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적 문학의 경계: 배수아라는 문턱 혹은 특이성

 

신현아

 

 

 

 

 

 

1. 세대론과 종말론: 마녀와 X세대의 시간

 

90년대라는 시간은 언제나 ‘세기말’이라는 감수성으로 기억된다. 99에서 00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 모든 윈도

우즈 체제의 컴퓨터들이 작동을 멈추어버려 전 세계가 전산의 암흑과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하는 ‘Y2K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대표되는 각종 종말론적 미신들이 횡행하였고, 철들지 않는 ‘X세대’들에 대한 보도들은 그들이 짊어질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에 더욱 불을 붙였다. 여성들에게는 사랑스럽거나 예쁘기보다도 ‘마녀’처럼 보이게 하는 검은빛 립스틱이 대유행하였다. 어머니도, 누이도 아닌 눈과 입술을 보라색, 갈색으로 칠한 ‘마녀’들과 폭주하다가 그대로 폭파되어버릴 것만 같은 ‘X세대’들이 ‘세기말적 감수성’을 형성하며 매체를 뒤덮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종말론적 서사가 함의하는 것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지 않는 ‘마녀’나 ‘X세대’들로 인하여 지금까지 계승ㆍ발전되며 진보해온 세계가 누구에게도 계승되지 않은 채로 소비되어 끝나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두려움에는 세계의 진보가 기성세대를 부정하고 다시 새로운 아버지가 되는 가족서사적인 세대론적 인정투쟁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세대론적 공포는 문학장에서도 나타났다. 이는 문학, 또는 근대적 글쓰기의 대표인 ‘소설’이 근대적 주체화의 도구인 동시에 근대적 주체의 탄생에서부터 세대론적 인정투쟁과 계승을 반복케하는 장치로 기능해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근대문학의 종언’에는 이제 소설이 그저 오락이 되어간다는 것, 그럼으로써 소설이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판단과 함께 근대적 글쓰기로서의 소설이 더 이상 근대적 주체화의 중요한 장치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는 암담함이 함께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암담함’은 90년대 문학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자주 출몰하는 수사인, ‘내면적’, ‘내성화’, ‘나르씨시즘’, ‘세계(혹은 역사나 현실)와 무관’, ‘탈사회성’, ‘탈정치적’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수사들은 ‘90년대 문학은 80년대의 계급/민족 담론과 같은 거대담론에 대한 환멸로 인하여 개인적 쾌락을 추구하며 내면으로 침잠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요구와는 유리된 채 나르씨시즘에 젖어들었다’는 내러티브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개인적이고 자폐적인 아이들’로 인해 아버지를 계승하는 세대론적 반복이 단절될 것이라는 공포와 함께, 문학장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소설’의 본령이 정의되는 방식을 함의한다. ‘개인적’, ‘미시적’, ‘사소함’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소설은 그 서사를 통하여 사회의 ‘주요 모순’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개입하고, 현실의 질서에 저항하고 대립함으로써 정치성과 사회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다시 ‘아버지’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스스로를 다시 ‘아버지’라는 주체로 세우는 세대론적 서사에 대한 요구와도 정확히 겹친다.

 

물론 90년대 문학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존재한다. 더 이상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고, 시대의 변혁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세대론적 서사가 아닌 ‘다른 주체성의 서사’에 대한 시도(권명아)로 보거나 ‘섹슈얼리티와 가족 제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제틀이 다원적으로 드러난 것(이광호)으로 보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렇듯 90년대라는 시공간은 세대론적 서사의 종말에 대한 공포, 정치적ㆍ사회적 위상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이야기를 벗어난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실험, 다양성과 차이를 전제로 하는 문제틀의 다각화와 같은 다양한 입장들의 각축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90년대라는 특별했던 시공간 속에서 ‘글쓰기’를 통하여 ‘세대론적 서사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과 ‘삶의 특이성을 쟁취하는 시도’가 어떻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를 보고자 한다. 즉 ‘내면적’, ‘관념적’, ‘탈정치적’, ‘탈사회적’이라고 이야기되는 90년대적 문학의 서사가 소설의 경계를 벗어나는 글쓰기(에쎄)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삶에 대한 열정’이 발현시키는 방식을 살피고, 그러한 열정이 결코 ‘개인적’이거나 ‘자폐적’ㆍ‘내면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모순과 같은 ‘대의’를 담보하지 않고서도, 그 자신의 삶에 의미와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을 통하여서 새로운 관계의 이론과 정치성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식을 보고자 함이다.

