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진보

 

 

권명아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일흔 어름의 할머니에게 “한창 좋은 때다”라고 말하는 풍경이 참 먹먹했던 적이 있다. 늙음과 젊음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몇 백 년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게 헛된 고목 아래 앉아 나이듦에 대해 묻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곱씹어본다. 유용하고 무용한 세상의 지식을 많이도 들춰보았지만, 나이 들며 마주하는 낯설고 두려운 질문에 대해 그 지식의 서재에서 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다. 세상을 향해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내고 조언과 진단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에게도 나이 들며 부딪치는 질문은 그저 홀로 침잠해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물론 건강에서 재테크까지 나이 들면서 챙겨야 하는 일들을 조언해주는 정보는 넘쳐난다. 그러나 나이듦과 정치라는 두 항을 이어주는 지식이나 담론은 거의 부재하다.

 

 

   다만 세대 논쟁만이 뜨겁다. 세대 논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와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진보, 혁명, 변화.’ 이런 단어에서 우리는 암암리에 젊음, 청춘을 연상한다. 보수가 ‘늙음’, 오래됨과 자연스레 연결되듯이 진보는 언제나 ‘젊음의 것’이었다. 이는 근대 주체가 형성되어온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보수=늙음’, ‘진보=젊음’이라는 식의 의미 연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정치적 주체에 대해 진부한 세대 논쟁을 넘는 새로운 담론 지형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간다’(progress)는 의미를 지녔기에, ‘젊음’의 시간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이론적 입장에 따라 진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래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생태주의나 근대적 개념이 인간 모두를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굳이 ‘진보’라는 개념을 선호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 있다. ‘진보’라는 개념은 품을 수 있는 주체가 한정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기득권 수구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유는 때로, 아니 언제나 현실에 뒤진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원래 살던 대로 살 권리’를 요구하는 밀양 할매들의 십년이 넘는 투쟁은 ‘청년 진보’라는 표상을 뒤흔들었다. 또 혐오를 무기로 삼는 청년 우익의 등장은 보수가 더 이상 오래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뼈아프게 환기시켰다. 그러나 ‘밀양’을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듯이,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나이듦을 사유하는 것은 아직은 시작 단계다.

 

 

   나이듦을 단지 숫자로 환원되는 ‘나아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나이듦은 육체의 나아감을 측량하고 관리하는 기술과 학문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나아감에 속한다. 그러나 나이듦이란 신체적 상태의 변화와 생각, 정서, 관계 맺음, 삶과 사회에 대한 태도의 변화 역시 함축한다. 이는 단지 노화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 나아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나아감이야말로 정치적 사유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근원적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호감을 얻기 위해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청년 문화에 동참하는 진보정치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이런 ‘청춘의 코스프레’는 어쩌면 나이듦에 대한 진보정치의 불안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이듦이라는 차원을 이론과 실천 속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진보정치는 그 자체의 나아감에도 근원적인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바지를 벗고,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종편의 괴성으로 상쇄시키고 있는 저 ‘고집불통의 노친네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민중 속으로’ 나아가는 진보정치의 길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깃발이 드높다

 

 

 

권명아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것’이다.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논의는 그가 동성애자라거나 위장한 동성애자라는 소문으로도 이어졌다. 히틀러는 동성애자를 유대인만큼이나 혐오했다. 동성애에 대한 히틀러의 강박적 혐오 때문에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뜬소문이 끊이지 않았다는 논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반파시즘 진영에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하여 나치를 희화화하는 방식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반파시즘은 동성애를 ‘절멸의 대상’이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한겨레>가 동성애 혐오 발화를 전면 광고로 게재하여 물의를 빚었다. 논란이 일자 한겨레 쪽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가진 의견 또한 정보”라고 해명했다. 이는 혐오 발화의 폭력성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혐오 발화는 ‘의견’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로 보장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혐오 발화를 하나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사태를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혐오 발화의 폭력성을 사유하고 대처해 나가는 데 무지하다는 점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파시즘은 증오 정치를 동력으로 진행된다. 파시즘은 낙인찍기, 혐오 발화, 증오 행동을 거쳐 대량 학살로 향했다. 혐오 발화가 하나의 ‘의견’이나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학살의 예고편이라는 것은 무수한 사례가 보여준다. 그 사례들에 따르면, 혐오에는 이유가 없다. 혐오란 이유가 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들러붙는 신체적 힘들의 결집체이다. 파시즘이 여성, 성적 소수자, 인종적 타자를 혐오하며 절멸시킨 데에는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다. 물론 이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이들 집단이 당대 주요하게 부상한 ‘새로운 세력’이라는 점과도 관련된다. 대표적인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는 파시즘이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라고 주장했다. 즉 파시즘의 혐오는 논리적 근거가 아닌, ‘안티’의 역학을 따라 촉발된다.

 

 

   최근 한국 사회의 혐오 세력이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집단들을 향해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을 수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그때마다 ‘쟁점이 되는’ 집단을 찾아다니며 혐오 발화나 방해 시위를 자행하고 있다. 혐오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들러붙는 신체적 힘들의 결집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혐오가 대상에게 부정적으로 들러붙는 속성을 지닌다면, 그 강도가 높을수록 혐오의 주체는 대상에 들러붙어 휘감겨버린다. 히틀러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것’에 대한 추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최근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둘러싼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혐오의 강도는 이에 맞서는 저항의 강도를 높이기도 한다. 물론 혐오 덕분에 저항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혐오에 맞선 사랑은 추상적으로 논의된 사랑의 정치성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여했다. 이 일은 ‘나른한’ 진보 이론의 대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혐오에 맞서 행동한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2014년 한국 사회는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사랑의 깃발’과 그 사랑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만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의 공허한 열광을 마주하며, 우리는 단지 파시즘의 도래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도가 다시 그려지는 현장을 보고 있다. 2014년, ‘진보’라는 말로 다 포함할 수 없는,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의 정치가, 사랑이 일어나고 있다.

 

 

 

 

 

 

 

무상급식과 유턴 정치

 

 

 

권명아

 

 

 

 

 

   지방대 교수들끼리는 매사 너무 지나치게 열심인 동료를 두고 “그 사람 요즘 편입 준비하나 보다”라며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기회만 되면 서울로 ‘유턴’하는 지방대 교수들의 풍토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이다. 지방을 서울로 유턴하기 위한 반환점 정도로 생각하는 대표적 집단이 교수와 정치인이다. 이들에게 지방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업적을 쌓는 거점일 뿐, 돌보고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다. 이들이 쌓는 업적도 결국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에 부응하는 일일 뿐 지방을 돌보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들을 ‘유턴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교수나 정치인이나 ‘유턴족’들이 지방에 와서 하는 일은 주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유턴 정치뿐이다.

