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a

 

 

 

4년 전쯤 산 노트북이 고장이 났다. 그래서 급한 용무는 그 노트북보다 더 오래되고 하이텔스러운 컴퓨터로 해결하고 있는데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1분에서 3분정도 소요되기에 매번 1분과 3분의 공백이 생겨나게 된다. 속도의 전쟁 속에서 1분과 3분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그만큼 몸은 세속화된 변화에 아주 빠르게 적응하며 그 편리함속에서 더 많은 편리함을 찾고 예전의 몸을 지워간다.


과도기를 거처 요즘은 1분에서 3분의 공백을 무난하게 견딜 수 있게 되었는데 중간 중간 책을 읽기도 하고 메모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느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이미 만들어진 몸을 어디론가 이행시키는 것은 수고스러움이 따르는 일이지만(어떤 이행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막상 몸이 안정을 찾으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여서 비-창조적인 몸이 되고 만다. 그만큼 몸의 이행은 어려움과 익숙함의 문턱에서 그 존재를 감추기 십상이다.


이 몸의 중요성은 인간이 자본화된 ‘몸’으로서 묾듬으로 인해, 인문적 맥락에서 중요한 형태로 얘기된바 있다. 인문이 ‘말’이 아닌 실천과 맞닿아 있을수록 이 ‘몸’의 행방은 더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몸은 값싸게 ‘말’할 수 있되,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세미나와 심포지움 뿐 아니라 서평회, 대중강좌, 국경을 넘은 워크샵들은 이 ‘몸’에 대한 실험들이 아닌였던가?

이미 ‘개인의 몸’이 아닌 ‘세속화된 몸’으로서 삶의 반경 안에 포획된 몸은 그 반경을 한치 앞도 벗어 날수 ‘없음’이다. 그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차리기 힘들뿐더러,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절망 앞에 혹은 희망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가동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의 형태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희망의 몸’들을 요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맺어온 몸의 결실은 학술 심포지움과 같은 외부를 만나는 장소에서 확연히 들어난다. 선생과 제자, 오로지 학연의 관계들로 뒤섞인 학술장안에서, 우리가 늘 곱씹었던 문장, ‘연구자와 박사, 학부생 아티스트’가 함께 활동하고 있는 팀의 색깔은 학술장안에서 그 특이성을 더 잘 헤아릴 수 있다. 학교의 관습과 제도속의 관계를 가로지르며 미흡하게나마 함께 만들어온 각자의 포지션과 그 속에서 일하고 깨우치며 공부해온 문맥들을 누구나 말할 수 있음이 우리가 만들어온 자리와 같다.


예를 들어, 차가운 복도에 마련된 부스를(프로젝트 1년간의 작업들을 사진, 영상, 소책자의 형태로 만든 아카이브) 외부에서 오신 선생님들에게 설명드리면서 몇 번씩이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Q 음...자네는 어디소속이며, 박사수료는 했는가?

A 아 저는 동아대학교 사람이 아니라 부산에서 미술 관련 작업을 하고 있고 정념 프로젝트팀에서 아트워크를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팀에서 했던 요코하마와 관련된 미술작업이나 영상, 사진과 같은 결과물들이 이러 이러한 문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Q 음 ....

 

언제나 첫번째 질문에서 끝나고 마는 이 낯설음의 문맥에서도 내 몸은 학술장에는 특별한 자리가 없는 기이한 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음으로 인해서 그 자리는 마련이 되는것이며, 그 자리는 그간 선생님들과 동료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자리이므로 ‘모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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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몸- 글쓰는 몸- 약속과 요청의 몸- 공부하는 몸‘으로서의 기나긴 이행이였으며 이-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 에서 -행으로 맺지 못하고 ’ - ‘ 사이에서 몸의 행방을 잃어버리는 것을 어떤 ’슬픔‘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공동체 안에서의 몸의 이행속에서 ’ - ‘ 사이에 잃어버린 몸을 기어 올릴 수 있는 것은 함께 이행하고 있는 동무의 결을 통해서일텐데, 동무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동무가 되어주지 못할 때 ‘ - ’ 사이에서 슬픈 정동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동무는 고사하고 이 이행의 실험들의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몸의 상태를 진단하고 연구하며 깨닫는 것이 (알아 차리는것)제한된 삶을 뚫어내는 ‘공부하는 몸’, ‘작업하는 몸’, ‘연구하는 몸’과 같은 ‘창조적인 몸’을 만드는 과정이 될수 있을것이다.

 

1분과 3분 사이에서 길을 헤메지 않는 '몸'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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