 

2. 근대적 글쓰기가 요구하는 서사가 아닌 글쓰기

‘90년대’ 또는 ‘90년대 문학’이라는 담론장 속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90년대의 문학들에게 부여되는 수사들 간의 각축장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배수아의 소설에 내려지는 ‘소비적’, ‘개인적’, ‘향락적’, ‘탈가족적’, ‘내면적’, ‘여성적’이라는 평가들이 한편으로는 90년대적 문학에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평자들의 입장과 정확히 겹치며, 배수아의 이름이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배수아의 소설 속에서는 가족적인 이야기나, 새로운 남자를 만남으로써 주체가 되는 여자아이의 성장서사와 같은 것들이 비틀어져서 나타난다. 소설 속의 불안한 아이들에게는 명확한 부모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가족관계에는 언제나 ‘사촌’, ‘배다른’, ‘사생아’과 같은 불명료한 관계들이 삽입되어있다. 여기서 부모는 투쟁이나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모호한 기원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커서 왕을 만나는 강청같은 여자가 될 것을 요구받으며, 자신이 공주라는 꿈을 꾸지만, 실제로는 오리장수의 딸일 뿐인 권태로운 일상만이 이어질 뿐이다(「프린세스 안나」). 이처럼 권태로워진 아이들은 파괴적으로 연애를 하고 파티를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 또한 일상이다(<랩소디 인 블루>). 그러한 삶의 마지막은 나이들고 지쳐, ‘조용히 죽어가기만을 바라’며, ‘더 이상의 일은 이제 생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예감만을 남긴다(<부주의한 사랑>). 결혼은 실패하고, 관계들은 깨어져 홀로 남는다(「한나의 검은 살」, 「장화 속 다리에 대한 나쁜 꿈」). 그러니, 배수아의 소설이 ‘번역투’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단순히 ‘한국어 문장’의 번역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문법 바깥의 언어를 마주하였을 때의 불편한 감각이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다시 자신이 새로운 아버지가 되는 청년ㆍ남성의 세대론적 인정투쟁의 서사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소설 속 ‘여자아이’들에게는 ‘아버지’ 또는 ‘새로운 아버지’인 남자 형제들의 속에서 ‘공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는 것 역시 형제적 관계 속에서 벗어나는 순간 바로 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러니 마지막의 끝없이 권태로운 일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로서 남는 시간뿐이다. 그러나 이 때 ‘나’로서 남는, ‘나’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는 결코 자기폐쇄적이거나 자기고백적으로 포장된 자기애적인 서사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나’를 통하여 가부장적 아버지의 세계의 구조에 도달하는 동시에, 그 구조에 편입되지 않고 실패함으로써 오롯이 다시 ‘나’로 남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아무도 반역하지 못하고, 아무도 반란의 음모를 꿈꾸지 못하고 아무도 저항하지 못’(「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심야통신>,p137)하는 이 삶들은 현실의 질서에 저항하고 대립함으로서 정치성을 획득하고 사회에 복무한다는 소설의 본령과는 관계가 멀어보인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은 ‘나 바깥의 불결한 오물’과 싸우라는 지속적인 ‘요청’(김영찬)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족의 이야기, 세계와 대결하는 정치성, 부정과 계승을 통한 세대론적 반복의 서사라는 문학장 속의 소설의 문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배수아의 소설은 그러한 문학장 내의 소설의 공동체적 문법이 아닌 글을 쓰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선언과 도약의 기미를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발견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유로운 글이란 그 형태로나 내용으로나 이미 규정되어 있는 어느 폐쇄된 영역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p197)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이라는 서사의 형태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주된 내용은 독일에 온 ‘나’가 과거 독일에 왔을 때 함께 하였던 M과의 기억을 회상하며, 점점 M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독일에서의 현재의 기억과 과거의 기억은 교차하며, 명확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야기 속의 ‘나’가 작가 자신을 지시하는 듯한 기호들이 반복되면서, 이야기는 종이를 뚫고 현실로 자꾸만 현실로 돌출해 나온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소설이기보다는 그 제목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시도하는(‘~essai sur’) 글쓰기로서의 ‘에세이Essai’라고 하는 것이 적확하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나’는 적극적으로 고독한 이방인으로 남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대의나 공동체적 가치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하나의 특이한 것singularity으로서 만들어나가는 생의 실험 자체로 가능한 것이다. 교실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라 트라비아타>보다는 ‘아바’를 열심히 들었던 ‘나’가 차라리 영화관의 군중 속에서 고립되는 것을 원하게 되는 것으로의 변화는 그 작은 징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특이성’의 텍스트로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M과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놓는 일 그 자체이다. “네가, 뭘 했느냐 하면 말이지, 단지 네가 한 것은 M이 부자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 그것뿐이잖아.”라는 말로 손쉽게 ‘오해’되어버리는, 이방인인 ‘나’와 연약하고 가난한 M이 나누었던 누구에게도 완전히 전달될 수 없을 시간을 되새기고, 이 시간이 자신에게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의미를 부여할 때, ‘나’의 삶은 환원될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즉 이러한 행위는 아버지ㆍ형제ㆍ대의와 같은 공동체적 주체화의 문법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생을 기투하는 시도를 통해 삶의 특이성을 견지함으로서, 자신이 통과한 하나의 세계를 해석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세이’ 또는 ‘글쓰기’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특이성을 갖게 하는 시도로서 기능한다.

