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화와 표현의 자유

 

 

권명아

 

 

 

 

 

 

 

   롯데의 외국인 투수 쉐인 유먼이 인종차별적인 혐오발화(發話)를 비판하는 의미로 '말조심' '누군가 듣고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만들었다고 몇몇 신문이 전한 바 있다.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는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아프리카 사람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거리에 내걸었다. 세계적 모델 에릭 오몬디는 이에 대해 '인종주의는 그만(Stop Racism)'이라는 제목의 비판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하였다. 어떤 기사에서는 인종차별이 한국만 심각한 건 아닌데, 이런 사태가 마치 한국만의 문제인 것처럼 과장하면 안 된다고 논평을 하기도 했다.
 


피해자를 공격하고 소수자를 증오하는 사회
 
   오히려 근본적 문제는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의 언어 표현이나 행동이 혐오 발화나 증오 행동과 같은 특수한 형태의 폭력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거의 부재하다는 점에 있다. 즉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폭력이라는 인식이 없고, 그 행동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폭력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이런 식의 폭력이 마치 표현의 자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도되는 사례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혐오 발화는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지역차별주의와 같이 이미 구성된 사회적 배제와 적대를 토대로 형성되는 상징적 폭력이다. 특히 혐오 발화는 사회적 약자가 지닌 '차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혐오 발화는 '조센징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일본 극우파의 발언이다. 일본 내에서 이런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을 이끄는 단체의 이름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다. 일본 내의 소수 민족인 '조선인'의 권리 요구가 재특회에게는 특혜로 간주된다. 재특회는 조선인 학교 주위를 돌며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내쫓아라" "스파이의 자식들"이라고 확성기로 외치며 시위를 하면서 이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이에 대해 이들의 행위가 "(일본도 비준한)인종차별철폐조약에서 규정한 인종차별에 해당하므로 위법"이라며 시위를 금지하고 배상 명령 판결을 내렸다. 일본 사회에서는 혐오 발화에 대항하는 교육과 시민운동이 대학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의 분노 에너지가 급상승하고 공감 지수도 높아질 것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혐오 발화를 일본 문제로 환원해 버리면 참 속이 편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어떤가. 단식 투쟁 중 병원에 이송된 김영오(유민이 아버지) 씨에 대한 악의적 논란은 전형적인 혐오 발화의 특성을 보여 준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있는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 씨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진 글들에는 여러 형태의 공격이 담겨 있다. 지역차별(호남출신 공격), 계급차별이 뒤섞인 이 혐오 발화 사례에는 가족 형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전형적 편견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혼한 아버지의 자격과 진정성을 비판하는 글들은 법적 결속, 이성애적 결속 등 이른바 '정상 가족' 이념에 근거한 차별 의식을 전형적으로 반복한다. 이 차별적 의식은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족이나, 이른바 '정상가족'의 범위에 들지 못하는 다양한 가족을 '부적절하고 자격이 없는 것들'로 배제하는 논리를 함축한다. 


폭력성에 대한 법적 규제와 교육, 사회관심 필요 

   일본의 경우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 단체에 대해 법적 처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혐오 발화의 폭력성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법적 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의 폭력성과 책임을 묻는 일은 법의 심판만으로 완수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규제와 교육, 사회적인 관심의 확대는 혐오 발화의 위험성을 줄이는 가장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 조건에 대해 논하기에는 한국 사회의 실상은 참으로 비참하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감하기는커녕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인간으로서의 근본적 윤리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조차 부재한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혐오 발화에는 증오를 에너지로 소수자를 불태워 버렸던 파시즘의 망령이 일렁인다는 점에서 혐오 발화가 넘쳐 흘러나는 한국 사회는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있다 할 것이다.

 

 

 

로봇과 살고 있어요

 

 

권명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보좌관 로봇을 보낸다. 보좌관 로봇은 아버지의 식사와 청소를 담당할 뿐 아니라, 건강관리를 맡아서 해 준다.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아버지를 깨우고,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도 한다.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아버지와 잔소리 듣기 싫으면 말 좀 들으라는 로봇의 대화는 부자관계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영화 '로봇 앤 프랭크'(제이크 슈레이어 감독, 2012)에서 보여 주는, 로봇과 함께 사는 시대는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청소 로봇과 '가족 로봇'
 
   미국의 한 연구팀이 세계 최초 '가족 로봇'을 출시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로 느껴졌던 로봇과 함께 사는 삶이 현실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로봇 청소기 정도가 일상에서 만나는 로봇의 모습이고, 로봇 청소기조차 일반인들이 사용하기에는 아직은 가격이 비싼 편이다. 한국의 일반인들 인식 속에서 로봇은 로봇 청소기처럼 아직은 생활을 돕는 기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서 로봇이 도구적 기계가 아닌 '가족'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이 '가족 로봇'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기술적 진전을 이뤄냈는지는 아직은 확인이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제공된 정보를 토대로 볼 때 흥미로운 것은 '가족 로봇'이 인간을 위한 기능적 보조나 기술적 도구성보다 인간과의 정서적, 사회적, 인지적 관계 맺음을 주요한 기능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봇과 함께 사는 미래, 혹은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없어지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비관론과 낙관론이 팽팽하게 대립해 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런 비관과 낙관의 어떤 입장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대너 해러웨이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한다. 즉 그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이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라면 공상과학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무수한 캐릭터들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를 로봇이나 기계로 대체한 존재이다.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사이보그가 위험한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이보그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신체 일부를 비유기체로 대체하며 살고 있다. 철이나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안경, 입안의 인공보철, 관절 속의 보철물들까지 우리 인간 신체는 이미 비유기체와 함께, 비유기체를 통해 구축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체인 인간이 비유기체인 존재들(로봇, 기계적 보충물 등)과 함께 사는 시대는 이미 도래해 있는 것이다.

   물론 '사이보그로서의 우리'는 아직은 기계나 비유기체를 인간 신체의 작동을 위한 보충물이나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친구가 되거나 가족이 되는 것은 여전히 공상과학적 상상이거나, 과도한 기술 낙관주의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와 인간, 테크놀로지와 휴머니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경계가 여전히 설정되어 있다. 