 

 

   현재 과격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무상급식 폐지 선언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치인들의 유턴 정치의 무책임한 결과이다. 무상급식 폐지 논란이 왜 경남에서 선정적일 정도로 선동되는지를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남에서는 무상급식을 ‘경남의 자부심’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무상급식 논란에서 막상 경남 지역은 사라져버렸다. 홍준표 지사는 이 논란 덕택에 대선 주자로서 한자릿수의 지지율을 얻는 ‘결실’을 얻었다고 한다. 도지사가 ‘아이들 밥그릇’으로 유턴 정치에 열심인 사이, 도민들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홍준표 도지사가 내동댕이친 ‘아이들 밥그릇’은 실은 김두관 전 도지사의 ‘작품’이기도 했다. 야권 불모지 경남에서 53.5%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김두관 전 도지사가 ‘대권’을 위해 유턴해버렸고 경남도민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홍준표 도지사의 당선은 그런 점에서 김두관 전 도지사의 유턴 정치에 대한 도민들의 강력한 심판 의지의 결과였다. 유턴 정치에 대한 심판으로 당선된 도지사가 다시 유턴 정치를 위해 경남도민의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왜 경남도민들은 일어나서 분노하지 않느냐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결국 보수정당 텃밭인 경남 사람들의 정치 성향이 문제라는 비판도 들린다. 자주 듣는 진단이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하는 이른바 지식인들도 결국 선거 때 말고는 지방의 사정에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의 지방 비판은 지방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선거 결과만으로 고질적 지역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이나, 지방을 표밭으로만 보는 정치인들은, 지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가꾸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도지사들이 차례로 밥상 뒤엎는 모양을 내내 지켜보아야 했던 경남도민들은 분노하기보다 냉랭하다. 이 냉랭함이 정치 무관심과 같은 것일까? 내동댕이쳐진 밥상으로 더렵혀진 방구석을 치우는 이들은 화를 내기보다, 냉정하게 이를 앙다문 채 뒤치다꺼리를 할 수밖에 없다.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야말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이 맡아야 하는 몫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건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떠나면 그만인 ‘유턴족’들과 멀리서 불구경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유턴 정치는 모두 서울 중심주의의 결과이지만, 교수의 유턴이 학벌 사회와 관련된다면 정치인의 유턴은 지역 자치가 불가능한 정치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가 변화되지 않는 한 선거는 결국 지방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선거는 근본에서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지방의 맥락에서 선거는 지방을 중앙의 식민지로 만드는 노예화의 도구에 불과하다. 분탕질 뒤끝의 심판도 살림도 결국 지방 사람들의 몫이다. 그 뒤끝이 선거 결과만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뒤끝의 매서운 맛을 볼 날이 오리라.

 

 

 

'막장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권명아

 

 

 

 

 

   태풍이 불면 바다 심연에 있던 것들이 기슭으로 올라온다. 태풍이 지난 후 백사장을 가득 채운 쓰레기 더미는 충격적이었다. '저 바다 깊은 곳에 이런 쓰레기가 가득했었구나.' 그 쓰레기들은 항상 바다 저 멀리 심연에 있었을 터이지만, 사람들이 사는 기슭으로 올라오기 전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2014년 한국 사회에는 일 년 내내 태풍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매일매일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쓰레기가 '한국 사회'의 기슭으로 올라온다. 이제 한국 사회가 바닥을 보인다는 말도 너무 자주 듣고 말해서 물려 버렸다.
 


심연의 유령들, 고딕 판타지의 시작
 
   그런데 이제, '심연, 바다' 같은 표현을 더는 심상하게 쓸 수 없다. 2014년 바닥을 보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연, 바다' 같은 표현조차 집단적 트라우마를 환기한다. 우리는 이미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현실로, 생생하게 한국 사회의 바닥을 보았다. 
 
   태풍이 불지도 않았는데, 바닥을 드러낸 채 뒤집힌 세월호는 '바닥' '심연'을 상징 차원에서 현실로 불러들였다. 바닥을 드러낸 세월호가 무슨 전조이기라도 한 것처럼, 줄줄이 한국 사회의 심연에서 '유령'들이 밀려온다. 심연으로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의 유령들은 죽지도 않고 되돌아온다. 파시즘이 지배했던 스페인을 고딕 판타지로 그려낸 영화 '판의 미로'에는 아이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는 괴물이 나온다. 피 맛에 굶주린 이 괴물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상징이다. 고딕 판타지 장르를 빌려 말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는 바다의 심연에서 아이들을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은 유령들이 피 맛에 굶주려 배회하는 모양이다. 남미의 문학이나 영화는 고딕 판타지나 마술적 리얼리즘이 지배적인 장르로 활용된다. 폭력과 학살로 점철된 남미의 역사적 경험은 통상적인 사실주의나 리얼리즘으로 재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리얼리즘이 불가능한 고딕 판타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조짐을 보인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에로-그로'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 장르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결합한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에로'와 '그로'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미적, 정치적 효과는 다양했다. '에로-그로' 장르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성적 표현은 성 해방에 대한 열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오히려 193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폭력의 기괴함과 폭력에 몸을 내맡기는 대중의 충동이 '파괴적인 죽음 충동'으로 충만한 '에로-그로'라는 장르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일본의 파시즘이 극단화되면서 '에로-그로'는 전쟁 광기를 선동하는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파시즘의 역사를 참조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볼 때 눈여겨볼 지점은, 파시즘의 폭력성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장르 복합체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파시즘의 역동성과 '자발적 광기의 분출'은 이런 면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파시즘의 폭력성과 그 전조를 단선적인 회색 톤의 억압적이고 건조한 장르로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면적이다. 파시즘의 폭력은 일방적이지만, 그 폭력의 형태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버라이어티 장르, 파시즘 

   2014년 정치 뉴스는 '19금' 경고 자막이라도 넣어야 할 만큼 어처구니없이 에로틱하다. 사회 뉴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게다가 '에로'와 '그로'는 종종 몸을 바꾸고, 때론 이종 교배를 일삼는다. 이런 버라이어티 장르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지배적인 미디어와 정치 집단이다. 그러나 이런 버라이어티에 열광하는 대중 또한 파시즘이라는 복합적인 장르의 발명자들이다. 물론 대중을 이렇게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에로-그로', 고딕 판타지, 이름 붙일 새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막장 장르를 한국 대중들은 아주 오래도록 '관람'해 왔다. 한국 사회는 여러모로 막장의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막장 장르의 주도권이 지배 집단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관람자의 자리에서 채널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는 대중 역시 만만치 않은 막장의 달인들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무한 반복되는 막장 드라마를 끝내고 새로운 장르를 발명할 기회는, 그러니까 이제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2014년이 고딕 판타지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오늘 말이다.

 

 

 

경제위기와 폭력적 언어유희

 

 

 

권명아

 

 

 

 

 

 

   대공황이 다시 오는가? 경제학자들도 이에 대해 쉽사리 예측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대공황은 파시즘의 득세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문화사적 자료를 참조해 볼 때 대공황의 시대는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대공황은 마치 세계가 격렬하게 휘발되고 있는 것 같은 공포로 다가왔다. 쓸모없는 종이더미가 된 지폐 다발들이 상징하듯이, 대공황은 기존의 물질적인 경제적 토대를 휘발시켜 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휘발성이란 단지 상징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가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는 것은 아주 작은 불씨에도 금세 불타올라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체가 모호한 '적'을 향해 불타오르는 증오와 적대감은 대공황 시대의 정동(affects)이었다. 
 


