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두근거리는 마음

 

엄준석

 

 

 

아프꼼을 생각하면 두근거린다. 혹 빼먹은 일은 없을까? 보고할 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오늘 찍은 사진 페이스북에 올려도 될까? 아프꼼 홈페이지에는 어떤 글을 실을 수 있을까(필자는 아프꼼에서 홈페이지, 페이스북 운영을 맡고 있다)? 다른 대안적 공동체 관련 홍보물을 봤을 때도 아프꼼 생각이 난다. 그리곤 또한 두근거리는데, 아프꼼에 관한 고민하거나 그의 새로운 모습을 홀로 상상하며 흥분하곤 하는 것이다. 그 고민과 상상을 구체화한 경우도 있으나(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티져 영상과 같은) 마음속에 간직한 경우도 많다. 규모가 컸던 두 실험-시위인 환을 켜다배수아와 새벽의 극장이 끝난 후 조금의 여유가 허락돼 그를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쉽지는 않은 것 같다(이 두 행사를 시위라고 칭한 것은 권명아 선생님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아프꼼을 대단히 많이 고민하는 사람인 것 같다. 부끄럽다. 아프꼼의 일원이 된 지 4개월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기획도, 발전적인 뭔가도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니, 4개월밖에 안 지났는데도 큰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다른 식구(왠지 이렇게 부르고 싶다)에 비해 맡은 실무도 턱없이 적은데도 말이다. 그러나 아프꼼의 일원 즉 래인커머가 된 이후 일상적으로나 상시적으로나 아프꼼을 많이 고민하고 상상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나아가 항상 그에 대해 긴장하고 흥분하고 욕망하고 있음 또한 말이다. 물론, 그러한 운동은 나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프꼼 또는 대안인문학운동은 나에게 과제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미래의 아프꼼을 생각하고, 지금 아프꼼의 일-글은 향후 어떤 식으로 확장/축소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 아프꼼을 비롯한 여러 대안인문학운동의 성과와 의의를 밝히는 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대안적 형태의 공동체에 대해 궁금해 있기도 하다. 아울러 아프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프꼼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지를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래도 아프꼼의 의의와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과제로 주어지고 또 의뭉스러운 무엇으로 설정된 것 같다. 아프꼼이 생산했던 글을 읽어보며 대략적인 틀을 잡아가곤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더 깊게 엮이고, 더 부딪혀보아야 그 과제를 해소할 수 있는 어딘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몇몇의 사건에 연루되었던 탓에 아프꼼에 대한 대략적인 상은 잡을 수 있었다. 그 상들이 내 속에서 패치워크(김명주의 글 참고)’되면서 아프꼼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첫 번째 사건은 201212월 한나 아렌트에 관한 세미나를 열었을 때였다. 아프꼼 식구를 처음 만났었고 아프꼼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당시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관해 알고 싶어 찾아갔지만, 그보다는 아렌트의 논의를 빌어 아프꼼 또는 공동체를 꾸려가는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었다. 당시 권명아 선생님과 신현아 선생님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이후 조심스러우면서도 당당하게, 슬프면서도 기쁘게 아프꼼-공동체에 관해 얘기해줬다. 순간 그 고민과 갈등, 문제의식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사는 부산의 어딘가에서 진지하고 묵묵한 걸음을 하고 있는 사람-집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약 반년이 지난 후 그 걸음을 함께 해보자고 했을 때 두려우면서도 숙연해졌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헌데, 막상 아프꼼에 들어왔을 땐 흥겨움과 경쾌함을 느꼈다. 오자마자 환을 켜다에 참여했다. 행사의 바탕에는 지역문화와 인문학의 현재를 사유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중앙동 40계단과 그 주변 공간과의 새로운만남 즉 그 공간을 새롭게 걷고 만지고 꾸미고 있었다. 직접 찍고 만들고 쓴 시와 사진, 미술 작품 등을 중앙동 일대에 펼쳐놓고 다른 이들과 걸으면서 그를 감상하고 설명하는, 능동적인 행사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중앙동 일대는 기왕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함께 그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서사, 이미지를 곁들일 수 있었다. 아울러 중앙동의 현재와 부산 또는 한국사회 내에서 인문학의 현재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꼭지도 있어 무형적비자본적 가치를 지닌 무엇이 사라지고 외면당하는 현실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를 그저 비극이라 명명하지 않고 새로운 저항의 시발점으로 여기는 지점을 만들어가며 말이다(‘환을 켜다의 마지막 소라계단 환등장면 참고). 그렇다고 이 행사가 모든 점에서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더 많은, 다른 참가자와 이 흠겨움, 경쾌함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 중앙동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는 계기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4시간여의 이 기이한 놀이 속에서 벗어나는 자가 거의 없었으며, 기실 낯섦과 부끄러움 탓이었겠지만 웃음과 미소도 지속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새로운 놀잇거리, 새로운 놀이의 장소를 발견한 즐거움이 순간적으로나마 표출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아프꼼의 무거우면서도 명랑한 시위에 참여하면서 또한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은 자연스레 두근거림으로 번져갔다.