인간, 사이보그, 로봇 

   인간이 오랫동안 인간을 닮은 로봇을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해 온 이중적 욕망의 구조는 이러한 인간의 경계, 테크놀로지의 경계와도 관련이 깊다. 이러한 논의들은 '포스트 휴머니즘'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학문 경향들에서 천착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반면 로봇 공학이나 사이버네틱스와 같은 학문들은 점점 더 휴머니즘적 주제들, 즉 감정, 사회적 관계, 인지적 연결 등의 문제에 보다 깊게 천착하고 있다. '가족 로봇'의 개발자가 "기술을 인간화(humanize)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기술은 공학이 아니라, 인문의 영역에 도달한다. 고도기술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라는 가장 고전적인 인간적, 사회적 질문이 도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로봇과 인간 사이, 휴머니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기술 공학과 인문학 사이, 미래적 상상력과 현재적 기술 발전 사이의 경계는 이미 무너지고, 새로운 흐름이 오늘 여기에 도래해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가? 아직도 자신이 '휴먼'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과거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청룡동 - 나무들이 살아요

 

  

 

 

 

 

金 飛

 

 

 

 

 

 

 

 

 

 

 

   어차피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그리움은 오직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고, 너무 많은 것들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슬픔이나 안타까움 앞에 담담한 우리를 비관적이라 말하지 않고 현실적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여기 이 시대가 가르친 생존의 방식이기도 할 테고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린 우리들의 퇴화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 기다림 이후 몇 분이 둘 중 무엇이든, 나는 뒤돌아보거나 기웃거리지 않고 예정된 길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오늘 내가 목적지로 정했던 곳은 청룡동의 상마마을이었다. 부산의 입구인 금정구의 청룡동은 쉽게 말해 범어사를 중심으로, 범어사역에서 금정산 쪽으로 이어진 제법 광범위한 지역을 이른다. 이웃한 노포동 혹은 남산동은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외국어대학교의 분교가 위치해 있어 그 이름이 익히 알려졌지만, 실제로 청룡동은 부산시민들에게도 익숙지 않은 이름이라고 한다. 매일 지나치며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지 못 했던 청룡동이란 이름은, 우리들의 바깥이 물리적인 거리나 지역 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호출하고 기억하는 마음 씀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변함없이 이번에도 나는 청룡동의 가장 외곽에 자리한 마을을 점찍어두었고, 그렇게 혼자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마마을은 금정산 자락에 위치한 부락으로서, 범어사 바로 아래에 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나 등산객들의 시선이 범어사혹은 금정산에 머물러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들의 관심 바깥에 있는 부락의 주민들과 마을 정경이 어떤 모습일지 자못 설레었다.

   버스는 범어사를 지나 얼마 가지 않은 내리막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다음 정류장이 하마마을이라고 했으니 마을이 위아래로 나뉘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버스에서 내려 이정표를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언덕 위쪽으로 거슬러 올랐다. 겨우 몇 분 남짓 걸음을 떼자, 산속으로 향하는 상마마을이라는 이정표는 몇 개의 암자 이름과 뒤엉켜 도로 위에 불쑥 나타났다. 화살표를 따라 조금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답게 들어서는 입구 양 옆에 우거진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무 둥치에 압류딱지 같은 식당 간판이 붙어있긴 했지만, 그 너머에 소담스레 자리하고 있을 마을 풍경이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식당 간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거슬러 올랐지만, 뒤이어 다른 간판 하나가 또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손님들을 끄는 간판이 아닌 마을을 안내하는 도로명 주소 표지판에 눈을 두면서 걸음을 옮겼지만, 이내 또 다른 간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쩔 수 없이 간판을 따라 올라가니, 외제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대한 주차장이 나타났고 그 너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골목은 그 식당 앞에서 뭉텅 잘려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더 깊숙한 곳으로 방향을 트니, 길 끄트머리엔 여지없이 또 다른 식당이 거대한 철문의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주민들이 사는 집들을 찾아보아도 식당이 아닌 건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었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가면서도 내 생각은 그뿐이었다. 다시 큰 길로 나오다 보니 잘 생긴 나무 둥치마다,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작은 골짜기마다 식당의 평상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곧 그곳에 사는 주민이고 그것이 곧 마을의 풍경임을 알고 있었지만, 산자락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평화로운 마을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은 그래서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큰 길까지 나와 나는 길을 따라 다시 더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개구진 아이들처럼 여기저기 나무 위에 매달린 간판들을 피하지 않고서, 눈앞에 나를 이끄는 길만을 생각하며 차분히 내 걸음만 세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뒤엉킨 간판들은 내 앞 길을 막아섰고, 사람이라곤 조화(造花)처럼 화려한 색으로 친친 감은 등산객들이 전부였다. 골목을 끝까지 올라갔지만, 거대한 철문을 드리운 암자 하나가 길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을 뿐 어디에도 내가 상상했던 마을의 풍경은 만날 수가 없었다. 식당들 사이에 오래된 주택 서너 채가 보이긴 했지만,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간판들 사이에서 그건 마을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닮은 낯선 외지인처럼 보였다.

 

 

 

 

 

 

 

 

 

   마을 꼭대기 암자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는 했는데, 무엇을 담았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암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간판이 없는 사진이 거의 없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멀리 지붕 너머에 우뚝 솟아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차의 뒤꽁무니가 삐죽 나와 있어서 마을이 아니라 상가 뒷골목을 담은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 찾은 걸까, 애초부터 나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 있는 걸까.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길 위에서, 나는 한참을 멀뚱히 섰다. 그런 나를 놀리듯 어느 식당에서 통속적인 대중가요 가락이 흥얼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외지인임이 분명한 누군가의 추임새가 흥겨운데, 산자락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을까, 왜 떠났고 또 왜 떠나지 않았을까. 금정산 자락을 들썩이며 울리는 노랫소리는 맴을 돌듯 계속 이어지는데, 나는 흥겨운 가락을 들으면서도 자꾸 어깨가 무너졌고 다리가 풀렸다. 어느새 우리의 즐거움은 이웃을 잃고 여기 이 마을은 언제 주민을 잃었던 걸까.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간판들은 사진 속 눈엣가시 같았는데, 문득 간판에게 몸을 내어준 나무들이 보였다. 그저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간판에 몸을 붙들려놓고도 어쩌면 그리도 풍채들이 좋으신지. 패이고 꺾이며 철사줄을 꽁꽁 둘러매고도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은 어쩜 그렇게 씩씩한지.