대공황, 경제를 잃고 적을 얻은 시대
 
   이런 점에서 히틀러는 대공황 시대의 전형적 산물이다. 히틀러와 파시즘이야말로 이 세계를 격렬한 휘발성으로 불태워 버리고자 했으니 말이다. 격렬한 휘발성은 파시즘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파시즘 시기 언어는 내용, 의미, 가치, 구체성, 책임성과 같은 실체를 상실한다. 프리모 레비는 이러한 '언어의 폭력적 변형'이 파시즘의 특이성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을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연설광이었던 히틀러가 적에 대한 증오와 선동으로 가득 찬 언어를 구사할 때, 말은 내용과 의미를 상실한 '이상한 소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경제 불황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하는 소란이 잦아진다. 경제는 황폐해지고 사회 갈등이 고조되고, 공동체의 위기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는 곳곳에서 이러한 격렬한 휘발성의 증상과 마주한다. 경제 논리를 정치로 환원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경제는 '적'을 비난하는 폭력적 언어 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다.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듯이 대공황은 막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집권 세력들이 경제 불황을 해결할 실질적 대책을 무시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적대와 증오의 말들로 그 책임을 휘발시켜 버린 결과 대공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휘발된 언어에 휩쓸려 버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014년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집권 세력은 매번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할 뿐이고, 이제는 언어의 폭력적 변형에 스스로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불황의 고통을 매일매일 감수하고 살아야 하고, 거기에 더해서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언어의 '향연'을 관람해야 하는 참담함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편 무책임한 휘발성의 언어가 발산하는 적대의 향기에 심취한 이들은 앵무새처럼 '적'을 공격하는 말로 현실의 고통을 해소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 속 화폐다발의 가치도 해소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2014년 겨울,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마치 '시끌벅적하고 분노로 가득한 소리들이 넘쳐나지만 무의미한 영화'와도 같다. 과거나 현재나 대공황이란 경제와 언어와 정동의 특별한 결합물이다. 경제 위기의 실질적 해결과 책임이 '폭력적 언어유희'에 전가되어 버린 결과 우리 사회는 경제를 잃고 대신 '적'과 '적대의 언어'만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를 '파괴적 언어유희'로부터 구출해야만 경제 불황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언어의 가치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경제 불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가는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언어라는 문, 그 탈출구를 점거할 시간이다. 문은 이미, 항상 거기에 있다.


불황의 책임을 묻고 언어의 가치 살펴야 

   "귀청이 터질 듯한 배경 소리에 잠겨 허우적대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난리법석, 그럼에도 그 위로 인간의 말은 떠오르지 않는 영화. 잿빛과 검은빛의 영화, 유성영화인데도 말이 없는 영화." 목청을 높여 적들을 물리칠 것을 외치고 마치 적을 마주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법석을 떠는 어떤 종편 채널의 소리를 뒤로 하며, 수용소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폭력적 언어로 가득 찬 세계에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가는 일이었다는 프리모 레비의 말을, 아무 소용없이 떠올려 본다. 겨울이 다가온다. 모두 무사하고 안녕하시길 마음 깊이, 그러나 역시 아무 소용없이 빌어 본다.

 

 

 

 

청년 이탈 100% 향해 진격하는 부산시

 

 

 

권명아

 

 

 

 

 

 

   2012년 부산시의회는 '부산 청년대학생 정책욕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 중 졸업 후 부산에 계속 거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학생은 51.2%에 불과하다. 또 이 조사에 따르면 부산 청년 대학생들이 부산에서 개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꼽은 것은 인적 자원 개발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노력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부산 지역 청년 대학생들에게 부산에서 자신들이 어떤 '인력'으로 성장할지 미래를 그려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재 양성 전망 등 '미래'를 달라는 청년들
 
   이는 청년들의 일자리에 대한 불만이 '일자리가 적다'는 식의 양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커 나갈 수 있는 미래적 전망을 가진 일자리가 없다는 불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조사에서 많은 학생이 월급 때문이 아니라, '미래' 때문에 서울과 수도권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청년들에게 부산에서의 자기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청년들이 부산시의 인력 정책에 대해 다양성, 비전, 변화 가능성, 진취성과 같이 사람을 '키우는' 미래적 전망을 요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청년들은 부산시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청년들이 부산에서는 주체적인 미래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서울이나 수도권과 비교해 부산에서 젊은 세대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다는 것은 굳이 통계가 없이도 실감할 수 있다.

   청년들이 자기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지역에 자립적 삶의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미래는 꿈꾸는 것이다. 즉 미래란 그저 물리적 시간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해 부산시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한 논의가 부산의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인구 통계학적 관점이 아니라 지역의 삶과 문화에 대한 성찰로 진전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부산 청년 창업 지원센터 추진이나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2013년 5월 22일) 제정은 이러한 정책적 관심이 확대된 결과이다.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의 경우 지역의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청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구하려는 정책적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상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 정책이기도 하다. 문화(culture)의 원뜻이 '키우다'(cultura·경작하다)라는 문화 이론의 원론을 새삼 거론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실질적 차원에 있다. 

   예를 들어 부산시 의정지원 자료인 '부산문화재단 비전, 핵심가치, 추진 방향 분석'(2012년)에서는 '인재들의 역외 유출'을 부산시가 처한 총체적 위기 상황의 핵심 요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이와 같은 총체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문화 분권'의 초석을 놓는 일이라고 논하고 있다.


미래 키우는 일,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문화 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부산의 자립적 삶의 기반과 문화주권을 정초하는 데 있다. 또 앞서 인용한 자료들은 부산시 자체에서 수립한 정책 자료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문제는 단지 문화계의 진영 문제나, '인물' 품평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을 이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기하지 못한 채 공전할 우려가 높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의 핵심은 부산시가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도시, 즉 자립과 주체적 삶이 가능한 지역을 만들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스스로 배반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의 문제점은 부산시가 그간 추진해 온 정책 기조를 스스로 부정해 버린 데 있다. 인사가 정책을 부정해 버린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청년 이탈 100%의 기록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예방과 검열, 사전 조치의 희극

 

 

 

 

권명아

 

 

 

 

 

 

   유효성에 대해서는 의학적인 논란도 있지만, 예방 접종은 질병 발생에 대비하는 유효한 사전 조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발생 가능한 질병에 대한 예방 조치가 때로는 과도한 건강 염려증과 감염 공포를 동반하기도 한다. 예방 조치란 개입의 시기와 발생 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판단과 분석 능력에 따라 그 효율성과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방 조치가 적절하게 취해지는가, 아니면 부적절하게 취해지는가는 그 사회의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을 나타내는 근본적 지표이다. 물론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이 있을 때에만 예방 조치라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이빙 벨'과 에볼라, 사전 조치 필요 영역은?
 
   사전 조치에 대한 판단 능력과 적절성이라는 차원에서 최근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은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는 ITU(국제전기통신연합) 전권회의와 관련하여 에볼라 감염 사전 조치 논란이며, 다른 하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예정작 '다이빙 벨'에 대한 상영불가 조치 논란이다.
 
   10월 20일부터 열리는 ITU 전권회의는 정보통신기술 정책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 세계 193개국에서 참가자들이 모이기에 여러 다양한 절차와 사전 조치들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특히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사전 조치를 부산의 시민 단체들이 요구하고 있다. 먼저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은 몇몇 보도나 성명에서 '에볼라 발병국' 참가에 대한 우려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문제적이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그저 '에볼라 발병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피폭국가'로 부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질병 감염에 대한 사전 예방 조치를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은 국제회의를 주관하는 국가와 지방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런데도 ITU 전권회의 주관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국제회의 참가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사전 조치를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수수방관하고 있던 부산시는 논란이 커지자, "미래창조과학부와 협력해 에볼라 바이러스 발병국에 참가자 수를 최소화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예방 조치가 부산 시민의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제임에도 이를 책임질 부산시의 대응은 참으로 느긋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 벨' 상영에 대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대응이 매우 기민하고, 집요하고, 적극적인 점을 전권회의에 대한 질병 예방조치와 비교해 볼 때, 이 대비는 더욱 흥미롭다. 국제영화제 참가작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상영불가 압력을 넣는 것은 부당한 검열이며, 사전 조치라는 의미에서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 사전 조치를 취할 질병 예방에는 무관심하고, 시민의 판단에 맡겨야 할 표현의 자유에는 적극적으로 사전 조치를 취하는 이 역설적 태도는 실상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부산시, 시민 기본권 지켜야 할 책임 안 지켜 

