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인문학) 운동의 운명: 곤경과 실험 가운데 열리는/내는 길

 

 

김 명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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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안을 모색하기?: 곤경을 넘어서기!!

 

제게 대학이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거주해온, 당장 이사하고 싶어도 마련해놓은 대안이 없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때로 합리화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낡은 주거지와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부질없긴 하지만 왜 나는 이 곳을 떠나지 못했고, 또 여전히 한 발을 걸치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대학이 학인으로서의 시민권을 부여받는 잘 알려진 통로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에 비해 얻는 권리란 고작 수강권, 도서관 이용권 등에 불과하다 해도 말입니다. 그렇게 수년, 운이 나빠 추가비용까지 들이고 결국 남은 것은 비정규직 강사로 강의 몇 시간을 얻을 수 있는 자격과, 생활의 방도는 오직 개별적으로 강구해야 하는 권리같지 않은 권리를 양도받았을 뿐이지만요.

 

 

그러는 동안 학교 밖에서 찾은 선생에게 배움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함께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이름 난 선생을 중심으로 공부공동체가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른 방식의 대안공간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2005년. 한 선구자의 독자적이고 돌발적인 실험이었던 <연구공간 장전>(이하 <장전>)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될 것 없는, 아직은 대안공간이 그다지 절박하지는 않았던 이들이 함께 연대해 공간을 지켜나갈 힘을 갖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장전>이 모델로 삼았던 <수유+연구공간 너머>(이하 <수유 너머>)는 많은 전업 연구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만큼 필요의 차원에서나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의 차원에서나 이미 다른 생태계를 확보하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물론 외부인이기에 <수유 너머>의 성립과 오늘에 이르는 내부 사정을 아는 바는 없습니다. 다만 저나 제 주변의 연구자들에게 그 당시 <수유 너머>는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대학이라는 공적 기관에 기대지 않고도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사람들과 만나 공부의 결과물을 공유하고, 동시에 그것이 자립의 방도가 되었던 사례였기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공부와 삶을 결합시키는 상상력을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하나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또 많은 시간이 지나고 <수유 너머>도 다양한 모습으로 분리되고 서울의 다른 대안인문학 공간들이나 커뮤니티 역시 굴곡을 거쳤습니다. 부산 지역에도 많은 인문학 공동체들이 생겨나 지속적으로 모임을 꾸리고 있으니 10여 년 전에 비하면 외견상으로도 대안인문학 운동의 지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유명세를 치른 대안인문학 공동체의 변화들이 대안인문학 운동 자체의 약화로 여겨져 저 자신도 우려와 안타까움을 갖기도 했지요. 하지만 시차를 두고 생각하니 시간의 흐름 가운데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한 입장들이 분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어쩌면 대안인문학 공동체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설정된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직진하여 걸어가는 것이기보다는, 처음과 다른 자리로 이행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과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덧붙여가는 우회와 선회를 동반하며 계속해서 구성되는 패치워크와 같은 것일 겁니다.

 

 

2. 곤경, 이행, 실험: 주어진 삶에서 샛길 내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대안인문학 운동 내지 연구활동가가 겪는 복합적인 상황과 연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 연구자가 제도(대학) 바깥에서 자신의 연구를 실천(글쓰기, 강의와 같은 생각을 소통하는 관계)하기 위해서는 기성의 공간이나 기성의 질서에 기댈 수 없기에 형식적인 공간은 물론이고 공부의 방향 및 내용 역시 제도권 안에 머물기 어렵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곤경은 단순히 대안 연구활동가로서 재무장하는 것으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제도권의 방식을 보수하며 관습화된 기성의 삶의 방식에 익숙한 한 개인의 몸과 일상이 대안인문학 운동의 실천 과정에서 부대끼며 자기 자신을 문제 삼는 상황에 처한다는 거지요. 이런 자기반성과 재인식, 이질적인 것을 생성하는 과정 없이 인문학 담론의 시혜자로서의 연구활동가란 계몽된 지식인 이미지에 다를 바 없고, 대안인문학운동이 지닌 보다 깊은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안인문학 운동이란 한 개인 혹은 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제도권 바깥에서 재구성하고, 재발견하는 모색의 과정과 등치되는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안인문학 공동체 안에서의 곤경들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앞서 언급한 제도 공간 바깥에서 함께 공부하고 공부의 결과물을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활동이 연구자의 경제적인 자립에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대안공간을 성립시킨 이념이라면, 그 이념을 실제로 실행하는 실천(내지 실험)의 과정에서 당장 ‘함께-삶’이라는 부대낌이 대두됩니다. 부대끼는 가운데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 공통의 자리를 발굴하기도 하겠지만 뜻이 같다고 해서 그 방식 내지 경로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희석되지는 않기에 처음 만난 이들이 모두 함께 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얼핏 사소해 보이는 방식 내지 모색하는 경로의 차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내지는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기에 삶과 공부를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대안인문학 운동에서는 중요한 결절점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가령, 제가 몸담고 있는 대안인문학 공동체 중 하나인 <연구모임 비판과 상상력>(이하 <비상>) 역시 현재 또 다른 단계로 이행 중입니다. 주로 철학・사학 전공자들인 연구자들이 모여 정말 소박하게 사상서를 읽으며 친목을 도모하던 <비상>은 처음부터 <공간초록>이라는 독특한 공간과 인연을 맺은 덕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부산 지역 여러 학교의 대학생들과 인문학 독서모임을 여는 한편,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동력은 주도적으로 팀을 이끌었던 좌장의 역할이 주요했지요. 이제 <비상>은 주도적인 역할을 위임받은 우두머리 없이 말 그대로 함께 책 읽고, 글 쓰는 가운데 우리의 공부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꿈을 조심스럽게 꾸는 중입니다. 사실 <비상>의 관계 방식은 매우 느슨하고 책읽기, 발제, 글쓰기, 책 출간 기획 등 모든 활동은 극히 자율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강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모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어떤 제재도 없습니다. 부담을 느낄 만한 게 있다면 책읽기에 뒤처지는 것과 모임 내부 관계에 소외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런 관계 방식이 대안인문학 공동체가 응당 지녀야할 자생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임의 가능성과 매력 역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느슨한 관계 방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책을 읽고 있다는 점과 구성원들 다수가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모임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 만들 변이를 기약하게 만듭니다.