 

 

 

 

 

 

 

 

   떠나가고 돌아온 것은 애초부터 없었구나.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구나. 그제야 나는 눈을 들어 다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꽃을 피우고 잎을 늘어뜨릴 나무들은 마을 곳곳에 우람하게 자리한 채,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든 무엇이든 떠나든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허약한 기다림마저 지워버리고, 또 한 해를, 그렇게 몇 십 년을, 어쩌면 몇 백 년을.

 

   더 이상 길이 없는 끄트머리에서 나는 암자 너머를 올려보았다. 수백 번의 겨울을 지나며 다시 부활하고 또 살아났을 산자락의 주인들이, 빼곡히 어깨를 걸고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겹겹이 나를 둘러싼 채, 따스해진 봄바람을 내 두 볼에 휘휘 불면서. 주인의 너른 품을 활짝 펼치며, 누구든 오시라 우리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정겨움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반기면서.

 

 

 

 

 

 

 

 

 

 

   인사라도 하듯 나는 그제야 산자락을 향해 활짝 웃었다.

   사람이 없다고 속상해하던 마음 따위 슬그머니 지워버렸다.

결국 그날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데, 마을을 내려오는 걸음은 충분히 가벼웠다. 너무 많은 주민들의 환대라도 받은 것처럼 명치 아래가 훈훈했다. 기다린 것들은 오지 않았고 떠나간 것들은 사라져버린 그곳에서, 나는 제일 융숭한 대접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곳엔,

   나무들이 산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5

 

 

 

자본이 '시'가 되는 시대



권명아

 

 

 




 

   한국이 자신의 광대역이 더 우수하다며 차별화된 '기술적 우위'를 주장하는 LTE에 몰두해 있는 동안 전혀 다른 차원의 광고를 들고 도래한 것은 애플이다. 물론 애플 역시 기술경쟁의 대열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지만, 애플의 광고는 기술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완전히 미학적 텍스트로 시장을 사로잡았다. 대표적인 것은 애플 아이패드 에어의 "Your Verse"(당신의 시) 버전이다. 너무나 '시적인' 이 광고가 애플의 노동 착취를 가리고 애플 사용자의 우월감을 은근히 만족시킨다는 점은 먼저 전제로 해두자. 즉 너무나 미적이고 시적인 애플의 광고가 예술의 가치나 휴머니즘을 상업적 목적과 결합시킨 훌륭한 사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너무나 '시적인' 애플의 광고는 오늘날 자본과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지표의 역할을 한다.

 


 

한국의 '광대역'과 애플의 '당신의 시'


   한국의 LTE 광고들이 '기술+스타'라는 한정된 프레임을 무한 반복하는 것과 달리, 애플은 전 세계, 아니 우주 전체로 프레임을 확장한다. 전 지구를 횡단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저 멀리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프레임을 가로지르며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야.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거야.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등도 훌륭한 일들이고 삶을 지속하는데 필요해. 그러나 시, 아름다움, 로맨스, 사랑, 이것들은 삶의 목적이야." 너무나 미학적이고 시적인 텍스트의 효과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애플은 경쟁 상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얘들아, 이제 기술을 파는 시대는 끝났단다."


   이렇게 자본이 마치 이전에 우리가 '시'라고 이름 붙인 어떤 영역이 하던 일을 대체해가는 것을 이론에서는 정동 자본이나, 비 물질 노동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우리가 산업 노동 시대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때만이 파악할 수 있다. 경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기술 개발, 건설과 같은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문학이나 예술, 시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비아냥대는 통속적 이해방식은 이런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오늘날은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물질성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인지 자본주의의 비 물질성이 지배하는 시대로 변화하는 거대한 전환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패러다임이 모두 비 물질 노동으로 대체되지는 않지만, 노동과 자본의 위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아이돌에 초점을 맞춘 LTE 광고와 전 지구와 '인류'로 프레임을 확장한 애플 광고는 기술과 시가 어떤 식으로 우위를 다투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기술 입국이라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표어가 상징하듯이 기술은 '일국'의 시장을 좌지우지 할지 모르지만 '시'는 우주와 '인류'를 좌우하고 있다. 이제 이 우주와 인류는 '시'가 된 자본이 좌지우지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를 자신의 '자본'으로 삼은 자들이 이 새로운 우주의 '엘리트'가 될 것이다.


 

"이제, 기술을 파는 시대는 끝났다"


   이미 이러한 전조는 나타나고 있다. 시, 예술, 미학의 '미래적 가치'를 글로벌 자본이 자신의 자양분으로 만들어가는 동안, 산업 역군의 후예들이 이끄는 지역 대학은 '의학, 법률, 경제, 기술'과 같은 산업화 시대의 '전통' 학문을 실용학문이라 떠받들며 시와 예술을 비실용적이고 무가치한 학문으로 폐기처분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의 지역 대학은 '시가 자본이 되는 이 시대'에 결코 '엘리트'를 양성할 수 없다. '기술을 파는 시대가 끝난' 이 시대에 기술입국을 꿈꾸는 한, 지역 대학은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속에서 하층에 배치되는 산업 역군을 길러내는데 자족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이런 대학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교육 관료들이 애용하는 표현이 있다. "Top/Down". 즉 경쟁력 있는 '탑'은 살리고 경쟁력 없는 '다운'은 없앤다. 지역의 행정 관료들, 대학의 교육 관료들에게 이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자! '시가 자본이 되는 시대'에 산업화 시대의 '전통' 학문을 실용 학문이라고 떠받드는 당신들, 지역 인재의 미래는 탑입니까 다운입니까?

 

 

 

 

 

 

 

  

점과 점이 모여 선이 되기까지 2

 

 

 

차가영(래인커머)

 

 

 

매일 똑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곳에 점을 찍다보면 어딘가로 떠나는게 무서워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그 여정은 새로운 점을 찍을 수 있는 힘이 된다.