당시 행사를 촬영했었는데 그를 편집제작하여 다른 이에게 이 기이한 놀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당황스러움이 두근거림으로 이행된 이유였던 것 같다. 촬영편집한 텍스트를 보여주며 그의 신산함과 운동성, 그리고 정치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데에 흥분했던 것. 부산에서 인문학을 하거나 그 주변을 오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새로운 일이 전개되고 있음을, 좀 더 명랑한 방식으로 저항-시위는 전개될 수 있음을 소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흥분했었던 것 같다(‘환을 켜다다큐멘터리는 이후 재편집을 하여 부산의 몇몇 영화제에서 상영을 시도해볼 예정이다). 그 흥분은 일찍부터 행사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수아와 새벽에 극장에 이르러 더 켜져 갔다. 물론 행사 일에 맞춰 환을 켜다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했던 것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5년 만에 다뤄보는 편집 프로그램이었기에 힘겨웠고, 또 아프꼼에서의 첫 생산물이기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시간 또는 선택(편집과 사진 보정은 다양한 이미지 중에서의 선택/포기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과 부단히 싸워야 했던 문제는 있었지만, 새로운 만남 덕택에 새로운 나를 발굴해낼 수 있는 기쁨의 두근거림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생각은 했었던 것이지만 색다른 프로필 사진을 찍어보는 것(사진역사의 영역 내에서 내 프로필 사진은 그리 색다른것은 적어도 나의 능력치, 상황 내에서는 색다른 것이었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최대한 그에 가깝게 구현해보는 것 등 다양한 개인적 실험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나아가 이는 내 생각과 신체를 통해 아프꼼의 모습을 꾸려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 내 생각과 신체는 아프꼼의 토대 위에서 생성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프꼼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더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울러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매체적)놀이를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이 지점에서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이런 발견이 아프꼼과의 관계 안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나만의 발견,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식구와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언젠가 꼭 아프꼼 식구와 함께, 아프꼼의 이름으로, 또 다른 아프꼼의 이미지를 생산하고자 한다). 이미지 생산에 참여하며 더 분명한 두근거렸던 것은 지난 12월 중순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더 정확하게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대안인문학운동을 만나고 그와 접속했을 때였다. 권명아 선생님은 이행과 자기해방의 결속체들: 대안인문학운동의 곤경과 실험들이란 글에서 대안인문학운동에 대한 평가와 진단의 어려움 또는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 어려움, 불가능성은 각각의 대안인문학운동의 상황과 그에 따른 결속과 애씀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라 했다. 각각의 운동이 지닌 상황과 정황을 온전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 이상 평가와 진단은 불가능하거나, 외려 거부해야 할 상황이기도 한 것이란 것이다. 헌데,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평가와 진단의 문제 이전에 대안인문학운동의 성과, 지속의 문제라는 것이 쉬이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대안인문학운동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거부극복하고자 하는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지 못하면 근원적으로 실험적저항적인 순간에 그치고 이내 사라질 운명 또는 사라지기 일쑤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사라지더라고 그 순간을 정초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이 같은 판단은 대안인문학운동에 대한 심원한 사유를 전개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성과와 지속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항상 곤경에 도달하는 대안인문학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내 판단은 오사카에서 아망또, KEY, 코코룸과 같은 대안인문학운동과 마주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8여 년 동안 지속한 아프꼼은 그러한 국내외의 다양한 여러 대안인문학운동과 결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 속에서 아프꼼과 같은 대안인문학운동이 특정 국가와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확장적인 연대를 실현하고 있음을 보았다.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해외의 대안인문학운동을 직접 경험한 것도 놀랐지만, 그 운동이 다양한 국가, 사람과 어울리고 있음을 확인한 것도 놀랐다. 그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망또에서는 우리의 빼빼로과자와 같은 포키과자를 들고 그 대안적 공간-까페를 찾아온 작은 소녀를 만날 수 있었고, 쓰다 남은 전기난로를 가슴에 이고 찾아온 할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KEY에서는 (/)조선, 한국, 일본 어디에도 쉬이 속할 수 없어 다양한 국가적정치적문화적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나이 또래가 비슷해서 인지 왠지 동포 또는 친구라 부르고 싶기도 하다)과 얘기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그들을 보며 단지 고통만이 깃들어있는 것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그들을 대면할 수도 있었다. 오사카의 넓고 낮은 동네 가마가사키에 있는 코코룸에서는 건설 붐이 끝난 이후 남겨진 노동자를 내치지 않고 외려 그를 존중하고 그의 삶의 생기를 복원해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 모습은 영화적이었는데(필자의 전공은 영화학이다) 코코룸의 주인이자 그 동네를 소개해주는 카나요상이 지나갈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할아버지를 많이 만났다. 할아버지들은 기쁜 얼굴로 카나요상과 인사했다. 아울러 그 동네 속에 홈리스 노인분들을 위해 마련된 표현 프로그램(요리, 미술, 운동 등으로 이루어진)’과 각종 보호시설(의료와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한 잘 꾸려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제도적으로 잘 구축된 것만이 아닌 그의 역사와 심정을 잘 이해한 형태로, 최대한 안온하게 꾸려져 있음을 보았다.

