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연구-

              글쓰기의

                            인터페이스(interface), aff-com

 

 

 

 

연구모임 aff-com(아프콤)은 ‘affect’와 ‘commune’의 합성어이다. 이 이름에는 ‘정동’과 ‘공동체’에 관한 이론 및 실천을 문제틀로 삼아 삶 속에서 실험하고 연구로 반성하며 글쓰기로 녹여내는 이행의 작업이 함의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에는 ‘정동’과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작업과 이 이론이 실제로 부대끼며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aff-com은 그 자체로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부대끼는 인터페이스들의 연결체이다. aff-com은 우리의 신체가 그 자체로 다른 존재, 다른 것들과 정동됨을 배울 때만이 가능한 그런 접촉면이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확고한 것에는 더 이상 ‘실험’이 필요하지 않듯, ‘실험’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실패가 상정되어 있다. 우리의 실험 역시도 지난한 실패를 통과하며 이행하는 중이다. 연구모임 아프콤의 단초는 <지역 전업 연구자들의 자립을 위한 연구 공동체>인 연구모임a에서 시작되었다. 단지 연구를 통해 삶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결단’이 되는 지역에서의 삶을 배경으로 우리는 서평회 기획<Lo-culture>, 국제교류, 매체운영, 영화제 등의 실험들을 함께 해 왔다. 이 과정에는 서로 다른 개체들의 부대낌과 정념들이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구모임a가 다시 아프콤으로 이행해가는 이 과정은 실험인 동시에 다른 의미를 탄생시켜가는 역동적 작업의 하나라고 믿는다.

 

부대낌과 이행. 이 모든 것들을 삶 속에서 뚫어내는 것은 언제나 실험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직 발명되지 않은 어떤 것, 또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현실에 지지 않을 우리의 의지, 그것이다.

 

 

 

 

 

 

aff-com 

 

 

 

 

 

 

 

 

 

 

 

대중강좌 식순

제1부: 박홍규 선생님 소개및 강연

제2부: 질의 및 전체 토론

제3부: 서평 발표 및 코멘트

 

 

 

 

 

 

대중강좌 다과를 준비해주신 가이씨와 자료집과 테이블 세팅중인 장수희선생님과 선우씨.

 

 

 

 

음향체크중인 현아씨와 김대성 선생님

 

 

 

 

오늘 대중강좌 내용을 체크 중인 선우씨

 

 

 

 

짜잔 ~~ 하고 나타나신 박홍규 선생님의 모습

 

 

 

 

하나 둘씩 모이는 사람들. 방명록 기재 모습

 

 

 

 

박홍규 선생님의 강연시작. 이날의 강연은 선생님 좌석과 마이크를 따로 마련해 두었지만, 편하고 자연스럽게

박홍규 선생님의 스타~일로 진행되었습니다.

 

 

 

 

경청하는 사람들.

 

 

 

 

 

 

열정적으로 강연해주시는 박홍규 선생님의 모습

 

 

 

 

2부 질의및 전체 토론 사회를 맡은 현아씨.

 

 

 

 

플로워 질문시간

 

 

 

 

 

 

3회 정기세미나 문학텍스트/지역학 냉전의 감각과 정념 공동체

 2012년 5월 9일

 

 

참석

 

권명아, 김대성, 양순주, 송진희

 

1. 문학텍스트

 

해방촌가는길/강신재

요한시집/장용학

황선지대/오상원

 

2. 지역학

 

마루카와 데스시_ 리저널리즘

2부_ 원한에 맺힌 지역-일본과 아시아

 

3부 3장_ 한국전쟁으로 돌아가라-제2차 한국전쟁과 핵에서 벗어나는 힘

 

 

 

 

 

내용

 

 

 

 

 

◭문학텍스트 <해방촌가는길/강신재_ 요한시집/장용학_ 황선지대/오상원> 

 

전후 몽타주적 시선이 대상들을 배치하는것들을 좀더 꼼꼼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고 50년대 문학에서 실존주의 문학의 측면이 아닌 전후의 무기력한, 혹은 특이성을 가진 이들의 신체나 언어, 소리들을 어떻게 불러들일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런 특이성의 지표들을 문학텍스트를 통해서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문학텍스트를 통해서 전후의 50년대와 안정화된 60년대의 문학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냉전의 중심으로 끌어들일수 있는 대목을 찾을수 있지 않을까