 

3. 찍고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처음이라는 긴장되는 상황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말을 꺼낼 수나 있을까,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내가 이 만남에서 맡은 일이 뭐였더라, 이 사람은 어떤 말을 할까. 이런 것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오고, 하나로 모일 수 없는 생각은 몸을 긴장 시킨다. 코도모 센터의 마마상, 섹스워커 인권 활동가 다나카 과장, 동지사 대학의 정유진 선생님, women's action network의 오카노, 무타 선생님, 마와시요미신문의 창시자 무츠상과 만났을 때 내 시야는 오로지 눈앞에 있는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 한국 사람인 정유진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만난 모든 사람들이 일본 사람임에도 옆에서 해주는 통역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긴장된 첫 만남이 끝나고 나면,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올려보아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급하게 기록해둔 약간의 문자를 통해서만 이랬었지, 하고 기억을 더듬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후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첫 만남의 소중함은 좁아진 시야에서 나온다. 한 사람만을 향해 있는 긴장된 몸은 그 사람이 말할 때의 감정을 보는 것에만 집중하게 한다. 그 순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라는 언어의 경계 사이 어딘가 쯤에 내가 서있는 것 같다. 일본어를 거의 모르고, 처음 맞는 상황임에도 몸짓과 몇 개의 단어들로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의 맥락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이 되면, 굉장히 중요한 어떤 걸 몰래 훔쳐본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생기며 말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 호기심이, 첫 만남의 소중함을 만든다. 호기심은 그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계속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게 하니까 말이다.

  2014630. 우리는 가마가사키와 토비타신치 답사 후, 아케이드 뒤편에 있는 코도모센터를 방문했다. 코도모센터는 토비타신치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아이나 부모가 맞벌이를 하여 낮동안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조그만 보육시설이다. 코도모센터에서는 대장인 마마상을 중심으로 코도모센터 출신의 청년들이 아이를 돌보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대장인 마마상은 처음 만난 우리들에게 적극적으로 코도모센터를 소개해주었다. 코도모센터에 대해 말하는 마마상의 얼굴과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곧 끊길지도 모르는 정부의 코도모센터 지원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공간을 지키려는 사람의 결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코도모센터의 아이들이 왜 자라서 센터에 선생님으로 다시 오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 함께 있는 것의 재미와 행복을 느끼고 있을 코도모센터의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친구들이 될지 궁금해졌다.

  같은 날 가마가사키 코코룸에서 만난 섹스워커 인권활동가 다나카 과장은 정해진 단체에 속하지 않은 활동가이다. 여러 곳을 다니며 섹스워커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 다나카 과장과의 첫 만남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은 단어 사용의 다름에서 온 의사 전달의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활동가 다나카 과장과 한국의 활동가 정희샘은 성노동에 대해, 성매매에 대해 각자가 사용하는 단어를 두고 한참이나 설명을 해야 했다. 일본어와 영어와 한국어가 마구 뒤섞여 오갔다. 말의 뒤섞임 속에서 다나카 과장의 얼굴과 말투는 경계에서 안도로 변해갔다. 마구 엉켜버렸던 말의 꼬리들을 하나씩 풀면서 다나카 과장과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나카 과장과의 만남은 인권신장을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활동가끼리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무언인지에 대해, 연대라는 것은 어느 지점에서 가능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

201471. 교토에 있는 동지사 대학에서 정유진 선생님을 만났다. 정유진 선생님은 한국에 있을 때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한 활동가였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시작되었는데, 그 시간은 질문도 별로 없이 유려한 정유진 선생님의 말로 이루어졌다. 오랜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성찰이 바탕이 된 정유진 선생님의 이야기는 우리를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했다.

  정유진 선생님과의 만남 후, 바로 같은 건물에서 만난 무타, 오카노 선생님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연구자이자 활동가이다. women's action network라는 NPO 단체에 있는 두 분은 위안부, 성노동, 성소수자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연구자와 활동가를 함께 하고 있는 두 분의 모습에서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정유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도 같았다. 세 명의 여성 연구자이자 활동가의 만남에서 나는 앙다문 입이 계속 생각이 났다. 존재를 삭제하려고 하는 폭력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그 폭력이 전부 무너져 내릴 때까지 끝까지 들이받겠다는 힘이 숨겨져 있는 앙다문 입.’

  201472. 관광자이자 여행자이자 마와시요미 신문의 창시자인 무츠상이 운영하는 카페 얼스에 방문했다. 무츠상이 만든 마와시요미 신문은 교감을 위해 만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카페에 앉아서 혼자 신문을 보며 만들었는데, 이것이 점차 퍼져 지금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를 체험하고, 만든 신문을 서로 공유하며 서로 교감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날 우리는 마와시요미 신문 2호를 만들었다. 무츠상은 둘러앉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국말이 가득한 방 안에서 무츠상은 신문을 만들고 있는 우리를 보며 미소 짓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하고, 아프꼼과 동인들의 마와시요미 신문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무츠상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것을 발명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여 그것을 널리 퍼뜨리는 재미가 무엇인지 느껴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의견을 나누고, 코멘트를 해주며 다 만든 신문을 하나하나 스크랩 하는 무츠상의 얼굴을 보며, 다함께 모여 앉아 만드는 신문이 왜 공감을 만들어내는 신문이 되는 것인지를 알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때, 그에 응답하는 사람의 표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

 

  만남의 시간동안 좁아졌던 시야는 만남이 끝난 후, 숙소에 돌아와서 침대에 털썩 앉는 순간 제자리로 돌아온다. 한 번의 만남을 통해 넓어진 시야를 갖는 것이 아니라 좁아진 시야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워크숍 기간 동안의 첫 만남마다 경험한다. 헤어지고 나서야, 왜 이렇게 긴장을 했었는지, 긴장한 게 오히려 티가 나서 폐가 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며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더 만나게 되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 텐데. 질문이라도 하나 해볼 텐데. 긴장으로 한껏 움츠러든 채 이루어진 만남은 절대 첫 만남으로 끝을 낼 수 없다. 첫 만남의 소중함은 여기에서 또 나온다.

