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국제선 공항청사. 우물안같은 좁은 나라, 여기에서만 통용되는 상식들과 숨막히는 명분들의 자장이 소멸하는 곳. 사실 그 완고한 것들이 임의적이면서 그토록 가혹하게 그어진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두 세시간전에 미리 모이는 약속이행의 장소인 것이 맘에 든다. 아아, 나는 약속을 정해놓고, 늦거나, 변경하거나, 기다려도 지켜지지 않는 것들에 계속 상처받는다.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타본다는 소설가 김비는 무려 4시간 전에 집에서 출발해 누구보다도 먼저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냉면을 먹는 중에, 김비가 꿈 얘기를 한다.

 

   "나에게 한 늙은 부부가 부탁을 하는 거야. 돈은 넉넉하게 드릴 테니, 죽은 아들을 좀 만나달라고목에 로프를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어. 어둠속에서 아주 작은 환함그의 실체를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그는 나의 얼굴을 잠시 쓰다듬었는데, 그 때 물속에서도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는 나와 애닲은 이별을 하고 바다 더 깊은 곳으로 멀리 사라졌어. 나는 애잔한 가슴으로 헤엄쳐 다시 물위로 올라왔어저 쪽에는 같은 일을 시도했다가 로프에 목이 졸려 죽은 여자도 보였어나는 운 좋게 성공한 거지그 꿈에서 난 나를 만난 건지도 모르겠어."

 

   짧지만 아주 강렬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의 함께하는 여행을 붙잡아주는 프리즘이 되었다. 낯설은만큼 낯익고, 낯익은만큼 낯선 일본과 일본인들에 접속하는. 낯익은 나로부터 검은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에는 공포와 피로가 따를 것이겠지만, 그렇게만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안식도 있었다. 가마가사키라는 오사카의 폐부와 천년고도 교토를 경유하여 동래구 복천동의 나의 집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꾸는 꿈은 서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렇게 꿈이야기를 길게 하고픈 욕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꿈이야기를 하는 자는 여행자와 같다. 자신의 꿈의 세계를 잊으며 잃어버리기 전에 의식의 세계에 기록한다는 점에서도. 현실을 현실 그대로만 전하는 자들의 플랫flat함이 가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언젠가 우리는 현실이 모든 것이라는 이들을 등지며 여행을 시작하였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만나지 않는 여행이란 없을 것이다.

 

   음악얘기를 해야겠다. 이륙하는 비행기에 샤먼의 종이 흔들린다. 어린 시절에 놀이공원에서 기계가 처음 움직이는 소리, 특히 회전목마가 시작하는 소리가 좋아 여러번을 탔던 기억이 난다.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이행한다는 뜻이며, 다른 세계로 진입하자마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 물에 뛰어든다. 5음계의 기타 라미솔라는 파도미b파와 만나면서 블루스 음계를 따른다. 두 개의 패턴에서 각음의 간격은 일치한다. 중심이 바뀐 소리일 뿐이지만, 그 순간에 블루노트가 시작되고, 이 작은 우울의 음(특히 미b)은 블루스가 그러하듯이-이 마이너노트를 메이저스케일로 연주하면 그루브가 발생한다. 우울한 것만은 아니게 된다. 말하자면 경계는 고정점이 있을 때만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되면, 메이저와 마이너의 차이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게 된다.

 

   김현은 <존재와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는 한 생물학 실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방이 붉은색으로 덮인 그런 협소한 방 가운데서 인간은 쉬이 미쳐버린다는 그런 실험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붉은 방에 갇힌 수인의 처절한 고통--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오직 붉다라는 단어로 환원되어버리고 모든 현상이 그의 발광을 재촉하는 것같이 느끼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탈출할 수 없는 수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런 방 속에 갇힌 존재이니까. 갇혀 있으면서도 갇힌 줄 모르는 존재자--그것이 우리 하나하나의 슬픔 모습이 아니었던가.”(12191)

 

   <행복한 책읽기>에서 1986523일의 일기에는 "현상학적 환원이 결국은 하강 초월이 아닐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던져 볼 만한 질문이다. 자신의 내부로 하강 초월하면 거기에 대상이 있는 게 아닐까?"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존재와 언어>에서 말라르메에 대해서 평하기를 "병자들만이 가득 차 있는 세계는 말라르메에게는 견딜 수 없는--그리하여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느낌을 강렬하게 던져주는 것이다."라고 한다.

 

   계속되는 드럼루프(loop : '고리'라는 뜻으로 같은 패턴의 리듬이 반복되는 것)는 자세히 들어보면 반음씩 계속 낮아진다. 마치 끝나지 않는 영원회귀의 반복이지만, 그 톤을 조금씩 낮추어가야 피리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리는 날 때에도 요란스럽지 않다. 그것은 김비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그녀는 날 때에도 경박해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청수사의 오래고 서늘한 기운은 압권이었다. 비록 우리의 삶이 때로 저주받은 것이라 느낄 때에도 이 모든 일이 그저 절이 꾸는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 절의 말이 일테다.

 

   나는 김비의 <경계인간>을 연재될 때마다 보았다가, 일본에 가기 전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 글은 말라르메식 하강초월-그녀의 이름은 -이었고, 말라르메가 그러하듯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제기하여 자기의 삶을 근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가령 프루스트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했던 것처럼. 하강으로서만 솟구칠 수 있는 고통이지만, 그 과정으로 변모하고, 그것에 새롭게 적응하는 과정마저 사라진 것이 이 세계의 불행이 아닐까? 그녀가 자기 존재의 심연으로 깊이 하강하여,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자기를 만나고, 다시 물 밖으로 헤엄쳐나오는 장면은 눈물겨웁다. 그것을 감행한 이의 글을 만나고, 그 저자와 함께 동행하면서 나눈 귀한 시간에 대해 이 작은 답가를 올린다.

 

 

 

 

https://soundcloud.com/la-martin-2/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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