 

 

 ◭리저널리즘   2부_ 원한에 맺힌 지역-일본과 아시아

 부 3장_ 한국전쟁으로 돌아가라-제2차 한국전쟁과 핵에서 벗어나는 힘 

 

마루카와 데스시가 이야기하는 당사자성과 책임주체성이라는 대목을 지역의 연구자라는 포지션에 가져와서 이해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낼수 있을텐데 당사자성과 책임주체성이라는것이 중앙의 포지션과 논리이고,이것을 자신의(지역) 포지션에서 어떻게 획득할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이것은 자신의 작업 포지션에서 마루카와나 일본연구자들의 논의와 접속할수 있는지점을 찾아야 하는것과도 연결된다)

 

냉전의 지도를 사상적, 국민국가적 단위가 아닌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 ,냉전의 흔적들, 작은단위들을 통해서 냉전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2회 정기세미나 문학텍스트/지역학 냉전의 감각과 정념 공동체

 2012년 4월28일

 

 

참석

 

권명아, 김대성, 양순주, 송진희

 

1. 문학텍스트

 

손창섭_ 생활적

선우 휘_ 불꽃

 

2. 지역학

 

마루카와 데스시_ 리저널리즘

1부- 방법으로서의 ‘리저널리즘’

1장 개념 및 문제 설정

2장 전쟁, 혁명, 식민지

 

3부- 동아시아, 유동하는 역사의 자장

1장 일중전쟁 이라는 문화공간-저우쭤런과 다케우치 요시미

2장 왕복하는 ‘눈’ 혹은 ‘냉정’ 여행-뤼다오에서 베이징으로

 

 

 

 

내용

 

 

 

 

 

◭ 전후 소설에 나타나는 전쟁상태적 신체와 언어의 상실.

개인의 체험만으로 설명할수 없는 정념들의 출현을 살펴보았다

◭지역주의란 역사에 우연적인 힘의 계기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러한 우연을 자명한 것으로 바꿔버린 연원을 추적하는 것이다. 푸코와 브로텔의 방법론, 아르마 사민과 칼슈미트의 공간혁명등을 통해서 지역적인것의 재편성을 보려한다

 

 

1회 정기세미나 자료읽기 냉전의 감각과 정념 공동체

 2012년 4월23일

 

 

참석

 

권명아 김대성, 양순주, 송진희

 

1. 자료읽기 세미나

 

1955년 대중잡지 <아리랑> 9월 10월 12월호 검토

 

2. 냉전의 이미지 관련 논문

 

<1950~1960년대 한국 영화포스터 이미지 연구_문혜영>

 

<<혁명과 웃음>>(천정환 외),

 

<한국 근대초기 시사만화 논문들 >

 

 

 

 

내용

 

 

 

 

1955년 아리랑 9월호

-8월호가 한국잡지 최초로 임시증간호를 발행 했고 그것이 다 팔려 재판까지 찍었으나 그 또한 다 팔림.

-<입체적 전시> : 액자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사진 전시와 만화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코너

-이승만의 전기(24페이지)

-김내성의 탐정소설 <붉은 나비> 완결

-전후 남방지역과 관련된 두 편의 글이 눈길을 끔

 -<아리랑의 환상> : 아리랑이라는 노래의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한 글. '아리랑'은 민족적 표지이기에 '얼'과 '정신'을 새기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범람하는 미국문화 비판) 대중들로 하여금 정서적인 공감대를 쉽게 형성하는 데 활용되는 복합(혼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 '대중적'이라는 의미 또한 '아리랑'만큼 복합(혼종)적일 것임.