 

 

 

(첫번째 후기에 그렸던 지도를 이용하여 만든 두번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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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동 - 육지 위에 섬

 

 

 

 

 

 

金 飛

 

 

 

 

 

 

 

 

 

 

   김해시청 바로 아래 자리한 죽림동이라는 마을은 흙빛의 바다 위에 떠있는 섬 같다. 언제나 국경 가까이에 흩어져야 했던 섬들의 운명처럼, 그곳은 부산이라는 지명을 지니고 있었지만 김해가 지척이기도 하다. 지도 위에서 살펴보니 네모나게 잘려진 평원 위에 다섯 개의 섬들은 낙동강을 끌어안으며 옹기종기 모였다.

이번에도 구포시장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마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데, ‘분도증사도니 섬의 이름과 꼭 닮은 정류장들은 금세 먼지 가득한 평원을 가르며 바다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버스는 잘 닦인 넓은 도로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부산의 강동동 쪽으로 뻗은 다리는 어떤 무게라도 실어 나를 수 있을 만큼 우람했고, 보이지 않는 너머에 흐르고 있을 낙동강은 물결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바다의 섬에 사는 사람들에겐 섬사람 특유의 우직함이 있다고 하는데, 육지의 섬에 사는 이들에겐 어떤 힘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지. 혹시 나의 생이 알지 못하는 활력으로, 바다가 사라진 육지에도 낚싯대를 드리워 매일 펄떡이는 생명을 길어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바다 위를 걷는 듯, 나는 그렇게 천천히 도로를 가로질러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낡아 희미해진 간판과 널따랗게 잘 닦인 도로가 어색하게 뒤엉켜 어쩐지 첫인상은 불편했는데, 골목에 들어서니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가 나를 반겼다. 어느 집에선지 담장 너머까지 뻗어 나온 상록수는 머리 위로 물결치듯 일렁였고,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함께 나란히 기댄 작은 의자들은 혼자 온 내게 인사라도 건네는 듯했다. 의자에 앉지 않고 의자를 마주 본 채로, 나는 한참이나 그렇게 쪼그려앉아 있었다. 담장 너머에선 익숙한 트로트 가락이 넘실대며 흘러나왔고 의자 위에서 흔들흔들 몸을 들썩이는 누군가를 나는 구경이라도 하고 있는 기시감이 떠올랐다.

 

 

 

 

 

 

 

 

 

 

 

   골목 안으로 조금 더 들어서니 뒷짐을 진 할머님 한 분이 나타났고, 조용히 인사를 건네니 온화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섬사람의 우직함은 아니었는데, 낯선 사람을 대하는 그 미소가 참으로 넉넉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펄떡이는 생활의 힘이었는데, 주름진 미소 하나 만으로 금세 그곳의 정경은 달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디에서든 그렇게 인사를 드릴 때마다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건네받았던 것 같다. ‘낯선 사람이란 말의 불편함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 어쩌면 지금도 너무 많은 이들이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사람으로 걷고 있는 내 허약한 몸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깃발이 펄럭이는 골목 끝으로 할머님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섰다. ‘낯섦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아니며, ‘사람도 결국 그렇게 나와 닮은 누군가일 것이다.

 

 

 

 

 

 

 

 

 

 

 

   마을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는데, 나는 자꾸 어딘가로 올라서고 있었다.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을 오르니, 마을 한가운데 등대처럼 솟은 것이 보였다. 굴뚝이었다. 사정없이 타오르는 것들을 제 몸으로 보듬어 날마다 뜨거워졌던 시간을 기억하는지, 찌르듯 솟은 그것은 온기의 때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을 홀로 견디며 얼마나 오래도록 그곳에 그렇게 버티고 섰던 건지.

더 이상 아무것도 태우지 못하는 굴뚝은 차갑게 식었지만, 나는 그 위에 깃발이라도 걸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연기를 뿜거나 뜨겁게 타오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검댕과 흙먼지로 뒤덮인 고독한 흉터는 그 어떤 문명의 화려함보다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목소리 높여 외쳐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의 뜨거움을, 당신의 펄럭임을, 당신의 외로움을, 우리 알고 있다고.

 

 

 

 

 

 

 

 

 

 

   그렇게 한참을 굴뚝 아래 앉아있다가 골목을 따라 더 위로 오르니, 금세 인가는 사라져버렸다. 마을 끄트머리에 나와 앉은 오래된 TV 하나는 길을 막은 불량배처럼 건들대는 듯했다. 가볍게 그것을 뛰어넘어 수풀이 우거진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나는 어느새 높다란 나무들이 우거지고 키가 큰 대나무들이 사방을 가로막은 산 속에 와 있었다. 그 너머에 김해 죽도 왜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곳을 등진 채 숲 속으로 난 길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걷고 싶은 것은 지나간 길이 아니라 여기 이 길이며,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물리치고 승리한 영웅이 아니라 무기력하고 소심한 나를 닮은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밭이랑으로 난 좁은 길을 가로질러, 나는 높이 솟은 대나무 담장을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내 곁으로, 한껏 몸을 세운 청청한 대나무 줄기들이 따가운 오후 햇살을 산산이 부수어내고 있었다. 눈부신 세상의 열기를 거역하는 대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너무 작은 절이 나타났고, 나무 담장을 다듬던 주민 한 분이 나타났고, 다시 또 잘 닦인 도로가 나타났지만, 나는 널따란 도로를 따라 걷지 않고 다시 마을 속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섰다. 일어서지 못한 누군가를 내던진 두 개의 신발이 수풀 속에 드러누웠고, 발길질 같은 신발의 몸짓을 피해 걷다가 나는 그만 휘적거리며 발을 헛딛고 말았다. 발에 걸려 넘어지듯 나는 주저앉았고, 내 발목은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우린 어차피 그렇게 걸려 넘어지고 말지.

사람들 속에서 더욱 고독해지는 여기,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거기. 그래도 다시 또 일어서야 하지, 걸어가야 하지.