   2012년 제정된 '부산광역시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보면 부산시(3조)와 부산시장(4조)은 '시민의 인권 보장과 증진을 위하여 인권 보장 및 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임을 지닌다. 안전하게 살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본이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질병과 재난에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전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부산 시민들이 다양한 사상과 예술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이에 반하는 일들을 조사하고 예방하는 것 역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따라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사전 조치에 무관심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부산시의 행위는 부산시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할 자신의 최소한의 책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조례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부산 시민은 도대체 기본권을 지켜 달라고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전 조치의 적절성에 대한 부산시의 합리적 분석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합리적 판단 능력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第一回座談会概要

 

れの再構築逆装置アポリア

 

 

 


 

 

日時2015227

場所東京新宿 IRREGULAR RHYTHM ASYLUM

主催研究 aff-com(アプコム)文化/科

参加者 孔任順(コン インスン/座長)権明娥(クォン ミョンア/

パネラ 許允( ユン) 金萬錫(キム マンソク)古川高子(フルカワ タカコ)小田原琳オダワラリン 柳忠熙(リュ チュンヒ) 金泰植(キム テシク)宋連玉(ソン ヨノク)張秀熙 (ジャン スヒ)申賢娥(シン ヒョナ/)車嘉鍈(チャ カヨン/).

張秀熙 金萬錫.

座談整理車嘉鍈金萬錫.

aff-com 來人comer: 権明娥張秀熙金萬錫申賢娥車嘉鍈

参加者しい紹介にあります。

 

 


 

 

1/正規としてっている

女性マイノリティー学問分野国人研究者地方研究者

 

座談は「自己紹介」からまる。この自分紹介すること」は実上自分っている」についての発話であり、不安定いてきた「」についてのことでしかありえない。特任助教務補助専任研究員常勤研究員など、はしきりに「かれる」のやし細分化するが、これは実上研究者っているをよりめていくにぎない。こうしてまっていく一方/正規は、その内部においてびジェンダ専攻国籍出身により一層細密けられ線引きされる。おいがかれたえないほどかく線引きされていく状況で、おいが/正規によっていでた「」に共有することは、一方線引きをえてび「共通するもの」を手繰っていく過程であるともえるだろう。

 

 

 

 

1. /정규로 서 있는 자리들

: 여성, 소수 전공, 외국인 연구자, 지방 연구자

 

좌담은 자기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자기를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대한 토로이자, 불안정하게 움직여 온 이력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특임조교, 교무보조, 전임 연구원, 상근 연구원 등 대학은 자꾸만 처할 곳의 이름들을 늘리고 세분화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연구자들이 서 있을 자리를 더욱 좁혀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좁혀져만 가는 비/정규의 자리들은 그 내부에서 다시 젠더, 전공, 국적, 출신에 따라 더욱 세밀하게 나뉘고 구획된다. 서로가 처한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구획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서로가 비/정규의 자리들로 이어온 이력에 귀를 기울이고 공유하는 것은 한편으로 구획을 넘어 다시 공통적인 것을 더듬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2仲間関係労働者ネットワ

/可能非正規職関係性

 

学内において研究者たちが「共通するもの」を喪失していくということは、してうが、「関係」を構築できる可能性っていくということでもある。共通するものをもっているびとはし「仲間」とぶのであれば、非正規職に「仲間」が存在するのか、という質問結局彼()らが構築きる「」の可能性うことである。こうしたから日本非正規職講師労組は、各大学別問題として分離されやすい非正規職を「労働者」というで、地域問題としてねるとなった(古川)。しかし非正規職講師たちが労働者という団結するほど、()らを「教育者」でない「教育ビス労働者」へとしてしまおうとする圧迫えられる(権明娥) 。したがって非正規職講師学生とのの「関係」が回復される地点は、以前師弟関係回復することではなく、かえって講義時間においては平等学生労働者講師労働者としてっていることをして可能と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存在するしかしたちが「研究労働者」や「非正規職講師労働者」としてをつなぐには、()らの依然としてあまりにくのたわっている。学内において講義と、外部講義との、また、家庭教師ができる「学閥」ヒエラルキをもっている研究者と「マクドナルド」でアルバイトをしている研究者とのには、「非正規職労働者」というつに間隙存在する(許允)。またもう一方研究者仲間」についていえば、それもまた「大型プロジェクト」というシステムでは「研究者雇」と「研究者助教」、「非定年トラック教授」などとにバラバラに分離されてしまう。したがって非正規職労働者研究者講師といった数多くののうち、どこにも完全できない()らの関係はそれこそ可能でありながらも不可能となるもの、といえるだろう。

 

 

 

 

2. 동료 관계와 노동자 네트워크

: /가능한 비정규직의 관계성

 

대학 내에서 연구자들이 공통적인 것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일러 동료라 한다면, 비정규직에게 동료가 존재할 수 있냐는 질문은 결국 이들이 구축할 수 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비정규직 강사 노조는 각 대학 별 문제로 분리되기 쉬운 비정규직들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지역의 문제로 묶어주는 장소가 되었다.(후루카와) 그러나 비정규직 강사들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단결할수록, 이들을 교육자가 아닌 교육 서비스 노동자로 환수시켜버리려고 하는 압박이 강해진다.(권명아) 그렇다면 비정규직 강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지점은, 이전과 같은 사제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의시간 내에서는 평등한 학생 노동자와 강의 노동자로써 만나고 있음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 노동자비정규직 강사 노동자로 손을 잡기에는, 모두의 사이에 여전히 너무나 많은 벽들이 가로놓여있다. 대학 안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과 바깥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의 사이, 그리고 과외를 할 수 있는 학벌서열을 갖고 있는 연구자와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 사이에는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한다.(허윤) 하여 다른 한 편에서는 연구자 동료를 말해보지만 그 또한 대형 프로젝트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연구자 고용주연구자 조교’, ‘비정년트랙 연구교수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하여 비정규직, 노동자, 연구자, 강사 등 수많은 이름들 중 어디에도 채 소속되지 못한 이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가능하면서 다시 불가능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3研究マが/正規かつのか?

数化される専攻分野、あるいはグロバル時代実用主義

 

研究者たちが数多階級立場へと破片化され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研究をする」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だけは依然として「共通するもの」として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可能場合もある。しかし実情研究というのなかでも数多階層存在する。フェミニズム―ジェンダー研究人文学研究のなかでは依然として辺部存在し、「制度批判研究はそのめるいつつある。こうした状況で「研究」はかえって共通するものの基盤でなく、かせとなってしまうのがである(権明娥)。また一方で、これは人文学自体辺部的なものとなっていく現象つの断片はないかとわれもする。また人文が「グロバル人材養成」のための「英語教育機関」へと転落する事態人文学研究者たちはかえって「ナショナル」な城壁かれ、喪失していく(古川)

 

 

 

 

3. 연구 주제가 비/정규를 가른다?

:소수화 되는 전공분야, 혹은 글로벌 시대의 실용주의

 

연구자들이 수많은 계급과 입장으로 파편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만큼은 여전히 공통적인 것으로 남겨져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연구라는 장의 안에서도 수많은 계층이 존재한다. 페미니즘-젠더 연구가 인문학 연구의 장 내에서 여전히 주변부에 존재하고, ‘제도 비판의 연구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구는 오히려 공통적인 것의 기반이 아닌, 족쇄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권명아) 한 편으로 이는 인문학 자체가 주변부적인 것이 되어가는 현상의 한 단편이 아닐까가 질문되기도 한다. 또한 인문학이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영어교육기관으로 전락하는 사태 속에서, 인문학 연구자들은 오히려 더욱 내셔널한 장벽 안에 놓이고 연대를 상실해간다. (후루카와)

 


 

 

4.オルタナティヴかアウトソシングか?