 

1955년 아리랑 10월호

-이승만의 위인전기

-방인근의 <조선문단> 회고록 수록

-박계주의 <한국동란 이면사> : 이후에 이 연재글을 묶어서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함. 다른 작가들의 전쟁체험 수기와 함께 검토

-만화특집 : 한국의 만화 발달사, 해외만화 발달사 등이 실림

 

 

 

1955년 아리랑 12월호

-조만식 선생을 회고하는 글이 실림(간디와의 비교)

-평양 여간첩에 관한 글

-최근 북한 실정에 관한 기사

-미인의 기준을 제시하는 '당신도 현대미인이 될 수 있다'

-서울의 사창가를 분석하는 르포 기사

-애독자 사교실

 

◭포착할 수 있는 내용들

-12월호 미인의 기준을 언급할 때 한국인의 얼굴은 괜찮으나 몸매가 엉망이다라는 언급(미스코리아들도 예외가 아님)이 함의하고 있는 바를 <아리랑> 잡지와 연관해서 고민해볼 수 있다. 위의 언급은 미적인 기준이 서구 체형을 선호하는 것으로 정리되는 문제가 아닌데, 가령 사진+소설의 조합이나 사진+만화(포토몽타주)의 조합 등의 혼종과 뒤섞임의 문맥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다. 한국여성에 대한 평가가 '얼굴'은 괜찮으나 '몸매'가 문제라는 것은 마치 9월호에 실린 <아리랑 환상>에서 '아리랑'을 전유하고 있는 독특한 문맥과 겹쳐지기도 한다.

 

-시사(반공)적인 내용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 주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냉전'의 분위기를 포착할 수 있는 대목도 적지 않았음. 가령, 남방지역에서 귀환하는 병사의 이야기나, 그곳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 의사에 관한 논의는 패전 후 일본이 전쟁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식과 겹쳐서 읽을 필요가 있어보인다. 특히 10월호에 실려 있는 <패망 일본이 걸어온 십년>과 같은 글은 징후적인데, 일본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비판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면서 패전국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조형하고 있는 이 글이 한국전쟁 이후 안정기에 접어든 55년 일본의 상황에서 씌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를 잡지 <아리랑>의 전략, <민족적인 얼/정신+대중적[미국문화]성격>의 조합과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일본을 비판하고 있는 입장이 패전국으로서의 희생자 의식으로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전쟁 경험을 지워버리는 일본의 전후 처리 방식과 공모하고 있는 것에서 '미국문화'의 역할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어떻게 연관되고 또 단절되는지에 대해서도 새심히 살펴야하겠다.

 

◭냉전의 이미지 관련 논문

 

<1950~1960년대 한국 영화포스터 이미지 연구>(문혜영)와 <<혁명과 웃음>>(천정환 외), <한국 근대초기 시사만화>가 검토되었다. 한국영화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60년대에 걸친 영화 포스터 이미지(400여편)의 변화양상을 추적하고 그 의미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영화 <자유부인>에서의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이 이어졌었다. 이때의 '아프레-게르'에서의 '자유'와 '명랑'의 거리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간단히 논의했다. 미국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도덕율과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이중성의 의미에 대해서도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50년대 시사만화(김성화의 '고바우영감')의 분석을 위해 근대초기 '만화'가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거슬러올라가서 살펴보았고 <대한민보>의 삽화와 만화들을 주로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아울러 일본 근대 초기 만화와도 비교하면서 조선과 일본의 근대 초기 만화의 활용 방식 차이에 대해서도 확인해보았다. 르네상스인 '김승옥'이 4.19이후 연재했던 <파고다 영감>을 축으로 1960년대의 문화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저작 <<혁명과 웃음>>을 통해 <아리랑>에 실려 있는 많은 시사 만화들, 특히 <고바우 영감>이 당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얼마나 핍진하게 담아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현대문화사를 4컷에 담아내고 있는 <<고바우 현대사 1, 2, 3>>의 중요성이 새삼 환기되었다.

 

 

 

 

 mora

 

 

 

4년 전쯤 산 노트북이 고장이 났다. 그래서 급한 용무는 그 노트북보다 더 오래되고 하이텔스러운 컴퓨터로 해결하고 있는데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1분에서 3분정도 소요되기에 매번 1분과 3분의 공백이 생겨나게 된다. 속도의 전쟁 속에서 1분과 3분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그만큼 몸은 세속화된 변화에 아주 빠르게 적응하며 그 편리함속에서 더 많은 편리함을 찾고 예전의 몸을 지워간다.