 

   절룩거리며 나는 작은 공원을 지나,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시멘트로 얼기설기 만든 계단은 높낮이가 제멋대로였고 부은 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잔뜩 몸을 낮춘 가로등이 허술한 담장에 매달려 나를 내려봤고, 우렁찬 개의 울음소리가 야유하듯 쩌렁쩌렁 울렸다. 한 쪽 다리를 끌며, 허약하게 무너져내린 다짐들을 끌어안으며, 나는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풍경이 내 앞에 나타났다. 인사하듯 나를 반기던 바로 그 의자 두 개.

 

 

 

 

 

 

 

 

 

 

 

 

   나는 더 이상 서있지 못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랜 시간 걷고 또 걸었는데, 나는 겨우 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내 머리 위에서 새하얀 비행운을 그리며 무언가 날아갔고 담장 너머에선 노랫가락조차 들려오지 않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춤을 추는 것이 아니었다. 통증 때문이었다.

 

   갑자기, 몹시도 사람이 그리웠다.

 

   쪼그려앉아 나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텅 빈 내 곁에 와 앉을 사람이.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 사람이.

 

 

사진: iPhone 4S © 김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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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장치를 발명하자! - 비정규직 대학구성원 좌담회 안내>

 

 

연구모임 <아프콤>과 계간 <<문화과학>>이 2015년 2월 27일 도쿄 이레귤러 어사일럼에서 서울, 부산, 일본의 비정규직 대학구성원들과 <인문장치를 발명하자!> 연속 좌담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일시: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오후 2시

 

장소: 도쿄 <이레귤러 어사일럼>

 

주관/주최: 연구모임 <아프콤> / 계간 <<문화과학>>

 

문의: affcom11@gmail.com

 

 

 

대학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비정규직 대학구성원들의 위기,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될 이번 좌담회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0 : 시랑리 - 등 뒤에 타오르는 빛 

 

 

 

金 飛

 

 

 

 

 

 

 

 

 

   비가 갠 하늘은 시리고 서늘했다. 그토록 짙은 파랑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듯한데, 내겐 모든 또렷한 것들이 그저 나를 겨냥한 것만 같았다.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은 물러서라, 처연하고 우울한 것들에 사로잡힌 생각들은 집어치우라. 무작정 웃어라, 열광하라. 저 하늘의 순리마저 지상의 생명들에게 청청한 축제를 명하노니, 우리들의 책무는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향유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몸서리치도록 투명한 풍경 앞에 말을 잃는다.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경탄하는 그들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모든 것들을 등지고 돌아서니, 또 다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위기의 순간마다 모성을 부르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습성인지, 나는 또 다시 그렇게 나도 모르게 바다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바다를 만나기 위해, 나는 부산의 제일 끄트머리인 기장으로 향했다. 기장은 1914년에는 동래에, 1973년에는 양산에, 그리고 다시 기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지금의 기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위쪽으로는 울산에, 서쪽으로는 양산에, 그리고 남쪽으로는 금정구에 맞닿아있는 기장군은, 갑화양곡(甲火良谷)이라 하여 원래 이름도 변두리마을, 혹은 큰 마을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 기장읍의 시랑리로 향한 것은 온전히 축축하게 젖어만 있던 나를 (‘사랑이라는 말과도 닮은) ‘시랑으로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알량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양산에서 버스를 타고 보니, 내가 가야할 길은 부산 해운대를 거쳐 다시 기장군 쪽으로 올라가는 노선이었다. 기장군은 양산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니 그저 동쪽으로 가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될 듯했지만, 그렇게 갈 수 있는 버스 노선은 있지도 않을 뿐더러 있더라도 시간을 맞추어 일일이 갈아타며 갈 수도 없었다. 자동차를 몰고 갔다면 50여분 남짓 될 거리를, 하는 수 없이 나는 두 시간 반 넘게 걸려 양산에서 부산 해운대 쪽으로 갔다가 다시 해운대에서 송정을 지나 기장 쪽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가 닿을 수 없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가 닿는 거리와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리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그렇게 크고 넓기만 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다 보니, 시랑리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하늘에 저녁 기운이 무럭무럭 번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덕분에 마을의 정경은 더욱 조용하고 고즈넉하기만 했다. 엄마의 품에 안기듯 나는 마을 한 복판에 뛰어들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감들은 저녁 빛 때문에 더욱 붉었고 어느 집 마당에 높이 솟은 솟대는 당당하게 바다 쪽을 넘겨보고 있었다. 뒷짐을 진 어르신이 골목을 거슬러 올라갔고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그저 까딱 .’하고 그녀가 대답했던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마음은 훨씬 더 가벼워졌다. 이미 겨울 바람으로 돌변해버린 저녁의 기운은 쌀쌀했는데, 내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바다 쪽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경쾌했다.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한 조용한 집들을 사진 속에 담으며,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인적이 사라지고 없어도 괜찮은 정경을 기억하며, 나는 시간 속에 버려진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바다는 방파제로 가로막혔고 여기저기 작은 어선들이 몸을 기댄 채 쉬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내어준 바다의 몸짓임을 알 것만 같았다. 바닷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노인분들을 다시 만났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청했다가 손사래를 받았지만 그래도 나는 속상하지는 않았다. 정중히 그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와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저만치 포구 끄트머리에 할머님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어스름 저녁 빛에 물들어가는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고즈넉이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는, 그녀의 머리 위에 날고 있는 새는, 매일 밤 그녀를 비추었던 가로등의 큰 키마저도, 어쩐지 오늘은 달라보였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녀에게서 물러나, 나는 계속해서 방파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어부들이 어지럽게 엉킨 것들을 육지로 끌어 올리고 있었고, 나는 그 건너편 동해 상회라는 이름의 작은 건물에 눈을 빼앗겼다. 그저 남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동해라니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아 엉성하게 웃고 말았는데, 셔터를 누르고 나니 여기가 남쪽이면서 동시에 동쪽이었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스쳐갔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쪽으로 돌아서 나 혼자만 더욱 넓은 세상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한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틀린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고, 여기는 남쪽이면서 또한 동쪽이며 어딘가의 북쪽이면서 또한 서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궁지에 몰려있다고만 생각했던 내 등 뒤를 허물어내는 고마운 몰락이었다.