이와 함께 특히 마음이 두근거렸을 때는 아망또, KEY, 코코룸에게 직접 말을 건넸을 때였다. 더 정확하게는 질문을 던졌을 때였는데 그때마다 마음속 한구석이 일렁였다. 적절한 질문일까 하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나의 선배, 스승, 동료에게 질문을 던지는, 연대를 요청하는 신호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에 흥분했던 것 같다. 아망또에게는 그 공간에서 영화를 활용하는 방식을 물었고, KEY에서는 반쪽바리같은 혐오발화를 아무렇지 않게 남발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 코코룸에서는 세대론의 문제를 질문했다. 부족한 질문에도 모두 성실하게 답변해 주신 것이 기억난다. 답변 속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제,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이 일본사회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질문이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익숙한 것, 달리말해 우리는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그에 대응하는 해결책을 또한 다르면서도 같은 형태로 내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미로웠고 또한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나와 같은 고민, 곤경을 겪으면서도 그를 성숙한 방식으로 이겨내 가고 있는 이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랄까. 권명아 선생님의 지적대로 다양한 대안인문학 운동단체들이 함께-있음의 온도 차이를 서로 감지하고 인지하면서 그들 간의 애씀의 인터페이스와 같은 새로운 어소시에이션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하는 과정의 영역 바깥에서 경험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4개월 남짓 동안 실은 많은 경험을 했었던 것 같다. 당장 나에게 남아있는 흔적만 더듬어 봐도 중앙동 40계단을 더 즐겨 찾아가게 됐으며 배수아의 그 난해한 언어가 외려 난해한 존재를 더 수월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 세계는 자본에 의해서만 확장성을 갖는 것이 아닌 그에 버금가는 다양한 저항적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 권명아 선생님은 대안인문학운동 각각이 지닌 애씀과 온도차이 때문에 그에 대한 판단과 성과를 가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였지만 적어도 그 이후, 즉 운동 이후를 적극 상상, 사유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프꼼이 누군가의 내면에 남긴 흔적이, 나에게서처럼 적지만은 않을까란 사실. 각각의 해석은 다르겠지만, 그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누군가에게든 남아있다는 것. 8여 년 동안의 그 운동은 당장 가시화하지는 않겠지만, 그 흔적을 통해 인문학이 비단 먹물에 머무르지 않는 구체성을 띠고 있는, 띨 수 있는 무엇임은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러한 실험적인 운동 속에서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때야 자기해방을 생각할 수 있는 프레임을 찾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느긋한 시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대안인문학운동은 궁극적으로 많은 이의 해방을 지향해야겠지만 이 속박에 익숙해져 있는 사회 속에서 그 주체의 해방 그리고 그것의 번져나감을 모색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세계와 나를 만날 것에 대한 두근거림, 만난 것에 대한 두근거림을 다른 이에게도 흘려보내면서 저항적인, 명랑한 전염병을 만다는 것. 별다른 논의를 끌어오기보다 나의 경험과 즐거움을 솔직히, 꼼꼼히 적고자 했던 건 다른 이 또한 이 두근거림을 찾아봤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아직 적은 경험 때문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진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내 운동에의 경험을 알리는 이 시간 속에서도 두근거림은 지속하고 있음이 전달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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