人文空間のジレンマ

 

学内数多くの限界にぶつかるのは、その/可能性たな可能性の「発明」により専有しようとするをもみだす。いろいろな「オルタナティヴ」な人文学空間られつつあるのはその突破である。ここでは、その専有突破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という言葉解決していこうとった(孔任順)。その装置はな「オルタナティヴ人文学空間」だけではなく、授業料闘争といった「ストライキ」の瞬間しばらく顕現するものでもあった(権明娥)。しかしわれる実験がかえって「人文アウトソシング」の形態構築するのではないのかといういので「オルタナティヴ」という言葉はより政治性要求することになる(古川)。そこにはしいシステムの構築が「資格証認証機」の拡充もれてしまうことにならないかというれもまた存在している。したがってたちはこれをいかに個別の「」の問題ではない「装置が循環する生態系」として構成できるかをわなければならない(権明娥)

 

 

 

 

4. 대안인가 아웃소싱인가?

: 대학 바깥의 인문 공간의 딜레마

 

대학 내에서 수많은 한계를 마주하는 것은 그 불/가능성을 새로운 가능성의 발명으로 전유해보고자 하는 힘을 낳기도 한다. 여러 가지 대안적인 인문학 공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그 돌파의 증거들이다. 여기서는 그 전유와 돌파를 장치의 발명이라는 말로 풀어보고자 하였다.(공임순) 그 장치는 다양한 대안 인문학 공간뿐만이 아니라 등록금 투쟁과 같은 스트라이크의 순간에 잠시 현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권명아) 하지만 대학 바깥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실험들이 오히려 인문학 아웃소싱의 형태를 구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 앞에서 대안이라는 말은 보다 첨예한 정치성을 요구하게 된다.(후루카와) 거기에는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이 자격증 인증기관의 확장에 머물러버리게 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 또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개별적 기관의 문제가 아닌 장치들이 순환하는 생태계로 구성해낼 수 있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권명아)

 


 

5れと逆裝置的アポリア

 

制度として人文学崩壊にもかかわらず、会的には人文する欲求まるという奇異現象きている。これに大方否定的態度せているが、かえってそうした「大衆人文学講座ム」という自己啓/自己満足的欲望のなかで人文-装置の原動力てられるかを熟慮すべきではないだろうか。これは逆裝置的アポリアとぶことができるだろう。このように内部につつある人文では「ブム」をこしている現象理由めれば、のブラック企業化やこれ以上急進的理論えられない制度限界(許允)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しかしこれにし「しているのだから、まる場所をつくればいいじゃないか」とうことは、は「」という二分法的構す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れをもたせる。したがって「オルタナティヴ」という厳格かつ、その「」にるときにたちはまたなる生存可能性を「発明」することになる(権明娥)

 

 

 

5. 흐름과 힘: 역장치적 아포리아

 

 

제도로서 대학 인문학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인문학에 대한 소구력이 높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로 이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보내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대중인문학 강좌 붐이라는 자기계발/자기만족적 욕망 안에서 인문 장치의 원동력을 캐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만 하지 않을까. 이를 역장치적 아포리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윤인로) 이처럼 대학 내부에서 죽어가는 인문학이 대학 바깥에서는 을 일으키는 현상의 이유를 찾자면, 대학의 블랙기업화(공임순)나 더 이상 급진적인 이론을 가르칠 수 없는 제도의 한계(허윤)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를 두고 대학이 붕괴하고 있으니 대학 바깥에서 모일 장소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실상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다시 반복하게 할 우려를 낳는다. 하여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의 안과 밖을 엄중히 나누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생존의 가능성을 발명하게 된다.(권명아)

 

 


 

 

 

6発明原材料(materials)あるいは歴史

 

という二者択一より大事なことは、その「」で人文-装置を「発明(権明娥)することである。それは「創造」ではなく、にあるものから変容・専有し、リズムと言語再活性化することにいものだろう。もないものからせよと要求することは、まさにイデオロギー的反動政治原点へのている。そうしたから出現内在していたつのモデルは「発明」の重要資料として使用できる(萬錫)えれば、歴史してげてきたものをもかもてるものではない、発明のための元肥として活用することのみが、られなかったというイメジの幻滅からし、えられたものをなるものとして「発明」できる方式まれることであることはめてうまでもない。そこを経過しないとき、韓日関係において努力して「発明」してきた関係様相とへイトスピチにしてしまうだろう(萬錫)

 

 

 

 

6. 발명과 원재료(materials) 혹은 역사

 

대학의 안과 바깥 양자의 선택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에서 인문장치를 발명’(권명아)을 하는 일이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변용하고 전유하여 리듬과 언어를 재활성화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출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인 반동정치의 원점으로의 회귀와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학의 출현에 내재해 있던 두 가지 모델은 발명의 중요한 자료로 사유될 수 있다.(김만석) 달리 말해, 역사를 통해서 쌓아온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발명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하는 것만이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는 이미지의 환멸로부터 벗어나 이미 주어진 것을 달리 발명할 수 있는 방식이 생겨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통하지 않을 때, 한일관계에서 어렵게 발명해온 관계양상들을 증오와 헤이트스피치로 화하게 될 것(김만석)이다.

 


 

 

 

7過少悲喜劇

 

今日制度としての人文外部とのでの発明るまでには諸問題があるのだが、研究者生涯史的周期深刻問題となっている。非正規職講師たちはお見合いして結婚出ないという(金泰植)は、につまらないとしてす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女性研究者場合学歴するヘイトスピ(小田原)までわれているである。こうした不安定さはりなくらをしていかねばならないという自責と、にもかかわらずらの研究マが大衆要求合致しないことにより「淘汰」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萎縮した防御んでいる。こうした状況において研究者たちのはきわめて「」となるか、防御的に「過少」となる。それにえて学内での講座より予備校での授業のほうがしかったという日本学生たちの証言(宋連玉)示唆するところがめてきい。でなされる大規模人文学講座考察すべき部分らかにあるだろうし、学内での一定変化もまた熟慮するべき状況(宋連玉)ったことはらかなだとわれる。

 

 

 

 

7. 과잉과 과소의 희비극

 

오늘날 제도 인문학과 바깥 그 사이에서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연구자의 생애사적 주기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비정규직 강사들은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김태식)은 그저 싱거운 이야기로만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연구자의 경우에는 고학력에 대한 혐오발화(오다와라)까지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불안정함은 끝없이 자신을 계발해나가야한다는 자책과 그럼에도 자신의 연구 주제가 대중들의 욕구와 맞아 떨어지지 않으므로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위축된 방어를 낳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의 삶은 매우 과잉되거나 방어적으로 과소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대학 내에서의 강좌보다 입시학원에서의 수업이 더 즐거웠다는 일본 학생들의 증언(송연옥)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대학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인문학 강좌에서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 분명이 있을 것이고 대학 내에서의 일정한 변화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송연옥)에 도착한 것은 분명한 일로 여겨진다.