 

 

 

 

 

 

 

 

   방파제 위를 걸으니 그 좁은 길이 더욱 좁고 또한 멀게만 느껴졌다. 아니다. 어쩌면, 한 발 더 내가 걷는 그 길은 넓어졌고 또한 내 걸음으로 방파제는 당연히 가까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축축하다고만 생각했던 내 기억은 생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였고, 그늘 속에 있다고 믿었던 여기는 그저 저녁 빛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늘이 밤이 되고 밤이 다시 새벽이 되어 또 다시 그늘이 드리우더라도, 여기 이곳의 아침은 조용히 세상의 하루를 기록할 것이다.

 

   슬프지만 울지 않은 채로, 나는 그렇게 바다 앞에 섰다. 주저앉고야 말았지만 쓰러지지 않은 채로, 나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괜찮겠구나, 여기 이렇게 무기력하고 비겁한 삶을 살게 되더라도, 비통하게 오열하고 몸부림칠 수 없더라도, 나의 그늘은 또 그렇게 하루의 싹을 잉태하고 있겠구나.

 

   가장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부여받았지만, 처음으로 나는 내 앞의 시간에게 두 손을 벌렸다.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은 채로, 혹은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나는 다시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기꺼이 몸을 열어 그 혹독한 시간에 나를 내맡기면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시간을 내 스스로 품어 안으며.

 

   고개를 돌려보니, 잔뜩 웅크린 내 등 뒤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날개를 단 영혼들이 마음껏 하늘을 날았고, 시커멓게 밤의 기운으로 뒤덮인 어둠 속에서 황금색 저녁이 불을 뿜으며 폭발하고 있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가마가사키를 걷다

 

 

 

장옥진(래인커머)

  

 

 

 

 

  

가마가사키의 코코룸은 여러, 다양한 만남들이 잦은 곳이다. 안심을 나눌 수 있는 예술 같은 공간, 코코룸의 좁은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쪽에 놓인 탁자가 보인다. 두 개의 탁자를 이어붙인 앉은뱅이 탁자. 신발을 벗고 자리를 채워 앉으면 맞은편엔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고,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는다. 코코룸의 운영자인 카나요상은 이 탁자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카나요상과 얘기를 나누던 중 코코룸으로 엔도상이 들어왔다. 엔도상은 조금 서두르는 기색으로 우리 일행과 코코룸을 나갔다. 가마가사키를 걷기 위해서다. 이날 엔도상은 가마가사키를 안내해주었고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사진 촬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엔도상은 민감하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곳을 민감한 곳, 민감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말하며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는 시늉을 해보였다. 우리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지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고, 이것으로 우리의 가마가사키 걷기는 시작되었다.

 

코코룸을 나와 양쪽으로 이어진 상가를 지나 거리로 나섰다. 상가 앞을 지나는 사람들, 거리의 사람들은 유독 남자가 많았다. 평소 아저씨, 할아버지로 부르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소 허름한 옷을 입고 상가 앞에 앉아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저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인 그들 곁을 약간은 긴장한 채로 지나쳤다. 거리도, 사람도 특별히 찾아온 손님이라 하여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것이 마음 편히 느껴지기도 했다.

 

엔도상의 설명으로 가마가사키는 일용직 노동자, 홈리스들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1960년대 산업화가 되면서부터 국가가 전략적으로 형성한 노동시장이었고 이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거품 경제가 몰락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일용직 노동자는 필요치 않게 되었고, 이 후 가마가사키에는 노동력이 있으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갈 곳을 잃은 사람들, 세월이 지나 고령이 된 사람들이 남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이들은 여전히 실업 문제, 고령화 문제 등을 안고서 가마가사키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둡고 좁은 거리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는 지친 이들의 모습에는 이러한 사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이곳은 경찰과 주민들 간의 갈등이 많이 빚어진다고 하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행위에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도 하고, 이는 곧 폭력사태로 번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들까지 겹쳐져 가마가사키는 대내외적으로 문제적인 곳이 되었다. 이에 오사카 정부는 가마가사키의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아이린(愛隣) 지구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엔도상은 사랑하는 이웃이란 뜻의 저 지명이 오히려 폭력적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가마가사키 주민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히 시혜적인 용어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므로 포용해야만 하고 도움 받아야 마땅할 존재가 된다. 우위의 시선에서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지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 벽에 예쁘게 달아놓은 꽃과 이 꽃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한 관이 사실은 벽에 기대어 자는 노숙자들을 쫓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엔도상에게 들었을 때는, 그들은 사실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주민들조차도 서로를 이웃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계속 해서 길을 걷다 한 건물 앞에 섰다. 쪽방, 일본말로는 야도라 한다는 이 건물은 독신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지금은 호텔의 형태로 개조된 곳도 많고 하룻밤 묵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실제로는 일용직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잠시 묵는 숙소에 가깝다고 하였다. 이에 엔도상은 사실상 노동자를 위한 호텔은 없다고 말한다. 가마가사키에는 주일 방, 달 방의 형태로 값을 치르고 사는 독거노인, 500엔 정도의 싼 방을 차지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도 있겠지만 갈 곳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엔도상의 설명에 의하면 가마가사키에는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이와 관계없이 오사카 시에서 지어준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는 가마가사키를 국가, , 부 차원에서 각각 보험 등록, 숙박 및 무료 의료센터, 직업교육 등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오사카 부에서는 노동지원센터라 해서 일용직 노동자를 서포터해주는 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직업교육, 연수 등 여러 강좌를 무료로 개설하고 있다. 엔도상은 이에 참여하는 연령대가 70~80세로 높으며 이들 역시도 고도 경제 성장기 때 모집되어 남겨진 사람들이라 하였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는 노동복지센터에는 직접 방문했는데 아무런 가구도 없는 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 자는 사람, 그 안에서 굳어진 생활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건물 자체에는 쾌쾌한 냄새와 눅눅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박스로 칸막이를 만들고 깨끗이 빤 수건을 널어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는 우리들 곁으로 방향제를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엔도상은 한 쪽 모퉁이에서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오전 다섯 시에서 오후 다섯 시 사이에 홈리스와 노동자들을 위한 인력시장이 열리고 이들이 고용되기 위해서는 주민 등록이 필수라 하였다. 주민 등록을 하지 않으면 여러 복지 지원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더불어 고용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민 등록은 그들이 가마가사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고령이 되어서도 일을 계속 하게 만들고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게 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단지 잠잘 곳이 없어 이곳을 방문했거나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사람들 또한 가마가사키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없을 경우 낮에 자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 대부분은 고용 보험을 들게 되는데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당연히 고용 보험의 혜택은 없다. 이는 곧 실업-노숙자로 이어지게 되고, 엔도상은 이런 지원센터들이 마켓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노동자가 노숙자가 되는 상황이 큰 문제라 하였다. 노동복지센터 건물을 나오며 이것이 지원인가에 대해 생각했고, 그들을 국가에 등록시키고 명목상 그들을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국가의 지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해진 마음으로 거리를 걸으며 이외에도 다소 허름한 모양새의 공터, 여러 사람들을 지나쳤다. 엔도상의 안내에 따라 우리 일행은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토비타 신치를 걷게 되었다. 카메라를 절대 꺼내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두세 명씩 떨어져 걸음을 옮겼다. 젊은 여자가 야한 옷을 입고 가만히 전시되어 있으면 할머니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형태가 길의 양 옆으로 쭉 이어졌다. 길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랐고, 길의 끝에서 생각나는 건 오사카 거리에서 보았던 전통 등()이었다. 오사카 거리를 걸었을 때 느꼈던 화려함이 이곳에서도 묘하게 느껴졌고, 성매매가 일본에서도 불법이긴 하지만 경찰도 어찌하지 못하는 곳이란 설명을 들었을 때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바삐 몇 걸음을 옮기자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껏 뭘 보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뚝 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반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전혀 다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이 아파트에는 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가마가사키를 엔도상의 안내에 따라 걷고 나니 허기가 졌다.