과도기를 거처 요즘은 1분에서 3분의 공백을 무난하게 견딜 수 있게 되었는데 중간 중간 책을 읽기도 하고 메모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느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이미 만들어진 몸을 어디론가 이행시키는 것은 수고스러움이 따르는 일이지만(어떤 이행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막상 몸이 안정을 찾으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여서 비-창조적인 몸이 되고 만다. 그만큼 몸의 이행은 어려움과 익숙함의 문턱에서 그 존재를 감추기 십상이다.


이 몸의 중요성은 인간이 자본화된 ‘몸’으로서 묾듬으로 인해, 인문적 맥락에서 중요한 형태로 얘기된바 있다. 인문이 ‘말’이 아닌 실천과 맞닿아 있을수록 이 ‘몸’의 행방은 더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몸은 값싸게 ‘말’할 수 있되,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세미나와 심포지움 뿐 아니라 서평회, 대중강좌, 국경을 넘은 워크샵들은 이 ‘몸’에 대한 실험들이 아닌였던가?

이미 ‘개인의 몸’이 아닌 ‘세속화된 몸’으로서 삶의 반경 안에 포획된 몸은 그 반경을 한치 앞도 벗어 날수 ‘없음’이다. 그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차리기 힘들뿐더러,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절망 앞에 혹은 희망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가동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의 형태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희망의 몸’들을 요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맺어온 몸의 결실은 학술 심포지움과 같은 외부를 만나는 장소에서 확연히 들어난다. 선생과 제자, 오로지 학연의 관계들로 뒤섞인 학술장안에서, 우리가 늘 곱씹었던 문장, ‘연구자와 박사, 학부생 아티스트’가 함께 활동하고 있는 팀의 색깔은 학술장안에서 그 특이성을 더 잘 헤아릴 수 있다. 학교의 관습과 제도속의 관계를 가로지르며 미흡하게나마 함께 만들어온 각자의 포지션과 그 속에서 일하고 깨우치며 공부해온 문맥들을 누구나 말할 수 있음이 우리가 만들어온 자리와 같다.


예를 들어, 차가운 복도에 마련된 부스를(프로젝트 1년간의 작업들을 사진, 영상, 소책자의 형태로 만든 아카이브) 외부에서 오신 선생님들에게 설명드리면서 몇 번씩이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Q 음...자네는 어디소속이며, 박사수료는 했는가?

A 아 저는 동아대학교 사람이 아니라 부산에서 미술 관련 작업을 하고 있고 정념 프로젝트팀에서 아트워크를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팀에서 했던 요코하마와 관련된 미술작업이나 영상, 사진과 같은 결과물들이 이러 이러한 문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Q 음 ....

 

언제나 첫번째 질문에서 끝나고 마는 이 낯설음의 문맥에서도 내 몸은 학술장에는 특별한 자리가 없는 기이한 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음으로 인해서 그 자리는 마련이 되는것이며, 그 자리는 그간 선생님들과 동료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자리이므로 ‘모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_

그 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몸- 글쓰는 몸- 약속과 요청의 몸- 공부하는 몸‘으로서의 기나긴 이행이였으며 이-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 에서 -행으로 맺지 못하고 ’ - ‘ 사이에서 몸의 행방을 잃어버리는 것을 어떤 ’슬픔‘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공동체 안에서의 몸의 이행속에서 ’ - ‘ 사이에 잃어버린 몸을 기어 올릴 수 있는 것은 함께 이행하고 있는 동무의 결을 통해서일텐데, 동무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동무가 되어주지 못할 때 ‘ - ’ 사이에서 슬픈 정동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동무는 고사하고 이 이행의 실험들의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몸의 상태를 진단하고 연구하며 깨닫는 것이 (알아 차리는것)제한된 삶을 뚫어내는 ‘공부하는 몸’, ‘작업하는 몸’, ‘연구하는 몸’과 같은 ‘창조적인 몸’을 만드는 과정이 될수 있을것이다.

