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시랑리 - 등 뒤에 타오르는 빛 

 

 

 

金 飛

 

 

 

 

 

 

 

 

 

   비가 갠 하늘은 시리고 서늘했다. 그토록 짙은 파랑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듯한데, 내겐 모든 또렷한 것들이 그저 나를 겨냥한 것만 같았다.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은 물러서라, 처연하고 우울한 것들에 사로잡힌 생각들은 집어치우라. 무작정 웃어라, 열광하라. 저 하늘의 순리마저 지상의 생명들에게 청청한 축제를 명하노니, 우리들의 책무는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향유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몸서리치도록 투명한 풍경 앞에 말을 잃는다.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경탄하는 그들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모든 것들을 등지고 돌아서니, 또 다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위기의 순간마다 모성을 부르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습성인지, 나는 또 다시 그렇게 나도 모르게 바다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바다를 만나기 위해, 나는 부산의 제일 끄트머리인 기장으로 향했다. 기장은 1914년에는 동래에, 1973년에는 양산에, 그리고 다시 기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지금의 기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위쪽으로는 울산에, 서쪽으로는 양산에, 그리고 남쪽으로는 금정구에 맞닿아있는 기장군은, 갑화양곡(甲火良谷)이라 하여 원래 이름도 변두리마을, 혹은 큰 마을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 기장읍의 시랑리로 향한 것은 온전히 축축하게 젖어만 있던 나를 (‘사랑이라는 말과도 닮은) ‘시랑으로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알량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양산에서 버스를 타고 보니, 내가 가야할 길은 부산 해운대를 거쳐 다시 기장군 쪽으로 올라가는 노선이었다. 기장군은 양산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니 그저 동쪽으로 가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될 듯했지만, 그렇게 갈 수 있는 버스 노선은 있지도 않을 뿐더러 있더라도 시간을 맞추어 일일이 갈아타며 갈 수도 없었다. 자동차를 몰고 갔다면 50여분 남짓 될 거리를, 하는 수 없이 나는 두 시간 반 넘게 걸려 양산에서 부산 해운대 쪽으로 갔다가 다시 해운대에서 송정을 지나 기장 쪽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가 닿을 수 없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가 닿는 거리와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리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그렇게 크고 넓기만 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다 보니, 시랑리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하늘에 저녁 기운이 무럭무럭 번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덕분에 마을의 정경은 더욱 조용하고 고즈넉하기만 했다. 엄마의 품에 안기듯 나는 마을 한 복판에 뛰어들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감들은 저녁 빛 때문에 더욱 붉었고 어느 집 마당에 높이 솟은 솟대는 당당하게 바다 쪽을 넘겨보고 있었다. 뒷짐을 진 어르신이 골목을 거슬러 올라갔고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그저 까딱 .’하고 그녀가 대답했던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마음은 훨씬 더 가벼워졌다. 이미 겨울 바람으로 돌변해버린 저녁의 기운은 쌀쌀했는데, 내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바다 쪽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경쾌했다.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한 조용한 집들을 사진 속에 담으며,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인적이 사라지고 없어도 괜찮은 정경을 기억하며, 나는 시간 속에 버려진 나를 쓰다듬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바다는 방파제로 가로막혔고 여기저기 작은 어선들이 몸을 기댄 채 쉬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내어준 바다의 몸짓임을 알 것만 같았다. 바닷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노인분들을 다시 만났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청했다가 손사래를 받았지만 그래도 나는 속상하지는 않았다. 정중히 그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와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저만치 포구 끄트머리에 할머님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어스름 저녁 빛에 물들어가는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고즈넉이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는, 그녀의 머리 위에 날고 있는 새는, 매일 밤 그녀를 비추었던 가로등의 큰 키마저도, 어쩐지 오늘은 달라보였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녀에게서 물러나, 나는 계속해서 방파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어부들이 어지럽게 엉킨 것들을 육지로 끌어 올리고 있었고, 나는 그 건너편 동해 상회라는 이름의 작은 건물에 눈을 빼앗겼다. 그저 남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동해라니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아 엉성하게 웃고 말았는데, 셔터를 누르고 나니 여기가 남쪽이면서 동시에 동쪽이었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스쳐갔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쪽으로 돌아서 나 혼자만 더욱 넓은 세상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한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틀린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고, 여기는 남쪽이면서 또한 동쪽이며 어딘가의 북쪽이면서 또한 서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궁지에 몰려있다고만 생각했던 내 등 뒤를 허물어내는 고마운 몰락이었다.

 

 

 

 

 

 

 

 

   방파제 위를 걸으니 그 좁은 길이 더욱 좁고 또한 멀게만 느껴졌다. 아니다. 어쩌면, 한 발 더 내가 걷는 그 길은 넓어졌고 또한 내 걸음으로 방파제는 당연히 가까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축축하다고만 생각했던 내 기억은 생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였고, 그늘 속에 있다고 믿었던 여기는 그저 저녁 빛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늘이 밤이 되고 밤이 다시 새벽이 되어 또 다시 그늘이 드리우더라도, 여기 이곳의 아침은 조용히 세상의 하루를 기록할 것이다.

 

   슬프지만 울지 않은 채로, 나는 그렇게 바다 앞에 섰다. 주저앉고야 말았지만 쓰러지지 않은 채로, 나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괜찮겠구나, 여기 이렇게 무기력하고 비겁한 삶을 살게 되더라도, 비통하게 오열하고 몸부림칠 수 없더라도, 나의 그늘은 또 그렇게 하루의 싹을 잉태하고 있겠구나.

 

   가장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부여받았지만, 처음으로 나는 내 앞의 시간에게 두 손을 벌렸다.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은 채로, 혹은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나는 다시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기꺼이 몸을 열어 그 혹독한 시간에 나를 내맡기면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시간을 내 스스로 품어 안으며.

 

   고개를 돌려보니, 잔뜩 웅크린 내 등 뒤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날개를 단 영혼들이 마음껏 하늘을 날았고, 시커멓게 밤의 기운으로 뒤덮인 어둠 속에서 황금색 저녁이 불을 뿜으며 폭발하고 있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