 

翻訳:田

번역: 타지마 테츠오


 

 

*参加者のプロフィル

 

孔任順(コンインスン/座長): 西江大學校、現代小説専門、著作関係は『スキャンダルと反共國家主義』、『植民地時代野談娛樂性とプロパガンダ』外

権明娥(クォンミョンア/司会): 東亜大学教授、ファシズム、ジェンダー政治専門、著作関係は『淫乱と革命』、『無限に政治的な寂しさ』、『歴史的ファシズム』

許允(ホ ユン): 梨花女子大学時間講師、現代韓国小説専門、著作関係は「1950年代の韓国小説の男性ジェンダー硏究」、「1970年代の女子敎養の発見と転化」、「朴正レジムのガバマンタリティ女子労動者の主体化 」

萬錫(キム マンソク/企画/aff-com 來人comer): 韓國海洋大學校 時間講師、韓國近代詩専門、 著作関係は『屋上の政治』外

古川高子(フルカワ タカコ):東京外国語大学特任助教、ロッパにハプスブルクストリア専門、 著作関係は新知識人よ、せよ

小田原琳オダワラ リン):講師イタリア近現代史、ジェンダー研究専門、日本世界抗的社運動がある

柳忠熙リュウ チュンヒ東京大東洋文化究所・特任研究員国学・比較文学・比較思想専門、著作関係近代東アジアの朝鮮知識人英語リテラシ19世紀末尹致昊英語中心に」漢詩文で〈再現〉された西洋―『海天秋帆』『海天春帆小集』『環璆唫艸』と理想開化期朝鮮活動と「通用規則」――「通用規則」(1898)の流通中心に」

金泰植(キム テシク):獨協大聖心女子大ほか非常勤講師会学専門、著作関係在日朝鮮人政治犯朴正におけるヘゲモニ危機

宋連玉ソン ヨノク):青山学院大学教授、朝鮮近現代史ジェンダー史日本近現代ジェンダー史専門、著作関係のフェミニズムを求めて朝鮮女性植民地主義

張秀熙(ジャン・ スヒ/企画/aff-com 來人comer/「風の研究者」の編集委員):東亜大学時間講師、韓国近・現代文学専門、特に文学に現れた日本軍慰安婦について勉強している。 著作関係は「戦争が重なる体」、「シングルが溢れる新世界」外

申賢娥(シン・ヒョナ/通訳/aff-com 來人comer/「風の研究者」の編集委員)東亜大学博士課程、 韓国近・現代文学専門、特に若者文化専門、著作関係は「世代論と年談論で見た文的文を書き物と主体性の」、消耗するるの‘地面/紙面」、「変態する恋と弾ける現実」

嘉鍈(チャ・ガヨン/記録/aff-com 來人comer):東亜大学修士課程、 韓国近・現代文学専門、特にクイア・セクシュアリティを勉強している。著作関係は「変形物質シリー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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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イノリティ化から流れ再構築へ

 

:座談「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を始めるにあたって[각주:1]

 

クォン ミョンア( 明娥)

 

♣♣

 

二○一五年五月現在、政府の大学構造調整により、全国的に入学定員(四年制大学)が一万七千五四○名ほど減らされる予定である。このうち非首都圏の大学がその八五.四%を占め、首都圏の大学は一四.六%しか割り当てられていない。釜山地域にある十五の四年制大学の二○一七年度の入学定員は二○一四年度より二.八五三名ほど減らされる予定である。減少する定員数は今年度の慶星大学校の入学定員(二千九二○名)に近い数である。[각주:2]いわゆる学齢人口の減少により大学の定員割れ事態に備えた大学の構造調整は地域の大学を犠牲にして進めれれてきた。結局大学の構造調整は根本的に地域差別と首都圏中心主義をいっそう加速するだけでなく、学閥主義と首都圏中心主義の密着関係をも深化させるのは明らかである。

国家機構により強制的に進められてきた大学の構造調整は、学閥ヒエラルキーと地域差別、また大学に投入された巨額の資本の利益を中心にして進められてきた。大学関係者たちは地域差別と学閥主義には沈黙しても、国家機構により強いられた構造調整に対しては「共通」した声を上げてはいる。しかし地域差別と学閥主義に沈黙する「共通」した声が、果たして共通のものとなりうるだろうか。構造調整への怒りと非難の声が強硬なのに、何か虚しさを感じさせるのは、こうした共通するものの欠如に起因している。しかし同時に大学の構造調整という事態は逆説的に大学あるいは大学制度のなかで実際にいかなる差別と還元不可能な差異が存在していたかをもろに目撃させることになった。そうなのだ。私たちは大学の構造調整という国家介入事態を通して国家の暴力性だけでなく、実は「私たち」のなかの差別と差異を目撃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国家の暴力性と新自由主義体制の問題を指摘する論議が虚しく聞こえるのはまさにこうした内部的問題を回避しているからでもある。

そしてこうした内部的差別と差異は地域と首都圏という問題だけに限られない。今回の座談においてあらわれたように、ジェンダー、移住性[각주:3]、専攻領域、制度としての学問の立ち位置の選択など、いっそう緻密な差異の線が大学と学問制度の内部を横断しつつ、差別/排除の線引きを行っている。もちろんジェンダー、地域、移住性と専攻領域などが全て差別の標識としてのみ働くのではない。また如何なる問題に対しても理論と知識が現実の全ての差異を扱うことはできない。そうした点から知識と理論は現実の細部を扱うのに限界をもっている。もちろん知識と理論は現実の細部にたどり着くための異なる方法をもっている。しかしその「ちがい」をしばしば忘却し、理論の全一的な力を誇示しかねないところが理論の陥穽でもある。知識の領域内において現場記述誌(ethnography)や座談会、インタビュー、フィールドワークといった現実の細部と差異を扱うための多様な方法論もまた模索されている。座談」という名称を掲げているが、この企画は知識の方法では扱いにくい、ある現実の細部と差異に出会おうとする試みである。したがって対象に対する客観的な分析と総合的な判断を中心とする作文とは多少異なる形式を試みてみたい。

大学の構造調整や学問の危機に対し誰もが激昂し声高に語るが、実際会って「ともに」交わす話がない。各自自らの問題があまりに手にあまり最も難しい問題であるため、会っても自らの境遇について「我が身への悲観的」な愚痴だけをこぼして別れることになる。こうした話を長いこと交わした後、家に帰り、せずもがなの話をしてしまったようで自嘲的で憂鬱な状態に落ち込んでしまう経験を誰もがもっているだろう。そのため努めて言葉を惜しんだり沈黙するしかなく、私たちは誰もが自らの位置と経験について、その生の現実性について言葉を交わすことができない。残るのは恥ずかしさや恥辱、そして幻滅だけである。私たちは大学制度と学問の場において自らが置かれている位置と経験について語るとき、こうした形式の談話の慣習と情緒とを空回りさせるしかない。そのため会って我が身を悲観する言葉を交わし、その言葉と立場と情緒の現実性を再度、常に確認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車座になって我が身を悲観し大学制度と学問の場での自らの身の処し方(身の置き所、あるいは subject positioning)を吐露しつつ、どうにかそこからある糸口が見出されるかもしれない。そしてこうした糸口をしかと握りしめ、私たちの幻滅と自嘲の流れを断ち切り、異なる流れへとともに流れ込んでいくだろう。

今回の座談においても論議されたように、この座談を大学の内と外という固定した境界ではなく、その間を流れる多様な流れと緻密な差異に出会い、探しに行く実験にしたいと思う。そうした実験を通して既存の大学制度を批判的に突破した大学の外の様々な実験を受け継ぎながらも、内と外の排他的な境界設定とはことなる方式で「オルターナティヴな制度」を構成することを目標にしたいと思う。

 

座談「人文-裝置(dispositif) を「発明」しようはそうした場になってほしい。すでに一度失敗し、二度目にしてどうにか言葉を汲み上げた。「座談」は生中継の形式よりは、一種の言葉に対する応答の形式を取りたいと思う。座談の場で行き交った言葉をおもむくまま取捨選択するという意味でなく、行き交った言葉をいくつかのテーマを中心に集め、整理し、その「意味」を抱きしめ考察する形式によりかき集める方式を採った。そのようにして以下のように七つほどのテーマにより言葉を手繰り寄せた。手繰り寄せたテーマは各座談の冒頭に要約し説明を提示する形で整理した。これといった見返りもない座談に参席してくださった全ての方に感謝をささげる。