 

1분과 3분 사이에서 길을 헤메지 않는 '몸'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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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불가능한 삶                                                                                                 mora

 

프로젝트 관련 일과 권명아 선생님 강의 참석 겸 해서 서울을 오랜만에 올라가게 되었다.
서울에 갈 때 마다 마음이 찹찹해진다. 주로 무궁화호나 버스를 타는데 무려 5시간이 걸리지만
선듯 ktx를 타지 못한다.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서울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야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
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예전에 부산과 서울을 꽤 오랫동안 오고갔던 버스나 기차 안에서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버스 안에선 잡 생각이 총 출동하고 불편한 과거들과의 만남이 늘 기다리고 있어서,

때론 잔인하다.

그럴땐 마지못해 억지로 뒤척이며 잠을 청하곤 한다. 그래서 인지 그 긴 시간은 늘 피.곤.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버스를 타고 올라가고 말았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1)’ 라는 주제아래 권명아 선생님 강의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이날은 권명아 선생님의 전반적인 연구, 작업의 맥락들을 소개하면서 진행이 되었는데,
풍기문란과 정념,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까지 문학이라는 코드 와 그 밖을 넘나들며 강의를 해주셨다.

선생님의 전체적인 연구의 흐름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는데, 들으면서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하기론 동경에서 요코하마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선생님이 우스게 말로 ‘내 곁에는 문제아 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라고 하신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반대로 선생님의 연구 또한 그러한 문제아 혹은 문제들과 늘 만나고
있음을 세삼 느끼게 되었다. 풍기문란과 골치덩어리들, 공동체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번역불가능한 삶 또한
그런 맥락과 닿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점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기묘하게까지 느껴졌다. 나 역시 문제아에
속하지 않던가 ....

 

선생님 저서와 논문 중 아직 다 읽어보지 못한 글들도 있지만, 그동안 팀원들과 선생님 사이에서 들었던 말들과
읽었던 문장들을 생각하며 강의를 들으니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한결 가벼워서 새삼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연구자인 선생님의 고민들 또한 많이 와닿았는데, 연구자로서, 공동체의 언어에 속한 사람으로서 풍기
문란의 대상들, 골치덩어리들, 혹은 번역 불가능한 삶들을 어떻게 호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연구자 혹은
작가들에겐 늘 풀어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것 같다.


아무래도 이날 뼈속까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번역불가능한 삶’ ...'번역 불가능한 삶' 이다.


물론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에서 번역 불가능한 삶이라는 것이 번역가-여성작가로서의 삶, 특정 계급의
여성들의 이야기에 한정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을 다시 번역해서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일
테다.


요즘 부쩍 주위에서 너무 지평 없는 삶이 아니냐,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는가, 등 요상한 질문들을 던지는데
마땅한 대처 방법이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되묻는 방식인데, 지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미래
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 그 말의 정체는 언제나 공동체안의 언어와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특히 주위
친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좀 곤혹스럽기도 하고 내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인지
묻게 되면서 힘을 잃곤 한다.


강의 마지막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처럼 내 삶이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는 ‘비슷한 길을 가는
동무들’을 통해서 라는 것을 조금씩 실감한다. 그래서 서로의 생사와 안부를 잊지 않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는 의미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어떤 젊은이로부터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뜻이 있기 때문에” 라는 말인데 좀 더 설명하자면 어떤 일을
하던지 그것을 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하찮다 할지라도 혹은 작은 일 일지라도 소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듣기 힘든 말이 돼버려서 그 말이 참 귀하게 느껴졌다. ‘뜻’ 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은 뜻을 버리고 뜻을 지운다. 때로 그 뜻은 현실적이지 못한 의미로 전략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말’처럼 반갑다.


사람들의 프로필처럼 정리되지도 않고, 스펙도 없는, 이 번역 불가능한 삶,
언제나 아마츄어로 읽히고 무명인 이 삶을 ‘뜻'을 동력 삼아 슬기롭게 해쳐나갈 수 있을까?


내게 지평을 다른 말로 한다면 ‘말을 얻는다’는 것이 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체계와 만나고 엇갈리는
순간이며 스치는 그 지점이다. 말을 얻는 다는 것은 체계에 들어가는 통로가 아닌, 부딧치는 지점에서
얻어진 '말'이고 그 '말'로 스스로 언어를 만들어 보는 과정인 샘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번역될수가 없다.  


.....

그렇다고 모험을 멈출수는 없을터, '미래를 신뢰하지 말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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