 도대체 풍기문란이 뭐기에 지식인들과 통치 권력은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 책이 바로 권명아의 <음란과 혁명>(책세상 펴냄)이다. <음란과 혁명>은 풍기문란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자, 한국 근현대사 100여 년의 역사를 풍기문란의 관점에서 탈구축한 역작이다.


저자의 분석처럼 풍기문란은 음란과 짝을 이루는 말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풍기문란은 단순히 포르노그래피나 화류계에서 펼쳐지는 불구적 욕망의 배설만을 뜻하지 않는다. 풍기문란은 통치 권력에 의해 "부적절한 정념"으로 치부되는 것이자, "그 자체로는 규정을 갖지 않는 무규정적인 개념"으로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인 것이다.


한국에서 풍기문란에 대한 단속과 통제의 역사는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한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통치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풍속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성(色), 마약, 음주, 도박, 음란물, 사치(과소비), 복장, 끽연, 영화, 광고, 놀이 등 일상의 전 분야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이라는 이분법을 적용하여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했다. 이른바 황국의 신민화의 전략 중 하나였던 셈이다. 이렇게 탄생한 풍기문란죄는 해방 이후 냉전 체제를 지나 오늘날의 일상에도 존속되고 있다.


결국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풍기문란죄는 "전형적인 파시즘적 법제"이자 인간의 감각과 정념과 정동에 대한 "사전 검열"이자 "정신 개조와 생활 개선이라는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 "삶에 대한 총체적 지배와 개조"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하는 식별법이며, 건전함과 건전하지 못함의 이항대립을 통해 국민(들) 사이를 적대적 관계로 재정립하는 식민 통치 기술이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풍기문란죄는 해방 이후 남한의 냉전 체제 속에서도 그대로 이행되었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는 식민지의 유산인 셈이다. 풍기문란은 1970년대에 이르러 망국과 퇴폐의 논리에 근거하여 단속되고 통제되었다.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 등은 애교에 가까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목적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가 아닌 자의 삶을 구별 짓고 구획해 나갔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닌 자의 삶이란 사회적 통념이라는 두루뭉술하고 무규정적인 근거에 위배되는 삶이자 "다스릴 수 없는 자들"의 삶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통치 권력은 국민의 풍기를 단속하려고 했던 것일까. 풍기란 일종의 정념의 흐름이자 정념이 세상을 물들이며 형성되는 풍경이다.

"사랑·열정·분노·분개 등의 정념은 특정 주체로 하여금 사회적 연대나 정치적 결사로 이끄는 동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반대로 다른 주체들에게는 사랑·열정·분노·분개 같은 정념이 사회적 연대나 정치적 결사에 미달하는, 부적절하고 문란한 결속만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간주된다."(248쪽)

문란한 정념이란 성적인 열정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말이 아니다. 문란은 특정한 통치 권력이 만들어 놓은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는 모든 정념, 열정, 감각, 정동을 뜻한다. 그리하여 문란함에 대한 단속, 즉 풍기문란에 대한 규제와 단속은 곧 "폭력적인 절멸의 정치"와 다름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 총독부 권력이 조선인들의 풍기문란을 단속하면서 시작된 음란과 문란에 대한 통제는, 4.19혁명의 실패와 5.16쿠데타 그리고 냉전 체제와 개발독재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청년과 학생들의 문화를 미시적으로 감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또한 <내게 거짓말을 해봐>(김영사 펴냄)를 쓴 작가 장정일을 음란범으로 만들고 그를 풍기문란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통치 체제가 규정한 선량한 시민이 아닌 모든 자들은 곧 내부의 적이자 척결해야할 사회의 악이 된 것이다.

이 책의 요지는 '풍기문란을 허하라!'라는 단순한 구호이거나 풍기문란자들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차이의 문화를 인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음란과 풍기문란이란 개념을 통해 이 척박한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풍기문란이라는 무규정적인 개념의 정치성과 통치성이다.

"불안은 기존의 인간주의적 개념인 정념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논하자면 한국인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정념이자, 사회적 권력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정동이다."(348쪽)

"한 인간 존재의 삶의 반경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정해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구조이고 체계이고 이데올로기이며 통치성이다."(308쪽)

대한민국 통치의 역사는 불안을 숙주로 삼아 지속되어 왔다. 불안의 증거는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실체 없는 실체였다. 풍기문란은 부적절한 정념이자 불온한 정념이다. 불온한 것은 통치의 규율로 포획되지 않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기에 통치 권력은 언제나 그 불온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절멸하려 든다. 그러나 그 부적절한 정념과 불온한 정념은 불합리한 세계의 견고한 아성을 언젠가는 균열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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