 

 

그에 비해 현재 임금을 받으며 실무자로 활동 중인 <연구모임 아프꼼aff-com>(이하 <아프꼼>)의 경우는 이미 주어진 틀과 이념이 굳건하게 있다는 점이 제가 경험해본 다른 커뮤니티와 갖는 본질적인 차이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뒤늦게 합류하여 계속해서 뒤따라가는 입장에서 아프꼼의 업무를 총괄한다는 것이 버거웠고 약간은 불가능한 시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제가 합류한 이후 아프꼼의 활동을 이루는 체제들, 홈페이지/웹진, 기획, 학술・문화 사업 등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어 종종 마음이 무거웠고 지금도 그런 부담은 계속되고 있지요. 더군다나 오거나이저의 특성 상 학교에 걸쳐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학문후속세대를 교육하고 지원하는 차원에서는 이점으로 작용하지만 대안인문학 공동체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안인문학 공동체가 어떤 고정된 정체성을 유지,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프꼼의 독특한 처지와 체제는 문제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아프꼼의 활동 전체를 회고할 만한 자격이나 위치에 있지 않기에 올 해 아프꼼이 해왔던 일만 반추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제 웹진으로 변모한 홈페이지는 지속적으로 지역과 지역을 넘어서는 예술가, 대안문화활동가, 연구자들의 글을 실으며 그들의 생산을 지원하고 응원하는가 하면, 부산문화재단의 일부 지원을 받은 <로컬來人>이라는 기획 하의 세 개의 복합문화예술행사는 문화예술 장르들 사이, 인문학의 분과 학문들 사이의 ‘문턱과 경계를 넘고’ 드러난 ‘차이를 연결’하는 고투가 담긴 실험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 오거나이저 권명아 선생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두지휘하는 방식은 미리 전체를 꿰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참여해서 모색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판을 제공해주는 식입니다. 우리는 <로컬來人> 행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예술가 집단을 만나기도 했고(<한량맨션>), 기성의 팀 역시 새로 발견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극단 새벽>). 거리로 나갔을 때는 인문학이 지역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했으며(<환(幻)을 켜다>), 문학과 극(劇)이 조응하는 또 다른 방식과 그 결과물을 새롭게 체험하며 기존의 앎을 손쉽게 넘어설 수 있기도 했습니다(<배수아와 새벽의 극장>). 이 모든 과정이 오거나이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프꼼 팀원들이 함께 고군분투하지 않았다면 역시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아프꼼의 체제는 어떤 의미에서 분업과 협업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심포지엄을 치러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지난 해 마지막 활동이었던 일본의 대안운동 커뮤니티를 방문했던 일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추후 후기를 통해 전달될 예정입니다). 통역을 전담하시며 빡빡한 일정 동안 너무 많은 수고를 도맡아 해주신 권선생님 덕분에 일어에 까막눈인 저는 오사카에서 가슴 벅찬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팀원들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정동되었던 시간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전인미답의 길을 열어가는 이들에 대한 경외심어린 감동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만났던 대안운동 커뮤니티 활동가들 모두가 곤경과 실패를 넘어서며 계속해서 묵묵히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다른 단계로 이행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담담한 자세가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들과의 만남은 <아프꼼>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고군부투하면서 다른 지역의 운동과 네트워크하면서 새로 또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진실을 충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3. 대안인문학 운동: 대안적 삶의 모색

 

사실 이 글은 권명아 선생님의 논문 「이행과 자기 해방의 결속체들 -대안인문학 운동의 곤경과 실험들」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저 자신이 직, 간접적으로 겪었던 대안인문학 운동을 소회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의 글 자체에 대해 직접적인 코멘트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 글을 읽는 과정은 부산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고유한 굴곡이 있는 연구자로서 제 관점과 사고방식 안에 깃들어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지역성을 감지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글의 미덕은 <아프꼼>을 포함하여 우리의 대안인문학 운동이 처한 곤경을 직시하고 더불어 대안운동 내지는 공동체가 열어가야 하는 새로운 단계에 대한 전망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우토피아>의 저자들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존재하지 않는 장소(U-topos)’로 만든 것은 오직 다수에 대한 억압과 지배의 환상으로 현실을 초월한 완벽한 총체성과 획일성을 추구했던 이들 때문이었고 역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대안인문학운동 역시 지금/여기의 삶의 방식 가운데, 새로운 관계 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는 새로운 현재를 구성하는 실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곤경이 우리의 모색이 되고, 우리의 운동이 우리의 삶이 되는 과정을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형편은 대안인문학 운동, 나아가 모든 대안적 운동들이 처한 운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삶이 지닌 잠재력이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 모든 생이 그렇듯 체념과 좌절은 매몰된 하나의 현실에서 오는 법. 우리는 오직 다른 현실 가운데, 다른 관계 가운데 구원받을지니, 그것은 발굴과 연대의 힘 가운데서만 가능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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