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 재송동 - 마을, 단지, 빌

 

 

 

 

金 飛

 

 

 

 

 

 

 

 

   갖가지 생명들이 의지해 사는 땅을 인간의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애초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에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 그 분야에서 매해 전국의 땅에 돈 가치의 순위를 매기는 모양이다. 그 중에 가장 상위에 속하는 지명의 이름으로는 서울의 강남이라든가 명동의 이름이 있었던 것 같고, 부산에는 단연 해운대와 서면의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해운대와 서면은 부산을 대표하는 그 중심이라고 이야기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그럼에도 해운대구의 높이 솟은 건물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높고 화려한 것들을 짓기 위해 무너지고 부서졌던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좋은 시절에 살면서 옛날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무작정 화려하고 찬란한 시대만을 쫓으며 너도 나도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더욱 '착오'적인 것은 아닌지,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되묻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는 부산의 바깥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인 해운대구로 향했던 것은, 이 질주하는 세계에 던지는 그러한 물음이기도 하다.

 

   해운대구의 재송동은 여러 백화점들과 영화의 전당, 그리고 무수히 많은 아파트 단지의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고개를 들면 어디에서나 마을 너머의 하늘을 반 쯤 가린 아파트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재송동 마을 자체가 장산 자락에 드리워져 있음에도, 수영강 천변으로 이어지는 마을의 시선은 높다란 고층 아파트 건물에 꽉 막혀있다.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도 똑같은 이름의 마을 주민이 살고 있음을 알지만, 푸른 산자락이나 하늘 대신 아파트 건물을 올려 보고 살게 되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유창맨션 앞 정류장에서 내려 재송동 쪽으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부산의 어디나 그러하듯 가파른 비탈에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몸을 실었는데,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꺾었다. 수영강 천변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 건물이 너무 높아, 햇살을 등지니 그 모습이 말 그대로 괴괴했다.

   장산 자락 쪽으로 더 올라갈까 망설이다가, 나는 고층 아파트 단지에 붙어있는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섰다. 시간의 때를 입은 채 오래도록 그곳에 자리했을 낮은 주택 건물들은 하나 같이 거대한 고층 건물들에 둘러싸였다. 답답한 느낌이 들어 골목을 돌아섰는데도, 길 끄트머리엔 또 다른 아파트 건물이 가로 막고 있었다.

   좀 더 마을 깊숙이에 들어서니 다행히 키 큰 나무들이 장승처럼 우뚝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부산의 가장 번화가라는 해운대 지역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우거진 수풀과 높은 나무들은 내 앞에 또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주었다. 생뚱맞게도 '청송 슈퍼'라는 이름의 작은 가게 너머는, 영락없이 나를 산자락 깊숙한 곳의 시골 마을 안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초록 이끼로 뒤덮인 담벼락의 축축함이 그 순간 얼마나 반갑게 느껴지던지.

 

 

 

 

 

 

   나는 되도록 등 뒤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을 고층 건물들은 잊어버린 채, 마을 여기저기를 천천히 걸었다. 이미 철거가 끝나버린 집터에는 안타까운 덩굴만 방 안까지 들어와 주인을 찾고 있었고, 비슷한 또래의 두 주민은 나란히 걷다가 말고 심각한 이야기라도 주고받는지 골목 끄트머리에서 서로에게 낯을 붉히는 듯했다. 두 분의 사정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멀리 돌아서 더 위쪽으로 향했다.

 

 

 

 

 

 

 

 

 

   언제 그려놓았는지 알 수 없는 벽화들은 이미 색이 바랬고, 집에서 내쫓긴 부서지고 깨진 것들은 시위하듯 좁은 골목에 나 앉았다. 또 다시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나무가 반가워 올려보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아파트 건물에 새겨진 이름이 슬쩍 그런 나를 넘겨보고 있었다.

   골목을 걸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미 마을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 정문에까지 와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등진 채 낡은 담벼락을 넘어온 감나무를 올려보고 있으니, 열린 문 안 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들어오라, 감나무는 들어와 찍으면 더욱 예쁘다, 할머니는 생전 처음 보는 나를 문 안으로 들이며, 여기가 좋다, 거기가 좋다, 사진에 예쁘게 담길 곳을 일일이 일러주셨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당신은 사진에 담기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내게는 빨갛게 익어가는 감 몇 알 보다, 할머니의 그 손짓 몇 번이 훨씬 더 아름다웠는데 말이다.

 

   '집 앞에 아파트 때문에 답답하시죠?' 그렇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고작 힘겹게 감춘 흉터를 손가락질 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평상 위 할머니 곁에 앉아 할머니가 가리키는 감나무만 올려다봤다. 이제는 햇살 한 자락 받아내기도 쉽지 않은 이 그늘진 자리에, 어쩌자고 열매들은 저렇게 빨갛고 탐스럽게 달렸는지.

   '할머니, 저 가볼게요.' 주름 가득한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고 나는 문을 나섰다. 한 쪽에는 높이 치솟은 아파트 건물을 어깨에 걸고, 또 다른 한 쪽에는 감나무를 가리키던 할머니의 손길을 기억한 채, 나는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서로 다른 세상의 경계가 되어버린 골목을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담벼락 한 구석에 색색의 우산 하나가 세워졌다. 누가 잠시 세워둔 것인가 싶었는데, 우산 끝에 작은 돌멩이가 괴어져 있었다. 비도 오지 않았고 금세 내릴 것 같지도 않은데, 누군가를 위해 거기에 세워졌을 우산 하나가 뭉근하게 마음속을 데워 주었다. 비를 피하라는 부모의 마음일까, 그도 아니면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마음 씀일까.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멀리 헤아린 생각일까. 나는 작은 돌로 괴어진 그 우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저렇게 높이 치솟아 발아래 세상을 키워가면서도, 우리는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우리 앞에 닥칠 먼 시간을 그렇게 헤아릴 수 있을까. 화려하고 찬란한 세상에 눈멀지 않고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 수 있을까.

 

   갑자기 눈앞이 먹먹해졌다. 어느새 사방이 깜깜해지고 있었다. 저녁 햇살마저 가리운 거대한 건물 때문인가 싶어 눈을 드니, 멀리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기우(杞憂)라고 치부해버렸을 그 위태로운 시간이,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