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되는 신체

 

mora


머리는 하나, 손과 눈, 발은 두 개 모두 멀쩡히 붙어 있다. 하지만 무덤 속에서 기어나온 구더기는 그들의 몸을 갈아먹는다.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감각이자, 살아있다는 치욕과 뒤섞인 ‘무 감각’이기도 하다. 지칠대로 지쳐버린 동주의 신체는 남한의 포로와 북한의 포로가 대립되있었던 포로수용소에서 행해진 폭력으로 송장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 폭력의 감각에 노출된 신체가 해방됨과 동시에 비폭력적인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여전히 폭력을 감지한 채 되돌아 갈수 없이 신-음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그 신음은 옆집의 순이와 조우하고 순이의 신음소리는 그런 그의 신체를 자극한다. 동주와 동거하는 춘자는 일본인으로, 해방되던 해 한국남자와 결혼한뒤 해방이 되자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통에 경찰에서 일 보던 남편은 학살당했다. 그 뒤 일본에 돌아가려고 부산에 오기는 했으나 호적수속과정에서 의해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편 순이의 양 아버지로 나오는 봉수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사십 전후의 건장한 사나이라고 묘사되는데 이 건장함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돈과 여자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보스턴백으로 압축된 그 외부성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면에서 만큼은 동주와는 대립지점에 있을수 있다.

 

그는 해방 전에 만주에서 관헌을 끼고 공공연하게 아편장사를 했다는 것으로 얘기된다. 소설의 초반에 동주와 춘자/ 봉주와 순이의 양극 관계 속에서 동주와 순이가 연결되고 극의 후반부로 가고, 순이가 숨이 멎은 그 순간 봉주와 춘자의 몸은 판자촌 산둥성이가 아닌 산의 아래로 그 외부로 더욱 깊게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해방후 동주와 순이/ 봉주와 춘자의 신체를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순이가 느닷없이 찾아온 해방처럼 느닷없는 병을, 혹은 알수 없이 부패되어 가듯/ 동주가 폭력적인 기억의 신체를 다시 재활할 수 없듯 / 그리고 봉주가 끊임없이 외부로부터의 자극들을 받아들이고 외부에 적극적인 몸이되듯/ 춘자가 사람답게 살기를 꿈꾸며 공장을 떠나가듯/ 전후의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기인한 무기력함과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희망은 안과 밖, 양극으로 맞서있다. 그 이유는 (해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전장 중에 그들이 서 있는 것이고 냉전은 또 다른 전장의 삶 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체는 살아있음에도 죽음에 가까운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 순이가 죽음을 맞을 때서야 동주는 ‘살아있으니까 죽을 수 있다’(살아있기 때문에 신음하는 것)는 즉 살아있을음 죽음을 통해서 어렴풋이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이 내몸이 아닌, 그렇다고 누구의 몸도 될 수 없는 상태.

 

그렇게 신체는 부패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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