座談の具体的内容は『文化/科学』八二号(二○一五年五月)を参照。  

 

翻訳:田




 

 

소수화에서 흐름의 재구축으로

 

: ‘인문 장치를 발명하자좌담 연재를 시작하며[각주:4]

 

 

 

권명아(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20155월 현재 정부의 대학 구조조정으로 전국적으로 대입 정원(4년제 대학)17540명이 줄어들 예정이다. 이중 비수도권 대학이 85.4%를 차지하고 수도권 대학은 14.6%만 할당되었다. 부산 지역 154년제 대학의 2017학년도 총 입학 정원은 2014학년보다 2853명 줄어들 예정이다. 감소하는 정원 규모는 올해 경성대의 입학정원(2920)과 비슷한 수준이다. [각주:5]이른바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정원 미달 사태에 대비한 대학 구조조정은 지역대학을 희생양 삼아 진행되었다. 결국, 대학 구조조정은 근본적으로 지역 차별과 수도권 중심주의를 더욱 가속할 뿐만 아니라, 학벌주의와 수도권 중심주의의 밀착 관계 역시 심화시킬 것이 뻔하다.

 

  국가 기구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된 대학 구조조정은 학벌 위계와 지역 차별, 그리고 대학에 투여된 거대 자본의 이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대학 관계자들은 지역 차별과 학벌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더라도 국가 기구에 의해 강제된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공통의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지역차별과 학벌주의에 침묵하는 공통의목소리가 과연 공통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구조조정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가 격렬함에도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동시에 대학구조 조정이라는 사태는 역설적으로 대학, 혹은 학문 제도 안에서 실제 어떤 차별과 환원 불가능한 차이들이 존재했는지를 노골적으로 대면하게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대학구조 조정이라는 국가 개입의 사태를 통해 국가의 폭력성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안의 차별과 차이들을 대면해야만 한다. 국가의 폭력성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논의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부적 문제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적 차별과 차이들은 단지 지역과 수도권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번 좌담에서도 나타나듯이 젠더, 이주성[각주:6], 전공 영역, 제도 학문에 대한 입장 취함 등 더 조밀한 차이의 선들이 대학과 학문 제도 내부를 가로지르며 차별/배제의 선을 구획한다. 물론 젠더, 지역, 이주성과 전공 영역 등이 모두 차별의 표지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이론과 지식이 현실의 모든 차이를 다룰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지식과 이론은 현실의 세부를 다루는 데에 한계를 지닌다. 물론 지식과 이론은 현실의 세부에 다다르기 위한 다른 방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을 종종 망각하고 이론의 전일적 힘을 자만하기 쉬운 것이 이론의 함정이기도 하다. 지식의 영역 내에서 현장기술지나 좌담, 인터뷰, 필드워크 등 현실의 세부와 차이를 다루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 또한 모색되어 왔다. 좌담이라는 명칭을 걸고 있지만, 이 기획은 지식의 방법이 다루기 어려운 어떤 현실의 세부와 차이들을 만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하여 대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종합적 판단을 중심으로 하는 글쓰기와는 다소 다른 형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대학 구조조정이나 학문의 위기에 대해 다들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만나서 함께나눌 말이 없다. 각자 자신의 문제가 너무나 힘겹고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에 만나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변 비관형의 푸념만 늘어놓고 돌아가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나눈 후, 집으로 돌아가 괜한 말을 늘어놓은 것 같아 자조적이고 우울한 상태에 빠진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애써 말을 삼키거나, 침묵할 뿐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위치와 경험에 대해, 그 삶의 현실성에 대해 말을 나누지 못한다. 남는 것은 부끄러움이나 치욕, 그리고 환멸뿐이다. 우리는 대학제도와 학문장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와 경험에 대해 말을 할 때 이런 형식의 담화 관습과 정서를 맴돌게 될 뿐이다. 그래서 만나서 신변을 비관하는 말들을 나누면서, 그 말들과 입장과 정서의 현실성을 다시, 매번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둘러앉아 신변을 비관하고 대학 제도와 학문장에서의 자신의 처신(몸 둘 바 혹은 subject positioning)을 토로하면서 간신히, 거기서 어떤 실마리를 찾아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실마리를 부여잡고 우리는 환멸과 자조의 흐름을 끊고, 다른 흐름으로 서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좌담에서도 논의된 것처럼 이 좌담은 대학의 안과 밖이라는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 그 사이를 흐르는 다양한 흐름들과 조밀한 차이들을 만나고 찾아나가는 실험이 되고자 한다. 그런 실험을 통해서 기존의 대학 제도를 비판적으로 돌파한 대학 바깥의 여러 실험들을 이어가면서도, 안과 바깥의 배타적 경계 설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안적 제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자 한다.

 

 

  ‘인문 장치를 발명하자는 그런 자리가 되고 싶다. 이미 한번은 실패했고, 두 번째에 겨우 말을 건져내었다.좌담은 생중계의 형식보다는 일종의 말들에 대한 응답의 형식을 취하려고 한다. 좌담 자리에서의 오고 간 말들을 마음대로 취사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고 간 말들을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모으고 정리하여, 의미를 보듬고 살피는 형식으로 그러모으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게 해서 7개 정도의 주제로 말을 보듬었다. 보듬은 주제는 각 좌담의 앞부분에 요약하고 설명을 제시하는 식으로 정리하였다. 별다른 보상도 없는 좌담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좌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문화/과학』82호, 2015년 여름호를 참조.


번역: 타지마 테츠오 

 



  1. 1. 異なる生に対する至難な様々な実験が失敗した場から、その失敗と限界から更に歩き出すこと、それを私は『限界から踏み出すこと』であると論じている。拙稿「落ち着く:安心のアソシエーションのために」(『石堂論叢』59号、2014年)を参照。 [본문으로]
  2. 2.「大学構造調整一年、釜山から「四年制大学一校」(入学定員二千八百五三名)が消える」『釜山日報』二○一五年五月二○日. [본문으로]
  3. 3. 移住性は留学したり、または地域を移住し移動しつつ触発される人種的マイノリティー性との関連が深い。しかし、国家間の境界移動だけでなく、学制内での移動、すなわち専攻の変更や、古典的な学制からの離脱から生じる状態、時には国家内での地域移動から生じる移住性などもここに含まれる。多様な研究者グループとの出会いを通して、こうした移住性の様々な姿を実際に確認できるだろう。 [본문으로]
  4. 1. 다른 삶에 대한 지난한 여러가지 실험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 실패와 한게로부터 다시 걸어나가는 것, 그것을 나는 <한계를 딛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졸고 <마음을 놓다: 안심의 어소시에이션을 위하여>(석당논총59호, 2014년) 참조. [본문으로]
  5. 2. 「대학 구조조정 1년, 부산에서 ‘4년제 대학 1곳’(입학 정원 2천 853명) 사라졌다」, 『부산일보』, 2015. 5. 20. [본문으로]
  6. 3. 이주성이라는 규정은 유학을 가거나 또는 지역을 이주하거나 이동하면서 촉발되는 인종적 소수화 상태를 기본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국가 간 경계 이동뿐 아니라, 학제 내의 이동, 즉 전공의 변화나 고전적 학제로부터의 이탈에서 비롯되는 상태, 때로는 국가 내부에서의 지역 이동에서 비롯되는 이중성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양한 연구자 그룹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실 이러한 이주성의 여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가자 일본으로!!