 

코코룸 안으로 다시 들어오니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마주한 것은 허름한 옷차림의 웃음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거리에서 보았던 아저씨, 할아버지들과 다름이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처음 앉았던 탁자에 앉았다. 정성스레 차린 음식이 탁자 위에 차려졌고, 좁은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밥을 먹었다. 가마가사키의 많은 사람들이 간신히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를 곱씹으며 코코룸에서의 밥 한 숟가락을 꿀떡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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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섬, ,

 

장수희(래인커머)

 

 

 

 

 

 

 

 

 

 

 

  

 

시공사의 ‘Just Go’ 시리즈는 여행정보 가이드북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구하기도 쉽다. 이 가이드북은 여행을 떠날 사람들에게 여행지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 한권만 들면 여행지 안에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을 것처럼 광고되기도 한다. “명소 총망라라든지 완벽 가이드는 이런 가이드북에 늘 따라붙어 다니는 광고 문구이다.



내가 오키나와에 가게 되었을 때에도, 도서관에서 ‘Just Go’ 시리즈의 『오키나와』편을 빌려 읽었다. 이 책은 오키나와를 북부중부남부, 공항이 있는 나하시, 그리고 케라마 열도로 나누어 설명한다. 나는 오키나와에 가기 전까지 그곳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이 여행 책자에서 설명하는 오키나와 본섬과 케라마 열도가 오키나와의 전부인 줄 알았다. 사실, 일본의 오키나와현은 오키나와 제도, 다이토우 제도, 미야코 제도, 야에야마 제도 등 총 36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근처에 중국과의 분쟁 지역인 센카쿠 열도도 있다.



그런데 오키나와를 이루는 수많은 섬들이 한국의 여행 가이드북에는 제외되어 있다. 한국의 여행 가이드북에는 없는 섬-한국이나 한국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남국 혹은 일본의 일부분일 뿐인 것처럼 느껴지는 섬들. 한국인들에게 오키나와의 섬들은 왜 삭제되어 버린 것일까.



사실, 오키나와는 한국영사관이 있을 정도로 한국 정부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속해 왔던 곳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1972년까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아 왔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자, 오키나와에서는 민단(7012)과 조총련(729)이 재빨리 조직되었다. 한국은 오키나와에 영사관을 설치함으로써 안보 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군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에 군부나 병사로서 그리고 일본군위안부로서 희생되었던 조선인에 대한 규명이나 당시 오키나와에 살고 있었던 1,000여 명의 한국인에 대한 지원보다, 냉전 상황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고려가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오키나와는 휴전선 없이 남과 북이 뒤섞여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해 갔던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현현되는 공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오키나와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삶은(혹은 기록은) 한국인에게서 서서히 잊히면서 인식의 지도에서 삭제되어 간다.



1973년부터 1995년까지 조총련의 활동과 북괴를 견제하며 오키나와의 나하시()에 주재했던 대한민국영사관은 이제 없다. 또한 1972년부터 1998년까지 활동했던 오키나와의 조총련 조직도 이미 해산했다. 이제는 오키나와에서의 조선인의 삶, 조선인의 고난, 조선인의 역사는 잊히고 아름다운 휴양지 오키나와의 이미지만 남아 있다. 한국인에게 휴양지혹은 관광지로 인식되는 오키나와가 다이토우 제도, 미야코 제도, 야에야마 제도를 포함한 363개의 섬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관광지, 휴양지로서의 오키나와는 본섬과 케라마 열도 정도로 족하기 때문이다.



여행 가이드북에선 소개하지 않은 미야코 제도의 미야코 섬에는 일본군위안부를 추모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아리랑의 비12개의 언어로 반전평화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는 여자들에게라는 기념비가 있다. 일본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는 장소 옆, 작은 비석이 놓여 있는 벌판의 주위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위안소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인에게 잊어진 섬, ‘오키나와의 미야코 제도에는 잊히고 배제되어 왔던 그들의 이 남아있다. 그런 오키나와에 가는 일은 우리가 냉전기를 지나면서 삭제시켜 온 , ‘, 그리고 들을 만나는 것, 그리고 , ‘, ‘들을 되살리고 듣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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