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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불가능한 삶                                                                                                 mora

 

프로젝트 관련 일과 권명아 선생님 강의 참석 겸 해서 서울을 오랜만에 올라가게 되었다.
서울에 갈 때 마다 마음이 찹찹해진다. 주로 무궁화호나 버스를 타는데 무려 5시간이 걸리지만
선듯 ktx를 타지 못한다.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서울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야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
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예전에 부산과 서울을 꽤 오랫동안 오고갔던 버스나 기차 안에서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버스 안에선 잡 생각이 총 출동하고 불편한 과거들과의 만남이 늘 기다리고 있어서,

때론 잔인하다.

그럴땐 마지못해 억지로 뒤척이며 잠을 청하곤 한다. 그래서 인지 그 긴 시간은 늘 피.곤.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버스를 타고 올라가고 말았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 (1)’ 라는 주제아래 권명아 선생님 강의를
듣는 기회를 얻었다. 이날은 권명아 선생님의 전반적인 연구, 작업의 맥락들을 소개하면서 진행이 되었는데,
풍기문란과 정념,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까지 문학이라는 코드 와 그 밖을 넘나들며 강의를 해주셨다.

선생님의 전체적인 연구의 흐름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는데, 들으면서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하기론 동경에서 요코하마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선생님이 우스게 말로 ‘내 곁에는 문제아 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라고 하신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반대로 선생님의 연구 또한 그러한 문제아 혹은 문제들과 늘 만나고
있음을 세삼 느끼게 되었다. 풍기문란과 골치덩어리들, 공동체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번역불가능한 삶 또한
그런 맥락과 닿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점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이 기묘하게까지 느껴졌다. 나 역시 문제아에
속하지 않던가 ....

 

선생님 저서와 논문 중 아직 다 읽어보지 못한 글들도 있지만, 그동안 팀원들과 선생님 사이에서 들었던 말들과
읽었던 문장들을 생각하며 강의를 들으니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한결 가벼워서 새삼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연구자인 선생님의 고민들 또한 많이 와닿았는데, 연구자로서, 공동체의 언어에 속한 사람으로서 풍기
문란의 대상들, 골치덩어리들, 혹은 번역 불가능한 삶들을 어떻게 호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연구자 혹은
작가들에겐 늘 풀어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것 같다.


아무래도 이날 뼈속까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번역불가능한 삶’ ...'번역 불가능한 삶' 이다.


물론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에서 번역 불가능한 삶이라는 것이 번역가-여성작가로서의 삶, 특정 계급의
여성들의 이야기에 한정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을 다시 번역해서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일
테다.


요즘 부쩍 주위에서 너무 지평 없는 삶이 아니냐,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는가, 등 요상한 질문들을 던지는데
마땅한 대처 방법이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되묻는 방식인데, 지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미래
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 그 말의 정체는 언제나 공동체안의 언어와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특히 주위
친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좀 곤혹스럽기도 하고 내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인지
묻게 되면서 힘을 잃곤 한다.


강의 마지막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처럼 내 삶이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는 ‘비슷한 길을 가는
동무들’을 통해서 라는 것을 조금씩 실감한다. 그래서 서로의 생사와 안부를 잊지 않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는 의미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어떤 젊은이로부터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뜻이 있기 때문에” 라는 말인데 좀 더 설명하자면 어떤 일을
하던지 그것을 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하찮다 할지라도 혹은 작은 일 일지라도 소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은 듣기 힘든 말이 돼버려서 그 말이 참 귀하게 느껴졌다. ‘뜻’ 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은 뜻을 버리고 뜻을 지운다. 때로 그 뜻은 현실적이지 못한 의미로 전략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말’처럼 반갑다.


사람들의 프로필처럼 정리되지도 않고, 스펙도 없는, 이 번역 불가능한 삶,
언제나 아마츄어로 읽히고 무명인 이 삶을 ‘뜻'을 동력 삼아 슬기롭게 해쳐나갈 수 있을까?


내게 지평을 다른 말로 한다면 ‘말을 얻는다’는 것이 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체계와 만나고 엇갈리는
순간이며 스치는 그 지점이다. 말을 얻는 다는 것은 체계에 들어가는 통로가 아닌, 부딧치는 지점에서
얻어진 '말'이고 그 '말'로 스스로 언어를 만들어 보는 과정인 샘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번역될수가 없다.  


.....

그렇다고 모험을 멈출수는 없을터, '미래를 신뢰하지 말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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