‘나는 미래와 과거 사이의 어느 유동적인 부분에 머물고 있을 뿐이며 미래 혹은 과거가 지금의 나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있었으며 글쓰기로 인해서 나는 미래 혹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다시 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M을 생각했다. (p165)’


여기에서 ‘나’는 M을 생각하고, M과 나눴던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것이 ‘나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유동적이고 지속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글쓰기’를 행하고 있다. ‘소설’을 벗어난 ‘에세이’는 근대적 주체화가 요구하는 ‘성장’이 아닌, 자신의 삶의 특이성을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정박점으로 출현한다.

 

 

3. 삶의 특이성과 관계의 방식

이러한 삶의 특이성은 여전히 ‘자의식의 근원의 재현’, ‘강한 정신주의’, ‘나르씨시즘적 기획’(김영찬)과 같은 ‘개인적’, ‘자폐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이는 ‘삶의 특이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특이성을 갖는 것은 너의 삶의 특이성과 충돌하고 난 후에야 뒤늦게 도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특이성의 관계들 사이에서 타자는 대의와 같은 것을 담보하지 않더라도, 그 특이성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가능하다.

M은 몇 마디의 구호나 텔레비전 토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M은 마치 그림이 전혀 없는 책과 같았다. 내가 영혼을 바쳐 읽지 않으면, 나는 M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나는 내가 M을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만날 수 없으며, 그 기회를 내가 영영 잃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M에 대한 그리움을 멈추지 않았다.(p157~158)


여기서 M이 ‘나’에게 ‘영혼을 바쳐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책’일 때, 그것은 누군가의 삶의 특이성은 그 자체로 다른이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텍스트임을, 따라서 그러한 특이성 속에서의 관계는 ‘영혼을 바쳐서 읽는 것’일 때에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즉 그 삶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각 개인은 영혼을 바쳐 읽어야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에세이’가 ‘M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시작’되었던 것처럼, 내 삶의 특이성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끝없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되돌이키고, 그것에서 받은 의미를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나’의 안에서 정착가능한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M’과 ‘나’가 처음 만나 서로에게 정동되기 시작하던 첫 만남의 순간에서 끝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오랜 시간 오직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서 고독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인 것처럼 보였다. 교습법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중에도 나는 M에게 서서히 끌려가고 있었다. 내 표정에서 M은 당황과 불안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M은 흔들리지도 않았고 침착해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M이 고백하기를, 그때 자신도 몹시 떨렸으며 진정하기 위해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고 심지어 우리들에게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던 M이 그 상태로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내가 중단한 부분을 계속했다.

“......서로 관통하고 작용한다.”


이처럼 삶의 특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서로의 관계가 ‘관통하고 작용’하는 결과가 뒤늦게서야 찾아오는 과정이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글쓰기를 통하여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이 때의 ‘글쓰기’는 ‘아버지’와 같은 세계와 대결하거나, 또는 계승하여 다시 자신을 주체화하는 세대론적 서사의 반복을 벗어나면서 각 개인은 어떻게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타자와 관계맺는 것이 가능한가를 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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