 

신콩떡

1. 국경클럽 소개

 

[국경 안의 불만]은 말 그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활동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모임입니다. 석당학술원에서 연구하고 있는 지역연구자 선생님들 중에서 몇 분이 모여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세계화니 무어니 외친지도 하 십 수년이 되어가는 이 마당에 일본에 가는 걸루다가 이리 계획과 취지를 소상히 밝히고자함은 어찌된 일인가하면. 그 하 십 수년 동안 국경을 넘나드는 네트워크를 갖춘 것은 거의 서울의 대학 및 연구소에 한정되어 있었던지라, 지역에서는 연구로 국경 바깥과 교류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 실정이었도다. 아아 통재라. 그러나 지역연구자에게도 발이 있고 논문이 있는데 나가지 못할 것은 또 무어냐. 그리하여 그 시작을 닦아보자 하는 것이 이 기획입니다. 즉 지역연구자들이 국경 너머로 활동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통로를 개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기획은 일회성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선례와 통로를 만들어 다음 해, 그 다음 해에도 더 많은 지역의 연구자들이 품에 꿈과 논문을 안고 국경 바깥으로 넘나들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직접 접촉코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정보를 얻고 다른 루트를 계속 파낼 수 있도록 준비 과정과 교류 내용 및 접선 방법 등을 오픈하고 일본의 단체와 연구자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다들 자미있게 읽으시고 "어머 나도 내년엔 여기에 참가해봐야겠어!" 라고 마음먹으시거나 "어머 내가 직접 컨택해봐도 되겠어!" 라고 결의하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지 말입니다.

 

2. 우리의 일정

 

2/ 19~ 21

 

부산에서 오사카로 출발! 그리고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권 캠프에 참석합니다.

캠프의 큰 주제는 동아시아 냉전 구조 하의 국가폭력, 그리고 민중의 저항입니다. 참가한 학생들은 다른 지역, 다른 시각 속에서 일어난 각 지역의 사건들을 공부하고 체험하는 도중에 이들 사건들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일관된 힘과 권력의 작동방식에 의해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라네요 ''

(이 캠프의 참가자는 자유롭게 지원을 받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동아대학교 자유게시판 참조)

 

 

2/ 21

 

첫 번째 발표 장소인 리츠메이칸 대학으로 이동합니다!

리츠메이칸 대학에는 코리아연구센터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동북아시아 공동체라는 지형 안에서의 한국의 위치와 일본과의 관계 등 현대 한국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의 카츠무라 마코토 선생님과 서승 선생님은 전에 동아대학교에 오셔서 발표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카츠무라 선생님 논문: 일본 사회운동사에서의 월경(越境)과 정념-나카니시 이노스케를 중심으로

서승 선생님들이 발표하셨던 논문 제목은.. 지금 집이라서 학교에 가면 찾아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

코리아연구센터 홈페이지: http://www.ricks2005.com/index.html

 

그리고 리츠메이칸에는 '세미나 하우스'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곳에선 세미나실, 숙박시설, 등등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숙박시설은 23일 한정이긴 하지만 하루에 600엔이라는 무지무지 싼 가격이니 리츠에 교류하러 방문하시는 분들은 꼭 알아보시면 좋습니다~

 

 

2/ 22

 

리츠메이칸에서의 대망의 첫 발표 날입니다.

색연필님, 종업원님, 기타등등걸님, 78번 버스님이 발표하실 예정이시구요,

각각 게토와 네트워크/ 중앙과 지역문학의 역학/ 부산지역 인문공동체/ 지역의 미술 공동체의 지도그리기

(주제는 내맘대로 요약) 이라는 주제들로 발표하실 예정이십니다.

각자 어떤 문제의식에서 어떻게 연구 방향을 잡아나가는가를 곧 여기에 올려주신다고 하시네요.

 

 

2/ 23

 

도쿄로 신칸센을 타고 이동!

신칸센 요금 계산 사이트

http://www.jreast.co.jp/e/charge/index.asp

 

2/ 24

 

도쿄 근처의 요코하마에 있는 <뱅크 아트>에서의 두번째 발표입니다.

 

<뱅크 아트>는 요코하마의 역사적 건축을 개조하여 문화 창조의 공간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의 일환입니다. 이름이 뱅크 아트인 것은 은행 건물+ 예술의 장소이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일본 최대의 대안 미술 공간이기도 하지요.

 

뱅크 아트에는 회화나 조각같은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인 설치물들부터 시작해서 요리까지(!) 모든 것을 재미있게 전시하고 나누고 체험하게 함으로써 생활의 감각을 새로이 나누게 만들기도 합니다.

 

뱅크 아트 홈페이지: http://www.bankart1929.com

뱅크 아트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곳: http://blog.naver.com/ohmiky5/57457082

 

 

2/ 25

 

무사시노 대학의 와타나베 나오키 선생님이 함께 하는 인문평론 연구회와 만납니다. 인문평론 연구회는 와타나베 선생님을 중심으로 2006년 봄부터 현재까지 도쿄의 무사시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해왔는데요, 이 연구의 성과를 <전쟁하는 신민, 식민지의 국민문화>라는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습니다. (논문집이니 riss를 털면 대부분의 논문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식민지 말의 문학 및 사상의 전체상을 조망한 글과 제국문화의 위계 및 소수자문학의 네트워크를 논한 글, 그리고 국민문학의 기치 아래 창작된 실제적 창작물들과 그것이 유통되는 방식에 대해 논한 글들 다양한 연구시도를 담아냈다고 하네요.

 

와타나베 선생님의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농민문학과 '만주'- '협화'의 서사와 '재발명된 농본주의'><한국문학연구>, 2007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인문평론 연구회>의 선생님들의 세미나에 참관할건데요, 일본에서 조선문학을 공부하는 일본인 선생님들, 유학생들, 연구원이나 연구생들이 오신다고 하네요. <신시대>라는 잡지를 읽는 중이라고 하시는군요.

 

 

2/ 26

 

오전에는 니가타대학의 하타노 선생님과 도쿄의 구석 구석 식민지 시기 유학생들의 자취를 따라 돌아다니는 문학산책을 할 예정이구요,

오후에는 도쿄외대의 WINC에 합류합니다. WINC는 이와사키 미노루 선생님이 주관하시는 곳인데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새로 나온 좋은 연구서 등에 대한 서평회를 갖고 저자를 초청도 하는 좋은 연구회입니다.

 

 

2/ 27

 

니혼대학의 심포지움에 참석합니다. 심포지움 주제는 찾아보고 알려드려야 할 것 같은듸..

니혼대학의 주최자는 고영란선생님이십니다. <자본의 순환과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역학관계-한국 근대문학의 트랜스내셔널리티(transnationality) ; 제국 일본의 출판시장 재편과 미디어 이벤트 -"장혁주(張赫宙)"를 통해 본 1930년 전후의 개조사(改造社)의 전략->이라는 논문이 사이에서 2009년에 발표되었으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28

다시 부산으로~!

 

일정은 이렇게 되구요, 정확히 어느 날 가는지 까먹었는데 일본의 재일 커뮤니티에도 가볼 예정입니다. 이번 일본행에서는 대안 예술 공간, 한국학, 식민지기의 제국과 조선, 조선인 유학생, 재일이라는 경계의 모습 등등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눈이 아파서 여기까지..

[출처][국경 안의 불만] 가자 일본으로!! (웹진; 아지트)|작성자신콩떡

http://cafe.naver.com/agitproject/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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